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 당선, 합격, 계급

장강명
장강명의 최근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꽤 재미있게 읽었다. 젊은 세대라면 한번쯤 들어보았고 생각해보았을 “헬조선”을 중심으로 풀어낸 주제의식도 마음에 들었고 빠르게 책장을 넘기게 되는 쉽고 쫀득한 문체도 좋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기대 이상으로 치밀하다고 느낀 작가의 취재능력이었다. 공중에 5cm 정도 떠 있는 다른 한국 소설들과 달리 현실의 밑바닥에 바짝 달라붙어 그 까칠한 촉감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이 소설의 진면목이 작가의 치밀한 사전 취재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역시나, 기자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픽션이 아닌 논픽션을 신작으로 내놓았다는 소식에 적지 않은 흥미를 느꼈다. 그것도 공채와 문학상으로 대표되는 ‘고인 물’을 정면으로 파고드는 르포 형식이라니, 국내 유력 일간지 공채 기자 출신으로 굵직한 문학상을 다수 수상한 그가 작심하고 소위 ‘내부 총질’을 하는데 어찌 기대가 되지 않겠는가.

[당선, 합격, 계급]은 치밀하게 전개하고 명쾌하게 쏟아내는 좋은 논픽션이다. 여기서 ‘좋은’이라는 단어는 ‘사회적으로 필요한’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이 책은 저자가 과거에 속한 사회적 집단(대기업, 정부, 공기업, 언론사를 포괄하는 주류 대기업)이 내부 구성원을 선발하고 육성하는 대표적인 방식인 ‘공채’와, 저자가 현재 속한 사회적 집단(문학계)이 구성원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대표적 방식인 ‘문학상’의 이면을 파고들어 그 명과 암을 제대로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국사회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인재 선발 양식인 공채와 문학상에 대해, 저자는 그 사회적 장점 – 예컨대 공정성과 같은 – 을 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형태의 인재선발 방식이 한국사회의 전체적인 역동성을 해치고 있음을 다각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수많은 인터뷰와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극소수의 인원을 선발하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가 장기간 에너지를 낭비해야 하는 비효율성, 기업이나 문학상이 원하는 인재상과 그 선발 기준 및 절차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 비논리성, 그리고 선발되지 못한 이들이 감수해야 하는 배타성과 차별까지 조목조목 제시한다. 결국 이러한 선발 방식은 사회의 계급을 분화시키고 고착화시키는 역할만 할 뿐, 제대로 된 인재를 발견하고 키워내기 위한 적합한 방식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지방 정부의 말단 공무원으로 평생 일해야 하는 사람이 어려운 국사 문제를 ‘완벽하게’ 풀어야 할 이유는 없다. 몇 년 뒤 자신들의 먹거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삼성그룹에서 몇십년 뒤의 먹거리까지 책임질 인재를 몇십개의 시험문제로 선발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문학계와 영화계 등 예술계에서 폐쇄적이고 배타적으로 행해지는 ‘등단’, 혹은 ‘입봉’의 과정이 갖는 불합리성 역시 본질적으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극히 상대적이고 우연적인 이유에 의해 선정된 작가에게 부여되는 ‘등단’이라는 특혜와 그 이후 문학계의 주류 안으로 편입시켜 내부자(insider)로 활동하게 하는 사다리 걷어차기는 기본이고, 문학상이라는 ‘고시’를 통과하지 못한, 혹은 그러한 방식을 거부한 다수의 작가들에게 가해지는 배타적 차별 현상 역시 만성적이고 노골적이다. 이러한 부조리함은 변호사와 의사, 공무원 등 특정 시험을 통과한 후 ‘자격’을 획득한 사람이 능력 부족 등을 이유로 결코 소속집단에서 누락되지 않는 현상으로 이어지며, 더 나아가 이들의 능력이 공적으로 평가되고 취합되어 공개되는 과정이 암묵적으로 생략되는 현상으로가지 나아간다. 어떤 변호사가 승률이 높은지, 어떤 의사가 어떤 병을 잘 고치는지 일반인이 알기가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네이버 영화 평점처럼 정보의 비대칭성을 완화시킬 수 있는 ‘정보의 민주화’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문학계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문학작품이 자신의 취향과 맞는지 판단할 적절한 기준이 공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평론가의 서평은 너무 현학적이고 언론사의 서평은 칭찬 일색이다. 이 분야 역시 정보의 비대칭성이 강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사회적 비용의 증가 원인이 바로 ‘공채’와 ‘문학상’으로 대변되는 선별적이고도 차별적인 시스템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명확하고 중대한 문제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많은 사람들이 공채와 문학상이 사라지기를 바랄까? 저자는 그조차 어둡게 본다. ‘로스쿨 vs 사시’와 같은 사회적 갈등이 좋은 예다. 사람들은 공채와 문학상으로 대변되는 비합리적인 ‘과거제도’ 방식이 여전히 존치되기를 원하고 있다. 갖은 고생을 해서라도 그 장벽만 넘는다면, 사회적으로 어마어마한 혜택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노량진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수십만명의 젊은이들이 취업을 포기한채 공시에 집착하는 현상부터 “기대치를 낮추어 중소기업에 취직하라”며 중소기업의 연봉구조나 복지혜택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어른들의 행태까지, 이 사회가 조금 더 보잘것 없어지는 현상의 이면에는 개인의 이기심을 부추기는 공채와 같은 사회적 장치가 존재하고 있다.

