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맥도나 | 쓰리 빌보드

three-billboards-outside-ebbing-missouri-2696_8
우선 영화의 원제는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다. 이걸 그냥 [쓰리 빌보드]로 자신감 넘치게(!) 줄여버린 국내 배급사의 호기에 경의를 표한다. 이 영화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역성(locality)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즉, 한국어 제목에서 사라진 “outside Ebbing, Missouri”는 그 자체로 상징하는 바가 꽤 크다고 할 수 있다. “연쇄살인범의 주”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미주리주에서 치안은 꽤 심각한 사회문제다. 여기에 (영화에서도 주된 비판의 대상이 되는) 흑/백 인종 갈등 문제가 더해져 2014년 세인트루이스 근교 퍼거슨에서는 대규모의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경찰과 같은 공권력이 지켜주지 못하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웃을 적으로 돌려야 하는 이 곳의 냉랭한 분위기는 어린 시절의 제니퍼 로렌스가 열연한 [윈터스 본]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에빙(Ebbing)이라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작은 도시는 물론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마을이다(영화를 촬영한 곳은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실비아(Sylvia)라는 도시다) 대부분의 이웃이 서로를 알고 있을 정도로 익명성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작은 마을, 이 곳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누군가를 적으로 돌려야 한다면 그 절박함은 상당한 수준일 것이다. 이 영화는 이 폐쇄적인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원한과 분노, 복수에 대한 이야기다.

우선, 예고편을 보고 상상했던 이야기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 깜짝 놀랐다. 납치된 딸을 경찰 대신 추격하는 엄마가 주인공인 스릴러물을 상상했는데(도대체 왜 이런 상상을 했을까..) 정작 영화는 블랙 코메디에 가까운 서사를 느린 템포로 보여준다. 강간당하고 불태워진 딸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던 엄마는 거금을 들여 마을 외곽에 있는 광고판 세 개에 광고를 게재한다.

“(내 딸은) 죽임을 당하는 동안 강간당했다”
“그런데 아직도 범인을 잡지 못했다고?”
“대체 어떻게 된거야, 윌로비 서장?”

이 세 문구는 그 자체로 충분히 강력하게 영화의 주제를 함축한다. 영화는 이 세 광고판에 새겨진 분노가 작은 마을에서 어떻게 되물림되는지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분노의 힘은 우연과 필연을 가로지르며 한 엄마에게서 경찰서장에게로, 경찰서장에게서 형사를 꿈꾸는 충성스러운 경찰에게로, 그리고 다시 엄마와 경찰에게서 강간범으로 의심되는 한 남자에게로 전이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멍청한 캐릭터로 등장하는 19살 여자의 입에서 나온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낳는다”라는 문구는 영화의 모든 주제를 집어삼키는 단 하나의 키워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모든 행동에 대해 충분한 개연성을 부여받는다. 그 누구도 지독하게 악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비현실적으로 선하지도 않다. 적당히 약았고 적당히 이기적이며 또 적당히 비겁하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분노의 대물림이 희극적으로, 혹은 부조리극에 가까운 형태로 표현되는 동안, 자연스럽게 ‘대체 왜 일이 이지경까지 오게 되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딱히 잘못한 사람도 없고 딱히 잘한 사람도 없는데 모두가 조금씩 망가져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마음 한켠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낀다. 이와 동시에, 누군가의 슬픔이, 혹은 누군가의 분노가 어떤 지점에서 어떤 계기에 의해 멈출 수 있었다면, 과연 이 마을은 다시 평화를 찾게 되었을까, 하는 의심도 살짝 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결국 이 분노와 복수의 서사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되면 코언 형제의 걸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까지 떠올리게 된다. 현실을 비추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작은 마을의 비극적 이야기가 성공적으로 현실 그 자체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날카롭게 미국의 현재를 비춘다. 미국은 갈등의 천국이기도 하지만 봉합의 귀재이기도 하다. 어떤 갈등이 발생하면 미디어와 정책 당국은 재빠르게 “하나의 미국”을 외치며 휴머니즘을 화려하게 포장한다. 대규모 총기 살해사건이 발생한 다음날에는 서로를 껴안으며 슬픔을 나누는 유가족의 모습이 영웅적으로 표현된 사진이 모든 신문의 1면 톱에 등장한다. 총기규제를 위한 실질적인 논의는 처음에만 잠깐 반짝할 뿐 곧 강력한 로비에 막혀 용두사미 형태로 마무리된다. 미국의 이러한 위선적인 갈등 봉합 과정은 비슷한 형태와 구조의 갈등의 재발을 필연적으로 불러온다. 아마도 확실히, 올해 안 언젠가, 미국의 한 학교에서는 복수의 학생이 총기에 의해 살해당할 것이다. 미국 정부는 그것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방치하고 있다. 주민을 지키지 못하는 미주리주 경찰처럼. 그리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당신들이 스스로 이겨내야만 한다고. 이 역시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윌로비 경찰서장의 모습과 흡사하다. (자살 후 ‘따뜻한’ 편지를 남기는 모습까지 미국사회를 그대로 재현했다!) 과연 딸을 잃은 어미에게 그 슬픔을 오롯이 혼자 감당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옳은가, 라는 질문은 현재의 미국 사회에도 똑같이 돌려줄 수 있는 질문이다. 자살한 윌로비 서장은 위선적인 미국의 시스템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고, 강간범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기 위해 길을 떠나는 ‘답 없는’ 어미와 경찰은 혼란을 겪고 있는 미국인 전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션 베이커 | 플로리다 프로젝트

