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가미 나오코 | 요시노 이발관

여기 이상한 마을이 하나 있다. 익명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작은 규모의 이 마을에 사는 모든 미성년 남자아이는 하나같이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다. 아니 해야만 한다. 마을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이발관에서 동일한 스타일의 머리모양으로 깎아야만 하는 이유는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때문이다. 전통인지 강압인지 알 수 없는 이 마을의 관습을 지키기 위해 마을의 모든 어른들은 합심하여 아이들의 머리모양을 적극적으로 통제하는데, 도쿄에서 전학 온 도시소년 한명이 여기에 반기를 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카메모 식당], [안경] 등 잔잔한 영화를 만든 오기가미 나오코의 2004년작 [요시노 이발관]은 단순하고 소박한 시놉시스에서 시작하여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의식으로 마무리짓는다. 두발의 자유화를 부르짓는 소년은 곧 몇명의 동지를 구하지만, 이 어린 소년들이 오랜 마을의 전통을 지키려는 어른들의 권력에 정면으로 맞서는 과정은 쉽지 않다. 논리나 이유는 없다. 감정적인 설득도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하는 어른들만 있을 뿐이다. 어른들의 강압적인 태도 뒤에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있을 수도 있다. 목적이 선의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아이들이 자유를 박탈당했다고 느끼는 순간 그것은 명백한 폭력이 된다. 자신이 원하는 머리모양을 하기 위해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어린 아이들의 이야기를 영화는 아름답고 유머러스하게 그려내고 있지만, 사실 이 영화는 상당히 섬뜩한 이데올로기 간 충돌에 관한 이야기다.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통제 기제가 머리모양으로 상징화되고 있는 셈인데, 어째서인지 영화는 마냥 평화롭게 마무리된다. 머리 모양을 제멋대로 바꾼 아이들은 결국 강제로 머리를 짧게 깎이게 되지만, 여전히 평화롭게 어른들과 공존하며 조금은 나아진 머리모양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그동안 조심스럽게 쌓아온 서사구조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결국 ‘타협’이 결론인건가? 적당히 굴복하되(혹은 굴복당하는 현실을 인정하되) 상존하는 시스템 안에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는 쪽을 택해라는 것인가? [안경]에서 꽤 그럴듯한 멋진 마무리를 선사했던 감독은 [요시노 이발관]에서는 선명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한다. ‘화합’이나 ‘이해’ 같은 것을 이끌어내고 싶었다면 이 영화는 지나치게 게으르고 건방지다. 조금 더 세심하게 고려해야 하는 장면들이 많다. 열린 결말로 시청자에게 어느 정도의 몫을 남겨두기에는 모든 이야기가 명확한 마침표를 가지고 있다. 관객이 개입할 여지도 많지 않다. 이래저래 답답한 결말이다.

이상근 | 엑시트

에어컨이 없으면 버틸 수 없는 여름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곡식이 익고 자연이 순환하기 위해서는 찌는 듯한 더운 계절도 필요하기에 여름이라는 계절 자체를 혐오하지는 않지만, 습도에 약한 체질 탓에 결코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어제는 아내와 함께 집을 탈출하여 에어컨을 공짜로 즐길 수(?) 있는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녔는데, 우리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동네 영화관이었다. 영화관 역시 우리 부부처럼 별 생각 없이 극장에 와서 적당히 몇시간 때우고 갈 심산으로 올 사람들을 위한 영화들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고른건 [엑시트]였다.

[엑시트]는 재난 영화의 기본 구조에 한국사회의 특수성을 적당히 버무리되, 배우들을 혹사시키고 강약을 조절하는 법 없이 우직하게 신경쇠약 직전의 극단만을 강조하는 한국영화의 특수성도 함께 섞여 버린, 평범한 한국영화 그 자체다. 취업준비생 남자주인공과 성차별에 노출된 노동자 여성이 대학시절 갈고닦은 등산기술을 바탕으로 가족들을 위기에서 구하고 본인들의 삶도 능동적으로 개척한다는 줄거리는 ‘새로운 것은 전혀 없지만 결재선에 있는 임원 그 누구도 심하게 태클 걸지 않을 것 같은’ 전형적인 모범생 한국영화 시나리오다. 재난이라는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서사에 불안한 청춘의 삶을 녹여낸다는 발상은 이와 아무런 개연성이 없는 재난의 원인과 그보다 더 어이없는 재난의 거시적 해결과정때문에 아무런 지지를 받지 못한채 사그라든다. 중간에 탈출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삽입한 장면은 노골적으로 세월호 사건을 노린 것 같은데, 이것도 결과적으로 희화화시켜버리는 감이 없지 않아 ‘세월호 마케팅’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듯 하다. 임윤아의 연기는 ‘연기 못한다’라는 평을 듣지 않기 위한 아이돌 출신 연기자가 억지로 망가지려는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튀게 느껴져 영화를 위해 연기를 하는 것인지, 자신을 위해 연기를 하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조정석의 대사는 잘 들리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니 어차피 대사를 귀기울여 들을 필요도 없었다. 고함을 치거나 울거나, 둘 중 하나였으니까. 배우들을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전력질주하게 만들고, 울게 만들고, 소리치게 만들고, 배우들의 고운 얼굴에 검댕이칠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디렉팅은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감정과잉에서 벗어나는 일이 그렇게 힘든걸까. 한번 면전에 대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영화에서 딱 하나 볼만했던 장면은 조정석의 클라이밍 씬이었는데, 이건 마일드한 고소공포증 환자인 내가 공포영화적인 기분을 느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겟아웃]보다 더 스릴 넘치게 지켜봤다. 그냥 단순히 고소공포증 때문이었다.