친구 중 한 명은 대학 졸업 후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공채로 입사했다. 승승장구하던 그 친구는 최근 어떤 이유에서인지 임원으로 올라갈 길이 막혔다는 생각이 들자 심각하게 이직을 고민 중이다. 그 친구의 말에 따르면 오직 공채 출신만이, 그 중에서도 윗선으로 선택을 받아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만이 그룹의 관리를 책임지는 임원 레벨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지인 한 명 역시 대학 졸업 후 국내 대기업에 들어갔는데, 지금도 여전히 ‘임원 코스’를 밟으며 잘 나가고 있다. 그가 가진 소속 그룹에 대한 충성심과 자부심은 대단한 수준이다. 각종 비리에 얽혀 뉴스에 그 회사가 등장하는 것 따위는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못하는 듯 보인다. 어쩌면 이 두 명의 사례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들에게는 국내 대기업의 공채 시험을 통과하여 그 기업의 주류가 되었다는 ‘업적’을 굉장히 중요하게 평가했다. 아직 기업 내부에서 관리직급으로 올라가지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채를 통과했다는 결과만으로 이미 다수의 다른 한국인들과 자신을 가르는 어떤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이들의 삶에서 ‘계급’의 발생은 대기업에 입사할 즈음, 이십대 중반 정도의 젊은 나이에 이미 역동적으로 분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계급 안으로 입성하기 위해 이들이 치루어야 했던 공채 시험이 과연 정말 효율적인 시험방식이었는지, 혹은 심지어 공정한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의심해보지는 않았을 확률이 높다.

이들과 비슷한 방식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계급의 분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장강명은 공채라는 특수한 시험 방식을 통해 계급의 분화와 고착화의 핵심을 잘 꼬집고 있다. 나는 그의 생각에 거의 대부분 동의한다. 그는 이 사회의 역동성을 저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를 잘 짚어냈다. 그의 답답함이 책의 이곳저곳에서 절실하게 느껴진다.

박철수 | 박철수의 거주 박물지

거주박물지

[박철수의 거주 박물지]는 ‘아파트 공화국’ 한국이 가진 문화적 획일성 문제의 미시적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일종의 문화 고고학 서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파트라는 특수한 건축양식이 서울 전역을 뒤덮는 현상이 마뜩지 않고, 더 나아가 이러한 거주양식의 획일화가 어쩌면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적 양태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그러한 걱정을 확신으로 바꾸어주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서울이 아파트에 지배당하고 있고 한국사회가 서울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가정이 사실이라면, 아파트라는 건축양식의 변화추이 안에 내재되어 있는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코드를 읽음으로써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질병’의 근원을 조금 더 내밀하게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히 건축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사회변화상으로 압축하기에는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고 그 무게감도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책은 개인적으로 궁금해 했던 한국형 거주문화의 독특한 형태들, 예컨대 ‘확장형 발코니’라던가 다목적실의 흔적으로 남은 식모방  등의 역사적 유래를 친절하게 설명해줄 뿐 아니라 여의도 시범아파트와 같은 오래된 아파트에 남아 있는 과거의 유산들(장독대, 더스트 슈트(dust chute), 단지내 수영장 등)이 탄생하고 사라져간 연유를 다양한 인문학 레퍼런스를 동원하여 설명하고있다. 더 나아가,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욕망이 투영된 강남의 탄생, 그리고 국토건설 정책이 사회에 미친 광범위한 영향 등 거시적인 차원의 담화 역시 빼놓지 않고 포함시키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박철수의 거주 박물지]라는 책의 제목에 걸맞는 고고학적 기능을 충실히 이행할 뿐 아니라, 단순한 ‘화석의 전시’ 차원을 넘어 그 유물이 담고 있는 인문학적 배경을 통시성 있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꽤 무게감 있는 건축 현대사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설명하고자 하는 다양한 이슈들을 통해 몇 가지 공통된 시사점을 추려볼 수 있다. 첫째, 현대 한국 사회가 아파트라는 특수한 하나의 건축 형태에 경제적, 정신적으로 지배를 당하게 된 데에는 정책당국의 결정, 혹은 판단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정부가 강남을 개발하고 아파트를 주된 공급 단위로 삼게 된 경제적 유인에 동의하는지 여부와 상관 없이, 이 책은 우리 사회가 강남의 아파트 한 채에 모든 욕망을 쏟아붓게 된 가장 큰 요인이 박정희로 대표되는 6~80년대 독재정권의 개발 드라이브였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둘째, 해방 이후 급속하게 진행된 경제발전과 그 안에서 무실서하게 발생한 계급의 분화 과정 역시 현대 한국 사회의 아파트 신드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회사 관리자 등의 신 중산층 계급과 아주 빠른 속도로 재산을 증식한 신흥 자영업자를 시각적으로 ‘분리’시키기 위한 거주양식이 필요했고, 공급의 편의성 등 정책 당국의 경제적 유인과 맞물려 아파트라는 건축 양식이 강남을 중심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파트 신드롬, 혹은 강남 신드롬은 새롭게 탄생한 지배 계급과 편의성, 목적 달성 중심의 정책 당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탄생한 역사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다양성을 존중하고 과정 중심의 행동 양태를 추구하는 최근의 사회적 움직임은 여전히 강력한 경제적 유인을 내포한 강남-아파트 연결고리를 쉽게 깨트리지 못할 것이다. ‘힙스터’로 대표되는 젊은 소규모 자본가들이 을지로나 효자동과 같은 비(非)아파트촌 낡은 동네로 걸어들어가 새로운 문화 공동체를 가꾸고 다른 차원의 경제적 움직임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이러한 시도가 서울, 더 나아가 한국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아파트 등의) 부동산을 통한 재산 증식’ 명제를 뒤엎을 정도의 강력한 사회적 운동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이들의 움직임에 동조하는 경제적 수요는 여전히 니치(niche)한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이러한 대안적 문화 생산이 치솟는 임대료 등에 의해 연속성을 쉽게 확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시선을 거둘 길이 없는 것이다.

더 많은 ‘동네’가 아파트 ‘단지’로 대체될 것이며, 그 속도는 전보다 더 빨라질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왠지 정말 그렇게 될 것만 같아 속이 상했다.

