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지하철 1호선]은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2001년, 혹은 2002년 무렵 어느 겨울날 이 뮤지컬을 처음 접했고, 큰 충격에 빠졌다. 내가 알던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충격은 아마도, 애써 무시하고 있던 세상의 밑바닥을 날것 그대로 접해야 했던 어린날의 성장통이었을 것이다. 이후 두 세번 정도 더 관람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관람 후 계단에서 기다리던 출연진과 일일이 악수를 하는 여유도 생겼지만, 관람 중 어느 순간 맞닥뜨렸던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듯한 감동은 여전한 크기로 전해져왔다. 유학을 나와있던 중 [지하철 1호선]이 4천회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다고 했을 때 느꼈던 서운함도 아직 잊지 못한다. 영원히 달릴 것 같았던, 마냥 씩씩해보였던 작품이 갑자기 운행을 종료한다는 통보를 해왔을 때 느꼈던 서늘하고 먹먹한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게 가슴 한구석에 살아남아있다. 연속 공연을 중단한 김민기 대표가 이후 아동극에 천착하는 모습을 보며 [지하철 1호선]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할 수 조차 없게 된 것은 오히려 인상적이었다. 매일 이 작품을 기억하며 살지는 않았지만, 첫번째 관람 이후 이 작품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말도 거짓은 아니다.

그런 작품이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마음 속으로 16,17년 전 감정이 살아나는 듯 해 묘한 반가움을 느꼈다. (사실은 뛸 듯 기뻤다) 그 때 들었던 노래들은 여전한 감동으로 다가올지도 궁금했고, 그 당시 이 작품을 통해 발견했던 마음 속 깊숙한 곳부터 시작된 아우성은 이제 어떤 모습으로 반응할지도 궁금했다. 나는 [지하철 1호선]을 비롯한 몇몇 예술 작품과 서적들을 통해 현재의 자아를 획득한 경우다.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십대 시절 읽지 않았다면, 머큐리 레브(Mercury Rev)의 [Deserter’s Songs]를 수험생 시절 듣지 않았다면, 로버트 하일브로너의 책들을 유학을 떠나기 전 읽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하철 1호선] 역시 마찬가지다. 입대 전 방탕한 대학생 시절에 만난 이 작품을 통해 세상을 보는 시선은 분명한 변화를 겪었다. 지금의 나는 그 때로부터도 멀리 달아나 있지만, 최소한 그 뿌리는 아직도 굳건히 자리잡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기에 이 작품을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관람하는 것은 최소한 개인적으로는 나에게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아내와 함께 찾았다. 아내가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지금 우리가 함께 보는 공연에서 어떤 것들을 공유할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다시 찾은 학전블루 소극장은 여전히 낡고 좁았다. 좌석은 세시간 가까이 진행되는 공연 시간동안 내 뾰족한 엉덩이를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딱딱했다. 하지만 앞좌석에 무릎이 닿을 정도로 좁고 불편한 좌석도, 매캐한 냄새가 은근히 퍼지는 지하의 공연장도 그저 반갑고 고맙기만 할 뿐, 공연을 기다리는 들뜬 마음을 식혀버리는 걸림돌이 되지는 못했다.

공연은 1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배경은 여전히 1998년 IMF 위기가 터진 직후였고, 선녀는 여전히 제비를 찾아 1호선을 타고 이곳 저곳을 배회한다. 그 와중에 만나는 사람들 역시 여전히 1998년을 살고 있었다. 혼혈로 태어나 사창가에서 포주 노릇을 하는 철수도, 그런 철수를 주워다 키운 곰보할매도, 곰보할매의 가게에서 우동을 외상으로 먹는 안경도, 그런 안경을 사랑하는 걸레도 모두 그대로였다. 지하철에서 UFO에 대한 믿음을 설파하는 교주와 고무장갑을 파는 잡상인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공연에서 2018년을 느낄 수 있었던 유일한 부분은 음악이었다. 밴드 ‘무임승차’의 구성이 조금 달라졌다. 드럼과 색소폰이 빠지고 바이올린과 건반, 퍼커션이 들어왔다. 그러다보니 모든 곡에서 약간의 편곡이 이루어졌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공연에서 정말 크게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사람이다. 공연을 올리는 배우들이 바뀌었고, 그 공연을 보는 나와 내 주변의 관람객이 바뀌었다. 우리는 이 작품이 무대 위에서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1998년의 공기에서 20년이나 떨어져 있었다. 그 당시의 무겁고 우울한 공기에서 조금씩 벗어난 우리는 이제 조금 다른 형태의 삶의 고단함으로 옮겨온 터였다. 비록 기억은 하고 있을지언정 더이상 그 순간을 살지 않은 우리들이 공연장에서 가장 서서히, 하지만 기어코 가장 극적으로 변해버린 존재가 아니었을까. 한 인터뷰에서 이번 [지하철 1호선]에 참여한 배우 중 과거에 공연되었던 [지하철 1호선]을 직접 경험한 배우는 딱 한 명 뿐이라는 이야기를 읽었다. 1998년이 2018년의 우리에게 ‘역사’로 기억되는 것처럼, 이 공연의 무대에 서는 배우들에게도 이 작품은 하나의 역사였던 것일까. 그래서인지 배우들의 연기에서 작지않은 이질감을 느꼈다.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선녀와 철수, 걸레와 안경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한 것이, 이번에 무대에 오른 젊은 배우들이 받아들였을 1998년과 나를 비롯한 객석의 많은 ‘늙은’ 관객이 기억하는 1998년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12월 쯤 되어 예정된 100회 공연의 막바지에 다다를 때, 이 배우들은 어떤 공기를 내뿜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관객으로부터 어떤 공기를 받아들일 것이며, 1998년을 반복해서 상기시키는 대사와 몸짓을 통해 무엇을 체화할 것인지 궁금해졌다. 아마도 적지 않은 것들이 달라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 1호선]은 4,000회에서 100을 더해 딱 4,100회까지만 운행한다고 한다. 김민기 대표의 인터뷰에 따르면 “정리하고 가야 할” 작품들이 학전에 쌓여 있고, [지하철 1호선]은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 가장 먼저 털고 넘어가기로 했다고 한다. 이제 이 작품이 정말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셈이다. 이 작품의 2008년, 2018년 버전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대표의 말처럼 만약 그렇게 시대를 한번 더 옮겨야 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번안이 아니라 새로운 작품이어야만 할 것이다. 2018년을 살아가는 철수와 걸레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 시대가 변했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변했으며, 우리와 시대 안에 존재하는 공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8년을 그리고 있는 [지하철 1호선]은 여전히 넘치는 생명력으로 펄떡거렸다. 오프닝에서 선녀가 독창을 할 때부터 이미 시작된 짜릿한 기운은 한 이름없는 술취한 직장인이 남산 아래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느껴지는 먹먹한 감정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되었다. 선녀의 이야기가, 걸레의 이야기가, 빨간바지의 이야기가 관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 개개인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 여전히 눈 앞에서 펼쳐졌다. 좁고 불편한 객석에서 세시간 만에 몸을 일으키며 고맙다는 생각만 계속 들었다. 다시 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단 100회 뿐이라 해도, 이렇게라도 다시 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박훈정 | 마녀