florida1
션 베이커 감독의 전작 [탠저린(Tangerine)]을 굉장히 인상 깊게 봤다. 비전문배우들과 함께 아이폰으로 촬영해서 만든 영화라는 점, 트렌스젠더-매춘이라는 LA 최하위문화를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도 충분히 인상적이었지만, 영화의 기본 서사구조가 매우 전통적이면서도 탄탄하다는 점이 가장 놀라웠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평단으로부터의 좋은 평가와 함께 영화제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는 등 세상의 어두운 면을 올곧은 시선으로 관찰하는 션 베이커에게 새로운 힘을 실어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가 조금 더 단단한 모습으로 돌아와서 무척 반갑고 행복했다.

영화는 몹시 아름답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종의 마법, 혹은 기적과도 같은 장면들을 내뿜는다. 아이들이 두 싸구려 모텔을 오가며 작은 이야기들을 하나 둘 쌓아올려가는 과정이 신비롭기만 하다. 빈민가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 분모를 가진 [문라이트]가 상대적으로 희곡적인 요소가 강한 반면,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영화적이다. 이 점이 우선 가장 놀라웠다. 션 베이커가 한단계 더 높고 깊은 세계로 나아갔음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단순히 미학적인 진전만을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제 ‘미국의 다르덴 형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윤리적 시선도 더 강하고 단단해졌다. 전작에서 성소수자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던 베이커는 이번 영화에서는 히든-홈리스(hidden homeless)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모텔에 장기 투숙하기 때문에 통계상 홈리스로 잡히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그와 비슷한 수준의 열악한 삶의 조건에 놓인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무니의 엄마는 무니를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그녀를 온전히 지켜낼 능력이 없다. 무니는 엄마와 함께 하는 일상이 너무 행복하지만, 그 끝에는 “절친과 다시 만나지 못할”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 사이에는 이 안쓰러운 모녀를 묵묵히 지켜보지만 그 자신조차 이 싸구려 모텔의 가난한 삶에서 구원해내지 못하는 바비라는 모텔 관리인이 있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코끝 찡한 사연이 전혀 유치하지 않게,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의 완전한 결론으로 나아가는 과정 역시 아름답다. 서서히 중첩되는 서사구조 안에서 방향성이 흔들리지 않고 일관된 하나의 결론으로 우직하게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영화의 엔딩씬은 또다른 마법의 시작이다. 영화 시작 후 처음으로 배경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이 씬은 (아마도 확실히) 아이폰과 같은 다른 기기로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거칠고 투박한 카메라의 시선이 두 소녀의 뒤를 바짝 따라 붙을 때 기묘한 체험이 새롭게 시작됨을 알 수 있다. 두 소녀의 여행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 때 쯤 영화는 갑자기 끝나게 되는데, 엔딩 크레딧의 배경음악으로 (아마도 확실히) 디즈니랜드의 실제 군중 목소리가 삽입된 것을 보면 관객의 마음 안에서 두 소녀의 여행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감독의 마음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추측해보게 된다. 나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적인 기적을 체험했다.

