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 여성중심주의를 반대하는 이유

최근 기성 언론을 통해 보도된 ‘워마드’를 중심으로 한 두세개의 사건들이 내 관심을 끌었다. 하나는 가톨릭 성체 훼손 사건이었고, 또다른 하나는 지하철 남성 조롱 사건이었으며, 마지막 하나는 현직 대통령을 향해 “재기하라”고 발언한 사건이었다. “이게 ‘사건’ 정도나 되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요즘 한국사회의 한 단면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발생한 일련의 일들이 꽤나 상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워마드’가 어떤 곳인지는 해당 사이트를 여러 차례 방문해 관찰했기에 잘 알고 있다. ‘워마드’ 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정체성과 문화를 공유하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다수 존재하고, 최근 혜화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시위의 중요한 일원으로 이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이들이 인터넷 밖으로 나와 본격적으로 현실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여러가지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현재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과 ‘워마드’가 어떤 관계로 엮여 있는지 보다 분명하게 정리하고 가야하지 않을까 싶다.

우선 한국사회에서 사용하는 ‘페미니즘’이라는 용어 자체가 올바르게 정의내려지지도 않고 있으며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하나의 공통적인 가치로 공유되지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시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극단주의 페미니즘(radical Feminism)만을 뜻하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는 반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유주의적 페미니즘(liberal Feminism)까지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누군가에게는 페미니즘이 하나의 ‘운동’이라면, 다른 누군가에게 페미니즘은 ‘학문’의 영역에서 이해된다. 누군가에게는 페미니즘이 양성 평등을 위한 이데올로기라면, 다른 누군가에게 페미니즘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저항운동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나는 페미니즘이 “공부”를 해야만 받아들일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주장하는 순간 교조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고 페미니즘이 “믿음”의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충분한 논거가 뒷받침되지 않은 운동은 우스꽝스러워지기 쉽상이다. 중요한 점은 페미니즘이 사회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 사회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회 안에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페미니즘을 사회과학(social science)의 범주 안에 포함시키는지의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다. 페미니즘의 태동 자체가 사회와 떼어놓을 수 없었고, 지금까지 사회의 ‘질서’와 유기적인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며 성장해온 이데올로기이며, 이 사상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 역시 사회의 ‘질서’ – 를 수정하든, 재정의내리든 – 라는 개념 안에서만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나는 ‘워마드’가 여성우월주의, 혹은 극단적 여성중심주의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단체라고 생각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박근혜를 지지하고 남성이라는 이유로 현직 대통령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행위가 한 집단의 공통적인 입장으로 자리매김한다면 이건 더이상 개인의 장난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현상이 아니다. 이들의 원동력은 ‘혐오’에 기반하고 있다. 남성과 관련된, 남성이 포함된 거의 모든 집단을 향한 무차별적인 혐오. 현재 ‘워마드’가 가진 중요한 정서적 기반인 이 ‘혐오’의 집단화가 사회에 끼치는 해악은 그 어떠한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일베’로부터 현현하기 시작한 혐오와 편가르기의 정서는 ‘워마드’로 인해 특정 정치 세력의 차원에서 성별의 문제로 진화했다. 개인이 소신을 가지고 선택하는 정치성향과 달리 태어날 때 상당 부분이 결정되는 성 정체성을 혐오의 재료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워마드’의 현재 위치는 매우 서글프고 안타깝다.

‘워마드’의 구성원들이 자신을 페미니즘의 한 분파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큰 오류라고 할 수 있다. 페미니즘은 ‘워마드’가 해오는 방식처럼 편을 가르고 상대방을 혐오하고 깔아뭉개는 방식으로 발전해오지 않았다. 잘못된 사회 질서를 바로잡고 보다 나은 세상을 공유하기 위해 인류는 여러가지 이데올로기를 탄생시켰다. 그러한 목적의식 하에 발전되어 온 여러 시각 중 하나가 성적 차이로 인한 차별을 없애자는 목소리, 즉 페미니즘이다. ‘워마드’는 오히려 반(反)페미니즘적 시각을 가진 이들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으며, 페미니즘과 상충되는 개념을 공유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남성에 대한 혐오의 정서는 결국 여성에 대한 혐오의 정서를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다. 이것은 페미니즘에도 좋지 않으며, 양성평등의 방향성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이상향이 성적 차이로 인해 차별받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면, 극단적 여성중심주의가 나타내는 남성혐오 문화는 결코 그 해답이 될 수 없다.

상당수의 여성이 이러한 혐오의 정서에 편승하는 현상은 이들이 진정으로 혐오를 통한 남성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을 남녀 차별 극복을 위한 현실적인 대안으로 인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일베’가  유행할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한 성격의 단순하고 피상적인 본능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했노”라는 말투부터 특정 인물을 의도적으로 비하하고 희화화하여 조리돌림하는 과정까지, 올바른 사회화를 체득하지 못한 성인들의 집단적 퇴행현상이라고 볼만한 사례가 충분히 발견되고 있다. ‘워마드’가 내세우는 거의 유일한 존재 근거인 ‘미러링’이 (하필이면) ‘일베’를 그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한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일베’는 ‘남성 주류사회’를 대표하지도 않으며 페미니즘이 배척해야 할 남성주의적 정치성향을 가장 폭넓게 대변하는 단체도 아니다. ‘워마드’는 단지 ‘일베’가 발전시킨 집단적 혐오, 유아적 왕따의 정서를 도구적으로 차용하여 폭력의 대상을 상이하게 설정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워마드’가 ‘일베’를 혐오한다면, ‘미러링’의 조건대로 ‘워마드’ 역시 사라져야 할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셈이다.

