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퍼 리, 크리스 벅 | 겨울왕국 2

다양성. 최근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노골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일종의 생존전략이다. [모아나]와 [코코]에서는 지금까지 만화속 주인공 역할에서 꾸준하게 소외되어 왔던 유색인종과 비백인 문화권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주토피아]와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이 영화철학의 근간을 형성하는 중요한 주제의식이 된다. [겨울왕국]은 남자’주인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꽤 인상적이었는데, 안나와 엘사라는 젊은 자매가 전면에 나서는 가운데 남자 캐릭터들은 찌질한 악당이나 충실한 사이드킥으로서의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디즈니 에니메이션이 대단히 진보적인 사상을 충실하게 실현하는 그런 존재는 아니라는 점 역시 잊지 말아야 한다. 여전히 전 세계의 모든 여자 아이들은 엘사의 여성스러운 흰색 드레스에 열광한다. (물론 [겨울왕국 2]에서는 엘사가 바지를 입는다는 점에서 약간의 발전을 내비치지만, 디즈니의 ‘진보’는 딱 이정도 수준이라는 점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기도 한다) [코코]와 [인사이드 아웃]이 그토록 찬란하게 펼쳐 놓았던 서사구조의 마지막 지점에는 ‘가족’이라는 전통적 가치로의 공손하게 회귀본능이 존재한다. 최근 가장 성공적인 프랜차이즈였던 [토이스토리]는 4편에 이르러 결국 새로운 세상으로의 확장을 이루어내지만, 이 역시 ‘정상’적인 남성 장난감과 여성 장난감 간의 이성적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아주 혁신적인 엔딩은 아니었다.

디즈니는 항상 이 정도의 애매한 성장을 이루어내면서 생존해왔다. 그 성장의 정도가 사회철학, 혹은 사회적 가치의 성장속도보다 느릴 때에는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지 못했는데, 문제는 그 반대의 경우에도 그리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결국 [겨울왕국]처럼 이미 공고하게 형성된 새로운 페러다임 – 여성 중심의 서사 – 에 엘사의 목소리와 같은 킬러 컨텐츠를 살짝 끼얹는 방식의 ‘수요 맞춤 전략’이 통할 때에만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셈이다. [겨울왕국 2]는 약간 뒤따라 가는 느낌이다. 여전히 엘사는 압도적이고 안나는 진취적이며, 남자 캐릭터는 수동적이다. 개그를 담당하는 캐릭터들은 마치 그렇게 태어나기라도 한 것 마냥 웃기는 데에만 집중한다. 결말은 누구나 알고 있듯 해피엔딩이지만, ‘모두가 함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는 더이상 아닐 것이라는, 누군가는 희생을 할 것이라는 사실도 능히 추측할 수 있다. 이런 구도는 이제 식상하다. 새로운 것이 없다. 이 사회는 이미 현실에서 그러한 가치들을 충분히 실현하고 있다. 에니메이션은 상상력이 극대화된, 현재의 사회가 가고 싶어하는 아주 가까운 미래의 세상일 것이고, 그 상상력이 이미 현실이 되어 영화 속에서 구현될 때 우리는 하품을 하기 시작한다. [겨울왕국 2]의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발견되는 ‘하품 포인트’는 이 영화에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러니까 아마도 엘사가 다시 한번 멋들어지게 노래를 부르며 새로운 드레스를 꺼내 입기 위해서는, 디즈니가 온전히 기댈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판이 필요한데, 현재의 디즈니에게는 그걸 세상에 역으로 먼저 제시할 정도의 역량은 없어보인다. [겨울왕국 3]는 이 사회가 새로운 방향으로 꽤 많이 움직였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 같다.

린 램지 | 너는 여기에 없었다

린 램지 감독의 전작 [케빈에 대하여]는 보지 않았다.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고 이 영화를 볼 기회가 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략적인 시놉시스를 읽은 후 그 영화를 봐야 할 이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보지 않았다. 영화를 감상한 후 어떤 감정이 들어설지,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지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느끼게 될 그 감정이, 해야 할 그 이야기가 싫었다. [킬링 디어]를 보지 않은 것도 비슷한 이유때문이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색깔의 영화들이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도 원래 나의 영화취향에 따르면 챙겨 볼 확률이 극히 낮은 쪽에 속하지만, 출근길에 들었던 [김혜리의 필름클럽] 팟캐스트에서 김혜리 기자가 그녀가 평소에 구사하지 않는 상당히 예외적인 표현을 동원해가며 찬사를 보냈기에 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특히 그가 [드라이브]를 두어번 반복해서 언급했을 때(비록 그것이 조니 그린우드의 영화음악에 대한 묘사였다 하더라도) 마침내 이 영화를 집에 가자마자 꼭 챙겨봐야겠다 마음먹게 되었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감독/각본을 담당한 린 램지와 화면을 꽉 채운 주연배우 와킨 피닉스와 영화의 청각적 요소를 담당한 조니 그린우드, 이 삼총사가 빚어내는 호흡이 특유의 흥미로운 리듬을 만들어내는 영화다. 영화의 서사구조는 단순하며 관객에게 주는 효과는 직관적이다. 전직 군인으로 추측되는 ‘조’는 해결사로 일하며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고 있다. 거의 매일 자살을 시도하는데, 어머니가 살아있는 한 정말 자살할 생각은 없어보인다. 그가 자살을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도 어린 시절 겪었던 학대와 군인 시절 경험한 살인, 혹은 죽음에 대한 경험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조’의 회상으로 그려지는 이와 같은 과거 장면들은 찰나의 시간동안 단편적으로 스쳐지나갈 뿐이다. 과거 회상씬 뿐 아니라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이 ‘조’, 혹은 그를 바라보는 인물의 시선으로 처리되는데, 그러니까 영화는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진행이 되거나, 그런 주인공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때문에 서사구조가 헐겁다고 느끼는 관객이 있을 수 있으며 영화의 단순한 서사구조만을 따라가다 금세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친절하게 선후관계를 설명해주기보다 한 상황을 넌지시 제시하고 관객에게 많은 것을 추측하게 만드는데, 그 설계가 꽤나 촘촘하게 이루어져 있어 영화 속 상징을 오독하거나 숨어있는 서사를 놓치는 일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빈틈이 많기 보다는 비어있는 공간을 관객이 적극적으로 채워나가게 하는 매력이 있는 영화인 셈이다. 음악으로 치면 The XX의 1집 음반같달까. 이 묘한 ‘비어있는 꽉참’은 독의 연출과 피닉스의 연기, 그리고 그린우드의 음악/음향이 어느 하나 튀지 않고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영화의 제목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그 자리에 없는 것으로 추정되어야 하는 해결사 직업을 가진 ‘조’의 삶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 조금 더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듯 ‘조’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어머니와 가졌던 관계성을 전이시키게 되는 ‘나나’와 함께 떠나게 되는 새로운 여정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영화가 맞이하는 터닝포인트는 ‘조’가 현역 주지사의 심복인 상원의원으로부터 그의 실종된 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은 뒤 어린 소녀들을 감금하고 유린하는 사창굴로 찾아 들어가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안에 ‘나나’가 있다. ‘나나’의 발견은 ‘조’의 유일한 삶의 이유였던 어머니의 죽음으로 귀결되고, ‘조’는 자신과 같은 괴물로 변해버린 ‘나나’와 함께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하지만 상원의원과 주지사가 사망한 이 꽤 큰 사건의 한복판에 서 있는 ‘조’와 ‘나나’가, 현역 경찰관까지 매수되어 아무한테나 함부로 총질을 해대는 이 세상에서 전과 같이 온전히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어디로 갈지 알 수도 없으며 아무런 계획도 세울 수 조차 없다. 이런 막막한 상황에서 ‘나나’는 “날씨가 참 좋다”고 웃으며 말하고, 아마도 ‘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좋은 날씨를 즐기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것 정도일 것이다. 즉, 그들은 이 세상에 더이상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존재한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게 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죽음으로 가고 싶어했던 한 사내가 자신이 모든 것을 걸고 지키려 했던 어떤 존재를 상실한 후, 사실상의 죽음을 얻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이야기해도 그리 틀린 설명은 아닐 것이다.