데이빗 레이치 | 데드풀 2

데드풀2
[데드풀]을 보지 않았다. 마블 시리즈도 거의 챙겨보지 않았다. [데드풀 2]를 보기 전 유심히 들여다본 작품이라면 바로 직전에 본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비행기 안에서 본 [앤트맨]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드풀 2]를 유쾌하게 즐길 수 있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다스럽다. 영화와 직, 간접적으로 얽힌 많은 문화적 코드를 안주 삼아 신나게 씹어댄다. 하지만 영화에서 사용하는 문화적 코드가 엄청 딥-하지는 않다. 나처럼 마블 시리즈를 거의 보지 않았지만 대중문화코드에 적당히 노출된 관객이라면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을 정도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크게 두가지였다. 첫째, 이 영화는 ‘제 4의 벽’을 적극적으로 허물고 있다. 구글링을 해보면 원작의 설정에서 데드풀은 자신이 카툰 안에 존재하는 캐릭터임을 자각하는 유일한 존재라고 한다. 그래서 카툰 밖으로 나와 작가들의 세계(현실)를 침범하는 에피소드까지 있을 정도라고 하니, 각종 문화코드를 먹잇감처럼 잘근잘근 씹어대는 데드풀의 캐릭터를 극단적으로 확장하면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점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었다. 관객과 대화하며 ‘이제부터 사람을 많이 죽일텐데 이건 다 오락이고 뻥이야’라고 미리 알려주는 친절한 캐릭터라니. 좋은 시도라고 느꼈다. 둘째, 단순히 선정적인 표현만이 난무하는 성인을 위한 오락영화라고 하기에는 [데드풀 2]가 가진 정치적인 균형감각이 매우 뛰어나보였다. 다인종-동성애자 커플을 주요 조연으로 배치한 점이나 대안가족의 형성을 영화의 큰 테마로 설정한 점, 뚱뚱하고 못생긴 소년을 안티-히어로 역할로 배치하여 전통적인 히어로물의 프로토타입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점 등은 이 영화가 가진 절묘한 정치적 감각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쉴새 없이 튀어나오는 거의 모든 대사에서 정치적인 올바름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건 계산이라기 보다는 감각, 혹은 자세의 영역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나 싶다. 작가들의 능력이 놀라울 뿐이다.

이창동 | 버닝

이창동 버닝
결론부터 말하면, [버닝]은 이창동의 필모그래피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기록될만한 가치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동시대에 존재하는 모든 한국영화들 중 최고의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그만큼 이창동은 완전히 다른 레벨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또한, 이창동이 차기 작품에서 나아갈 방향에 대한 단서들을 꽤 많이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 [버닝]은 매우 흥미로운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먼저 이창동의 다른 영화들과 비교하여 [버닝]이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혹은, 그 진실성을 표현하는 방법이 상투적이고 진부하다. 이 영화를 ‘현 시대 젊은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 혹은 공감’으로 해석한다면 이 상투성은 더 크게 다가온다. 현실은 지옥이고 전쟁인데, 이창동은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못한채 현학적으로 현실을 ‘음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영화적으로 가장 잘 하는 것은 ‘선’을 제대로 긋는 것이다. 그가 만든 모든 영화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정확하고도 올곧은 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버닝]에서도 그가 가진 시선은 옳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파주와 반포 사이 어딘가에 줄세워져 있을 것이고, 파주의 젊은이가 가진 응축된 분노와 반포의 젊은이가 가진 책임감 없는 쾌락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현실은 이미 모두가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뼈에 사무치도록 경험하고 있는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이다. 이창동의 [버닝]에서는 현실의 차가운 촉감을 느낄 수 없다. 매혹적인 장면들과 구조주의적인 대사, 잔뜩 꼬아버린 서사구조가 이 시대 젊은이들의 고통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물론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영화가 되긴 했다(후술할 것이다). ‘존재’에 대해 묻지 않고 ‘부재’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방식은 굉장히 날카롭다. 하지만 어른인 그가 청춘의 비틀거림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딘가 어설프고 동떨어져 있다. 진심어린 위로의 목소리를 느낄 수 없다. 그렇다고 지옥도 안에서 함께 숨쉬고자 하는 연대의식도 찾을 수 없다. 영화의 구조적 완성도에 천착한 나머지 메시지를 다듬는 일에 조금 소홀하지 않았나 느껴질 정도다.

둘째,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방식은 오히려 퇴보했다. [오아시스], [밀양], [시]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여성을 향한 서늘하고도 뜨거운 양가적인 시선은 이번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쓸데없이 벗기고, 대상화시키는 데에 적극적이다. 아름다운 석양 아래에서 춤추는 장면을 보며 이창동이 이번에는 여성을 굉장히 나이브하게 담아내려고 작정했구나, 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해미'(전종서 扮)로 대표되는 주요 여성 캐릭터 자체가 [버닝]이 가진 미스테리하고 다차원적인 서사구조를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해석하면 아예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영화에서 해미만큼 적극적으로 영화의 주제의식을 함축하고 있는 캐릭터도 없는 셈이기도 하다. 다만, 감독의 여러 의도 중 하나가 이 영화에 대한 다채로운 해석의 공존에 있다면, ‘모든 것은 실재하는 현실’이라고 이 영화를 이해하는 관객에게는 해미의 역할이 충분히 불쾌할 수 있다. 실재하는 여성의 벗겨진 모습을 대상화하는 주인공에게 요즘 젊은층의 대표성을 부여할 수 없다고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셋째, 이 영화는 조금 비겁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대표적이다. 종수의 극단적인 선택은 그의 개인적인 선택이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 혹은 그가 대표하는 사회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운명을 묘사하는 쪽에 가깝다. 과연 그의 선택이 온당하고 합당한가. 혹은, 어른의 시선으로 젊은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위로의 최선이 그것이었는가. 나는 조금 더 담대하고 조금 더 따뜻한 무언가를 원했던 것 같다. 차라리 조금 덜 허무하게 인생을 이어나가는 쪽이었다면 납득하기 수월했을 것이다. 극단적 선택을 이끄는 하나의 결론에 종수가 사로잡혀가는 과정은 논리적으로 정당하지 않으며 강제적이지도 않고 숙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미스테리한 서사구조를 위해 희생되어야만 하는 것이 있다면, 왜 하필 그것이 종수의 선택이었는지도 궁금하다.

