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완 | 챔피언

챔피언
영화는 너무나 상투적이고 진부해서 1%의 독창성도 발견할 수 없다. 이 영화를 영화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 같다. 다만, 영화가 사회상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생각한다면,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이 영화가 반영하는 현대 한국사회의 얼굴에서 조금 흥미로운 구석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먼저 이 영화는 ‘대안 가족’을 평범하게 그린다. 아주 무심한 표정으로,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이 영화의 밝은 결말이 대안가족의 ‘완성’이 되어버리게 만들어버린다. 이게 이 영화가 가진 무서운(?) 부분이다. 개그소재마저 어디선가 베껴온 듯한 진부함의 연속에서 주인공이 가짜 가족을 진짜 가족으로 만들어버리는 과정이 몹시 자연스럽다. 주인공의 배경은 이 영화가 반영하는 한국사회의 또다른 어두운 부분이다. 주인공은 미국으로 입양되어 친부모와 양부모 모두 여의고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달동네에 거주하며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비주류 스포츠의 최강자로 발돋움한다는 설정을 통해 영화는 한국사회가 가진 모든 비주류 정서를 한 사람 안에 무식하게 뭉뚱그려버린다. 이게 이 영화가 가진 두번째 무서운(?) 부분이다. 그야말로 이 영화는 한국사회에서 소수로 차별받는 모든 소재를 끌어다가 가장 주류 영화다운 방식으로 만든, 욕할 수 없을 정도로 천진난만한 정서를 가진 작품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평가하는 것이 더더욱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영화에서 신스틸러로 활약하는 귀여운 남매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이 이 영화를 상징하는 것 같다.   마동석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역할, 그로 인해 탄생한 역할을 무난하게 소화한다. 권율과 한예리도 딱 주류 영화의 평균적인 조연이 해야 할 부분까지만 무난하게 해낸다. 배우들의 연기가 딱히 훌륭하지도 않다. 그래서 더 불가사의한 영화다.

앤써니 루소, 조 루소|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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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스크린의 80% 이상을 독점했다던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우리 부부에게 영향을 미칠거라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대전에서의 완전한 정착을 아직 이루지 못한 우리는 한가로운(?) 저녁 시간을 극장에서 보낼 때가 늘었는데, [레이디버드]까지 보고 난 직후 대전의 거의 모든 스크린을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쓸어담아버리는 바람에 사실상 이 영화를 보도록 강요받게 된 것이다. 문제는 내가 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관련 영화 중 그 어떤 영화도 보지 않았고 심지어 마블에서 발간한 그래픽 노블 중 그 어떤 것도 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내가 본 미국식 히어로물 그래픽 노블이라면 배트맨 관련 몇 권과 [왓치맨] 정도가 전부였다.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나를 만나기 전의 아내(짧게 말하기엔 좀 뭐하지만 간단히 정리하면 아내의 영화 취향은 나를 만나기 전과 만난 후로 나뉜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가 그나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대해 상대적으로 익숙하다는 점 정도였다.