마녀 포스터
영화를 나보다 훨씬 좋아하는 아내덕분에 예전에는(즉, 아내를 만나기 전에는) 보지 않았을 작품들도 종종 보게 된다. 박훈정 감독의 최근작 [마녀] 역시 이런 연유로 보게 되었다. [신세계]는 채널을 돌리다 발견하면 꼭 끝까지 보게 되는 영화다. 이런 류의 오락영화(즉, 아주 편한 마음으로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영화)로 [본] 시리즈가 있는데, 잘 만든 오락영화는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는 좋은 미덕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영화를 만든 박훈정 감독의 근작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사실 박훈정의 능력 중 상당 부분이 과거 명작의 장점을 매끄럽게 베낀다는 데에 기대고 있었으니, 그가 창의적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이라고 예상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스타파워나 대기업 자본에 기대지 않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만든 [마녀]는 [신세계]에서 보여준 장기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작품이다. B급 영화에서 만날 수 있을 법한 서사구조와 클리셰들이 판치는 가운데 한국영화 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소녀 히어로, 혹은 안티-히어로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미 어느정도의 성취를 이룬 셈이다. 영화적으로 많은 단점들이 존재하기에 결코 단단한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는 작품이지만, 어디선가 베낀듯한 요소들을 잘 버무려 이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아우라를 만들어냈다는 점도 칭찬할 만 하다. 주연 배우 김다미는 박훈정의 그러한 어설픈 작가주의를 거의 완벽하게 드러내는 페르소나로 손색이 없다. 어색한 듯한 표정과 몸짓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윤종빈 | 공작

공작 포스터
[용서받지 못한 자] 이후 윤종빈 감독의 작품 중 딱히 마음에 든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그가 본격적으로 블록버스터 영화만 찍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흥미도 거의 완전히 식어버렸다고 할 수 있고, [군도]나 [범죄와의 전쟁]에서 구시대적이고 남성주의적인 시각이 여전히 발견되는 것을 보고 그가 한계를 극복해나가며 성장하는 감독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만 강해졌다. [공작] 역시 그리 인상깊게 본 영화는 아니다. 여전히 남성중심적인데 심지어 등장하는 배우가 황정민이나 조진웅같은 사람들이다. 내 아버지보다 더 자주 만나게 되는 황정민같은 배우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영화를 보며 식상함을 느끼지 않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서사구조 역시 단순하다. 차라리 이 영화로 인해 새롭게 조명받게 된 실존인물의 실제 생애가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이 영화가 가진 미덕을 두 개 쯤 꼽아보라면 하나는 영화적으로 편집이 무척 잘 되어 있어서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 속 북한사회의 모습을 꽤나 그럴듯 하게, 다른 말로 하면 영화를 보는 일반 관객이 상상하는 그 모습 그대로 잘 형상화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실제 북한사회가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할 방법이 당장은 없다. 그러니 관객이 대충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부분만 잘 끄집어내어 돈을 처발처발하면 그럴듯한 그림이 나오는 것 같다. 이제 정말 당분간 황정민이 나오는 영화는 보고 싶지 않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 어느 가족

어느가족
어쩌다보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최근작들을 꾸준히 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는 참으로 끈질기고 집요하게 가족에 대해 다루고 있다. 고레에다 감독의 팬이라면 “더이상 가족영화를 만들지 않겠다”는 감독의 선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가족에 대한 다른 시선’을 담아보겠다는 영역확장에 대한 의지의 표현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보여주는 서늘한 가족 서사를 마지막으로 필모그래피의 한 단락을 마무리한 이후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그답지 않은 천진난만함으로 잠시 한템포 쉬어갔다면, [세번째 살인]에서는 가족과 사회 간 유기적인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관찰대상을 적극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모양새다.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는 미시적 가족 구조, 법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관계를 가족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의 여부, 그리고 그 가족의 안을 한번 더 파고들어가 ‘개인에 대한 믿음’에 대한 질문까지 던지는 이 영화는 고전적이고 진부한 연극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함으로써 서사 그 자체에 집중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가족]은 [세번째 살인]과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는 영화이자, 전작에서 감독이 흥미를 보였던 주제를 조금 더 깊게 파고들어간 작품이다.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혹은 그 법적 보호의 혜택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이 모여 가족과 유사한 형태를 이루어 살아간다. 각자 말하지 못하는 과거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동거인 사이에 흐르는 끈끈한 정, 혹은 돈이라는 물질적 욕망 사이 어딘가에 기대어 연대를 이루고 있다. 일반적인 가족과는 조금 다른 추동력을 가진 이 집단에 새로운 멤버가 우연히 들어오게 되고, 이 가장 어린 멤버이자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가진 멤버를 중심으로 집단에 조금씩 변화가 생겨난다. 영화는 후반부까지 이 변화의 양상을 느린 속도로 가만히 비추는데 집중한다. 잠시나마 모성애와 혈연이라는 전통적인 가족의 영역으로 편입되는가 했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못한다. 법과 사회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규범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던 이 ‘가족 아닌 가족’은 결국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파멸한다. 이들이 가진 ‘경계인’으로서의 삶은 사회로부터 이해되지 못했고, 이들 스스로도 조금 더 ‘정상적인 가족’으로 편입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한 채 뿔뿔이 흩어지는 쪽을 택한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후반부 인터뷰씬에서 감독은 영화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데, 차라리 그 부분이 없었다면 더 좋을 뻔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이케와키 치즈루는 반가웠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한 영화 안에서도 곱씹어볼만한 질문을 여러개 던져주는 감독이다. [어느 가족]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가족의 변이와 확장을 사회가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사려깊게 던지고 있다. 다만 형식적인 부분에서 확실히 질리는 부분이 점점 많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진부한 부분이 너무 많다. 전작들 중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싶은 기분을 느낀다. 홍상수처럼 자기복제의 함정에만 걸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스위스-이탈리아 여행 중 비행기에서 본 영화들