연출은 감각적이다. 피닉스의 연기는 여전히 훌륭하다. [마스터]와 [그녀], [조커]를 지나 [너는 여기에 없었다]까지 다다르니 살짝 피로감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아버지 얼굴보다 황정민 얼굴을 더 많이 볼 때의 피로감같은 것이 있다. 하지만 그가 다작을 한다고 사실때문에 그의 연기력을 평가절하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조니 그린우드의 영화음악은 [데어 윌 비 블러드]에 비하면 훨씬 정교하고 노련해졌다. 그래서 그 당시의 참신한 맛은 많이 사라졌지만, 이제는 정말 당당히 당대 최고의 영화음악가라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린 램지의 영화는 처음 접했는데, 호불호가 갈릴 법한 방법론을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저력이 느껴져 오히려 더 좋았다.

타마라 젠킨스 | 프라이빗 라이프

최근, 그러니까 몇 개월 전 우리 부부는 임신을 했다. 2016년 말 결혼 이후 약 2년 반 만에 처음으로 가진 아이인데, ‘첫 아이’라고 표현은 했지만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 한꺼번에 생긴, 약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 새로운 생명으로 인해 우리 가정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부부를 둘러싼 다른 가족들과 함께 한 마음으로 기뻐했다. 이번 임신을 꽤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고작’ 결혼 후 2년 반 만에 가진 아이였다. 본격적으로 임신을 준비한지는 1년이 채 되지 않았고, ‘불과’ 몇 개월 간의 실패(그러니까 부모 양 쪽의 몸으로부터 출발한 난자와 정자가 정해진 시간에 적절한 방식으로 만나지 못한 결과로 조용히 각자의 생을 마감하는 것을 이쪽 업계에서는 보통 실패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끝에 임신을 하게 되었으니, 세상에 존재하는 수 많은 난임, 불임 부부들이 겪는 고통에 비하면 우리 부부는 상당히 무난하게 임신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몇 개월의 ‘실패’의 기간동안 많이 힘들어했다. 함께 많이 울었고, 또다른 실패를 겪지 않기 위해 많은 것을 새롭게 공부해야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성교육 시간에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스스로를 탓하며 여성의 ‘주기’와 착상 등의 정보에 예민하게 집착했고, ‘정상’적인 방법에 의해 임신이 힘들다는 판정받을 경우 받아들여야 하는 여러 대안들을 준비해야 했다. 인공수정, 체외수정, 난자기부 등 다양한 기법들을 먼저 경험한 부부들의 경험담을 들으며 그들이 겪은 고통을 마음 속으로 나누기도 했고, 우리가 대체 얼마나 큰 행복을 얻으려고 이 고생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아마 우리 부부만 이런 것은 아닐 것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 부부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발을 내딛었고, 이 세계에 미리 들어와 고군분투 중인 수 많은 엄마, 아빠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프라이빗 라이프]는 넥플릭스에서 제작한 영화로, 타마라 젠킨스라는 감독이 자신이 직접 쓴 각본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이 감독의 전작들을 본 적은 없지만 이 영화가 발표된 해 최고의 영화들 중 하나로 손꼽혔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고, 최소한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로 올라갈 정도의 작품은 꼭 보고 싶어하는 성미 덕분에 넷플릭스 위시리스트에 오래 전부터 올려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이 영화를 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영화의 줄거리가 우리 부부가 최근 겪어온 현실과 지나치게 가깝게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영화라는 예술은 현실에 그 바탕을 두고 있지만 관객이 속해있는 현실과 지나치게 가까울 경우 오히려 그 관객으로부터 거부당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영화란, 현실에 기반하여 제작하되 어느 정도의 추상화(abstraction) 과정을 거쳐 보편화, 일반화(universalization)시켜야 비로소 관객이 조금은 마음을 놓고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현실을 환기시키되 현실로부터의 도피처 역할도 수행해야 하는 조금은 복잡한 영화의 속성 때문에 우리같은 ‘기피’관객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프라이빗 라이프]의 주인공 레이첼과 리처드 부부는 뉴욕에 사는 40대 중산층으로, 거실 한켠에 쌓여 있는 주사들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아마도 꽤 오래 전부터 임신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온 듯 보인다. 두 마리의 강아지와 함께 살면서 각자의 직업도 충실히 꾸려오고 있는 부부지만, 오직 삶에서 아이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 둘을 임신에 대한 “집착”으로 이끌게 된다(영화 속 이들 부부와 친한 친구 부부 간 대화에서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영화는 인공수정과 입양이라는, ‘정상’적인 임신방법을 통하지 아니하고 아이를 가정에 들일 수 있는 ‘대안’을 마주하게 되는 이 부부의 이야기를 주된 서사로 다룬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체외수정의 건조한 각 단계가 하나의 챕터를 형성하는 가운데 인공수정을 위해 한 부부가 겪어야 하는 끔찍한 병원에서의 체험이 긴 인트로처럼 보여진다. 어떠한 이유로 인해 타인의 난자를 제공받아야만 하는 상황과 과거 입양을 시도했으나 어이없는 이유로 실패한 사연 등이 순차적으로 보여진 후, 영화는 일종의 순환고리와 같은 구조로 부부의 ‘반복되는’ 삶을 조금씩 뒤틀어 다시 보여준다. 과거에도 수많은 시도를 했고 실패를 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밝힌 후, 이 부부가 또 한번의 실패를 겪는 과정을 영화의 주된 서사구조로 활용하고,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또 다른 시도의 첫 출발점을 보여줌으로써 이 부부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삶을 살아 왔고 앞으로도 그런 삶을 살 것임을 적극적으로 증명하고 예언하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조카 세이디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된 떠들썩한 한바탕 소동이 마무리된 후, 주인공 부부인 레이첼과 리처드는 다시 평범한 일상 속으로 들어가 반복되는 삶을 경험하지만, 큰 사건을 겪은 그들의 삶은 더이상 전과 같지 않다. 