Diane Coyle: GDP: A Brief but Affectionate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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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아는 GDP, 하지만 그 누구도 잘 알지 못하는 GDP. “국격”같은 해괴한 개념을 좋아하는 국민적 특성을 가진 어떤 나라에서는 GDP보다 올림픽 금메달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국가의 살림살이나 삶의 질, 그리고 다른 국가와의 비교를 위해 사용하는 주된 지표로 GDP를 선호한다. GDP는 완벽하지 않은 지표다. 한 국가의 경제 수준을 하나의 단일한 숫자로 표현한다는 것부터 엄청난 생략과 왜곡을 감수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DP가 왜 현대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권위적인 지표로 자리잡았는지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 국가의 삶의 질을 측정하는 지표로 GDP가 완벽하지 않다면, 새로운 지표를 개발할 것인지, 혹은 GDP를 보완해서 발전시킬 것인지 여부도 생각해야 한다. <GDP: A Brief but Affectionate History>는 이러한 고민을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좋은 출발점으로 기능할 수 있는 책이다. “역사책”을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 이 책은 GDP의 현재를 이야기하기 위해 과거를 빌려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저자는 GDP의 현재 위상과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확고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의 주장을 합당화시키기 위한 근거자료로써 GDP의 기원이라던가 발전 과정에서의 여러 실책들, 그리고 GDP에 제기되는 여러 비판들을 시간 순서로 배열하고 있는 셈이다. 목적이 분명한 책이기에 포기하는 지점도 많다. 시간순으로 정리된 역사책이라고는 해도 저자의 주장이 생뚱맞은 곳에서 장황하게 이어지는 바람에 그 흐름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매우 얇고 간결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잘 정돈된 느낌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또한 GDP에 대해 피상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던 독자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의 정보를 담고 있지만, 경제학 전공자들에게는 미진한 감이 느껴지는 정보의 ‘깊이’도 이 책이 가지는 또다른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1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전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탄생한 GDP가 발전 초기 단계에서 이미 후생(welfare)의 측정을 고민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흥미롭지만, 그 후생을 현재 어떻게 측정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보다는 이러저러한 학자들이 이러저러한 시도를 하고 있다, 라는 개괄적인 소개만을 간단히 하고 서둘러 마무리짓는 구성은 전채요리만 먹고 본식을 건너뛴 듯한 공복상태를 유지시킨다. 하지만 GDP와 관련된 여러 혜안들을 간결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 책이 갖는 가치는 충분한 듯 하다. 아마 많은 이들이 한번 쯤 생각했을 법한 “가정주부의 가사노동은 GDP에 포함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가정주부의 세탁 노동 가치가 한 나라의 금융산업이 창출하는 가치의 총합의 80%에 달한다는 사실이 주는 놀라움과 함께 한 남자가 아내와 이혼한 뒤 그 집에 고용되었던 가정부와 결혼할 경우 GDP가 감소한다는 역설(가정부의 노동가치는 가정주부로 신분이 전환됨으로써 GDP에서 지워지기 때문이다)을 예시로 제시함으로써 GDP가 갖는 통계적 허점을 통렬하게 지적하는 이런 방식의 논리 전개는 학부 수준의 독자가 GDP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게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하고 있다. 또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보다 정교하고 복잡해진 금융산업이 GDP에 기여하는 바와 인공지능 등 새로운 형태의 자본-혹은 노동-이 탄생함으로써 수정될 수 밖에 없는 기존의 계산 방식에 대한 고민 등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한 것도 인상적이다. 저자는 GDP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자신의 고민을 적당한 수준에서 잘 소개하고 있다. 한 국가의 삶의 질을 시장가치로 환산된 최종거래 금액으로 정리하는 현재의 방식이 정당한가에 대한 대답을 이 책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무리다. 이 책은 GDP에 대한 소개서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 하다. ‘행복’이나 ‘여가’같은 보다 추상적인 개념을 어떻게 GDP에 녹여낼 것인가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한 고민은 Weimann 등이 함께 쓴 <Measuring Happiness>를 참고하기 바란다. 물론 이 책도 완벽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이 예전보다 조금 더 추상적인 개념들을 어떻게 기존 경제학에 융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의 현재 수준을 확인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갈 수 있을까.

