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 보든, 라이언 플렉 | 캡틴 마블

[캡틴 마블] 포스터

전에도 몇 번 이야기했지만, 소위 DC니 마블이니 하는 그런 류의 히어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예술적으로 전혀 새롭지 않은 형식을 차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적으로도 흥미롭지 않다. 일차원적인 캐릭터와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갈 때부터 예측할 수 있는 단순한 서사구조는 영화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든다. 그 외에도 수많은 단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런 류의 영화에 열광하는 관객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영화를 예술이 아닌 산업-상품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보다 더 훌륭한 상품이 또 어디있나 싶다.

하지만 [캡틴 마블]은 꼭 보고 싶었다. 이 영화의 관람 여부가 엉뚱하게 ‘페미니즘’ 분쟁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조차 찻잔 속 태풍 정도에 불과하겠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역을 맡은 브리 라슨이 과거에 한 발언 등에 근거하여 불매운동을 벌이는 젊은 남성층의 태도는 나로 하여금 반드시 이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드는 동력으로 작동했다. 영화는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다른 히어로 영화들이 가진 단점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지만, 딱 하나, 브리 라슨의 연기력만으로 이 영화는 구원받기에 충분하다. 기존에 보지 못한 복합적이고도 흥미로운 성격의 여성 히어로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데에는 브리 라슨의 연기력이 절대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뒤뚱뒤뚱 뛰는 모습이 히어로답지 못하다”는 비판을 한 기성언론에서 읽을 수 있었는데, 이런 류의 시선이야말로 페미니즘과 여성주의 문화를 제대로 독해하지 못한 보수적 남성주의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라슨이 연기한 캐럴 댄버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그 캐릭터의 과거와 현재에 의해 중첩된 성격의 면면을 읽을 수 있었다. 뒤뚱거리며 뛰는 모습을 예로 들면, 캐릭터가 가진 불완전한 성장배경과 다혈질(이지만 섬세하기도 한 복합적인) 성격 등에 의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장면이었다. 브리 라슨은 아주 엉성한 영화에서 매우 섬세하게 캐릭터를 구현해냈다. 이 영화에서 볼만했던 것은 그거 딱 하나였다.

Yorgos Lanthimos | The Favourite

[The Favourite] poster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요즘 영화판에서 가장 핫한 이야기꾼인 것 같다. [더 랍스터(The Lobster)]부터 [킬링 디어(The Killing of Sacred Deer)]를 지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The Favourite)]까지, 큰 실수 없이 착실하게 자신의 영화적 세계를 구축했다. 감정을 숨긴 무표정한 배우의 얼굴, 새파란 숲, 극단적인 광각 렌즈의 사용 등 란티모스 영화만의 트레이드 마크가 시각적으로 우선 강렬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의 영화가 시각적으로 선사하는 깔끔한 모습은 아주 뛰어나다고 할 정도로 독창적이진 않다. 란티모스를 동년배의 다른 감독군과 분리시키는 것은 아주 단순한 서사구조를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와중에 창의적으로 이끌어내는 선명한 문제제기 능력일 것이다.

그의 세계는 항상 날카로운 대립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극에서 가장 복합적인 인물은 대립적인 두 세계 사이에서 고뇌하고 갈등하는 사람이다. 가운데에서 방황하는 인물의 고민이 깊어질수록, 그 누구도 행복해지지 못하며 그 누구도 균열을 막을 수 없게 된다. [더 페이버릿]에서는 여왕 앤이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는 누구나 대립관계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친절하게 설명한 뒤 부차적인 장식물은 모두 거세한 채 빠른 속도로 핵심으로 치닫는다. 관객은 이미 결말을 알고 있지만, 등장인물 사이의 갈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긴장감도 함께 높아지기 때문인지 직선적인 서사구조로 인해 지루해할 틈은 없다. 지극히 판타지스러운 이 세계는 결말에 다다르는 지점에서 갑자기 관객의 현실을 환기시키는데, 나는 이 부분이 란티모스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점점 일그러지는 앤의 얼굴과 마비되어가는 팔, 다리는 잘못된 선택이 연속적으로 행해지고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쉽게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의 낡고 굳어버린 처지를 상징한다. 그렇다고 앤의 사랑을 차지한 한쪽 세계가 많이 행복해보이진 않는다. 그녀는 여왕의 무릎 밑에서 짓눌리는 삶을 평생 살아야 한다. 껍데기 뿐인 권력이지만 그 권력의 끄트머리를 부둥켜 잡고 살아야 겨우 생존하는 가냘픈 인생이 이 한쪽 세계의 전부임을, 영화는 꽤 긴 클로즈업을 통해 적나라하게 비춰준다. 여왕의 사랑과 권력을 빼앗긴채 이제 모든 것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다른 세계의 모습이 오히려 더 담담해보인다.