그 예로 할로윈 기간 사탕을 얻기 위해 부부의 집을 찾아온 꼬마들을 대하는 부부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들 수 있다. 오직 임신에만 집착하여 동네 꼬마들에게 사탕 하나 내어줄 마음 속 여유조차 갖지 못했던 이들이 닉슨과 힐러리 클린턴의 가면을 쓰고 아이들에게 어떤 분장을 했는지 물어볼 정도의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영화는 딱 이정도의 성장이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는다. 50대의 문턱에 다다른 중년의 부부가 아이의 ‘결여’를 내적으로 극복해내는 과정은,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사실 그렇게 극적이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동안, 충분한 고통과 아픔을 감내하며 아주 서서히 성장하는 가운데 이겨내야 하는 것이 보통의 우리가 경험하는 인생의 과제다. 영화는 그 과정을 상당히 현명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불과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이 영화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나름대로 고통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 절실히 기다렸던 아이가 이번달에도 오지 않음을 인정해야 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그 고통은 커져갔다. 임신테스트기에 두 줄을 찍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남들은 다들 쉽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임신이라는 것이 왜 우리에게만 이토록 어렵게 오는지 괜히 억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쌍둥이를 아내의 배에 가득 안은 지금, 당시 상황을 복기해보면 ‘왜 그렇게 오버했나’ 싶어 금세 부끄러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 그 자체임을 잊으면 안된다. 우리 모두는 아이를 갖던 갖지 않던, 결혼을 하던 하지 않던, 그 어떤 상황에 있건, 매우 미숙하고 어리석은 존재다. 그 미숙함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시간과 아주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인생은 결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느린 속도로 어떤 방향성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결코 성장하지 못한다는 말도 맞다. 거북이처럼, 달팽이처럼, 조금씩 인내하며 움직이다보면 어떤 지점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임신의 과정을 통해 이 교훈을 조금 더 배웠다. [프라이빗 라이프] 역시 이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장-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 언노운 걸

다르덴 형제는 변화하고 있다. 전작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어슴프레한 희망을 내비쳤던 이들은 [언노운 걸]에서 본격적으로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전작과 이번 작품의 공통점이라면 잘 알려진 전문배우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일텐데, 이와 함께 이 두 영화를 다르덴 형제의 필모그래피의 다른 영화들과 구분지을 수 있는 지점은 희망의 메시지를 조금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영화적 시선의 변화에 있다.

젊고 유능한 의사 제니 다방은 이제 막 3개월 임시 주치의 생활을 마치고 꽤 좋은 조건을 제시한 큰 병원으로 옮길 참이다. 하지만 마침 그날 저녁 몇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같은 병원에서 수련의로 있던 인턴 줄리앙에게 의사로서의 사명감에 사로잡혀 몇 마디 쓴 소리를 하던 와중 밖에서 들려온 벨소리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게 된다. 병원 문을 닫은지 한 시간 지난 뒤 찾아온 손님을 웬만해서는 받아들이는 그녀였지만, 왠지 그날따라 줄리앙을 훈육시킬 목적으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외부의 손님을 거부한 것이다. 줄리앙은 무언가를 느낀채 화가 나 뛰쳐나가고, 제니는 다음날 자신을 찾아온 형사들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자신이 거부했던 그 손님은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젊은 흑인 여자였고, 그날 밤 병원으로 들어가려는 요청이 거부된 뒤 근처 공사장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그녀는 큰 병원으로부터의 이직을 거부한채 임시 주치의로 있던 병원을 아예 물려받기로 결심하고, 그날로부터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한채 죽어야 했던 흑인여자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와 함께 자신에게 심하게 혼난 후 의사로서의 꿈을 꺾은 제자 줄리앙을 찾아가 다시 의사의 길을 걸어갈 것을 설득한다.

사회의 밝은 곳보다는 어두운 곳에 위치한다고 보아야 할 위태위태한 영혼들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했던 전작들과 달리, 이번 영화의 주인공은 대표적인 중산층 직업인 의사의 삶으로부터 시작된다. 영화속 인물의 사회적 위치와 상관없이, 다르덴 형제는 이 사회의 부조리함이 빚어내는 윤리의 위기는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 있고, 이 윤리적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 역시 사회의 구성원 그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인 감정들이 이끌어나갈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하는 죄의식, 죄책감, 부채의식과 같은 감정들인데, 영화가 극적인 반전을 맞이하게 되는 지점 역시 다르덴 형제의 전작들에서 익히 보아온 바대로, 죄책감을 느낀 주인공의 마음 속으로부터 출발한다. 환자들을 프로페셔널하게 치료하는 것에만 집중하던 제니는 자신의 무신경함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한 여성의 이름을 찾아주기 위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속죄와 참회의 과정을 거치기 위해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사실 어쩌면 그녀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어떤 우연한 기회를 맞이하여 마음속에서부터 그 감정을 꺼내는 과정을 겪었을 뿐이다.

