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주도 성장론이 그렇게 욕 먹을 일인가

요즘 나라가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현 정부의 첫번째 위기가 온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최근 발표된 7월 ‘고용 쇼크’ 자료를 바탕으로 언론과 야당은 집중포화를 퍼붓고 있고, 이로 말미암아 대통령과 청와대에 대한 지지도는 취임 후 최저치를 연일 갱신하고 있다. 북한과의 관계가 개선이 되든 말든, 결국 필부필부의 최대 관심사는 먹고 사는 문제에 집중될 수 밖에 없다. 막연히 추측만 할 수 있었던 사안이 숫자로 뚜렷하게 제시되는 순간 자신의 추정이 객관적으로 증명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고, 이러한 확신은 눈과 귀를 조금 더 닫히게 만들고 주장하는 목소리에는 힘을 실어준다. 사실 숫자가 나온 순간부터 본격적인 검증과 고민이 시작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현 정부의 정책 중 요즘 가장 큰 비판을 받는 부분은 소위 소득주도 성장론이라고 부르는, 대통령 취임 후 주요한 경제정책으로 추진되어온 성장방식이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그 이름도 생소한 방식의 경제 성장론이기 때문에 도입 당시부터 말이 많았고, 많은 경제학자와 정책 전문가들이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명한 정책적 방법론이기도 하다. 현재 이 소득주도 성장론을 기반으로 행해진 주요한 정책으로 크게 세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최저임금의 가파른 인상,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 그리고 재정정책의 확대를 통한 보조금 지급이 그것이다.

이 중 최저임금 인상이 가장 큰 저항에 부딪힌 것처럼 보인다. 비판의 근거는 크게 세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자영업이라는 제3의 영역을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은 정책이라는 비판이다. 최저임금의 직접적인 영향은 대부분 일용 근로자(1개월 미만의 일일 단위 계약 노동자), 혹은 임시 근로자(1개월 이상 1년 미안의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에게 돌아간다. 최저임금이 빠르게 상승하면 이들 일용 근로자, 혹은 임시 근로자를 고용하는 영세한 자영업자의 비용이 상승하여 고용률이 오히려 하락하고 영세 자영업자의 파산 확률을 높일 수 있다. 최저임금에 대한 비판의 두번째 근거는 내부자-외부자 이론 등에 근거한 실업률 상승에 대한 기여도 부분이다. 즉 비판자들은 최저임금의 상승은 기 고용된 근로자의 임금을 증가시켜주는 역할을 하지만, 구직자에 대한 진입장벽을 높여 실업률을 오히려 상승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판의 세번째 근거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현재의 어려운 경제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이라는 주장이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이 1%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수출에 비해 내수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경제상황에서 최저임금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도,소매업 및 숙박, 판매업 등의 경제지표를 세밀히 관찰하지 않고 노동계측의 의견만을 받아들여 인상의 폭을 적절히 조절하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세 비판 모두 일견 타당한 논거를 가지고 있지만, 최저임금만이 최근 고용 쇼크의 유일한 근거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 또한 희박해보인다. 먼저 내수 시장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는 특정 산업 내 존재하는 가격 경직성을 고려해야 한다. 코인 노래방을 생각해보자. 한 곡 당 보통 500원의 요금을 받는다. 임대료가 비싼 곳은 1,000원을 받을 수도 있다. 어쨌든, 한 곡 당 500원을 받는 가게에서 최저임금이 인상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요금을 한 곡 당 1,000원으로 인상할 수는 없다. ‘메뉴 비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게 주인은 근처 노래방 가격은 물론, 코인 노래방과 전혀 상관없는 분야의 가격들이 일반적으로 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가격에 대한 소비자의 저항심리를 최소화시키며 기존 고객을 계속 유치할 수 있다. 최저임금의 부정적 충격을 상쇄할 정도의 가격인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어느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셈이다. 이 가격 상승은 당연히 최저임금 인상의 혜택을 보는 근로소득자의 소비 증가를 필요로 한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해 내수가 살아나고, 살아난 내수를 기반으로 가격이 상승하여 국가 전체적인 소비자물가상승률로 이어지는 선순환구조(이게 소득주도 성장론의 핵심이다)를 확인할 때까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현재는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다음으로, 경기변동 상 국면전환과 최저임금 인상 중 어느 쪽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구분해야 한다. 현재 한국의 경기흐름이 호황기에서 침체기로 전환되고 있다는 신호를 여러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정 대기업의 특정 수출품목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제구조는 그 자체로 큰 리스크를 안고 있는데, 올해 하반기부터 그 특정 품목의 경기조차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소비자물가에서는 올해 들어 지속적으로 수요측면의 상승압력을 발견할 수 없다. 미국과 중국, 유로존 간 통상마찰로 인해 신흥국의 ‘발작(tantrum)’이 발생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와 터키가 무너지고 있는데, 이정도 덩치의 국가들의 화폐가치가 폭락하는 현상은 가벼운 감기 정도로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기준금리 인상기조를 이어가고 있지만 한국은 금리 동조화를 시킬 수 없을 정도로 국내경기가 살아나지 않고 있다. 내외부에서 진퇴양난에 빠져있는 형국이다. 즉, 이미 한국의 경기가 올해 초부터 침체국면으로 접어들었다면, 고용에 영향을 주는 주된 요인은 최저임금이라기 보다는 경기변동 그 자체일 가능성이 있다. 경기가 좋지 않으면 고용이 되지 않는다. 물론 최저임금이 복합적으로 고용에 악영향을 주었다는 추정조차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저임금의 가파른 인상이 마치 영세 자영업자에게 내려진 사형선고 마냥 절대악으로 비춰지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일 가능성이 높다.

최저임금은 소득의 인위적 성장을 통해 성장을 꾀하는 경제정책이라기보다는, 한국사회의 ‘최저 생계 기준’을 상징적으로 설정함으로써 서민의 삶의 질을 최소한으로 보호하려는 사회복지정책에 가까운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즉, 현 정부는 경제와는 별개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는 최소한의 철학을 가지고 있고, 이를 ‘숫자’로 확실하게 보장해주려는 정책적 움직임이 최저임금의 가파른 인상으로 현실화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주 52시간 근무제도 마찬가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최저임금과 주 52시간 근무제는 국가 경제활동이라는 게임의 방향을 결정짓는 결과론적 평등주의 정책이라기 보다는 게임의 규칙을 재설정하는 쪽에 가깝다. 이제 모든 플레이어는 새로운 게임의 규칙 아래에서 ‘이익의 극대화’라는 목표를 다시 찾아나서야 한다. 기업은 근로자의 최저임금과 최대근무시간을 보장해주는 한도 내에서 이익을 최대화시키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컴퓨터를 끄고 근무를 시키거나 최저임금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는 장기적인 이익 극대화를 성취할 수 없다. 당장은 힘들어지겠지만, 장기적으로 더 나은 기술을 발전시키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게 생산성 향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국가 경쟁력 확보의 원천이다.