2010년 이후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감정은 ‘혐오’의 정서다.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보다 결과적인 불평등을 납득하지 못해 상대방이 가진 것을 강제로 빼앗아오려는 배고픔의 정서가 혐오를 낳았다. 결국 이 사회가 조금 더 가난해졌기 때문에 발생한 사회현상이다. ‘워마드’로 상징되는 여성중심주의적 혐오의 정서는 이 사회에 발생하고 있는 다양한 혐오의 정서 중 한 예일 뿐이다. 이 외에도 공무원을 향한 분노, 정규직을 향한 분노, 장애인을 향한 분노, 성적 소수자를 향한 분노 등 다양한 방향과 크기를 가진 분노가 이 사회에 존재한다. 갈수록 한국에서 먹고 사는 것이 힘들고 피곤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그만큼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도 그만큼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씩 더 많이 미워하고, 더 많이 질투하고 있다. 한국이 살기 힘든 이유이자 이 사회가 더이상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회찬이 계속 생각난다

사연 없는 죽음이 어디 있겠냐마는, 투명한 유리 안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생중계하듯 살아온 유명인들의 죽음은 그만큼 더 극적으로 보일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명인의 죽음은 그 순간 잠시 서늘한 기분을 느끼고는 빠르게 증발해버리는 편이다. 유명인의 전시된 삶을 소비하듯 보아온 일반인들에게 그들의 죽음 역시 일종의 전시처럼 보여지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가끔 아주 오랜 기간동안 잊혀지지 않는 죽음이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다가도 문득 그가 생각나 울컥해지고, 우울해지고,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죽음이 있다.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는 무겁게 짓누르는 그런 죽음이 있다. 노무현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리고 요즘에는 노회찬이 자꾸 생각난다.

그가 하는 말들이 무척 인상 깊었다. 정치인 중 그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지금도 아무도 없다. 그가 만들어내는 비유는 참신할 뿐 아니라 날카롭기까지 해서, 그가 뱉은 말들을 후에 한참동안 곱씹어봐도 절묘하고 정확하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타고난 재능인지, 오랜 기간 노동운동을 하며 쌓은 경험이 좋은 재료를 제공해주는 것인지 궁금했다. 뉴스를 보며 답답해진 가슴은 그가 한마디 할 때마다 조금씩 시원해졌다. 소수정당에 소속된 한계가 그를 짓누를 때마다 안타까웠고, 그의 언행이 더 많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어쩌면 노무현처럼 그 역시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정치인이었을지 모른다. 삭막한 정치판에 한줄기 유머를 선사하는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었고, 이데올로기에 갇히지 않고 실제적인 소수자 보호를 위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끊임없이 내던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우리 사회가 그의 목소리에 조금 더 크게 호응해주었다면, 그의 유머에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웃어주었다면, 그의 날카로운 비판에 조금 더 큰 박수로 화답해주었다면, 어쩌면 며칠 전과 같은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의식이 마음을 짓누른다.

죽기 전 그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차마 짐작도 되지 않는다. 굳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했을까, 라며 안타까워 하는 이들이 많지만, 운동권 특유의 극단적 문화에 노회찬 고유의 강성함이 더해져 도저히 스스로를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겠다고 상상해본다. 그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 정도 되는 그릇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지만, 몹시 어지러웠을 그의 마음 자체를 최소한 부정은 하지는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가 많이 아쉽다. 그를 더 오래 보고 싶었다. 그가 조금 더 오래, 더 넓은 영역에서 많은 이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기를 바랐다. 그렇게 되지 못해 슬프고 슬프다. 마음 한구석이 계속 아려온다. 공무원의 신분이라 그에게 후원금 한푼 보내주지 못했지만, 마음 속으로 그를 계속 응원하고 있었다. 빗자루를 기타 삼아 흥을 돋우던 사진이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그런 정치인을 우리는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노무현이 없는 노무현의 세상이 조금씩 오고 있는 것처럼, 노회찬이 없는 노회찬같은 세상도 올 수 있을까. 계속 슬퍼온다.

이명박의 구속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영장이 발부되었고, 영장이 집행되는 과정을 많은이들이 생방송으로 지켜보았다. 페이스북에는 구속을 기념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도 보였고, 인터넷 상에서도 많은 이들이 기쁨을 표현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별로 기쁘지 않았다. 그가 최종심에서 충분한 수준의 형을 선고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구속수사를 받게 된 것은 충분히 소명되었다고 판단된 범죄혐의를 그가 적극적으로 부인하였고, 때문에 증거인멸 등에 대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실 구속수사는 불구속수사에 비해 수사의 용이성과 편의성이 조금 더 있을 뿐 법리적으로 그리 큰 의미를 가지는 형태의 수사는 아니라고 본다. 다만, 피의자가 영어의 몸이 되는 모습이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효과가 크기 때문에, 즉 일종의 전시효과가 있기 때문에 최근 대형 범죄의 경우 대부분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추세를 보이는 것 같다. 즉, 검찰은 일반 시민들이 시각적으로 느끼며 만족하는 ‘형벌’의 모습을 십분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마치 피의자가 이미 어느정도 심판을 받은 듯한 모습을 전시함으로써 향후 재판 과정에서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어가고자 하는 비법리적 전략이 깔려있다고 본다.

이러한 전략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 소환조사에서도 명백히 드러난 바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포토라인 앞에 선 모습 자체에서 치욕을 느낀 사람들이 많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검찰과 당시 정권에 대해 그러한 악감정을 가졌던 사람들 중 대부분이 이번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수사 방침에 환호성을 질렀다. 수사의 공정성과 정권의 정치적 목적, 사회정의와 같은 비법리적 요인들이 사람의 감정에 작용하는 과정 전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과연 이 사람들이 이 두 경우에 공정한 잣대를 들이밀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나는 대중의 이러한 심리에 복수심과 처벌에 대한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 과정에서 나타난 일부 집단의 기쁨의 표현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권과 검찰의 무리한 수사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강요당했다는 믿음 아래, 이러한 ‘비극’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앙갚음해주겠다는 복수심이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 복수심이 육체적인 형벌과 처벌로부터 시작한다는 근대적인 사고관에 기인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푸코가 여러차례 지적했듯, 현대사회에서의 처벌과 형벌은 육체에 대한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는 단계를 벗어나 사회로부터의 격리를 통한 사회 안전망 확보에 중점을 두고 있다. 잠재적 범죄자를 가둠으로써 사회를 안전하게 지킬수만 있다면 그 범죄자에게 따뜻한 밥을 제공하든 텔레비전을 틀어주든 사실 크게 상관할바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구치소나 교도소의 ‘호화로움’에 대한 비판이 유독 한국사회에서 강하게 제기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사회의 처벌에 대한 개념이 아직 근대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된다.

