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Coltrane | Both Directions at Once: The Lost Album

지난 해 가장 즐겨 들었던 음반이지만 블로그에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 음반이 하나 있다. 작년 재즈씬 뿐 아니라 음악계 전체를 들썩이게 만든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의 신작 [Both Directions at Once: The Lost Album]은 음반 제목에서 추측할 수 있듯 1963년 녹음된 이후 50여년 넘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묻혀 있다 2018년이 되어서야 공개된, 기적과 같은 작품이다. 이 음반은 1963년 3월 6일, 뉴저지 주의 반 젤더 스튜디오(Van Gelder Studio)에서 녹음되었다. 존 콜트레인이 색소폰을 연주했고, 1963년 당시 콜트레인과 함께 했던 그 유명한 “Classic Quartet” 멤버인 지미 개리슨(Jimmy Garrison, double bassist), 엘빈 존슨(Elvin Jones, drummer), 맥코이 타이너(McCoy Tyner, pianist)가 함께 했다. 녹음 이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임펄스 레코드(Impulse Records)에서 음반의 마스터 테잎을 파괴했고, 콜트레인은 반 젤더 스튜디오에서 개인 감상용으로 받은 복사본 중 하나를 그의 첫번째 아내인 주아니타 나이마(Juanita Naima)에게 주었다. 2005년, 건지 경매회사(Guernsey’s auction house)에서 콜트레인과 관련된 물품으로 경매행사를 주최하였고, 이 행사에서 복사본의 판권 및 저작권을 획득한 반 젤더 스튜디오와 프로듀서 켄 드러커(Ken Druker), 콜트레인의 아들 래비(Ravi) 콜트레인은 합심하여 이 음반을 완성시키기로 결심한다. 루디 반 젤더가 믹싱을 담당했고, 미국음악사가 애슐리 칸(Ashley Kahn)이 음반의 라이너 노트를 집필했다.

음반은 총 7개의 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Vilia”를 제외한 모든 곡이 전에 공개된 적이 없는 신곡이다. 음반이 최초 공개된 것은 2018년 6월이지만, 지금에 와서 이 음반이 개인적을 새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최근 발매된 콜트레인의 다른 음반 [Coltrane ’58: The Prestige Recordings]를 최근에 듣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58년에서 63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콜트레인은 상당히 흥미롭다. 1958년은 콜트레인이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하던 시절이다. 음악사에 가장 중요하게 기록될 음반 중 하나인 [Blue Train]이 발표된 해이고, 텔로니어스 몽크와의 협업 등을 통해 발전된 특유의 코드 진행 방식인 “Coltrane changes”이 형식적으로 완성된 해이기도 하다. 최근 발표된 58년 음반은 그래서 그런지 무척 감미롭고 여유롭게 들린다. 콜트레인의 미적 감수성이 극대화되어 안정적인 코드 진행 속에서 마음껏 뛰어논다. 춤으로 치면 왈츠나 발레가 떠오른다. 1963작은 이와 여러가지 측면에서 대비된다. 음반의 타이틀곡인 “Impressions”의 첫소절을 들으면 정신이 버쩍 든다. 음반의 모든 부분에서 콜트레인의 광기가 펄떡거리고 있다.음반은 그의 정규음반들과 달리 정제되어 있지 않고 거칠게 진행되지만, 음반 전체에 살아 숨쉬는 생명력 만큼은 어느 정규음반 못지 않게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춤으로 치면 열정적이고 즉흥적인 탭댄스가 떠오른다. 1965년부터 콜트레인은 아방가르드 재즈에 대한 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데, 이 1963년 녹음은 그러한 콜트레인의 변화하는 감수성을 발견할 수 있는 소중한 사료이기도 하다. 여러 부분에서 밴드는 쉬지 않고 실험을 한다. 가끔은 그 실험이 너무 난해하게 느껴지고 가끔은 그 과정에서 성긴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콜트레인 역사의 ‘missing link’를 발견한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재즈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최소한 콜트레인은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뮤지션으로 남아 있다.

세종시 생활 1년

세종시에 전세집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선배 교수님들께 처음 전해드렸을 때 그 분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출퇴근하기에 너무 멀지 않겠어요?” 나는 “차로 30분 정도 걸립니다”라고 답변드렸지만, 반응은 달라지지 않았다. “30분이면 너무 오래 걸리는데…” “세종시 갔다가 너무 힘들어서 (대전으로) 돌아온 교수님들도 많더라구요” 세종시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를 재어 보았다. 20키로 쯤 나왔다. 서울에 살 때 금호동 집에서 여의도 직장까지 거리를 재어 보았더니 16키로 쯤 나왔다. 여의도 회사에서 자동차로 집까지 퇴근할 때 걸렸던 시간은 최고 70분 정도였다. 평소에는 한시간 정도면 집에 올 수 있었고,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한 시간 남짓 걸렸다. 세종시에서는 금요일 저녁 6시 정각에 학교에서 나선다고 해도 35분이면 집에 도착한다. (퇴근시간대 대전의 교통량에 대한 출신 지역에 따라 조금 상이하다. 여기 사는 분들은 “몹시 막힌다”고 표현하지만 나는 “통행량이 조금 많은 정도”라고 주장한다) 요즘에도 가끔 교수님들이나 학교 동료들이 물어본다. 출퇴근이 힘들지는 않냐고. 요즘에는 “그럭저럭 다닐만 합니다” 하고 가볍게 뭉뚱그린다.

위의 예는 ‘서울과 지방’이라는 약간은 과격한 이분법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주된 패러다임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다. ‘서울에 살지 않는 사람은 모두 지방 사람’이라는 이 논리는 사실 정당하지 않은, 어찌 보면 매우 ‘후진’ 주장이지만 그렇다고 이 논리가 비현실적이라고 부정하기에는 서울이 가진 위상이 너무 남다르다. 서울은 좁고 밀집되어 있다. 지방은 널찍하게 퍼져있다. 이렇게만 보면 지방이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것처럼 느껴지지만, 서울이 가진 살인적인 ‘밀집도’는 거기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도시로 만들었다. ‘효율적’이라는 표현에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서울 지도를 펼쳐놓고 지하철 노선과 기간 도로의 배치, 주요 상권과 관공서, 주요 업무지구의 배치를 살펴보면 에너지의 집중과 분산이 몹시 효율적으로 배분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도시설계 전문가는 아니지만, 직관적으로 서울의 자원분배가 효율성 우선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형평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서울 안에서도 특정 지역에 사람과 돈, 문화와 창조성이 집중되어 있다. 서울은 지난 600여년의 역사를 거치며 철저하게 스스로를 다른 지역과 고립시켜 왔고, 심지어 그 안에서도 끊임없이 계급을 분화해 왔다.