결국 소득주도 성장론에 기반한 위의 두 정책은 현 정부의 경제정책 중 다른 한 축인 ‘혁신성장론’으로 귀결된다.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던져 주었으니, 그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더 나은 기술을 만들어내자는게 혁신성장론이다. 기업들에게 더 높은 경쟁력을 요구하되, ‘더 높은 경쟁력’은 ‘인건비 절감’이 아닌 ‘생산성 증가’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혁신성장론의 핵심 논리다. 정부는 이를 위해 생산성 향상을 저해하는 각종 규제를 철폐하고 재정정책을 통해 지속적인 기술 및 생태계 혁신을 지원해야 한다. 이제 관건은 과연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국가 경쟁력 확보를 효율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있느냐이다. 만약 한국의 최근 경제상황을 소득주도 성장론과 결부시켜 비판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비판의 초점을 재정정책 쪽에 맞추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소득주도 성장론을 기반으로 한 약 세 개의 주된 정책 중 가장 비효율적으로, 철학 없이 진행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재정정책을 통한 보조금 지급이기 때문이다. 이 보조급 지급은 ‘원 샷’ 정책에 가까워보인다. 당장 취업을 하지 못한 청년 구직자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 중장기적으로 얼마나 많은 부가가치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 0에 가깝다. 그들은 용돈 등 생계비로 이 보조금을 사용할 것이고, 그렇게 세금은 허공으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최저 생계비 수준에 머물고 있는 노인들에게 지급하는 보조금도 마찬가지다. 어르신들 용돈 챙겨드리는 정도일 뿐, 이들이 이 돈을 생산적으로 다른 일에 쓸 확률은 0에 가깝다. 중소기업에 지급하는 고용 보조금도 2년, 혹은 4년 내의 단기적인 고용효과만이 있을 뿐 장기적으로 중소기업이 고용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렇게 낭비되는 세금은 중소기업의 기술 혁신, 혹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존재하는 비합리적인 하청 관계를 청산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스타트업 기업이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지원을 함으로써 젊은 기업가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보다 창의적인 모험에 뛰어들도록 유도해야 한다. 대학이 단기 실적에 얽메이거나 연구비 수주에 목메지 않고 연구실 안에서 고유한 원천기술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충분한 여유를 확보해주어야 한다. 일개 기업이 수출확로를 뚫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국가가 나서서 큰 판에서 해결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확대 재정정책, 혹은 재정적자 정책이다.

결국, 현 정부의 가장 큰 패착은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이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최저임금 인상은 현 정부의 철학을 대표하는 주요한 정책으로 포기하지 말고 추진해야 한다. 단기적으로 최저임금 인상을 감당해내지 못하는 한계 기업이 있다면 이들을 억지로 되살려 ‘좀비 기업’으로 만들지 말고, 재빠르게 청산하고 업종 전환을 할 수 있도록 재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이 합리적이다. 주 52시간 근무제는 근로자가 최소한으로 누려야 하는 인간다움을 보장해주는 제도이기 때문에 이 역시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퇴근 후 극장에 가고 차 한잔을 마실 수 있는 여유 정도는 근로자가 누려야 하는 당연한 삶의 질이다. 오히려 이 제도를 편법적으로 악용하려 하는 일부 기업을 보다 강력하게 단속하여 그 어떤 상황에서도 더이상 일을 시킬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정부는 근로자에게 더 높은 임금을 주고 더 적게 부려 먹어야 해서 울상을 짓는 기업을 도울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많다는 것을 신속하게 깨달아야 한다. 현재 한국의 세수는 역대 최고 수준이다. 이렇게 국고로 흘러 들어오는 세수를 효율적으로 쓰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재정적자를 실현하되,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실시되어야 하지, 이 세금을 고용창출이나 보조금 지급 등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낭비해서는 안된다. 이건 게임의 방향을 정부가 정해버리겠다는 말과 다름 없는 것으로, 오히려 시장에 좋지 않은 신호를 줄 수 있다. 일한 만큼 월급을 주고 받되, 일하는 시간만큼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해보자, 라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책상에 앉는 순간 일에만 집중하되, 정해진 시간 외에는 업무에 대해서는 언급 조차 하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의 노동 생산성은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에 속한다. 전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한다는 한국인의 명성이 무색해지는 지표 중 하나다. 어쩌면 우리가 ‘근면성실함’이라는 자부심에 취해서 현실을 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월급루팡’이 더이상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의 상징이 되는 날이 온다면, 한국의 생산성도 다시 세계적 수준으로 회복될 수 있을 것이고, 경제성장률도 3%대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며, 한국의 경제상황도 빠르게 호황기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Snail Mail | Lush

snail mail
최근 음악 일기가 많이 밀렸다. 좋은 음악은 끊임없이 듣고 있는데, 그 감상을 차분히 글로 풀어내는 일은 항상 해야할 일들 중 우선 순위가 가장 뒤로 밀리게 된다. 물론 나의 게으름 외에 다른 이유를 가져다 붙이기에 민망한 일이지만, 어찌 되었든 이 블로그에 기록하지 못한 좋은 음반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픈 것도 사실이다.

밀린 일기를 해소해야 할 때 주로 하게 되는 고민은 ‘무엇부터 쓸 것인가?’이다. 나는 보통 가장 좋게 들었던 음악부터 적어나간다. 최근 몇 달 사이에 가장 감명깊게 들었던 음반은 만 18세의 여성 싱어송라이터가 발매한 데뷔 음반, [Lush]였다. 스네일 메일(Snail Mail)이라는 무대명을 가진 린지 조던(Lindsey Jordan)은 2018년 볼티모어 교외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마타도어(Matador) 음반사와 계약을 맺고 데뷔 음반 [Lush]를 발매했다. 이 음반은 올 해 가장 인상깊은 데뷔 음반으로 기록될 것이 확실하며,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올해의 음반으로 칭송받을 것이다. 최근 사커 마미(Soccer Mommy)나 US 걸스(US Girls) 등 미국 로 파이(Lo-Fi)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젊은 뮤지션들이 주목받고 있는데, 스네일 메일은 이러한 흐름의 끝판왕격으로 등장한 충격적인 신예 뮤지션이다.

5살 때부터 기타를 잡기 시작했다고 하며, 십대 시절 가족과 함께 파라모어(Paramore)와 피오나 애플의 공연을 본 이후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하며 두 장의 EP를 발매했다. (볼티모어 교외에 살던 린지 조던은 워싱턴DC의 NPR 사무실에서 열린 파라모어의 Tiny Desk 공연을 직접 가서 관람했고,  이후 2017년 본인이 직접 Tiny Desk에서 공연을 하게 된다) 인터뷰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음반으로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의 [Loaded] 음반을 언급하는 이 뮤지션은 결코 애늙은이처럼 90년대 음악을 답습하지 않는다. [Lush]는 십대의 펄떡거리는 정서가 날것 그대로 담겨 있다. 학교와 가족, 사랑과 이별, 우정 등 십대 시절 경험하게 되는 여러가지 성장통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이 음반은 그렇다고 여느 십대 갤러지 밴드의 음악들처럼 아마추어적이지도 않다. 그녀는 이미 뛰어난 기타리스트이며, 아주 뛰어난 작곡가이자 작사가이다. “Pristine”, “Heat Wave”, “Stick”같은 노래를 들어보면 도저히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탄탄하고 쫀득한 구성과 훅을 가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음반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은 “Full Control”인데, 90년대 로 파이 음악에 대한 애정이 진득하게 느껴지면서도 스네일 메일만이 가지고 있는 폭발적인 정서가 형식적으로 잘 구현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나른하고, 또 가끔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이 시절의 정서가 감각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표현되어 있다.

