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좌파의 현실과 한계

조국 전 민정수석의 법무부장관 청문회 문제로 뉴스판이 떠들썩하다. 후보자를 둘러싼 여러가지 의혹들과 그 해명을 지켜보며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후보자의 정치적 성향이나 공무원으로서의 업무 적합성 등이 청문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질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분위기는 전혀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 듯 보인다. 후보자로서 하자가 있는지 여부가 정쟁의 중심에 있는 모양인데, 그 하자라는 것조차 법적인 기준이 명확히 설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정서”와 같은 모호한 개념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논쟁의 차원을 결코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후보자는 오래 전부터 소셜미디어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현 정권을 옹호해 왔다는 점에서 유시민과 유사한 사회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유시민이 제도권 밖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 느끼고 직접 노무현을 돕기 위해 직접선거를 거쳐 국회를 통해 정치판에 뛰어든 것과는 달리, 조국은 서울대 교수라는 안정적인 사회적 지위 위에 트위터, 페이스북과 같은 해외 사업자 기반 소셜미디어를 이용하여 목소리를 높이다 선출직 공무원으로 이 ‘판’에 들어왔기에 그 결이 꽤 명확히 갈린다고 할 수 있다. 즉, ‘오피니언 리더’라는 사회적 위치는 두 인물이 서로 공유하는 지점일지 모르나, 정치판의 거물로 성장하기 까지 지나온 과정은 판이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으며, 나는 그 성장과정이 조국을 유시민과 구분짓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차이점이 조국과 조국을 지명한 현 정권이 현재 어려움을 겪게 된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조국과 같은 성장배경과 사회적 위치를 가진 사람을 ‘강남좌파’라 부른다. 재단을 소유할 정도로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태어나 뛰어난 학업능력을 바탕으로 명문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안정적인 직업을 일찌감치 획득하여 경제적, 사회적으로 탄탄대로만을 걸어왔다는, 이 ‘강남’이라는 요소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뻔한 성공담에 불과하지만, 여기에 상위계급의 이너서클 안에 갇혀 우경화하지 않고 하위계층을 위한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낸 ‘좌파’ 이미지가 합쳐질 경우 대중에게 꽤 신선한 매력을 선사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요소를 모두 가진 인물이 소셜미디어에서 스타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경제적, 사회적 성공은 개인의 능력에 좌우된다는 믿음이 우리 사회에서 아직 의미가 있다면, 조국이 획득한 경제적, 사회적 지위는 그를 많은 이들의 롤모델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비록 그의 성취수준에 다다르지는 못할지라도, ‘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즉 기득권층에 야합하지 않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계속 목소리를 낸다는 사실 자체가 꽤 쿨하고 멋져 보이는 것이며 충분히 따를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평생 학계에만 있어 국가조직을 이끌어본 경험이 전무한 그가 선출직 공무원으로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 온라인에 형성된 그에 대한 강한 지지와 믿음이 이를 증명한다. 사람들은 아마도 그의 전문성보다는 그의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더 강한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서울대 법대 교수라는 타이틀은 공직자로서의 전문성을 최소한으로 담보하는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국이 이렇게까지 거물이 된 배경의 한편에는 검찰을 필두로 한 현 권력층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자리잡고 있다. 법치국가에서 사법부와 검찰이 신뢰를 잃는 현상은 생각보다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데, 조국은 어느 순간부터 많은 대중이 ‘개혁’하기를 바라는 검찰의 반대편을 상징하는 인물로 비추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교수 시절 실제로 검찰개혁 등에 대해 꽤 많은 목소리를 내어 왔고 그 경력(?)을 인정받아 민정수석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이 사실이라면, 그에 대한 대중의 믿음이 마냥 맹목적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청문회에서 조국의 ‘하자’가 공격당하기 시작하면서 그를 향한 대중의 믿음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지금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획득해온 과정에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발견될 수록, 그리고 그가 획득한 경제적, 사회적 위치를 자녀에게 석연치 않은 방법으로 증여하려한 정황이 포착될수록, 결국 그 역시 ‘좌파’라는 이미지 안에 감추어진 ‘강남’으로서의 속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렇고 그런 사람 중 하나라는 실망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후보자의 해명에서 살펴볼 수 있듯, 실제 불법으로 드러난 것은 현재까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만약 후보자측이 청문회에서 불법성 여부를 중심으로 방어하기 시작한다면 패착이 될 확률이 높다. 대중은 그가 여전히 다른 ‘강남’과는 다른 사람이기를 바라고 있고, 이는 다분히 감정적이며 정치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황교안 역시 법무부장관 후보자 시절 청문회를 거쳤다. 그도 ‘강남’이었고, 부동산 투기부터 고액 변호사 수임료 문제까지 불편한 과거가 꽤 여럿 드러났음에도 장관직에 임명되는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국민 모두가 그를 노골적인 ‘강남’으로만 생각했지, 그에게 약자를 향한 애정이라던가 소수자를 위한 법재정 의지를 바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속한 세상에서 자유로웠다. 조국은 다르다. 그는 사회적 올바름, 정의의 공평한 실현, 경제적 평등 추구라는 다른 세계에도 발을 걸치고 있다. 특히 그가 되려 하는 법무부장관의 경우 공직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 모두에 속해있는 만큼, 후보자의 삶 자체에서 대중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황교안이 뼛속까지 강남우파를 대변하는 꼴통 기독교인의 이미지를 노골적으로 내세움으로써 대선후보까지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면, 조국은 공정하고 엄격하게 자신을 통제하는 와중에도 사회적 정의를 위해 헌신한 일생을 셀링포인트로 내세울 수 밖에 없는 어려운 포지션을 스스로 택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드러난 바에 따르면 조국의 인생은 남들보다 쉬었으며, 그의 딸 역시 남들보다 쉬운 길을 걸어왔다. 불법이 아니라 하더라도, 어깨를 내어 함께 행진하고자 하는 그의 ‘동지’들보다 훨씬 쉬운 길을 기득권 세력이 좋아하는 방식을 이용하여 편취해왔다면, 그 자체로 조국에 대한 믿음에 균열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인다. 이 점이 유시민과 조국을 나누는 경계선이며, 노무현과 문재인이 왜 여전히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지 역설적으로 설명하는 가장 좋은 지점일 것이다. 대중이 전처럼 조국에게 그들의 어깨를 내어줄까? 단지 문재인이 지명한 후보자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현 정권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사람 중 하나다.그리고 지금까지 현 정부가 펼쳐온 정책들은 어떤 차원 안에서 나름의 최선책이었다고 생각한다. 부동산정책, 대북정책, 통상정책 등등, 다른 정당이 정권을 잡았다면 분명 이보다 더 못한 정책을 펼쳤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물론 지금까지 해온 것보다 더 잘할 수 있었다. 아쉬운 정책도 많았고, 오판이라는 느낌이 확 드는 결정도 많았다. 하지만 이건 그들이 가진 인간적 한계때문이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다거나 특정 기업, 혹은 세력과 결탁하기 위한 목적에서 벌어진 의도된 실패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정책적 실패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국민은 그 실패를 용납해야 한다. 이명박이나 최순실처럼 개인적 욕심을 위해 나라 정책을 움직이면 나라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으나, 단순한 정책 실패 한 두개로는 나라가 망하진 않는다. 현 정권은 그러한 차원에서 충분히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조국 후보자 문제도 확대해석을 경계하는 편이다. 법무부장관이 무척 중요한 자리이긴 하지만, 조국이라는 개인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사법정의 전체가 흔들리거나, 혹은 갑자기 눈에 띄게 좋아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조국으로 상징되어 한동안 꽤 트렌디한 브랜드로 이름을 날렸던 ‘강남좌파’라는 특정 사회계층에 대해 생각을 다시 하는 계기로 삼으면 좋을 것 같다. 조 후보자 문제를 현 정권의 문제로 확대해석하기보다는, 현 정권의 핵심 지지세력 중 하나였던 이들이 가진 민낯이 과연 어떤 색깔일까, 이 기회에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다.