스파이크 리 | 블랙클랜스맨

최근 스파이크 리는 도저히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구제불능 닉스 구단(New York Knicks)을 대변하는 상징물처럼 보여진 것이 사실이다. 본업인 영화판에서는 거의 잊혀지고 있었고, 오직 그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텅빈 메디슨스퀘어가든의 터무니 없이 비싼 맨 앞줄 좌석 뿐이었다. 그런 그가 [블랙클랜스맨]으로 보기 좋게 재기에 성공했다. 스파이크 리가 흑인 정체성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니, 이보다 뻔한 스토리가 또 어디 있을까 싶겠지만, 그 결과물은 썩 그럴싸할 뿐 아니라 꽤 잘만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와 그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영화가 스파이크 리의 ‘인생작’일 확률이 굉장히 높다는 사실을 곧 확인하게 된다. 다른 말로 바꾸면, 이 영화 이후 리 감독의 인생은 예전과 비슷하게 흘러갈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이야기다. 굳이 그를 깎아 내리려는 의도는 없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다.

[블랙클랜스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파이크 리의 개인사를 먼저 조금 되짚어보아야 한다. 뉴욕필름아카데미에서 영화를 공부하던 학생 시절, 리는 한 교수가 [국가의 탄생]이 이룩한 영화기술적 업적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영화의 정치적 편향성(1915년작인 이 영화는 토마스 딕슨 주니어의 KKK 미화 소설 [Clansman]을 각색한 작품이라고 한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아 분노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항의하는 과정에서 학교에서 제적당할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는데, 우선 이 일화에서 [국가의 탄생]과 KKK로 대변되는 백인우월주의에 대한 스파이크 리 개인의 관심(?)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2017년 버지니아주 샬롯츠빌에서 발생한 폭력사태가 있다. 남부군기(Confederate Flag) 게양 논란으로 대변되는 미 남부지역 백인우월주의 운동 단체가 이에 반대하는 시위대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시위대를 향해 돌진한 차량에 의해 무고한 여성 시민 한 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다친 사건이다. 이 사건을 일으킨 백인우월주의 단체의 뒤에는 아직까지 현존하고 있는 KKK의 조직적인 지원이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1915년부터 2017년까지, 약 백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흑인을 증오하고 백인의 유전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세력이 버젓이 미국사회 곳곳에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스파이크 리가 [블랙클랜스맨]을 만들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이 영화는 콜로라도주 콜로라도 스프링스 최초의 흑인 경찰인 론 스톨워스가 우연히 KKK 콜로라도 지역 지부로 흘러들어가 단원이 되고, 이 조직 중 일부가 기획한 폭탄테러 움직임을 사전에 포착하여 방지한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그러니까 ‘왜 여태 스파이크 리가 이 사건을 영화로 만들지 않았을까’ 궁금해질 정도로 리의 입맛에 딱 맞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셈이다. 문제는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스톨워스라는 형사가 명백한 흑인이었다는 사실이고, 콜로라도 스프링스 경찰 조직은 이를 위해 스톨워스의 옆에 필립 짐머맨이라는 유태계 백인 형사를 짝지워준다. 그러니까 전화로는 스톨워스가 ‘론 스톨워스’ 행세를 하고, 실제 조직으로 침투해 단원으로 활동하는 ‘론 스톨워스’는 백인 동료 형사가 맡은 것이다. 영화는 상당히 단순하고 순탄한 서사구조로 흘러간다. 별다른 반전이나 위기 없이 하나의 사건이 마무리되는 과정을 보면 전형적인 흑인-백인 버디 무비로 가볍게 즐기고 끝낼 수도 있는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그보다 조금 더 생각할만한 무언가가 있다.