아무튼, 마블의 세계관에 대해 어깨 너머로 주워들은 것이 전부인 나같은 사람도 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이해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었다는 점이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유일한 장점이다. 아 하나 더 있구나. 블록버스터 영화 한 편의 주인공 역할을 맡았어야 할 수퍼스타들이 씬 몇 개에만 등장하는 조연으로 나온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래서) 스칼렛 요한슨의 얼굴을 많이 보지 못한 점, 돈 치들, 폴 베타니, 마크 러팔로같은 좋은 배우들이 철저히 계산된 ‘money-making’ 대사들만 꼭두각시처럼 내뱉는 모습을 영화 내내 지켜봐야 하는 점, 조쉬 브롤린과 브래들리 쿠퍼의 얼굴을 전혀 볼 수 없는 점, 그 외 영화를 보는 동안 떠올랐던 374가지의 불만들은 모두 단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블의 히어로들과 세계관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도 알겠고 이 프로젝트가 왜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이는지 그 이유도 알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같은 사람은 이 영화를 볼 이유가 거의 없어보인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출연진들이 살짝 보여주는 키치한 세계에서 조금 위로받은 것을 빼면 이 영화가 가진 유머감각도, 서스펜스도, 서사도, 연기도, 연출도, 그래픽도,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레타 거윅 | 레이디 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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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독립영화계가 사랑해 마지 않는 그레타 거윅(Greta Gerwig)의 감독 데뷔작 [레이디 버드(Lady Bird)]는 사랑스럽고 따뜻한, 그리고 명민한 성장영화다. 그녀가 직접 주연을 맡고 공동으로 각본을 쓴 [프랜시스 하(Frances Ha)]를 본 이후 거윅이 영화를 만든다면 어떤 모습일지 무척 궁금해 했는데, 자전적인 이야기를 풀어낸 데뷔 작품에서부터 그녀의 젠체 하지 않는(down to earth) 성향이 적극적으로 드러난 것 같아 묘한 흥분감마저 느껴졌다. 캘리포니아의 작은 도시(사실 새크라멘토가 그리 작은 도시는 아닌데 뉴욕과 비교가 되다 보니..) 를 떠나 뉴욕으로 가고 싶어하는 한 소녀가 좌충우돌하다 부모의 품을 떠난 뒤에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어찌보면 흔하디 흔한 서사구조를 가지고도 주제의식의 진실성과 소소한 디테일을 앞세워 관객을 무장해제시켜버리고야 마는 능력은 분명 주목받아야만 한다. 거윅이 다른 감독의 디렉팅을 일방적으로 받는 연기를 하며 커리어를 마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연출가로서도, 극본가로서도 이렇게나 빠른 속도로 자기 세계를 구축해낼 것이라고 확신한 이도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샤얼샤 로넌(Saoirse Ronan)과 같은 재능 넘치는 배우를 만나 에너지가 꽌 찬 흥겨운 코메디-드라마 한 편을 잘 만들어냈다.