욕망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쟁취했지만 불안감에 한 치도 마음 놓을 수 없는 현실, 틀린 것을 알고 있지만 바로잡을 용기가 없는 삶, 지나친 소유욕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알량한 자존심. 그렇게 판타지스럽지 않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습들이다. [더 페이버릿]은 그런 현실의 누추함을 비추는 현명한 우화다. 란티모스의 영화는 테크닉이 너무 화려하고 뛰어나서 별 네개 이상을 줄 수 없게 만들지만([플로리다 프로젝트]와 [문라이트]같은 영화가 내가 별 다섯개를 줄 수 있는 영화들이다), 그렇다고 그가 가진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시기하거나 깎아내릴 마음은 추호도 없다. 지적으로 자극이 되는 흥미로운 영화를 계속 만들어주기를 희망한다.

Susanne Bier | Bird Box

[Bird Box]

영화의 구조는 단순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무엇’을 본 사람은 자살하게 되는 세계가 도래한다. 그것을 보면 반드시 죽는다. 죽지 않기 위해 문을 걸어잠그고 창문의 커튼을 내린다. 음식 등을 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갈 때에는 눈을 가린채 여기저기를 손으로 더듬어가며 길을 찾아야 한다. 주인공 멀로리(산드라 불록 扮)는 그 와중에 아기까지 출산했다. 한 집에서 함께 위기를 겪어나가던 여자는 동시에 아이를 낳고 숨졌다. 그녀와 한 집에 우연히 모여 함께 위기를 헤쳐나가던 동료들은 ‘그것’을 보아도 죽지 않는 미치광이에 의해 살해당했다. 멀로리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동료 톰(트레반테 로즈 扮)과 함께 두 아이를 데리고 외딴 곳에서 5년 동안 생존한다. 하지만 톰마저 미치광이들에 의해 숨지고, 멀로리는 우연히 무전교신을 통해 연락이 닿은 신원불명의 남자 ‘릭’이 가르쳐준 방향대로 눈을 가린채 작은 보트에 몸을 싣고 무작정 그 ‘유토피아’로 나아간다.

영화의 매력도 단순하다. 영화는 산드라 불록이 가진 미덕을 최대한 전시하는데 집중한다. 그녀는 [그래비티]에서 보여준 강인한 육체적 매력을 자신있게 보여줌과 동시에, 동 영화에서 주인공 라이언이 극복해야 했던 대상이자 채워지지 않는 공백이었던 모성애를 마음껏 드러낸다. 갑자기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해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디스토피아적 세계, 바깥 세상은 아무 것도 볼 수 없기 때문에 집 안에서만 생활할 수 있는 폐쇄적인 공간성, 그 좁은 공간을 공유하는 동료조차 믿을 수 없게 만드는 다양한 상황설정 등 영화는 스릴러의 기본공식을 충실히 따라간다.

영화의 단점도 명확하다. 우선 서사구조가 엉성하다. 설정 상 모순이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등장인물의 성격도 하나같이 일차원적이다. 스릴러 장르 영화에 대한 클리셰로 가득차있다. 심지어 무언가를 보면 반드시 죽는다는 기본 설정조차 어디에서 본 듯 하다. (영화는 조쉬 메일러맨(Josh Malerman)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넥플릭스에서 만들어진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텔레비전이라는 한정된 전달매체 안에서 지속적으로 시청자의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한 장치를 끊임없이 삽입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손쉬운 장치가 스릴러 구조다. [버드 박스] 또한 예외는 아니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심지어 앞도 보지 못하는 포스트-아포칼립틱 세계에서 두 아이를 건사해야 하는 어머니의 사투라는 주제는 끝까지 영화를 보게 만드는 원천이다. 영화의 매력도 딱 거기까지고, 그 외 새로운 매력을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다.

하지만 [눈먼 자들의 도시] 등의 관련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주제의식을 [버드 박스]에서도 동일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은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영화에서는 사람들의 시각을 지배하여 목숨을 잃게 만드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정체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주인공이 거주하는 집에 침입한 미치광이의 그림에 의해 대략적인 형태를 짐작할 수 있지만, 우스꽝스러운 그 모습을 보면 더이상 중요하지 않은 존재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초월적 존재와 인간 사이의 대립관계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관계는 ‘그것’을 보아도 눈이 멀거나 죽지 않는 미치광이 집단과 ‘그것’을 보면 죽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 사이의 사투일 것이다. 미치광이는 주인공이 거주하는 집에 침입한 뒤 창문을 개방하여 동료들을 하나씩 죽게 만든다. “넌 저것을 봐야해. 얼마나 아름다운지.”라는 대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억지로 바깥 세상을 보도록 강요한다. 모두가 시력을 가진 세계에서 눈먼 자들은 비정상이라고 취급당한다. 하지만 모두가 시력을 빼앗긴 채 살아가는 영화 속 세계에서 ‘그것’을 볼 수 있는 자들은 미치광이, 혹은 폭력적 존재로 그려진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현실의 세계에 사는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당연’한 일이자, 가끔은 퍽 낭만적이거나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현실에서 눈먼 자들이 사는 세상은 세심하게 보살펴지지 못할 때가 많다. 어쩌면 영화속에서 눈을 가린 자들에게 바깥 세상을 보라고 강요하는 미치광이의 모습이, 현실에서 눈먼자들에게 동등한 세계를 공유할 것을 강요하는 시력을 가진 이들의 행동을 은유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속 미치광이에게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는 그 모습이 평범한 이들에게는 죽음으로 가는 독약이듯, 현실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이 다수에 의한 폭력이 되어서는 안된다.