하지만 [버닝]이 여전히 동시대 모든 한국영화, 더 나아가 꽤 많은 전세계 영화들과 비교하여 여전히 압도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영화가 가진 다층적인 서사구조를 이해하는 과정 자체만으로 충분히 지적으로 즐겁고 흥미롭다. 영화는 종수(유아인 扮)가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을 묘사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의 모든 씬 중 종수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 장면은 거의 마지막 즈음 딱 한 번 등장한다. 벤(연상엽 扮)이 화장실에서 화장도구를 꺼내 여성을 화장해주는 장면 말이다. 즉, 이 영화는 종수가 바라보는 모습이 모두 다 실재하는 현실인지, 혹은 중간 중간 잠들었던 그가 꿈에서 깬 이후부터 전개되는 현실인지, 혹은 그 꿈에서부터 환상이 시작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영화의 종반부에 종수가 해미의 방에서 열심히 타이핑하는 그 소설의 내용이 그냥 이 영화 자체인지 알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 관객은 그 어떤 가능성으로 해석해도 영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며, ‘실재’와 ‘부재’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영화의 형식과 그 형식을 바라보는 관객 모두가 하나의 주제의식을 형성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여러 상징물과 촘촘히 직조된 대사들을 끼워맞추는 행위는 그래서 재미를 넘어 관객 스스로 영화의 주제의식을 형상화시키는 하나의 의식으로 승화되기에 이른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에 대한 어른의 시선, 혹은 공감’이라는 사회적 키워드만 제거한다면, 이 영화는 영화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조립품질을 자랑한다. 결국 나는 이 영화가 영화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어쨌든, [오아시스]에서부터 차근 차근 쌓아온 이창동의 ‘환상과 현실 간 모호한 경계’의 영화적 실현이 [버닝]에 이르러 미학적으로나 구조적으로 거의 완성단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둘째, 종수, 벤, 해미로 대표되는 영화의 중심 캐릭터는 이 시대의 사회상 그 자체를 상징한다. 그러니까 나는 처음부터 종수나 벤, 해미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영화 내내 그들이 인간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이창동은 살아있는 배우들이 연기하는 이 캐릭터들을 철저하게 사회 그 자체로 설계하고 표현하려고 의도한 듯 보인다. 종수라는 인물이 품고 있는 사회의 한 부분이 있다. 벤도 그러하고, 해미도 그러…할까? 아무튼, 최소한 종수와 벤의 대립 관계에서 관객은 파주와 반포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된 공기를 느낄 수 있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종수가 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벤이 종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현실을 환기한다. 최근에 등장한 그 어떤 영화에서도 이정도로 담대한 시선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진실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은 뼈아픈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중간에 멈춘 느낌이다)

셋째, 영화는 시각적으로 충분히 아름답고, 모든 씬이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다. 한 평론가는 이 영화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고 했는데, 사실 그 정도는 아니다. 허세가 약간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부터 이 영화가 영원히 끝지 않기를 바랐던 유일한 영화는 허우샤오시엔의 [빨간 풍선]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이창동답지 않게 멋을 잔뜩 부렸다. 그런데 완성도가 꽤나 훌륭하다.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랄 정도는 아니지만 몇 번이고 또 보고 싶어지게 만든다.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될 해미의 춤 장면이 대표적인 그런 장면일 것이고, 남산타워(혹은 서울타워)를 바라보는 해미의 옥탑방이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묵직한 한 방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창동의 전작들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많은 영화적인 장치들이 [버닝]에서는 깜짝 놀랄 정도로 높은 완성도와 함께 가지런하게 전시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이창동의 다음 영화가 무척 기다려지기도 한다. 구조적으로 영화를 직조하는 능력이 완성단계에 이르렀고, 시각적, 혹은 미학적으로 이를 표현하는 능력도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면, 이제 남은 것은 그 그릇안에 무엇을 담느냐 정도일 것이다. 그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무엇이 담겨 나올지 궁금하다.