심지어 요즘에는 비슷한 몸집을 지닌 세계적인 도시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깊이까지 갖추게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스페셜티 커피를 파는 집은 서울에 있을 확률이 가장 높다. (아닙니다 부산에 있습니다) 세계적인 수준의 프랑스 요리나 일식 요리를 먹고 싶다면 굳이 빠리나 도쿄로 가지 말고 서울로 가면 된다. 지금 가장 핫한 미국의 인디 뮤지션이 궁금하다면 6개월만 꾹 참고 기다리면 된다. 국내 에이전시가 서울의 작은 공연장에 그 뮤지션을 대령해 놓을테니까. 서울은 한국사회의 모든 에너지원을 독점하며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했다. 서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다른 도시와의 차별점을 굳이 꼽자면, 국내에 서울의 경쟁자가 전무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서울은 한국사회의 편애를 잔뜩 받고 자란 외동아들과 같은 존재다.

이런 서울을 고향으로 하는 나는, 서울을 벗어나 살기 전까지 스스로를 서울 안의 작은 구역에 가두며 정체성을 만들어왔다. 즉, 서울을 다시 잘게 쪼개기 시작한 것이다. ‘강남 3구’는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압구정동은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가봤다. 서울의 다른 지역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강동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딱 한 번 가봤다. 노원구에 사는 친구를 만나지 않았다면 노원구와 강북구, 중랑구에는 결코 가보지 못했을 것이다. 양천구와 강서구는 아직도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다. 나는 종로구와 마포구, 서대문구에서만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커왔다. 그런데 서울을 벗어나 살아보니 그 모든 정체성이 다 부질없어 보이기 시작했다. 대전에서, 나는 ‘서울에서 온 사람’일 뿐, ‘마포구에서 온 사람’으로 구체화되지 못했다. 그 누구도 나에게 “어디에서 오셨어요?” 라는 질문 다음에 “그래서 서울 어디서 오셨냐구요?”라고 이어 묻지 않았다. 내가 세종에서 산 1년여의 기간동안 얻은 가장 큰 레슨이 이것이다. 서울 사람은 서울이 전부인 줄 안다. 하지만 서울 밖에서 살다 보면, 서울이 한국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24시간 내내 체감하게 된다. 서울 사람들에게 서울 외의 지역은 가끔 놀러 가는 경치 좋은 곳이거나 특이한 음식을 파는 맛집이 있는 곳, 혹은 명절 때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친척이 사는 곳 정도로 인식되겠지만, 그 곳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그저 또다른 서울’일 뿐이다. 지역 주민에게 삶의 중심은 그 지역이고, 그 지역의 일정 반경을 벗어나면 거기서부터 ‘지방’으로 인식된다. 사실 그렇게 인식되는 것이 맞다.

문제는 서울과 서울 외 지역 간 격차가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 외 지역에 사는 이들이 그 지역을 중심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으며, 서울을 중심으로 놓고 자신과 자신이 사는 지역을 주변으로 놓는 인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서울과 지방’ 문제가 일차원적이지 않은 이유다. 이 ‘격차’는 앞서 표현한 에너지의 격차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격차는 앞으로 점점 벌어질 일만 남았다. 지금과 같은 낮은 성장률이라면, 특정 기간산업에 집중하여 수출을 통해 성장률을 떠받드는 국가전략을 고수한다면, 서울에 모든 기관과 기업이 모여 있고 그 에너지의 흔적이라도 받아 먹기 위해 다른 모두가 서울로만 모여든다면, 서울 외의 모든 지역은 지속적으로 뒤쳐질 수 밖에 없다.

이 거대한 흐름을 조금이라도 바꾸어보려고 만든 여러 정책 중 유일하게 실패라고 낙인찍히지 않은 것이 바로 세종시다. 어떻게 보면 지방균형발전을 위한 마지막 실험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곳은, 아직 많은 것이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기에는 상당히 많은 요소들이 빈칸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2019년 3월 기준 세종시의 인구는 약 32만명인데, 이중 약 28%가 수도권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62%는 대전과 충청도 등 충청권에서 유입되었다. 정부에서 작정하고 키우려고 하는 도시이니 그동안 부동산 광풍 등 ‘돈벌이’에서 소외되어 온 충청권 주민들이 먼저 반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충청권의 한계적인 인구를 감안할 때, 수도권에서 지속적인 유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2030년 목표로 잡은 80만명의 인구를 채우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수도권에서 열 개가 넘는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매 블록마다 있는 스타벅스를 바라보던 이들이 세종시로 올 수 있을까? 삼성과 엘지, 국회와 청와대가 서울에 가만히 버티고 있는데 기차와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두시간 쯤 걸려 서울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의 신도시에 호기롭게 내려올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처럼 운이 좋게 좋은 직장이라도 구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지만, 대규모의 인구 이동을 유인할 만큼 ‘질 좋은’ 일자리를 세종시에서 얼마나 많이 창출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이 물음표로 남아 있다.