그녀가 짧은 순례의 길을 걷는 동안 마주치는 세상은 그녀에게 새로운 차원의 구원과 자유를 경험하기에 충분한 순교의 고통을 선사한다. 서류가 미비되어 원하는 치료를 받지 못하자 제니를 위협하는 사람도 있고, 제니가 타고 가던 차를 억지로 세운채 더이상 깊게 파지 말라고 협박하는 사내도 있다. 윤리가 결여된 세상에서 그녀가 걷는 속죄의 길은 의사라는 직업적 특수성과 결부되어 영화의 주제의식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그녀는 늘 환자의 부름을 받는다. 환자가 있는 곳에는 언제, 어디라도 뛰어간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자신을 찾아온 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죄책감때문에, 더이상의 늦은 시간 벨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아예 잠자리를 병원으로 옮겨 새우잠을 청한다. 비록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환자가 죽음의 비밀을 감추려는 사람, 자신을 위협한 사람이라 해도 제니는 왕진가방과 함께 그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순간, 공권력으로부터도 경고를 당한 그녀에게 이름 모를 여성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오고, 제니가 쌓아올린 속죄와 참회의 마음을 나누어담는다. 이것이 영화 속 작은 기적일까. 영화의 마지막 씬은 평화로운 표정으로 또 다른 환자를 맞이하는 제니의 모습을 담는데, 이 장면에서 비로소 제니도 구원을 얻은 것처럼 보이고, 그녀가 속한 세계에서 자유를 획득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제니가 정성을 쏟은 또다른 인물인 줄리앙이 전해준 기쁜 소식은, 제니가 구축하려 한 세계가 다음 세대로 전이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비친다.

우울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다르덴 형제 영화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 선사하는 희망찬 메시지에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다. 다르덴 형제의 오랜 팬들이 가질법한 또다른 불만은, 제니가 당면하는 과제들이 어쩌면 쉬워보이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그녀의 삶은 생존의 경계에서 몸부림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윤택하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베푸는’ 쪽에 속하는 사람이며, 그녀는 단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어떤 여성에게 가지는 죄책감으로 인해 이 모든 일을 행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 지점이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상징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내일을 위한 시간] 이전까지의 영화들은 너무나 극한 상황에 몰린 이들이 겪게 되는 심리적 고통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에 그 인물들이 선택하거나 선택을 강요받게 되는 어떤 상황들이 마치 운명처럼 느껴지는 면이 다소 존재했다. 리얼리즘이라고 하지만 너무 극적인 것이다. 하지만 [내일을 위한 시간]과 [언노운 걸]은 결이 조금 다르다. 얼굴이 많이 알려진 전문 배우가 화면을 가득 채운 이 영화들은, 어쩌면 피할 수도 있었을 미묘한 상황에서 피하지 않고 용기를 내는 보통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가 과감히 마리옹 꼬티아르와 아델 아에넬을 캐스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보통의 관객들에게 ‘움직일 것인가’에 대해 직접적으로 묻기 위해서는 이런 배우들이 아니면 안되는 거다.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나가는 아델 아에넬의 연기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표정 하나, 동작 하나에서 제니의 고뇌가 느껴진다. 다르덴 형제의 원래 방식대로 무명의 연기자를 캐스팅했다면 어쩌면 매우 위험해질 뻔한 영화였다는 생각도 든다.

이동우 | 노후 대책 없다

영화는 홍대 놀이터 앞에서 공연 중인 한 펑크밴드의 모습을 담는 것으로 시작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와 차라리 소음에 가까운 디스토션 기타, 드럼을 때려부수기 위해 스틱을 휘두르는 듯한 드러머 등이 어우러진 이 4인조 하드코어펑크 밴드는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 [노후 대책 없다]의 두 주인공 중 하나인 파인더스팟이고, 영화는 또다른 주인공 스컴레이드와 파인더스팟이 함께 떠나는 짧은 여정을 함께 한다. 영화의 감독이자 카메라를 주로 들고 있는 촬영감독이기도 한 이동우 본인이 밴드의 멤버이기도 하다. 멤버들의 인터뷰와 공연장면이 교차 편집되는 기본 구성에 로-파이 가득한 홍대 지하실의 습한 공기를 가득 품은 이 다큐멘터리 영화에 굳이 서사구조가 있다면, 두 밴드가 일본 도쿄에서 열린 작은 하드코어펑크 페스티벌에 참여하면서 겪게 되는 크고작은 소동들의 연대기 정도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비추어지는 한국의 하드코어펑크씬은 규모가 그리 커보이지는 않는데, 어쨌든 그 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맺어지고 열정이라던지 실망과 같은 구체적인 감정들이 오고가는 와중에 하나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 세계에 사는 젊은이 몇몇이 멀지만 가까운 해외로 나가 자신들과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무언가를 느끼고 돌아온다. 언뜻 보면 ‘일베’같아 보일 정도로 입에서 욕이 떠날 때가 없으며, 때로는 아무런 대책이 없는 답없는 젊은 세대의 망가진 현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멤버들은 번듯한 직업이 있거나, 사회운동을 하다 감옥에 들어갈 처지에 놓였거나, 오래전부터 꾸준히 일관된 프로젝트에 몰두하거나 하는 식으로 각자의 세상을 소중히 꾸려온 사람들이다. 부모의 집에 얹혀 사는 처지이지만 최소한 자신의 생계는 스스로 꾸려가기 위해 노력하며, 사고를 쳐서 직장에서 잘렸다면 편의점에서라도 그 삶을 이어가려 애쓴다. 이들이 말하는 ‘펑크’정신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군대 휴가를 나와 술에 취한 나머지 멀쩡한 식당의 수족관을 깨부순 이가 몇 달 뒤 다시 그곳으로 돌아와 가게 사장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는 모습은 ‘한국’의 특수성과 어떻게든 타협해보려는 ‘펑크’의 모습처럼 읽히기도 한다. 중간에 단편선과 같은 꽤 유명한 사람도 등장하는데, 이들이 언급하는 여러 무거운 이슈들은 두 밴드 멤버들의 어처구니 없이 웃긴 모습에 치중하던 전반부에서 어느정도의 ‘의식’을 강조하기 위해 제법 진지해지는 영화의 후반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영화에 따르면, 스컴레이드와 파인더스팟,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하는 동지들은 나름의 진지함을 가지고 있다. 불투명한 미래 속에서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애쓰는 ‘예술인’들이며, 자신들의 시선에서 충분히 부조리한 세상에서 나름의 행동을 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행동하는 지성인들이다. 물론 이들의 행동이 사회의 평균적인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읽힐지는 또다른 문제이지만, 절망보다는 희망을, 냉소보다는 연대를, 말 뿐인 위로보다는 현장에서의 행동으로 상징되는 이들의 모습이 마냥 ‘대책 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펑크라는 음악장르가 기본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폭력성, 혹은 남성중심주의의 한계는 영화 속 밴드들의 모습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된다. 밴드 안에 여성멤버가 있기는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지는 대부분의 공연장면과 인터뷰장면에서 강하고 그릇된 형태의 남성성의 발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에 대한 자정작용을 바라는 것은 씬의 특징을 고려할 때 아무래도 무리이겠지만(실제로 SNS를 통해 감독 및 출연진의 성추행 의혹 논란이 발생했다고 한다), 이러한 한계까지 적나라하게 관찰된다는 점에서는 영화가 갖는 또다른 의미가 없지는 않은 셈이다.