가톨릭 신자로서 경제학을 공부하다 보면 갖게 되는 근원적인 질문이 하나 있다. 인간은 부를 추구하고 부를 축적하게끔 설계되어 있다. 언제부터였는지, 혹은 그것이 신의 뜻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부를 축적하는 것을 욕망한다. 그리고 아무도 그 욕망이 잘못되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성당이나 교회에 가는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듣게 되는 성경에 적힌 구절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성경에 적혀 있는 것들을 곧이 곧대로 받아 들이면 우리 모두는 가난해야 한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 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천주교나 개신교에서 부자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아니, 교회가 태초에 생길 때부터 그들은 부자들을 미워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불경할지도 모르겠지만, 성직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스템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 은 부를 축적하는 사회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즉 이 현대 사회의 굴레를 벗어난 성직자들은 부에서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겠지만, 그들이 설교의 대상으로 삼는 대다수의 인간들은 ‘최소한의 생존 수준에서 벗어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충분히 여유로운 상태’ 를 추구하며, 이에 더해 이 평범한 인간들이 ‘부를 축적할 기회가 주어질 경우’ 이를 거부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해 보인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개인의 ‘탈렌트’ 에 충실하여 부를 추구하고 돈을 벌어들이는 행위가 미덕이자 ‘천국으로 가는 방법’ 쯤으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는 서구 사회에서 발달한 금융 시장은 ‘돈놓고 돈먹기도 주님의 뜻으로 행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발달해 있는 금융 시장의 대부분의 상품들 – 환시장, 선물시장 등등 – 은 ‘위험을 감수한 자에게 그가 노동을 제공하지 않아도 더 많은 부를 부여하는 형식’ 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도박꾼이 합법적으로 돈을 잘 벌게 만드는 구조인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신의 존재를 강하게 부정한 마르크스는 노동의 신성함과 노동력에 의한 생산물의 가치를 숭상했는데 이게 오히려 고전적인 가톨릭 교리와 더 맞닿아 있다. 우리는 고리세금업자를 천하게 여기는 유태인의 마을을 아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고기를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베드로의 극적인 인생 역전 드라마도 잘 알고 있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밥먹을 시간도 없이 정신없이 ‘피땀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은 생계를 이어나가기도 힘들다.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자본으로 덩치를 불려 나가는 ‘자본가 계급’ 은 책상에 앉아 지시를 내리는 것만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현대 경제학에서는 이를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극소수의 자본가 계급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 계층은 뭔가 자신들의 처지가 불공평한 상태에 놓여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이는 일인 일표를 원칙으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사회적 목소리로 재탄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문제는 정치 구조는 어찌 어찌 바꿀 수 있다고 해도 자본 주의의 기본적인 불평등함은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민주주의가 생겨나기 전부터 자본 주의는 발달해 있었고, 그 때부터 시작된 ‘시스템’ 은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시스템의 발전이 없이도 충분히 작동하게끔 구성되어 있고 또 견고히 그 시스템을 스스로 보호하게끔 성장되어 왔기 때문이다. 흔히 음모론하면 좋아하는 사람들이 입에 담기 즐겨 하는 로스차일즈 가문이 프랑스쪽과 영국쪽 지분을 합쳐 하나의 거대한 회사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과연 이 사람들이 세상의 거의 대부분의 부를 가지고 있을까? 설사 그렇다고 가정해도, 그게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해서, 자본 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불공평함과 우리 개개인이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큰 관계가 있을까?