물론, 거액의 돈을 탈루하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 혐의를 강하게 받고 있는 전직 대통령이 구속수사를 받는 모습을 전시함으로써 사회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주장에는 적극 동의한다. 이것이 또다른 전쟁의 시작으로 기록될지 여부는 그쪽 진영 사람들의 울분이 어느 정도 수준일지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최소한 나는 이번 수사가 사회질서를 확립하는 데에 좋은 기여를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명박을 싫어한다. 그리고 그가 드디어 범죄혐의에 대한 수사를 받게 되어 매우 고무적으로 생각한다. 그가 대통령이 되던 시절 그에 대한 주변 친구들의 맹목적인 지지를 똑똑히 기억한다. 당시 이해할 수 없었던 광풍의 크기를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친구들 중 일부는 지금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고, 다른 일부는 적극적으로 ‘전향’하기도 했다. 돈에 대한 욕망이 집단적으로 합치되어 가장 저열한 형태로 발현된 상징체가 바로 이명박이다. 이 사회에 속한 우리 시민 모두는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를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것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 이번 수사는 그 책임의 시작일 뿐, 아직 그 어떠한 기쁨도 표출한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도 복수를 하고 싶다. 하지만 복수의 방식은 그들과 달라야 한다.

#MeToo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엉겹결에 반장을 맡게 되었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가 있을 당시 특목고의 고3 생활은 단조로운 자율학습의 연속이었다. 대부분의 수업은 취소되었고, 아이들은 수능공부에만 매진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반장이라고 해봤자 거창한 임무를 부여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나의 주된 임무는 자율학습 시간에 떠드는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는 일 정도였다. 수능을 앞둔 상태에서 모두가 예민했고, 자그마한 속삭임조차 거슬려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나 역시 수험생 중 한명으로 앞가림하느라 바빴기에 일을 크게 벌이지 않고 조용한 학업 분위기를 지속시키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어느날 밤 담임교사에게 입시상담을 받으러 갔던 여자 아이들이 울면서 교실로 돌아오던 그날까지는 그렇게 평범한 일상이 반복됐다.

그날 밤, 담임교사에게 불려갔던 여자아이들 중 일부가 교실로 돌아와 울음을 터뜨렸고, 다른 여자아이들이 그 주변을 둘러싸고 위로를 해주는 모습을 목격했다. 여자 아이들을 붙잡고 이것 저것 캐물었다. 그 중 나와 가장 친했던 아이 한명이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반장이니까 알려달라’는 대의명분에 몇가지 사건이 발생했음을 이야기해주었다. 어떤 여자 아이는 교사가 자신의 무릎에 앉으라고 명령했다고 했다. 다른 여자아이는 교사가 자신의 귓볼을 만졌다고 했다. 다른 여자아이는 가슴에 부착된 명찰을 똑바로 해준다며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댔다고 했다. 충격적이었다. 남자 아이들 사이에서도 욕이 터져나왔다.

그날부터 교실은 난장판이 됐다. 나는 ‘반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고, 정식으로 항의하는 절차를 밟았다. 물론 일개 학생이었던 나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어머니를 비롯해 피해자의 어머니들을 중심으로 공론화시켰다. 이후 꽤 오랫동안 수업에 거의 들어가지 못했다. 교장에게, 교감에게, 각종 보직 교사들에게 불려다니며 협박을 당했다. 가해 담임교사의 동료 교사들은 우리반에서 수업하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스승의 은혜를 모른다며, 어린 것들이 뭘 알겠냐며 혀를 끌끌 차고는 우리를 무시했다. 아이들의 서명을 받고 투표를 진행했다. 그 와중에 수능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일을 이렇게까지 크게 만들어야 하냐는 항의가 아이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 의견을 가장 먼저 낸 사람은 여자아이였다. 자신은 무관한데 왜 반 전체가 피해를 받아야 하냐는 문제제기였다. 학교측에서는 담임교사가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것 정도로 마무리짓자고 제안해왔다. 더이상 안되겠다 싶어 아버지들이 나서기로 했다. 방송국 간부도 있었고, 신문사 기자도 있었다. 결국 외부로 이 사건을 공개하지 않는 조건으로 학교측이 담임교사의 교체를 받아들였고, 그 담임교사는 같은 재단 내 남자학교로 보내졌다. 이후 그 교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해듣지 못했다.

이상이 내 인생에서 최초로 겪은 성폭력 사건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어린 시절 동네 할머니들이 “꼬추 한번 보자”고 추근덕거리는 것이 일상이긴 했지만, 그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같다) 이 사건은 현재 진행중인 #MeToo 움직임과 이를 둘러싼 사회적 공기를 축약해서 보여주는 하나의 일화다. 권력관계의 우위를 점한 남성이 열위에 있는 다수의 여성을 압력을 행사하여 추행했고, 이 사건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 결국 더 강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남성집단이 나서는 단계에서 해결되었다. 피해자 여성 다수는 이 사건이 퍼져 나가는 것 자체를 원치 않았고, 그 중 상당수가 문제의 해결 과정에서 극도의 수치심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이 사건에 의해 불필요한 피해를 받는다고 생각한 ‘방관자’들의 냉소적인 시선까지 견뎌야 했다. 구성원 중 다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피해자를 위한 서명을 모을 때에도 왜 자신의 이름을 포함시켜야 하냐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나는 이 사건 이후 거의 모든 종류의 권력에 대해 어떤 혐오같은 것이 생겼다. 아마 그 전부터 내재적으로 자리잡고 있었겠지만, 이 사건 이후 조금 더 노골적으로 권력과 그 권력이 탄생시킨 부조리한 관계 전부를 싫어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나보다 덩치가 큰 상대가 힘을 과시하려고 할 때 괜히 개기고 싶은 마음이 더 세진 셈이다. 그래서 대학교에 들어간 이후 학생회에서 실시했던 근거 없는 농활 동원에도 빠졌고, 군대에서 상관의 부당한 지시에 항의하다 거의 죽도록 맞을뻔 하기도 했다. 심지어 최근 세금을 전용하려는 상관의 지시를 따를 수 없다는 이유로 회사를 나오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나의 어줍잖은 ‘반골기질’은 각종 사회현상에도 투영될 때가 많은데, 대표적인 경우가 다수자에 의한,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목격할 때이다.