김용완 | 챔피언

챔피언
영화는 너무나 상투적이고 진부해서 1%의 독창성도 발견할 수 없다. 이 영화를 영화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 같다. 다만, 영화가 사회상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생각한다면,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이 영화가 반영하는 현대 한국사회의 얼굴에서 조금 흥미로운 구석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먼저 이 영화는 ‘대안 가족’을 평범하게 그린다. 아주 무심한 표정으로,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이 영화의 밝은 결말이 대안가족의 ‘완성’이 되어버리게 만들어버린다. 이게 이 영화가 가진 무서운(?) 부분이다. 개그소재마저 어디선가 베껴온 듯한 진부함의 연속에서 주인공이 가짜 가족을 진짜 가족으로 만들어버리는 과정이 몹시 자연스럽다. 주인공의 배경은 이 영화가 반영하는 한국사회의 또다른 어두운 부분이다. 주인공은 미국으로 입양되어 친부모와 양부모 모두 여의고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달동네에 거주하며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비주류 스포츠의 최강자로 발돋움한다는 설정을 통해 영화는 한국사회가 가진 모든 비주류 정서를 한 사람 안에 무식하게 뭉뚱그려버린다. 이게 이 영화가 가진 두번째 무서운(?) 부분이다. 그야말로 이 영화는 한국사회에서 소수로 차별받는 모든 소재를 끌어다가 가장 주류 영화다운 방식으로 만든, 욕할 수 없을 정도로 천진난만한 정서를 가진 작품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평가하는 것이 더더욱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영화에서 신스틸러로 활약하는 귀여운 남매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이 이 영화를 상징하는 것 같다.   마동석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역할, 그로 인해 탄생한 역할을 무난하게 소화한다. 권율과 한예리도 딱 주류 영화의 평균적인 조연이 해야 할 부분까지만 무난하게 해낸다. 배우들의 연기가 딱히 훌륭하지도 않다. 그래서 더 불가사의한 영화다.

앤써니 루소, 조 루소|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avengers
전국 스크린의 80% 이상을 독점했다던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우리 부부에게 영향을 미칠거라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대전에서의 완전한 정착을 아직 이루지 못한 우리는 한가로운(?) 저녁 시간을 극장에서 보낼 때가 늘었는데, [레이디버드]까지 보고 난 직후 대전의 거의 모든 스크린을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쓸어담아버리는 바람에 사실상 이 영화를 보도록 강요받게 된 것이다. 문제는 내가 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관련 영화 중 그 어떤 영화도 보지 않았고 심지어 마블에서 발간한 그래픽 노블 중 그 어떤 것도 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내가 본 미국식 히어로물 그래픽 노블이라면 배트맨 관련 몇 권과 [왓치맨] 정도가 전부였다.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나를 만나기 전의 아내(짧게 말하기엔 좀 뭐하지만 간단히 정리하면 아내의 영화 취향은 나를 만나기 전과 만난 후로 나뉜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가 그나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대해 상대적으로 익숙하다는 점 정도였다.

아무튼, 마블의 세계관에 대해 어깨 너머로 주워들은 것이 전부인 나같은 사람도 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이해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었다는 점이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유일한 장점이다. 아 하나 더 있구나. 블록버스터 영화 한 편의 주인공 역할을 맡았어야 할 수퍼스타들이 씬 몇 개에만 등장하는 조연으로 나온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래서) 스칼렛 요한슨의 얼굴을 많이 보지 못한 점, 돈 치들, 폴 베타니, 마크 러팔로같은 좋은 배우들이 철저히 계산된 ‘money-making’ 대사들만 꼭두각시처럼 내뱉는 모습을 영화 내내 지켜봐야 하는 점, 조쉬 브롤린과 브래들리 쿠퍼의 얼굴을 전혀 볼 수 없는 점, 그 외 영화를 보는 동안 떠올랐던 374가지의 불만들은 모두 단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블의 히어로들과 세계관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도 알겠고 이 프로젝트가 왜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이는지 그 이유도 알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같은 사람은 이 영화를 볼 이유가 거의 없어보인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출연진들이 살짝 보여주는 키치한 세계에서 조금 위로받은 것을 빼면 이 영화가 가진 유머감각도, 서스펜스도, 서사도, 연기도, 연출도, 그래픽도,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레타 거윅 | 레이디 버드

lady_bird_ver2
뉴욕 독립영화계가 사랑해 마지 않는 그레타 거윅(Greta Gerwig)의 감독 데뷔작 [레이디 버드(Lady Bird)]는 사랑스럽고 따뜻한, 그리고 명민한 성장영화다. 그녀가 직접 주연을 맡고 공동으로 각본을 쓴 [프랜시스 하(Frances Ha)]를 본 이후 거윅이 영화를 만든다면 어떤 모습일지 무척 궁금해 했는데, 자전적인 이야기를 풀어낸 데뷔 작품에서부터 그녀의 젠체 하지 않는(down to earth) 성향이 적극적으로 드러난 것 같아 묘한 흥분감마저 느껴졌다. 캘리포니아의 작은 도시(사실 새크라멘토가 그리 작은 도시는 아닌데 뉴욕과 비교가 되다 보니..) 를 떠나 뉴욕으로 가고 싶어하는 한 소녀가 좌충우돌하다 부모의 품을 떠난 뒤에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어찌보면 흔하디 흔한 서사구조를 가지고도 주제의식의 진실성과 소소한 디테일을 앞세워 관객을 무장해제시켜버리고야 마는 능력은 분명 주목받아야만 한다. 거윅이 다른 감독의 디렉팅을 일방적으로 받는 연기를 하며 커리어를 마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연출가로서도, 극본가로서도 이렇게나 빠른 속도로 자기 세계를 구축해낼 것이라고 확신한 이도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샤얼샤 로넌(Saoirse Ronan)과 같은 재능 넘치는 배우를 만나 에너지가 꽌 찬 흥겨운 코메디-드라마 한 편을 잘 만들어냈다.

