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산드로 보파 |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비스코치브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는 흥미로운 우화(寓話)집이다. 스무편의 짤막한 이야기가 모여있는데, 모든 단편의 주인공 수컷의 이름은 비스코비츠로 통일되어 있다. 비스코비츠는 전갈로 태어나기도 하고 쇠똥구리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각각의 삶에서 비스코비츠는 종(種)의 특성과 본능에 충실하지만, 그안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며 인간 세상을 거울처럼 비추기도 한다. 그 거울 안에는 한 치 앞의 인생도 알지 못하면서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마냥 떠들어대는 인간의 나약함과 자만심이 동물의 모습으로 현현하여 독자를 비추고 있다. 야생의 동물들을 한없이 가여운 존재, 혹은 본능에 충실한 단순한 존재로 바라보는 인간 역시 그 한계와 나약함이 다른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작가는 각각의 동물이 가지는 주요한 특성을 과학적으로 친절하게 설명하며 어렵지 않게 전달한다.

생물학자로 평생을 살다 염증을 느끼던 와중 폭등한 주식가격을 핑계로 긴 휴가를 떠난 저자 알레산드로 보파는 친구들에게 들려주던 짤막한 이야기들을 묶어 이 책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가 전달하는 동물의 삶에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도 있고(뻐꾸기의 산란 행태같은 것들)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는데(해면동물의 생식과정 등) 사실 그러한 생물학적 상식의 전달 유무가 이 책을 읽는데 그리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오히려 짧은 길이의 스무편의 단편에(어떤 단편은 한국어 번역본 기준으로 두 쪽을 넘지 못한다) 서-본-결 구조가 단단하게 짜인 재미있는 서사가 완성된다는 점이 놀랍게 다가온다. 각각의 단편이 가진 특성도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읽는 내내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다. 타고난 이야기꾼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김혼비 |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김혼비
‘한국에서 여성이 취미로 축구를 한다’

억지로 한 문장에 우겨넣은 이 책의 요약은 그 자체로 사회적인 의미를 가진다. 에세이스트 김혼비는 자신이 경험한 여성 사회인 축구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것 자체로 독자들에게 생각할 지점을 여럿 던진다. 남성의 전유물과 같이 여겨지는 스포츠, 그 중에서도 과격한 축에 드는 축구를 여성이 한다는 것, 더 나아가 2,30대 젊은 여성이 아닌 4,50대의 나이 지긋한 여성이 주축이 된 사회인 체육의 형태로 스포츠를 향유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나를 포함한 한국인 대다수에게 익숙하지 않은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이 ‘익숙하지 않음’의 이유를 하나씩 파고들다 보면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축적되어온 불평등과 억압의 역사가 숨어있음을 알게 된다. 그 불편한 현실을 불편하지 않게, 무겁지 않고 유쾌하게 전달한다는 점이 이 책의 첫번째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전세계적으로 볼 때 축구는 여성의 운동으로 자리잡은지 꽤 되는 편이다. 전체적인 프로스포츠 시장 자체가 남성 편향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이건 스포츠 활동을 함에 있어 남성의 육체적 능력이 상대적 우위에 있다는 생물학적 특성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한 결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학원체육이나 사회인 체육 쪽에서는 축구가 여성에게도 많이 열려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축구를 좋아하는 초등학생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다만 이 ‘전세계적 추세’가 한국을 중심으로 살아온 30대 이상의 기성세대에게 ‘인식’되는지의 문제로 한정짓는다면, 아마도 이 책의 저자가 동호회에 처음 가입할 때의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이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야구장을 가득 메운 여성 관중들을 보며 “규칙도 모르면서 치킨이나 먹으러 간다”고 비아냥거리는 자칭 ‘야구매니아’ 남성이 도처에 깔려 있는 현실에서(아니, 그리고 말 나온 김에, 야구 규칙 잘 모르면서 치킨 먹으러 야구장 가는게 그렇게 분하게 생각할 일인가?), 인사이드킥을 연습하고 아웃사이드 드리블을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여성의 모습이 마냥 편하고 자연스럽게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것이다. 저자는 독자의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그 불편한 현실에 대한 인식을 예의바르게 건드린다. 이건 축구 자체에 대한 저자의 절대적인 애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글쓰기 방식이었을 것이다.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좌도 우도, 남도 여도 없다는 간단한 진리를 에세이의 형식을 통해 성공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도 여름이 끝나갈 때 쯤 집 근처에 있는 대전월드컵경기장에 한번 가보기로 결심했다. 2부리그에 있는 대전 시티즌에 소속된 선수 중 아는 선수라고는 한 명도 없지만, 로컬 스포츠팀을 응원하는 기쁨을 너무 잊고 산 것 같아 많은 반성을 했다.