먼저 촬영기법이나 카메라 구도 등에서 미묘하게 ‘건드리는’ 구석이 있다. 그러니까 전형적인 헐리우드 상업영화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기술적인 요인이 존재하는데, 영화 초반 장광설처럼 쏟아내는 극중 스토클리 카마이클의 연설 장면이 좋은 예다. 카마이클의 연설 자체는 별다른 기교없이 다큐멘터리처럼 끊기지 않고 이어진다. 연설 중간 중간에 삽입되는 청중의 얼굴은 그의 ‘블랙파워’ 운동에 감화된 것처럼 보이는데, 그 과정이 상당히 과장된 콜라주 기법 – 마치 그룹 퀸의 “Bohemian Rhapsody” 뮤직비디오처럼 – 으로 표현된다. 이 극적인 대비는 전체적으로 건조한 다큐멘터리적 색채로 구성된 영화의 화면에서 유독 튀는 부분으로 기억된다. 영화에서 노골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프로파간다를 가장 영화적인 방법으로 표현한 셈인데, 이 강한 메시지가 결말부분을 대신하는 실제 다큐멘터리 필름(2017년 버지니아 샬롯츠빌 사건을 다룬다)과 호응하여 이 영화를 예술작품, 즉 조작된 허구로서 관객에게 기억되지 않고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현상을 환기시키는 도구로서 기능하게 만든다. 영화 곳곳에 이런 장치들이 숨어 있다. 스파이크 리가 ‘늙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지는 구간들이 다수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끝까지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힘이 그런 소소한 단점들을 상쇄하는 느낌이었다.

배우들의 연기도 볼 만하다. 아담 드라이버는 이제 믿고 보는 배우로 성장했고, 주연 론 스톨워스를 연기한 배우 존 데이빗 워싱턴은 덴젤 워싱턴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유전자의 힘이 참 무섭다는 것을 느낀다. 소수의 배우가 제한된 무대에서 연극처럼 극을 이끌어간다. 그래서 집중도가 더 올라가는 효과가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보다 더 좋은 스파이크 리의 영화를 만날 확률은 극히 낮다. 그의 인생에서 한번은 풀고 넘어 갔어야 할 푸닥거리를 보는 것 같았는데, 그 살풀이가 꽤나 강렬했다.

알리체 로르와커 | 행복한 라짜로

오늘 우리 부부는 오랜만에 대전역 부근으로 나들이를 떠났다. 중앙시장 부근에 차를 주차해두고 대전아트시네마에서 [행복한 라짜로]를 보았고, 중앙로역 부근에 있는 오래된 식당에서 두부 두루치기와 부추전을 먹은 후 다시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왔다. 대전역에서 세종시까지 오는 길은 차로 운전하면 대략 50분 정도 걸리는데, 대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인 대전의 동쪽 끝에서 출발하여 입주가 시작된지 10년이 채 되지 않은 서쪽 끝 세종으로 오는 길은 몇십년의 세월을 단 몇십분만에 축약해서 경험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대전의 도시개발이 대전역을 중심으로 한 동쪽의 구도심을 그대로 방치해 둔 채 서쪽으로 옮겨가며 이루어졌고, 대전 내에서 가장 신도시라고 할 수 있는 도안과 반석의 바로 왼쪽에 세종시가 또다시 새로 만들어졌으니, 어쩌면 그런 경험이 아주 틀렸다고도 할 수 없는 셈이다.