[버드 박스]가 성취하고 있는 가장 훌륭한 주제의식이 위와 같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영화의 결말은 두배로 실망스럽다. 모든 고난을 뚫고 멀로리와 두 아이가 도착한 곳은 실제 눈을 먼 이들과 시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에 의해 바깥 세상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함께 사는 일종의 유토피아인데, 그곳에서 어떻게 식량은 조달하는지 등 설정, 그곳에서의 삶이 미치광이 집단과의 대립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등에 대한 설명 등 꼭 필요한 정보를 전혀 제공하지 않고 뭉클한 감동을 강요한 뒤 성급하게 엔딩 크레딧을 올려버린다. 전형성에 대한 비판을 담은 영화인데 서사구조나 영화적 장치는 너무나 전형적이다. 이런 모순도 가 설계된 것이라면 실로 대단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지만, 솔직히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Yorgos Lanthimos | The Lobster


저녁식사를 위해 고기를 구워야 해서 짧게 감상평을 남긴다. (무려 창원에서 공수된 등심 소고기다. 아내를 실망시킬 수 없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에 대한 명성은 오래 전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그의 영화를 본 것은 이 [랍스터]가 처음이다. 이 영화가 개봉되었던 2015년 당시에서 주변의 많은 이들이 칭찬했던 기억이 난다. 깔끔하고 똑똑하다는 평가가 적절할 것 같다.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고, 지적으로 까탈스러운 평론가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영리하다.

영화는 부조리로 가득찬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벌어지는 감정에 대한 억압의 문제를 블랙 코미디 장르 위에서 유려하게 풀어낸다. 주인공은 반드시 짝을 찾아야 하는 세계와 절대 짝을 찾으면 안되는 세계 사이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두 세계는 대립하고 있고, 주인공은 딱히 굳건한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나름 자신이 속한 세계의 규칙에 순종하기 위해 애쓴다. 짝을 반드시 찾아야 하는 세계든, 그렇지 않은 세계든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규칙, 혹은 주인공이 필사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상대방과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일이다.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것에 대한 집착은 결국 주인공과 그의 파트너를 일종의 감정적 파멸로까지 이끌게 되는데, 영화는 이 외에도 자연스럽게 피어나야 하는 다양한 감정들을 규제와 억압의 대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부조리극의 설계를 탄탄히 한다. 관객은 ‘왜’ 그런 세계가 만들어졌고 유지되어야 하는지 알 길이 없는데, 이건 사실 알 필요가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집요하게 파고드는 지점은 일상의 관계에서 우리가 알게모르게 집착하게 되는 감정의 규범화, 혹은 상대방에 대한 감정의 강요 등의 문제다. 상대방에게 사랑의 언어를 자신의 원하는 형식으로 강요한 적은 없는지, 상대방과의 관계 그 자체가 목적인 나머지 억지로 공유지점을 창조하여 관계의 지속을 스스로에게 강요한 적은 없는지, 감정의 소멸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점에서 이를 거부하며 상대방에게 그 책임을 떠밀었던 적은 없는지 생각해볼만 하다.

영화에서 가장 섬뜩한 부분은 한 세계의 지도자에 의해 신체의 일부분을 잃은 등장인물 중 하나가 “내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이런 짓을) 해도 되는 거잖아요!” 라고 절규하는 장면이었다. 이 등장인물은 이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불행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그 결과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욕망을 정당화한다. 이런 장면들의 반복만으로 영화를 보는 즐거움은 충분했다. 어른을 위한 우화로 꽤 괜찮은 만듦새를 가진 영화다.

Jay Bulger | CounterPunch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영화 [카운터펀치(Counterpunch)]를 기획하고 감독한 제이 벌저(Jay Bulger)는 복싱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놓았는지 회고하는 것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전국적인 인기를 끈 스포츠 종목이자 가난한 이들에게는 ‘어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의 상징과도 같았던 복싱은 이제 NFL이나 NBA에게 그 영광을 내어주고 관심의 뒷편으로 밀려난지 오래다. 반쯤 벌거벗은 몸뚱아리가 전시의 전부인 오락물이자 육체적 강인함을 바탕으로 상대방을 쓰러뜨려야 승리의 달콤함을 맛볼 수 있다는 원시성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 스포츠 종목인 복싱에 가진 것이라곤 몸뚱아리 밖에 없던 가난한 흑인사회가 더 열광적으로 반응한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그 흑인사회마저 등을 돌릴 정도로 쇠락의 길로 빠져든 이 원초적 스포츠의 속살을 담담하게 비추고자 하는 이 영화의 시선은 오히려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복싱을 담아내는 영화의 카메라 렌즈는 대부분 역동적인 각도를 잡아내기 위해 애쓰고, 복싱을 담아내는 영화의 시놉시스는 대부분 가난과 영광, 그 이후의 몰락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도구로써 이 종목을 활용하고자 노력하는데 반해 다큐멘터리 [카운터펀치]는 각기 다른 위치에서 시작한 복서 세 명의 이야기를 독립적으로 다루되, 감독의 시선은 철저히 배제한다는 원칙을 끝까지 유지한다는 점에서 색다른 복싱 영화로 기억될 만 하다.