김기찬 | 골목안 풍경 전집

골목안풍경전집
한국은 서울에 지배당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은 아파트에 지배당하고 있다. 우리는 서울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큼지막한 콘크리트 덩어리들 중 한줌의 구역을 손에 넣은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와 동시에 서울은 골목 안 풍경 팔이 장사로 돈을 벌고 있다. 아파트에 사는 젊은이들은 골목 안에 숨은 예쁘장한 가게와 이를 둘러싼 풍경을 사랑한다. 하지만 아파트에 사는 그들은 결코 골목 안의 세상에 소속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래서 서울은 노골적인 위선으로 가득차 있다. 서울은 골목 안을 사랑하는 척 하지만, 정작 그 골목 안의 풍경은 끝끝내 전시의 대상으로서만 취급될 뿐이다. 우리는 결코 아파트 바깥으로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채 살아가고 있다. 서울을 서울답게 만드는 곳이 경복궁 뒤로 숨은 효자동 골목과 홍대 번화가 뒤에 자리잡은 연남동의 작은 골목들이라고들 이야기하지만, 반포 자이 아파트와 압구정 현대 아파트의 유혹 앞에서는 모두가 가지런히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그런 곳이 서울이다. 공동체 의식은 무너지고 있고, 옛것과 새것 사이에서 서울의 정체성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서울은 몹시 빠르게 변화하는 곳이다. 다시 말하면, 아주 바쁘게 이곳저곳에 아파트를 세우고 있는 중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서울 안에 있는 골목들은 오늘도 쉼 없이 파괴되고 있다. 골목 안 풍경을 사랑하는 듯 위선을 떠는 한편 오늘도 바쁘게 옛 골목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도시가 서울이다. 속절없이 망가져버린 이 거대한 도시에서 콘크리트 한 줌의 은혜를 받으며 벽돌과 시멘트와 유리의 신에게 찬양의 기도를 올리고 있는 우리들은 골목 안 풍경에 대해 과연 무엇이든 이야기할 자격이 있을까.

김기찬의 사진집 [골목안 풍경 전집]은 1970년대부터 90년대 말까지 존재했던 서울의 중림동과 도화동, 만리동과 천호동 일대의 ‘골목’안 풍경을 담고 있다. 그곳에 빼곡히 자리잡았던 달동네 다세대 주택과 그들의 핏줄과도 같았던 골목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지금은 평당 가격이 2천만원을 넘기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그 공간을 차지하고 앉아있다. 김기찬의 사진들은 서울의 소중한 유산이었지만 아무도 보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골목길의 풍경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는 기록사진으로서의 가치도 대단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70년대부터 꾸준히 한 동네를 드나들던 한 사진가가 그곳에 살던 주민들과 나누었던 미묘한 ‘거리’의 유지에 있다. 사진은 때론 덤덤하게, 때론 친근하게 그곳에 살던 주민들을 비춘다. 주민들 역시 카메라의 존재를 굳이 신경쓰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렌즈에 눈을 맞추며 미소를 지어보인다. 허우샤오시엔의 영화 [빨간 풍선]에서 빠리의 이곳저곳을 떠돌던 풍선의 시선처럼, 김기찬의 시선은 자유롭게 골목 안 여기저기를 배회한다. 그 골목길이 재개발이란 명목하에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그라고 알지 못했을까. 사진가로서 사회적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골목길을 유랑한다. 멸종해가는 골목길에 대한 절박함을 알면서도 일부러 딴전을 피우듯, 그렇게 공기처럼 골목 안으로 흘러들어갔다가 기척도 없이 빠져나온다. 이 전집이 유독 짜릿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골목안 풍경 전집]은 중림동과 도화동 등 작가가 찾았던 공간들이 재개발로 사라진 뒤, 작가가 그곳에 살던 이들을 수소문해 다시 찾아 찍은 사진들에서 다른 차원으로 승화한다. 아랫도리를 벗어재낀 채 골목의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7살 꼬마는 청년이 되어 늙어버린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쪽방에서 몸을 반쯤 겹친 채 누워 자던 여섯 형제들은 무사히 성인이 되어 같은 동네에 오손 도손 모여살며 다음 세대를 키우고 있었다. 골목은 사라지고 공간은 잊혀져도,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계속 살아남아 생을 지속한다. 서울은 끊임없이 옛공간을 파괴하고 역사도 없고 맥락도 없는 새로운 건물들을 쌓아 올리는데 열중하고 있지만, 파괴된 옛공간에 살던 사람들은 그 공간을 마음으로 기억하며 다음 세대로 전이한다. 지금 그나마 남아있는 서울의 옛 골목들에는 젊은 소규모 자본가들이 들어와 서울의 옛모습과 미국의 힙스터 문화를 적절히 섞어 만들어낸 ‘흉내’로 돈벌이를 하고 있다. (물론, 지방은 그런 서울의 모습을 한번 더 ‘흉내’내며 문화적으로 기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래 역시 한국에선 서울이 최고다!”라는 쓴 농담을 할 수밖에 없다) 문화적으로도 배척받고 경제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7,80년대 골목 안 풍경은 그렇게 기억 속에서만 살아남도록 강요받고 있다. 김기찬의 사진집은 이런 이유에서든, 혹은 저런 이유에서든 소중하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책이다.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 변방의 사운드: 모더니티와 아시안 팝의 전개 1960~2000