[행복한 라짜로]를 보면서도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우리가 흔히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르는 경험이 가능한 작품이다. 소작농들을 착취하는 농장주와 주인공 라짜로를 착취하는 농부들, 그리고 아무도 착취하지 않는 라짜로의 모습이 영화의 전반부를 채운다. 근대적인 방식의 착취가 죄책감 없이 이루어지는 작은 지옥에서 라짜로는 타인을 의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저 선한 존재로 존재한다. 농장주의 아들과 우애를 맺은 후 라짜로의 일상에는 미묘한 균열이 발생하는데, 그의 새로운 친구가 작은 소동을 일으키며 영화의 전반부는 작은 지옥의 갑작스러운 종말로 마무리된다. 라짜로가 사고를 겪은 후 다시 깨어나면서 시작되는 영화의 후반부는 조금 더 크고 현대적인 지옥의 모습을 전시한다. 농장주로부터 착취당하던 농부들은 차가운 도시에서 조금 더 크고 세련된 시스템에 여전히 착취당하는 한편, 마찬가지 방식으로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착취하고 있었다. 농부들을 착취하던 근대적 귀족 역시 은행과 자본이라는 현대 자본주의의 전도사에 착취당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지옥을 살아가기 위해 인간성을 버려야 했던 이들의 눈 앞에 몇십년 전과 똑같은 모습의 라짜로가 나타났을 때, 성자로 현현한 그의 존재를 알아본 이는 시골마을에서 성자의 그림에 입을 맞추던 여자 한 명 뿐이었다. 영화의 후반부는 성자 라짜로의 수난과 기적을 리얼리즘의 색채 안에 담아내며 영화를 다른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먹고 먹히는 나선의 지옥도에서는 성자를 알아보는 것조차 쉽지 않다. 이토록 갸날픈 영혼을 지닌 현대의 이웃들에게 라자로는 결코 절망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고, 착취의 시스템에 포섭되어 약자를 내치는 위치에 서버린 교회에서 음악을 훔쳐내어 공기 중에 흩뜨려 주며, 수난의 십자가를 기꺼이 떠안으며 모두를 위해 고통을 감수한다. 라짜로의 존재는 세상을 대신 바꾸어주는 영웅이 아닌, 세상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성자의 모습 그 자체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1988년작 [안개속의 풍경]이 떠올랐다. 아빠를 찾아 그리스의 거친 현실 이곳 저곳을 떠도는 어린 남매의 순례기는 이 영화를 처음 보던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는데, 이 영화가 한없이 아름다운 곳이라고만 생각했던 그리스의 뒷골목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준 것처럼 [행복한 라짜로]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한없이 아름다울 것만 같았던 이탈리아라는 나라에 깊숙히 자리잡은 절망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선 두 영화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교차 지점은 두 영화 모두 지독한 절망 속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절대적인 희망의 존재를 무척 영화적인 방법으로 아름답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우리는 늘 신에게 기도한다. 기도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자신의 안위를 부탁한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 신을 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기도 중에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기독교적 세계관을 상정하지 않더라도, 라짜로처럼 깨끗한 영혼이 우리 주변에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빵 한조각을 떼어 내어 줄 수 있을 정도의 넉넉함을 가지고 있을까. 끊임없이 그의 이름을 불러대며 잡일을 시키지는 않을까. 내 마음에 낀 때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되는 영화다. 올해 남은 기간동안 어떤 영화를 더 보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그와 상관없이 이 영화는 올해 최고의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데이미언 셔젤 | 퍼스트맨

데이미언 셔젤의 [퍼스트맨]도 지난 3월 중순 사우스캐롤라이나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본 영화다. [위플래쉬]는 굉장히 안좋게 봤고 [라라랜드]는 나쁘지 않게 봤다. 데이미언 셔젤은 분명 재능 넘치는 영화감독이지만, 그가 영화라는 예술 분야의 본질을 깊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영상, 혹은 음향과 같은 기술적인 부분이 관객에서 어떤 육체적 효과를 불러오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그 쪽의 ‘재주’를 이용해 관객의 심리에까지 영향을 미치려는 노력을 해왔다고 판단한다. 그런 그가 [퍼스트맨]을 통해 닐 암스트롱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내면으로 들어가보려는 노력을 했다는 점에서 우선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기특했지만, 역시 결과적으로는 실패할 것이라는 예상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많은 평론가들이 평가한 것과 내 생각은 조금 많이 다르다. 촬영 및 음향 등 기술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탁월한 성취를 이루었으며, 라이언 고슬링이 연기한 닐 암스트롱이 가진 내면의 고충 역시 나름의 설득력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드러내고자 했던 철학적 깊이는 얄팍하다. 영화의 결말에서 무언가 깊은 성찰을 이끌어내려 했지만, 감독이 가진 이해의 폭 자체가 피상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 보니 동명의 원작 평전 이상의 깊이를 결코 보여줄 수 없었던 듯 보인다. 세상을 떠난 딸의 팔찌를 우주로 떠나보내며 눈물을 흘리는 닐 암스트롱의 모습에서 관객은 감동도, 깨달음도 얻을 수 없다. 그저 개인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써가며 국가적인 차원에서 달에 가려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미국이 달에 간 이유는 지극히 정치적이며 도구적이었다. 이걸 개인의 극복 서사로 포장하여 영화적으로 그럴듯하게 표현하는 것은 그 자체로 현실을 외면한 기만이다. 달에 가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지만, 그 안에서 철학적인 성찰을 이끌어내고 싶었다면 달 착륙과 관련된 거시적 컨텍스트를 완전히 지워버리면 안되는 것이었다. 결국 관객은 ‘또 미국식 가족 신파야? 달 위에서 울려고 두시간동안 그렇게 고뇌한거야?’라는 하품 섞인 하소연만을 할 뿐이다.