2008년부터 올해까지 매년 최소한 두 번은 10시간 이상의 장거리 비행을 경험하고 있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공항과 좀 멀어질까 살짝 기대했지만, 출장이라는 예상치 못한 복병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줄은 몰랐다. 이후 신혼여행과 여름휴가 등으로 인해 지금까지 정기적으로 좁은 이코노미석에 몸을 구겨넣고 열시간 이상을 버티는 연습을 10년째 해오고 있다. 이쯤 되면 좋든 싫든 공항과 비행기 안에서 나름의 여유를 찾고 유희를 즐기는 법을 터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인간은 적응을 하게 되어 있으니까. 나는 비행운(飛行運)도 지지리도 없는 편이어서 장거리 노선 항공권을 무려 10년동안 지속적으로 구입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어느 한 항공사에 마일리지를 몰아서 쌓지 않았다. 어리석은 인류애를 바탕으로 여러 항공사에 마일리지를 고르게 나누어준 결과 남들은 한번쯤 경험한다는 비지니스석으로의 업그레이드를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몸을 구겨 넣는 연습을 계속 하는 가운데 어떻게든 즐거움을 찾아야 하는 셈이다.

나의 경우, 공항에서는 최대한 여유를 찾으며 쉬는 쪽을 택하는 편이고, 비행기 안에서는 잠을 청하기 보다는 이것저것 여러가지를 하며 즐기는 편이다. 면세점 구경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세금이라는 평생 따라다니는 족쇄를 일시적으로 풀어주는 대가로 소비의 노예로 기꺼이 전락하고 말겠다는 욕망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 욕망을 우아하고 아름답게 부추기는 면세점의 화려한 조명이 마치 미용실의 거울마냥 나의 현재를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대신 남들보다 훨씬 일찍 게이트 앞에 앉아 하염없이 멍때리는 쪽을 택한다. 기나긴 여정(=몸을 잘 구겨넣은 상태에서 아주 약간 허용된 자유공간을 최대한 허용하여 몸을 깔짝거림으로써 신체의 손상을 최소화시키려는 한 인간의 눈물겨운 노력)을 앞두고 심리적으로나마 최대한 안정을 취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결혼한 뒤부터는 이러한 루틴도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다. 면세점에서의 경제적 이득을 최대화시키려는 아내의 뒷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다보면 지금까지 면세점에서 아무것도 사지 않은 내가 세계에서 가장 멍청하고 충직한 세납자가 된 것 처럼 느껴진다. (나의 충성심에 대한 국가의 화답은 더 높은 근로소득세와 건강보험료뿐!) 심지어 현명한 소비를 오래전 체득한 아내는 그렇게 쌓아올린 인생에 대한 보답으로 획득한 고상한 신용카드를 사용하여 로마공항의 고급스러운 라운지에서 멍을 때릴 수 있는 기회까지 부여해주었다.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행해왔던 내 멍때림의 질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경제적 소비와 그 소비를 거부하는 행위 사이에 이렇게나 깊은 연관성이 있을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최근에는 비행기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늘어난 편이다. 국적기를 기준으로 인포테인먼트 화면도 많이 커졌고(심지어 요즘에는 터치도 된다!), USB 포트도 자리마다 마련되어 있어 휴대폰 충전도 가능하다. 인터넷이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휴대폰으로 음악을 듣거나 사진을 편집하거나 미리 다운받아온 신문을 읽을 수 있다. 10시간 정도 비행을 할 경우 이륙 두시간 후 첫번째 식사가 나오고 착륙 두시간 전 두번째 식사가 나온다. 비행기 안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이것저것 할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이 두 식사 시간 전후로 발생한다. 탑승한지 별로 되지 않아 체력과 의욕이 넘칠 때, 그리고 착륙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무릎을 펼 수 있다는 희망을 서서히 가지기 시작할 때 에너지가 가장 넘치는 법이다. 여기에 식사까지 제공해주니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밥을 먹으며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행위는 특별하다. 나는 지금까지 10여년의 장기 비행기간동안 기내식 선택에 있어 단 한번도 실패를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나의 감식안이 유난히 발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항공사 측에서 식사를 하며 영화를 보게끔 배려해주었기 때문이다. (몸을 구겨넣는 것에 익숙해지다보면 많은 것들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