변방의사운드
신현준 교수가 진행하는 다양한 형태의 글쓰기 프로젝트를 좋아하고, 또 지지하는 편이다. 그가 청년 시절 쓴 [얼트문화와 록 음악] 등의 책을 읽으며 십대시절을 보냈으니 어쩌면 나의 지지성향은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편애를 탄생시킨 보다 중요한 이유는 그가 진행한 프로젝트가 갖는 사회적 가치, 혹은 시의성에 기인한다. 그는 미국 대중음악의 한 조류를 실시간으로 분석한 거의 최초의 평론가였고([얼트문화와 록 음악]), 힙스터 문화의 일부분 정도로 취급될 수 있었던 6,7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으며([한국 팝의 고고학] 시리즈), 음악의 범주를 벗어나 문화적 다양성을 보호하기 위한 시도([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를 하기도 했다. 즉, 그는 문화적 주체성이라던가 문화와 사회가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내는 무형의 가치에 주목하여 이러한 가치가 갖는 동시대성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가 속한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가 기획하고 펴낸 [변방의 사운드: 모더니티와 아시안 팝의 전개 1960~2000]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한 책이다.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대중음악이 어떻게 출발했고 또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한 눈에 조망해보자는 것이 이 책의 출판목적이라면, 단 한 권의 책에 그 방대한 역사를 균일하고 정밀하게 담아낼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 역시 기획 단계에서부터 충분히 예상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대중음악이라는 거대한 하나의 산업은 하나의 국가 내에서도 그 층위가 촘촘하게 나뉘어지기 마련이고, 국가별 저자의 시각 및 성향에 따라 선별적이고 편파적인 기술이 얼마든지 가능한 글쓰기 환경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언더그라운드 문화에만 집중하여 대안적인 사운드의 진화과정만 기술할 수 있고, 또 다른 이는 정치, 사회적 분위기가 대중음악 산업에 미친 전반적인 영향을 고려하여 글을 쓸 수도 있다. 이러한 한계를 충분히 인지한다면 이 책의 시도 자체가 그리 어리석어 보이지 않는다. 아시아를 “변방”으로 규정하며 시작한 이 모음집은 아시아 국가들이 서구사회의 팝 문화로부터 받은 지대한 영향을 부정하지도 않고,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겪은 냉전과 독재라는 어두운 사회분위기가 미친 절대적인 영향력을 과소평가하지도 않는다. 동시대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거울과 같은 성질이 대중음악이라는 상품이 갖는 본질 중 하나라면, 이 기획에 참여한 저자들은 그러한 본질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데에 인색함이 없다.

일본과 중국이라는 ‘큰’ 나라들이 음악산업에 있어서도 상대적으로 더 많은 주체성을 담보할 수 있었다는 점이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흥미로운 지점인데, 어쩌면 정치 및 경제 면에서 드러나는 ‘덩치’가 개별적인 문화산업의 발전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심증을 확보한 셈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과거 제조업 등에 기반하여 선진국을 ‘캐치업’하는 것이 경제적 필살기였던 이 나라는, 음악산업에 있어서도 이러한 캐치업 효과를 극단적인 차원에서 활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돌 문화를 연구하는 많은 이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현재 케이팝의 전세계적 성공이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 즉 ‘2등 중 최고의 2등이 되자’는 정서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이 나라는 혁신과 같은 창의성이 완전히 부재한 상태에서 외부로부터 주어진 ‘1등’의 모범적 사례를 비틀거나 발전시켜 나가며 경쟁력을 확보하는 틈새전략으로 생존해온 나라다. (예를 들어 서울을 보라. 이 곳에는 정말 맛있는 음식들이 많지만, 그 중 그 어떤 음식도 ‘서울만의’ 음식은 아니다) 아이돌 문화, 혹은 케이팝 컨텐츠도 이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말 흥미로운 것은 ‘1등’마저도 결국 이 아름답고 완벽한 ‘2등’에 홀딱 빠져버렸다는 역설이지만.

필립 글래스 | 음악 없는 말

필립글래스
필립 글래스의 자서전 [음악 없는 말]을 읽다 보면 패티 스미스의 자서전 [저스트 키즈]를 떠올리며 비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970년대 이후 뉴욕이라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공유하는 이 두 뮤지션이 뉴욕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음악가로 자리매김했을 뿐 아니라 현대 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기 거대한 인물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지만, 전업음악가로 살게 되기 전까지, 즉 공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전까지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기록에서 미묘한 호흡, 혹은 자세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글래스와 스미스 모두 가난한 젊은 시절을 견디며 음악가로의 꿈을 놓지 않았지만, 스미스의 경우 특유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통해 가난이라는 삶의 밑바닥을 스프링처럼 한단계 위로 도약하는 계기로 삼은 반면, 글래스는 음악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생계유지 수단으로 가난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두 뮤지션의 삶의 궤적이 달라지는 변곡점을 발견할 수 있다.

글래스의 삶이 인상적인 것은, 매순간 배움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는 점이다.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공부를 시작하기 위해 시작한 막노동일은 나디아 불랑제와 라비 샹카르라는 두 스승을 사사하는 과정을 지나 뉴욕에서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또 돈이 되지 않는 작곡일을 하는 음악가로서 삶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속된다. 음악가가 흔히 가질 법한 과잉된 자의식은 최소한 500쪽이 넘는 글래스의 자서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밤 늦게까지 택시운전을 하고 새벽에 작곡을 하며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는 그의 중년의 일상은, 꼭 필요한 가구만이 존재했던 그의 집처럼, 혹은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보는 듯한 그 당시 글래스의 미니멀한 작풍처럼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조용하지만 맹렬하게 달려간다. 마치 꼭 필요한 최소한의 근육만을 남긴채 모조리 포기한 마라토너의 깡마른, 하지만 단단한 몸을 보는 것과 같은 삶이다. 책에 등장하는 당시 뉴욕을 주름 잡던 예술가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도 글래스는 지나치게 겸손하지 않은, 하지만 지나치게 자만하지도 않은 자세를 유지하며 그들로부터 끊임없이 에너지를 주입받고 가르침을 청한다. 그렇게 하나의 작품을 올리기 위해 몇 년을 고생하지만 남는 것은 얄팍한 명성과 결코 가볍지 않은 빚더미 뿐. 수많은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음악가로서의 삶 자체에 감사하며 천천히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글래스의 삶이 숭고하게 느껴지는 순간은 역설적으로 그가 다른 많은 이들과 비슷한 일생을 살아온 평범한 인간으로 받아들여질 때이다. 일상의 매순간을 충실히 살아가면서도 음표 하나, 화음 하나에도 깊은 사유의 끈을 놓지 않고 고민하며 수십년을 살다보면 결국 언젠가 전세계가 인정하는 거장이 된다는 진리를, 글래스는 그 어떤 화려한 수식어와 과장법을 동원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자신이 걸어온 길을 기술하는 것만으로 증명하고 있다. 자신의 삶 자체가 하나의 증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인 것 같다.