셔젤이 닐 암스트롱을 주제로 액션 SF 어드벤처를 찍을 것이라고 기대한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고색창연한 필름을 이용해 영웅의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시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아폴로 11호와 관련된 모든 영화들 중 가장 사색적인 영화일 것이다. 다만 꽤 괜찮은 시도만이 있을 뿐, 의도했던 성과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 이 영화가 가진 뼈아픈 실책이다. 이건 감독이 조금 모자라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을 것이다.

Peter Farrelly | Green Book

3월 중순,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본 또다른 영화는 [그린북]이다. 이 영화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한 클래식/재즈 피아니스트 돈 셜리(Don Shirley)와 그가 미국의 남부(“Deep South”) 지역 순회공연을 위해 고용한 프랭크 발레롱가(Frank Vallelonga)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를 감독한 피터 패럴리의 전작들이 [덤 앤 더머],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와 같은 코메디물이고, 프랭크 발레롱가의 아들 닉 발레롱가(Nick Vallelonga)가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여 돈 셜리라는 실존 인물을 왜곡하여 다루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등, [그린북]을 둘러싼 잡음과 의구심이 상당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충분한 사회적 의미와 영화적 매력을 가지고 있다.

먼저 의미라 함은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가 그리 가볍지 않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돈 셜리는 흑인이었고, 그가 발레롱가와 함께 남부지역을 여행한 때는 1960년대였다. 즉, 비교적 인종차별에서 자유로웠던 미 동북부 지역이나 서부 지역과 달리, 당시 우리가 ‘”Deep South”라고 부르는 남부 7개 주에서는 흑인이 백인 밀집지역을 돌아다니면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때였다. 셜리가 클럽 기도 등 ‘해결사’ 역할로 생계를 유지하던 덩치 발레롱가를 운전기사 겸 보디가드로 고용한 이유도 이때문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공항에 내렸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곳에 남부군 깃발(Confederate Flag)이 걸려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고, 실제 친구 스캇의 결혼식 뒷풀이에서 그곳에 살던 몇몇 백인들이 나에게 다가와 “네가 들었던 악명과 비교해 실제 남부에 와보니 어때?” 라고 농담 반 진담 반 질문을 던졌다. 당연히, 스캇의 성대한 결혼식에 참석한 아시안은 나 하나였다. 비록 지금은 흑인과 백인이 함께 길거리에서 공존할 수 있는 환경까지 조성이 되었다고 하지만, 흑인 입장에서 ‘내 조상이 저기 보이는 백인의 조상의 노예였다’ 라는 사실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며, 그건 백인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가 선거운동을 할 당시 흑인 인구비율이 가장 높은 이 남부지역에 한번도 오지 않았다는 기록은(그는 백인 인구비율이 압도적이었던 콜로라도나 아이오와 주에 10번 이상 들렸다), 그 많은 남부지역 흑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의 주인’이었던 농장주의 후손들이 지지하는 보수정당에 투표한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슬픈 통계지표일 것이다. [그린북]은 현재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미국 남부지역의 이 슬픈 사회적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진중하고 조심스러운 자세로 접근한다. 물론 감독의 성향(..) 상 어이 없는 지점에서 도덕적 기준을 상실하는 순간도 발견되긴 하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밑도 끝도 없는 헤피엔딩’은 아닌 것이다.

재미도 있다. 전형적인 버디 무비가 될 뻔한 이 영화를 구워한 것은 다름 아닌 두 주연배우, 비고 모르텐슨(Viggo Mortenssen)과 마허샬라 알리(Marhershala Ali)다. 비고 모르텐슨은 아주 자연스럽게 인종차별을 체득한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분해 돈 셜리와의 여행을 통해 성장하는 캐릭터를 훌륭히 연기해냈다. 물론 캐릭터의 전형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교양 없는 서민계층 백인이 훌륭한 음악에 감화되어 그동안 고수해온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꾼다는 설정도 약간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능청맞게 이탈리아식 영어 억양을 구사하는 그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절로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문라이트]에서 매우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 마허샬라 알리는 [그린북]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역량에 걸맞는 주목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연기하는 교양 넘치는 흑인 피아니스트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연기 교본으로 쓰일 수 있을 것 같다. 실제 돈 셜리는 클래식 피아니스트로 출발했지만 유리장벽 등으로 인해 그 바닥에서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그나마 흑인 뮤지션이 활동할 폭이 넓은 재즈/크로스오버 장르로 넘어왔다고 한다. 심지어 당시 상당한 탄압을 받던 성정체성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방대한 역사적 컨텍스트를 절제된 연기에 담아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걸 알리가 해냈다! 그의 연기를 보며 ‘탁월하다’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린북]은 완벽한 영화는 아니다. 헛점도 많고 한계도 분명하다. 생각보다 가볍다고 느끼는 관객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꽤 모범적인 수준에서 주제를 잘 형상화했고, 두 배우의 인상깊은 연기가 영화에 깊이를 더해주며 나쁘지 않은 영화적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Marielle Heller | Can You ever Forgive Me?