조금 덜 거창하게 이야기의 차원을 좁혀 매일 매일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 곳에서 꽤 만족하며 살고 있다. 물론 여전히 서울에는 때때로 올라간다. 나의 모든 친구들이 그 곳에 있고, 많은 공연이 그곳에서 열리며, 심지어 내가 사고 싶어하는 물건을 파는 백화점도 서울의 강남구에만 있다. 하지만 대전의 신도심과 세종시를 오며가는 일상의 삶 속에서 ‘후회가 들 정도’의 심대한 불편함은 거의 찾을 수 없다. 물론 생활이 조금 느려지는 측면은 반드시 존재한다. 예를 들어 대전의 큰 병원을 한 번 가려고 해도 반드시 차가 필요하다. 학교에서 퇴근 후 교수님들과 한 잔 하려고 하면 시간을 계속 확인해야 한다. 버스가 일찍 끊기기 때문이다. 이마트라도 한 번 다녀오면 장바구니는 가득 차 있고 하루 반나절이 지나가 있다. 퇴근길에 잽싸게 백화점 식품코너에 들려 그날 그날 먹을 것을 사던 서울생활과 확실히 다르다. 하지만 ‘시간의 느려짐’은 어찌 보면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축복이다. 서울의 경쟁에서 자발적으로 탈출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나는 서울에서의 탈출을 어느 정도 즐기고 있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의 단지 내부에는 자동차가 다니지 않아 아이들이 맘 놓고 뛰어 놀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한 낮에 창문을 열어 놓으면 아이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자동차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쓰레빠를 끌고 어슬렁 바깥으로 나가면 공차부터 베스킨 라빈스까지 많은 거대자본 점포들이 눈에 보인다. 특색 있는 소규모 자본의 성업을 벌써부터 바라는 것은 무리가 있다. 아직 역사가 10년도 되지 않은 도시다. 도시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기 전의 대규모 거주지역은 거대 자본의 놀이터가 될 수 밖에 없다. (서울의 대부분의 지역 역시 마찬가지다. 마포와 용산, 강남의 일부분을 제외하고 그 지역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몇이나 되는가? ‘~리단길’은 왜 그리도 많은지, 자기 지역 다운타운의 별칭 하나 자신 있게 짓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걸어서 10분 거리에는 공원이 두세개 정도 위치해 있어 쉽게 흙밭과 숲길을 걸을 수 있다. 차를 타고 조금만 나가면 (그 어떤 시간대에도 절대 막히지 않는다. 뭐 ‘통행량’이 많을 수는 있겠지만..) 좋은 숲과 절 등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많아서 도시에 활기가 넘친다. 서울 사람들의 눈에는 상가 공실도 많고 차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 ‘죽은 도시’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이를 낳지 않아 실제로 ‘죽어가는’ 서울보다는 훨씬 생명력이 넘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는 서울로의 재진입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이유는 ‘연고’ 때문이다. 처음 대전으로 내려간다고 할 때 많은 이들이 그곳에 연고가 있는지 걱정했다. 어느 정도의 두려움은 있었지만 그것이 어떤 결정의 결정적 이유가 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고는 상당히 중요하다. 지역에 연고가 있다는 것은 ‘연대’로의 이행이 그만큼 쉬울 수 있음을 의미한다. 세종시가 아무리 도시 설계가 잘 되어 있고 쾌적한 환경을 제공한다고 해도, 그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이 나의 실제적인 이웃이 될 수 없다면, 이 도시가 나에게 아주 깊은 유대감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세종시에서 ‘좋은 이웃’을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다. 아내는 친구를 한 명 사귀었고, 오랫동안 온라인상으로 알고 지낸 분의 가족과 식사도 함께 했다. 단골 커피숍도 생겼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우리 부부가 아이를 낳고 키우며 장기간 삶을 지속하고자 할 때 이 곳이 최선의 선택인지에 대한 확신이 아직은 들지 않는다. 조금 더 우리 부부에게 익숙한 공간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고, 그 익숙한 공간에서 많은 친구들과 서로 의지해가며 삶을 이어나가고 싶다. 우리가 말버릇처럼 “친구 아무개만 이 곳으로 이사오면 서울은 꿈도 꾸지 않을텐데” 라고 농을 주고 받는 것도 이때문이다. 너무 나약한 말일수도 있겠지만, 세종시가 심리적으로 아주 조금 답답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 가족이 확장할 수 있는 여력이 그리 많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주 친밀한 이웃 두어 가족 (더!). 지금 이 도시에서 우리가 찾고 있는 퍼즐조각이다. 이 조건만 만족된다면, 좋은 직장과 쾌적한 주거 환경이라는 기본 전제조건과 함께 우리 부부는 세종시를 서울의 대안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Jenny Lewis | On the Line

결혼 전, 여의도에 있는 회사에서 근무할 당시 나는 돈을 멍청하게 낭비하는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셔츠 빨래가 귀찮아 세탁소에 열 장이 넘는 셔츠를 한꺼번에 맡겨버리는가 하면 아무 이유 없이 “내가 쏜다!”를 외치기도 했다. 그 중 제일 가관이었던 낭비는 퇴근 길 싱글몰트 바에 들려 한 잔에 몇 만원씩 하는 위스키를 마시는 일을 ‘루틴’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친해진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당시 자주 듣던 음악을 바에서 틀곤 했는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순간은 제니 루이스(Jenny Lewis)의 [The Voyager] 를 듣던 어느날 밤이다. 당시에도 제니 루이스는 완벽했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점이 하나 있는데, 제니 루이스는 첫번째 음반 [Rabbit Fur Coat]부터 [Acid Tongue], [The Voyager]까지 단 한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국인 중 제니 루이스를 ‘최애’로 꼽는 이는 극히 드물겠지만, 최소한 그녀의 음악은 항상 기대 이상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개인적으로는 2008년 유학을 시작하던 시기부터 지금까지 인생의 변곡점을 함께 해온 뮤지션이라는 점에서 조금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그녀는 무척 ‘미국적’이지만, 그래서 한국인들에게는 ‘잘 팔리지 않는 메뉴를 고집하는 원테이블 레스토랑 사장님’같은 느낌으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지만, 그녀의 그런 ‘미국스러움’은 내가 사랑하는 미국의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뮤지션이기도 하다.

제니 루이스의 네번째 솔로 음반 [On the Line]은 마흔을 넘긴 뮤지션이 속한 장르를 극적으로 바꾸지 않은 채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는 놀라움을 선사하는 뛰어난 작품이다. 컨트리와 포크의 자기장 안에서 여전히 아주 전통적인 미국적 사운드를 들려주지만, 그 안에서 끊임없이 자기 성장을 하기 위해 노력해온 그간의 성과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느낌이다. NME와의 인터뷰 영상에서 진행자가 루이스를 “legendary” 라고 소개하는데, 이제 그 표현을 거리낌 없이 그녀의 이름 앞에 붙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확신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 음반에 수록된 “Do Si Do” 때문이다. 제니 루이스는 이번 음반 작업을 벡(Beck), 라이언 아담스(Ryan Adams) 등과 함께 했는데, (전설 링고 스타도 음반에 참여했다) 그 과정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진짜 락앤롤 음악을 처음 했던, 에너제틱하면서도 편안했던 작업”이었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거듭 강조했다. “Do Si Do”를 듣다 보면 뜬금없이 “rock and roll” 이라는 가사가 튀어 나온다. 거기서 느껴지는 묘한 카타르시스가 있다. 사운드는 더 없이 탄탄하고 그 위에 얹힌 루이스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단단하다. 유년 시절부터 끊임없이 미디어에 노출되고 그룹 활동과 여러 프로젝트 작업을 거친 베테랑 뮤지션이 갑자기 당당하게 이제 나는 록음악을 합니다, 라고 선언하는데 그 아우라가 대단하다. 이제 그녀는 새로운 경지로 나아갔다. 음반에는 “Do Si Do” 외에도 좋은 곡들이 무척 많다. 들으면 들을수록 감탄이 나올 정도로 거의 모든 곡들이 매끄럽고 단단하다. 십년 넘게 함께 해온 뮤지션이기에 그저 음악을 계속 해주는 것만으로 고마운데, 심지어 매 음반마다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존경심마저 우러 나온다. 더이상 벤 기바드(Ben Gibbard)와 찰랑거리는 사랑-이별 노래를 부르지는 않지만, 그 시절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성숙한 음악을 계속해서 공급하고 있다.