클라이브 제임스 | 죽음을 이기는 독서

죽음을 이기는 독서
이번 여행에서 가지고 간 책은 이 [죽음을 이기는 독서], 달랑 한권이다. 아내와 가진 첫번째 여행은 남해로 떠나 한 곳에서 머무는 3박 4일 일정이었는데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 세 권을 가지고 갔다. 이번 여행은 3주 가까이 되는 긴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한 권 이상 가져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여행이라 일정을 빡빡하게 잡은 탓이 크고, 긴 일정과 잦은 이동으로 짐을 최대한 간편하게 싸야할 필요성도 컸으며, 무엇보다 햇반과 김치, 라면에 가방의 공간을 상당부분 양보해야 했다.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고 오자는 작은 소망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겨우 현실화시킬 수 있었다. 그만큼 이번 여행은 빡빡했고, 또 체력적으로 많은 부담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곳을 다니면서 다양한 기억들을 남길 수 있었으니 ‘인생은 항상 트레이드 오프(trade-off)가 있다’는 격언이 이번에도 맞아떨어진 셈이다.

클라이브 제임스는 호주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비평가라고 한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2010년에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 중에 있으며, [죽음을 이기는 독서]는 [Latest Readings]라는 원제를 달고 2018년 출간됐다. 투병 중에도 끊임없기 독서를 해온 작가의 생각을 담은 에세이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시점에서 아직 사망하지 않은 작가에게 “숭고함”과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은 실례일 것 같다. 작가는 몸이 쇠약해진 투병 생활 중에도 독서 생활을 멈추지 않는다. 평생을 비평가로 활동해온 그가 나열하는 책의 제목들을 읽는 것만으로 숨이 찰 지경이고 그가 읽은 책의 10%도 들어보지조차 못했지만, 그가 묘사하는 책의 내용을 세심하게 따라가기 보다는 책을 읽으며 삶을 버티어내는 그의 자세에 조금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물론 그가 소개하는 책들 중에는 꽤나 높은 흥미를 느껴 리딩 리스트에 포함시키고 싶은 것들도 눈에 띈다. 서양인들에게는 거대한 트라우마로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는 히틀러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이 그렇고, 필립 라킨의 작품들이 그러하며, 나이폴의 책이 그러하다. (물론 클라이브 제임스가 찬양하는 책들 중 상당수가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어떤 책에 대해 떠들든, 그가 떠드는 모습 그 자체가 하나의 서사가 되고 작품이 되며 상징이 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된다.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한 지식인의 열정적인 마지막 모습들은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하는 나에게 좋은 지침서가 될 것 같다.

허주영 엮음 | 성매매 안 하는 남자들

성매매 안 하는 남자들 표지
이 책은 2016년 시작된 ‘수요자 모임’에 참석한 남성들이 성매매와 관련된 각자의 사연들, 주장들, 혹은 상념들을 풀어놓은 에세이 모음집이다. ‘수요자 모임’은 성매매의 공급 측면이 아닌 수요 측면의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2016년 만들어진 일종의 토론 모임으로, 이 포럼의 참가자는 대부분 성매매 경험이 없는 남성들이라고 한다. 이 책에 의하면, 참가자들은 함께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거나 특정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하는 방식으로 우리나라 성매매 시장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공유해오고 있다고 한다.

각종 통계자료에 의하면 한국 남성 중 약 절반 정도가 성매매 경험이 있고, 한국의 성매매 시장 규모는 1년에 (보수적으로 추산해도) 약 6조원 정도 규모로 국내 커피시장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한국인 중 성매매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되지 않은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성매매는 남·녀 간 젠더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데, 왜냐하면 통계적으로 성매매의 수요자-공급자 관계가 남-녀 관계로 고정될 때가 많으며, 성매매 거래의 특성 상 육체의 직·간접적 통제와 구속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기 때문에, 사회에 만성적으로 퍼진 성매매 문화가 남·녀 간 젠더 불평등성 심화에 미치는 영향이 존재한다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책 [성매매 안 하는 남자들]의 배경이 되는 ‘수요자 모임’은 기본적으로 성매매로 인해 피해를 받는 여성을 보호하고자 하는 성매매 반대운동의 기본적인 목적에 더해 성매매를 구매하는 남성의 자발적인 반성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양성 평등적 가치 아래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성매매가 만성화된 한국사회에서 성매매를 ‘자발적으로’ 하지 않은 남성들이 갖는 상식적 수준의 합의를 무난하게 이끌어내고 있다. 이 책은 성매매 합법화 반대 논리가 지나치게 귀납적이고 추상적이며 윤리적인 차원에 갇혀 있다는 비판과, 그 비판에 논리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주최측의 한계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군대에서 흔히 받게 되는 성매매 유혹이나 이후 사회생활에서 강요받게 되는 ‘2차’ 문화 등을 개인적 차원의 ‘위기’로 인식하고 이를 나름 슬기롭게 피해다녔다고 생각하는 나 조차 한국의 성매매 산업을 너무 얕게 이해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의 말처럼,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멍청해서, 혹은 젠더 감성이 부족해서 성매매를 합법화시킨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성매매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성적 불평등 현상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사회적 모럴을 가지고 있었기에 시장논리 아래 탄생할 수 밖에 없는 그 산업을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변질된 유교문화의 압박 속에서 여성이 누리는 사회적 지위는 유럽국가들보다 한참 뒤처져 있다. 성매매의 변질된 형태가 직장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폭력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이런 사회에 존재하는 성매매 산업은 다른 시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흔히 성매매에 찬성하는 남자들은 “못생긴 남자는 어떻게 푸냐?”는 주장을 한다. 여성에게 충분히 성적인 어필을 할 수 없는 남자는 돈을 지급하고 시장에서 성을 구매할 수 있게 허락해야 한다는 논리다. 나의 답은 조금 다르다. “섹스를 못(안)하시면 됩니다” 못생긴 수컷은(혹은 암컷은)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평생 짝짓기를 한 번도 하지 못하고 생명을 다하는 동물도 많다. 그리고 이것은 시장의 법칙이기도 하다. 매력이 없는 상품은 팔리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고, 팔리지 않는 것이 맞고, 팔리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상품의 경쟁력을 제고하고 산업의 경쟁력을 제고하고 나라의 경쟁력을 제고하는 가장 쉬운 법칙이다. 이걸 정부가 인위적으로 나서서 구제해 줘도 괜찮을 정도로 성적 평등성에 대한 우리사회의 모럴이 엄청 단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대기업에 들어가냐?”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이 사람이 돈을 내면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는 시장이 존재하는가. 평생 대기업에 들어가지 못하는 쪽이 더 자연스럽다. 성욕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에 정부가 관심을 더 가져야 한다는 주장… 을 백번 수용한다고 해도, 쌍방의 육체적 관계를 전제로 하는 성관계를 합법화해야 한다는 주장까지는 갈 길이 멀다. 우리나라에서는 말이다.