세종시 생활 1년

세종시에 전세집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선배 교수님들께 처음 전해드렸을 때 그 분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출퇴근하기에 너무 멀지 않겠어요?” 나는 “차로 30분 정도 걸립니다”라고 답변드렸지만, 반응은 달라지지 않았다. “30분이면 너무 오래 걸리는데…” “세종시 갔다가 너무 힘들어서 (대전으로) 돌아온 교수님들도 많더라구요” 세종시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를 재어 보았다. 20키로 쯤 나왔다. 서울에 살 때 금호동 집에서 여의도 직장까지 거리를 재어 보았더니 16키로 쯤 나왔다. 여의도 회사에서 자동차로 집까지 퇴근할 때 걸렸던 시간은 최고 70분 정도였다. 평소에는 한시간 정도면 집에 올 수 있었고,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한 시간 남짓 걸렸다. 세종시에서는 금요일 저녁 6시 정각에 학교에서 나선다고 해도 35분이면 집에 도착한다. (퇴근시간대 대전의 교통량에 대한 출신 지역에 따라 조금 상이하다. 여기 사는 분들은 “몹시 막힌다”고 표현하지만 나는 “통행량이 조금 많은 정도”라고 주장한다) 요즘에도 가끔 교수님들이나 학교 동료들이 물어본다. 출퇴근이 힘들지는 않냐고. 요즘에는 “그럭저럭 다닐만 합니다” 하고 가볍게 뭉뚱그린다.

위의 예는 ‘서울과 지방’이라는 약간은 과격한 이분법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주된 패러다임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다. ‘서울에 살지 않는 사람은 모두 지방 사람’이라는 이 논리는 사실 정당하지 않은, 어찌 보면 매우 ‘후진’ 주장이지만 그렇다고 이 논리가 비현실적이라고 부정하기에는 서울이 가진 위상이 너무 남다르다. 서울은 좁고 밀집되어 있다. 지방은 널찍하게 퍼져있다. 이렇게만 보면 지방이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것처럼 느껴지지만, 서울이 가진 살인적인 ‘밀집도’는 거기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도시로 만들었다. ‘효율적’이라는 표현에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서울 지도를 펼쳐놓고 지하철 노선과 기간 도로의 배치, 주요 상권과 관공서, 주요 업무지구의 배치를 살펴보면 에너지의 집중과 분산이 몹시 효율적으로 배분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도시설계 전문가는 아니지만, 직관적으로 서울의 자원분배가 효율성 우선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형평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서울 안에서도 특정 지역에 사람과 돈, 문화와 창조성이 집중되어 있다. 서울은 지난 600여년의 역사를 거치며 철저하게 스스로를 다른 지역과 고립시켜 왔고, 심지어 그 안에서도 끊임없이 계급을 분화해 왔다.

심지어 요즘에는 비슷한 몸집을 지닌 세계적인 도시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깊이까지 갖추게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스페셜티 커피를 파는 집은 서울에 있을 확률이 가장 높다. (아닙니다 부산에 있습니다) 세계적인 수준의 프랑스 요리나 일식 요리를 먹고 싶다면 굳이 빠리나 도쿄로 가지 말고 서울로 가면 된다. 지금 가장 핫한 미국의 인디 뮤지션이 궁금하다면 6개월만 꾹 참고 기다리면 된다. 국내 에이전시가 서울의 작은 공연장에 그 뮤지션을 대령해 놓을테니까. 서울은 한국사회의 모든 에너지원을 독점하며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했다. 서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다른 도시와의 차별점을 굳이 꼽자면, 국내에 서울의 경쟁자가 전무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서울은 한국사회의 편애를 잔뜩 받고 자란 외동아들과 같은 존재다.

이런 서울을 고향으로 하는 나는, 서울을 벗어나 살기 전까지 스스로를 서울 안의 작은 구역에 가두며 정체성을 만들어왔다. 즉, 서울을 다시 잘게 쪼개기 시작한 것이다. ‘강남 3구’는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압구정동은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가봤다. 서울의 다른 지역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강동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딱 한 번 가봤다. 노원구에 사는 친구를 만나지 않았다면 노원구와 강북구, 중랑구에는 결코 가보지 못했을 것이다. 양천구와 강서구는 아직도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다. 나는 종로구와 마포구, 서대문구에서만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커왔다. 그런데 서울을 벗어나 살아보니 그 모든 정체성이 다 부질없어 보이기 시작했다. 대전에서, 나는 ‘서울에서 온 사람’일 뿐, ‘마포구에서 온 사람’으로 구체화되지 못했다. 그 누구도 나에게 “어디에서 오셨어요?” 라는 질문 다음에 “그래서 서울 어디서 오셨냐구요?”라고 이어 묻지 않았다. 내가 세종에서 산 1년여의 기간동안 얻은 가장 큰 레슨이 이것이다. 서울 사람은 서울이 전부인 줄 안다. 하지만 서울 밖에서 살다 보면, 서울이 한국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24시간 내내 체감하게 된다. 서울 사람들에게 서울 외의 지역은 가끔 놀러 가는 경치 좋은 곳이거나 특이한 음식을 파는 맛집이 있는 곳, 혹은 명절 때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친척이 사는 곳 정도로 인식되겠지만, 그 곳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그저 또다른 서울’일 뿐이다. 지역 주민에게 삶의 중심은 그 지역이고, 그 지역의 일정 반경을 벗어나면 거기서부터 ‘지방’으로 인식된다. 사실 그렇게 인식되는 것이 맞다.

문제는 서울과 서울 외 지역 간 격차가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 외 지역에 사는 이들이 그 지역을 중심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으며, 서울을 중심으로 놓고 자신과 자신이 사는 지역을 주변으로 놓는 인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서울과 지방’ 문제가 일차원적이지 않은 이유다. 이 ‘격차’는 앞서 표현한 에너지의 격차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격차는 앞으로 점점 벌어질 일만 남았다. 지금과 같은 낮은 성장률이라면, 특정 기간산업에 집중하여 수출을 통해 성장률을 떠받드는 국가전략을 고수한다면, 서울에 모든 기관과 기업이 모여 있고 그 에너지의 흔적이라도 받아 먹기 위해 다른 모두가 서울로만 모여든다면, 서울 외의 모든 지역은 지속적으로 뒤쳐질 수 밖에 없다.

이 거대한 흐름을 조금이라도 바꾸어보려고 만든 여러 정책 중 유일하게 실패라고 낙인찍히지 않은 것이 바로 세종시다. 어떻게 보면 지방균형발전을 위한 마지막 실험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곳은, 아직 많은 것이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기에는 상당히 많은 요소들이 빈칸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2019년 3월 기준 세종시의 인구는 약 32만명인데, 이중 약 28%가 수도권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62%는 대전과 충청도 등 충청권에서 유입되었다. 정부에서 작정하고 키우려고 하는 도시이니 그동안 부동산 광풍 등 ‘돈벌이’에서 소외되어 온 충청권 주민들이 먼저 반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충청권의 한계적인 인구를 감안할 때, 수도권에서 지속적인 유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2030년 목표로 잡은 80만명의 인구를 채우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수도권에서 열 개가 넘는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매 블록마다 있는 스타벅스를 바라보던 이들이 세종시로 올 수 있을까? 삼성과 엘지, 국회와 청와대가 서울에 가만히 버티고 있는데 기차와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두시간 쯤 걸려 서울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의 신도시에 호기롭게 내려올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처럼 운이 좋게 좋은 직장이라도 구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지만, 대규모의 인구 이동을 유인할 만큼 ‘질 좋은’ 일자리를 세종시에서 얼마나 많이 창출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이 물음표로 남아 있다.