Stella Donnelly | Beware of the Dogs

호주(Australia) 출신 뮤지션 스텔라 도넬리(Stella Donnelly)의 첫번째 정규 음반 [Beware of the Dogs]는 기쁘지만 슬프고, 유쾌하지만 우울하고, 반갑고 소중하지만 답답하고 미안한 음반이다. 2019년 참 좋은 음반과 뮤지션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어서 기쁘지만 다시는 나오면 안되는 음반이기에 슬프고, 음반 곳곳에 깃든 그녀의 유머러스한 모습에 유쾌해지지만 그 밝은 표현이 성폭력과 성차별, 남성우월주의 등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에 우울해진다. 그래서 반갑지만 답답하고, 소중한 음반이지만 동시에 미안해지기도 하는 음반이다.

스텔라 도넬리는 2017년 그녀의 첫번째 EP [Thrush Metal] 을 발표할 당시 호주의 한 펍에서 접시를 닦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그녀는 “10명보다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게 될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고, NPR Tiny Desk Concert 에서 공연하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두고(하지만 절대 이루어질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채) 살고 있었다. EP가 생각보다 큰 호응을 얻으며 Secretly Canadian 레이블과 계약을 체결하고 데뷔 음반을 발표하게 되었는데, 이게 그만 대박이 터져버렸다. 결국 그녀는 최근 밥 보일린의 초대를 받아 NPR Tiny Desk Concert에서 공연을 했다. 물론 열명보다 더 많은 관객을 앞에 두고서.

단순히 도넬리의 음악을 맥 드마코(Mac Demarco) 류의 찰랑거리는 인디팝과 비교하는 것에는 무리가 조금 따를 것 같다. 그보다는 오히려 호주 출신 선배 뮤지션 코트니 바넷(Courtney Barnett)과 비교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기타를 중심으로 음악을 진행시켜 나가고, 곡마다 명확한 스토리 텔링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의 주제를 전달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음반은 성폭행을 당한 도넬리의 친구의 실화를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음반의 첫 곡 “Old Man”의 밝은 분위기에서 그것을 감지하기란 쉽지 않지만, 가사는 생각보다 훨씬 직설적이다.

그는 뉴스의 스포츠 섹션을 읽고 있어
이상한 웃음을 짓는 하얀색 이빨을 가진 백인 남자
뭔가를 했군
집에 혼자 있네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길 원했거든
우리에게 미소를 보이며
이봐, 만약 그녀를 한번만 더 건드리면
당신의 아내와 아이에게 모두 이야기하겠어
그 시간에 대해
왜냐하면 지금은 1993년이 아니거든
넌 직장을 잃었고
이 사회에서도 아웃이야

오, 내가 두려운 거야, 늙은이?
아니면 내가 뭘 할지 두려운거야?
당신은 나를 두 손으로 잡았지
그리고 이제 세상이 당신을 잡으려 해

이 음반이 그렇다고 단순히 페미니즘의 메시지만으로 승부하려는 작품은 아니다. 음악이 우선 충분히 괜찮다. 타이틀곡 “Beware of the Dogs”와 “Boys will be Boys”는 도넬리의 기타와 목소리만으로 구성된 곡인데, 맑은 기타톤과 섬세한 도넬리의 목소리가 심금을 울린다. “Old Man”은 앞서 언급한 맥 드마코가 연상될 정도로 청량하고 아름다우며, “U Owe Me”는 싱글로도 손색 없을 정도로 간결하고 명쾌하다. “Lunch”는 정교하게 잘 짜여진 좋은 팝넘버다. 음반 전체적인 구성도 괜찮은 편이고, 트랙을 굳이 뛰어 넘고 싶을 정도로 구린 곡도 없다. 도넬리의 음악을 들으며 기타와 목소리, 이 두 요소가 완벽한 음악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음악을 직접 만들어내는 재능은 거의 없는 편인데, 그래서 이런 뮤지션의 음악을 들으면 부러움과 경탄이 동시에 터져나온다. 올해의 신인으로 꼽혀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데뷔 음반이다.

The Comet is Coming | Trust in the Lifeforce of the Deep Mystery

더 코멧 이즈 커밍(The Comet is Coming)을 단순히 재즈 트리오라고 소개하는 것은 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재즈를 기반으로 하는…” 과 같은 부연 설명을 붙이는 것도 조심스럽다. 이들의 음악을 정의내리기 위해서는 몇 개의 장르 이름보다는 촉각, 혹은 미각적 느낌을 설명하는 형용사에 집중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만큼 더 코멧 이즈 커밍의 음악은 강렬하고 직관적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이들의 음악은 정교하게 잘 짜여진 명품 옷처럼 탄탄하고 빈틈이 없다. 반복해서 들으면 들을수록 미리 설계된 미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재미가 있다. 혹자는 이들이 재즈의 미래라고 이야기하고, 다른 이들은 재즈 뿐 아니라 소울, 펑크, 힙합, 전자음악, 사이키델릭 등 현재 트렌드를 장악하고 있는 거의 대부분 장르를 아우르는 조금 더 큰 그림을 이들이 그리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흥분한다.