이명옥·김동훈 | 이명옥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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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 시절 자주 들락날락거렸던 동네 서점이 하나 있다. 영어로 쓰인 책을 빨리 읽지도 못하면서 그 곳을 자주 찾았던 이유의 절반은 (당연히) 허세였고, 나머지 절반은 한국의 서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분야의 서적들에 대한 흥미로움이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분야는 역사쪽이었다. 그 서점의 역사 코너는 꽤나 자세히 세분화되어 정리되어 있었다. 전쟁사(戰爭史) 부분이 따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흥미로웠고, 한 인물에 대한 평전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대형 서점에서 역사 서적들이 어떻게 몰개성화된 상태로 전시되어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더 나아가 한국과 미국이 가진 역사의 물리적 ‘시간’만을 고려한다면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국 사람들이 역사 분야에 보여주는 열정은 한국보다 더 뜨거워보였다.

그 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계속 잡아 끌었던 부분은 한국에서는 그 개념도 생소한 가족사(家族史) 코너였다.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인물부터 전혀 그렇지 않은 인물까지 다루고, 짧게는 한 세대부터 길게는 몇 세대를 아우르는 긴 시간까지 포괄하는 등 이 분야가 가지는 범위의 확장성도 놀라웠지만, 그 가족을 둘러싼 이야기만으로 하나의 역사 서적이 완성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당시 나에겐 획기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내 곧 이러한 가족사적 담화가 매우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가족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나가다 보면 그 가족을 둘러싼 환경이 보인다. 가족의 구성원이 대물림되며 핏줄이 이어지는 과정을 따라가다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대의 변화상이 보인다. 통계수치나 전쟁같은 거대담론만을 나열하면 절대 발견할 수 없는 역사의 미시적 변화상은 시대를 직접 살아낸 민초 개개인의 삶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고, 그러한 미시적 역사를 정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가 가족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가족이 평범하면 평범할수록 거시적-미시적 역사의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있는 훌륭한 케이스 스터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어머니와 고속버스를 타고 하동에서 서울까지 함께 올라온 적이 있다. 네시간 가까이 되었던 그 시간동안 어머니로부터 외갓집 식구들의 역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 이후 시간이 꽤 흐른 뒤에야 당시 어머니의 목소리를 녹음해둘걸,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이후 지금까지, 기회가 허락된다면 어머니의 회고를 녹취해서 글로 풀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해왔다. 어머니의 기력이 쇠해지는 모습이 최근 눈에 띌 정도로 확연히 느껴지는 최근 그러한 생각이 더 강해지고 있다. 어머니의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 지금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녀가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과 어머니 그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의 완성된 글로 정리하여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평생 조연으로, 조력자로만 살아온 삶이기에 더 그런 것 같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한국에 또 있었나보다. [이명옥 회고록]은 공주와 대전, 경기도 광주 등에서 살아온 ‘평범한’ 여자 이명옥이 그녀의 아들 김동훈과 행한 인터뷰를 글로 정리한 책이다. 이 책에서 이명옥은 자신의 삶과 함께 주로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그녀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홀홀단신 넘어와 맨주먹 하나로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일구어냈다. 이명옥의 증언대로 그녀의 아버지가 유독 가족에 집착하며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었던 것은 그가 탄생시킨 가족이 또 누구로부터도 이어받지 않은, 온전히 그와 그의 아내(이명옥의 어머니)가 0의 상태에서부터 만들어낸 가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가족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 시대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이명옥이 어린 시절을 보낸 대전의 판자촌부터 이명옥의 아버지가 숨을 거둔 서울의 지하철까지, 영화보다 더 극적인 삶의 순간들이 숨쉬는 일만큼 평범한 일상 속에 고르게 펴 발라져 있다.