로스차일즈가 가문에 대한 기사가 나온 신문의 다른 면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가톨릭 주교의 기고문이 실렸다. Holy Week 를 맞이해 “부자가 되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 라고 주장하는 주교님이었다. 즉, 더이상 가난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은 옳지 않으며, 단지 ‘충분히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과 ‘탐욕스럽게 남의 자유를 침범하며 부를 욕망하는 것’ 사이의 구분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버낸키와 드라기가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려 대고 우리 모두가  각자 열심히 돈을 벌기 위해 이기적으로 노력한다면,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전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수중에 아주 약간의 돈이 더 많이 들어오면, 아마도 성당에 내는 헌금의 양도 늘어날 것이고, 어쩌면 그 헌금중 극소수는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어 가는 한 어린이의 한끼 식사 정도를 도와줄 수는 있을 것이다. 아직도 전세계의 대다수는 돈이 없어서 끼니를 굶고 있다. 돈이 없어서 밥을 못 먹는다는 현실이 크게 와닿지 않는 것이 나를 포함한, 한국을 포함한, 극소수 선진국들과 개발 도상국들에 사는 사람들의 머릿속이다. 하루에 1달러가 없어서 굶어 죽는다. 1달러만 있으면 하루 세끼를 해결할 수 있을텐데 그게 없어서 굶어 죽는다. 사람 목숨은 다 똑같이 소중하다는 생각, 이거 정착된지 사실 백년도 안된거다. 불과 백년전까지 사람은 계급에 따라 목숨의 경중이 다르게 취급되었고 여성은 정치에 참여할 기회도 없었으며 전세계 70% 에서 노예 제도가 합법이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아프리카 어딘가, 방글라데시 어딘가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중 어떤 사람은 원망하겠지. 왜 빌어먹을 예수는 이스라엘 근처에서 태어나서 백인들의 아이돌이 된거야? 애초에 아프리카에서 흑인으로 태어났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하고. 그리고 사흘 뒤 에이즈에 걸려 죽으면서 하느님! 저를 천국으로 인도하소서, 하고 기도할 거다. 이게 전세계 부의 대부분을 소유한 로스차일즈 가문등의 일부 초대형 부자들의 잘못인가, (그들은 나보다 훨씬 많은 돈을 기부하고 있고 아마도 나보다 훨씬 많은 빈민층의 목숨을 살려 놓았을 것이다. 병주고 약주고일 수도 있지만.) 아니면 오늘 하루도 씨발 되는 일 존나 없네, 앞으로 난 대체 뭘하며 먹고 살까, 나 하나 먹고 살기도 바쁜데 뭔놈의 기부는 기부냐, 하고 중얼거리면서 8불짜리 싸구려 중국집에서 프라이드 라이스를 시켜 먹는 와중에 나름 페어 트레이드한답시고 소문난 카페에 가고 유기농 음식 먹는답시고 홀푸드만 골라 가는 나의 잘못인가. 아니면 애초에 설계를 잘못한 무능한 신이 벌여 놓은 일일까.

Barry Eichengreen: Globalizing Capital

Barry Eichengreen, Globalizing Capital: A History of the International Monetary System, Princeton University Press, Second Edition, 2008.

이 책의 저자 베리 아이켄그린은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경제학과의 석좌 교수다.  학자가 출간을 목적으로 책을 집필할 때에는 독자층을 미리 상정해 놓기 마련이다. 같은 주제를 다룬다고 해도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쓸 것인지 이 책의 저자와 같이 상아탑에 오래 머물러 있는 “동업자”들을 대상으로 쓸 것인지에 따라 책의 성격이 많이 변하게 된다. 아이켄그린은 머리말에서 이 책의 대상 독자층이 “거시 경제학과 국제 경제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이론들의 역사적 배경을 알고 싶어하는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이라고 밝히고 있다. 더불어 “국제 금융 시스템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조금 더 깊은 레벨에서 알고 싶어하는 일반 독자층” 도 이 책에서 도움이 될만한 정보들을 얻어가기를 “희망” 한다고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이 목적하고자 하는 바는 국제 금융 시스템이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했는지 그 과정을 역사적으로 간략하게 밝히고자 하는 것이고, 이 책의 대상 독자들에 일반 대중들도 포함되므로 수학적인 수식이나 엄밀한 증명같은 것은 등장하지 않는다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무런 경제학적 배경 지식없이 도전할 만큼 호락호락한 책은 아니다.  저자는 19세기 말 등장한 금본위제도부터 2000년대 전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까지 약 130여년간의 국제 금융 시스템이 어떻게 구성되거나 무너져 갔는지 각 시대별로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는데, 단순히 역사적 사실들만을 나열하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경제학적 해석까지 곁들이고 있다. 이 책이 가지는 미덕, 혹은 관련 학계에 기여하는 바는 전적으로 후자의 ‘해설’이 제공하는 경제학적 통찰력에 기반하고 있고, 때문에 거시경제학과 국제 무역, 국제 금융에 대한 학부 수준의 지식은 있어야 이책을 보다 폭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00년이 넘는 현대 국제 금융 시장에 대한 역사를 한권의 책에 담고 있기 때문에 아쉬운 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서구 학자들의 책들에서 흔히 느끼는 그런 감정이긴 하지만, 이 책 역시 서구 중심의 서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제 무역처럼 국제 금융 시장도 미국-유럽 중심의 서구 사회와 일본-중국 중심의 동양 사회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 받게 되기까지 (1차 세계 대전이 지나서야 일본이 비로소 등장하고, 1970년대 이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국과 중국등 동아시아 시장에 대한 언급이 간략하게 나마 등장한다) 동양 사회의 금융 시장 발전에 대한 기술이 전혀 없는건 그 중요성과 국제적 위치를 차치하고서라도 너무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경제학을 전공하게 만들었던 90년대말 아시아 금융 위기에 대한 서술도 마지막장에 단 몇페이지만으로 성급하게 마무리지어버린다. 둘째, 국제 금융 시장에 집중한 책의 목적때문이겠지만, 국제 금융 정책이 각국의 정치적 입장과 다른 정책들과의 이해 관계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는 점에 기초해 볼때 각 시대에 여러 국가들이 맺고 있던 정치적인 함의들을 단지 외부적인 충격으로 치환해 분석하는 이론적인 한계에 대한 아쉬움도 남는다. 물론 저자는 정치적인 변화가 어떻게 금융 시장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가에 대해 이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라는 대부분의 서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근간이 경제적으로 올바른 방향을 반드시 제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과 1990년대까지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서구 사회 곳곳에서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경제학적 이론을 약간 포기하더라도 정치/사회학적인 접근에 조금 더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에겐 굉장한 책이다. 나는 현시대에 존재하는 경제 주체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를 공부하는 학생이지만, 현재에 발현되는 현상들도 일정 부분 분명 통시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마도 사학자인 아버지에게 받은 영향일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이 주는 ‘넓은’ 시선은 내가 보다 큰 그림을 그리게 하는 데에 엄청난 힌트를 가져다 주었다. 이 책에 대한 헌사중 더글라스 어윈이 상찬한 것처럼 “미래의 클래식” 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가 지근거리에 놓고 수시로 펼쳐보게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Abhijit V. Banerjee and Esther Duflo, Poor Economics: A Radical Rethinking of the Way to Fight Global Poverty