장애인, 성적소수자, 그리고 여성. 우리 사회가 가장 노골적으로 타자화시키고 매몰시켜 버리는 존재들이다. 그 중에서도 여성은 사회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사회적 소수자 집단이자 남성을 중심으로 공고하게 구조화된, 그래서 아예 일상이 되어버린 차별과 폭력에 만성적으로 노출된 집단이라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성폭력, 혹은 성추행이라고 불리우는 다양한 형태의 성적 학대 행위는 남성이 여성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저열한 형태의 차별이자 폭력 행위다. 아마도 우리나라 사회 구조에서 대부분의 남성은 최소한 한 명 이상의 여성보다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거나 더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회사까지, 심지어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 안에서까지, 한국사회에서 남성은 여성에게 권력 구조에서 우위를 갖기 매우 쉬운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남녀 간 발생하는 대부분의 성적 학대 행위는 권력에 의한 압력행사를 통해 이루어질 확률이 대단히 높다. 논리적으로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현실에서 대부분 그렇게 되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평범한 삶’을 살아온, 즉 여성이 남성에게 억압당하는 광경을 목격할 기회를 (어떤 이유에서든) 갖지 못하고 살아온 대부분의 남성들이 결코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남성들이 왜 그렇게 ‘어두워졌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만 하다) 그래서 [82년생 김지영]은 픽션의 영역에서 여성에 대한 만성화된 차별이 여성의 일생 전체에 걸쳐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음을 알린 시대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문학적 완성도를 논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나 퍽퍽한 삶이 여성에게는 평생에 걸쳐 일어난다, 라는 사실을 좀 알아라, 라고 선언하는 듯한 책이었다. 노회찬 의원같은 진보세력의 리더조차 이 책을 읽고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 있다고 할 정도다.

‘평범한’ 남성, 즉 ‘평범한’ 여성이 일상적으로 당하는 차별을 적극적으로 체감하지 못하고 살아온 남성에게 이러한 현실을 일깨우는 작업이 과연 ‘계몽’의 영역일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계몽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할 것이며, 계몽의 방법론은 사회적으로 어떻게 도출되어야 하는가.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반대로 많은 남성들이 ‘미투 운동’의 변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남녀차별은 당연히 추방되어야 하지만, 요즘은 그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는 것이다. 혹은, #MeToo의 탈을 뒤집어쓴 “가짜” 페미니즘이 사회적 아젠다를 주도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선구적으로 여성 차별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 JTBC의 뉴스룸에 출연한 한 여성 운동가가 저지른 위선적 행위를 비판하는 것이 대표적인 반론의 한 예다. 워마드나 메갈리아와 같은 페미니즘에 기반한 커뮤니티가 일베와 다를바 없다고 이야기하며 페미니즘 운동 전체가 폭력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혹은 현 여권 정치인에 집중되고 있는 성폭력 폭로 행위가 “공작”이라고 의심하기도 한다. 남성 대 여성의 편가르기가 점점 더 노골화되고 있다. 물론, 현재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페미니즘은 결코 완벽하지 않으며 크고 작은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여성은 남성만큼이나 멍청하다) 어떤 경우에는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이 학문의 영역이 아닌 종교의 영역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연구와 사색보다는 운동과 궐기의 형태로 페미니즘의 영향력이 발현되는 것을 걱정스럽게 보는 시각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위의 모든 주장과 걱정이 사실로 밝혀진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변하는 것은 없다. 아직 갈 길이 멀고, 지금 이것도 많이 부족하다. 얄팍한 권력관계를 이용해서 개인의 욕망을 해소해보겠다는 원시적인 생각은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부조리한 가부장적 유교문화의 핵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한국에 살면서 단 한번도 여성이 남성과 진정으로 동등한 위치에서 존재한다는 인상을 받지 못했다. 지금 이 핵심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MeToo 움직임은 망가진 시스템을 수리하기 위한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그 어떠한 예외도 없이, 권력의 우위에 선 자가 압력 혹은 위력을 행사하여 부조리한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회규칙이 이번 기회에 정립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결과론적인 평등이 아닌, 처음부터 정해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억압적 차별도 아닌, 특정 사회적 집단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정치적 구호가 아닌, 그저 남자는 남자로서, 여자는 여자로서, 그리고 제3의 성은 그 자체로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적 공기를 형성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의 임금수준을 동일하게 맞추는 식의 어리석은 결과론적 평등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식사를 따로 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유치한 펜스룰의 확산이 아니라, 성별에 관계없이 그 누구라도 자신의 가치를 추구함에 있어 성적인 차이에 의해 차별을 받지 아니하는 자연스러운 환경을 형성하는 것이 기본이다. 아마도 이것은 계몽의 영역이 아닌 반성의 영역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남성은 남성대로, 여성은 여성대로 역사적으로 여성이 억눌리며 살아오게 만든 사회적 불균등성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남의 탓을 하기 전에 자신이 혹여나 방관자였는지, 가해자였는지, 혹은 피해자였음에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는지, 한번 살펴보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 비뚤어진 권력관계가 낳은 부조리를 해결하는 방식이 더 높은 권력으로부터의 하향식 처벌이 되어서는 안된다. 애초에 권력에 도달하는 과정 자체가 공정했다면, 권력으로부터 발생하는 문제의 빈도도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유아인의 애호박과 ‘당신들의’ 페미니즘