[레이디 버드]는 [프랜시스 하]의 프리퀄로도 받아들일 수 있고, [보이후드]의 코메디 버전, 혹은 여자 버전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프랜시스 하]에서 몸과 마음이 고갈된 프랜시스가 새크라멘토의 부모에게 돌아가 잠시나마 마음의 안정을 찾았던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노아 바움백과 그레타 거윅이 그 장면을 집어넣을 수 있었던 자신감의 원천을 [레이디 버드]에서 확인한 것 같아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또한 [프랜시스 하]에서 주인공의 ‘숨겨진 이름(중에서도 성(surname))’이 영화의 주제를 상징했던 것처럼 [레이디 버드]에서는 “내가 내 자신에게 지어준 이름(given name)”인 “lady bird”가 영화의 주제의식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레타 거윅이 스토리텔러로서 천착하는 주제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한편, [레이디 버드]는 엔딩씬에서 이야기를 완결짓지 않고 갑자기 끝낸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이 마지막 장면이 영화의 핵심이자 큰 매력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영화가 보여주는 부분(졸업시즌부터 입학까지) 이제 막 열여덟살이 되어 새로운 곳에서 첫 발을 내딛은 그녀에게 하나의 마침표로 기억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삶은 지속될 것이고, 그녀에게 어머니의 눈물은 삶을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원천으로 미래에서 기능할 것이다. [보이후드] 역시 주인공의 삶을 12년 간 따라가며 보여주지만 결코 하나의 완결된 서사로 마무리짓지 않고 현재에 충실하라는 숙어(“seize the moment”)로 결말을 대신한다. [레이디 버드]에서 주인공 레이디 버드가 부모에게 전화로 목소리를 남기고 어딘가를 불안한 시선으로 응시하는 장면과  [보이후드]에서 주인공 메이슨이 새롭게 만난 기숙사 친구들과 함께 황량한 자연으로 걸어들어가는 장면이 두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다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루카 구아다니노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callme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캐롤]과 [문라이트]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다양한 기준을 충족시키는 영화다. 유명한 소설이나 희곡을 원작으로 했다는 점, 주인공들이 동성의 대상을 사랑한다는 점, 뛰아름다운 음악과 영상이 함께 한다는 점, 무엇보다 감독의 엄청난 연출력과 그 연출력에 주눅들지 않는 뛰어난 연기력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점 등에서 여러모로 이 세 작품은 같은 선상, 혹은 비슷한 수준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세 영화가 많은 이들에게 찬사를 받은 본질적인 이유는 아마도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집중도가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캐롤]에서는 사회적 계급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두 여성의 절박한 마음이 유리창, 어깨너머의 시선 등의 장면으로 표현된 단절의 정서를 통해 절절하게 형상화되었고, [문라이트]에서는 하위 계급 흑인 동성애자 남성이 맞닥뜨린 바닥까지 내려가버린 가난한 마음을 새파랗게 질린 어슴프레한 하늘의 모습이 완벽한 상징체로 기능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주인공들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은 남부 이탈리아의 한여름 풍경이다. 기분 좋게 내리쬐는 뜨거운 햇살과 느긋한 안식처를 제공해주는 울창한 나무, 한낮의 더위를 식히는 쉼터이자 고단한 짝사랑의 무게를 잠시나마 씻겨내주는 강과 호수, 그리고 코끝을 간지럽히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들어오는 별장침대. 이 모든 것이 영화의 주인공 그 자체가 되어 첫사랑의 마음을 형상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음악이 있다. 수프얀 스티븐스(Sufjan Stevens)와 류이치 사카모토(Sakamoto Ryuichi) 등이 참여한 영화음악은 경쾌한 클래식 넘버들과 어우러져 주인공의 넘실대는 마음을 날것 그대로 표현한다. 아마도 이 영화가 대단히 관능적으로 느껴진다면, 그 배경에는 분명 영화의 풍경과 음악의 자리가 크게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관능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인공 엘리오와 올리버를 연기한 티모시 샬라메(Timothée Chalamet)와  아미 해머(Armie Hammer)의 존재다. 티모시 샬라메는 첫사랑의 떨리는 마음 그 자체가 되어 현현하고, 아미 해머는 사회적 관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괴로움과 결코 잊지 못할 상대를 만난 황홀함을 절제된 표정으로 잘 표현해냈다. 화면과 음악, 연기와 연출력 모두 나무랄데 없지만, 이와 비교해 조금 심심하다고 느껴졌던 서사구조 역시 마지막 즈음에 이르러 기어코 구원받는다. 주인공의 마음을 처음부터 헤아리고 있던 부모가 그들의 사랑을 사려깊게 배려하는 장면을 곳곳에 배치함으로써 이 영화는 조금 다른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보수적인 고고학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가톨릭 중심의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유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관습을 따라야만 하는 올리버와 달리 엘리오는 부모의 따뜻한 품 안에서 첫사랑의 상처를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둥지를 발견한다. 모닥불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엘리오를 옆에 두고 묵묵히 식사 준비를 하는 가족의 모습을 블러 처리하여 보여주는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그래서 인상적이다. 이 영화는 첫사랑의 달뜬 마음부터 고통스러운 이별의 아픔,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기꺼이 껴안아주는 성숙한 어른의 세계를 균형감 있는 매혹적인 시선으로 보여준다. 