이명옥의 담담한 말투가 상상될 정도로 평온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이 짧은 책은 그녀가 10여년간 모시고 살아온 시어머니의 죽음 장면에 이르러 짤막한 절정과 시큰한 감동을 선사한다. 먹고 살기 위해 젊음을 희생하고 낭만을 포기했던 나의 윗 세대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격한 감정의 파고는 아마도 부모의 죽음이 아니었을까. 나는 평생 무뚝뚝하게 가족을 대해온 아버지가 내 앞에서 처음으로 흘린 눈물을 아직도 기억한다. 할머니의 시신을 염하는 장소였다. 차마 가까이 다가가 마지막 인사를 하지도 못하고 귀퉁이 어딘가에 기대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아버지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이후로 다시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해서 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명옥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길거리에서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죽음을 묘사하며 “걔들(이명옥의 손자·손녀를 가리킨다) 보면 얼마나 예뻐하셨을까” 안타까워 하면서도 “시간이 다 그렇다”며 너무 일찍 떠는 부친을 향한 그리움을 애써 시간 속으로 묻어버린다.

기쁨과 슬픔을 억누르며 살기를 강요받아온 윗 세대가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소중한 것들과 이별을 해야 할 때, 그들은 마치 감정을 능숙하게 다루어온 장인처럼 행세하려 한다. 그 모습이 참으로 애처롭고 애닲게 느껴져 조용히 어루만져 주는 일은 그들을 바라보는 자녀들의 몫이다. 이 책은 그러한 어루만짐이 느껴져서 좋았다. 작가 김동훈은 아주 간단한 질문을 던지는 것 만으로 평범한 사람 이명옥의 특별한 삶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다. 마음을 가만히 움직이는 좋은 책을 읽었다.

김은덕, 백종민 | 사랑한다면 왜

사랑한다면왜
[사랑한다면 왜]는 재미있는 에세이 모음집이다. “지독한 개인주의자”이자 “비혼주의자”였던 두 저자가 결혼이라는 제도를 택해 한 집에 함께 살게 되면서 겪게 된 일들, 그리고 생각들을 정리한 책이다. 이 부부가 지금까지 함께 해 온 삶을 살펴보면 약간 독특하다고 할만한 특징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 결혼식을 치루어냈으며, 결혼 후 1년 간 맞벌이 생활로 돈을 모은 후 2년동안 ‘한 달에 한 도시’ 컨셉으로 세계여행을 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책 세 권을 함께 집필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통장잔고 0원”의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다시 회사에 취직하는 방법 대신 함께 글을 쓰는 삶을 택했다. 그러는 와중에 텔레비전에도 몇 번 나오고 강연 초청도 제법 받게 되는 등 나름의 터를 잘 닦아 나가고 있다. 청담동의 고급 웨딩홀에서 식을 치룬 뒤 서울 변두리 어딘가에 살고 있을 보통의 젊은 부부에게는 다소 의아한 삶의 방식일테지만, 달리 말하면 망원동이나 합정동 어딘가에 머물며 제도권 문화의 영향력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려는 한국판 힙스터 부부가 지속하고자 하는 삶의 전형적인 형태다.