요즘 힙합 음악이 대세인 것은 아마도 힙합이 가진 뛰어난 서사 전달 능력이 한 목 하지 않았나 싶다. 우리가 흔히 스토리텔링이라고 부르는 힙합 음악의 서사 전달 기능은 최근 록음악으로도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Lyrical Rock’이라고 불리는 이 장르에서 성공한 뮤지션으로는 최근의 코트니 바넷(Courtney Barnett) 정도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고, 그 이전에는 아마도 홀드 스테디(Hold Steady)가 어느 정도의 기반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스네일 메일은 대중음악에서 왜 가사가 여전히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자, 가사와 음악이 어우러지는 음악적 공간(soundscape)이 어떻게 더 진화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 그 자체이기도 하다. 10월 3일 내한공연을 가진다고 한다. 김밥레코즈가 주관하는 내한공연은 러닝타임이 지나치게 짧고 구성이 지나치게 단촐하다는 공통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데뷔 음반을 이제 막 발매한, 로 파이를 기반으로 하는 뮤지션의 공연은 김밥 레코즈와 함께 해도 관중 입장에서 별로 잃을 것이 없어보인다. 꼭 가서 볼 생각이다.

극단적 여성중심주의를 반대하는 이유

최근 기성 언론을 통해 보도된 ‘워마드’를 중심으로 한 두세개의 사건들이 내 관심을 끌었다. 하나는 가톨릭 성체 훼손 사건이었고, 또다른 하나는 지하철 남성 조롱 사건이었으며, 마지막 하나는 현직 대통령을 향해 “재기하라”고 발언한 사건이었다. “이게 ‘사건’ 정도나 되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요즘 한국사회의 한 단면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발생한 일련의 일들이 꽤나 상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워마드’가 어떤 곳인지는 해당 사이트를 여러 차례 방문해 관찰했기에 잘 알고 있다. ‘워마드’ 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정체성과 문화를 공유하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다수 존재하고, 최근 혜화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시위의 중요한 일원으로 이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이들이 인터넷 밖으로 나와 본격적으로 현실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여러가지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현재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과 ‘워마드’가 어떤 관계로 엮여 있는지 보다 분명하게 정리하고 가야하지 않을까 싶다.

우선 한국사회에서 사용하는 ‘페미니즘’이라는 용어 자체가 올바르게 정의내려지지도 않고 있으며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하나의 공통적인 가치로 공유되지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시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극단주의 페미니즘(radical Feminism)만을 뜻하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는 반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유주의적 페미니즘(liberal Feminism)까지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누군가에게는 페미니즘이 하나의 ‘운동’이라면, 다른 누군가에게 페미니즘은 ‘학문’의 영역에서 이해된다. 누군가에게는 페미니즘이 양성 평등을 위한 이데올로기라면, 다른 누군가에게 페미니즘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저항운동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나는 페미니즘이 “공부”를 해야만 받아들일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주장하는 순간 교조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고 페미니즘이 “믿음”의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충분한 논거가 뒷받침되지 않은 운동은 우스꽝스러워지기 쉽상이다. 중요한 점은 페미니즘이 사회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 사회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회 안에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페미니즘을 사회과학(social science)의 범주 안에 포함시키는지의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다. 페미니즘의 태동 자체가 사회와 떼어놓을 수 없었고, 지금까지 사회의 ‘질서’와 유기적인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며 성장해온 이데올로기이며, 이 사상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 역시 사회의 ‘질서’ – 를 수정하든, 재정의내리든 – 라는 개념 안에서만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나는 ‘워마드’가 여성우월주의, 혹은 극단적 여성중심주의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단체라고 생각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박근혜를 지지하고 남성이라는 이유로 현직 대통령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행위가 한 집단의 공통적인 입장으로 자리매김한다면 이건 더이상 개인의 장난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현상이 아니다. 이들의 원동력은 ‘혐오’에 기반하고 있다. 남성과 관련된, 남성이 포함된 거의 모든 집단을 향한 무차별적인 혐오. 현재 ‘워마드’가 가진 중요한 정서적 기반인 이 ‘혐오’의 집단화가 사회에 끼치는 해악은 그 어떠한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일베’로부터 현현하기 시작한 혐오와 편가르기의 정서는 ‘워마드’로 인해 특정 정치 세력의 차원에서 성별의 문제로 진화했다. 개인이 소신을 가지고 선택하는 정치성향과 달리 태어날 때 상당 부분이 결정되는 성 정체성을 혐오의 재료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워마드’의 현재 위치는 매우 서글프고 안타깝다.

‘워마드’의 구성원들이 자신을 페미니즘의 한 분파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큰 오류라고 할 수 있다. 페미니즘은 ‘워마드’가 해오는 방식처럼 편을 가르고 상대방을 혐오하고 깔아뭉개는 방식으로 발전해오지 않았다. 잘못된 사회 질서를 바로잡고 보다 나은 세상을 공유하기 위해 인류는 여러가지 이데올로기를 탄생시켰다. 그러한 목적의식 하에 발전되어 온 여러 시각 중 하나가 성적 차이로 인한 차별을 없애자는 목소리, 즉 페미니즘이다. ‘워마드’는 오히려 반(反)페미니즘적 시각을 가진 이들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으며, 페미니즘과 상충되는 개념을 공유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남성에 대한 혐오의 정서는 결국 여성에 대한 혐오의 정서를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다. 이것은 페미니즘에도 좋지 않으며, 양성평등의 방향성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이상향이 성적 차이로 인해 차별받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면, 극단적 여성중심주의가 나타내는 남성혐오 문화는 결코 그 해답이 될 수 없다.

상당수의 여성이 이러한 혐오의 정서에 편승하는 현상은 이들이 진정으로 혐오를 통한 남성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을 남녀 차별 극복을 위한 현실적인 대안으로 인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일베’가  유행할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한 성격의 단순하고 피상적인 본능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했노”라는 말투부터 특정 인물을 의도적으로 비하하고 희화화하여 조리돌림하는 과정까지, 올바른 사회화를 체득하지 못한 성인들의 집단적 퇴행현상이라고 볼만한 사례가 충분히 발견되고 있다. ‘워마드’가 내세우는 거의 유일한 존재 근거인 ‘미러링’이 (하필이면) ‘일베’를 그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한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일베’는 ‘남성 주류사회’를 대표하지도 않으며 페미니즘이 배척해야 할 남성주의적 정치성향을 가장 폭넓게 대변하는 단체도 아니다. ‘워마드’는 단지 ‘일베’가 발전시킨 집단적 혐오, 유아적 왕따의 정서를 도구적으로 차용하여 폭력의 대상을 상이하게 설정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워마드’가 ‘일베’를 혐오한다면, ‘미러링’의 조건대로 ‘워마드’ 역시 사라져야 할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셈이다.