지난 3월 중순, 1박 4일(?)의 끔찍한 여정을 소화하며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다녀 왔다. 미국 유학시절 사귄 친구 스캇의 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는데, 학기 중이라 주말 밖에 시간을 내지 못해 기형적인 여정이 나와버렸다. 친한 친구의 행복한 날을 축복해주기 위해서라면 얼마를 쓰든 며칠을 길 위에서 허비하든 크게 개의치 않지만, 이제 더이상 청년이라고 우길 수 없는 나이대로 접어들어서인지 육체적으로 쌓이는 피로는 피할 길이 없었다. 비행기 소음에 취약해 기내에서 잠을 잘 자지 못하는 치명적인 약점까지 겹쳐져 이번 여행은 오고 가는 길이 유난히 힘들었다. 덕분에(..) 기내에서 많은 영화를 보았는데, 지금까지 생각나는 영화가 몇 편 있다. 그 중 하나가 실존인물이 직접 쓴 회고록을 기반으로 만든 [Can You ever Forgive Me?]다.

영화속 리 이스라엘(Lee Israel)은 괴팍한 성격을 가진 실패한 작가다. 일은 잘 풀리지 않고 술만 늘어간다. 비사교적인 성격은 그를 점점 고립시킨다. 그녀의 삶에 작지 않은 변화를 불러일으킨 건 우연히 발견한 유명작가의 서명이 들어간 편지였다. 중고서점 등을 통해 유명작가의 서명이 들어간 편지가 고가에 거래된다는 사실을 알아낸 리 이스라엘은 작가적 능력을 발휘하며 직접 위조편지를 작성하여 여러 서점에 팔아 넘기기 시작한다. 명백한 범죄인 셈인데, 영화는 당연히 순리에 맞는 결말로 침착하게 나아간다. 큰 반전 없이 처벌을 받게 된 주인공은 투닥거리는 와중에도 그녀를 위로해주던 하나 뿐인 게이 친구가 에이즈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개인적인 고통도 경험한다. 사실 특별할 것 없이 뻔한 이 영화를 피로가 켜켜이 쌓인 빨간 눈을 부릅뜨고 끝까지 본 이유는 주인공 리 이스라엘 역을 소화한 배우 멜리사 맥카시(Melissa McCarthy)의 연기때문이다. 그녀의 연기는 너무도 탁월하여 알콜 중독에 성격까지 고약한 범죄자 여성을 특별한 캐릭터로 탈바꿈시켜버린다. 영화는 결코 리 이스라엘의 삶에 동정이나 연민의 시선을 보내지 않지만, 맥카시의 연기를 통해 한번쯤 주변에 있을 법한 이웃의 모습을 성공적으로 그려낸다. 영화에서 연기자의 힘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조던 필 | 어스(2019)

[겟아웃]으로 세상을 놀래킨 감독 조던 필(Jordan Peele)의 신작 [어스(Us)]는 국내 개봉 당시 극장에서 본 영화다. 아내와 함께 [겟아웃]을 보았을 때 꽤 신선하고 기분 좋은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조던 필의 신작을 손꼽아 기다리던 터였다. [어스]는 그의 담대한 시선이 조금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갔을 때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전작이 서스펜스의 형식을 띠고 있다면 [어스]는 조금 더 기존 공포영화의 틀에 가까운 외형을 띠고 있다. 관객 심리를 들었다 놨다 하는 장르적 특성을 십분 발휘하여 서사를 본인이 원하는 지점까지 무리 없이 끌고 간 후, 영화가 품고 있는 가장 큰 반전을 영화의 주제의식과 한 몸처럼 꽉 끼워맞추는 재주는 이번 영화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 점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제목 [어스(Us)]는 주인공 가족, 그리고 그 가족과 대립하는 또다른 가족을 구분 짓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The United States)을 상징하는 약어(US)로도 읽힌다는 점에서 감독이 영화에서 제기하고 싶어했을 미국사회의 양면성, 즉 계급 갈등과 인종 갈등 문제에 대해 머뭇거리는 태도 등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고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영화는 비록 끔찍한 비극으로 마무리되지만, 조던 필 특유의 낄낄거리게 만드는 유머는 이번에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미국사회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수록 그의 디테일한 비유와 풍자가 영화 곳곳에 스며들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요즘 사회에 꼭 필요한 감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트럼프로 대변되는 미국 주류 백인사회에 대항하는 공격수로 이만한 예술가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극장 밖을 나선 후에도 꽤 오랜 기간 곱씹어볼만한 이슈를 제시한다. 영화라는 장르를 이용하여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고민할 때 가장 먼저 참고해야 할 레퍼런스다. 주인공 역을 맡은 루피타 은용고(Lupita Nyong’o)의 참담한 표정과 목소리가 아직도 생각난다.