스스로의 음악을 “apocalyptic space funk”라고 정의하는 세 명의 런던 출신 뮤지션이 처음 만난 곳은 2015년 런던의 한 공연장에서였다. 드러머 맥스웰 할렛(Maxwell Hallet)과 키보디스트 댄 리버스(Dan Leavers)는 당시 퓨처리스틱한 음악을 하는 듀오 사커96(Soccer96)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었는데, 근처 공연장에서 연주하고 있던 색소포니스트 샤바카 허칭스(Shabaka Hutchings)를 만나 단숨에 의기투합하게 된다. 선 라(Sun Ra), 존 콜트레인과 같은 선대 뮤지션에 대한 애정을 공통분모로 하여 이들이 결성한 그룹의 이름은 그 이름도 요상한 더 코멧 이즈 커밍. 그룹을 만들면서 무대 이름도 새롭게 정했다. 할렛은 베타맥스(Betamax), 리버스는 다날로그(Danaloque), 허칭스는 킹 샤바카(King Shabaka). 컨셉도 확실했다. 세기말, 사이키델릭, 장르 불문. 이들이 2016년 발표한 데뷔 음반 [Channel the Spirits]는 내 귀에는 조금 버거웠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좋다는 확신은 있었지만 곁에 두고 즐겨 듣을 수 있는 그런 음반은 아니었다. 몇 번을 겨우 들은 후 뒤로 넘겨버렸던 기억이 있다. 컨셉이 확실한 뮤지션의 음악이 갖는 가장 큰 단점은 그 컨셉에 동의하지 못하는 청자의 마음을 돌리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되게 진한 산미를 가진 원두는 그 나름의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지만, 산미를 즐기지 않는 커피 애호가에게 결코 사랑받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그런 그들이 발표한 두번째 음반 [Trust of the liveforce in the Deep Mystery]는 그런 호불호조차 뛰어넘을만한 뛰어난 작품이다. 마치 호날두의 플레이스타일을 좋아하지 않는 축구팬조차, 르브론 제임스의 농구를 사랑하지 않는 안티-르브론 팬조차 결국 호날두나 제임스가 이룩한 업적에는 고개를 저으며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인 셈이다. (물론 코멧 이즈 커밍의 음악을 그정도로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 음반에서는 시각적 강렬함이 조금 더 빛을 발한다. 베타맥스의 스네어 소리와 킹 샤바카의 엘토 색소폰 음이 빚어내는 조화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여기에 더해 전체적인 사운드를 만지는 다날로그는 더 코멧 이즈 커밍의 음악을 조금 더 퓨처리스틱하게, 다른 말로 하면 때깔나게 꾸며놓았다. 이들과 가장 비슷한 색깔을 내는 뮤지션으로 테임 임팔라(Tame Impala)와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광기’가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는 점에서 콜트레인과 닮았고, 한도 끝도 없이 최면적이라는 점에서 테임 임팔라와 비슷하다. 음반의 베스트 트랙은 한 곡만 꼽기에는 너무 차고 넘친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곡인 “Summon the Fire”부터 “미쳤다”라는 표현 밖에는 나오지 않는 대단한 킬링 파트를 품고 있는 노래 “Birth of Creation”, 일렉트로닉의 차원으로 훌쩍 넘어가버리는 “Timewave Zero”, 음반에서 가장 사이키델릭한 “Blood of Past”, 심지어 명상적이기까지 한 “The Universe Wakes Up” 등,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노래가 대부분이다.

Sharon van Etten | Remind Me Tomorrow

올해 초, 샤론 반 에뗀(Sharon van Etten)이 5년만에 발표한 싱글 “Comeback Kid”를 처음 들었을 때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단 하나였다. ‘대체 그동안 무슨일이 있었던거야!’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던 그녀의 음악에 대한 이미지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노래였다. 피아노와 통기타로 포근하게 감싸안아 나른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차분했던 그녀의 포크음악은 기타와 드럼, 신서사이저에 의해 ‘광폭’하게 변했다.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던 반 에뗀의 목소리는 이 노래에서 울부짖기 시작했으며, 어떤 순간에는 상처나고 긁힌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후 발매된 [Remind Me Tomorrow]를 확인해보니, “Comeback Kid”에서 우려(?)했던 것만큼 음반 전체가 엄청난 변화를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전작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폭으로 음악세계에 변화가 온 것은 분명한 사실처럼 보인다.

단지 5년만의 시간때문일까. 샤론 반 에뗸의 [Remind Me Tomorrow]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간동안 그녀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음악적인 측면에서는 프로듀서가 바뀌었다. 이번 음반에서 새롭게 합류한 프로듀서 존 콘글턴(John Congleton)은 엔젤 올슨(Angel Olsen), 세인트 빈센트(St.Vincent) 등 로킹한 음악을 지향하는 여성뮤지션의 음반을 프로듀스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콘글턴은 반 에뗀의 음악세계를 기타를 중심으로 재편했고, 전작에서 부재했던 리듬과 디스토션을 대폭 강화하면서 포크에서 록, 혹은 팝으로의 장르적 변신을 꾀했다. 음악 외적인 변화는 아마도 반 에뗀의 개인적인 삶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 아이를 임신했고 출산했으며, 넷플릭스 드라마에 출연했고, 심리건강 상담사 자격증을 획득하기 위해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음악 커리어 바깥에서 지난 5년 중 대부분을 보낸 반 에뗀이 보고 느꼈던 것들이 이 음반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일렉트로-팝을 연상시킬 정도로 세련되어진(..) 악기 구성이나 편곡과 별개로, 그녀의 음악은 훨씬 적극적으로 변모했다. 음반 전체의 분위기가 사색적이고 목가적이었던 전작 [Tramp]를 그리워하는 팬들도 많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후속작 [Are We There]에서 아주 미세한 매너리즘, 혹은 슬럼프를 감지했기에 이번 신작에서의 대폭적인 마인드셋 변화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더 나아가, 그녀의 가사는 여전히 사색적이고 탐미적이다. 이 음반의 대표곡 “Comeback Kid”의 가사를 보면 결코 그녀가 ‘대놓고 들이대는’ 성격이 아님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조금 더 철저해진 공감과 상대방이 놀라지 않게 다가가려 하는 세심함이 있을 뿐이다. 음반의 또다른 좋은 곡인 “Seventeen” 역시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어려움을 자신의 과거를 반추함으로써 이해하려 하는 공감이 눈에 띈다. 이 노래가 특히 더 좋은 점은,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태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다시 그 거울을 자신에게 비추고자 하는 노력이 꽤 진지해보인다는 것이다. 이처럼 음반 전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공통점은 첫째, “you”, 즉 2인칭 타자가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며, 둘째, “당신”과 호응하는 “I”, 즉 1인칭 화자로 모든 정신이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어떤 노래에서 반 에뗀이 울부짖는다면 그것은 드디어 그녀가 ‘밖으로 나왔기’ 때문일 것이며, 이것은 하나의 명징한 성장의 상징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처연한 자기고백, 그것을 아주 세련된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음반이다. 당연히 올해의 음반 중 한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Weyes Blood | Titanic Rising


이제야 비로소 2019년에 들었던 음반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새로운 해를 맞이할 때마다 다짐하는 목표같은 것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일주일에 한 장의 음반 듣기’다. 지금까지 내게 음악을 듣는다는 행위는 조금 번거로운 루틴의 연속으로 정의되어 왔다.

1. CD나 LP같은 물리적 매체를 주문하거나, 직접 매장에서 구입한다.
2. 집으로 배달되거나 직접 가져온 음반을 CD플레이어나 턴테이블을 이용하여 플레이시켜 음악을 감상한다. 거의 대부분 곡 단위가 아니라 음반 단위로 듣게 된다.
3. 몇 번을 반복해서 감상한 후, 블로그에 그 느낌을 옮겨 적는다.