2016년 이 영화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공개된 후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고 결국 만장일치로 대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기존에 존재하던 정적인 방법론에서 과감히 벗어나 날 것 그대로의 ‘펑크’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론을 택했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받은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영화는 무겁지 않고 오히려 밝은 편이다. 멤버들이 또 어떤 사고를 칠지 몰라 전전긍긍해 하지만 않는다면, 노이즈 가득한 기타사운드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마지막까지 즐거운 기분으로 볼 수 있는 영화다.

노아 바움백 | 위아영

노아 바움백이 2014년에 내놓은 영화의 원제는 [While We’re Young]이다. 한국어 제목은 안일하게 급조한 듯한 느낌의 [위아영]인데, 접속사 하나 빠졌다고 뭐가 그리 많이 달라지겠냐고 담당직원은 항변할 수도 있지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너무나 당연하게 알 수 있듯 원제의 의미를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이 영화가 바움백의 전작 [프란시스 하]와 같은 수작이었다면 한국 배급사(혹은 이 번역과 관련된 누군가)의 무식함에 치를 떨었겠지만, 다행히(?) 영화가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라 이조차 별 것 아니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노아 바움백은 [프란시스 하] 이후 거의 아무런 성취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다. 웨스 앤더슨의 친구로 유명세를 떨치던(..) 시기가 오히려 전성기처럼 느껴지는 것은 [프란시스 하] 앞뒤로 자리잡은 그의 필모그래피가 ‘게으름이 재능을 갉아먹는 예술가의 아주 좋은 예’의 위치를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지라 차라리 웨스 앤더슨과 함께 작업했던 그 시절이 오히려 조금 더 부지런하고 명민해보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넷플릭스에서 공개되는 [결혼이야기]가 그나마 기대되는 이유는 아담 드라이버와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걸출한 배우가 바움백의 멱살을 끌고 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며,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움백의 거의 유일한 성공작인 [프란시스 하] 역시 그레타 거윅이 원맨쇼에 가깝게 현란한 재능으로 영화를 이끌어나가기 때문이다.

[위아영]은 [프란시스 하] 이후 공개한 첫 작품이기에 실망이 더 컸다. 최근 내 무릎 위에서 잠든 아내가 관여하지 않는 가운데 조용한 분위기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아는데, 다시 봐도 서사구조는 어지럽게 꼬여 있고 통찰력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화면이 엄청 아름답게 구성되어 있지도 않고, 영화적 리듬은 종종 축 늘어져 보는 이를 괴롭게 한다. 그나마 이 영화를 살려주는 구성요소는 역시 배우들일텐데, 특히 아담 드라이버는 이 영화에서 상당히 평면적인 캐릭터를 부여받아 고군분투한다. 이후 급격한 속도로 성장한 그의 배우 커리어를 고려하면 [결혼 이야기]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 약간 기대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벤 스틸러, 나오미 왓츠, 아만다 사이프리드, 아담 호로비츠 등 평균 이상의 연기력을 자랑하는 베테랑 연기자들은 각자 커리어에서 구축한 고정된 이미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가운데 무난한 연기를 보여주는데, 이정도 캐스팅을 가지고 색다른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못하는걸 보면 역시 이 영화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 것 같다.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안드는 부분은 출산-육아를 선택한 부부와 주인공 부부를 대비해 보여주며 대립관계를 한참 열심히 형성하더니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 이상한 방식으로 화합을 꾀하는 감독의 안일함이다. 중년의 부부에게 찾아오는 직접적인 위기는 노안도, 신경통도 아닌 정신적인 부분에서 오는 위기의식과 불안감일텐데, 그것을 힙스터 커플의 속임수로 간단하게 치환해 버리는 시도는 백번 양보해 그럴 수 있다 해도, 결국 주인공 부부가 안착하는 곳이 기성사회가 형성한 관습과 규칙을 충실히 따르기 위한 적당한 멋부림 정도라면 이만저만한 실망이 아닐 수 없다. 뉴욕 한복판에 사는 40대 부부가 아이티에서 흑인 아이를 입양한다는 결론은, 문화적 컨텍스트를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해봐도,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최대한의 관용을 베푼다 해도, 여전히 감독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게으름의 소산이라는 해석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암자드 아부 알라라 | 너는 스무살에 죽을거야