[레이디 버드]는 [프랜시스 하]의 프리퀄로도 받아들일 수 있고, [보이후드]의 코메디 버전, 혹은 여자 버전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프랜시스 하]에서 몸과 마음이 고갈된 프랜시스가 새크라멘토의 부모에게 돌아가 잠시나마 마음의 안정을 찾았던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노아 바움백과 그레타 거윅이 그 장면을 집어넣을 수 있었던 자신감의 원천을 [레이디 버드]에서 확인한 것 같아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또한 [프랜시스 하]에서 주인공의 ‘숨겨진 이름(중에서도 성(surname))’이 영화의 주제를 상징했던 것처럼 [레이디 버드]에서는 “내가 내 자신에게 지어준 이름(given name)”인 “lady bird”가 영화의 주제의식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레타 거윅이 스토리텔러로서 천착하는 주제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한편, [레이디 버드]는 엔딩씬에서 이야기를 완결짓지 않고 갑자기 끝낸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이 마지막 장면이 영화의 핵심이자 큰 매력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영화가 보여주는 부분(졸업시즌부터 입학까지) 이제 막 열여덟살이 되어 새로운 곳에서 첫 발을 내딛은 그녀에게 하나의 마침표로 기억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삶은 지속될 것이고, 그녀에게 어머니의 눈물은 삶을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원천으로 미래에서 기능할 것이다. [보이후드] 역시 주인공의 삶을 12년 간 따라가며 보여주지만 결코 하나의 완결된 서사로 마무리짓지 않고 현재에 충실하라는 숙어(“seize the moment”)로 결말을 대신한다. [레이디 버드]에서 주인공 레이디 버드가 부모에게 전화로 목소리를 남기고 어딘가를 불안한 시선으로 응시하는 장면과  [보이후드]에서 주인공 메이슨이 새롭게 만난 기숙사 친구들과 함께 황량한 자연으로 걸어들어가는 장면이 두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다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루카 구아다니노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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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캐롤]과 [문라이트]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다양한 기준을 충족시키는 영화다. 유명한 소설이나 희곡을 원작으로 했다는 점, 주인공들이 동성의 대상을 사랑한다는 점, 뛰아름다운 음악과 영상이 함께 한다는 점, 무엇보다 감독의 엄청난 연출력과 그 연출력에 주눅들지 않는 뛰어난 연기력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점 등에서 여러모로 이 세 작품은 같은 선상, 혹은 비슷한 수준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세 영화가 많은 이들에게 찬사를 받은 본질적인 이유는 아마도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집중도가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캐롤]에서는 사회적 계급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두 여성의 절박한 마음이 유리창, 어깨너머의 시선 등의 장면으로 표현된 단절의 정서를 통해 절절하게 형상화되었고, [문라이트]에서는 하위 계급 흑인 동성애자 남성이 맞닥뜨린 바닥까지 내려가버린 가난한 마음을 새파랗게 질린 어슴프레한 하늘의 모습이 완벽한 상징체로 기능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주인공들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은 남부 이탈리아의 한여름 풍경이다. 기분 좋게 내리쬐는 뜨거운 햇살과 느긋한 안식처를 제공해주는 울창한 나무, 한낮의 더위를 식히는 쉼터이자 고단한 짝사랑의 무게를 잠시나마 씻겨내주는 강과 호수, 그리고 코끝을 간지럽히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들어오는 별장침대. 이 모든 것이 영화의 주인공 그 자체가 되어 첫사랑의 마음을 형상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음악이 있다. 수프얀 스티븐스(Sufjan Stevens)와 류이치 사카모토(Sakamoto Ryuichi) 등이 참여한 영화음악은 경쾌한 클래식 넘버들과 어우러져 주인공의 넘실대는 마음을 날것 그대로 표현한다. 아마도 이 영화가 대단히 관능적으로 느껴진다면, 그 배경에는 분명 영화의 풍경과 음악의 자리가 크게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관능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인공 엘리오와 올리버를 연기한 티모시 샬라메(Timothée Chalamet)와  아미 해머(Armie Hammer)의 존재다. 티모시 샬라메는 첫사랑의 떨리는 마음 그 자체가 되어 현현하고, 아미 해머는 사회적 관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괴로움과 결코 잊지 못할 상대를 만난 황홀함을 절제된 표정으로 잘 표현해냈다. 화면과 음악, 연기와 연출력 모두 나무랄데 없지만, 이와 비교해 조금 심심하다고 느껴졌던 서사구조 역시 마지막 즈음에 이르러 기어코 구원받는다. 주인공의 마음을 처음부터 헤아리고 있던 부모가 그들의 사랑을 사려깊게 배려하는 장면을 곳곳에 배치함으로써 이 영화는 조금 다른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보수적인 고고학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가톨릭 중심의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유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관습을 따라야만 하는 올리버와 달리 엘리오는 부모의 따뜻한 품 안에서 첫사랑의 상처를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둥지를 발견한다. 모닥불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엘리오를 옆에 두고 묵묵히 식사 준비를 하는 가족의 모습을 블러 처리하여 보여주는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그래서 인상적이다. 이 영화는 첫사랑의 달뜬 마음부터 고통스러운 이별의 아픔,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기꺼이 껴안아주는 성숙한 어른의 세계를 균형감 있는 매혹적인 시선으로 보여준다. 