이들이 200쪽 남짓한 짤막한 책 안에 담아내고자 하는 이야기들은 진솔하고 치열하다. “며느리”, “시댁”과 같은 호칭부터 거부하는 여자의 태도는 완고하며, 주방을 ‘차지’하고 요리를 전담하는 남자의 태도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들의 개인주의적인 삶의 태도는 주변 관계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귀결되었다. 양가 부모님과 가까운 가족, 그리고 다섯명 정도의 친구 정도만 남게 된 이들의 삶에는 출산과 육아라는 선택지도 지워졌다. 때문에 이들이 지속하고자 하는 삶의 방식은 주변의 ‘방해’를 최소화시키는 작업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자의 부모는 각자 책임진다는 규칙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부모로부터의 속박을 최소화하고 싶어한다. 그와 동시에 자신들이 책임져야 할 식솔의 수도 ‘0’명으로 최소화시켰다. 그래서 이들의 삶은 이미 충분히 선택되어진 형태로 존재하고, 그렇게 잘 짜여진 조건 위에서 이들의 주장은 충분한 타당성을 획득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모순과 부딪히기도 한다. 예컨대 책을 읽는 내내 대체 ‘명절’의 권위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렇게 자신만만한 부부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인지 궁금했다. “가족 안에 매몰되는 것이 싫어서” 출산을 거부한 이들이 “비혼주의자 친구들과 평생 함께 하겠다”고 선언하는 모습에서 ‘적당한 거리의 관계만 취하며 살겠다’는 요즘 세대의 태도가 전형적으로 느껴져 갑자기 지루해지기도 했다. 아무튼, 최소한 이들은 지금까지 결혼이라는 제도와 한국사회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왔으며, 그 고민의 결과물을 나름의 실천을 통해 현실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 부부가 자신의 생각에 갇혀 이미 상당히 완고해져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비록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할 지언정 삶의 태도를 타의에 의해 바꿀 의지까지는 없어보인다. 나는 이 ‘완고함’이 대부분의 한국인이 가진 아주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닫혀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열려있지 못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부부는 자신의 부모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의 부모는 그 세대 안에서 나름 치열하게 살아왔을 것이다. 그 결과물이 그들의 아들과 딸이다. 그 아들과 딸은 지금 주어진 조건에서 다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그 결과물은 달라진 시대와 함께 그 외형만을 달리할 뿐 본질적으로 ‘우리가 맞아’라는 한국인 특유의 완고함을 1도 버리지 못했다. 이 완고함이 왜 나쁘냐 하면, 주변을 잘 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태도에서 이타적인 마음, 주변을 살피는 마음,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타인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1도 느껴지지 않는다. 부부가 서로 마주보고 꽁냥꽁냥하는 것에서 삶의 기쁨을 느꼈다면 이제 범위를 확대하여 그 기쁨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들이 포기한) 출산과 육아는 인간과 인간이 만나 깨달은 사랑이라는 가치를 사회로 환원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개인적인 이유에 의해 출산과 육아를 포기했다면(그것에 대해 뭐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방식으로 사회와의 공존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부는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경제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적으로 가난해서 마음도 가난해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부분을 중요시하는지 너무 가볍게 넘겨짚은 것 같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는 “지독한 개인주의자”가 저지르는 가장 기본적인 실수이기도 하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답답했나보다. 이 부부는 좋은 사람일지언정 아직 좋은 이웃은 아닌 것 같다. 나의 좋은 이웃이 아니라면, 페미니즘이고 뭐고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장강명 | 당선, 합격, 계급

장강명
장강명의 최근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꽤 재미있게 읽었다. 젊은 세대라면 한번쯤 들어보았고 생각해보았을 “헬조선”을 중심으로 풀어낸 주제의식도 마음에 들었고 빠르게 책장을 넘기게 되는 쉽고 쫀득한 문체도 좋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기대 이상으로 치밀하다고 느낀 작가의 취재능력이었다. 공중에 5cm 정도 떠 있는 다른 한국 소설들과 달리 현실의 밑바닥에 바짝 달라붙어 그 까칠한 촉감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이 소설의 진면목이 작가의 치밀한 사전 취재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역시나, 기자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픽션이 아닌 논픽션을 신작으로 내놓았다는 소식에 적지 않은 흥미를 느꼈다. 그것도 공채와 문학상으로 대표되는 ‘고인 물’을 정면으로 파고드는 르포 형식이라니, 국내 유력 일간지 공채 기자 출신으로 굵직한 문학상을 다수 수상한 그가 작심하고 소위 ‘내부 총질’을 하는데 어찌 기대가 되지 않겠는가.