최근 유아인이 SNS 상에서 불특정 다수의 누리꾼들과 벌인 설전이 화제가 되었다. 큰 의미를 부여할 일이 없는 단순한 말다툼이었다면 가쉽란의 한 꼭지를 차지하고 끝났을 일이지만, 사건의 발단과 전개, 그리고 마무리까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바람에 조금은 더 거창한 모습으로 비추어져 버렸다. 트위터를 하지 않는 내가 다른 곳들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담배와 트위터는 끊는게 아니라 잠시 참을 뿐이라지만 어쨌든 그쪽 세상에 발길을 끊은지 1년이 넘었다)  유아인을 특정한 한 트위터 계정이 “애호박”에 빗대어 유아인을 “친구로 지내라면 조금 힘들 것 같”은 사람으로 비유했고, 이를 유아인이 직접 인용한 뒤 “애호박으로 맞아봤음?”이라고 발언한 것이 사건의 시초였다. 이후 그 트위터 계정이 여성의 소유로 밝혀지며 여성에 대한 언어폭력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고, 유아인이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일이 커지게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사실 지저분하고 비논리적인 진흙탕 싸움이라 특별히 언급할 가치도 없고 의미를 부여할 이유도 없지만, 딱 하나 중요한 사실을 꼽자면 유아인과 그 반대편에서 유아인을 공격한 불특정 다수의 집단 모두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싸움판에서 훈수를 두는 사람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말과 글로 먹고 사는 구경꾼들이 달라붙어 유아인의 정신질환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의심하거나 “폭도”라는 단어 등 일부 표현에 천착해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의 차원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그 한 예다.

이 사건에 대한 균형잡힌 시선은 오히려 노동계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의 생각도 앞선 링크와 비슷한 맥락 위에 있다. 유아인을 여성혐오주의로 조리돌림하려는 시도는 부당하다. 또한 그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언어폭력행위는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과오였다. 그렇다고 유아인이 페미니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이번 사건에서 유아인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를 보낸 계층은 소위 남초 커뮤니티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활동하는 누리꾼 집단이다. 그리고 유아인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거두지 않은 계층은 그들과 대척점에 있는, 트위터를 중심을 활동하거나 여초 커뮤니티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활동하는 분리된 누리꾼 집단이다. 양쪽 집단 모두 편협된 사고와 부족한 공감능력, 그리고 성급한 일반화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었다.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성급히 대화상대를 적으로 돌릴 필요가 없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일이라고 경솔하게 무시해버려서도 안된다. 이해와 공감, 설득과 협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유아인의 ‘애호박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이 양성평등, 혹은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직도 많이 상이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이 갈등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 혹은 개념에 대한 이해가 상이하다는 점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페미니즘이 여성중심주의, 혹은 여성우월주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가부장적 남성중심 사회 ‘안에서’ 수정주의를 통해 점진적으로 양성평등을 실현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페미니즘 안에서도 다양한 입장과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다양한 생각을 아우르는 핵심적인 가치는 남성중심의 편향된 사회체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사명감이며, 이 핵심 가치 아래 다양한 의견과 입장을 이해와 협의, 논의와 양보를 통해 무리없이 추진해나가는 것이 페미니즘 운동이다. 하지만 최근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은 다양한 계층에 의해 상이한 모습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자신과 다르게 이해된 페미니즘을 일방적으로 부정하려고 하는 모습까지 보여지고 있다. 소수자 집단 간 연대의식을 거부한채 미러링이라는 방식을 왜곡되게 차용하여 언어폭력행위를 정당화한 일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커뮤니티의 과오를 억지로 껴안으려 한 여성운동권의 책임일 수도 있고, 그들의 일탈행위를 마치 페미니즘의 본질인양 호도하여 여성혐오주의로 맞받아친 남성중심 사회의 과오일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양쪽 진영 모두 편협함과 자기중심주의라는 공통된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르면 공부하라”는 엘리트주의도 배격해야 할 대상이며,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는 본질에서 벗어난 비난문구 역시 사라져야 할 논리다. 집단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그 어떤 폭력행위도 정당화되어서는 안되며,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기득권 세력의 자만심과 함께 비판의 주된 대상으로 상정되어야 한다. 소수자는 소수자와 함께 연대해야 하며, 지배세력에 속한 이들 역시 기득권을 내려놓고 그 연대의 선상에 함께 서야 한다. 운동은 반드시 전문적 지식의 습득으로부터 출발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꼭 정체성의 자각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공감과 이해, 설득과 합의의 과정을 통해 입장과 직접경험을 초월하여 훨씬 더 폭넓고 영향력 있는 운동이 시작될 수도 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때 창의적인 생각이 샘솟는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말이 된다고 한다. 나의 경우, 샤워할 때 떠오르는 창의적인 생각 중 대부분은 논문의 아이디어와 관련된다. 서울에서 생활하며 듣고 보고 겪은 다양한 사회현상을 잔뜩 얽힌 실타래처럼 집으로 가지고 오면 샤워를 하며 이 경험을 생각의 책장 속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분리해서 보관하는 셈이다. 요즘에는 사회적 소수자의 권리향상이 미치는 경제적 영향을 어떻게 계량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자주 한다. 물론, 내가 샤워를 하며 떠오른 아이디어 정도라면 이미 몇십년전부터 도서관에 책이나 논문의 형태로 보관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공헌할 정도의 지적 생산물이 나오는 과정은 번개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쌓아올린 공고한 지식의 탑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조금씩 기어올라가며 그 흔적을 손으로 더듬어 보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마침내 지식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아주 작은 돌덩어리 하나 정도 더 얹는 것으로 지식 생산의 소임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 확대, 혹은 양성평등의 제도적 확대가 거시경제변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은 놀랍게도 거의 행해지지 않고 있다. 경제학계야 말로 남성중심의 편향된 체계가 공고하게 자리잡은 대표적인 ‘기울어진 운동장’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들어 비로소 일부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자료를 사용하여 양성평등 문제를 경제학적 시선에서 바라보는 노력이 행해지고 있지만 아직 미약하다. 평생 먹거리로 삼을 만한 연구주제를 하나 큼지막하게 골라야 한다면, 박사학위 전공에서 살짝 벗어나 사회적 소수자의 경제적 지위와 관련된 연구에 힘을 보태고 싶다. 최소한 한국 사회에서, 나는 남성이자 이성애자이자 비장애인이자 고학력자이자 서울출생이자 서울거주자이자 아파트거주자인, 소수자로서의 차별 경험을 거의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다. 이런 내가 어디까지 소수자의 입장에 설 수 있는지 드러내는 것은 나 자신의 삶에서나 사회적으로나 의미가 아예 없는 실험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책임지지 않는 인터넷 대중