3번까지 완료해야 한 장의 음반을 “들었다”라고 스스로 인정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은 정의에 따르면 2019년에는 음반을 한 장도 제대로 듣지 않은 셈이다. 그런데 2019년은 위와 같은 루틴이 깨진 첫번째 해로 기억될 것 같다. 먼저, 물리적 매체를 거의 구입하지 않게 되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외벌이’를 하게 되면서 사치재 소비를 줄이게 되었다는 것이지만, 그보다는 애플 뮤직과 스포티파이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LP를 돌리며 음악을 듣는 행위에 대해 ‘현타’가 왔기 때문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솔직할 것 같다. 그래서 요즘에는 주로 애플뮤직을 이용해 음악을 듣는다. 더 나아가, 요즘에는 집에서 조용히 음악을 들을 시간이 없다.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나 차 안에서 보내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스트리밍 형태의 음악을 자연스럽게 더 선호하게 된다. 이렇게 루틴이 변하다 보니 블로그에 음악에 대해 감상문을 남기는 것조차 게을리 하게 되었다. 음악을 들어도 들은 것 같지 않고, 음악을 조금 더 가볍게 여기기 시작한 것 같은 죄책감도 느끼게 되었다. 물론, 정신없이 돌아가는 학기중의 스케쥴 속에서 한가로이 블로그에 음악 감상문이나 쓰고 있을 여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멀어진 탓도 크다.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구구절절이 해도 다 핑계일 뿐이다. 좋은 음악을 들었다면 그에 대한 기록을 한 줄이라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기억력이 나쁜 나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오늘 이야기할 첫번째 뮤지션은 와이즈 블러드(Weyes Blood)다. 멕시칸 서머(Mexican Summer) 레이블에서 서브팝(Sub Pop)으로 옮긴 후 첫번째 작업물로 [Titanic Rising]을 발표했다. 2016년 [Front Row Seat to Earth]로 좋은 평을 받고 3년만에 내놓은 새 음반인데, 같은 캘리포니아 출신 뮤지션 에어리얼 핑크(Ariel Pink)와 함께 2017년에 발표한 EP [Myths 002] 이후로는 만 2년만이다. 이번 음반에서 와이즈 블러드가 선호하는 음반 단위의 음악 구성이 드디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전작에서도 느껴졌던 웅장하고 담대한 색채가 한층 강해졌는데, 곡과 곡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가 눈에 띌 정도로 매끄럽고 단단하다. 조니 미첼(Joni Mitchel)을 빼닮은 목소리톤은 그대로인데 그 목소리를 가지고 노는 솜씨는 훨씬 좋아졌다. 여기에 더해 송라이팅과 편곡에도 눈을 뜬 것인지, 라이브에서 들으면 어떤 느낌일지 기대가 되는 노래들이 제법 많이 발견된다. 비틀즈가 연상되는 밝은 분위기의 “Everyday”조차 종반부로 갈수록 격하게 몰아치는 감정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여기서부터 “Something to Believe”, “Titanic Rising”, “Movies”까지 휘몰아치는 부분이 음반의 첫번째 절정이다. 포크 음악 ‘주제에’ 웅장하다는 감상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작년에 미츠키가 인디씬을 후려쳤다면, 올해는 와이즈 블러드가 인디씬 최고의 뮤지션으로 기억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untouched by Notre Dame fire

많은 이들에게 조금 불편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최근 빠리의 노틀담 성당에 화재가 발생했다. 많은 빠리 시민들이 애도의 뜻을 표했고, 오바마나 트럼프같은 세계 유명인사들도 노틀담 성당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며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프랑스가 아닌 다른 곳에 살고 있는 세계 시민들도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명소이자 소중한 인류 문화유산 중 하나인 성당의 일부가 소실되었으니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스타그램에는 저마다 개인적으로 간직한 노틀담 성당의 모습을 올리며 이제는 다시 돌아가지 못할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빠리에서 노틀담 성당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 역시 대부분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 그들의 마음을 전적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그다지 마음이 많이 움직이지 않았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만큼 안타까워 하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이유는 나의 경험 때문이다. 나는 빠리가 무척 아름다운 도시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보도블럭 한장까지 도시의 역사로 소중하게 간직하려고 하고 스카이라인을 보존하기 위해 고층건물조차 허락하지 않는 빠리 시민의 완고함을 존중한다. 아침 길거리 공기 위에 스며드는 빵 냄새와 지하철 역사에 울려퍼지는 악사의 음악을 사랑한다. 하지만 몇백년 전에 지어진 웅장한 건축물에 대해서는 경외감보다는 두려움과 역겨움을 느꼈다. ‘역겨움’이라는 표현이 조금 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생제르망 데 프레 성당(Church of Saint-Germain-des-Prés) 앞에서 에서 문자 그대로의 메스꺼움을 느꼈다.

몇백년 전 대성당이 건축되는 과정을 상상해본다. 수천명의 노역이 동원되었다. 대부분 가난한 서민들이었을 것이다. 수십년, 때로는 백년이 넘게 걸리는 건축과정에서(노틀담 성당은 정확하게 100년이 걸렸다)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역사책에 제대로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이들의 노력은 정확하게 평가되지 않았다. 성당이 완성된 후 프랑스 혁명 전까지 일반인은 이 성당에 출입할 수 없었다. 이후에도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치루는 등 여전히 노틀담은 상위계층의 전유물로 남아 있었다. 신에 대한 찬양을 증거하기 위해 지어진 건축물이 성당이다. 그 성당에서 신을 향해 찬양할 수 있는 자격은 계급에 의해 철저히 제한되었다. 당시의 신은 계급주의를 신봉하는 신이었다.

노틀담 성당을 비롯한 많은 중세시대 대형 건축물이 인구의 99%를 차지하는 서민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는 증거는 외부 장식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노틀담 성당의 정문 주변에는 상당히 정교하게 설계되고 조각된 예술품이 도처에 깔려있다. 정문 그 자체도 마찬가지다. 문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품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이 모든 예술적인 장식물은 모두 권위적인 표정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내려보는 듯한 고압적인 태도,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 앞에서 나약한 모습의 인간을 심판하는 절대 권력자이자 권위자로서의 신의 모습, 다양한 형태로 노려보는 듯한 악마와 괴물들의 모습이 성당의 거의 모든 외관을 휘감고 있다. 12사도와 천사의 표정은 이들이 우리 편인지, 혹은 우리를 지배하러 온 이들인지 헷갈릴 정도다. 당시 성당은, 그 앞을 지나다니던 피지배계층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절대적인 신 앞에 복종하라. 단, 당신의 왕과 귀족은 신의 권력을 대신 행사하고 있으니, 왕과 귀족에게도 복종하라. 대충 이런 메시지로 읽힌다. 즉 신과 지배계층의 모습을 일치시킨 것이다. 이런 노틀담 성당이 내 눈에는 전혀 아름답지 않다.