우리 부부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유일한 영화는 수단에서 온 [너는 스무살에 죽을거야]였다. 유럽에서 공부한 젊은 수단 감독이 프랑스 등 많은 국가의 자본의 도움을 받아 만든 영화였는데, 스무살에 죽을거라는 예언을 받고 태어난 한 남자아이가 성인이 되기까지 겪는 성장담이 주된 서사구조라고 할 수 있다. 정적인 화면에 담긴 황량한 사막의 풍경은 죽을 것을 알고 태어난 소년의 텅 빈 마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소년은 빼앗긴 미래가 현재를 갉아먹는 구조에서 나름의 방황을 거치며 조금씩 성장해간다. 그런 주인공에게 생명의 공기를 불어넣어주는 존재로 강인한 의지를 가진 어머니와 종교에 속박당한 마을에서 서구사회의 문물을 전달해주는 삐딱한 존재인 동네 아저씨가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중 가장 진취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지는 주인공의 어머니는 아들의 불행한 미래를 감당할 수 없어 가족을 버리고 도망친 아버지와 크게 대비되는데,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해가며 아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주인공이 우연히 만나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 동네 아저씨는 수단의 현재를 상징하는 비유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는데,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등장하는 수단의 민주화운동 인사들에 대한 헌사에서 이 인물이 영화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영화의 주인공 소년은 암울한 수단의 현재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일부 진취적인 사람들의 열망을 품고 있는 존재이며, 상대적으로 더 열려있는 서구사회를 목적지로 하여 어머니로 상징되는 유무형의 유산을 발판삼아 결국 죽음을 극복하고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에 이른다. 아내가 전해준 말처럼 유럽출신 감독이 만든 아프리카 영화의 전형성을 답습하고 있으며, 선진국의 자본, 그리고 다국적 자본이 개입할 경우 영화의 메시지가 얼마나 ‘정치적 올바름’에 갇혀 뭉툭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처럼 느껴졌다.

토드 필립스 | 조커

영화 포스터에 감독의 이름보다 배우의 이름이 더 큼지막하게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조커]는 호아킨 피닉스의 원맨쇼를 유희적으로 감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다. 그는 작은 얼굴 근육 하나부터 전체적인 몸짓의 형상까지 촘촘하게 설계하고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무엇을? 조커의 그것을. [조커]는 피닉스의 연기력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며 조커가 악당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소외당하고 차별당하던 가난한 청년이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부모의 학대로부터 시작된 비극의 크기가 비정한 고담시의 현실과 맞닿아 겉잡을 수 없이 불어나 머릿속 이성을 지배하게 되어버린다는 서사구조는 새롭지 않다. 오히려 만화에서 영화로 넘어온 히어로물의 흔한 성장담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 서사를 ‘평범한 개인이 우연한 계기를 통해 능력을 깨닫고 특별한 행동을 행하게 되어 대중을 주목을 받게 된다’고 짤막하게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나, [조커]는 흔한 영웅, 혹은 반영웅의 서사가 아니다. 윤리적인 부분을 깊게 고려하지 않고 감성적인 부분에 호소하며 만들어진, 상당히 위험하고 불안정한 영화다.

피닉스의 연기에 대해서는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를테니, 차라리 짧게 줄이는 편을 택하겠다. 그는 좋은 연기를 펼쳤다. 하지만 최고의 연기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한국사람들이 좋아하는, 한국영화적 연기를 했다고 하는 쪽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영화의 구조적 결점을 배우의 에너지를 갈아넣어 메우려는 의도가 느껴져 박수를 아주 세게 쳐줄 수 없었다. 물론 그는 조커를 완벽하게 재창조해냈지만, 그의 조커-아서 플렉 캐릭터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창조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느냐,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 그는 그냥 조커였는데, 매우 뛰어난 연기를 펼쳤을 뿐이다. 대중이 여러 영화로부터 ‘교육’받은 조커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혹은 ‘배트맨’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조커의 최종적 캐릭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상상하며 만들어진 조커의 초기 모습은 충분히 상상 가능하며 그다지 다양한 층위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영화의 첫장면부터 영화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흐름으로 2차원 직선 위에서 진행되는데, 이 영화는 사실상 조커-아서 플렉의 내면의 변화를 다루고 있으므로 조커의 캐릭터 자체가 2차원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조커는 누구인가? 만화책의 유명한 캐릭터다. 마블과 DC코믹스가 본격적으로 종이에서 벗어나 필름으로 그 판을 옮긴 후 히어로물 영화는 오히려 더 만화적으로 변했다. 영화적 상상력에 기반하여 만화책의 주인공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만화책에서 팬들이 읽었던 장면을 영화속에서 재현해내는 것에 충실한 나머지, 오히려 영화적인 혁신은 둔화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마블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블의 오랜 팬들은 가슴이 두근거리겠지만, 그냥 보통의 영화를 좋아하는 나의 눈에는 재미있는 장면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CG로 떡칠된 장면들이 새로운 영화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만화책 속 장면의 재현에 그칠 때 힘이 쭉 빠진다. 돈이 또 이렇게 낭비됐구나 싶다. 그 와중에 서사구조는 점점 더 빈약해졌다. 마블영화에서 제대로 된 서사를 보여준 영화는 사실 거의 없다. 그들이 영화를 본격적으로 만든지 10년이 넘었는데 앞서 언급한 ‘평범한 개인이 블라블라~’ 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굳이 예외를 찾자면 [다크나이트] 시리즈 정도일텐데, 이조차 나는 사람들의 열렬한 숭배를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에 열광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만든 배트맨 시리즈 3편이 썩 괜찮게 만든 오락영화 수준이라는 의견에는 변함이 없다. 아무튼, 조커는 이런 흐름 위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캐릭터이고 아마도 가장 사랑받는 악역일텐데, [조커]는 대중이 궁금해하는 그 지점, 히어로물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악당의 탄생비화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히 상업적이고, 충분히 자극적이며, 적당히 자연스러운 시나리오와 정말 좋은 배우의 연기만 합쳐지면 박스오피스 1위는 거뜬히 가능하겠다, 싶은 그런 영화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어버렸다.