2010년 이후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감정은 ‘혐오’의 정서다.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보다 결과적인 불평등을 납득하지 못해 상대방이 가진 것을 강제로 빼앗아오려는 배고픔의 정서가 혐오를 낳았다. 결국 이 사회가 조금 더 가난해졌기 때문에 발생한 사회현상이다. ‘워마드’로 상징되는 여성중심주의적 혐오의 정서는 이 사회에 발생하고 있는 다양한 혐오의 정서 중 한 예일 뿐이다. 이 외에도 공무원을 향한 분노, 정규직을 향한 분노, 장애인을 향한 분노, 성적 소수자를 향한 분노 등 다양한 방향과 크기를 가진 분노가 이 사회에 존재한다. 갈수록 한국에서 먹고 사는 것이 힘들고 피곤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그만큼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도 그만큼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씩 더 많이 미워하고, 더 많이 질투하고 있다. 한국이 살기 힘든 이유이자 이 사회가 더이상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 어느 가족

어느가족
어쩌다보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최근작들을 꾸준히 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는 참으로 끈질기고 집요하게 가족에 대해 다루고 있다. 고레에다 감독의 팬이라면 “더이상 가족영화를 만들지 않겠다”는 감독의 선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가족에 대한 다른 시선’을 담아보겠다는 영역확장에 대한 의지의 표현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보여주는 서늘한 가족 서사를 마지막으로 필모그래피의 한 단락을 마무리한 이후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그답지 않은 천진난만함으로 잠시 한템포 쉬어갔다면, [세번째 살인]에서는 가족과 사회 간 유기적인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관찰대상을 적극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모양새다.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는 미시적 가족 구조, 법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관계를 가족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의 여부, 그리고 그 가족의 안을 한번 더 파고들어가 ‘개인에 대한 믿음’에 대한 질문까지 던지는 이 영화는 고전적이고 진부한 연극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함으로써 서사 그 자체에 집중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가족]은 [세번째 살인]과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는 영화이자, 전작에서 감독이 흥미를 보였던 주제를 조금 더 깊게 파고들어간 작품이다.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혹은 그 법적 보호의 혜택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이 모여 가족과 유사한 형태를 이루어 살아간다. 각자 말하지 못하는 과거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동거인 사이에 흐르는 끈끈한 정, 혹은 돈이라는 물질적 욕망 사이 어딘가에 기대어 연대를 이루고 있다. 일반적인 가족과는 조금 다른 추동력을 가진 이 집단에 새로운 멤버가 우연히 들어오게 되고, 이 가장 어린 멤버이자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가진 멤버를 중심으로 집단에 조금씩 변화가 생겨난다. 영화는 후반부까지 이 변화의 양상을 느린 속도로 가만히 비추는데 집중한다. 잠시나마 모성애와 혈연이라는 전통적인 가족의 영역으로 편입되는가 했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못한다. 법과 사회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규범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던 이 ‘가족 아닌 가족’은 결국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파멸한다. 이들이 가진 ‘경계인’으로서의 삶은 사회로부터 이해되지 못했고, 이들 스스로도 조금 더 ‘정상적인 가족’으로 편입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한 채 뿔뿔이 흩어지는 쪽을 택한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후반부 인터뷰씬에서 감독은 영화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데, 차라리 그 부분이 없었다면 더 좋을 뻔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이케와키 치즈루는 반가웠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한 영화 안에서도 곱씹어볼만한 질문을 여러개 던져주는 감독이다. [어느 가족]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가족의 변이와 확장을 사회가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사려깊게 던지고 있다. 다만 형식적인 부분에서 확실히 질리는 부분이 점점 많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진부한 부분이 너무 많다. 전작들 중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싶은 기분을 느낀다. 홍상수처럼 자기복제의 함정에만 걸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김혼비 |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김혼비
‘한국에서 여성이 취미로 축구를 한다’

억지로 한 문장에 우겨넣은 이 책의 요약은 그 자체로 사회적인 의미를 가진다. 에세이스트 김혼비는 자신이 경험한 여성 사회인 축구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것 자체로 독자들에게 생각할 지점을 여럿 던진다. 남성의 전유물과 같이 여겨지는 스포츠, 그 중에서도 과격한 축에 드는 축구를 여성이 한다는 것, 더 나아가 2,30대 젊은 여성이 아닌 4,50대의 나이 지긋한 여성이 주축이 된 사회인 체육의 형태로 스포츠를 향유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나를 포함한 한국인 대다수에게 익숙하지 않은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이 ‘익숙하지 않음’의 이유를 하나씩 파고들다 보면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축적되어온 불평등과 억압의 역사가 숨어있음을 알게 된다. 그 불편한 현실을 불편하지 않게, 무겁지 않고 유쾌하게 전달한다는 점이 이 책의 첫번째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전세계적으로 볼 때 축구는 여성의 운동으로 자리잡은지 꽤 되는 편이다. 전체적인 프로스포츠 시장 자체가 남성 편향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이건 스포츠 활동을 함에 있어 남성의 육체적 능력이 상대적 우위에 있다는 생물학적 특성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한 결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학원체육이나 사회인 체육 쪽에서는 축구가 여성에게도 많이 열려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축구를 좋아하는 초등학생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다만 이 ‘전세계적 추세’가 한국을 중심으로 살아온 30대 이상의 기성세대에게 ‘인식’되는지의 문제로 한정짓는다면, 아마도 이 책의 저자가 동호회에 처음 가입할 때의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이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야구장을 가득 메운 여성 관중들을 보며 “규칙도 모르면서 치킨이나 먹으러 간다”고 비아냥거리는 자칭 ‘야구매니아’ 남성이 도처에 깔려 있는 현실에서(아니, 그리고 말 나온 김에, 야구 규칙 잘 모르면서 치킨 먹으러 야구장 가는게 그렇게 분하게 생각할 일인가?), 인사이드킥을 연습하고 아웃사이드 드리블을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여성의 모습이 마냥 편하고 자연스럽게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것이다. 저자는 독자의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그 불편한 현실에 대한 인식을 예의바르게 건드린다. 이건 축구 자체에 대한 저자의 절대적인 애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글쓰기 방식이었을 것이다.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좌도 우도, 남도 여도 없다는 간단한 진리를 에세이의 형식을 통해 성공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도 여름이 끝나갈 때 쯤 집 근처에 있는 대전월드컵경기장에 한번 가보기로 결심했다. 2부리그에 있는 대전 시티즌에 소속된 선수 중 아는 선수라고는 한 명도 없지만, 로컬 스포츠팀을 응원하는 기쁨을 너무 잊고 산 것 같아 많은 반성을 했다.

노회찬이 계속 생각난다

사연 없는 죽음이 어디 있겠냐마는, 투명한 유리 안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생중계하듯 살아온 유명인들의 죽음은 그만큼 더 극적으로 보일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명인의 죽음은 그 순간 잠시 서늘한 기분을 느끼고는 빠르게 증발해버리는 편이다. 유명인의 전시된 삶을 소비하듯 보아온 일반인들에게 그들의 죽음 역시 일종의 전시처럼 보여지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가끔 아주 오랜 기간동안 잊혀지지 않는 죽음이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다가도 문득 그가 생각나 울컥해지고, 우울해지고,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죽음이 있다.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는 무겁게 짓누르는 그런 죽음이 있다. 노무현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리고 요즘에는 노회찬이 자꾸 생각난다.