조쉬 & 베니 사프디 | 굿타임

Good-Time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굿타임]을 동생을 사랑한 형의 좌충우돌 모험기로 읽어내려간다고 해도 그 자체로 크게 무리없이 완결된 서사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라면, 이 영화는 무척 심심하고 엉성한 작품으로 기억되어야만 한다. 형 코니가 맞닥뜨리는 상황들은 논리적으로 무리가 따르는 연결고리로 이어진다. 코니와 동생 닉이 타고가던 택시에서 갑자기 분홍색 가루가 터지는 순간부터 이 비논리적 연결고리를 이해해야 했다. 영화는 두 형제가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채 경찰에 쫓기게 되는 이 결정적 사건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 코니가 왜 유태인에게 돈을 맡겨야 하는지, 왜 그에게 압박을 받아야 하는지, 그래서 왜 병원으로 잡입하여 동생을 몰래 꺼내려는 시도를 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설명해주지 않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때까지 영화는 늘 이런 식으로 상냥하지 않게 군다. 그래서 동생 닉을 위기에서 구해내기 위해 형 코니가 뉴욕의 어두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 해가 뜨고 사건은 종료된다, 라는 서사구조는 심심하고 불완전해 보인다. 흔들리는 카메라와 가슴을 때리는 전자음악 등 감각적인 요소들만으로 이 영화를 설명하기에도 뒷맛이 개운치 않다.

하지만 평론가 정성일이 주장한 바대로 동생 닉의 머릿속에서 벌어진 꿈, 혹은 상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오는 시점은 영화가 시작되고 한참 뒤, 닉과 코니가 경찰에 의해 강제적으로 헤어진 뒤부터다. 영화는 코니와 닉이 분리된 시점부터 어떤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암시를 적극적으로 건네고 있다. 닉이 구치소에서 싸움에 휘말려 정신을 잃은 시점부터 형 코니의 모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코니가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취한다. 연인관계였던 코리는 중년의 여인이지만 엄마에게서 독립하지 못했고 아이처럼 울거나 보챈다. 코니를 집으로 들이고 방까지 내어주는 흑인 할머니, 집에 있는 염색약을 마음대로 쓰는 코니를 따라다니며 그에게 자동차 키까지 내어주는 손녀딸 크리스탈 모두 이유없는 친절함을 베푼다. 특히 열여섯 소녀인 크리스탈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일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어른스러움을 보여준다. 이 역시 비정상적이다. 닉인줄 알고 병원에서 몰래 데리고 나온 얼치기 죄수 레이와 그의 동료 칼리프 역시 코니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마약의 위치까지 공유하며 코니로 하여금 동생을 빼내오기 위해 돈을 모으려는 노력을 하게끔 만든다. 즉, 이 모든 주요 등장인물은 형 코니가 어떤 정해진 운명으로 나아가게끔 도와주는 조력자들로 기능할 뿐, 코니의 존재나 코니의 목적을 위협하는 방해요소가 되지 못하는 셈이다. 레이와 함께 훔친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장면부터 영화는 그들이 차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을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데, 이건 미국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흔히 보는 탈주자를 비추는 경찰의 카메라 앵글과 흡사하다. 즉 자신은 병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현실을 충분히 인지한 닉의 마음 속에서 형의 영웅적인 노력은 결국 경찰에 의해 저지당할 것이라는 결말이 미리 정해져있던 셈이다. 이 외에도, ‘코니는 닉의 꿈’이라는 가설 안에서,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친절하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는 동생 닉의 모습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닉은 정신병원의 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행해지는 질의응답을 소화해야 한다. 널리 알려진 문장을 듣고 그 의미를 추리하거나 두 단어 간 관계를 연상하는 등의 간단한 활동이었지만, 닉은 잘 대답하지 못하거나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얼핏 이해하기 힘든 닉의 이런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영화의 라스트 씬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닉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고, 정신과 의사는 “코니는 코니대로 옳은 일을 했다”며 닉을 위로한다. 닉은 다른 환자들에 둘러싸여 특정 질문에 대한 답을 몸으로 보이는 활동을 한다. 어떤 질문에도 반응하지 않던 닉은 “가족과 다툰 적이 있나요?”라는 질문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 뒤이어 “내 잘못이 아닌데 손가락질당한 적이 있나요?”, “외로웠던 적이 있나요?”와 같은 철학적인 질문들이 이어진다. 어느새 닉은 방 안에 있는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카메라와 닉 사이에는 창문이라는 벽이 존재하게 된다. 즉,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닉은 지금까지 그 방 안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방 안에서 외롭게 혼자 지낼 것임을 알 수 있다. 코니는 닉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친구였으며, 어쩌면 코니의 파란만장한 모험은 닉이 창조해낸 ‘장르’ 그 자체일 수 있다. 엔싱 시퀀스에 맞춰 흐르는 이기 팝의 노래 가사(“순수한 녀석과 망할 녀석은 하나였다”)가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증언한다.