잡설이 길었다. 인천공항에서 쮜리히공항으로 가는 길은 동행자가 세 명이었다. 아내와 아내의 아버지와 어머니. 이번 여행의 처음 열흘은 가족여행으로 계획되었고, 우리는 스위스의 이곳저곳과 이탈리아의 중요한 관광지를 돌아볼 생각이었다. 인천-쮜리히 구간을 운항하는 대한항공 항공기의 좌석구조는 3-3-3이고(그렇다. 여전히 이코노미석이었다. 죄송합니다 부모님..) 화장실 이용의 편리함을 위해 아내와 부모님을 가운데 3자리에 앉히고 나는 아내 옆 복도쪽 좌석에 앉았다. 좌섣배치가 이렇게 되고 보니 혼자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내기에 더할나위없이 좋은 환경이 주어진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인천에서 쮜리히로 가는 열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내가 선택한 첫번째 영화는 무려 [골든 슬럼버]였다. (..) 강동원의 억울한 표정이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아주 명쾌하고 단순한 영화다. 비행기에서 틀어주는 영화의 공통점이라면 안좋은 화질의 작은 화면으로 봐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어야 한다는 점, 대사가 잘 들리지 않아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어야 한다는 점, 중간에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려도 영화에 정신이 팔려 불안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내용이 빠르게 전개되어야 한다는 점 등이다. [골든 슬럼버]는 비행기 영화의 거의 모든 미덕을 갖추고 있는 영화다. 강동원의 길쭉한 팔,다리와 억울한 표정은 그 자체로 훌륭한 두시간의 킬링타임을 제공한다. 그 외에는 별달리 할 이야기가 없는 영화이기도 하다. 사실 한국영화는 비행기에서 유난히 선호되는 장르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자막을 읽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비행기에서 글씨를 읽는 행위가 얼마나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내가 선택한 두번째 영화는 [꾼]이었다. 이 영화 역시 현빈과 유지태라는 두 명의 훌륭한 기럭지를 자랑하는 배우의 패션쇼 외에는 할 이야기가 별로 없는 영화다. 플롯은 엉성하고 조연들의 캐릭터는 일차원적이다. (나나를 거의 활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가슴속 한켠에 분노가 치밀어오르기도 했다) 극장에서 봤다면 상당한 허탈감을 느꼈겠지만, 비행기 안이라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 유지태와 현빈이 눈을 부라리며 서로를 응시하는 장면만으로 시간의 낭비를 꽤나 잘 하고 있다는 우월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보통 영화를 연달아 두 개 쯤 보고 나면 눈과 귀가 피로해진다. 이 시점에서 많은 승객들은 잠을 청한다. 항공기 측에서 조명을 꺼주기 때문이다. 창문은 강제로 닫혀졌고 불도 꺼졌으니 몸을 구기고 앉은 승객에 남아있는 옵션은 잠을 청하거나 책을 읽는 것 정도인데, 여기서 활자를 굳이 꺼내 읽는 용감한 승객은 굉장히 드문 편이다. 나는 이 시점에서 랩탑을 켜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 잠들지 않은 친정 부모님께 ‘쇼잉’을 하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덕분에 외부 청탁 원고의 초고를 완성할 수 있었고, 나는 자랑스럽게 랩탑을 덮으며 영화가 아닌 스포츠 카테고리로 눈을 돌렸다. 대한항공의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에는 외국인 승객을 위해 마련된 듯 보이는 예상 밖의 훌륭한 컨텐츠가 가끔 들어있다. [NFL 결승전 2018] 역시 철저히 외국인 승객을 위해 준비된 다큐멘터리 필름이다. 한국어 자막이 있긴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대사는 번역되지 않았다. “자, 이제 힘을 내자구!”처럼 굳이 하지 않아도 괜찮은 대사들만 억지로 번역이 되어 있었다. “4th down conversion에서 와일드캣(Wilde Cat) 포메이션을 구사하는군요”와 같은 대사는 번역가에게 너무나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글스의 역사적인 수퍼보울 퍼포먼스는 백업 쿼터백을 데리고 탐 브래디와 빌 벨리첵을 상대로 거둔 승리이기에 더 값져보였다. 우리 브롱코스도 케이스 키넘이 아닌 닉 폴스를 데려왔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다. 이 다큐멘터리와 커플처럼 존재하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컨텐츠는 [샤크 vs 코비] 인터뷰 필름이었다. TNT 농구중계방송 패널로 참여하고 있는 샤킬 오닐이 코비 브라이언트의 은퇴를 기념하여 인터뷰어로 나선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샤킬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는 레이커스를 여러차례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팀 동료로서 좋은 캐미스트리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두 명의 수퍼스타는 그러한 과정에 대해 가감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에 서로를 질투했지만 그와 동시에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존경심 역시 숨길 수 없었던 두 명의 고백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시끄러운 비행기 안에서 듣는 샤킬 오닐의 웅얼거리는 듯한 발음은 정말 참기 어려웠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법정 영화 [세번째 살인]은 여행을 떠나는 비행기와 여행에서 돌아오는 비행기를 연결해주는 작품이다. 나는 이 영화를 착륙하기 두시간 전 쯤 보기 시작했고, 30분 정도 시청하다 그만 잠들고 말았다. 부모님 앞에서 너무 열심히 일한 탓에 미처 눈을 붙이지 못했기 때문에 피로가 몰려온 것 같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첫번째 영화로 [세번째 살인]을 다시 택한 것은 옆자리에 앉아 [블랙팬서]를 시작한 아내에게 내가 결코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세번째 살인]의 지루한 초반 전개과정을 무사히 넘기고 플롯이 뒤엉키며 급변하기 시작하는 후반부를 무사히 맞이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가족영화의 범주에서 탈출해 만든 첫 영화이지만, 그가 결코 가족이라는 테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증명한 영화이기도 하다. 스릴러의 구조를 택하고 있지만 긴장감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며, 완전한 형태의 가족의 모습이 한차례도 등장하지 않지만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의 관계와 위로, 보상과 같은 고레에다 특유의 세계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묘한 영화다. 고레에다는 결국 이 영화의 다음 작품으로 [어느 가족]을 만든다. ‘역시 안되겠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깊게 본 영화는 [더포스트]였다. 매릴 스트립과 톰 행크스, 그리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언론과 언론인에 대한 영화라는 한 줄의 묘사만으로 그야말로 모든 상투성의 집합소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영화는 놀랍게도 묵직한 감동을 무리없이 전달하는데 성공한다. 서사 자체는 뛰어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하다. 뉴욕 타임즈에 밀려 유력 지역신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던 워싱턴 포스트가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되는 특종을 잡아내는 비결은 정론보도라는 간단한 진리였다, 라는 아주 스필버그적이며 아주 미국적인 주제의식. 정작 나를 감동시킨 건 이걸 ‘영화적’으로 탈바꿈시키는 장인들의 솜씨였다. 스필버그는 한 씬, 한 컷도 낭비하지 않는데 심지어 사소한 카메라워크까지 모두 서사와 주제를 위해 치밀하게 사용하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매릴 스트립과 톰 행크스는 마치 연기란 이런 것이다, 를 강의하는 듯 교과서적인 움직임을 흐트러짐 없이 보여준다. 아마도 그 해 최고의 영화로는 절대 뽑히지 못했겠지만, 아무도 이 영화를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행기에서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보리 vs 매켄로]였다. 역사적인 1980년 윔블던 남자단식 결승전을 소재로 만든 영화인데, 상반된 캐릭터를 지닌 두 뛰어난 테니스 선수가 서로를 마주하는 자리까지 가는 과정에서 자신 안에 숨겨져 있는 상대방의 모습을 발견해가는 이야기다. 경기 장면은 그다지 역동적으로 찍히지도 않았고 재미도 없다는 점에서 스포츠 영화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극한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내면을 세밀히 관찰한다는 점에서 차라리 심리 관찰물에 가까운 영화처럼 느껴졌다. 다만 회상씬이 너무 빈번하게 등장하고 예선전부터 결승전까지 올라가는 과정이 아무런 변화없이 똑같은 형식으로 그려져서 영화는 많이 지루한 편이다. 샤이아 라보프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굳이 고백이란걸 해보자면,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깊게 본 컨텐츠는 [코리안 뉴웨이브(뮤직비디오)]였다. 2008년 유럽 배낭여행 이후 가장 길었던 여행을 끝내고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는 길, 착륙을 약 한시간 정도 남기고 선택할 수 있었던 최상의 컨텐츠였다. 주로 아이돌 음악의 뮤직비디오가 나왔는데, 한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거의 대부분의 아이돌 음악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남자 아이돌 음악의 뮤직비디오에는 상대 여성이 등장하는 반면 여성 아이돌 음악의 뮤직비디오에는 상대 남성 배우가 등장하지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트와이스(Twice)의 신곡 “What is love?” 뮤직비디오다.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형이상학적인 사랑이 아니라 정말 그냥 십대의 사랑, 그런 느낌의 가사다) 뮤직비디오에서 상대 남성의 역할은 여성 멤버가 남장을 하고 대신하고 있다. 이들이 크로스드레서나 여성 동성애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문근영의 남장을 보는 듯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지?’ 정도의 느낌. 그와 함께 자본이 집중적으로 투입되는 아이돌 음악과 그렇지 않은 성인 발라드(?) – 이것을 ‘코리안 어덜트 컨템프로리’라고 표현하자 – 사이에 이젠 질적인 격차가 확연히 느껴진다는 점도 발견했다. 후자의 경우 저옛날 SG워너비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뮤직비디오조차 그렇다. 놀라울 정도로 시대착오적이었다.