박원순 | 나는 가드너입니다

나는가드너입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 밖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는 삶을 살아온 나조차 흙 위를 걸을 때의 반가움과 꽃향기를 맡을 때의 황홀함에 본능적으로 익숙해져있는 것을 보면, 자연이 인간에 속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에 속한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된다. 시멘트와 콘크리트로 뒤덮혀 온전한 흙길을 발견하기 쉽지 않은 현대 도시 안에 가지런히 박제된 나무와 꽃들의 모습은 그러한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려는 인간의 이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 같아 마냥 좋아보이지만은 않는다. 식물이 살 수 없는 환경에 억지로 식물을 가져다 놓고 오로지 인간을 위해 전시한다는 의미에서 현대의 동물원을 볼 때의 불편함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아내가 꽃을 좋아해 가끔 꽃을 한다발씩 사다주고는 하지만, 우리가 꽃병에 꽃을 꽂아놓고 감상하는 행위는 사실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식물이 완전히 숨을 완전히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뿜어내는 고통과 탄식을 애써 무시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인간은 식물을 사랑한다. [나는 가드너입니다]의 저자 박원순이 에필로그에 적은 문구처럼, 인간은 본능적으로 식물에 끌리게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상의 여러 덕후들과 마찬가지로 식물에 미친 식물광또한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지은이는 원예학과를 졸업하고 한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던 중, 원예와 식물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못한 채 아내와 딸을 이끌고 제주도의 한 식물원으로 향한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가드닝을 좀 더 체계적으로 배워보고자 세계 최고의 식물원 중 하나인 롱우드 가든(Longwood Gardens)으로 떠난다. [나는 가드너입니다]는 지은이가 가족을 한국에 남기고 홀홀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롱우드 가든에서 1년동안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 책이다. 책의 속지는 초록색과 흰색, 두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초록색 속지에 적힌 글에서는 가드너로서의 전문가적 지식을 바탕으로 롱우드 가든의 이곳저곳을 설명하고 있다.  흰색 속지에 적힌 글들은 조금 더 캐주얼한 일기 형식으로 적혀있다. 낯선 미국생활에서 느끼는 외로움부터 덕질의 대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함께 일할 때 느껴지는 기쁨까지 식물과 가드닝에 얽힌 다양한 감정들이 기록되어 있다. 타지로 유학을 떠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은이의 고된 유학생활기에 더 큰 관심을 보일지도 모르겠다.

지은이가 롱우드 가든에서 배운 가드닝은 현대사회가 식물을 대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인간의 눈에 보기 좋게 하기 위해 잘 자라고 있는 부분을 잘라내고, 인간이 보고 싶은 모양을 만들기 위해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배양을 한다. 원래 꽃을 피우는 시기에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보고 싶은 시기에 꽃을 피우도록 식물을 “속이기”도 한다. 지중해에서만 자라는 식물들은 춥고 건조한 펜실베이나의 온실에 잘 마련된 가짜 지중해식 기후 환경에서 계속 성장해야만 한다. 지은이는 이러한 인위적인 식물배양에 대해 아주 짧은 고민만을 한 뒤 이내 그 화려한 결과물에 대해 장황할 정도로 찬양을 늘어놓는다. 결국 자연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더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었으니 좋은게 아니냐는 논리가 기저에 깔려있다. 요즘 인간들이 꽃을 대하는 방식의 전형이라 지은이만을 탓할 수도 없고, 나 역시 그러한 환경을 적극적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으므로 돌을 던질 자격이 없을 것 같다. 인간이라는 신분 자체가 원죄일지도 모른다.

지은이는 이후 롱우드 가든과 델라웨어 대학이 공동으로 개설한 2년짜리 대학원과정까지 마치고 귀국하여 현재 에버랜드에서 가드너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배워온 ‘선진’ 가드닝 기술이 한국의 정원에도 충실히 이식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에버랜드와 롱우드가든에는 아직 가보지도 못했지만, 한국의 산과 들에 흐드러지게 핀 들꽃이 마냥 예뻐보인다. 그 모습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고 믿기 때문이다.

장상미 | 지금은 없는 동네: 옥수동 트러스트

[지금은 없는 동네|옥수동 트러스트]는 필자 장상미가 운영하던 위치 기반의 사진 기록 저장소웹사이트를 책자 형태로 정리한 결과물로 보인다. 옥수동 13구역은 성동구 옥수동의 윗쪽 끝자락에 붙어있는 지역이다. 이 구역은 2011년 9월 재개발이 시작되어 2016년 11월 ‘e편한세상 옥수파크힐스’라는 이름의 대규모 아파트단지로 탈바꿈되었다. 재개발이 되기 전 이 구역으로 필자인 장상미가 입주했을 당시 그녀는 전세 보증금 1,500만원으로 반지하방을 구할 수 있었지만, 지금 옥수파크힐스의 가장 작은 평수대 아파트를 한채 구입하려면 8억원이 넘는 돈이 필요하다. 금액으로 환산된 가치의 간극만큼이나 필자가 남긴 사진 속에 존재하는 동네의 이미지와 현재 같은 공간에 세워올려진 마천루의 이미지는 몹시 달라보인다. 낡은 칼국수집과 이발소 사이에 자리잡고 누워 인간과 체온을 나누었던 길고양이들의 행방을 묻는 것조차 사치로 느껴질 정도로 지금 그 공간에 사는 사람들의 계급과 그곳을 떠나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의 계급 사이에는 차가운 금속과 콘크리트, 시멘트 따위만이 빼곡히 존재할 뿐, ‘동네’가 던져주는 따스한 느낌은 찾아볼 수 없다.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는 강제이주계획은 오래된 도시 서울이 그나마 가지고 있는 마지막 미덕인 커뮤니티의 역사조차 영(0)으로 돌려버리는 자본주의의 파괴적인 면모 중 하나다. 서울에서 그나마 아름다운 동네는 대부분 달동네들이다. 그곳을 개발하는 유일한 방식이 ‘완전히 밀어버리고 아파트를 올리는’ 것 뿐이었는지,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배려하는 방법은 없었는지, 도시계획쪽 전공이 아닌 나는 뻔한 답이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우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옥수동 바로 옆에 위치한 금호동이다. 인구의 90% 이상이 아파트에 거주하는 옥수동과 달리 금호동은 예전부터 존재했던 달동네와 새로 들어서는 아파트가 어지럽게 혼재되어 있다. 가판대가 널려있는 금남시장과 장진우가 새로 문을 연 식당이 같은 골목에 위치해 있고, 고급 외제차가 쉴새없이 쏟아져나오는 신축 아파트 바로 옆에 바다이야기 따위를 취급하는 성인오락실이 성업중이다. 이곳도 곧 옥수동처럼 변할 것이다. 수십년 자리를 지키던 나이많은 이들이 얼마의 돈을 받고 다른 곳으로 떠나갈 것이다. 금호동이 간직했던 역사는 콘크리트 밑에 파묻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사라질 것이다. 이 책의 필자와 같은 사람이 금호동에 한명이라도 있다면, 몇 장의 사진 정도로 금호동의 역사를 기억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게 너무 많은 역사들이 가볍게 취급되고 있다. 도시의 역사는 이보다는 조금 더 중하게 기억되어야 한다.