Financial Times 에서 ‘올해의 책’ 으로 선정했다는 기사를 읽고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이에 더해 이 책에 대한 추천사중 <괴짜 경제학> 으로 유명한 Steven Levitt 이 쓴 “경제학이 (이 세상에)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것” 이라는 문구가 결정적으로 마음을 움직였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세상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경제학을 공부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 고민해 보았음직한 문제이고, 그중 거의 대부분이 평생토록 명쾌한 해답을 내놓을 수 없는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모든 학문은 세상에 무언가를 공헌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사회과학, 그 중에서도 먹고 사는 문제과 직결되는 경제 현상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경제학이 현대에 가지는 존재 가치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은 이 학문을 업으로 삼기로 결심한 이후 내가 거의 매일같이 생각하는 주제이다. 그에 대한 해답은 아닐지언정 어떤 힌트는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같은 것이 이 책을 읽게 만들었다.

전 세계의 거의 대부분은 빈곤에 시달린다. 세계 인구의 13%가 하루에 1달러가 채 되지 않는 돈으로 연명한다.  이 책은 부제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어떻게 하면 전세계적으로 만연해 있는 빈곤을 가장 효과적으로 퇴치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하는 책이다. ‘준비한다’ 라는 단어를 억지로 가져다 쓴 것은, 이 책이 그 자체로서 어떤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 책은 가장 올바른 해답을 찾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기능한다. 즉 ‘왜 빈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와 ‘그렇다면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라는 두가지 큰 질문이 있다면, 이 책은 전자에 거의 모든 노력을 소진한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그러하듯이, 이 책은 쉽게 해답을 내지 못하고, 그럴 생각도 별로 없어 보인다. 다만 특정 문제를 야기시키는 원인에 대한 효과적인 분석을 행하는 것만으로도 그 다음 단계에 행해져야 할 대안의 마련을 조금 더 용이하게 만든다. 그 대안은 각국 정부의 정책 변화가 될 수도 있고, 시민 의식구조의 개혁이 될 수도 있으며, 선진국에 의한 원조 프로그램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책의 저자 두사람의 몫은 아닌 셈이다.