조금 덜 거창하게 이야기의 차원을 좁혀 매일 매일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 곳에서 꽤 만족하며 살고 있다. 물론 여전히 서울에는 때때로 올라간다. 나의 모든 친구들이 그 곳에 있고, 많은 공연이 그곳에서 열리며, 심지어 내가 사고 싶어하는 물건을 파는 백화점도 서울의 강남구에만 있다. 하지만 대전의 신도심과 세종시를 오며가는 일상의 삶 속에서 ‘후회가 들 정도’의 심대한 불편함은 거의 찾을 수 없다. 물론 생활이 조금 느려지는 측면은 반드시 존재한다. 예를 들어 대전의 큰 병원을 한 번 가려고 해도 반드시 차가 필요하다. 학교에서 퇴근 후 교수님들과 한 잔 하려고 하면 시간을 계속 확인해야 한다. 버스가 일찍 끊기기 때문이다. 이마트라도 한 번 다녀오면 장바구니는 가득 차 있고 하루 반나절이 지나가 있다. 퇴근길에 잽싸게 백화점 식품코너에 들려 그날 그날 먹을 것을 사던 서울생활과 확실히 다르다. 하지만 ‘시간의 느려짐’은 어찌 보면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축복이다. 서울의 경쟁에서 자발적으로 탈출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나는 서울에서의 탈출을 어느 정도 즐기고 있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의 단지 내부에는 자동차가 다니지 않아 아이들이 맘 놓고 뛰어 놀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한 낮에 창문을 열어 놓으면 아이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자동차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쓰레빠를 끌고 어슬렁 바깥으로 나가면 공차부터 베스킨 라빈스까지 많은 거대자본 점포들이 눈에 보인다. 특색 있는 소규모 자본의 성업을 벌써부터 바라는 것은 무리가 있다. 아직 역사가 10년도 되지 않은 도시다. 도시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기 전의 대규모 거주지역은 거대 자본의 놀이터가 될 수 밖에 없다. (서울의 대부분의 지역 역시 마찬가지다. 마포와 용산, 강남의 일부분을 제외하고 그 지역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몇이나 되는가? ‘~리단길’은 왜 그리도 많은지, 자기 지역 다운타운의 별칭 하나 자신 있게 짓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걸어서 10분 거리에는 공원이 두세개 정도 위치해 있어 쉽게 흙밭과 숲길을 걸을 수 있다. 차를 타고 조금만 나가면 (그 어떤 시간대에도 절대 막히지 않는다. 뭐 ‘통행량’이 많을 수는 있겠지만..) 좋은 숲과 절 등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많아서 도시에 활기가 넘친다. 서울 사람들의 눈에는 상가 공실도 많고 차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 ‘죽은 도시’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이를 낳지 않아 실제로 ‘죽어가는’ 서울보다는 훨씬 생명력이 넘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는 서울로의 재진입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이유는 ‘연고’ 때문이다. 처음 대전으로 내려간다고 할 때 많은 이들이 그곳에 연고가 있는지 걱정했다. 어느 정도의 두려움은 있었지만 그것이 어떤 결정의 결정적 이유가 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고는 상당히 중요하다. 지역에 연고가 있다는 것은 ‘연대’로의 이행이 그만큼 쉬울 수 있음을 의미한다. 세종시가 아무리 도시 설계가 잘 되어 있고 쾌적한 환경을 제공한다고 해도, 그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이 나의 실제적인 이웃이 될 수 없다면, 이 도시가 나에게 아주 깊은 유대감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세종시에서 ‘좋은 이웃’을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다. 아내는 친구를 한 명 사귀었고, 오랫동안 온라인상으로 알고 지낸 분의 가족과 식사도 함께 했다. 단골 커피숍도 생겼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우리 부부가 아이를 낳고 키우며 장기간 삶을 지속하고자 할 때 이 곳이 최선의 선택인지에 대한 확신이 아직은 들지 않는다. 조금 더 우리 부부에게 익숙한 공간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고, 그 익숙한 공간에서 많은 친구들과 서로 의지해가며 삶을 이어나가고 싶다. 우리가 말버릇처럼 “친구 아무개만 이 곳으로 이사오면 서울은 꿈도 꾸지 않을텐데” 라고 농을 주고 받는 것도 이때문이다. 너무 나약한 말일수도 있겠지만, 세종시가 심리적으로 아주 조금 답답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 가족이 확장할 수 있는 여력이 그리 많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주 친밀한 이웃 두어 가족 (더!). 지금 이 도시에서 우리가 찾고 있는 퍼즐조각이다. 이 조건만 만족된다면, 좋은 직장과 쾌적한 주거 환경이라는 기본 전제조건과 함께 우리 부부는 세종시를 서울의 대안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극단적 여성중심주의를 반대하는 이유

최근 기성 언론을 통해 보도된 ‘워마드’를 중심으로 한 두세개의 사건들이 내 관심을 끌었다. 하나는 가톨릭 성체 훼손 사건이었고, 또다른 하나는 지하철 남성 조롱 사건이었으며, 마지막 하나는 현직 대통령을 향해 “재기하라”고 발언한 사건이었다. “이게 ‘사건’ 정도나 되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요즘 한국사회의 한 단면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발생한 일련의 일들이 꽤나 상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워마드’가 어떤 곳인지는 해당 사이트를 여러 차례 방문해 관찰했기에 잘 알고 있다. ‘워마드’ 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정체성과 문화를 공유하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다수 존재하고, 최근 혜화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시위의 중요한 일원으로 이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이들이 인터넷 밖으로 나와 본격적으로 현실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여러가지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현재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과 ‘워마드’가 어떤 관계로 엮여 있는지 보다 분명하게 정리하고 가야하지 않을까 싶다.

우선 한국사회에서 사용하는 ‘페미니즘’이라는 용어 자체가 올바르게 정의내려지지도 않고 있으며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하나의 공통적인 가치로 공유되지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시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극단주의 페미니즘(radical Feminism)만을 뜻하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는 반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유주의적 페미니즘(liberal Feminism)까지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누군가에게는 페미니즘이 하나의 ‘운동’이라면, 다른 누군가에게 페미니즘은 ‘학문’의 영역에서 이해된다. 누군가에게는 페미니즘이 양성 평등을 위한 이데올로기라면, 다른 누군가에게 페미니즘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저항운동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나는 페미니즘이 “공부”를 해야만 받아들일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주장하는 순간 교조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고 페미니즘이 “믿음”의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충분한 논거가 뒷받침되지 않은 운동은 우스꽝스러워지기 쉽상이다. 중요한 점은 페미니즘이 사회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 사회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회 안에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페미니즘을 사회과학(social science)의 범주 안에 포함시키는지의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다. 페미니즘의 태동 자체가 사회와 떼어놓을 수 없었고, 지금까지 사회의 ‘질서’와 유기적인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며 성장해온 이데올로기이며, 이 사상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 역시 사회의 ‘질서’ – 를 수정하든, 재정의내리든 – 라는 개념 안에서만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나는 ‘워마드’가 여성우월주의, 혹은 극단적 여성중심주의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단체라고 생각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박근혜를 지지하고 남성이라는 이유로 현직 대통령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행위가 한 집단의 공통적인 입장으로 자리매김한다면 이건 더이상 개인의 장난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현상이 아니다. 이들의 원동력은 ‘혐오’에 기반하고 있다. 남성과 관련된, 남성이 포함된 거의 모든 집단을 향한 무차별적인 혐오. 현재 ‘워마드’가 가진 중요한 정서적 기반인 이 ‘혐오’의 집단화가 사회에 끼치는 해악은 그 어떠한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일베’로부터 현현하기 시작한 혐오와 편가르기의 정서는 ‘워마드’로 인해 특정 정치 세력의 차원에서 성별의 문제로 진화했다. 개인이 소신을 가지고 선택하는 정치성향과 달리 태어날 때 상당 부분이 결정되는 성 정체성을 혐오의 재료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워마드’의 현재 위치는 매우 서글프고 안타깝다.