켄지 요시노: 커버링

커버링
사회적으로 보호해야 할 소수자 집단 중 대표성을 가지는 집단을 꼽아보자면 여성, 장애인, 소수인종, 성적소수자 정도가 있을 것이다. 이들은 어느 나라에나 반드시 존재하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완전히 평등한 대우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 동성애자 결혼이 합법화되고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금지법이 강화되는 등 국가에 따라 이들에 대한 법적 보호장치가 선진화되는 흐름을 엿볼 수 있지만, 한국을 비롯한 많은 사회에서 이들 소수자 그룹은 아직도 다양한 차원의 차별을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다. 소수자에 대한 ‘보호’와 ‘차별’의 개념이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지고 있음을 염두에 둘 때, 소수자 집단에 대한 보이지 않는 억압이 시대적으로 어떻게 변화, 또는 진화해왔는지 관찰하는 작업은 소수자 보호를 위한 법적 장치를 마련한다는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켄지 요시노는 일본 출신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생김새는 영락없는 아시아인이었던 요시노는 미국에서 정규교육을 받았지만 부모의 방침에 따라 방학마다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의 문화도 익혀야 했다. 다문화 사회에서 소수인종이 받는 차별보다 요시노에게 개인적으로 더 중요했던 것은  성적 정체성 문제였다. 남들과 다른 성정체성을 부모를 포함하여 그가 속한 사회에 고백하는 과정에서 그는 집단 내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억압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후 하버드, 옥스퍼드, 예일 등에서 수학한 뒤 성공한 법학 교수이자 유명 소수자인권 활동가로 살아오며 요시노는 소수자의 민권을 억압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폭력에 천착하게 되었고, 그 고민의 결과를 일반 대중을 위해 쉽게 풀어쓴 첫번째 저작이 바로 [커버링]이다.

이 책에 따르면 ‘커버링(covering)’은 비주류, 혹은 소수로 낙인찍힌 개인에게 사회가 가하는 억압의 세번째 단계다. 첫번째 단계는 ‘전환(conversion)’의 요구다. 비교적 최근까지 동성애는 의학계에서 정신질환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동성애가 치료 가능한 대상이라는 의미였기에 당시 많은 동성애자들이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이성애자로 전환되는 ‘치료’를 받아야 했다. 동성애 행위는 불법으로 인식되었고 동성애자들은 공개적으로 처벌받았다. 이후 의학계를 중심으로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사회는 동성애자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서 ‘존재의 인식’까지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억압의 두번째 단계는 그래서 ‘패싱(passing)’이다. 최근까지 논란이 되었던 미군내 규율인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 규정이 대표적인 패싱 사례다. 이는 군내 동성애자를 식별하기 위한 공식적 조사행위를 금지하되,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군인에 대해서는 불이익을 감수하라는 규정이다. 패싱은 주변에 소수집단이 존재함을 알고 있지만 그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회적 욕망의 그릇된 발현인 셈이다. 이 패싱으로 인해 많은 소수자들이 명시적인 피해를 감수해야 했고 법은 최근까지 이 패싱을 옹호해 왔다. 이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사회적 욕구가 거세지고 소수자들의 집단적 행동과 이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더해져 소수자들이 다수자들과 명시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무르익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태어난 세번째 억압의 단계가 바로 커버링이다.