영화는 퍼즐을 이리저리 끼워 맞추는 퍼즐같은 재미가 있다. 카메라 앵글 하나하나에 의미가 깃들어 있으며 화면을 통해 전달되는 빛의 강도와 음악의 세기까지 정밀하게 설계된 듯 보인다. 코니와 닉을 연기한 로버트 패틴슨과 베니 사프디의 연기 또한 훌륭하다. 화면부터 음악까지 거의 모든 요소가 너무나 감각적이어서 자칫 잊어버릴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무엇보다 뉴욕의 낮은 부분을 직설적으로 비춘다는 점에서 매우 사회적이다. 다큐멘터리적인 요소가 영화의 이곳저곳에 깃들어있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사프디 형제의 영화는 [굿타임]이 처음이었는데 앞으로도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 언크리치 | 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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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와 [코코]가 한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것을 보면 세상에는 재미있는 우연이 참 많이 일어나는 것 같다. 두 영화는 비슷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완성도부터 결론에 이르는 방식까지 많은 부분에서 ‘수준’ 차이를 보인다. [신과 함께]가 주호민 원작의 미덕 – 주인공 김자홍의 ‘평범함’과 그를 지켜주는 변호사 진기한의 ‘특별함’이 만들어내는 앙상블 – 을 완전히 거세한 채 물리적인 눈물만을 강요한 결과 소름끼치는 졸작이 되어버린 것에 반해, 사후세계에서의 모험을 통해 현실세계를 반추한다는 서사구조를 [신과 함께]와 공유하는 [코코]는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는 이 한국영화를 조롱이라도 하듯 가볍고 유쾌한 방식으로 죽음을 ‘축복’하고 있다. [신과 함께]가 관객에게 억지 눈물을 강요하기 위해 동원해야 했던 스토리라인이 무려 가난때문에 부모를 죽여야 한다는 패륜(!)임에 반해, [코코]는 축제를 통해 저승세계로 들어가 “기억해줘!”라는 단순명쾌한 진리를 받아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신과 함께]가 묘사하는 저승은 오로지 처벌과 환생만이 존재하는, 끊임없이 피해다니고 싶은 어두운 공간이다. 이런 환경에서 아무리 눈물로 회개하고 서로를 용서해봤자 사랑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까? 하늘 위로 솟구치는 군용트럭을 보며 제발 영화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지만 우리 관객들은 [코코]의 저승에서 쉽게 빠져나오고 싶지 않다. 단지 화려한 잔칫상이 가득 차려져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곳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온기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고,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죽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공간이며, 혼자 죽더라도 사랑하는 가족, 친구와 함께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황홀경 안에서라면 기꺼이 사랑의 마음을 키워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신과 함께]는 애니메이션에 준하는 판타지적 요소를 차용하여 상상과 허구의 세상으로 떠나도 좋다는 면죄부를 부여받았지만, 결국 스스로를 강박관념 속에 가두어버리며 영화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코코]는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며 그 어떤 영화보다 독창적인 사후세계를 만들어냈고, 죽음만이 가득할 것 같았던 그 안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스스로 획득하였다. 클래스 차이가 너무 나서 감히 비교의 글이라고 할 수도 없겠다. [코코]는 단지 저승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것 뿐 아니라 디즈니의 앞으로의 먹거리에 대한 새로운 비전까지 제시했다.