[조커]에 대해 비판할 지점은 참으로 많지만, 가장 중요한 딱 하나만 언급해야 한다면 윤리성의 결여다.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며, 현실이 존재하지 않으면 영화도 존재할 수 없다. 현실에서 사회적 구성원들에 의해 역사적으로 맺어진 윤리적 합의가 영화로 옮겨진다고 해서 완전히 새롭게 재정의될 수 없는 이유다. 이 영화는 마지막에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어 반영웅으로서 폭도들의 찬양을 받는 것을 보여주는데, 일반인이 살인자가 되어가는 심리적 과정을 설득력 있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건 [조커]가 지난 10여년의 기간동안 대중이 반복적으로 교육받은 히어로물 영화의 전형적인 서사구조를 그대로 따라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관객은 그가 자신의 힘을 폭발시키게 되는 과정에서 많은 외부적 요인이 있음을 반복적으로 주입받게 된다. 그 결과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한다. 이게 지나친 비약이라면, ‘영화 모방 범죄’를 구글에서 검색하도록 하자. 영화는 생각보다 훨씬 무겁고 강력한 전달매체다. 두시간여의 시간동안 어두운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커다란 화면을 통해 아서 플렉의 ‘성장담’을 보게 되면 그의 악마성에 충분히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영화적으로 새로울 것이 없는 뻔한 서사구조를 만든 감독이 배우의 미친듯한 연기력에 떼를 쓰며 만들어낸 결과가 윤리적으로 아주 얄팍한 영화라면, 마음이 상당히 불쾌해진다. [위플래쉬]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런 류의 영화는 조금 더 많이 비판받아야 한다.

심지어 이 영화는 조커 캐릭터를 알뜰살뜰하게 보살피지도 못했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했고, 그 결과 의도와 상관없이 웃음이 터져 나오는 정신병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직장과 사회로부터 차별받고 핍박받는 와중에 정신착란에 빠진 어머니때문에 머릿속 정신병이 점점 더 심화된다는 설정은 얼마나 형편없고 성의없는가. 우리가 궁금했던 것은 아서 플렉이 어떻게 조커가 되어가는지였는데, 감독이 던져주는 해답은 ‘부모에게 맞아서’였다. 아서 플렉이 내면 속에 잠자고 있던 폭력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는 이벤트는 동료 광대가 건네주는 총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왜 동료가 갑자기 총을 건네주는지에 대한 설명도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갑자기 총이 생기고 그걸 우연히 마주친 폭력적인 취객에게 사용하며, 여기서부터 숨겨진 광기를 되찾게 되는데.. 글쎄, 이게 최선의 흐름이었나 싶다. 정신착란에 빠진 어머니가 고담시의 최고 엘리트인 웨인 가문에 대해 착각-톰 웨인이 아서 플렉의 아버지라는-을 한다는 설정은 내가 지금 아침 드라마를 보고 있는지 순간적으로 헷갈리게 만들었다. 문제는 어머니의 이 어이없는 착각이 아서 플렉을 광기로 몰아넣는 또다른 기제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아마도 아서 플렉에게는 아버지의 부재가 상당히 큰 부분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토크쇼 진행자를 아버지로 여기는 것, 톰 웨인을 아버지로 믿는 점 등등), 그 부정의 결핍이 악마성의 탄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이 없다. 이 영화는 오롯이 아서 플렉의 내면에 대한 영화인데, 영화관을 나왔을 때 우리가 조커의 내면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가정교육이 참 중요하구나, 정도?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빈약한 서사구조와 게으른 윤리성을 배우의 연기와 감각적이 편집, 긴장을 고조시키는 음악 등으로 한껏 치장하며 변명하는, 꽤 잘만든 오락영화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것처럼 그리 대단한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고운 | 소공녀

[소공녀]는 관객 입장에서 일종의 테스트처럼 작용할 수 있는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인 미소는 일반적으로 기호식품이라고 알려진 담배와 위스키를 계속 즐기기 위해 거주 목적의 집을 포기한다. 실제로 짐을 챙겨 나와 거리를 떠도는 자발적 홈리스 미소의 선택을 두고 “굳이 저럴 필요까지 있나, 담배와 위스키 중 하나만 포기해도 되지 않았나”, 혹은 “왜 굳이 가사도우미 일을 고집하려 하나, 편의점 알바라도 하면 고시원에서라도 잘 수 있을텐데” 등의 의문을 품은채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이와 달리 “충분히 가능한 선택이다”며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는 쪽이 있을 것이다. 미소의 행보에 대한 공감의 정도를 통해 관객 스스로 자신의 가치관과 사회적 통념 간 거리를 측정해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영화가 선사하는 첫번째 흥미로운 지점이다. 물론, 그 어느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해도 이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로 전환된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가고자 하는 지향점이 균형적인 시각으로 양쪽의 의견을 고루 청취하는데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번쯤 생각해볼 질문을 던지되 그 답까지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 점이 [소공녀]가 가진 또다른 미덕이다. 미소가 잠잘 곳을 청하기 위해 찾아가는 곳은 과거 밴드활동을 함께 했던 멤버들의 집이다. 그들의 ‘집’은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물질적인 의미로서의 공간보다는 다사다난한 인간군상이 수집되는 사회활동의 채집 현장처럼 보여진다. 시댁 식구들과 갈등하며 자아를 잃어가는 젊은 여성의 집, 아내와 이혼한 뒤 쓰레기더미 속에서 오직 슬퍼하기만 하는 나약한 남성의 집, 과거의 자신을 감추고 들어간 부유한 가족 앞에서 거짓과 위선으로 자신을 꾸며야만 하는 여성의 집 등, 감독은 미소의 시선을 통해 현재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견고한 사회적 통념 및 부조리의 틈을 재치있게 파고든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자신의 가치관을 믿으며 호기롭게 집을 포기한 미소의 점점 곤궁해지는 삶이 그려진다. 담배, 위스키와 함께 미소의 유일한 삶의 의미였던 남자친구는 현실과 타협하여 미소의 곁을 떠나고, 휴대폰 유지비용과 머리결의 변색 방지를 위해 복용하던 약값마저 떨어지는 상황이 묘사된다. 거주공간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극한의 경계선까지 밀려난 그녀는 결국 영화 말미에 자발적이지 않은, 어쩌면 비자발적인 온전한 홈리스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런 그녀의 삶에는 여전히 담배와 위스키가 함께 한다. 선택에는 반드시 상충관계가 존재하며, 그 선택의 대가는 타인의 시선으로 재단할 수 없다는 (어쩌면 뻔한) 결론에 다가가는 과정이 부자연스럽지 않고 깔끔하다.