그가 하는 말들이 무척 인상 깊었다. 정치인 중 그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지금도 아무도 없다. 그가 만들어내는 비유는 참신할 뿐 아니라 날카롭기까지 해서, 그가 뱉은 말들을 후에 한참동안 곱씹어봐도 절묘하고 정확하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타고난 재능인지, 오랜 기간 노동운동을 하며 쌓은 경험이 좋은 재료를 제공해주는 것인지 궁금했다. 뉴스를 보며 답답해진 가슴은 그가 한마디 할 때마다 조금씩 시원해졌다. 소수정당에 소속된 한계가 그를 짓누를 때마다 안타까웠고, 그의 언행이 더 많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어쩌면 노무현처럼 그 역시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정치인이었을지 모른다. 삭막한 정치판에 한줄기 유머를 선사하는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었고, 이데올로기에 갇히지 않고 실제적인 소수자 보호를 위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끊임없이 내던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우리 사회가 그의 목소리에 조금 더 크게 호응해주었다면, 그의 유머에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웃어주었다면, 그의 날카로운 비판에 조금 더 큰 박수로 화답해주었다면, 어쩌면 며칠 전과 같은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의식이 마음을 짓누른다.

죽기 전 그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차마 짐작도 되지 않는다. 굳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했을까, 라며 안타까워 하는 이들이 많지만, 운동권 특유의 극단적 문화에 노회찬 고유의 강성함이 더해져 도저히 스스로를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겠다고 상상해본다. 그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 정도 되는 그릇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지만, 몹시 어지러웠을 그의 마음 자체를 최소한 부정은 하지는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가 많이 아쉽다. 그를 더 오래 보고 싶었다. 그가 조금 더 오래, 더 넓은 영역에서 많은 이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기를 바랐다. 그렇게 되지 못해 슬프고 슬프다. 마음 한구석이 계속 아려온다. 공무원의 신분이라 그에게 후원금 한푼 보내주지 못했지만, 마음 속으로 그를 계속 응원하고 있었다. 빗자루를 기타 삼아 흥을 돋우던 사진이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그런 정치인을 우리는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노무현이 없는 노무현의 세상이 조금씩 오고 있는 것처럼, 노회찬이 없는 노회찬같은 세상도 올 수 있을까. 계속 슬퍼온다.

클라이브 제임스 | 죽음을 이기는 독서

죽음을 이기는 독서
이번 여행에서 가지고 간 책은 이 [죽음을 이기는 독서], 달랑 한권이다. 아내와 가진 첫번째 여행은 남해로 떠나 한 곳에서 머무는 3박 4일 일정이었는데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 세 권을 가지고 갔다. 이번 여행은 3주 가까이 되는 긴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한 권 이상 가져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여행이라 일정을 빡빡하게 잡은 탓이 크고, 긴 일정과 잦은 이동으로 짐을 최대한 간편하게 싸야할 필요성도 컸으며, 무엇보다 햇반과 김치, 라면에 가방의 공간을 상당부분 양보해야 했다.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고 오자는 작은 소망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겨우 현실화시킬 수 있었다. 그만큼 이번 여행은 빡빡했고, 또 체력적으로 많은 부담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곳을 다니면서 다양한 기억들을 남길 수 있었으니 ‘인생은 항상 트레이드 오프(trade-off)가 있다’는 격언이 이번에도 맞아떨어진 셈이다.

클라이브 제임스는 호주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비평가라고 한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2010년에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 중에 있으며, [죽음을 이기는 독서]는 [Latest Readings]라는 원제를 달고 2018년 출간됐다. 투병 중에도 끊임없기 독서를 해온 작가의 생각을 담은 에세이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시점에서 아직 사망하지 않은 작가에게 “숭고함”과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은 실례일 것 같다. 작가는 몸이 쇠약해진 투병 생활 중에도 독서 생활을 멈추지 않는다. 평생을 비평가로 활동해온 그가 나열하는 책의 제목들을 읽는 것만으로 숨이 찰 지경이고 그가 읽은 책의 10%도 들어보지조차 못했지만, 그가 묘사하는 책의 내용을 세심하게 따라가기 보다는 책을 읽으며 삶을 버티어내는 그의 자세에 조금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물론 그가 소개하는 책들 중에는 꽤나 높은 흥미를 느껴 리딩 리스트에 포함시키고 싶은 것들도 눈에 띈다. 서양인들에게는 거대한 트라우마로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는 히틀러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이 그렇고, 필립 라킨의 작품들이 그러하며, 나이폴의 책이 그러하다. (물론 클라이브 제임스가 찬양하는 책들 중 상당수가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어떤 책에 대해 떠들든, 그가 떠드는 모습 그 자체가 하나의 서사가 되고 작품이 되며 상징이 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된다.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한 지식인의 열정적인 마지막 모습들은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하는 나에게 좋은 지침서가 될 것 같다.

스위스-이탈리아 여행 중 비행기에서 본 영화들

2008년부터 올해까지 매년 최소한 두 번은 10시간 이상의 장거리 비행을 경험하고 있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공항과 좀 멀어질까 살짝 기대했지만, 출장이라는 예상치 못한 복병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줄은 몰랐다. 이후 신혼여행과 여름휴가 등으로 인해 지금까지 정기적으로 좁은 이코노미석에 몸을 구겨넣고 열시간 이상을 버티는 연습을 10년째 해오고 있다. 이쯤 되면 좋든 싫든 공항과 비행기 안에서 나름의 여유를 찾고 유희를 즐기는 법을 터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인간은 적응을 하게 되어 있으니까. 나는 비행운(飛行運)도 지지리도 없는 편이어서 장거리 노선 항공권을 무려 10년동안 지속적으로 구입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어느 한 항공사에 마일리지를 몰아서 쌓지 않았다. 어리석은 인류애를 바탕으로 여러 항공사에 마일리지를 고르게 나누어준 결과 남들은 한번쯤 경험한다는 비지니스석으로의 업그레이드를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몸을 구겨 넣는 연습을 계속 하는 가운데 어떻게든 즐거움을 찾아야 하는 셈이다.