마틴 맥도나 | 쓰리 빌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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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영화의 원제는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다. 이걸 그냥 [쓰리 빌보드]로 자신감 넘치게(!) 줄여버린 국내 배급사의 호기에 경의를 표한다. 이 영화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역성(locality)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즉, 한국어 제목에서 사라진 “outside Ebbing, Missouri”는 그 자체로 상징하는 바가 꽤 크다고 할 수 있다. “연쇄살인범의 주”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미주리주에서 치안은 꽤 심각한 사회문제다. 여기에 (영화에서도 주된 비판의 대상이 되는) 흑/백 인종 갈등 문제가 더해져 2014년 세인트루이스 근교 퍼거슨에서는 대규모의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경찰과 같은 공권력이 지켜주지 못하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웃을 적으로 돌려야 하는 이 곳의 냉랭한 분위기는 어린 시절의 제니퍼 로렌스가 열연한 [윈터스 본]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에빙(Ebbing)이라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작은 도시는 물론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마을이다(영화를 촬영한 곳은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실비아(Sylvia)라는 도시다) 대부분의 이웃이 서로를 알고 있을 정도로 익명성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작은 마을, 이 곳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누군가를 적으로 돌려야 한다면 그 절박함은 상당한 수준일 것이다. 이 영화는 이 폐쇄적인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원한과 분노, 복수에 대한 이야기다.

우선, 예고편을 보고 상상했던 이야기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 깜짝 놀랐다. 납치된 딸을 경찰 대신 추격하는 엄마가 주인공인 스릴러물을 상상했는데(도대체 왜 이런 상상을 했을까..) 정작 영화는 블랙 코메디에 가까운 서사를 느린 템포로 보여준다. 강간당하고 불태워진 딸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던 엄마는 거금을 들여 마을 외곽에 있는 광고판 세 개에 광고를 게재한다.

“(내 딸은) 죽임을 당하는 동안 강간당했다”
“그런데 아직도 범인을 잡지 못했다고?”
“대체 어떻게 된거야, 윌로비 서장?”