‘워마드’의 구성원들이 자신을 페미니즘의 한 분파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큰 오류라고 할 수 있다. 페미니즘은 ‘워마드’가 해오는 방식처럼 편을 가르고 상대방을 혐오하고 깔아뭉개는 방식으로 발전해오지 않았다. 잘못된 사회 질서를 바로잡고 보다 나은 세상을 공유하기 위해 인류는 여러가지 이데올로기를 탄생시켰다. 그러한 목적의식 하에 발전되어 온 여러 시각 중 하나가 성적 차이로 인한 차별을 없애자는 목소리, 즉 페미니즘이다. ‘워마드’는 오히려 반(反)페미니즘적 시각을 가진 이들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으며, 페미니즘과 상충되는 개념을 공유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남성에 대한 혐오의 정서는 결국 여성에 대한 혐오의 정서를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다. 이것은 페미니즘에도 좋지 않으며, 양성평등의 방향성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이상향이 성적 차이로 인해 차별받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면, 극단적 여성중심주의가 나타내는 남성혐오 문화는 결코 그 해답이 될 수 없다.

상당수의 여성이 이러한 혐오의 정서에 편승하는 현상은 이들이 진정으로 혐오를 통한 남성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을 남녀 차별 극복을 위한 현실적인 대안으로 인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일베’가  유행할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한 성격의 단순하고 피상적인 본능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했노”라는 말투부터 특정 인물을 의도적으로 비하하고 희화화하여 조리돌림하는 과정까지, 올바른 사회화를 체득하지 못한 성인들의 집단적 퇴행현상이라고 볼만한 사례가 충분히 발견되고 있다. ‘워마드’가 내세우는 거의 유일한 존재 근거인 ‘미러링’이 (하필이면) ‘일베’를 그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한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일베’는 ‘남성 주류사회’를 대표하지도 않으며 페미니즘이 배척해야 할 남성주의적 정치성향을 가장 폭넓게 대변하는 단체도 아니다. ‘워마드’는 단지 ‘일베’가 발전시킨 집단적 혐오, 유아적 왕따의 정서를 도구적으로 차용하여 폭력의 대상을 상이하게 설정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워마드’가 ‘일베’를 혐오한다면, ‘미러링’의 조건대로 ‘워마드’ 역시 사라져야 할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셈이다.

2010년 이후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감정은 ‘혐오’의 정서다.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보다 결과적인 불평등을 납득하지 못해 상대방이 가진 것을 강제로 빼앗아오려는 배고픔의 정서가 혐오를 낳았다. 결국 이 사회가 조금 더 가난해졌기 때문에 발생한 사회현상이다. ‘워마드’로 상징되는 여성중심주의적 혐오의 정서는 이 사회에 발생하고 있는 다양한 혐오의 정서 중 한 예일 뿐이다. 이 외에도 공무원을 향한 분노, 정규직을 향한 분노, 장애인을 향한 분노, 성적 소수자를 향한 분노 등 다양한 방향과 크기를 가진 분노가 이 사회에 존재한다. 갈수록 한국에서 먹고 사는 것이 힘들고 피곤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그만큼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도 그만큼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씩 더 많이 미워하고, 더 많이 질투하고 있다. 한국이 살기 힘든 이유이자 이 사회가 더이상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회찬이 계속 생각난다

사연 없는 죽음이 어디 있겠냐마는, 투명한 유리 안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생중계하듯 살아온 유명인들의 죽음은 그만큼 더 극적으로 보일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명인의 죽음은 그 순간 잠시 서늘한 기분을 느끼고는 빠르게 증발해버리는 편이다. 유명인의 전시된 삶을 소비하듯 보아온 일반인들에게 그들의 죽음 역시 일종의 전시처럼 보여지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가끔 아주 오랜 기간동안 잊혀지지 않는 죽음이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다가도 문득 그가 생각나 울컥해지고, 우울해지고,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죽음이 있다.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는 무겁게 짓누르는 그런 죽음이 있다. 노무현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리고 요즘에는 노회찬이 자꾸 생각난다.

그가 하는 말들이 무척 인상 깊었다. 정치인 중 그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지금도 아무도 없다. 그가 만들어내는 비유는 참신할 뿐 아니라 날카롭기까지 해서, 그가 뱉은 말들을 후에 한참동안 곱씹어봐도 절묘하고 정확하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타고난 재능인지, 오랜 기간 노동운동을 하며 쌓은 경험이 좋은 재료를 제공해주는 것인지 궁금했다. 뉴스를 보며 답답해진 가슴은 그가 한마디 할 때마다 조금씩 시원해졌다. 소수정당에 소속된 한계가 그를 짓누를 때마다 안타까웠고, 그의 언행이 더 많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어쩌면 노무현처럼 그 역시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정치인이었을지 모른다. 삭막한 정치판에 한줄기 유머를 선사하는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었고, 이데올로기에 갇히지 않고 실제적인 소수자 보호를 위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끊임없이 내던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우리 사회가 그의 목소리에 조금 더 크게 호응해주었다면, 그의 유머에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웃어주었다면, 그의 날카로운 비판에 조금 더 큰 박수로 화답해주었다면, 어쩌면 며칠 전과 같은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의식이 마음을 짓누른다.

죽기 전 그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차마 짐작도 되지 않는다. 굳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했을까, 라며 안타까워 하는 이들이 많지만, 운동권 특유의 극단적 문화에 노회찬 고유의 강성함이 더해져 도저히 스스로를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겠다고 상상해본다. 그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 정도 되는 그릇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지만, 몹시 어지러웠을 그의 마음 자체를 최소한 부정은 하지는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가 많이 아쉽다. 그를 더 오래 보고 싶었다. 그가 조금 더 오래, 더 넓은 영역에서 많은 이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기를 바랐다. 그렇게 되지 못해 슬프고 슬프다. 마음 한구석이 계속 아려온다. 공무원의 신분이라 그에게 후원금 한푼 보내주지 못했지만, 마음 속으로 그를 계속 응원하고 있었다. 빗자루를 기타 삼아 흥을 돋우던 사진이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그런 정치인을 우리는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노무현이 없는 노무현의 세상이 조금씩 오고 있는 것처럼, 노회찬이 없는 노회찬같은 세상도 올 수 있을까. 계속 슬퍼온다.