수잔 존슨 |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2018년 넷플릭스 월드에서 뜨거운 화제를 모았던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는 화제성만큼 충분히 귀엽고 재미있는 영화다. 한국계 작가 제니 한(Jenny Han)의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영화적 상상력이라는 방어막을 영리하게 활용하며 십대 소녀의 달뜬 마음을 유쾌하고 거침없이 풀어낸다. 주인공 라라 진은 한국계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지만 백인 아버지, 두 자매와 함께 씩씩하게 생활하는 전형적인 아시안-어메리칸 십대 소녀다. 주인공의 ‘전형성’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꾸준하게 드러나는데, 이건 백인 주류사회가 바라보는 모습이기도 하고 실제 한국계 미국인 학생들이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나름의 당위성을 부여받는 측면이 크다. 라라 진 뿐 아니라 이 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주요 캐릭터들이 사회적 관습과 고정관념에 기반한 전형성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데, 겉으로는 자상한 아버지이지만 딸들의 개인사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 백인 가장 아버지, 백인-미남-운동선수-인기남 vs (역시)백인-(역시)미남-내성적인 독서광-비인기남 구도의 남자친구 선택 결정 과정, 주인공의 든든한 지원군인 친구들은 화장을 짙게 한 별난 동성친구와 흑인-게이 이성친구라는 점 등이 그러하다. 물론 영화는 이런 전형성을 그대로 물려받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문화적 관습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면서 캐릭터 구성에 쏟을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한편, 서사구조를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비트는 쪽에 집중하여 나름의 독창성을 구현해냈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사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관객의 ‘공감’일텐데, 그 부분에서 훌륭하게 성공한 듯한 인상을 받는다. 곁가지 없이 깔끔하게 구성된 서사구조 위에 주인공 역을 맡은 베트남계 라나 콘도르(Lana Condor)가 훌륭한 연기를 선보인다.

알폰소 쿠아론 | 로마

내가 근무하는 대학교의 단과대학 건물에는 네 개 학과가 함께 살림살이를 꾸리고 있다. 학교로 적을 옮긴 후 고개 숙여 인사하는 대상이 확 줄어들었다. 교수끼리 고개 숙여 인사할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고개 숙여 인사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학교 복도에서 청소하는 중년의 여성을 만날 때다. 나는 아직도 복도와 화장실을 청소하는 그들이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일해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지만(그것이 자의에 의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삶에 대한 애착과 고단함에 굴복하지 않는 강인함을 온 몸으로 드러낼 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경기침체와 빈부격차 확대, 질좋은 일자리의 감소 등 거시경제의 부정적 여파가 미시적 개인의 삶 속으로 파고들 때 가장 앞자리에서 그 고통을 온 몸으로 견디어 내야 하는 계층은 항상 성인 여성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무너지지 않고 늘 사회의 진보를 이끌어 왔다. 사회적으로 낮은 곳에 위치한 노동자 여성의 숭고함에 존경심을 표하는 길에는 그래서 한계가 없어야 한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그래비티] 이후 5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자 [이투마마] 이후 멕시코로 돌아가 스페인어 – 와 멕시코 원주민어 – 로 찍은 첫번째 영화, 그리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극소수의 극장에서만 개봉한 뒤 넷플릭스 스트리밍으로 공개한 영화. 이 때문에 깐느 영화제와 출품 자격 문제로 시비를 겪었고 마침내 베니스 영화제에서 공개되어 심사위원 전원일치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화제작. 심지어 쿠아론 본인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놓은 영화라는 소식까지. [로마]는 최초 공개 시점부터 꼭 보고 싶었던 영화였고, 항상 위시리스트 첫머리에 위치한 영화였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보았다!