[소공녀]에서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인물을 굳이 꼽자면 주인공 미소 정도가 있을텐데, 영화 속 미소는 그 어떤 등장인물보다 이타적이고 현명하며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행동한다. 다만 남들이 다 가지고 있다는 집이 없을 뿐이다. 그녀 주변의 사람들은 미소보다 많은 면에서 떨어지지만 오직 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녀를 업신여긴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보는 많은 관객들 역시 ‘집’이라는 가치를 무시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미소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이 갖는 가치만큼이나 그것이 우리를 얼마나 구속하지를 미소의 극단적인(?) 예를 통해 깨닫게 된다면, 담배와 위스키가 집보다 결코 덜 소중하다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일만큼은 피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미소의 행동이 설득력을 갖는 중요한 이유는 배우 이솜의 연기 덕분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녀의 필모그래피에서 꽤 굵직한 선으로 방점이 찍힐 이 영화에서 이솜은 자신이 가진 신체적 장점을 한껏 뽐내며 꽤 그럴듯한 연기를 선보인다. 그 외의 연기들은 평범했다. 적당히 평면적이고 적당히 기능적으로만 존재하는 인물들이 미소의 주변을 감싸고 있다.

이 영화는 아마도 2010년 이후 서울의 변화가 아니라면 나오지 못했을 작품이다. 현재 서울은 사회구조적인 분화가 몹시 빠른 속도로 발생하고 있다. 강남구와 서초구의 상류층은 부의 축적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고, 서울의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은 조금 더 창의적인 장점을 활용하여 ‘다른’ 생활방식을 창조해내고 있다. 상수와 연남, 이태원, 문래, 혹은 그 어딘가에서 전통적인 자본주의 통념에 기초하는 부의 축적을 거부한채 ‘YOLO’를 추구하는 세대가 점점 그 두께를 두텁게 만들어나가고 있다. 그 사이에 낀 서민, 혹은 중산층은 (미소의 남자친구처럼) 상류층에 기생하며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는 와중에 서울 곳곳에서 발생하는 창조적 문화로부터 창출되는 산업의 찌꺼기를 적당히 즐기기도 하며 불안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 지방에서는 쉽게 발견하기 힘든 계층의 다양한 방향으로의 분화는 [소공녀]가 집중하고 있는 주제의식의 현실성을 담보하는 거의 유일한 증거다. 영화의 주요 무대 중 하나로 쓰이는 싱글몰트바 코블러는 김앤장 변호사 빌딩과 서울종로경찰서 바로 옆 좁은 골목길에 위치해 있다. 미소는 그곳에서 현금을 내고 위스키 한 잔을 마시는 것으로 하루의 피로를 벌충한다. 누군가의 눈에는 그것이 젊은 시절 부리는 객기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위스키를 목으로 넘기는 그 순간의 행복은 결코 객관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미소의 그 찰나의 행복은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 [소공녀]는 그 정도의 넉넉함이 관객의 마음 속에 있는지 묻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도전적이고 날카롭다.

윤가은 | 우리들

[우리집]을 보고 서둘러 [우리들]을 챙겨보았다. [우리들]과 [우리들]은 연작이라기 보다는 독립적인 작품이다. 다만 영화의 배경이 되는 로케이션 장소(찾아보니 정릉 일대에서 촬영했다고 한다)를 공유하고 [우리들]의 주연 배우들이 [우리집]에서 똑같은 이름을 달고 잠깐씩 모습을 비춘다는 점에서 일종의 동일한 세계관 속에 존재한다는 점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우리집]이 무너져가는 가족의 불안함을 몸으로 느끼며 아둥바둥거리는 애어른들의 이야기라면, [우리들]은 상대적으로 완고한 미성년의 자장 속에 존재하는 이들이 주고받는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다. 어른으로의 성장을 강요받지 않았다 해서 이들이 맺는 관계성이 미숙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들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관계의 시작부터 파탄까지 다다르는 과정은 법적인 성년들이 맺는 관계의 일반성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대부분의 어른들이 겪는 관계의 서투르고 폭력적인 끝맺음을 비껴나가며 오히려 더 완숙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윤가은 감독은 [우리들]에서 대부분 쉽게 잊혀지거나 세심하게 보살펴지지 못한, 우리가 ‘평범’하다고 대충 규정 지어 표현하는 어린 영혼의 섬세하고 소중한 마음을 따뜻하지만 에리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 만으로 위로가 된다. 이 영화가 가진 폭발적인 힘은 이 ‘옆에 있어 주는 시선’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허우샤오시엔의 [빨간 풍선]이 생각났다. 아이의 시선에서, 아이의 앞길을 방해하지 않지만 아이가 거칠게 다루어지면 바로 옆에서 가장 먼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반 발자국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아이의 열심한 마음을 바라본다. 감독의 그 시선이 참 좋았다.

반마다 그런 애들이 있었다. 공부는 중하위권, 얼굴도 외모도 그다지 눈에 띄는 편이 아니고, 집은 잘 살지 못해 부모의 온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냄새가 나는 것 같다”는 말에 자신의 옷에서 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부터 하는, 그런 애들이 있었다. 뭐 하나 특출난 것이 없으며 특별한 보호를 받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 이 아이들은 조금 더 영악하고 욕심 많은 아이들의 쉬운 표적이 된다. 때로는 본인이 폭력의 대상이 되는지도 모른채, 텅빈 주변에 단 한명의 친구를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나와 같은 자리에 있었을 그런 아이들에게 나는 힘이 되어 주었던가. 혹시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어떤 아이의 시선을 일부러 거절하지는 않았던가.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을 치며 반성했다. 짧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꽤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스쳐 지나온 ‘기회’들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왜 나는 손을 먼저 내밀지 못했던가. 영화의 주인공 선만큼 용기를 내지 못한 내가 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