조쉬 & 베니 사프디 | 굿타임

Good-Time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굿타임]을 동생을 사랑한 형의 좌충우돌 모험기로 읽어내려간다고 해도 그 자체로 크게 무리없이 완결된 서사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라면, 이 영화는 무척 심심하고 엉성한 작품으로 기억되어야만 한다. 형 코니가 맞닥뜨리는 상황들은 논리적으로 무리가 따르는 연결고리로 이어진다. 코니와 동생 닉이 타고가던 택시에서 갑자기 분홍색 가루가 터지는 순간부터 이 비논리적 연결고리를 이해해야 했다. 영화는 두 형제가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채 경찰에 쫓기게 되는 이 결정적 사건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 코니가 왜 유태인에게 돈을 맡겨야 하는지, 왜 그에게 압박을 받아야 하는지, 그래서 왜 병원으로 잡입하여 동생을 몰래 꺼내려는 시도를 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설명해주지 않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때까지 영화는 늘 이런 식으로 상냥하지 않게 군다. 그래서 동생 닉을 위기에서 구해내기 위해 형 코니가 뉴욕의 어두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 해가 뜨고 사건은 종료된다, 라는 서사구조는 심심하고 불완전해 보인다. 흔들리는 카메라와 가슴을 때리는 전자음악 등 감각적인 요소들만으로 이 영화를 설명하기에도 뒷맛이 개운치 않다.

하지만 평론가 정성일이 주장한 바대로 동생 닉의 머릿속에서 벌어진 꿈, 혹은 상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오는 시점은 영화가 시작되고 한참 뒤, 닉과 코니가 경찰에 의해 강제적으로 헤어진 뒤부터다. 영화는 코니와 닉이 분리된 시점부터 어떤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암시를 적극적으로 건네고 있다. 닉이 구치소에서 싸움에 휘말려 정신을 잃은 시점부터 형 코니의 모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코니가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취한다. 연인관계였던 코리는 중년의 여인이지만 엄마에게서 독립하지 못했고 아이처럼 울거나 보챈다. 코니를 집으로 들이고 방까지 내어주는 흑인 할머니, 집에 있는 염색약을 마음대로 쓰는 코니를 따라다니며 그에게 자동차 키까지 내어주는 손녀딸 크리스탈 모두 이유없는 친절함을 베푼다. 특히 열여섯 소녀인 크리스탈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일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어른스러움을 보여준다. 이 역시 비정상적이다. 닉인줄 알고 병원에서 몰래 데리고 나온 얼치기 죄수 레이와 그의 동료 칼리프 역시 코니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마약의 위치까지 공유하며 코니로 하여금 동생을 빼내오기 위해 돈을 모으려는 노력을 하게끔 만든다. 즉, 이 모든 주요 등장인물은 형 코니가 어떤 정해진 운명으로 나아가게끔 도와주는 조력자들로 기능할 뿐, 코니의 존재나 코니의 목적을 위협하는 방해요소가 되지 못하는 셈이다. 레이와 함께 훔친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장면부터 영화는 그들이 차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을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데, 이건 미국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흔히 보는 탈주자를 비추는 경찰의 카메라 앵글과 흡사하다. 즉 자신은 병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현실을 충분히 인지한 닉의 마음 속에서 형의 영웅적인 노력은 결국 경찰에 의해 저지당할 것이라는 결말이 미리 정해져있던 셈이다. 이 외에도, ‘코니는 닉의 꿈’이라는 가설 안에서,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친절하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는 동생 닉의 모습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닉은 정신병원의 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행해지는 질의응답을 소화해야 한다. 널리 알려진 문장을 듣고 그 의미를 추리하거나 두 단어 간 관계를 연상하는 등의 간단한 활동이었지만, 닉은 잘 대답하지 못하거나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얼핏 이해하기 힘든 닉의 이런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영화의 라스트 씬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닉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고, 정신과 의사는 “코니는 코니대로 옳은 일을 했다”며 닉을 위로한다. 닉은 다른 환자들에 둘러싸여 특정 질문에 대한 답을 몸으로 보이는 활동을 한다. 어떤 질문에도 반응하지 않던 닉은 “가족과 다툰 적이 있나요?”라는 질문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 뒤이어 “내 잘못이 아닌데 손가락질당한 적이 있나요?”, “외로웠던 적이 있나요?”와 같은 철학적인 질문들이 이어진다. 어느새 닉은 방 안에 있는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카메라와 닉 사이에는 창문이라는 벽이 존재하게 된다. 즉,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닉은 지금까지 그 방 안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방 안에서 외롭게 혼자 지낼 것임을 알 수 있다. 코니는 닉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친구였으며, 어쩌면 코니의 파란만장한 모험은 닉이 창조해낸 ‘장르’ 그 자체일 수 있다. 엔싱 시퀀스에 맞춰 흐르는 이기 팝의 노래 가사(“순수한 녀석과 망할 녀석은 하나였다”)가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증언한다.