이명박의 구속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영장이 발부되었고, 영장이 집행되는 과정을 많은이들이 생방송으로 지켜보았다. 페이스북에는 구속을 기념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도 보였고, 인터넷 상에서도 많은 이들이 기쁨을 표현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별로 기쁘지 않았다. 그가 최종심에서 충분한 수준의 형을 선고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구속수사를 받게 된 것은 충분히 소명되었다고 판단된 범죄혐의를 그가 적극적으로 부인하였고, 때문에 증거인멸 등에 대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실 구속수사는 불구속수사에 비해 수사의 용이성과 편의성이 조금 더 있을 뿐 법리적으로 그리 큰 의미를 가지는 형태의 수사는 아니라고 본다. 다만, 피의자가 영어의 몸이 되는 모습이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효과가 크기 때문에, 즉 일종의 전시효과가 있기 때문에 최근 대형 범죄의 경우 대부분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추세를 보이는 것 같다. 즉, 검찰은 일반 시민들이 시각적으로 느끼며 만족하는 ‘형벌’의 모습을 십분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마치 피의자가 이미 어느정도 심판을 받은 듯한 모습을 전시함으로써 향후 재판 과정에서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어가고자 하는 비법리적 전략이 깔려있다고 본다.

이러한 전략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 소환조사에서도 명백히 드러난 바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포토라인 앞에 선 모습 자체에서 치욕을 느낀 사람들이 많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검찰과 당시 정권에 대해 그러한 악감정을 가졌던 사람들 중 대부분이 이번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수사 방침에 환호성을 질렀다. 수사의 공정성과 정권의 정치적 목적, 사회정의와 같은 비법리적 요인들이 사람의 감정에 작용하는 과정 전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과연 이 사람들이 이 두 경우에 공정한 잣대를 들이밀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나는 대중의 이러한 심리에 복수심과 처벌에 대한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 과정에서 나타난 일부 집단의 기쁨의 표현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권과 검찰의 무리한 수사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강요당했다는 믿음 아래, 이러한 ‘비극’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앙갚음해주겠다는 복수심이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 복수심이 육체적인 형벌과 처벌로부터 시작한다는 근대적인 사고관에 기인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푸코가 여러차례 지적했듯, 현대사회에서의 처벌과 형벌은 육체에 대한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는 단계를 벗어나 사회로부터의 격리를 통한 사회 안전망 확보에 중점을 두고 있다. 잠재적 범죄자를 가둠으로써 사회를 안전하게 지킬수만 있다면 그 범죄자에게 따뜻한 밥을 제공하든 텔레비전을 틀어주든 사실 크게 상관할바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구치소나 교도소의 ‘호화로움’에 대한 비판이 유독 한국사회에서 강하게 제기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사회의 처벌에 대한 개념이 아직 근대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된다.

물론, 거액의 돈을 탈루하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 혐의를 강하게 받고 있는 전직 대통령이 구속수사를 받는 모습을 전시함으로써 사회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주장에는 적극 동의한다. 이것이 또다른 전쟁의 시작으로 기록될지 여부는 그쪽 진영 사람들의 울분이 어느 정도 수준일지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최소한 나는 이번 수사가 사회질서를 확립하는 데에 좋은 기여를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명박을 싫어한다. 그리고 그가 드디어 범죄혐의에 대한 수사를 받게 되어 매우 고무적으로 생각한다. 그가 대통령이 되던 시절 그에 대한 주변 친구들의 맹목적인 지지를 똑똑히 기억한다. 당시 이해할 수 없었던 광풍의 크기를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친구들 중 일부는 지금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고, 다른 일부는 적극적으로 ‘전향’하기도 했다. 돈에 대한 욕망이 집단적으로 합치되어 가장 저열한 형태로 발현된 상징체가 바로 이명박이다. 이 사회에 속한 우리 시민 모두는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를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것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 이번 수사는 그 책임의 시작일 뿐, 아직 그 어떠한 기쁨도 표출한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도 복수를 하고 싶다. 하지만 복수의 방식은 그들과 달라야 한다.

#MeToo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엉겹결에 반장을 맡게 되었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가 있을 당시 특목고의 고3 생활은 단조로운 자율학습의 연속이었다. 대부분의 수업은 취소되었고, 아이들은 수능공부에만 매진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반장이라고 해봤자 거창한 임무를 부여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나의 주된 임무는 자율학습 시간에 떠드는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는 일 정도였다. 수능을 앞둔 상태에서 모두가 예민했고, 자그마한 속삭임조차 거슬려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나 역시 수험생 중 한명으로 앞가림하느라 바빴기에 일을 크게 벌이지 않고 조용한 학업 분위기를 지속시키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어느날 밤 담임교사에게 입시상담을 받으러 갔던 여자 아이들이 울면서 교실로 돌아오던 그날까지는 그렇게 평범한 일상이 반복됐다.

그날 밤, 담임교사에게 불려갔던 여자아이들 중 일부가 교실로 돌아와 울음을 터뜨렸고, 다른 여자아이들이 그 주변을 둘러싸고 위로를 해주는 모습을 목격했다. 여자 아이들을 붙잡고 이것 저것 캐물었다. 그 중 나와 가장 친했던 아이 한명이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반장이니까 알려달라’는 대의명분에 몇가지 사건이 발생했음을 이야기해주었다. 어떤 여자 아이는 교사가 자신의 무릎에 앉으라고 명령했다고 했다. 다른 여자아이는 교사가 자신의 귓볼을 만졌다고 했다. 다른 여자아이는 가슴에 부착된 명찰을 똑바로 해준다며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댔다고 했다. 충격적이었다. 남자 아이들 사이에서도 욕이 터져나왔다.

그날부터 교실은 난장판이 됐다. 나는 ‘반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고, 정식으로 항의하는 절차를 밟았다. 물론 일개 학생이었던 나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어머니를 비롯해 피해자의 어머니들을 중심으로 공론화시켰다. 이후 꽤 오랫동안 수업에 거의 들어가지 못했다. 교장에게, 교감에게, 각종 보직 교사들에게 불려다니며 협박을 당했다. 가해 담임교사의 동료 교사들은 우리반에서 수업하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스승의 은혜를 모른다며, 어린 것들이 뭘 알겠냐며 혀를 끌끌 차고는 우리를 무시했다. 아이들의 서명을 받고 투표를 진행했다. 그 와중에 수능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일을 이렇게까지 크게 만들어야 하냐는 항의가 아이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 의견을 가장 먼저 낸 사람은 여자아이였다. 자신은 무관한데 왜 반 전체가 피해를 받아야 하냐는 문제제기였다. 학교측에서는 담임교사가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것 정도로 마무리짓자고 제안해왔다. 더이상 안되겠다 싶어 아버지들이 나서기로 했다. 방송국 간부도 있었고, 신문사 기자도 있었다. 결국 외부로 이 사건을 공개하지 않는 조건으로 학교측이 담임교사의 교체를 받아들였고, 그 담임교사는 같은 재단 내 남자학교로 보내졌다. 이후 그 교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해듣지 못했다.

이상이 내 인생에서 최초로 겪은 성폭력 사건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어린 시절 동네 할머니들이 “꼬추 한번 보자”고 추근덕거리는 것이 일상이긴 했지만, 그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같다) 이 사건은 현재 진행중인 #MeToo 움직임과 이를 둘러싼 사회적 공기를 축약해서 보여주는 하나의 일화다. 권력관계의 우위를 점한 남성이 열위에 있는 다수의 여성을 압력을 행사하여 추행했고, 이 사건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 결국 더 강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남성집단이 나서는 단계에서 해결되었다. 피해자 여성 다수는 이 사건이 퍼져 나가는 것 자체를 원치 않았고, 그 중 상당수가 문제의 해결 과정에서 극도의 수치심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이 사건에 의해 불필요한 피해를 받는다고 생각한 ‘방관자’들의 냉소적인 시선까지 견뎌야 했다. 구성원 중 다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피해자를 위한 서명을 모을 때에도 왜 자신의 이름을 포함시켜야 하냐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나는 이 사건 이후 거의 모든 종류의 권력에 대해 어떤 혐오같은 것이 생겼다. 아마 그 전부터 내재적으로 자리잡고 있었겠지만, 이 사건 이후 조금 더 노골적으로 권력과 그 권력이 탄생시킨 부조리한 관계 전부를 싫어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나보다 덩치가 큰 상대가 힘을 과시하려고 할 때 괜히 개기고 싶은 마음이 더 세진 셈이다. 그래서 대학교에 들어간 이후 학생회에서 실시했던 근거 없는 농활 동원에도 빠졌고, 군대에서 상관의 부당한 지시에 항의하다 거의 죽도록 맞을뻔 하기도 했다. 심지어 최근 세금을 전용하려는 상관의 지시를 따를 수 없다는 이유로 회사를 나오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나의 어줍잖은 ‘반골기질’은 각종 사회현상에도 투영될 때가 많은데, 대표적인 경우가 다수자에 의한,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목격할 때이다.