영화는 “Lil B-Hop”이라는 애칭으로 불리우는 유망주 소년 복서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크리스토퍼 콜버트(Christopher Colbert)는 뉴욕주 브루클린의 가난한 집에서 성장했고, 이 지역의 불우한 청소년들을 계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역 경찰들이 합심하여 문을 연 무료 체육관 ‘Atlas Cops & Kids Boxing Gym’에서 복싱을 처음 접했다. 이후 이 스포츠에서 재능을 발견하고 화려한 아마추어 커리어를 마무리한 뒤 본격적인 프로 세계의 문을 두드린다. 콜버트의 이야기가 드러내는 것은 복싱이 지역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성이다. 이 무료 체육관은 영화를 제작하던 시기 브루클린 지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청소년 대상 무료 체육관이었다. 이제 경찰복을 벗고 체육관 운영에만 매달리는 운영자들은 매일 운영난에 허덕인다. 복싱은 점점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고, 가끔 콜버트와 같은 유능한 인재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 역시 알 헤이먼(Al Haymon)과 같은 거물 프로모터가 거절할 수 없는 금전적 제안을 해오며 냉큼 빼내간다. 콜버트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고, 자신이 가진 재능을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를 부와 명예의 길로 가장 빠르게 안내해줄 사람은 헤이먼과 같은 유능한 프로모터다.

알 페이먼과 같은 프로모터가 현 복싱계에 미치는 파급력은 영화의 다른 주인공, “Kid Chocolate”으로 불리우는 피터 퀼린(Peter Quillin)의 이야기에서 조금 더 명확하게 부각된다. 피터 퀼린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복서다. 미시건의 가난한 마을에서 성장하여 뉴욕에서 복싱을 연마한 뒤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자신의 고향 그랜드 래피즈(Grand Rapids)에 멋진 저택을 짓고 가족을 부양할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다. 밝은 앞날만이 가득해보였던 그가 돌연 챔피언 의무 방어전을 포기하고 벨트를 스스로 내려놓는 선택을 한다. 젊은 나이의 전도유망한 챔피언이 스스로 벨트를 포기했다는 뉴스는 전세계적인 화제의 대상이 되고, 곧 그의 비상식적 선택의 뒷편에 알 헤이먼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헤이먼이 자신의 구미에 맞는 대진을 짜기 위해 퀼린에게 거액의 돈을 주고 도전자와의 경기를 포기하라고 종용한 것이다. 이후 퀼린은 1년 간의 공백을 끝개고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재기전에서 체중을 맞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TKO로 패배하게 된다.

콜버트와 퀼린의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알 헤이먼은 플로이드 메이웨더(Floyd Mayweather)와 각별한 관계이며, 현 복싱계의 패러다임을 형성한 사람 중 하나로 지목받는 사람이다. 콜버트와 퀼린 모두 메이웨더를 우상으로 대한다. 첫번째 패배를 당하기 전까지 퀼린은 자신과 메이웨더의 공통점으로 ‘무패 전적’을 꼽으며 그와의 관계를 주기적으로 상기시킨다. 콜버트는 “어린 시절 메이웨더를 보는 것과 같다”는 복싱계 평단의 평가에 흡족해하며 링 위에서 쇼맨쉽을 기르기 위해 애쓴다. 메이웨더와 같은 수퍼스타 복서의 경기에 걸린 베팅 금액은 천문학적 수준이며 경기 입장권 금액 역시 상상을 초월한다. 복싱이 몇몇 소수 프로모터와 수퍼스타 복서에 의한 돈잔치가 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카운터펀치]는 복싱을 처음 시작하는 어린 흑인선수와 이미 거물이 되었지만 여전히 프로모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베테랑 복서의 예를 통해 복싱계가 선정성을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구조가 고착화되어 더이상 그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돈잔치 복싱계에서 한발자국 떨어진, 영화의 세번째 주인공이 있다. 캠 F. 어썸(Cam F. Awesome)은 베테랑 아마추어 복서다. 영화제작 중이던 2015년 당시 캠 어썸은 2016년 리우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기 위해 고군분투중이었다. 그는 전국의 유명한 아마추어 대회를 휩쓸었지만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려야 한다. 협회에서 어느정도 생활비를 보조해주긴 하지만 한 달에 두번 헌혈을 해야 복싱을 계속할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프로행을 권유하지만 그는 올림픽이라는 큰 꿈을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올림픽 역시 완전히 순수한 아마추어리즘을 포기한지 오래다. 대표선수 선발전에서는 갑자기 헤드기어 착용을 금지하는 규칙이 통과된다. 복싱이 가진 원시성과 야만성이 흥행을 위한 좋은 도구임을 잘 알고 있는 협회의 결정에 어썸은 분통을 터뜨리지만, 돌아온 것은 눈 위에 크게 생긴 상처였다. 우여곡절 끝에 대표선수 자격을 획득하지만, 해외 대회에서 일정 기준 이상의 포인트를 쌓지 못한 그는 결국 올림픽 출전권을 박탈당한다.