[로마]는 흑백영화다. 배경음악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파노라마로 넓게 펼쳐진 화면 안에서 카메라는 흔들리지 않고 횡으로(그리고 가끔은 종으로) 조용히 움직인다. 그래서 영화의처음부터 끝까지 관조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을 잃지 않으며 오로지 영화의 주인공에 집중하게 만든다. 영화의 주인공은 클레오, 멕시코시티 로마 지역의 한 중산층 가정에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젊은 여성이다. [로마]는 클레오에 대한 이야기다. 클레오의 캐릭터는 이 영화의 감독인 알폰소 쿠아론이 유년 시절 시간을 함께 보낸 가정부 로비 로드리게즈를 모델로 탄생했다. 감독은 50년 쯤 전 기억을 꺼내어 이를 영화로 재현했다. 클레오와 그녀가 보살피는 가정이 사는 집은 쿠아론이 어렸을 때 살던 집을 그대로 본따 제작했으며, 심지어 그 집 안에 있는 소품들은 쿠아론의 가족이 쓰던 것들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전적으로 개인의 기억에 기대어 제작된 영화이지만 영화의 시선이 무척 객관적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쿠아론이 이 영화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안으로부터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부유한 중산층 가정과 그 가정 안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삶을 이어가는 하위 계급에 관한 영화라는 점에서 최근 개봉한 [기생충]과 서사적으로 맞닿아 있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기생충]이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를 반복하며 계급 갈등 문제를 노골적으로 비꼬는 방향을 택했다면, [로마]는 횡으로 가지런하게 움직이는 카메라만큼이나 계급 간 갈등보다는 수평적인 ‘관계’에 보다 집중하고 있는 듯 보인다. 영화 속 클레오는 고용인 부부의 아이들과 평화롭게 어울린다. 아이들은 부모보다 클레오를 더 많이 따르고, 클레오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이도 고용인들이다. 즉, 이 영화는 멕시코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빈부격차 문제에서 눈을 돌리지 않지만, 일차원적으로 그 갈등을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문제가 개인의 삶에서 극복되어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남자에게 버림받은 두 여성이 서로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클레오는 영화 속에서 큰 개인적인 슬픔을 겪게 되는데, 그 사건 이후 슬픔 안으로 가라앉지 않고 고용인의 아이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지속적으로 나누어준다. 이를 통해 [로마]는 쿠아론이 자신의 유년 시절을 가꾸어준 보모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헌사이자, 그녀로 상징되는 노동자 여성에 대한 감독의 따뜻한 시선이 깊게 스며든 영화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영화는 빈부격차 문제 외에도 멕시코의 사회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영화의 절정 부분에 해당하는 지점에서 주요한 배경이 되는 사건은 시위 도중 120명이 학살된 ‘성체축일 대학살’ 사건인데, 가구점에서 주인공 클레오를 어려움에 몰아 넣은 남성과 마주치는 장면, 이후 병원에서 겪게 되는 클레오의 개인적인 비극 등과 합쳐져 상당한 감정적 파고를 이끌어낸다. [로마]가 개인의 이야기를 다루되 회고적인 시선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인 차원으로 이야기를 확장하여 극복의 서사를 제시하는 과정은 사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암시되어 있다. 클레오와 중산층 가정이 사는 집의 현관 앞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개똥들과 이를 물로 깨끗히 씻어내려는 클레오의 청소 장면이 바로 이 영화가 던지는 주제의식을 단적으로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감독은 아마도, 내가 추측하기에, 한 사회가 봉착한 어려움이 개인의 삶으로 스며들어 그들을 괴롭힐 수 있지만, 이와 반대 방향으로 에너지의 흐름이 움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즉, 사회는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반대로 개인의 작은 몸짓의 집단적 결합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쿠아론이 바라보는 대상, 클레오는 아마도 그 다른 흐름의 실마리는 제시하는 인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극복’의 서사의 한 가운데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사랑이다. 클레오가 가진 한없이 선한 마음과 그녀가 주변의 타인들에게 나누어주는 아낌 없는 사랑. 산불이 났는데도 술잔을 들고 나와 노래를 부르는 한심한 상위계급이 심화시키는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는 유일하고도 가장 현명한 방법은 아마도, 지하의 허름한 술집에서 새해를 축복하기 위해 일꾼들이 나누어 마시는 따뜻한 술잔, 혹은 그 술잔에 담긴 사랑과 연대의 마음이 아닐까. 쿠아론은 [로마]에서 유년 시절의 자신에게 사랑을 베푼 한 여성에게 끝없는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고 있는 한편, 이와 동시에 자신의 뿌리인 멕시코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문제들을 이 여성과 그녀가 속한 노동자 계급이 가진 숭고한 연대와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소망을 넌지시 전달하고 있다. 이 덕분에 영화는 다른 차원으로 승화한다. 더이상 개인의 회고록이 아닌, 영화사 전체에 걸쳐 큰 의미를 가지는 엄청난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걸 극장이 아니라 넷플릭스 플랫폼으로 본다는 경험도 흥미롭다. 소파에 앉아, 가족과 함께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감독이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영화의 주제의식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알폰소 쿠아론을 ‘작가’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영화로 인해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좋은 영화를 만들어주어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