나의 경우, 공항에서는 최대한 여유를 찾으며 쉬는 쪽을 택하는 편이고, 비행기 안에서는 잠을 청하기 보다는 이것저것 여러가지를 하며 즐기는 편이다. 면세점 구경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세금이라는 평생 따라다니는 족쇄를 일시적으로 풀어주는 대가로 소비의 노예로 기꺼이 전락하고 말겠다는 욕망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 욕망을 우아하고 아름답게 부추기는 면세점의 화려한 조명이 마치 미용실의 거울마냥 나의 현재를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대신 남들보다 훨씬 일찍 게이트 앞에 앉아 하염없이 멍때리는 쪽을 택한다. 기나긴 여정(=몸을 잘 구겨넣은 상태에서 아주 약간 허용된 자유공간을 최대한 허용하여 몸을 깔짝거림으로써 신체의 손상을 최소화시키려는 한 인간의 눈물겨운 노력)을 앞두고 심리적으로나마 최대한 안정을 취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결혼한 뒤부터는 이러한 루틴도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다. 면세점에서의 경제적 이득을 최대화시키려는 아내의 뒷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다보면 지금까지 면세점에서 아무것도 사지 않은 내가 세계에서 가장 멍청하고 충직한 세납자가 된 것 처럼 느껴진다. (나의 충성심에 대한 국가의 화답은 더 높은 근로소득세와 건강보험료뿐!) 심지어 현명한 소비를 오래전 체득한 아내는 그렇게 쌓아올린 인생에 대한 보답으로 획득한 고상한 신용카드를 사용하여 로마공항의 고급스러운 라운지에서 멍을 때릴 수 있는 기회까지 부여해주었다.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행해왔던 내 멍때림의 질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경제적 소비와 그 소비를 거부하는 행위 사이에 이렇게나 깊은 연관성이 있을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최근에는 비행기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늘어난 편이다. 국적기를 기준으로 인포테인먼트 화면도 많이 커졌고(심지어 요즘에는 터치도 된다!), USB 포트도 자리마다 마련되어 있어 휴대폰 충전도 가능하다. 인터넷이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휴대폰으로 음악을 듣거나 사진을 편집하거나 미리 다운받아온 신문을 읽을 수 있다. 10시간 정도 비행을 할 경우 이륙 두시간 후 첫번째 식사가 나오고 착륙 두시간 전 두번째 식사가 나온다. 비행기 안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이것저것 할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이 두 식사 시간 전후로 발생한다. 탑승한지 별로 되지 않아 체력과 의욕이 넘칠 때, 그리고 착륙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무릎을 펼 수 있다는 희망을 서서히 가지기 시작할 때 에너지가 가장 넘치는 법이다. 여기에 식사까지 제공해주니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밥을 먹으며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행위는 특별하다. 나는 지금까지 10여년의 장기 비행기간동안 기내식 선택에 있어 단 한번도 실패를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나의 감식안이 유난히 발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항공사 측에서 식사를 하며 영화를 보게끔 배려해주었기 때문이다. (몸을 구겨넣는 것에 익숙해지다보면 많은 것들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

잡설이 길었다. 인천공항에서 쮜리히공항으로 가는 길은 동행자가 세 명이었다. 아내와 아내의 아버지와 어머니. 이번 여행의 처음 열흘은 가족여행으로 계획되었고, 우리는 스위스의 이곳저곳과 이탈리아의 중요한 관광지를 돌아볼 생각이었다. 인천-쮜리히 구간을 운항하는 대한항공 항공기의 좌석구조는 3-3-3이고(그렇다. 여전히 이코노미석이었다. 죄송합니다 부모님..) 화장실 이용의 편리함을 위해 아내와 부모님을 가운데 3자리에 앉히고 나는 아내 옆 복도쪽 좌석에 앉았다. 좌섣배치가 이렇게 되고 보니 혼자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내기에 더할나위없이 좋은 환경이 주어진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인천에서 쮜리히로 가는 열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내가 선택한 첫번째 영화는 무려 [골든 슬럼버]였다. (..) 강동원의 억울한 표정이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아주 명쾌하고 단순한 영화다. 비행기에서 틀어주는 영화의 공통점이라면 안좋은 화질의 작은 화면으로 봐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어야 한다는 점, 대사가 잘 들리지 않아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어야 한다는 점, 중간에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려도 영화에 정신이 팔려 불안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내용이 빠르게 전개되어야 한다는 점 등이다. [골든 슬럼버]는 비행기 영화의 거의 모든 미덕을 갖추고 있는 영화다. 강동원의 길쭉한 팔,다리와 억울한 표정은 그 자체로 훌륭한 두시간의 킬링타임을 제공한다. 그 외에는 별달리 할 이야기가 없는 영화이기도 하다. 사실 한국영화는 비행기에서 유난히 선호되는 장르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자막을 읽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비행기에서 글씨를 읽는 행위가 얼마나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내가 선택한 두번째 영화는 [꾼]이었다. 이 영화 역시 현빈과 유지태라는 두 명의 훌륭한 기럭지를 자랑하는 배우의 패션쇼 외에는 할 이야기가 별로 없는 영화다. 플롯은 엉성하고 조연들의 캐릭터는 일차원적이다. (나나를 거의 활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가슴속 한켠에 분노가 치밀어오르기도 했다) 극장에서 봤다면 상당한 허탈감을 느꼈겠지만, 비행기 안이라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 유지태와 현빈이 눈을 부라리며 서로를 응시하는 장면만으로 시간의 낭비를 꽤나 잘 하고 있다는 우월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보통 영화를 연달아 두 개 쯤 보고 나면 눈과 귀가 피로해진다. 이 시점에서 많은 승객들은 잠을 청한다. 항공기 측에서 조명을 꺼주기 때문이다. 창문은 강제로 닫혀졌고 불도 꺼졌으니 몸을 구기고 앉은 승객에 남아있는 옵션은 잠을 청하거나 책을 읽는 것 정도인데, 여기서 활자를 굳이 꺼내 읽는 용감한 승객은 굉장히 드문 편이다. 나는 이 시점에서 랩탑을 켜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 잠들지 않은 친정 부모님께 ‘쇼잉’을 하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덕분에 외부 청탁 원고의 초고를 완성할 수 있었고, 나는 자랑스럽게 랩탑을 덮으며 영화가 아닌 스포츠 카테고리로 눈을 돌렸다. 대한항공의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에는 외국인 승객을 위해 마련된 듯 보이는 예상 밖의 훌륭한 컨텐츠가 가끔 들어있다. [NFL 결승전 2018] 역시 철저히 외국인 승객을 위해 준비된 다큐멘터리 필름이다. 한국어 자막이 있긴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대사는 번역되지 않았다. “자, 이제 힘을 내자구!”처럼 굳이 하지 않아도 괜찮은 대사들만 억지로 번역이 되어 있었다. “4th down conversion에서 와일드캣(Wilde Cat) 포메이션을 구사하는군요”와 같은 대사는 번역가에게 너무나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글스의 역사적인 수퍼보울 퍼포먼스는 백업 쿼터백을 데리고 탐 브래디와 빌 벨리첵을 상대로 거둔 승리이기에 더 값져보였다. 우리 브롱코스도 케이스 키넘이 아닌 닉 폴스를 데려왔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다. 이 다큐멘터리와 커플처럼 존재하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컨텐츠는 [샤크 vs 코비] 인터뷰 필름이었다. TNT 농구중계방송 패널로 참여하고 있는 샤킬 오닐이 코비 브라이언트의 은퇴를 기념하여 인터뷰어로 나선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샤킬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는 레이커스를 여러차례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팀 동료로서 좋은 캐미스트리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두 명의 수퍼스타는 그러한 과정에 대해 가감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에 서로를 질투했지만 그와 동시에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존경심 역시 숨길 수 없었던 두 명의 고백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시끄러운 비행기 안에서 듣는 샤킬 오닐의 웅얼거리는 듯한 발음은 정말 참기 어려웠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법정 영화 [세번째 살인]은 여행을 떠나는 비행기와 여행에서 돌아오는 비행기를 연결해주는 작품이다. 나는 이 영화를 착륙하기 두시간 전 쯤 보기 시작했고, 30분 정도 시청하다 그만 잠들고 말았다. 부모님 앞에서 너무 열심히 일한 탓에 미처 눈을 붙이지 못했기 때문에 피로가 몰려온 것 같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첫번째 영화로 [세번째 살인]을 다시 택한 것은 옆자리에 앉아 [블랙팬서]를 시작한 아내에게 내가 결코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세번째 살인]의 지루한 초반 전개과정을 무사히 넘기고 플롯이 뒤엉키며 급변하기 시작하는 후반부를 무사히 맞이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가족영화의 범주에서 탈출해 만든 첫 영화이지만, 그가 결코 가족이라는 테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증명한 영화이기도 하다. 스릴러의 구조를 택하고 있지만 긴장감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며, 완전한 형태의 가족의 모습이 한차례도 등장하지 않지만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의 관계와 위로, 보상과 같은 고레에다 특유의 세계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묘한 영화다. 고레에다는 결국 이 영화의 다음 작품으로 [어느 가족]을 만든다. ‘역시 안되겠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깊게 본 영화는 [더포스트]였다. 매릴 스트립과 톰 행크스, 그리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언론과 언론인에 대한 영화라는 한 줄의 묘사만으로 그야말로 모든 상투성의 집합소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영화는 놀랍게도 묵직한 감동을 무리없이 전달하는데 성공한다. 서사 자체는 뛰어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하다. 뉴욕 타임즈에 밀려 유력 지역신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던 워싱턴 포스트가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되는 특종을 잡아내는 비결은 정론보도라는 간단한 진리였다, 라는 아주 스필버그적이며 아주 미국적인 주제의식. 정작 나를 감동시킨 건 이걸 ‘영화적’으로 탈바꿈시키는 장인들의 솜씨였다. 스필버그는 한 씬, 한 컷도 낭비하지 않는데 심지어 사소한 카메라워크까지 모두 서사와 주제를 위해 치밀하게 사용하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매릴 스트립과 톰 행크스는 마치 연기란 이런 것이다, 를 강의하는 듯 교과서적인 움직임을 흐트러짐 없이 보여준다. 아마도 그 해 최고의 영화로는 절대 뽑히지 못했겠지만, 아무도 이 영화를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행기에서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보리 vs 매켄로]였다. 역사적인 1980년 윔블던 남자단식 결승전을 소재로 만든 영화인데, 상반된 캐릭터를 지닌 두 뛰어난 테니스 선수가 서로를 마주하는 자리까지 가는 과정에서 자신 안에 숨겨져 있는 상대방의 모습을 발견해가는 이야기다. 경기 장면은 그다지 역동적으로 찍히지도 않았고 재미도 없다는 점에서 스포츠 영화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극한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내면을 세밀히 관찰한다는 점에서 차라리 심리 관찰물에 가까운 영화처럼 느껴졌다. 다만 회상씬이 너무 빈번하게 등장하고 예선전부터 결승전까지 올라가는 과정이 아무런 변화없이 똑같은 형식으로 그려져서 영화는 많이 지루한 편이다. 샤이아 라보프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굳이 고백이란걸 해보자면,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깊게 본 컨텐츠는 [코리안 뉴웨이브(뮤직비디오)]였다. 2008년 유럽 배낭여행 이후 가장 길었던 여행을 끝내고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는 길, 착륙을 약 한시간 정도 남기고 선택할 수 있었던 최상의 컨텐츠였다. 주로 아이돌 음악의 뮤직비디오가 나왔는데, 한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거의 대부분의 아이돌 음악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남자 아이돌 음악의 뮤직비디오에는 상대 여성이 등장하는 반면 여성 아이돌 음악의 뮤직비디오에는 상대 남성 배우가 등장하지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트와이스(Twice)의 신곡 “What is love?” 뮤직비디오다.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형이상학적인 사랑이 아니라 정말 그냥 십대의 사랑, 그런 느낌의 가사다) 뮤직비디오에서 상대 남성의 역할은 여성 멤버가 남장을 하고 대신하고 있다. 이들이 크로스드레서나 여성 동성애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문근영의 남장을 보는 듯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지?’ 정도의 느낌. 그와 함께 자본이 집중적으로 투입되는 아이돌 음악과 그렇지 않은 성인 발라드(?) – 이것을 ‘코리안 어덜트 컨템프로리’라고 표현하자 – 사이에 이젠 질적인 격차가 확연히 느껴진다는 점도 발견했다. 후자의 경우 저옛날 SG워너비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뮤직비디오조차 그렇다. 놀라울 정도로 시대착오적이었다.