비교적 담담하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는 영화의 공기를 환기시켜 주는 일은 슈가레이 레너드(Sugar Ray Leonard)와 같은 복싱계 전설들의 인터뷰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현 복싱계가 과거와 달리 지나치게 편파적이고 선정적임을 비판한다. 복싱의 역사이기도 한 이들은 메이웨더로 상징되는 현금인출기능만이 강조되는 현 세대의 복싱 관계자들의 태도를 책망한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콜버트는 2018년 말 현재까지 10승 무패를 기록하며 잘 나가고 있다. 퀼린은 충격적인 패배 후 다음 경기에서 승리를 챙기며 재기를 위한 발판을 다지고 있다. 어썸은 올림픽 출전권을 박탈당한 후 체육관을 운영하며 프로 전향을 저울질하고 있다. 복싱이 가진 순수성, 원시성이 누군가의 노력에 의해 지켜질 수 있다면,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카운터펀치’가 제대로 꽂힐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해보이지 않는다. 메이웨더가 추진하는 ‘돈이 되는’ 이벤트성 경기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전통있는 아마추어 대회인 ‘골든 글로브(Golden Glove)’는 그 권위를 점점 상실해가고 있다. 콜버트를 키워낸 아틀라스 체육관은 전국으로 그 규모를 확대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브루클린에서 이 체육관 외에 빈민가 흑인 청소년을 위한 다른 복싱 체육관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윤미현 작, 최용훈 연출 | 텍사스 고모

최근 한 공중파 채널에서 유쾌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전라도의 한 시골 마을에 사는 소녀 몇명이 의기투합하여 밴드를 만든 뒤 고군분투(?) 끝에 동네의 작은 축제에서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가진다는 내용이었는데, 정작 눈길을 끈 건 멤버 중 가장 밝고 적극적이던 한 소녀의 생활상이었다. 그 친구가 사는 집에는 엄마가 없었다. 그 소녀의 어머니는 근처 도시의 공장에서 합숙을 하며 일을 하고 있었고, 그로인해 이 모녀는 주말에 딱 하루 반나절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 소녀의 어머니는 필리핀 사람, 즉 결혼이주 여성이었다.

지방 시골 마을에 가면 두세집 건너 한 가정 꼴로 다문화가족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가 가진 기형적인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수입’되어온 이주 여성들의 삶은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의도적인 무관심’에 힘입어 주변적으로만 다루어져왔다. 이들에 대한 무관심의 뿌리는 어디일까. 몇십년 전, 주한미군과의 결혼을 통해 미국에서의 행복한 삶을 꿈꾸던 “양공주”들이 미국에서 겪은 불행과 고통의 이야기들은, 그들의 후손인 앤더슨 팍(Anderson .Paak)이나 하인즈 워드(Hines Ward) 등을 통해 불쑥 불쑥 한국 사회로 튀어나왔다. 그 당시 한국 여성들이 경험한 삶의 굴곡이 현대 한국에서 동남아시아 이주 여성들의 삶을 통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당시 피해자라면 피해자에 속했던 한국 사회가 이제는 가해자의 터전으로 기능하는, 역사의 아이러니한 수레바퀴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텍사스 고모]는 이 지점을 타격한다. “원조를 받는 국가에서 원조를 주는 국가로 변신한 유일한 국가”라는 자랑은, ‘이주 여성을 수출하던 국가에서 이주 여성을 받아들이는 국가’로의 전이를 인정한다는 말이기도 하고, 이걸 다른 말로 바꾸면 ‘고통을 수출하면서도 아무말 할 수 없었던 힘 없는 국가에서 개인의 고통을 수입하고 이를 노동력으로 치환하려 하는 힘 있는 국가’로의 변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인공 ‘텍사스 고모’의 조카가 목에 힘을 주고 이야기하는 “전국가적 위기상황”이란, 최소한의 인격적 존중조차 받지 못하고 부족한 농촌의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짐승처럼 부려지는 삶을 사는 결혼 이주여성이 30만명을 넘어선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대다수 한국인들의 무관심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푸른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간 고모는 돈 한푼 받지 못하고 옥수수밭과 목화밭에서 일만 하다 아이 셋을 남기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의정부 양말공장에서 일하며 살아오던 고모는 환갑이 가까운 자신의 오빠가  키르기스스탄에서 열아홉 여성을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 곳 고향에는 남겨진 아이들이 있다. 집을 떠난 부탄 출신 엄마와 고기 잡으러 배를 타고 떠난 아빠를 잊지 못해 밝은 곳만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소년, 시어머니에게 국자로 머리를 맞아가면서도 아들을 위해 버텼지만 끝끝내 시댁 식구들의 인격적 모독을 견디지 못하고 존재를 감추어버린 엄마를 기다리는 소년, 그리고 고모의 기구한 삶을 그대로 반복하려 하는 위기의 키르기스스탄 여성이 있다.  이 두 여성이 어떤 연대를 이루어낼 수 있을까, 를 기대했지만 연극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현실을 직시하는 결말을 통해 저릿한 충격을 안긴다. 이들에게 “모닝커피 한 잔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수영장 딸린 주택”과 같은 판타지는 없다. 하고 싶은 공부는 꿈도 꾸지 못하고, 이 일이 끝나면 저 일로 끌려 다니며 노동력을 제공하고 남자가 원하는 수 만큼의 아이를 낳기 위해 자궁을 제공하는 임무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 안타까움이 배우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날 때, 바라보는 관객 역시 무너져내릴 수 밖에 없다. 