장애인, 성적소수자, 그리고 여성. 우리 사회가 가장 노골적으로 타자화시키고 매몰시켜 버리는 존재들이다. 그 중에서도 여성은 사회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사회적 소수자 집단이자 남성을 중심으로 공고하게 구조화된, 그래서 아예 일상이 되어버린 차별과 폭력에 만성적으로 노출된 집단이라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성폭력, 혹은 성추행이라고 불리우는 다양한 형태의 성적 학대 행위는 남성이 여성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저열한 형태의 차별이자 폭력 행위다. 아마도 우리나라 사회 구조에서 대부분의 남성은 최소한 한 명 이상의 여성보다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거나 더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회사까지, 심지어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 안에서까지, 한국사회에서 남성은 여성에게 권력 구조에서 우위를 갖기 매우 쉬운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남녀 간 발생하는 대부분의 성적 학대 행위는 권력에 의한 압력행사를 통해 이루어질 확률이 대단히 높다. 논리적으로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현실에서 대부분 그렇게 되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평범한 삶’을 살아온, 즉 여성이 남성에게 억압당하는 광경을 목격할 기회를 (어떤 이유에서든) 갖지 못하고 살아온 대부분의 남성들이 결코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남성들이 왜 그렇게 ‘어두워졌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만 하다) 그래서 [82년생 김지영]은 픽션의 영역에서 여성에 대한 만성화된 차별이 여성의 일생 전체에 걸쳐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음을 알린 시대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문학적 완성도를 논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나 퍽퍽한 삶이 여성에게는 평생에 걸쳐 일어난다, 라는 사실을 좀 알아라, 라고 선언하는 듯한 책이었다. 노회찬 의원같은 진보세력의 리더조차 이 책을 읽고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 있다고 할 정도다.

‘평범한’ 남성, 즉 ‘평범한’ 여성이 일상적으로 당하는 차별을 적극적으로 체감하지 못하고 살아온 남성에게 이러한 현실을 일깨우는 작업이 과연 ‘계몽’의 영역일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계몽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할 것이며, 계몽의 방법론은 사회적으로 어떻게 도출되어야 하는가.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반대로 많은 남성들이 ‘미투 운동’의 변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남녀차별은 당연히 추방되어야 하지만, 요즘은 그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는 것이다. 혹은, #MeToo의 탈을 뒤집어쓴 “가짜” 페미니즘이 사회적 아젠다를 주도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선구적으로 여성 차별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 JTBC의 뉴스룸에 출연한 한 여성 운동가가 저지른 위선적 행위를 비판하는 것이 대표적인 반론의 한 예다. 워마드나 메갈리아와 같은 페미니즘에 기반한 커뮤니티가 일베와 다를바 없다고 이야기하며 페미니즘 운동 전체가 폭력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혹은 현 여권 정치인에 집중되고 있는 성폭력 폭로 행위가 “공작”이라고 의심하기도 한다. 남성 대 여성의 편가르기가 점점 더 노골화되고 있다. 물론, 현재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페미니즘은 결코 완벽하지 않으며 크고 작은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여성은 남성만큼이나 멍청하다) 어떤 경우에는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이 학문의 영역이 아닌 종교의 영역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연구와 사색보다는 운동과 궐기의 형태로 페미니즘의 영향력이 발현되는 것을 걱정스럽게 보는 시각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위의 모든 주장과 걱정이 사실로 밝혀진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변하는 것은 없다. 아직 갈 길이 멀고, 지금 이것도 많이 부족하다. 얄팍한 권력관계를 이용해서 개인의 욕망을 해소해보겠다는 원시적인 생각은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부조리한 가부장적 유교문화의 핵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한국에 살면서 단 한번도 여성이 남성과 진정으로 동등한 위치에서 존재한다는 인상을 받지 못했다. 지금 이 핵심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MeToo 움직임은 망가진 시스템을 수리하기 위한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그 어떠한 예외도 없이, 권력의 우위에 선 자가 압력 혹은 위력을 행사하여 부조리한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회규칙이 이번 기회에 정립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결과론적인 평등이 아닌, 처음부터 정해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억압적 차별도 아닌, 특정 사회적 집단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정치적 구호가 아닌, 그저 남자는 남자로서, 여자는 여자로서, 그리고 제3의 성은 그 자체로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적 공기를 형성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의 임금수준을 동일하게 맞추는 식의 어리석은 결과론적 평등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식사를 따로 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유치한 펜스룰의 확산이 아니라, 성별에 관계없이 그 누구라도 자신의 가치를 추구함에 있어 성적인 차이에 의해 차별을 받지 아니하는 자연스러운 환경을 형성하는 것이 기본이다. 아마도 이것은 계몽의 영역이 아닌 반성의 영역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남성은 남성대로, 여성은 여성대로 역사적으로 여성이 억눌리며 살아오게 만든 사회적 불균등성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남의 탓을 하기 전에 자신이 혹여나 방관자였는지, 가해자였는지, 혹은 피해자였음에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는지, 한번 살펴보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 비뚤어진 권력관계가 낳은 부조리를 해결하는 방식이 더 높은 권력으로부터의 하향식 처벌이 되어서는 안된다. 애초에 권력에 도달하는 과정 자체가 공정했다면, 권력으로부터 발생하는 문제의 빈도도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유아인의 애호박과 ‘당신들의’ 페미니즘

최근 유아인이 SNS 상에서 불특정 다수의 누리꾼들과 벌인 설전이 화제가 되었다. 큰 의미를 부여할 일이 없는 단순한 말다툼이었다면 가쉽란의 한 꼭지를 차지하고 끝났을 일이지만, 사건의 발단과 전개, 그리고 마무리까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바람에 조금은 더 거창한 모습으로 비추어져 버렸다. 트위터를 하지 않는 내가 다른 곳들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담배와 트위터는 끊는게 아니라 잠시 참을 뿐이라지만 어쨌든 그쪽 세상에 발길을 끊은지 1년이 넘었다)  유아인을 특정한 한 트위터 계정이 “애호박”에 빗대어 유아인을 “친구로 지내라면 조금 힘들 것 같”은 사람으로 비유했고, 이를 유아인이 직접 인용한 뒤 “애호박으로 맞아봤음?”이라고 발언한 것이 사건의 시초였다. 이후 그 트위터 계정이 여성의 소유로 밝혀지며 여성에 대한 언어폭력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고, 유아인이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일이 커지게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사실 지저분하고 비논리적인 진흙탕 싸움이라 특별히 언급할 가치도 없고 의미를 부여할 이유도 없지만, 딱 하나 중요한 사실을 꼽자면 유아인과 그 반대편에서 유아인을 공격한 불특정 다수의 집단 모두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싸움판에서 훈수를 두는 사람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말과 글로 먹고 사는 구경꾼들이 달라붙어 유아인의 정신질환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의심하거나 “폭도”라는 단어 등 일부 표현에 천착해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의 차원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그 한 예다.