[당선, 합격, 계급]은 치밀하게 전개하고 명쾌하게 쏟아내는 좋은 논픽션이다. 여기서 ‘좋은’이라는 단어는 ‘사회적으로 필요한’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이 책은 저자가 과거에 속한 사회적 집단(대기업, 정부, 공기업, 언론사를 포괄하는 주류 대기업)이 내부 구성원을 선발하고 육성하는 대표적인 방식인 ‘공채’와, 저자가 현재 속한 사회적 집단(문학계)이 구성원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대표적 방식인 ‘문학상’의 이면을 파고들어 그 명과 암을 제대로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국사회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인재 선발 양식인 공채와 문학상에 대해, 저자는 그 사회적 장점 – 예컨대 공정성과 같은 – 을 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형태의 인재선발 방식이 한국사회의 전체적인 역동성을 해치고 있음을 다각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수많은 인터뷰와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극소수의 인원을 선발하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가 장기간 에너지를 낭비해야 하는 비효율성, 기업이나 문학상이 원하는 인재상과 그 선발 기준 및 절차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 비논리성, 그리고 선발되지 못한 이들이 감수해야 하는 배타성과 차별까지 조목조목 제시한다. 결국 이러한 선발 방식은 사회의 계급을 분화시키고 고착화시키는 역할만 할 뿐, 제대로 된 인재를 발견하고 키워내기 위한 적합한 방식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지방 정부의 말단 공무원으로 평생 일해야 하는 사람이 어려운 국사 문제를 ‘완벽하게’ 풀어야 할 이유는 없다. 몇 년 뒤 자신들의 먹거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삼성그룹에서 몇십년 뒤의 먹거리까지 책임질 인재를 몇십개의 시험문제로 선발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문학계와 영화계 등 예술계에서 폐쇄적이고 배타적으로 행해지는 ‘등단’, 혹은 ‘입봉’의 과정이 갖는 불합리성 역시 본질적으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극히 상대적이고 우연적인 이유에 의해 선정된 작가에게 부여되는 ‘등단’이라는 특혜와 그 이후 문학계의 주류 안으로 편입시켜 내부자(insider)로 활동하게 하는 사다리 걷어차기는 기본이고, 문학상이라는 ‘고시’를 통과하지 못한, 혹은 그러한 방식을 거부한 다수의 작가들에게 가해지는 배타적 차별 현상 역시 만성적이고 노골적이다. 이러한 부조리함은 변호사와 의사, 공무원 등 특정 시험을 통과한 후 ‘자격’을 획득한 사람이 능력 부족 등을 이유로 결코 소속집단에서 누락되지 않는 현상으로 이어지며, 더 나아가 이들의 능력이 공적으로 평가되고 취합되어 공개되는 과정이 암묵적으로 생략되는 현상으로가지 나아간다. 어떤 변호사가 승률이 높은지, 어떤 의사가 어떤 병을 잘 고치는지 일반인이 알기가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네이버 영화 평점처럼 정보의 비대칭성을 완화시킬 수 있는 ‘정보의 민주화’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문학계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문학작품이 자신의 취향과 맞는지 판단할 적절한 기준이 공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평론가의 서평은 너무 현학적이고 언론사의 서평은 칭찬 일색이다. 이 분야 역시 정보의 비대칭성이 강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사회적 비용의 증가 원인이 바로 ‘공채’와 ‘문학상’으로 대변되는 선별적이고도 차별적인 시스템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명확하고 중대한 문제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많은 사람들이 공채와 문학상이 사라지기를 바랄까? 저자는 그조차 어둡게 본다. ‘로스쿨 vs 사시’와 같은 사회적 갈등이 좋은 예다. 사람들은 공채와 문학상으로 대변되는 비합리적인 ‘과거제도’ 방식이 여전히 존치되기를 원하고 있다. 갖은 고생을 해서라도 그 장벽만 넘는다면, 사회적으로 어마어마한 혜택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노량진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수십만명의 젊은이들이 취업을 포기한채 공시에 집착하는 현상부터 “기대치를 낮추어 중소기업에 취직하라”며 중소기업의 연봉구조나 복지혜택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어른들의 행태까지, 이 사회가 조금 더 보잘것 없어지는 현상의 이면에는 개인의 이기심을 부추기는 공채와 같은 사회적 장치가 존재하고 있다.

친구 중 한 명은 대학 졸업 후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공채로 입사했다. 승승장구하던 그 친구는 최근 어떤 이유에서인지 임원으로 올라갈 길이 막혔다는 생각이 들자 심각하게 이직을 고민 중이다. 그 친구의 말에 따르면 오직 공채 출신만이, 그 중에서도 윗선으로 선택을 받아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만이 그룹의 관리를 책임지는 임원 레벨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지인 한 명 역시 대학 졸업 후 국내 대기업에 들어갔는데, 지금도 여전히 ‘임원 코스’를 밟으며 잘 나가고 있다. 그가 가진 소속 그룹에 대한 충성심과 자부심은 대단한 수준이다. 각종 비리에 얽혀 뉴스에 그 회사가 등장하는 것 따위는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못하는 듯 보인다. 어쩌면 이 두 명의 사례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들에게는 국내 대기업의 공채 시험을 통과하여 그 기업의 주류가 되었다는 ‘업적’을 굉장히 중요하게 평가했다. 아직 기업 내부에서 관리직급으로 올라가지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채를 통과했다는 결과만으로 이미 다수의 다른 한국인들과 자신을 가르는 어떤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이들의 삶에서 ‘계급’의 발생은 대기업에 입사할 즈음, 이십대 중반 정도의 젊은 나이에 이미 역동적으로 분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계급 안으로 입성하기 위해 이들이 치루어야 했던 공채 시험이 과연 정말 효율적인 시험방식이었는지, 혹은 심지어 공정한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의심해보지는 않았을 확률이 높다.

이들과 비슷한 방식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계급의 분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장강명은 공채라는 특수한 시험 방식을 통해 계급의 분화와 고착화의 핵심을 잘 꼬집고 있다. 나는 그의 생각에 거의 대부분 동의한다. 그는 이 사회의 역동성을 저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를 잘 짚어냈다. 그의 답답함이 책의 이곳저곳에서 절실하게 느껴진다.