이 세 문구는 그 자체로 충분히 강력하게 영화의 주제를 함축한다. 영화는 이 세 광고판에 새겨진 분노가 작은 마을에서 어떻게 되물림되는지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분노의 힘은 우연과 필연을 가로지르며 한 엄마에게서 경찰서장에게로, 경찰서장에게서 형사를 꿈꾸는 충성스러운 경찰에게로, 그리고 다시 엄마와 경찰에게서 강간범으로 의심되는 한 남자에게로 전이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멍청한 캐릭터로 등장하는 19살 여자의 입에서 나온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낳는다”라는 문구는 영화의 모든 주제를 집어삼키는 단 하나의 키워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모든 행동에 대해 충분한 개연성을 부여받는다. 그 누구도 지독하게 악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비현실적으로 선하지도 않다. 적당히 약았고 적당히 이기적이며 또 적당히 비겁하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분노의 대물림이 희극적으로, 혹은 부조리극에 가까운 형태로 표현되는 동안, 자연스럽게 ‘대체 왜 일이 이지경까지 오게 되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딱히 잘못한 사람도 없고 딱히 잘한 사람도 없는데 모두가 조금씩 망가져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마음 한켠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낀다. 이와 동시에, 누군가의 슬픔이, 혹은 누군가의 분노가 어떤 지점에서 어떤 계기에 의해 멈출 수 있었다면, 과연 이 마을은 다시 평화를 찾게 되었을까, 하는 의심도 살짝 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결국 이 분노와 복수의 서사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되면 코언 형제의 걸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까지 떠올리게 된다. 현실을 비추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작은 마을의 비극적 이야기가 성공적으로 현실 그 자체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날카롭게 미국의 현재를 비춘다. 미국은 갈등의 천국이기도 하지만 봉합의 귀재이기도 하다. 어떤 갈등이 발생하면 미디어와 정책 당국은 재빠르게 “하나의 미국”을 외치며 휴머니즘을 화려하게 포장한다. 대규모 총기 살해사건이 발생한 다음날에는 서로를 껴안으며 슬픔을 나누는 유가족의 모습이 영웅적으로 표현된 사진이 모든 신문의 1면 톱에 등장한다. 총기규제를 위한 실질적인 논의는 처음에만 잠깐 반짝할 뿐 곧 강력한 로비에 막혀 용두사미 형태로 마무리된다. 미국의 이러한 위선적인 갈등 봉합 과정은 비슷한 형태와 구조의 갈등의 재발을 필연적으로 불러온다. 아마도 확실히, 올해 안 언젠가, 미국의 한 학교에서는 복수의 학생이 총기에 의해 살해당할 것이다. 미국 정부는 그것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방치하고 있다. 주민을 지키지 못하는 미주리주 경찰처럼. 그리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당신들이 스스로 이겨내야만 한다고. 이 역시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윌로비 경찰서장의 모습과 흡사하다. (자살 후 ‘따뜻한’ 편지를 남기는 모습까지 미국사회를 그대로 재현했다!) 과연 딸을 잃은 어미에게 그 슬픔을 오롯이 혼자 감당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옳은가, 라는 질문은 현재의 미국 사회에도 똑같이 돌려줄 수 있는 질문이다. 자살한 윌로비 서장은 위선적인 미국의 시스템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고, 강간범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기 위해 길을 떠나는 ‘답 없는’ 어미와 경찰은 혼란을 겪고 있는 미국인 전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션 베이커 | 플로리다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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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 베이커 감독의 전작 [탠저린(Tangerine)]을 굉장히 인상 깊게 봤다. 비전문배우들과 함께 아이폰으로 촬영해서 만든 영화라는 점, 트렌스젠더-매춘이라는 LA 최하위문화를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도 충분히 인상적이었지만, 영화의 기본 서사구조가 매우 전통적이면서도 탄탄하다는 점이 가장 놀라웠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평단으로부터의 좋은 평가와 함께 영화제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는 등 세상의 어두운 면을 올곧은 시선으로 관찰하는 션 베이커에게 새로운 힘을 실어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가 조금 더 단단한 모습으로 돌아와서 무척 반갑고 행복했다.

영화는 몹시 아름답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종의 마법, 혹은 기적과도 같은 장면들을 내뿜는다. 아이들이 두 싸구려 모텔을 오가며 작은 이야기들을 하나 둘 쌓아올려가는 과정이 신비롭기만 하다. 빈민가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 분모를 가진 [문라이트]가 상대적으로 희곡적인 요소가 강한 반면,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영화적이다. 이 점이 우선 가장 놀라웠다. 션 베이커가 한단계 더 높고 깊은 세계로 나아갔음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단순히 미학적인 진전만을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제 ‘미국의 다르덴 형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윤리적 시선도 더 강하고 단단해졌다. 전작에서 성소수자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던 베이커는 이번 영화에서는 히든-홈리스(hidden homeless)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모텔에 장기 투숙하기 때문에 통계상 홈리스로 잡히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그와 비슷한 수준의 열악한 삶의 조건에 놓인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무니의 엄마는 무니를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그녀를 온전히 지켜낼 능력이 없다. 무니는 엄마와 함께 하는 일상이 너무 행복하지만, 그 끝에는 “절친과 다시 만나지 못할”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 사이에는 이 안쓰러운 모녀를 묵묵히 지켜보지만 그 자신조차 이 싸구려 모텔의 가난한 삶에서 구원해내지 못하는 바비라는 모텔 관리인이 있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코끝 찡한 사연이 전혀 유치하지 않게,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의 완전한 결론으로 나아가는 과정 역시 아름답다. 서서히 중첩되는 서사구조 안에서 방향성이 흔들리지 않고 일관된 하나의 결론으로 우직하게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영화의 엔딩씬은 또다른 마법의 시작이다. 영화 시작 후 처음으로 배경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이 씬은 (아마도 확실히) 아이폰과 같은 다른 기기로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거칠고 투박한 카메라의 시선이 두 소녀의 뒤를 바짝 따라 붙을 때 기묘한 체험이 새롭게 시작됨을 알 수 있다. 두 소녀의 여행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 때 쯤 영화는 갑자기 끝나게 되는데, 엔딩 크레딧의 배경음악으로 (아마도 확실히) 디즈니랜드의 실제 군중 목소리가 삽입된 것을 보면 관객의 마음 안에서 두 소녀의 여행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감독의 마음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추측해보게 된다. 나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적인 기적을 체험했다.