최근 ‘240번 버스기사 논란’이 인터넷을 후끈 달구었다. 결론은 버스기사의 책임은 없다는 것. 논란의 과정에서 가해자로 규명지을 수 있는 이들은 근거 없는 루머를 최초로 제기한 자와 논란의 중심에 있던 아이 엄마, 그리고 그 루머를 마치 사실인냥 퍼뜨린 이름없는 대중들. 피해자는 버스기사와 버스회사 정도가 되겠다. 가해자 중 실체를 특정당한 이들만이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는 모양새다.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비슷한 수준의, 혹은 더 심한 수준의 비난을 퍼부었던 이들은 모두 ‘아니면 말고’ 라고 얼버무리던가 익명성을 무기로 어디론가 숨어 마치 자신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듯 행동하고 있다. 트위터든, 유명 온라인 커뮤니티든, 페이스북이든 인터넷 공간은 모두 마찬가지다. ‘오해를 했다’라고 변명하고 자신을 아주 보잘것 없는 공범 중 하나로 포장하기엔 피해자가 느꼈을 ‘피해’의 상당 부분이 바로 이 불특정 다수의 인터넷 대중의 소문 부풀리기 과정에서 온다는 사실이 너무 크게 다가온다. 이들 중 아마 그 누구도 공개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법적인 책임이 돌아올 확률은 0%에 가깝고, 자신이 했던 것과 같은 방식의 사회적인 ‘마녀사냥’을 되돌림받을 가능성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라는 생태계가 이들을 이처럼 무책임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임을 느낄만한 경제적 유인을 제공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에 대해 실체를 특정할 수 있는 장치를 덧붙인다면 그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는 반대에 직면할 것이다. 개인의 자유가 침해당한다고 느끼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행해지는 발언이 집단적으로 축적되는 과정은 화장실의 낙서와는 차원이 다른 사회적 파급력을 가진다. 그저 배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고 하기엔 공개되는 범위를 제한할 수 없는 특징을 가짐과 동시에 특정인에 대한 비난의 경우 실제와 비슷한 수준의 피해를 입히기 때문에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는’ 법의 사각지대를 종종 만들어낸다는 분명한 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그저 자연적인 현상인냥 두고 보기에는 인터넷 익명성으로 인한 경제적 비용이 이를 제한하는데 다르는 경제적 비용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수의 자유를 제한할 것인가, 소수의 피해자를 보호할 것인가의 문제는 현대사회의 오래된 윤리적 고민거리이기도 하다. 인터넷의 경우 조금 더 적극적으로 소수의 피해자를 보호하는 쪽으로 정책이 움직여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또다른 사회적 이슈가 십대 청소년의 집단 폭력 문제다. 공교육이 무너져내린 후 손가락만 빨았던 ‘어른’들의 ‘방치’의 결과는 왕따를 넘어선 살인에 가까운 폭력행위다. 청소년법은 여전히 구시대적인데 아이들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어른의 폭력성을 습득해나간다. 인터넷 폭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 피해자는 신상이 공개되는데 반해 가해자의 대부분은 신상이 공개되지 않는다는 역차별의 문제가 있다. 법적으로 이것이 정의로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 특히 우리 사회의 경우, ‘책임을 지지 않는 개인’은 일종의 사회철학의 부재처럼, 혹은 사회적 질병처럼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거짓말을 서슴치 않고 새치기를 자랑스럽게 행하며 불법행위를 기꺼이 감수한다. 문제는 이것이 개인의 충동적 일탈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암묵적인 동의하에 지속적으로 용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터넷 폭력, 혹은 인터넷 상의 이지메 현상은 그러한 사회철학의 뒤틀림을 반영한 시대적 거울일 뿐이다. 법치국가에서 사법당국은 법을 통해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사회가 전체적으로 신경질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한숨만으로는 부족하다.

동성애혐오의 경제적 비용

동성애혐오 문제는 전세계적으로도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골치아픈 일이지만, 우리나라에 국한하여 동성애혐오자들의 정신세계를 탐구해보는 일은 나름의 독특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유교 근본주의, 불교 근본주의에 더해 개신교 근본주의까지 더해져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가 상당한 사회적 정당성을 부여받고 있는 실정이고 한발 더 나아가 동성애자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행위 등 실질적인 문제를 야기시키는 위험요인으로 발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내 일이 아니면 절대 나서지 않는다’는 한국인 특유의 국민성과 정책 당국자의 개인적인 ‘입장'(개신교 신자라던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 동성애혐오자에 대한 집단적이고도 강력한 대응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결국 연구자들이 앞장서서 한국식 동성애혐오론이 갖는 논리적 허구성을 적극적으로 논파해나가는 것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주로 심리학이나 사회학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경제학적으로도 접근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동성애혐오로 인한 경제적 비용을 추산하는 작업을 우선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미 캐나다에서 2001년 발간된 정책보고서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The Cost of Homophobia: Literature Review of the Economic Impact of Homophobia on Canada], submitted by Christopher Banks, submitted to Gay and Lesbian Health Service, 2001.)