박철수 | 박철수의 거주 박물지

거주박물지

[박철수의 거주 박물지]는 ‘아파트 공화국’ 한국이 가진 문화적 획일성 문제의 미시적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일종의 문화 고고학 서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파트라는 특수한 건축양식이 서울 전역을 뒤덮는 현상이 마뜩지 않고, 더 나아가 이러한 거주양식의 획일화가 어쩌면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적 양태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그러한 걱정을 확신으로 바꾸어주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서울이 아파트에 지배당하고 있고 한국사회가 서울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가정이 사실이라면, 아파트라는 건축양식의 변화추이 안에 내재되어 있는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코드를 읽음으로써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질병’의 근원을 조금 더 내밀하게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히 건축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사회변화상으로 압축하기에는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고 그 무게감도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책은 개인적으로 궁금해 했던 한국형 거주문화의 독특한 형태들, 예컨대 ‘확장형 발코니’라던가 다목적실의 흔적으로 남은 식모방  등의 역사적 유래를 친절하게 설명해줄 뿐 아니라 여의도 시범아파트와 같은 오래된 아파트에 남아 있는 과거의 유산들(장독대, 더스트 슈트(dust chute), 단지내 수영장 등)이 탄생하고 사라져간 연유를 다양한 인문학 레퍼런스를 동원하여 설명하고있다. 더 나아가,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욕망이 투영된 강남의 탄생, 그리고 국토건설 정책이 사회에 미친 광범위한 영향 등 거시적인 차원의 담화 역시 빼놓지 않고 포함시키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박철수의 거주 박물지]라는 책의 제목에 걸맞는 고고학적 기능을 충실히 이행할 뿐 아니라, 단순한 ‘화석의 전시’ 차원을 넘어 그 유물이 담고 있는 인문학적 배경을 통시성 있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꽤 무게감 있는 건축 현대사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설명하고자 하는 다양한 이슈들을 통해 몇 가지 공통된 시사점을 추려볼 수 있다. 첫째, 현대 한국 사회가 아파트라는 특수한 하나의 건축 형태에 경제적, 정신적으로 지배를 당하게 된 데에는 정책당국의 결정, 혹은 판단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정부가 강남을 개발하고 아파트를 주된 공급 단위로 삼게 된 경제적 유인에 동의하는지 여부와 상관 없이, 이 책은 우리 사회가 강남의 아파트 한 채에 모든 욕망을 쏟아붓게 된 가장 큰 요인이 박정희로 대표되는 6~80년대 독재정권의 개발 드라이브였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둘째, 해방 이후 급속하게 진행된 경제발전과 그 안에서 무실서하게 발생한 계급의 분화 과정 역시 현대 한국 사회의 아파트 신드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회사 관리자 등의 신 중산층 계급과 아주 빠른 속도로 재산을 증식한 신흥 자영업자를 시각적으로 ‘분리’시키기 위한 거주양식이 필요했고, 공급의 편의성 등 정책 당국의 경제적 유인과 맞물려 아파트라는 건축 양식이 강남을 중심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파트 신드롬, 혹은 강남 신드롬은 새롭게 탄생한 지배 계급과 편의성, 목적 달성 중심의 정책 당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탄생한 역사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다양성을 존중하고 과정 중심의 행동 양태를 추구하는 최근의 사회적 움직임은 여전히 강력한 경제적 유인을 내포한 강남-아파트 연결고리를 쉽게 깨트리지 못할 것이다. ‘힙스터’로 대표되는 젊은 소규모 자본가들이 을지로나 효자동과 같은 비(非)아파트촌 낡은 동네로 걸어들어가 새로운 문화 공동체를 가꾸고 다른 차원의 경제적 움직임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이러한 시도가 서울, 더 나아가 한국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아파트 등의) 부동산을 통한 재산 증식’ 명제를 뒤엎을 정도의 강력한 사회적 운동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이들의 움직임에 동조하는 경제적 수요는 여전히 니치(niche)한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이러한 대안적 문화 생산이 치솟는 임대료 등에 의해 연속성을 쉽게 확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시선을 거둘 길이 없는 것이다.

더 많은 ‘동네’가 아파트 ‘단지’로 대체될 것이며, 그 속도는 전보다 더 빨라질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왠지 정말 그렇게 될 것만 같아 속이 상했다.

김기찬 | 골목안 풍경 전집

골목안풍경전집
한국은 서울에 지배당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은 아파트에 지배당하고 있다. 우리는 서울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큼지막한 콘크리트 덩어리들 중 한줌의 구역을 손에 넣은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와 동시에 서울은 골목 안 풍경 팔이 장사로 돈을 벌고 있다. 아파트에 사는 젊은이들은 골목 안에 숨은 예쁘장한 가게와 이를 둘러싼 풍경을 사랑한다. 하지만 아파트에 사는 그들은 결코 골목 안의 세상에 소속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래서 서울은 노골적인 위선으로 가득차 있다. 서울은 골목 안을 사랑하는 척 하지만, 정작 그 골목 안의 풍경은 끝끝내 전시의 대상으로서만 취급될 뿐이다. 우리는 결코 아파트 바깥으로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채 살아가고 있다. 서울을 서울답게 만드는 곳이 경복궁 뒤로 숨은 효자동 골목과 홍대 번화가 뒤에 자리잡은 연남동의 작은 골목들이라고들 이야기하지만, 반포 자이 아파트와 압구정 현대 아파트의 유혹 앞에서는 모두가 가지런히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그런 곳이 서울이다. 공동체 의식은 무너지고 있고, 옛것과 새것 사이에서 서울의 정체성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서울은 몹시 빠르게 변화하는 곳이다. 다시 말하면, 아주 바쁘게 이곳저곳에 아파트를 세우고 있는 중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서울 안에 있는 골목들은 오늘도 쉼 없이 파괴되고 있다. 골목 안 풍경을 사랑하는 듯 위선을 떠는 한편 오늘도 바쁘게 옛 골목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도시가 서울이다. 속절없이 망가져버린 이 거대한 도시에서 콘크리트 한 줌의 은혜를 받으며 벽돌과 시멘트와 유리의 신에게 찬양의 기도를 올리고 있는 우리들은 골목 안 풍경에 대해 과연 무엇이든 이야기할 자격이 있을까.