빈곤 퇴치에 대한 상이한 시각 두개가 존재한다. 하나는 Jeffrey Sachs 라는 컬럼비아대 교수에 의해 대표되는 공급 중심의 시각이다. Sachs 는 선진국에 의한 원조에 의해 빈곤에서 탈출하는 가장 기본적인 해결책이 열린다고 주장한다. 즉 아주 기본적인 위생 문제를 해결하고 한사람이 하루에 먹고 살 수 있는 기본적인 의식주를 무상으로 제공할 수 있다면 이를 토대로 빈곤에 시달리는 국가들은 그 다음 레벨 – 빈곤 이후의 자생적인 경제 모델의 발전 – 로 나아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UN 에서 활동하는 안젤리나 졸리도 이쪽이다. 다른 하나는 William Easterly 라는 뉴욕대 교수에 의해 주창되는 수요 중심의 시각이다. 그는 무분별한 원조 프로그램은 오히려 자생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인 시장 구조를 왜곡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러한 원조 프로그램이 빈곤을 악화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는 원조 이전에 시장 구조를 보다 확실하게 정립하자고 주장한다. 삭스와 이스털리는 같은 맨하튼에 적을 두고 있고, 이 주제로 매년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이 책의 저자인 Banerjee 와 Duflo 는 이들과 한발 떨어진 매사추세츠 보스턴 근처의 MIT 에 재직하는 교수들이다. 그리고 이들 저자는  <Poor Economics> 에서 공급이 먼저냐 수요가 먼저냐로 다투기 이전에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간단하게 “그때 그때 달라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의 주장은 사실 그리 간단치가 않다.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이 이들의 핵심 결론이기도 하다. 수요 중심의 해결책이 먹히지 않을 때도 있고, 공급 중심의 해결책이 통하지 않을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왜” 그러한 노력들이 실패로 돌아갔는지 일일이 나누어 살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들은 놀라울 정도의 방대한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 각각의 이슈들에 대한 검증을 한다. 아이보리 코스트, 인도와 중국, 브라질과 방글라데시등 빈곤층을 상당 부분 보유하고 있는 국가들을 직접 발로 돌아 다니며 실제 빈곤층에 속한 계층을 일일이 인터뷰했다. 각각의 정책들이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미시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그 이후 이들의 삶은 경제학적으로 재해석하고, 경제학적인 “도구” 들을 이용해 원인을 분석한다. 한가지 놀라운 점은 이들이 경제학적 방법론으로 빈곤 현상을 분석할 때 사용하는 도구들은 아주 간단한 것들이라는 것이다. 경제학원론 수준의 경제학적 지식만을 이용해 세부적인 현상들에서 하나의 일관된 아이디어를 만들어 낸다. 그 과정에는 논리적인 비약도 없고 억측이나 과장도 없다. 철저히 인터뷰와 통계 수치만을 이용해 도출해낸 결과들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반박하기 힘들다. 이들이 그 이후 제시하는 해결책, 혹은 대안이라고 불릴만한 아이디어들은 원인 분석에 비해 훨씬 추상적이며 얄팍하지만 그 것이 이 책의 큰 흠집이 되지는 않는다.

간단하게나마 이 책의 “결론이자 또다른 연구의 출발점” 이 될만한 내용을 적어 본다. 즉 “왜” 빈곤층은 계속해서 빈곤한 상태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대략적인 이유 다섯가지다.  첫째, 빈곤층의 대부분은 충분한 올바른 정보를 얻을 기회가 없다. 이들은 또한 옳지 않은 정보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인 위생 문제부터 섹스, 마약, 식습관등 기본적인 것들에서조차 이들은 제대로 교육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살아간다. 둘째, 이들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것들에 대해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 즉 더 많은 부양 가족과 더 적은 유산, 더 불안정한 일자리등의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셋째, 이들을 빈곤으로부터 탈출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몇몇 시장들이 제대로 정의되거나 설립되어 있지 않다. 이는 정부의 부패부터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수렴되는 경제학적 행동들까지 다양한 이유들로부터 형성된다. 넷째, 빈곤층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상대적으로 적다. 원래부터 가진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지와 이데올로기, 저항등의 이유때문이기도 하다. 다섯째, 이들은 다음 수준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있다. 즉 혁신이나 도전등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필요한 모멘텀이 상대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다시 처음 이 책을 구입하기로 마음먹을 당시 가졌던 질문으로 돌아가본다. 이 책이 경제학이 세상에 해줄 수 있는 그 어떤 가치를 제공해주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내 개인적인 대답은 그렇다, 이다. 이 책은 경제학이라는 학문 안에 갇혀 있지 않다. 즉 이 책의 저자들이 결론을 대신하는 마지막 장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이들은 현대 경제학이 자랑하고 내세우는 수학적인 엄밀성이나 현상들에 대한 일반화에 관심이 없을 뿐더러 그러한 경제학의 경향성을 배척하기까지 한다. 이들의 목적은 오로지 한가지, 지금 이시간에도 굶어 죽어 가고 있는 수많은 이들을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는 데에 있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경제학이라는 수단을 사용하고 있는 것 뿐이다. 즉 이 책은 한 학문 분야라는 “바닥” 에서 내공을 인정받기 위해 쓰는 추상적인 언어 유희가 아니다.  Duflo 가 대학원 시절 실제 인도에 가서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며 시작된 이 책은 그러한 실제적인 접근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결코 성급하게 앞서가지 않는다. 지루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치밀한 현상 고증과 통계적 수치를 제시하면서 그 안에 담겨져 있는 경제학적 함의를 차근 차근 설명한다. 그리고 그 치밀한 논증 위에 그들이 원래 하고 싶었던 주장을 얹는다. 과격하지 않지만 분명한 어조로 전달한다. 행동해야 한다고. 그냥 행동하면 안되고, 아주 잘, 조심스럽고 현명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그래서 이 책의 부제가 완성된다. 빈곤과 “싸우기” 위한 “극단적”인 “생각”. “싸운다” 혹은 “극단적” 이라는 단어가 이 책의 말미에 이르러서는 그리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전적으로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인 엄밀함덕분이다. 그 안에 수학 공식은 존재하지 않고, 어려운 경제학적 개념도 등장하지 않는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지만, 쉽게 읽히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 치열한 고민을 요구하고, 뒤이어 뜨거운 가슴도 요구한다. 경제학이, 아니 학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실제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이런 책을 쓰는 것이 아닐까.