기예르모 델 토로 | 셰이프 오브 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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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동화, [셰이프 오브 워터]는 똑똑하고, 올바르며, 착하고, 다층적이며, 무엇보다 따뜻한 영화다. 크리처(creature)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바탕으로 판타지세계를 그리지만 서사구조 안에 반드시 현실세계에 대한 풍자적 요소를 삽입하는 것으로 유명한 기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예의 독특한 미적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현시대에 필요한 교훈을 성인 버전의 우화를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서사는 동화답게 단순하고 인물은 명확하다. 주인공으로는 장애를 가진 청소부 여성과 주류사회로부터 쫓겨난 노인, 그리고 신비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고 고향 아마존에서는 신으로 추앙받았지만 냉전시대에 소련과의 경쟁에 몰입한 미국 권력층에게는 한낱 해부의 대상일 뿐인 존재(자막에는 양서류 인간(amphibian man)으로 나오더라. 아가미와 폐를 모두 가지고 있어서인가..)가 있다. 주인공 일라이자는 말을 하지 못할 뿐 아침마다 자위를 하고 달걀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예쁜 구두도 깨끗이 닦아 신는, 품위있고 센스있는 여성이다. 그녀의 사랑을 얻는 양서류 인간은 사람을 치유하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예술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을 지녔다. 이들의 반대편에 있는 인물도 색깔이 분명하다. 성차별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인 보안담당자는 권력과 억압, 그리고 이와 관련된 모든 폭력적인 문화 전체를 상징한다. 치유와 다양성의 상징인 양서류 인간이 영롱한 청록색 불빛을 내뿜으며 대머리인 노인에게 머리카락을 심어주고 상처를 낫게 해주는 동안, 폭력의 생산자이자 또다른 폭력의 희생자인 보안담당관의 끊어진 손가락은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고, 그는 자신의 청록색 캐딜락 자동차가 찌그러진 후 부하의 자동차를 폭압적으로 탈취한다. 사실 주인공 남녀가 사랑을 확인하고 억압으로부터 탈출한다는 것이 서사의 전부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이 단순한 플롯 안에 다양성과 똘레랑스의 가치, 장애인, 성적 소수자, 그리고 소수 인종에 대한 차별, 국가주의와 전체주의에 기반한 폭력의 정당화 등의 주제를 무리없이 녹여낸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감독만의 영화라고 하기에는 힘들 정도로 다양한 요소들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먼저 영국의 자랑이자 우리 모두의 소중한 자산인 샐리 호킨스(Sally Hawkins)는 이번 영화에서도 위대한 연기를 펼친다. 상상 속에서의 뮤지컬 씬을 빼고는 목소리 한번 제대로 내지 않은채 온몸으로 일라이자를 완벽하게 표현해냈다. 1950, 60년대 스탠더드 넘버들도 영화를 풍성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의상과 특수효과가 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 영화를 참으로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화면 그 자체다. 한 장면 한 장면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구성되어 있어 스틸컷을 따로 구하고 싶어질 정도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씬, 일라이자를 평생 옭아메었던 목의 상처가 사랑하는사람과의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도구로 다시 태어나는 장면은 영화적 기적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로 아름답다. 지나치게 어렵지 않은 문법으로 중요한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아카데미가 사랑할만한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는 작품같다.