허주영 엮음 | 성매매 안 하는 남자들

성매매 안 하는 남자들 표지
이 책은 2016년 시작된 ‘수요자 모임’에 참석한 남성들이 성매매와 관련된 각자의 사연들, 주장들, 혹은 상념들을 풀어놓은 에세이 모음집이다. ‘수요자 모임’은 성매매의 공급 측면이 아닌 수요 측면의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2016년 만들어진 일종의 토론 모임으로, 이 포럼의 참가자는 대부분 성매매 경험이 없는 남성들이라고 한다. 이 책에 의하면, 참가자들은 함께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거나 특정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하는 방식으로 우리나라 성매매 시장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공유해오고 있다고 한다.

각종 통계자료에 의하면 한국 남성 중 약 절반 정도가 성매매 경험이 있고, 한국의 성매매 시장 규모는 1년에 (보수적으로 추산해도) 약 6조원 정도 규모로 국내 커피시장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한국인 중 성매매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되지 않은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성매매는 남·녀 간 젠더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데, 왜냐하면 통계적으로 성매매의 수요자-공급자 관계가 남-녀 관계로 고정될 때가 많으며, 성매매 거래의 특성 상 육체의 직·간접적 통제와 구속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기 때문에, 사회에 만성적으로 퍼진 성매매 문화가 남·녀 간 젠더 불평등성 심화에 미치는 영향이 존재한다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책 [성매매 안 하는 남자들]의 배경이 되는 ‘수요자 모임’은 기본적으로 성매매로 인해 피해를 받는 여성을 보호하고자 하는 성매매 반대운동의 기본적인 목적에 더해 성매매를 구매하는 남성의 자발적인 반성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양성 평등적 가치 아래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성매매가 만성화된 한국사회에서 성매매를 ‘자발적으로’ 하지 않은 남성들이 갖는 상식적 수준의 합의를 무난하게 이끌어내고 있다. 이 책은 성매매 합법화 반대 논리가 지나치게 귀납적이고 추상적이며 윤리적인 차원에 갇혀 있다는 비판과, 그 비판에 논리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주최측의 한계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군대에서 흔히 받게 되는 성매매 유혹이나 이후 사회생활에서 강요받게 되는 ‘2차’ 문화 등을 개인적 차원의 ‘위기’로 인식하고 이를 나름 슬기롭게 피해다녔다고 생각하는 나 조차 한국의 성매매 산업을 너무 얕게 이해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의 말처럼,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멍청해서, 혹은 젠더 감성이 부족해서 성매매를 합법화시킨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성매매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성적 불평등 현상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사회적 모럴을 가지고 있었기에 시장논리 아래 탄생할 수 밖에 없는 그 산업을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변질된 유교문화의 압박 속에서 여성이 누리는 사회적 지위는 유럽국가들보다 한참 뒤처져 있다. 성매매의 변질된 형태가 직장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폭력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이런 사회에 존재하는 성매매 산업은 다른 시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흔히 성매매에 찬성하는 남자들은 “못생긴 남자는 어떻게 푸냐?”는 주장을 한다. 여성에게 충분히 성적인 어필을 할 수 없는 남자는 돈을 지급하고 시장에서 성을 구매할 수 있게 허락해야 한다는 논리다. 나의 답은 조금 다르다. “섹스를 못(안)하시면 됩니다” 못생긴 수컷은(혹은 암컷은)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평생 짝짓기를 한 번도 하지 못하고 생명을 다하는 동물도 많다. 그리고 이것은 시장의 법칙이기도 하다. 매력이 없는 상품은 팔리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고, 팔리지 않는 것이 맞고, 팔리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상품의 경쟁력을 제고하고 산업의 경쟁력을 제고하고 나라의 경쟁력을 제고하는 가장 쉬운 법칙이다. 이걸 정부가 인위적으로 나서서 구제해 줘도 괜찮을 정도로 성적 평등성에 대한 우리사회의 모럴이 엄청 단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대기업에 들어가냐?”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이 사람이 돈을 내면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는 시장이 존재하는가. 평생 대기업에 들어가지 못하는 쪽이 더 자연스럽다. 성욕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에 정부가 관심을 더 가져야 한다는 주장… 을 백번 수용한다고 해도, 쌍방의 육체적 관계를 전제로 하는 성관계를 합법화해야 한다는 주장까지는 갈 길이 멀다. 우리나라에서는 말이다.