찾아보니 아직 국내에 번역이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하루 빨리 번역되어 소개되기를 바란다. 이제 한국은 세계 20위권의 “부자나라” 이고, 빈곤에서 가장 빨리 탈출한 모범 사례로 종종 소개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 나라가 가진 노하우를 더 발전해야 하는 나라들에게 전달하고 도움을 줄 때가 왔다. 세계에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이 책은 그런 고민을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여담. 젊은 경제학자가 받을 수 있는 영예로운 상들이 여럿 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상 두가지는 매년 40세 이하 경제학자중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한명에게 수여하는 John Bates Clark Medal 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아주 젊은 학자에게 수여하는 MacArthur “genius” Fellowship 일 것이다. 이책의 공저자인 프랑스인 Duflo 는 이 두개의 상을 모두 받았다. 한마디로 천재라는 얘기다. 천재가 머리를 좋은 방향으로 쓸 때 세상은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여담2. 유학오기 전 만났던 여자친구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라는 책을 읽고 있다고 내게 잠깐 보여준 적이 있다. 유심히 살펴 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 이후로 그 여자친구를 가끔 떠올리 때마다 이상하게 그 책이 함께 떠올랐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 친구는 무척 이뻤고, 이쁜 만큼 옷도 잘 입었고, 명품도 좋아하는 친구였다. 내게 항상 생각없이 산다고 구박을 들었고, 편하게 먹고 살기만 하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친구이기도 했다. 그랬던 친구가 왜 그 책을 20대 중반이던 그 당시 읽고 있었는지 이 책을 읽고나서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왜 그랬을까?

Officially dissolved Dept. of Economics & Policy Studies at the University of Notre Dame

rink to the article

The power game between Orthodox and Heterodox economists at the university becomes the result of sweeping heterodox guys by neo one. Heterodox economics has been at the heart of the university since 70’s, by adapting Roman Catholic social justice and its application to the social science field, but after accepting some neo guys into the program there have been lots of quarrels between those two radically parted in their thoughts. As mainstream economics has dominated the world economics, the orthodox economists has been getting powered up, and finally some years ago the two groups have take apart each other. And recently, the dept. of economics & policy, where the heterodox guys were kicked out, has been closed officially. It was expected since 2003 they were not accepted to have new graduate students or invite new faculty members by the university authority. So now Notre Dame dept. of economics has 90% of neo guys and, 10% of heterodox guys who will be out soon. One of the most prominent researcher in heterodox field already has gone to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last year. As this result, the ranking of the program has been rapidly rising, and funding situation is pretty better than yesterdays. However there are criticism about this changes of Notre Dame since the university was built upon the spirit of Roman Catholic that argues the virtue of an acceptance of various voices, and the changes does not reflect it very much.

I think.. mixture of orthodox and heterodox economics is impossible. They criticize each other heavily, and we don’t know who the right part is. Historically so called “heterodox” thoughts have been always the front runner of science, but there is no reason that heterodox economics is that right pioneer in this centu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