짐 자무쉬 | 패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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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친구가 인스타그램에 [패터슨]을 본 후 소감으로 “금호동에 사는 지인 분이 이름을 김호동으로 바꾸면 한국판 패터슨이지 않을까 혼자 생각”했다는 글을 적었다. 이후 이 영화에 관심이 생겨 속으로 봐야지, 봐야지 생각만 하다 운과 때가 맞지 않아 결국 극장에서 보지 못했는데, 오늘 와이프와 함께 IP TV를 통해 집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아, 나는 지금 금호동에 살고 있다.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 패터슨 시에 사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한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패터슨 시에 사는 이 남자의 이름도 패터슨이라는 사실이고, 또 하나 기억해둘만한 점이라면 이 남자는 버스를 운전하는 시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남들에게 자신의 직업을 버스운전기사라고 소개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아내도, 패터슨이 시를 쓰기 위해 즐겨찾는 장소인 패터슨 시의 폭포(Great Falls of Passaic River)에서 처음 만난 일본인도,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우리 모두도 그가 시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영화는 패터슨과 그가 살아가는 패터슨 시의 일상을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시간 순서대로 보여주며 그 일상 사이사이에 패터슨이 직접 쓴 시를 삽입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패터슨은 주로 그의 일상에서 영감을 얻는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성냥갑에서, 옛공장 앞에서 만난 10살 남짓의 어린 시인에게서, 또는 버스를 운전하는 도중 승객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그의 시가 피어오른다. 즉, 패터슨의 시를 탄생시키는 것은 패터슨 시 그 자체이며, 패터슨과 패터슨 시는 이러한 상호작용을 통해 생명력을 획득한다. 패터슨이 일상에서 유독 자주 목격하는 쌍둥이들의 출현이 패터슨과 그의 삶의 터전인 패터슨 시가 시를 통해 하나로 엮여있음을 상징하는 주요한 상징물로 작용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영화는 크게 다를 것 없는 그의 일주일을 보여주는데 주력하지만, 전과 다를바 없다고 해서 이 낡고 작은 도시 안에서 벌어지는 일상다반사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 교외지역에서 버스를 이용하는 승객이라 하면 보통, 나이가 많아 운전을 할 수 없는 노인, 반대로 나이가 너무 어려 운전을 할 수 없는 어린이, 혹은 경제적인 이유로 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서민층이나 학생 정도일 것이다. 패터슨이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인 버스 운전기사 역시 미국에서 그리 럭셔리한 직업은 아니다. 아내의 꿈을 응원하기 위해 마련한 몇백달러 짜리 기타 앞에서도 움찔할 정도의 얄팍한 살림살이를 유지하는 패터슨의 삶이 유독 찬란하게 빛나는 이유는 그의 시가 잔뜩 담긴 비밀노트덕분이다. 이 비밀노트는 비단 패터슨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보물은 아닐 것이다. 그가 매일 들르는 바에서 매일 이별연습을 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마음에도 비밀노트가 있을 수 있고, 어제 파티에서 만난 금발의 미녀에게 받은 전화번호를 보며 마음을 다잡는 한 찌질한 백인 사내의 마음 속에서 비밀노트가 있을 수 있다. 이 영화는 패터슨 시에 사는 필부필부가 손에서 손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아름다운 영혼을 나누며 살아가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영화 여기저기에 꾹꾹 눌러담아 전달하고 있다. 패터슨 시는 서울의 금호동이 될 수도 있고, 세종시의 도담동이 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쉽게 잊고 사는 중요한 가치를 일깨워 주고 있다. 공동체 안에서 개인이 살아가는 방식, 패터슨이 혼자 길가에 앉아 있는 어린 소녀에게 잠시 옆자리를 내어주는 그정도의 여유, 이 가르침은 매우 작지만 매우 크기도 하다.

지금까지 내가 본 모든 아담 드라이버의 연기 중에서 가장 훌륭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연기였다.

케네스 로너건 | 맨체스터 바이 더 씨

man by sea
아마존을 통해 배급되고 성추문에 휩싸인 배우 케이시 애플렉이 주연한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영화를 둘러싼 그 모든 주변적인 이야기들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있어 아무런 제약이 되지 못함을 일깨우는, 다른 말로 하면 영화를 읽어내려가는 데 있어 가장, 그리고 유일하게 중요한 요소는 영화가 가진 본질적인 힘 그 자체뿐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구조는 다층적이며 촘촘하고 빈틈이 없다.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는 장면 하나, 대사 하나에도 영화가 제시하는 주제의식의 무게가 묵직하게 실려있다. 배우들은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선보이며 서사구조는 완벽에 가깝다. 미국 동북부의 작은 해안도시가 갖는 황량하고 쓸쓸한 이미지는 영화의 조연으로 묵묵히 힘을 보탠다.