이명옥·김동훈 | 이명옥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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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 시절 자주 들락날락거렸던 동네 서점이 하나 있다. 영어로 쓰인 책을 빨리 읽지도 못하면서 그 곳을 자주 찾았던 이유의 절반은 (당연히) 허세였고, 나머지 절반은 한국의 서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분야의 서적들에 대한 흥미로움이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분야는 역사쪽이었다. 그 서점의 역사 코너는 꽤나 자세히 세분화되어 정리되어 있었다. 전쟁사(戰爭史) 부분이 따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흥미로웠고, 한 인물에 대한 평전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대형 서점에서 역사 서적들이 어떻게 몰개성화된 상태로 전시되어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더 나아가 한국과 미국이 가진 역사의 물리적 ‘시간’만을 고려한다면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국 사람들이 역사 분야에 보여주는 열정은 한국보다 더 뜨거워보였다.

그 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계속 잡아 끌었던 부분은 한국에서는 그 개념도 생소한 가족사(家族史) 코너였다.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인물부터 전혀 그렇지 않은 인물까지 다루고, 짧게는 한 세대부터 길게는 몇 세대를 아우르는 긴 시간까지 포괄하는 등 이 분야가 가지는 범위의 확장성도 놀라웠지만, 그 가족을 둘러싼 이야기만으로 하나의 역사 서적이 완성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당시 나에겐 획기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내 곧 이러한 가족사적 담화가 매우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가족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나가다 보면 그 가족을 둘러싼 환경이 보인다. 가족의 구성원이 대물림되며 핏줄이 이어지는 과정을 따라가다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대의 변화상이 보인다. 통계수치나 전쟁같은 거대담론만을 나열하면 절대 발견할 수 없는 역사의 미시적 변화상은 시대를 직접 살아낸 민초 개개인의 삶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고, 그러한 미시적 역사를 정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가 가족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가족이 평범하면 평범할수록 거시적-미시적 역사의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있는 훌륭한 케이스 스터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어머니와 고속버스를 타고 하동에서 서울까지 함께 올라온 적이 있다. 네시간 가까이 되었던 그 시간동안 어머니로부터 외갓집 식구들의 역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 이후 시간이 꽤 흐른 뒤에야 당시 어머니의 목소리를 녹음해둘걸,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이후 지금까지, 기회가 허락된다면 어머니의 회고를 녹취해서 글로 풀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해왔다. 어머니의 기력이 쇠해지는 모습이 최근 눈에 띌 정도로 확연히 느껴지는 최근 그러한 생각이 더 강해지고 있다. 어머니의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 지금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녀가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과 어머니 그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의 완성된 글로 정리하여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평생 조연으로, 조력자로만 살아온 삶이기에 더 그런 것 같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한국에 또 있었나보다. [이명옥 회고록]은 공주와 대전, 경기도 광주 등에서 살아온 ‘평범한’ 여자 이명옥이 그녀의 아들 김동훈과 행한 인터뷰를 글로 정리한 책이다. 이 책에서 이명옥은 자신의 삶과 함께 주로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그녀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홀홀단신 넘어와 맨주먹 하나로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일구어냈다. 이명옥의 증언대로 그녀의 아버지가 유독 가족에 집착하며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었던 것은 그가 탄생시킨 가족이 또 누구로부터도 이어받지 않은, 온전히 그와 그의 아내(이명옥의 어머니)가 0의 상태에서부터 만들어낸 가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가족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 시대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이명옥이 어린 시절을 보낸 대전의 판자촌부터 이명옥의 아버지가 숨을 거둔 서울의 지하철까지, 영화보다 더 극적인 삶의 순간들이 숨쉬는 일만큼 평범한 일상 속에 고르게 펴 발라져 있다.

이명옥의 담담한 말투가 상상될 정도로 평온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이 짧은 책은 그녀가 10여년간 모시고 살아온 시어머니의 죽음 장면에 이르러 짤막한 절정과 시큰한 감동을 선사한다. 먹고 살기 위해 젊음을 희생하고 낭만을 포기했던 나의 윗 세대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격한 감정의 파고는 아마도 부모의 죽음이 아니었을까. 나는 평생 무뚝뚝하게 가족을 대해온 아버지가 내 앞에서 처음으로 흘린 눈물을 아직도 기억한다. 할머니의 시신을 염하는 장소였다. 차마 가까이 다가가 마지막 인사를 하지도 못하고 귀퉁이 어딘가에 기대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아버지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이후로 다시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해서 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명옥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길거리에서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죽음을 묘사하며 “걔들(이명옥의 손자·손녀를 가리킨다) 보면 얼마나 예뻐하셨을까” 안타까워 하면서도 “시간이 다 그렇다”며 너무 일찍 떠는 부친을 향한 그리움을 애써 시간 속으로 묻어버린다.

기쁨과 슬픔을 억누르며 살기를 강요받아온 윗 세대가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소중한 것들과 이별을 해야 할 때, 그들은 마치 감정을 능숙하게 다루어온 장인처럼 행세하려 한다. 그 모습이 참으로 애처롭고 애닲게 느껴져 조용히 어루만져 주는 일은 그들을 바라보는 자녀들의 몫이다. 이 책은 그러한 어루만짐이 느껴져서 좋았다. 작가 김동훈은 아주 간단한 질문을 던지는 것 만으로 평범한 사람 이명옥의 특별한 삶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다. 마음을 가만히 움직이는 좋은 책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