데이빗 레이치 | 데드풀 2

데드풀2
[데드풀]을 보지 않았다. 마블 시리즈도 거의 챙겨보지 않았다. [데드풀 2]를 보기 전 유심히 들여다본 작품이라면 바로 직전에 본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비행기 안에서 본 [앤트맨]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드풀 2]를 유쾌하게 즐길 수 있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다스럽다. 영화와 직, 간접적으로 얽힌 많은 문화적 코드를 안주 삼아 신나게 씹어댄다. 하지만 영화에서 사용하는 문화적 코드가 엄청 딥-하지는 않다. 나처럼 마블 시리즈를 거의 보지 않았지만 대중문화코드에 적당히 노출된 관객이라면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을 정도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크게 두가지였다. 첫째, 이 영화는 ‘제 4의 벽’을 적극적으로 허물고 있다. 구글링을 해보면 원작의 설정에서 데드풀은 자신이 카툰 안에 존재하는 캐릭터임을 자각하는 유일한 존재라고 한다. 그래서 카툰 밖으로 나와 작가들의 세계(현실)를 침범하는 에피소드까지 있을 정도라고 하니, 각종 문화코드를 먹잇감처럼 잘근잘근 씹어대는 데드풀의 캐릭터를 극단적으로 확장하면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점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었다. 관객과 대화하며 ‘이제부터 사람을 많이 죽일텐데 이건 다 오락이고 뻥이야’라고 미리 알려주는 친절한 캐릭터라니. 좋은 시도라고 느꼈다. 둘째, 단순히 선정적인 표현만이 난무하는 성인을 위한 오락영화라고 하기에는 [데드풀 2]가 가진 정치적인 균형감각이 매우 뛰어나보였다. 다인종-동성애자 커플을 주요 조연으로 배치한 점이나 대안가족의 형성을 영화의 큰 테마로 설정한 점, 뚱뚱하고 못생긴 소년을 안티-히어로 역할로 배치하여 전통적인 히어로물의 프로토타입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점 등은 이 영화가 가진 절묘한 정치적 감각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쉴새 없이 튀어나오는 거의 모든 대사에서 정치적인 올바름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건 계산이라기 보다는 감각, 혹은 자세의 영역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나 싶다. 작가들의 능력이 놀라울 뿐이다.

이창동 | 버닝

이창동 버닝
결론부터 말하면, [버닝]은 이창동의 필모그래피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기록될만한 가치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동시대에 존재하는 모든 한국영화들 중 최고의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그만큼 이창동은 완전히 다른 레벨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또한, 이창동이 차기 작품에서 나아갈 방향에 대한 단서들을 꽤 많이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 [버닝]은 매우 흥미로운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먼저 이창동의 다른 영화들과 비교하여 [버닝]이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혹은, 그 진실성을 표현하는 방법이 상투적이고 진부하다. 이 영화를 ‘현 시대 젊은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 혹은 공감’으로 해석한다면 이 상투성은 더 크게 다가온다. 현실은 지옥이고 전쟁인데, 이창동은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못한채 현학적으로 현실을 ‘음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영화적으로 가장 잘 하는 것은 ‘선’을 제대로 긋는 것이다. 그가 만든 모든 영화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정확하고도 올곧은 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버닝]에서도 그가 가진 시선은 옳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파주와 반포 사이 어딘가에 줄세워져 있을 것이고, 파주의 젊은이가 가진 응축된 분노와 반포의 젊은이가 가진 책임감 없는 쾌락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현실은 이미 모두가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뼈에 사무치도록 경험하고 있는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이다. 이창동의 [버닝]에서는 현실의 차가운 촉감을 느낄 수 없다. 매혹적인 장면들과 구조주의적인 대사, 잔뜩 꼬아버린 서사구조가 이 시대 젊은이들의 고통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물론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영화가 되긴 했다(후술할 것이다). ‘존재’에 대해 묻지 않고 ‘부재’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방식은 굉장히 날카롭다. 하지만 어른인 그가 청춘의 비틀거림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딘가 어설프고 동떨어져 있다. 진심어린 위로의 목소리를 느낄 수 없다. 그렇다고 지옥도 안에서 함께 숨쉬고자 하는 연대의식도 찾을 수 없다. 영화의 구조적 완성도에 천착한 나머지 메시지를 다듬는 일에 조금 소홀하지 않았나 느껴질 정도다.

둘째,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방식은 오히려 퇴보했다. [오아시스], [밀양], [시]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여성을 향한 서늘하고도 뜨거운 양가적인 시선은 이번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쓸데없이 벗기고, 대상화시키는 데에 적극적이다. 아름다운 석양 아래에서 춤추는 장면을 보며 이창동이 이번에는 여성을 굉장히 나이브하게 담아내려고 작정했구나, 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해미'(전종서 扮)로 대표되는 주요 여성 캐릭터 자체가 [버닝]이 가진 미스테리하고 다차원적인 서사구조를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해석하면 아예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영화에서 해미만큼 적극적으로 영화의 주제의식을 함축하고 있는 캐릭터도 없는 셈이기도 하다. 다만, 감독의 여러 의도 중 하나가 이 영화에 대한 다채로운 해석의 공존에 있다면, ‘모든 것은 실재하는 현실’이라고 이 영화를 이해하는 관객에게는 해미의 역할이 충분히 불쾌할 수 있다. 실재하는 여성의 벗겨진 모습을 대상화하는 주인공에게 요즘 젊은층의 대표성을 부여할 수 없다고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셋째, 이 영화는 조금 비겁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대표적이다. 종수의 극단적인 선택은 그의 개인적인 선택이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 혹은 그가 대표하는 사회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운명을 묘사하는 쪽에 가깝다. 과연 그의 선택이 온당하고 합당한가. 혹은, 어른의 시선으로 젊은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위로의 최선이 그것이었는가. 나는 조금 더 담대하고 조금 더 따뜻한 무언가를 원했던 것 같다. 차라리 조금 덜 허무하게 인생을 이어나가는 쪽이었다면 납득하기 수월했을 것이다. 극단적 선택을 이끄는 하나의 결론에 종수가 사로잡혀가는 과정은 논리적으로 정당하지 않으며 강제적이지도 않고 숙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미스테리한 서사구조를 위해 희생되어야만 하는 것이 있다면, 왜 하필 그것이 종수의 선택이었는지도 궁금하다.