이와 같은 이유로, 나는 노틀담 성당을 비롯한 유럽의 대부분의 대형 건축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99%의 확률로 나의 조상은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를 귀족이라고 생각해본 적 역시 한번도 없다. 지금은 일반 시민들이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변했다고 해도, 그 공간의 역사적 유래는 변하지 않는다. 서양 건축물에 대한 내 불호의 예외가 있다면 프라하에서 확인한 카프카의 생가, 혹은 니스에서 찾아가본 세잔의 아뜰리에 정도일 것이다. 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삶을 살다 간 예술인의 개인적인 공간 정도가 내가 유럽에서 사랑하는 역사적인 공간이다. 그외 대부분의 관광명소에서는 욕지거리가 나올 정도의 폭압적인 권위주의가 읽혀져 더이상 있기 싫어진다. 노틀담 성당이 불탄 것이 경사로운 일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최소한 슬퍼할 일도 아니다.

Niall Ferguson | The Ascent of Money

국내에는 [금융의 지배]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출판된 [The Ascent of Money] 외에도 영국 출신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의 책이 꽤 여러 권 번역되어 시중에 출간되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조금 놀랐다. 나는 [The Ascent of Money]가 대중적으로 널리 읽힐 만큼 친절하게 쓰인 책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보의 비대칭이나 행동 경제학, 케인즈의 일반균형 이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주택저당증권(mortgage backed security; MBS)과 블랙-숄즈 모형의 복잡한 공학적 원리 등이 책의 이곳 저곳에서 튀어나오기 때문에 기본적인 경제학 지식이 없다면 책장을 넘기는 것이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유려하고 쉽게 쓰인 문장과 독자를 쉽게 몰입시키는 훌륭한 스토리텔링 능력은 니얼 퍼거슨이 속한 ‘장르’인 경제사(economic history)가 우리나라에서 가지는 초라한 위상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이 국내 일반 대중에게 널리 소개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작용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장점이 [The Ascent of Money]에서 극대화되어, 이 책의 주 목적인 인류의 금융사 개관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수반해야 하는 다소 어려운 경제학 이론조차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게 돕고 있다. 그 미덕을 인정받아 에미 상 등 굵직한 상도 수상하며 퍼거슨의 명성이 한껏 높아질 수 있었을 것이다.

[The Ascent of Money]는 금융의 기원과 발전을 시대순으로 따라가며 금융이 인류의 발전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강조하는데 집중한다. 다만 요즘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big history’ 의 대표 저작답게 금융사의 모든 측면을 세심하게 다루는 것은 아니고, 은행의 탄생, 보험의 탄생, 버블, 부동산 시장의 명과 암, 국제금융과 퀀트 등 금융사의 중요한 지점을 관통하며 부문별로 가장 중요한 사례를 한두가지 씩 소개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퍼거슨의 훌륭한 점은 독자의 입장에서 각각의 사례로부터 중요 개념으로 일반화시키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별로 느끼지 않게 친절한 안내문을 곳곳에 설치해준다는 점이다. 금융처럼 추상적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개념도 드문데, 상식 수준에서 널리 알려진 서양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과 연결시켜 가시성을 확보해준다는 점도 그의 책이 왜 대중적인지 쉽게 알게 되는 대목이다. 예컨대 현대 금융감독기관이나 중앙은행이 행하는 세부적인 매커니즘을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라 하더라도, 메디치 가문의 영특한 재산불리기 방식과 영란은행의 탄생 비화 등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주요 금융정책기관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탄생했고 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큰 흐름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식이다.

단순히 금융사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낸 책은 아니다. 퍼거슨의 번뜩이는 통찰력은 쉬운 문장 속에서도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중-미 간 활발한 무역-금융 거래를 통한 자본의 국제적 이동의 부활을 언급하며, 현재(이 책은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발간되었다)의 추세가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다시 한번 위기에 봉착할 수 있는 잠재요인으로 양 국 간 정치적 갈등, 더 구체적으로 무역 부문에서의 갈등을 지적하는 대목에 다다르면 그의 혜안에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역사를 통해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처럼 보이지만, 그 누구도 쉽게 해내지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누구나 역사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단 5년 간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문제 없다’는 판단을 내린 블랙-숄즈/VaR 모형의 실패 사례를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퍼거슨은 당시 VaR 모형이 만약 11년 이상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리스크를 추정했다면 실제 발생한 규모의 손실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5년과 11년은 어찌 보면 매우 짧은 기간 차이지만, 그 6년의 차이만으로 현대 금융사의 방향이 통째로 틀어지게 되었다. 이런 방식의 비판은 경제사학자만이 할 수 있는 성격의 비판이다.

책이 가지고 있는 한계도 명확하다. 은행과 보험, 주식 버블과 자산시장의 한계를 차근차근 살펴보는 책의 중반부까지는 완벽에 가까운 균형과 호흡을 보이지만, 국제금융시장과 2000년대 이후의 금융 흐름을 짚어내는 6장 및 결론 부분에 다다르면 중심을 잃고 흔들린다. 이것은 책이 출판되었던 시기가 2009년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불완전성이기도 하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이 간신히 규명되던 시기였고, 이후 세계경제의 방향성이 시계제로인 시기였다. 석학 퍼거슨이라고 해도 2008년 이후의 세계경제가 지금처럼 굼뜨게 회복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버낸키가 헬리콥터에서 달러를 뿌려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며, 바젤III 등 시스템리스크를 체계적으로 잡아내기 위한 국제적 공조가 어떤 방향으로 설계될지 그 구체성까지는 살펴보지 못했을 것이다. 퍼거슨은 금융경제학자, 혹은 경제예측론자보다는 역사학자에 가까운 시선을 보여준다. 때문에 그의 책에서 배워야 할 교훈도 그의 문장만큼이나 간단, 명료하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은 필연적이었으며, 모든 경제적 사건은 그 필연성 위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퍼거슨이 가진 정치적 스탠스(그는 미트 롬니를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오바마를 호되게 비판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금융의 순기능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책은 급하게 마무리되지만, 이 책을 바탕으로 조금 더 공부해야 할 부분들이 발견된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고맙고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4월 5일. 25년.