좋은 극본과 좋은 연출, 그리고 뛰어난 연기와 사려깊은 무대연출을 경험했다. 

김민기 |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지하철 1호선]은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2001년, 혹은 2002년 무렵 어느 겨울날 이 뮤지컬을 처음 접했고, 큰 충격에 빠졌다. 내가 알던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충격은 아마도, 애써 무시하고 있던 세상의 밑바닥을 날것 그대로 접해야 했던 어린날의 성장통이었을 것이다. 이후 두 세번 정도 더 관람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관람 후 계단에서 기다리던 출연진과 일일이 악수를 하는 여유도 생겼지만, 관람 중 어느 순간 맞닥뜨렸던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듯한 감동은 여전한 크기로 전해져왔다. 유학을 나와있던 중 [지하철 1호선]이 4천회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다고 했을 때 느꼈던 서운함도 아직 잊지 못한다. 영원히 달릴 것 같았던, 마냥 씩씩해보였던 작품이 갑자기 운행을 종료한다는 통보를 해왔을 때 느꼈던 서늘하고 먹먹한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게 가슴 한구석에 살아남아있다. 연속 공연을 중단한 김민기 대표가 이후 아동극에 천착하는 모습을 보며 [지하철 1호선]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할 수 조차 없게 된 것은 오히려 인상적이었다. 매일 이 작품을 기억하며 살지는 않았지만, 첫번째 관람 이후 이 작품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말도 거짓은 아니다.

그런 작품이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마음 속으로 16,17년 전 감정이 살아나는 듯 해 묘한 반가움을 느꼈다. (사실은 뛸 듯 기뻤다) 그 때 들었던 노래들은 여전한 감동으로 다가올지도 궁금했고, 그 당시 이 작품을 통해 발견했던 마음 속 깊숙한 곳부터 시작된 아우성은 이제 어떤 모습으로 반응할지도 궁금했다. 나는 [지하철 1호선]을 비롯한 몇몇 예술 작품과 서적들을 통해 현재의 자아를 획득한 경우다.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십대 시절 읽지 않았다면, 머큐리 레브(Mercury Rev)의 [Deserter’s Songs]를 수험생 시절 듣지 않았다면, 로버트 하일브로너의 책들을 유학을 떠나기 전 읽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하철 1호선] 역시 마찬가지다. 입대 전 방탕한 대학생 시절에 만난 이 작품을 통해 세상을 보는 시선은 분명한 변화를 겪었다. 지금의 나는 그 때로부터도 멀리 달아나 있지만, 최소한 그 뿌리는 아직도 굳건히 자리잡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기에 이 작품을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관람하는 것은 최소한 개인적으로는 나에게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아내와 함께 찾았다. 아내가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지금 우리가 함께 보는 공연에서 어떤 것들을 공유할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다시 찾은 학전블루 소극장은 여전히 낡고 좁았다. 좌석은 세시간 가까이 진행되는 공연 시간동안 내 뾰족한 엉덩이를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딱딱했다. 하지만 앞좌석에 무릎이 닿을 정도로 좁고 불편한 좌석도, 매캐한 냄새가 은근히 퍼지는 지하의 공연장도 그저 반갑고 고맙기만 할 뿐, 공연을 기다리는 들뜬 마음을 식혀버리는 걸림돌이 되지는 못했다.