커버링은 조금 더 교모한 형태로 행해진다. 소수자를 명시적으로 차별하지 않지만, 소수자로 하여금 그가 속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동화되기를 강요한다. 노멀(normal) 동성애자와 퀴어(queer) 동성애자 집단 간 논쟁이 좋은 예다. 노멀 동성애자는 동성애자 간 결혼의 합법화를 지지한다. 결혼이라는 사회적 관습을 차별없이 동등하게 누리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쪽이다. 퀴어 동성애자는 역사적으로 결혼은 이성애자 간 결합을 사회적으로 용인하는 편향된 사회적 장치로 기능해왔으므로 이를 적극적으로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성애자만의 사회적 표현이 존재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쪽이다. “너는 참 여성스럽게 행동하는구나. 자연스러워”와 같은 말도 커버링을 강요하는 폭력의 한 형태가 된다. ‘여성스러움’을 은연중에 강조함으로써 여성이라는 소수자의 고정관념을 떠안기를 강요하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커버링의 사회적 결과는 조직 내 관리자급 이상의 직위를 획득한 여성 중 상당 비율이 출산 경험이 없다는 통계 자료에서 잘 드러난다. 사회적으로 남성과 동등한 수준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출산을 포기해야 하며, 이렇게 출산(‘여성의 고유한 역할’)을 포기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낮은 단계에 머물 수 밖에 없다는 주장 역시 그래서 커버링의 한 형태가 된다. 아이를 낳고 낳지 않고는 전적으로 개인의 영역에서 결정될 사안이다. 그리고 그 결정과정에서 사회적 억압이 존재하면 아니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소수자 개인과 그가 속한 다수자가 지배하는 사회 사이에 맺어지는 불평등 계약관계를 조망하며 다양한 판례를 예시로 제시하고 있다. 미국 판례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아주 가끔 일본의 판례도 등장하긴 한다) 우리나라의 상황에 직접적으로 대입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현재 더 교묘하게 진행되고 있는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정에 법적장치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이 긴장관계를 완화해야 한다는 저자의 의지는 확실히 읽을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는 방식을 통해 논리전개과정을 보다 쉽게 전달한다. 그의 경험과 판례를 번갈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전환-패싱-커버링으로 이어지는 억압의 세 단계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큰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는 빈약하다. 2006년에 처음 발표된 이 책에 이어 요시노는 2016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세번째 책인 [Speak Now: Marriage Equality on Trial]을 발표했는데, 아마도 이 책에서 젠더 이슈를 조금 더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나 싶다. [커버링]은 소수자 개인에 대한 사회적 억압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다수자를 위한 책이다. 체험하지 않았기에, 체득하지도 못한 다수자는 광범위하게 행해지는 이러한 폭력행위에 대해 최소한 글을 통해서라도 이해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동성애에 대한 혐오, 소수인종에 대한 멸시, 여성에 대한 억압, 장애인에 대한 무시가 너무나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는, 소수자 민권의 사각지대와 같은 나라다. 다수자들의 반성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커버링]은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지적으로 아주 잘 쓰인 책이다.

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bellhooks
저명한 페미니즘 이론가인 벨 훅스(bell hooks)가 쓴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이론의 개론서라기 보다는 페미니즘 운동의 선언서(manifesto)처럼 읽힌다. “페미니즘은 ~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라는 분석적 문장보다는 “남성은~ 여성은~ ~해야 한다”의 형식을 갖는 정언명령적 신념이 느껴지는 문장이 훨씬 많이 존재하는 책이다. 아마도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게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다’라는 정의로부터 출발하여 이 정의를 확장시키는데 집중하는 이 책이 가진 태생이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는 하나의 ‘운동’에 대한 개괄서로 충실히 기능하고 있다. 때문에 학문적인 엄밀성, 혹은 중립성을 이 책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오히려 수필에 가깝게 읽힌다. 먼저 벨 훅스가 주장하는 페미니즘이 이룩한 대부분의 성취는 아무런 자료로 뒷받침되지 않고 오로지 훅스와 그 주변 사람들의 경험에 의존한다. 주장에 대한 근거를 상상력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학자로서 벨 훅스가 받는 대부분의 비판 역시 이러한 모호성에 기인하고 있다. 그녀의 책에는 주석이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학문적 전문용어(jargon)가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최대한 많은 대중에게 읽혀지기 위해서” 이러한 글쓰기 방식이 고수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녀의 책을 읽는 대중의 수준을 – 전문용어의 장벽을 넘을 수 없을 정도로 – 낮추어 보는 것 아니냐는, 즉 학자적 엘리트주의의 기형적 발현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학문적 전문용어는 미세한 차이조차 뭉뚱그려 대충 넘어가지 않으려는 학자적 완고함에 기인할 뿐이다. 상아탑에 스스로를 가두고 일반인의 접근을 차단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는 주장은 지나친 비약일 수 있다. 어쩌면 이제 주류 페미니즘 학계에서 비주류로 밀려난 노학자가 더이상 동료 학자를 상대로 글을 쓰지 않고 대중을 상대로 글을 쓰기 시작할 때 가장 손쉽게 택할 수 있는 옵션이 이러한 방식의 글쓰기일 것이다.

또한, 이 책은 ‘혁명적 페미니즘’의 시선에서 쓰였다. ‘개혁적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도, 혹은 남성중심주의와 함께 이 책에서 주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저자와 다른 생각을 가진 페미니즘 운동은 “기회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페미니즘의 실천은 상호성의 토양을 만드는 우리 사회의 유일한 사회운동이다”라는 저자의 주장이 무색해지는 순간을 자주 마주치게 될 정도로 적대적인 자세를 견지한다. 책을 읽으면서 이것이 어쩌면 페미니즘이 가진 한계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차별주의’ 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정의된 벨 훅스의 페미니즘은 반대하는 대상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상대적 개념에 가깝다. 혁명적 페미니스트는 현 체재를 전복시키고 페미니즘에 근거해 새로운 시스템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유토피아적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교한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더 나아가 혁명적 페미니즘이 반대한다는 ‘성차별주의’에 대한 정의, 혹은 자세한 묘사가 생략되어 있다는 점 역시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반대할 대상이 구체적일수록 목적은 분명해지고 공격은 정교해진다. 성차별주의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자세히 알기도 전에 선동적 문구에 의해 고무를 당하면 어리둥절해질 뿐, 쉽게 몸과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많은 이들에게 널리 읽혀질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전세계에 만연해 있고 우리나라에도 뿌리깊게 박혀있는 부조리한 남녀 불평등 구조를 깨기 위해 페미니즘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야 할 사회적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 유일한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페미니즘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보다 존재하는 세상이 훨씬 더 살만하다는 생각에는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82년생 김지영’들이 오늘도 고군분투하며 유리천장에 머리를 찧고 있다. 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페미니즘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은 세상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남녀 차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하는 좋은 프리즘으로 작동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벨 훅스가 이 책에서 보여주는 신념은 페미니즘이 자만에 빠지지 않게 만들어주는 좋은 채찍질과도 같다. 페미니즘은 계급투쟁과 인종차별 반대운동을 거친 서구사회가 투쟁 속에서 노골적인 남녀차별을 경험한 뒤 발생한 역사적 부산물이다. 때문에 백인, 중산층, 지식인에 의해 초기 페미니즘이 주도될 수 밖에 없었고, 노동계급, 유색인종, 저학력계층은 초기 페미니즘 운동에서 주변에 위치할 수 밖에 없었다. 벨 훅스는 초기 페미니즘이 가지고 있던 계급적, 인종적 한계를 극복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 페미니즘은 외연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이 책은 페미니즘이 현 시대에 당면하고 있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안, 혹은 비판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마지막 두 장에서 ‘영성’과 ‘교육’으로 성급히 결론내릴 때 힘이 약간 빠질 정도였다) 그 대신 벨 훅스와 그 주변인들이 성취한 운동의 성과물을 나열하고 그 결과 훅스가 갖게 된 신념의 뿌리가 무엇인지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훅스의 이론 자체가 페미니즘의 역사와 함께 한다면, 그녀가 가진 페미니즘에 대한 신념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이 페미니즘 운동이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하는 데에 약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패티 스미스: 저스트 키즈