최근 단과대 동료 교수 여섯 명과 학교 근처 양식집에서 간단히 저녁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그 식당은 스테이크 전문점으로, ‘미국식 식당’으로 보이기 위해 내부 치장에 정성을 쏟은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는데, 예를 들면 긴 뿔을 가진 황소 머리 모형(그것은 누가 봐도 어설픈 모형이었다)이나 유명한 ‘Route 66’ 패널을 벽에 걸어 놓는 식이었다. 보통 교수님들을 모시고 가게 되는 전형적인 식당(예: 인자한 아주머니가 떨어진 반찬을 알아서 채워주시는 한식집)은 아니었지만, 그 날 저녁 모임의 명분이 ‘단과대 건물 3층에 연구실을 둔 젊은 교수들이 새로 오신 교수님을 환영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선택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젊은 교수들’이라고 해봤자 역시 그 자리에서도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은 나였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요즘 ‘젊은 교수’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의 연령대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에서 몇 년 동안 공부를 한 공통적인 경험이 있어서인지, 술이 한 두잔 들어가고 난 뒤 자연스럽게 90년대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누군가 나의 긴 머리를 보고 “커트 코베인같네요”라고 농을 친 것이 시발점이었다. 한껏 신이 난 40대 ‘아재’들은 자신이 아직 잊어버리지 않은 90년대 음악의 각종 정보들을 두서없이 쏟아내기 시작했고, 결국 대화는 레드 제플린과 건스앤로지스 사이 어딘가에서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친구나 가족과 함께 하는 자리가 아닌 곳에서는 말을 극도로 아끼는 편인 나는 가끔 틀린 정보를 바로잡아 주는 정도에서만 대화에 참여했는데, 간혹 눈치 빠른 누군가는 나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듣기를 원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음악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기에 적당히 그 시대를 모르는 척 하며 시간을 때웠다.

90년대 5천원짜리 카세트테이프를 사 들으며 머리를 흔들어대던 십대 소년들은 허리둘레가 걱정스러운 나이의 중년에 진입했다. 당시 음악을 함께 듣던 친구들 사이에서 “시애틀 4대 천왕”으로 통했던 밴드 – 너바나, 펄 잼, 사운드가든, 엘리스 인 체인스 – 의 보컬리스트 중 오직 에디 베더만이 생존해 있다. (이건 생각보다 훨씬 무겁게 와닿는 부분이다.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오직 에디 베더 뿐이라니. 와.) 요즘 기타를 좀 치고 홍대씬을 어슬렁거린다는 록 키드는 어떤 뮤지션을 롤 모델로 생각할까. 커트 코베인은 화석이 되어 있을까. 그가 죽은지 25년이 지났다.

1994년 4월 6일. 당시 아직 국민학생이던 나는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나오던 노래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누나가 들려주던 머라이어 캐리의 크리스마스 캐롤 음반이나 아버지가 즐겨 듣던 산울림의 음반, 그리고 당시 무척 좋아했던 서태지와 아이들이 내가 알던 음악세계의 전부였다. 그 날, 배철수 아저씨는 평소와 다르게 무척 슬프고 무거운 목소리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리고 정규 프로그램을 잠시 멈추고 오늘 세상을 떠난 한 뮤지션을 추모하는 특집방송을 두 시간동안 가지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 외국 뮤지션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우리나라의 디제이를 이리도 슬프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시 어떤 노래들이 나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확실히 “Smells like Teen Spirit”이 나왔을 것이고, “Come as You are”같은 곡도 나왔을 것이다. 1994년 4월 6일 저녁 6시부터 8시 사이에 나에게 일어난 일 중 확실하게 기억하는 한가지는, 너바나와 같은 음악이 존재한다는 것과 이런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국내에도 많이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대체 왜인지 그 이유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당시 아직 국민학생이던 나는 그의 음악에 무서울 정도로 강하게 빨려들어갔다.

그 후 25년이 지났다. 1994년 4월 6일 이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음악은 나에게서 멀리 떨어진 적이 없다. 시애틀 그런지 음악과 판테라 등의 뉴메탈을 들으며 중학교를 졸업했고, 포티스헤드의 트립합과 블러의 브릿팝, 그리고 머큐리 레브나 윌코 등 인디뮤직의 힘을 빌어 고등학교 수험생 시절을 통과할 수 있었다. 대학교 시절 연애에 정신이 팔려 사랑을 속삭이는 인디팝을 선별해 구애할 때 이용했고, 군대에서 음악을 들을 여유가 생기면 편안히 들을 수 있는 에디 히긴스나 찰리 헤이든같은 재즈 음악을 찾아 낮은 볼륨으로 들었다. 미국 유학 시절은 개인적으로 무거운 삶의 무게를 처음 경험하느라 무척 힘든 시간이었지만, 음악을 듣는 사람 입장에서만 보면 천국과도 같은 시기였다. 거의 매주 공연을 보러 다녔고, 푼돈이 모아지면 아마존에서 음반을 구입해 끊임없이 돌려 들었다. 당시 보았던 윌코와 플릿 폭시스, 아케이드 파이어, 본 이베어 등의 공연은 지금도 매 순간이 기억날 정도로 좋았다.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온 뒤 만난 음악친구들을 통해 새로운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함께 맥주를 마시며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거나 음악에 대해 수다를 떨면서 현실의 무거움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커트 코베인이나 웨인 스탠리처럼 젊은 나이에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없었던 나는, 근근이 삶을 이어가는 와중에 음악을 통해 힘을 얻고, 음악을 통해 희망을 보았다. 내 삶은 음악과 동격이 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하고 보잘 것 없었지만, 음악이라는 영혼의 동반자를 옆에 끼고 살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며칠 전 그 교수 모임에서 누군가 커트 코베인의 자살과 관련하여 궁금해했던 것이 기억난다. 자살이었는지, 코트니 러브에 의한 타살이었는지, 둘 사이에 딸이 있었는지, 아들이 있었는지, 지금 몇 살인지, 등등 한물간 TMZ에나 나올 법한 이슈들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그 이야기가 그리 듣고 싶지 않아 “딸이구요, 이름은 프랜시스 빈 코베인이구요, 1992년 생이니 지금 스물 일곱 쯤 되지 않았을까요”라고 빠르게 말하고는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자리를 떴다.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가쉽거리로 치부되는 한 가수의 삶과 죽음이, 나와 같은 ’90년대 키드’에게는 삶의 방향성을 바꾸어버린 엄청난 존재로 기억된다. 때문에 나는 그의 이야기를 가볍게 취급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가끔, 우리 부부가 애정하는 자동차 ‘삼식이’가 랜덤으로 노래를 재생할 때 너바나의 노래가 나온다. 그 때마다 90년대의 어느 시점엔가로 돌아가, 여드름 투성이 얼굴을 한 한 소년을 마주한다. 여드름이 가득한 못난 얼굴을 비추는 거울을 보는 것조차 싫어 엄마를 졸라 집안의 거울을 모두 치우게 했던 이 예민한 소년은, 집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를 찾아내 너바나의 [Nevermind] 음반을 듣고 또 들었다. 전세계 3천만명 정도가 공통적으로 경험했을 이 기억이, 나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기에, 지금도 늘 자신의 머리를 엽총으로 날려버린 그 사람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 십대의 마음으로, 십대의 정신으로 늘 살 수는 없겠지만, 그 시절의 기억을 죽을 때까지 잊어버리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