공연은 1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배경은 여전히 1998년 IMF 위기가 터진 직후였고, 선녀는 여전히 제비를 찾아 1호선을 타고 이곳 저곳을 배회한다. 그 와중에 만나는 사람들 역시 여전히 1998년을 살고 있었다. 혼혈로 태어나 사창가에서 포주 노릇을 하는 철수도, 그런 철수를 주워다 키운 곰보할매도, 곰보할매의 가게에서 우동을 외상으로 먹는 안경도, 그런 안경을 사랑하는 걸레도 모두 그대로였다. 지하철에서 UFO에 대한 믿음을 설파하는 교주와 고무장갑을 파는 잡상인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공연에서 2018년을 느낄 수 있었던 유일한 부분은 음악이었다. 밴드 ‘무임승차’의 구성이 조금 달라졌다. 드럼과 색소폰이 빠지고 바이올린과 건반, 퍼커션이 들어왔다. 그러다보니 모든 곡에서 약간의 편곡이 이루어졌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공연에서 정말 크게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사람이다. 공연을 올리는 배우들이 바뀌었고, 그 공연을 보는 나와 내 주변의 관람객이 바뀌었다. 우리는 이 작품이 무대 위에서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1998년의 공기에서 20년이나 떨어져 있었다. 그 당시의 무겁고 우울한 공기에서 조금씩 벗어난 우리는 이제 조금 다른 형태의 삶의 고단함으로 옮겨온 터였다. 비록 기억은 하고 있을지언정 더이상 그 순간을 살지 않은 우리들이 공연장에서 가장 서서히, 하지만 기어코 가장 극적으로 변해버린 존재가 아니었을까. 한 인터뷰에서 이번 [지하철 1호선]에 참여한 배우 중 과거에 공연되었던 [지하철 1호선]을 직접 경험한 배우는 딱 한 명 뿐이라는 이야기를 읽었다. 1998년이 2018년의 우리에게 ‘역사’로 기억되는 것처럼, 이 공연의 무대에 서는 배우들에게도 이 작품은 하나의 역사였던 것일까. 그래서인지 배우들의 연기에서 작지않은 이질감을 느꼈다.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선녀와 철수, 걸레와 안경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한 것이, 이번에 무대에 오른 젊은 배우들이 받아들였을 1998년과 나를 비롯한 객석의 많은 ‘늙은’ 관객이 기억하는 1998년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12월 쯤 되어 예정된 100회 공연의 막바지에 다다를 때, 이 배우들은 어떤 공기를 내뿜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관객으로부터 어떤 공기를 받아들일 것이며, 1998년을 반복해서 상기시키는 대사와 몸짓을 통해 무엇을 체화할 것인지 궁금해졌다. 아마도 적지 않은 것들이 달라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 1호선]은 4,000회에서 100을 더해 딱 4,100회까지만 운행한다고 한다. 김민기 대표의 인터뷰에 따르면 “정리하고 가야 할” 작품들이 학전에 쌓여 있고, [지하철 1호선]은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 가장 먼저 털고 넘어가기로 했다고 한다. 이제 이 작품이 정말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셈이다. 이 작품의 2008년, 2018년 버전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대표의 말처럼 만약 그렇게 시대를 한번 더 옮겨야 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번안이 아니라 새로운 작품이어야만 할 것이다. 2018년을 살아가는 철수와 걸레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 시대가 변했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변했으며, 우리와 시대 안에 존재하는 공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8년을 그리고 있는 [지하철 1호선]은 여전히 넘치는 생명력으로 펄떡거렸다. 오프닝에서 선녀가 독창을 할 때부터 이미 시작된 짜릿한 기운은 한 이름없는 술취한 직장인이 남산 아래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느껴지는 먹먹한 감정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되었다. 선녀의 이야기가, 걸레의 이야기가, 빨간바지의 이야기가 관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 개개인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 여전히 눈 앞에서 펼쳐졌다. 좁고 불편한 객석에서 세시간 만에 몸을 일으키며 고맙다는 생각만 계속 들었다. 다시 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단 100회 뿐이라 해도, 이렇게라도 다시 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박훈정 | 마녀

마녀 포스터
영화를 나보다 훨씬 좋아하는 아내덕분에 예전에는(즉, 아내를 만나기 전에는) 보지 않았을 작품들도 종종 보게 된다. 박훈정 감독의 최근작 [마녀] 역시 이런 연유로 보게 되었다. [신세계]는 채널을 돌리다 발견하면 꼭 끝까지 보게 되는 영화다. 이런 류의 오락영화(즉, 아주 편한 마음으로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영화)로 [본] 시리즈가 있는데, 잘 만든 오락영화는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는 좋은 미덕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영화를 만든 박훈정 감독의 근작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사실 박훈정의 능력 중 상당 부분이 과거 명작의 장점을 매끄럽게 베낀다는 데에 기대고 있었으니, 그가 창의적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이라고 예상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스타파워나 대기업 자본에 기대지 않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만든 [마녀]는 [신세계]에서 보여준 장기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작품이다. B급 영화에서 만날 수 있을 법한 서사구조와 클리셰들이 판치는 가운데 한국영화 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소녀 히어로, 혹은 안티-히어로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미 어느정도의 성취를 이룬 셈이다. 영화적으로 많은 단점들이 존재하기에 결코 단단한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는 작품이지만, 어디선가 베낀듯한 요소들을 잘 버무려 이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아우라를 만들어냈다는 점도 칭찬할 만 하다. 주연 배우 김다미는 박훈정의 그러한 어설픈 작가주의를 거의 완벽하게 드러내는 페르소나로 손색이 없다. 어색한 듯한 표정과 몸짓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윤종빈 | 공작