저스트키즈
패티 스미스(Patti Smith)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보았을 때 시대를 읽을 수 없었다. [Horses]가 70년대 중반 발표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깜짝 놀랐고, 그녀가 당시 서른살에 가까운 나이었으며 나의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았다. 그녀의 음악은, 그녀가 풍기는 아우라는 시대를 지워버릴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나는 패티 스미스를 시대를 앞서나가다 못해 시대를 다시 정의내린 전설적인 뮤지션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녀는 뛰어난 시인이자 퍼포먼스 아티스트, 혹은 인기있는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그녀의 화려한 레쥬메를 보면 태어날때부터 예술가라는 직함을 부여받고 찬란한 꽃길만 걸어왔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직접 쓴 회고록 [저스트 키즈]는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저스트 키즈]는 패티 스미스가 젊은 시절 동반자이자 평생의 소울메이트였던 로버트 메이플소프가 함께 살아온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패티 스미스는 시카고의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교대를 중퇴하고 빈털터리 상태로 뉴욕으로 건너올 때까지 그녀의 삶에서 대중이 유명 예술가의 유년시절을 추측할 때 흔히 등장하는 독특한 환경같은 것은 딱히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녀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조금 더 가혹한 가난을 택했고, 그 대가로 60년대 중반 뉴욕의 들끓는 공기를 체험할 수 있었다. 공원에서 노숙을 하고 길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주워 끼니를 해결하는 삶을 살던 중 역시 뉴욕의 길거리에서 방황하던 로버트 메이플소프를 만났고, 각자의 외로웠던 가난은 두명이 함께 하는 희망섞인 가난으로 그 색깔을 달리하게 되었다.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뉴욕의 중산층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프랫에서 예술을 전공했지만 정식으로 학위를 마치지는 못하고 뉴욕 이곳 저곳을 떠돌던 터였다. 이 둘은 뉴욕의 뒷골목을 전전하며 생계를 위해 일해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나갔다. 이 책은 지나가던 노부부가 “쟤네 그냥 애들(just kids)이잖아”라고 부른 한 젊은 남녀가 혹독한 가난과 싸우며 시대를 뒤흔든 예술가로 성장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의 대부분은 60년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패티 스미스가 [Horses]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음악 커리어를 시작한 시기, 그리고 로버트 메이플소프가 특유의 관능적이고 탐미적인 흑백사진으로 뉴욕 사진계에서 명성을 획득하기 시작한 시기는 70년대 중반 이후로, 당시 이 둘은 동거관계를 정리하고 각자 다른 연인과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있을 때였다. 즉, 스미스와 메이플소프가 적극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획득하던 시기는 이들의 전성기와 제법 시차가 있는 편이다. 때문에 스미스가 대중적인 인지도를 회복한 이후의 모습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뉴욕 펑크씬의 대모로 불리우는 스미스의 회고록에서 음악팬이 쉽게 기대할 수 있는 것들, 그러니까 당시 뉴욕 음악씬의 생생한 묘사라던가 전설적인 아티스트와의 교류같은 이야기 역시 사실 이 책의 중심내용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그저 간략하게, 스쳐지나가듯 묘사되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은 패티 스미스가 어떻게 로버트 메이플소프를 만났고, 어떻게 함께 가난과 싸워 나갔으며, 얼마나 로버트 메이플소프를 사랑했고 또 어떻게 이별하게 되었는지, 헤어진 이후에도 어떻게 관계를 지속해 나갔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메이플소프는 89년 에이즈에 의한 합병증으로 사망하기 전 스미스에게 자신과 스미스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 책은 그 유언에 대한 스미스의 실행인 셈이다. 그래서 그녀가 발표한 그 어떤 작품보다 개인적이고 진솔하다. 패티 스미스는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메이플소프에게만 집중하고 있다. 풋내기 예술가에 불과한 이 둘이 서로의 작품활동에 깊게 관여하면서 각자의 재능을 온전히 쏟을 수 있는 전문영역을 발견하는 과정, 그리고 연인으로 시작했지만 메이플소프가 성정체성 및 성적취향을 깨달은 뒤 이를 받아들이고 소울메이트로 관계를 서서히 변화시켜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패티 스미스는 평론으로 시작해 퍼포먼스, 시를 거쳐 음악이라는 영토에 당도했고, 메이플소프는 콜라쥬와 폴라로이드를 지나 핫셀블라드를 만났다. 서로가 없었다면 결코 7,80년대의 영광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기에, 찬란하지만 가난했고 아름답지만 비참했던 60년대 젊은 시절에 대한 기록이 소중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사망하기 며칠 전, 침대에 누운 메이플소프가 스미스에게 물었다. “패티, 우리가 진정 예술을 찾은 걸까?” 눈길을 피한 패티 스미스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두 명의 예술가가 함께 걸어온 길, 그 길의 끝에서 확인하고픈 것은 예술적 성취의 물리적 결과물같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함께 걸어온 길이 나쁘지 않았음을, 사실은 참 좋았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는 미국판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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