이 사건에 대한 균형잡힌 시선은 오히려 노동계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의 생각도 앞선 링크와 비슷한 맥락 위에 있다. 유아인을 여성혐오주의로 조리돌림하려는 시도는 부당하다. 또한 그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언어폭력행위는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과오였다. 그렇다고 유아인이 페미니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이번 사건에서 유아인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를 보낸 계층은 소위 남초 커뮤니티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활동하는 누리꾼 집단이다. 그리고 유아인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거두지 않은 계층은 그들과 대척점에 있는, 트위터를 중심을 활동하거나 여초 커뮤니티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활동하는 분리된 누리꾼 집단이다. 양쪽 집단 모두 편협된 사고와 부족한 공감능력, 그리고 성급한 일반화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었다.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성급히 대화상대를 적으로 돌릴 필요가 없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일이라고 경솔하게 무시해버려서도 안된다. 이해와 공감, 설득과 협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유아인의 ‘애호박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이 양성평등, 혹은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직도 많이 상이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이 갈등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 혹은 개념에 대한 이해가 상이하다는 점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페미니즘이 여성중심주의, 혹은 여성우월주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가부장적 남성중심 사회 ‘안에서’ 수정주의를 통해 점진적으로 양성평등을 실현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페미니즘 안에서도 다양한 입장과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다양한 생각을 아우르는 핵심적인 가치는 남성중심의 편향된 사회체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사명감이며, 이 핵심 가치 아래 다양한 의견과 입장을 이해와 협의, 논의와 양보를 통해 무리없이 추진해나가는 것이 페미니즘 운동이다. 하지만 최근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은 다양한 계층에 의해 상이한 모습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자신과 다르게 이해된 페미니즘을 일방적으로 부정하려고 하는 모습까지 보여지고 있다. 소수자 집단 간 연대의식을 거부한채 미러링이라는 방식을 왜곡되게 차용하여 언어폭력행위를 정당화한 일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커뮤니티의 과오를 억지로 껴안으려 한 여성운동권의 책임일 수도 있고, 그들의 일탈행위를 마치 페미니즘의 본질인양 호도하여 여성혐오주의로 맞받아친 남성중심 사회의 과오일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양쪽 진영 모두 편협함과 자기중심주의라는 공통된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르면 공부하라”는 엘리트주의도 배격해야 할 대상이며,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는 본질에서 벗어난 비난문구 역시 사라져야 할 논리다. 집단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그 어떤 폭력행위도 정당화되어서는 안되며,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기득권 세력의 자만심과 함께 비판의 주된 대상으로 상정되어야 한다. 소수자는 소수자와 함께 연대해야 하며, 지배세력에 속한 이들 역시 기득권을 내려놓고 그 연대의 선상에 함께 서야 한다. 운동은 반드시 전문적 지식의 습득으로부터 출발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꼭 정체성의 자각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공감과 이해, 설득과 합의의 과정을 통해 입장과 직접경험을 초월하여 훨씬 더 폭넓고 영향력 있는 운동이 시작될 수도 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때 창의적인 생각이 샘솟는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말이 된다고 한다. 나의 경우, 샤워할 때 떠오르는 창의적인 생각 중 대부분은 논문의 아이디어와 관련된다. 서울에서 생활하며 듣고 보고 겪은 다양한 사회현상을 잔뜩 얽힌 실타래처럼 집으로 가지고 오면 샤워를 하며 이 경험을 생각의 책장 속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분리해서 보관하는 셈이다. 요즘에는 사회적 소수자의 권리향상이 미치는 경제적 영향을 어떻게 계량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자주 한다. 물론, 내가 샤워를 하며 떠오른 아이디어 정도라면 이미 몇십년전부터 도서관에 책이나 논문의 형태로 보관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공헌할 정도의 지적 생산물이 나오는 과정은 번개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쌓아올린 공고한 지식의 탑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조금씩 기어올라가며 그 흔적을 손으로 더듬어 보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마침내 지식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아주 작은 돌덩어리 하나 정도 더 얹는 것으로 지식 생산의 소임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 확대, 혹은 양성평등의 제도적 확대가 거시경제변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은 놀랍게도 거의 행해지지 않고 있다. 경제학계야 말로 남성중심의 편향된 체계가 공고하게 자리잡은 대표적인 ‘기울어진 운동장’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들어 비로소 일부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자료를 사용하여 양성평등 문제를 경제학적 시선에서 바라보는 노력이 행해지고 있지만 아직 미약하다. 평생 먹거리로 삼을 만한 연구주제를 하나 큼지막하게 골라야 한다면, 박사학위 전공에서 살짝 벗어나 사회적 소수자의 경제적 지위와 관련된 연구에 힘을 보태고 싶다. 최소한 한국 사회에서, 나는 남성이자 이성애자이자 비장애인이자 고학력자이자 서울출생이자 서울거주자이자 아파트거주자인, 소수자로서의 차별 경험을 거의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다. 이런 내가 어디까지 소수자의 입장에 설 수 있는지 드러내는 것은 나 자신의 삶에서나 사회적으로나 의미가 아예 없는 실험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책임지지 않는 인터넷 대중

최근 ‘240번 버스기사 논란’이 인터넷을 후끈 달구었다. 결론은 버스기사의 책임은 없다는 것. 논란의 과정에서 가해자로 규명지을 수 있는 이들은 근거 없는 루머를 최초로 제기한 자와 논란의 중심에 있던 아이 엄마, 그리고 그 루머를 마치 사실인냥 퍼뜨린 이름없는 대중들. 피해자는 버스기사와 버스회사 정도가 되겠다. 가해자 중 실체를 특정당한 이들만이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는 모양새다.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비슷한 수준의, 혹은 더 심한 수준의 비난을 퍼부었던 이들은 모두 ‘아니면 말고’ 라고 얼버무리던가 익명성을 무기로 어디론가 숨어 마치 자신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듯 행동하고 있다. 트위터든, 유명 온라인 커뮤니티든, 페이스북이든 인터넷 공간은 모두 마찬가지다. ‘오해를 했다’라고 변명하고 자신을 아주 보잘것 없는 공범 중 하나로 포장하기엔 피해자가 느꼈을 ‘피해’의 상당 부분이 바로 이 불특정 다수의 인터넷 대중의 소문 부풀리기 과정에서 온다는 사실이 너무 크게 다가온다. 이들 중 아마 그 누구도 공개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법적인 책임이 돌아올 확률은 0%에 가깝고, 자신이 했던 것과 같은 방식의 사회적인 ‘마녀사냥’을 되돌림받을 가능성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라는 생태계가 이들을 이처럼 무책임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임을 느낄만한 경제적 유인을 제공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에 대해 실체를 특정할 수 있는 장치를 덧붙인다면 그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는 반대에 직면할 것이다. 개인의 자유가 침해당한다고 느끼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행해지는 발언이 집단적으로 축적되는 과정은 화장실의 낙서와는 차원이 다른 사회적 파급력을 가진다. 그저 배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고 하기엔 공개되는 범위를 제한할 수 없는 특징을 가짐과 동시에 특정인에 대한 비난의 경우 실제와 비슷한 수준의 피해를 입히기 때문에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는’ 법의 사각지대를 종종 만들어낸다는 분명한 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그저 자연적인 현상인냥 두고 보기에는 인터넷 익명성으로 인한 경제적 비용이 이를 제한하는데 다르는 경제적 비용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수의 자유를 제한할 것인가, 소수의 피해자를 보호할 것인가의 문제는 현대사회의 오래된 윤리적 고민거리이기도 하다. 인터넷의 경우 조금 더 적극적으로 소수의 피해자를 보호하는 쪽으로 정책이 움직여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또다른 사회적 이슈가 십대 청소년의 집단 폭력 문제다. 공교육이 무너져내린 후 손가락만 빨았던 ‘어른’들의 ‘방치’의 결과는 왕따를 넘어선 살인에 가까운 폭력행위다. 청소년법은 여전히 구시대적인데 아이들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어른의 폭력성을 습득해나간다. 인터넷 폭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 피해자는 신상이 공개되는데 반해 가해자의 대부분은 신상이 공개되지 않는다는 역차별의 문제가 있다. 법적으로 이것이 정의로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 특히 우리 사회의 경우, ‘책임을 지지 않는 개인’은 일종의 사회철학의 부재처럼, 혹은 사회적 질병처럼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거짓말을 서슴치 않고 새치기를 자랑스럽게 행하며 불법행위를 기꺼이 감수한다. 문제는 이것이 개인의 충동적 일탈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암묵적인 동의하에 지속적으로 용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터넷 폭력, 혹은 인터넷 상의 이지메 현상은 그러한 사회철학의 뒤틀림을 반영한 시대적 거울일 뿐이다. 법치국가에서 사법당국은 법을 통해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사회가 전체적으로 신경질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한숨만으로는 부족하다.