위의 보고서는 동성애혐오, 혹은 성적소수자 혐오로 인해 성적소수자들이 받는 피해를 경제학적으로 추산한 작업들을 모아놓은 서베이페이퍼다. 방법론은 간단하다. 성적소수자에 대한 혐오로 인해 성적소수자들이 이성애자들과 동등한 의료혜택을 누리지 못할 때 발생하는 비용을 만약 이들이 동등한 의료혜택을 누렸다면 얻게 되었을 효과를 추정함으로써 역산하는 과정을 거친다. 환경경제학이나 보건경제학처럼 어떤 정책, 혹은 집단적 행위의 경제적 효과를 직접적인 통계자료로 추산하기 어려운 경우 주로 취하는 방법이다. 보고서는 성적소수자들이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진 혐오로 인해 “일반적인” 이성애자들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와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고  사회적인 장벽으로 인해 성적소수자에게 필요한 의료행위가 적시에 제공되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 사용한 지표는 자살률, 흡연률, 기대수명, 우울증, 실업률, 범죄율, 에이즈 발생률 등 8가지 항목이다. 보고서는 만약 호모포비아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성적소수자들이 나타내는 위 8가지 지표의 수치와  “일반적” 이성애자들의 수치는 통계적으로 유의한 수준에서 거의 동등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보고서에서 추정한 호모포비아의 연간 경제적 비용은 다음과 같다.

homiphobia costy

예를 들어 자살률의 경우, 2001년 캐나다 기준으로 호모포비아가 발생하는 경제적 비용이 약 8억달러 정도로 추산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즉, 호모포비아가 없었다면 더 적은 성적소수자가 자살했을 것이고, 이들이 만약 살아서 경제활동을 정상적으로 영위했을 경우 발생하는 경제적 순효과가 연간 8억 달러에 이르는 것이다. 이 결과를 두고 “동성애혐오자들이 우리나라 경제를 갉아먹고 있다!”라고 주장해도 사실 그리 크게 잘못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성적소수자의 ‘존재’ 자체만으로 사회에 발생시키는 경제적 비용은 정확히 추산할 수도 없을 뿐더러 아무런 논리적 근거도 없다. 성적소수자가 더 많은 범죄를 저지른다는 통계도 없고, 더 열등한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도 없다. 오히려 동성애결혼 합법화 등이 발생시키는 경제적 순효과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성적소수자들을 ‘양성화’시킬 때 그 사회가 부담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은 일부 종교인의 심리적 ‘불편함’ 정도일 것이다. 이건 거의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무시되어야 한다) 이에 반해 성적소수자들의 경제활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내고 이들에게 동등한 사회적, 의료적 혜택을 부여할 때 돌아오는 경제적 효과는 직관적으로 생각해도 상당한 수준이다. 더 나아가, 성적소수자와 같은 극단적으로 소외받는 계층을 사회적 장치 안으로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환경에서는 대부분의 소수자, 약자가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동성애자에게 사회적 혜택을 적극적으로 베푸는 사회가 빈민층이나 장애인에게 인색할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이다. 즉, 사회복지의 전체적인 ‘bar’ 자체가 한단계 높아지는 효과도 추가적으로 얻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와 비슷한 연구는 찾아볼 수 없다. dbpia나 kiss, kipris 등 국내 논문 검색 사이트에서 동성애 혐오를 경제적 효과와 연결짓는 논문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분명 누군가는 관심을 가지고 있을텐데 아직 발표가 되지 않은 것이라고 믿고 싶다.

책과 책장

책을 전시용으로 사용하는 순간부터 그 책은 시체로서 존재한다. 만약 당신이 지금까지 읽지 않은 책, 그리고 앞으로도 읽지 않을 책을 책장에 꽂아두고 다시 꺼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체가 썩어가는 모습을 음미하는 그릇된 도축장 주인의 심리와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외국서적을 관상용으로 구입한다”는 농담을 여러 사람들로부터 심심치 않게 들을 때마다 그냥 웃어 넘겼다. 그 정도의 허영심은 나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있을테니까. 다만 코엑스 별마당도서관과 한남동 북파크에 전시되어 있는 책들을 사진으로 접할 때마다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전시가 아니라 박제에 가까운 형태다. 책들을 방문객의 손에 닿지 않는 멀고 높은 곳에 위치시킨 이들이 노렸을 법한 수요층의 심리, 혹은 그 소비구조의 색깔을 헤아릴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책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아름다움을 지니지 못하는, 기표와 기의 간 관계가 온전히 성립하지 못하는 사물에 가깝다. 책 안에 들어 있는 활자들이 여러 사람에 의해 ‘읽혀짐’으로써 비로소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책은 아름다운 내용을 품고 있는 책이다. 못생긴 책은 못생긴 내용을 품고 있는 책이다. 책의 표지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것은 책에 대한 탐미가 아니라 책의 표지라는 디자인의 작은 분야에 대한 탐미다. 책의 내용에 접근하지 못하게 만든 공간이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차용할 때 느껴지는 절망스러움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소비의 본질 중 한 부분을 상징하는 현상이라면 단지 낙담하는 것만으로 끝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외국어고등학교