세상의 바닥 끝까지 떨어진 한 남자가 감정을 거두어 들인채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것처럼 생활한다. 그러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은 충동적인 반사회적 행동을 통해 현실의 거울에 비추어진다. 그가 아마도 거의 유일하게 의지했을 가족이었던 형의 죽음으로 인해 찾아온 철부지 조카의 후견인 역할은 세상에서 끊임없이 도망치려 하는 그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모른채 절망하는 그에게 세상은 잔인하게도 당연히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요구해온다. 갑자기 인서트되는 과거회상 장면은 지나칠 정도로 장엄한 배경음악과 함께 현재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절제하려 하는 그의 내면이 얼마나 폭발적으로 미칠 것 같은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경찰서에서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이미 충분히 무너져내린 그에게 세상 물정을 모른채 아버지의 배를 고집하는 조카의 어린 영혼은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세상이 내려준 마지막 선물이었을지도 모른다. 티격태격하는 가운데 사랑이 솟아나고, 절망의 끝에서 한줄기 희망을 본다.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는 주인공의 상황이 담담히 묘사되는 가운데 영화는 묘하게 희망적인 방향으로 조용히 나아간다. 독한 말을 쏟아내었던 것을 사과하고, 자신을 떠나지 말라고 애원한다. 그렇게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들끼리 서로 등과 어깨와 손을 내어주며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이다. 낡은 배의 모터를 다시 달고 어딘가 처박아 두었던 낚시대를 다시 꺼내 조용히 세상과 마주하는 엔딩씬에 다다르면 이 영화가 마법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영화적 마법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창재: 노무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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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입니다]가 개봉했을 때 애써 외면했다. 끝까지 보지 않으려 했다. 뻔한 줄거리에 뻔한 사람들이 나와서 뻔한 이야기를 할 것이 명명백백한데, 그것을 보는 내내 많은 눈물을 흘릴 나의 모습 역시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인터뷰이 중 안희정이 했던 말이 당시 내 심정을 정확히 대변한다. 그냥 애써서 일부러 안보려고 한다. 역사속의 인물로만 보려고 하지, 내 인생 속에서의 노무현은 너무 힘이 든다. “너무 힘이 드는” 사람. 나를 비롯한 한국사회의 수많은 이들에게 노무현은 아마 그런 존재로 남아있을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개인적인 인연은 전혀 없다. 종로구 보궐선거에 나왔을 당시 세검정성당 앞에서 노무현과 악수를 한번 하고 온 아버지가 (아마도 선거가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계속) 그 사람 참 좋더라, 하시던 모습이 그에 대한 첫번째 기억이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나와 그를 이어준 가장 가까운 연줄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부럽습니다. 악수도 해보시고..) 하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전세계 정치인 중 유일하게 열렬히 좋아하고, 아주 많이 미안해 하고, 또 생각날 때마다 뭉클해지는 사람은 노무현이 유일하다.

[노무현입니다]를 보면서 예상했던대로 많이 울었다. 등장하는 인터뷰이가 울 때 따라 울고, 노무현의 얼굴이 비춰질 때마다 미안해서 울었다. 뭐가 그리 슬픈지 모르겠다. 그는 나와 많이 다른데,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만 골라서 가지고 있는 사람같은데, 나는 감히 올려다 볼 수도 없는 그릇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뭐가 그렇게 미안한건지 모르겠다. 그저 한없이 미안하고 죄스럽다.

그리고 그가 강조했던 “깨어있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적당히 양심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의에 정면으로 맞서고 그 불의를 깨부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노무현이라면, 최소한 그에 대한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오늘 나름 큰 일을 하나 저질렀다. 아마 다음주에는 그에 대한 대단한 대가를 치루게 될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될 일을, “적당히 양심을 지키면” 될 일을 굳이 크게 만든 이유는, 그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가르침을 준 수많은 이들 중 중요한 스승이 몇 분 계신데, 그들 모두가 나에게 그렇게 적당히 착한 척 하며 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할 수 있다면, 옳은 것을 따라가고 그른 것을 그르다 말할 용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주 쉬운 일이다. 그대로 행했을 뿐이다. 영화를 보며 다시 한번 나에게 그러한 가르침을 준 고 노무현 전대통령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