영화는 퍼즐을 이리저리 끼워 맞추는 퍼즐같은 재미가 있다. 카메라 앵글 하나하나에 의미가 깃들어 있으며 화면을 통해 전달되는 빛의 강도와 음악의 세기까지 정밀하게 설계된 듯 보인다. 코니와 닉을 연기한 로버트 패틴슨과 베니 사프디의 연기 또한 훌륭하다. 화면부터 음악까지 거의 모든 요소가 너무나 감각적이어서 자칫 잊어버릴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무엇보다 뉴욕의 낮은 부분을 직설적으로 비춘다는 점에서 매우 사회적이다. 다큐멘터리적인 요소가 영화의 이곳저곳에 깃들어있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사프디 형제의 영화는 [굿타임]이 처음이었는데 앞으로도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 언크리치 | 코코

cocoposter
[신과 함께]와 [코코]가 한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것을 보면 세상에는 재미있는 우연이 참 많이 일어나는 것 같다. 두 영화는 비슷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완성도부터 결론에 이르는 방식까지 많은 부분에서 ‘수준’ 차이를 보인다. [신과 함께]가 주호민 원작의 미덕 – 주인공 김자홍의 ‘평범함’과 그를 지켜주는 변호사 진기한의 ‘특별함’이 만들어내는 앙상블 – 을 완전히 거세한 채 물리적인 눈물만을 강요한 결과 소름끼치는 졸작이 되어버린 것에 반해, 사후세계에서의 모험을 통해 현실세계를 반추한다는 서사구조를 [신과 함께]와 공유하는 [코코]는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는 이 한국영화를 조롱이라도 하듯 가볍고 유쾌한 방식으로 죽음을 ‘축복’하고 있다. [신과 함께]가 관객에게 억지 눈물을 강요하기 위해 동원해야 했던 스토리라인이 무려 가난때문에 부모를 죽여야 한다는 패륜(!)임에 반해, [코코]는 축제를 통해 저승세계로 들어가 “기억해줘!”라는 단순명쾌한 진리를 받아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신과 함께]가 묘사하는 저승은 오로지 처벌과 환생만이 존재하는, 끊임없이 피해다니고 싶은 어두운 공간이다. 이런 환경에서 아무리 눈물로 회개하고 서로를 용서해봤자 사랑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까? 하늘 위로 솟구치는 군용트럭을 보며 제발 영화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지만 우리 관객들은 [코코]의 저승에서 쉽게 빠져나오고 싶지 않다. 단지 화려한 잔칫상이 가득 차려져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곳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온기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고,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죽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공간이며, 혼자 죽더라도 사랑하는 가족, 친구와 함께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황홀경 안에서라면 기꺼이 사랑의 마음을 키워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신과 함께]는 애니메이션에 준하는 판타지적 요소를 차용하여 상상과 허구의 세상으로 떠나도 좋다는 면죄부를 부여받았지만, 결국 스스로를 강박관념 속에 가두어버리며 영화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코코]는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며 그 어떤 영화보다 독창적인 사후세계를 만들어냈고, 죽음만이 가득할 것 같았던 그 안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스스로 획득하였다. 클래스 차이가 너무 나서 감히 비교의 글이라고 할 수도 없겠다. [코코]는 단지 저승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것 뿐 아니라 디즈니의 앞으로의 먹거리에 대한 새로운 비전까지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