하지만 [버닝]이 여전히 동시대 모든 한국영화, 더 나아가 꽤 많은 전세계 영화들과 비교하여 여전히 압도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영화가 가진 다층적인 서사구조를 이해하는 과정 자체만으로 충분히 지적으로 즐겁고 흥미롭다. 영화는 종수(유아인 扮)가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을 묘사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의 모든 씬 중 종수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 장면은 거의 마지막 즈음 딱 한 번 등장한다. 벤(연상엽 扮)이 화장실에서 화장도구를 꺼내 여성을 화장해주는 장면 말이다. 즉, 이 영화는 종수가 바라보는 모습이 모두 다 실재하는 현실인지, 혹은 중간 중간 잠들었던 그가 꿈에서 깬 이후부터 전개되는 현실인지, 혹은 그 꿈에서부터 환상이 시작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영화의 종반부에 종수가 해미의 방에서 열심히 타이핑하는 그 소설의 내용이 그냥 이 영화 자체인지 알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 관객은 그 어떤 가능성으로 해석해도 영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며, ‘실재’와 ‘부재’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영화의 형식과 그 형식을 바라보는 관객 모두가 하나의 주제의식을 형성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여러 상징물과 촘촘히 직조된 대사들을 끼워맞추는 행위는 그래서 재미를 넘어 관객 스스로 영화의 주제의식을 형상화시키는 하나의 의식으로 승화되기에 이른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에 대한 어른의 시선, 혹은 공감’이라는 사회적 키워드만 제거한다면, 이 영화는 영화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조립품질을 자랑한다. 결국 나는 이 영화가 영화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어쨌든, [오아시스]에서부터 차근 차근 쌓아온 이창동의 ‘환상과 현실 간 모호한 경계’의 영화적 실현이 [버닝]에 이르러 미학적으로나 구조적으로 거의 완성단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둘째, 종수, 벤, 해미로 대표되는 영화의 중심 캐릭터는 이 시대의 사회상 그 자체를 상징한다. 그러니까 나는 처음부터 종수나 벤, 해미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영화 내내 그들이 인간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이창동은 살아있는 배우들이 연기하는 이 캐릭터들을 철저하게 사회 그 자체로 설계하고 표현하려고 의도한 듯 보인다. 종수라는 인물이 품고 있는 사회의 한 부분이 있다. 벤도 그러하고, 해미도 그러…할까? 아무튼, 최소한 종수와 벤의 대립 관계에서 관객은 파주와 반포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된 공기를 느낄 수 있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종수가 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벤이 종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현실을 환기한다. 최근에 등장한 그 어떤 영화에서도 이정도로 담대한 시선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진실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은 뼈아픈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중간에 멈춘 느낌이다)

셋째, 영화는 시각적으로 충분히 아름답고, 모든 씬이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다. 한 평론가는 이 영화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고 했는데, 사실 그 정도는 아니다. 허세가 약간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부터 이 영화가 영원히 끝지 않기를 바랐던 유일한 영화는 허우샤오시엔의 [빨간 풍선]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이창동답지 않게 멋을 잔뜩 부렸다. 그런데 완성도가 꽤나 훌륭하다.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랄 정도는 아니지만 몇 번이고 또 보고 싶어지게 만든다.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될 해미의 춤 장면이 대표적인 그런 장면일 것이고, 남산타워(혹은 서울타워)를 바라보는 해미의 옥탑방이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묵직한 한 방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창동의 전작들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많은 영화적인 장치들이 [버닝]에서는 깜짝 놀랄 정도로 높은 완성도와 함께 가지런하게 전시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이창동의 다음 영화가 무척 기다려지기도 한다. 구조적으로 영화를 직조하는 능력이 완성단계에 이르렀고, 시각적, 혹은 미학적으로 이를 표현하는 능력도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면, 이제 남은 것은 그 그릇안에 무엇을 담느냐 정도일 것이다. 그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무엇이 담겨 나올지 궁금하다.

김용완 | 챔피언

챔피언
영화는 너무나 상투적이고 진부해서 1%의 독창성도 발견할 수 없다. 이 영화를 영화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 같다. 다만, 영화가 사회상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생각한다면,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이 영화가 반영하는 현대 한국사회의 얼굴에서 조금 흥미로운 구석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먼저 이 영화는 ‘대안 가족’을 평범하게 그린다. 아주 무심한 표정으로,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이 영화의 밝은 결말이 대안가족의 ‘완성’이 되어버리게 만들어버린다. 이게 이 영화가 가진 무서운(?) 부분이다. 개그소재마저 어디선가 베껴온 듯한 진부함의 연속에서 주인공이 가짜 가족을 진짜 가족으로 만들어버리는 과정이 몹시 자연스럽다. 주인공의 배경은 이 영화가 반영하는 한국사회의 또다른 어두운 부분이다. 주인공은 미국으로 입양되어 친부모와 양부모 모두 여의고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달동네에 거주하며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비주류 스포츠의 최강자로 발돋움한다는 설정을 통해 영화는 한국사회가 가진 모든 비주류 정서를 한 사람 안에 무식하게 뭉뚱그려버린다. 이게 이 영화가 가진 두번째 무서운(?) 부분이다. 그야말로 이 영화는 한국사회에서 소수로 차별받는 모든 소재를 끌어다가 가장 주류 영화다운 방식으로 만든, 욕할 수 없을 정도로 천진난만한 정서를 가진 작품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평가하는 것이 더더욱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영화에서 신스틸러로 활약하는 귀여운 남매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이 이 영화를 상징하는 것 같다.   마동석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역할, 그로 인해 탄생한 역할을 무난하게 소화한다. 권율과 한예리도 딱 주류 영화의 평균적인 조연이 해야 할 부분까지만 무난하게 해낸다. 배우들의 연기가 딱히 훌륭하지도 않다. 그래서 더 불가사의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