나는 외고 출신이다. 당시 학교 분위기가 좀 거시기하긴 했지만 외고 중에서는 역사가 가장 오래 된 학교 중 하나여서인지 그 나름의 전통과 학풍은 충실히 경험하고 나왔다고 생각한다. “전통과 학풍”이라 해서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는 교사를 봐도 그러려니 해야 하고 학생을 성추행하는 교사에 대해 학무보들이 단체로 항의해도 해당 교사를 같은 재단에 있는 다른 학교로 보내는 것 이상의 조치를 기대할 수 없는 운영 방침, 아침 7시 30분부터 오후 늦은 시간까지 8개, 혹은 9시의 수업이 이어지지만 밤 10시까지 계속되는 야간 자율학습을 ‘자율’적으로 빠질 경우 다음날 교무실로 불려가 혼이 나는 사제 관계, 고등학교 3학년 시간표에 미술과 체육 등 수능과 관계 없는 과목은 완전히 제거되며 전공어 수업 시간조차 ‘자율학습 시간’으로 변이되어 국어나 수학을 들여다 보아야 하는 신축적인(?) 수업 운용방식 등이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그 학교의 오래된 전통이자 학풍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방식으로 운영된  학교가 매년 내세웠던 유일한 마케팅은 서울대, 연대, 고대 등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명문대에 진학시킨 학생수였다. 물론 이들 대학교로 진학한 학생들 대부분이 어문계열이 아닌 다른 계열을 선택했고, 학교는 심지어 “외고에도 이과가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가지 했다. 이에 더해 일반적으로 어문계열보다 높은 수능 커트라인 점수를 기록하는 상경, 법학 계열에 진학한 학생수를 따로 추려내어 자랑하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대학 잘 보내는 고등학교임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언어는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는 ‘수단’으로도 기능하기 때문에 외고 출신이 굳이 어문계열에만 지원해야 하냐는 반론도 가능하지만, 외국어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외국어 교육을 제대로 가르치지조차 못했다는 현실이 이러한 반론의 기본 가정부터 흔들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외고는 처음부터 외국어 교육을 위한 교육기관이 아니었고, 현재도 분명히 아니며, 앞으로도 아닐 것이다. 외고는 처음부터 내신을 포기하고 수능 하나만을 대박내기 위해 짜여진 커리큘럼을 강점으로 내세웠고, 이중 소수의 더 ‘나은’ 외국어고등학교는 SAT등 외국의 수능ish한 시험까지 정복하며 명문대 진학률을 극대화시켰다. 외고로 똑똑한 아이들이 몰려든 이유는 그들이 외국어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좋은 대학에 갈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그러한 욕망을 달성했고, 내부의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난 아이들은 자퇴 후 검정고시를 보거나 자살을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냥 인문계 고등학교에 갔어도 충분히 획득할 수 있었을 수능 점수를 받아들고 재수학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외고 설립 정책은 과학고의 경우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과학’이라는 쉽게 특정할 수 없는 넓은 카테고리를 가질 수 있었던 과학고 정책은 이들이 의대에 가든 공대에 가든 자퇴를 해서 회사를 차리든 설립목적에 어긋난다는 비판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외국어고는 그렇지 않다. ‘세계화시대에 걸맞는 외국어 인재 양성’이라는 목적 자체가 모호할 뿐더러 외국어 교육의 페러다임은 언제든 시장에 빼앗길 수 있다. 외고에 입학하는 학생 중 상당수가 이미 영어에 능통해 있다는 사실은 부끄럽고도 우스운 모순인 것이다. 더 나아가 백번 양보해 외국어 영재를 육성한다고 해도 그들이 어떻게 성장할지, 어떻게 쓰여질지에 대한 청사진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지금까지 운영되어 왔다면 사실상 교육의 성과를 측정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구체적인 교육 목표를 세우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지역에 관계 없이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이 곧 명문고가 되어 버리는 한국의 현실에서 일반고에 앞서 학생을 선발할 특권이 있는 이들 외고가 수능점수와 명문대 진학률에 마케팅을 올인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외고에서 외국어 교육은 뒷전이다. 엄연한 현실이다. 서울대 법대에 가장 많이 진학시키고 사시 합격을 가장 많이 시키는 출신학교 중 상당수가 외고라는 사실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한국에서 법조인으로 살 기 위해 외국어가 얼마나 필요한가? 한국어의 극치라는 판결문을 작성하는데 스페인어가 얼마나 필요한가? 범인을 잡기 위해 어려운 문법의 영어를 구사해야 하는가? 코메디가 따로 없다.

나는 물론 미국에 있는 학교에서 오래 공부했다. 하지만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당시 영어로 대화가 거의 불가능했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지난 1월 신혼여행으로 프랑스에 갔는데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이야기해야겠다. 나는 외고 프랑스어과 출신이다. 내가 지금까지 습득하고 익힌 외국어기술은 모두 대학교 입학 이후의 노력에 의해 성취된 것이다. 외고에서의 경험 중 지금까지도 내게 도움을 주는 것들은 당구 실력과 스타크래프트 실력 정도다. 대체 거기서 뭘 배웠는지 모르겠다.

nine to six and monthly paid life

일주일 중 5일을 희생하여 번 돈으로 카드값을 내고 월세를 내고 대출 이자도 갚고 약간의 저축도 할 수 있는 삶에 감사하고 있다. 시간외근무를 자주 해야 몇십만원이라도 더 손에 움켜쥘 수 있는, “빠듯하다”라는 표현이 딱 맞는 빡빡한 생활 리듬이 야속하기도 하지만,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시대와 나라를 잘못 만나 훨씬 더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 세대를 생각하면  이런 불만조차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나를 비롯한 ‘사회적으로 안착한’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윗세대에게 착취당하는 구조 속에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젊은 세대의 미래를 책임질 수 없다면, 현재 자리잡은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현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결혼을 하든, 아이를 낳든, 그런 개인적인 ‘입장’은 중요하지 않다.

많은 ‘정규직’ 월급쟁이들이 일확천금과 조기은퇴를 꿈꾼다. 아마도 오너가 있는 큰 회사에서 부속품처럼 사용되는 현재의 위치가 성취감을 제한하기 때문에 나온 생각일 것이다. “취집”이라는 말도 어쩌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이러한 생각에 기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부속품들이 모여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그렇게 완성된 시스템이 다시 개개인에게 혜택을 주는 순환구조를 이해한다면 부속품으로서의 가치가 결코 작다고 이야기하기도 애매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하루에 여덟시간을 오롯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다달이 예상되는 돈이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삶은 실패에 대한 사회적 보험장치가 다른 선진국에 비해 현격하게 부족한 현대 한국사회에서 아마도 가장 안전한 보호막일 것이다. 한국사회에 창의성이 부족한 것은 한국인 개개인이 창의성이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아마도 개인의 창의성이 발현되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환경이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역시 윗세대의 책임이고 숙제로 남겨져 있다. 창의성을 희생하는 대신 안정적인 미래를 담보받을 수 있다면 충분히 납득할만한 트레이드오프라는 생각이 든다. 그 정도 등가교환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세대가 존재한다. 일부 계층도 아니고 한 세대가 통째로 그런 위기에 처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