공작 포스터
[용서받지 못한 자] 이후 윤종빈 감독의 작품 중 딱히 마음에 든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그가 본격적으로 블록버스터 영화만 찍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흥미도 거의 완전히 식어버렸다고 할 수 있고, [군도]나 [범죄와의 전쟁]에서 구시대적이고 남성주의적인 시각이 여전히 발견되는 것을 보고 그가 한계를 극복해나가며 성장하는 감독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만 강해졌다. [공작] 역시 그리 인상깊게 본 영화는 아니다. 여전히 남성중심적인데 심지어 등장하는 배우가 황정민이나 조진웅같은 사람들이다. 내 아버지보다 더 자주 만나게 되는 황정민같은 배우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영화를 보며 식상함을 느끼지 않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서사구조 역시 단순하다. 차라리 이 영화로 인해 새롭게 조명받게 된 실존인물의 실제 생애가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이 영화가 가진 미덕을 두 개 쯤 꼽아보라면 하나는 영화적으로 편집이 무척 잘 되어 있어서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 속 북한사회의 모습을 꽤나 그럴듯 하게, 다른 말로 하면 영화를 보는 일반 관객이 상상하는 그 모습 그대로 잘 형상화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실제 북한사회가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할 방법이 당장은 없다. 그러니 관객이 대충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부분만 잘 끄집어내어 돈을 처발처발하면 그럴듯한 그림이 나오는 것 같다. 이제 정말 당분간 황정민이 나오는 영화는 보고 싶지 않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 어느 가족

어느가족
어쩌다보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최근작들을 꾸준히 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는 참으로 끈질기고 집요하게 가족에 대해 다루고 있다. 고레에다 감독의 팬이라면 “더이상 가족영화를 만들지 않겠다”는 감독의 선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가족에 대한 다른 시선’을 담아보겠다는 영역확장에 대한 의지의 표현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보여주는 서늘한 가족 서사를 마지막으로 필모그래피의 한 단락을 마무리한 이후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그답지 않은 천진난만함으로 잠시 한템포 쉬어갔다면, [세번째 살인]에서는 가족과 사회 간 유기적인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관찰대상을 적극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모양새다.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는 미시적 가족 구조, 법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관계를 가족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의 여부, 그리고 그 가족의 안을 한번 더 파고들어가 ‘개인에 대한 믿음’에 대한 질문까지 던지는 이 영화는 고전적이고 진부한 연극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함으로써 서사 그 자체에 집중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가족]은 [세번째 살인]과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는 영화이자, 전작에서 감독이 흥미를 보였던 주제를 조금 더 깊게 파고들어간 작품이다.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혹은 그 법적 보호의 혜택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이 모여 가족과 유사한 형태를 이루어 살아간다. 각자 말하지 못하는 과거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동거인 사이에 흐르는 끈끈한 정, 혹은 돈이라는 물질적 욕망 사이 어딘가에 기대어 연대를 이루고 있다. 일반적인 가족과는 조금 다른 추동력을 가진 이 집단에 새로운 멤버가 우연히 들어오게 되고, 이 가장 어린 멤버이자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가진 멤버를 중심으로 집단에 조금씩 변화가 생겨난다. 영화는 후반부까지 이 변화의 양상을 느린 속도로 가만히 비추는데 집중한다. 잠시나마 모성애와 혈연이라는 전통적인 가족의 영역으로 편입되는가 했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못한다. 법과 사회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규범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던 이 ‘가족 아닌 가족’은 결국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파멸한다. 이들이 가진 ‘경계인’으로서의 삶은 사회로부터 이해되지 못했고, 이들 스스로도 조금 더 ‘정상적인 가족’으로 편입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한 채 뿔뿔이 흩어지는 쪽을 택한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후반부 인터뷰씬에서 감독은 영화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데, 차라리 그 부분이 없었다면 더 좋을 뻔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이케와키 치즈루는 반가웠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한 영화 안에서도 곱씹어볼만한 질문을 여러개 던져주는 감독이다. [어느 가족]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가족의 변이와 확장을 사회가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사려깊게 던지고 있다. 다만 형식적인 부분에서 확실히 질리는 부분이 점점 많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진부한 부분이 너무 많다. 전작들 중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싶은 기분을 느낀다. 홍상수처럼 자기복제의 함정에만 걸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