동성애혐오의 경제적 비용

동성애혐오 문제는 전세계적으로도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골치아픈 일이지만, 우리나라에 국한하여 동성애혐오자들의 정신세계를 탐구해보는 일은 나름의 독특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유교 근본주의, 불교 근본주의에 더해 개신교 근본주의까지 더해져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가 상당한 사회적 정당성을 부여받고 있는 실정이고 한발 더 나아가 동성애자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행위 등 실질적인 문제를 야기시키는 위험요인으로 발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내 일이 아니면 절대 나서지 않는다’는 한국인 특유의 국민성과 정책 당국자의 개인적인 ‘입장'(개신교 신자라던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 동성애혐오자에 대한 집단적이고도 강력한 대응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결국 연구자들이 앞장서서 한국식 동성애혐오론이 갖는 논리적 허구성을 적극적으로 논파해나가는 것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주로 심리학이나 사회학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경제학적으로도 접근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동성애혐오로 인한 경제적 비용을 추산하는 작업을 우선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미 캐나다에서 2001년 발간된 정책보고서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The Cost of Homophobia: Literature Review of the Economic Impact of Homophobia on Canada], submitted by Christopher Banks, submitted to Gay and Lesbian Health Service, 2001.)

위의 보고서는 동성애혐오, 혹은 성적소수자 혐오로 인해 성적소수자들이 받는 피해를 경제학적으로 추산한 작업들을 모아놓은 서베이페이퍼다. 방법론은 간단하다. 성적소수자에 대한 혐오로 인해 성적소수자들이 이성애자들과 동등한 의료혜택을 누리지 못할 때 발생하는 비용을 만약 이들이 동등한 의료혜택을 누렸다면 얻게 되었을 효과를 추정함으로써 역산하는 과정을 거친다. 환경경제학이나 보건경제학처럼 어떤 정책, 혹은 집단적 행위의 경제적 효과를 직접적인 통계자료로 추산하기 어려운 경우 주로 취하는 방법이다. 보고서는 성적소수자들이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진 혐오로 인해 “일반적인” 이성애자들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와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고  사회적인 장벽으로 인해 성적소수자에게 필요한 의료행위가 적시에 제공되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 사용한 지표는 자살률, 흡연률, 기대수명, 우울증, 실업률, 범죄율, 에이즈 발생률 등 8가지 항목이다. 보고서는 만약 호모포비아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성적소수자들이 나타내는 위 8가지 지표의 수치와  “일반적” 이성애자들의 수치는 통계적으로 유의한 수준에서 거의 동등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보고서에서 추정한 호모포비아의 연간 경제적 비용은 다음과 같다.

homiphobia costy

예를 들어 자살률의 경우, 2001년 캐나다 기준으로 호모포비아가 발생하는 경제적 비용이 약 8억달러 정도로 추산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즉, 호모포비아가 없었다면 더 적은 성적소수자가 자살했을 것이고, 이들이 만약 살아서 경제활동을 정상적으로 영위했을 경우 발생하는 경제적 순효과가 연간 8억 달러에 이르는 것이다. 이 결과를 두고 “동성애혐오자들이 우리나라 경제를 갉아먹고 있다!”라고 주장해도 사실 그리 크게 잘못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성적소수자의 ‘존재’ 자체만으로 사회에 발생시키는 경제적 비용은 정확히 추산할 수도 없을 뿐더러 아무런 논리적 근거도 없다. 성적소수자가 더 많은 범죄를 저지른다는 통계도 없고, 더 열등한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도 없다. 오히려 동성애결혼 합법화 등이 발생시키는 경제적 순효과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성적소수자들을 ‘양성화’시킬 때 그 사회가 부담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은 일부 종교인의 심리적 ‘불편함’ 정도일 것이다. 이건 거의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무시되어야 한다) 이에 반해 성적소수자들의 경제활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내고 이들에게 동등한 사회적, 의료적 혜택을 부여할 때 돌아오는 경제적 효과는 직관적으로 생각해도 상당한 수준이다. 더 나아가, 성적소수자와 같은 극단적으로 소외받는 계층을 사회적 장치 안으로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환경에서는 대부분의 소수자, 약자가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동성애자에게 사회적 혜택을 적극적으로 베푸는 사회가 빈민층이나 장애인에게 인색할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이다. 즉, 사회복지의 전체적인 ‘bar’ 자체가 한단계 높아지는 효과도 추가적으로 얻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와 비슷한 연구는 찾아볼 수 없다. dbpia나 kiss, kipris 등 국내 논문 검색 사이트에서 동성애 혐오를 경제적 효과와 연결짓는 논문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분명 누군가는 관심을 가지고 있을텐데 아직 발표가 되지 않은 것이라고 믿고 싶다.

책과 책장

책을 전시용으로 사용하는 순간부터 그 책은 시체로서 존재한다. 만약 당신이 지금까지 읽지 않은 책, 그리고 앞으로도 읽지 않을 책을 책장에 꽂아두고 다시 꺼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체가 썩어가는 모습을 음미하는 그릇된 도축장 주인의 심리와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외국서적을 관상용으로 구입한다”는 농담을 여러 사람들로부터 심심치 않게 들을 때마다 그냥 웃어 넘겼다. 그 정도의 허영심은 나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있을테니까. 다만 코엑스 별마당도서관과 한남동 북파크에 전시되어 있는 책들을 사진으로 접할 때마다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전시가 아니라 박제에 가까운 형태다. 책들을 방문객의 손에 닿지 않는 멀고 높은 곳에 위치시킨 이들이 노렸을 법한 수요층의 심리, 혹은 그 소비구조의 색깔을 헤아릴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책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아름다움을 지니지 못하는, 기표와 기의 간 관계가 온전히 성립하지 못하는 사물에 가깝다. 책 안에 들어 있는 활자들이 여러 사람에 의해 ‘읽혀짐’으로써 비로소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책은 아름다운 내용을 품고 있는 책이다. 못생긴 책은 못생긴 내용을 품고 있는 책이다. 책의 표지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것은 책에 대한 탐미가 아니라 책의 표지라는 디자인의 작은 분야에 대한 탐미다. 책의 내용에 접근하지 못하게 만든 공간이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차용할 때 느껴지는 절망스러움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소비의 본질 중 한 부분을 상징하는 현상이라면 단지 낙담하는 것만으로 끝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