김기찬의 사진집 [골목안 풍경 전집]은 1970년대부터 90년대 말까지 존재했던 서울의 중림동과 도화동, 만리동과 천호동 일대의 ‘골목’안 풍경을 담고 있다. 그곳에 빼곡히 자리잡았던 달동네 다세대 주택과 그들의 핏줄과도 같았던 골목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지금은 평당 가격이 2천만원을 넘기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그 공간을 차지하고 앉아있다. 김기찬의 사진들은 서울의 소중한 유산이었지만 아무도 보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골목길의 풍경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는 기록사진으로서의 가치도 대단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70년대부터 꾸준히 한 동네를 드나들던 한 사진가가 그곳에 살던 주민들과 나누었던 미묘한 ‘거리’의 유지에 있다. 사진은 때론 덤덤하게, 때론 친근하게 그곳에 살던 주민들을 비춘다. 주민들 역시 카메라의 존재를 굳이 신경쓰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렌즈에 눈을 맞추며 미소를 지어보인다. 허우샤오시엔의 영화 [빨간 풍선]에서 빠리의 이곳저곳을 떠돌던 풍선의 시선처럼, 김기찬의 시선은 자유롭게 골목 안 여기저기를 배회한다. 그 골목길이 재개발이란 명목하에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그라고 알지 못했을까. 사진가로서 사회적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골목길을 유랑한다. 멸종해가는 골목길에 대한 절박함을 알면서도 일부러 딴전을 피우듯, 그렇게 공기처럼 골목 안으로 흘러들어갔다가 기척도 없이 빠져나온다. 이 전집이 유독 짜릿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골목안 풍경 전집]은 중림동과 도화동 등 작가가 찾았던 공간들이 재개발로 사라진 뒤, 작가가 그곳에 살던 이들을 수소문해 다시 찾아 찍은 사진들에서 다른 차원으로 승화한다. 아랫도리를 벗어재낀 채 골목의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7살 꼬마는 청년이 되어 늙어버린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쪽방에서 몸을 반쯤 겹친 채 누워 자던 여섯 형제들은 무사히 성인이 되어 같은 동네에 오손 도손 모여살며 다음 세대를 키우고 있었다. 골목은 사라지고 공간은 잊혀져도,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계속 살아남아 생을 지속한다. 서울은 끊임없이 옛공간을 파괴하고 역사도 없고 맥락도 없는 새로운 건물들을 쌓아 올리는데 열중하고 있지만, 파괴된 옛공간에 살던 사람들은 그 공간을 마음으로 기억하며 다음 세대로 전이한다. 지금 그나마 남아있는 서울의 옛 골목들에는 젊은 소규모 자본가들이 들어와 서울의 옛모습과 미국의 힙스터 문화를 적절히 섞어 만들어낸 ‘흉내’로 돈벌이를 하고 있다. (물론, 지방은 그런 서울의 모습을 한번 더 ‘흉내’내며 문화적으로 기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래 역시 한국에선 서울이 최고다!”라는 쓴 농담을 할 수밖에 없다) 문화적으로도 배척받고 경제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7,80년대 골목 안 풍경은 그렇게 기억 속에서만 살아남도록 강요받고 있다. 김기찬의 사진집은 이런 이유에서든, 혹은 저런 이유에서든 소중하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책이다.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 변방의 사운드: 모더니티와 아시안 팝의 전개 1960~2000

변방의사운드
신현준 교수가 진행하는 다양한 형태의 글쓰기 프로젝트를 좋아하고, 또 지지하는 편이다. 그가 청년 시절 쓴 [얼트문화와 록 음악] 등의 책을 읽으며 십대시절을 보냈으니 어쩌면 나의 지지성향은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편애를 탄생시킨 보다 중요한 이유는 그가 진행한 프로젝트가 갖는 사회적 가치, 혹은 시의성에 기인한다. 그는 미국 대중음악의 한 조류를 실시간으로 분석한 거의 최초의 평론가였고([얼트문화와 록 음악]), 힙스터 문화의 일부분 정도로 취급될 수 있었던 6,7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으며([한국 팝의 고고학] 시리즈), 음악의 범주를 벗어나 문화적 다양성을 보호하기 위한 시도([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를 하기도 했다. 즉, 그는 문화적 주체성이라던가 문화와 사회가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내는 무형의 가치에 주목하여 이러한 가치가 갖는 동시대성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가 속한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가 기획하고 펴낸 [변방의 사운드: 모더니티와 아시안 팝의 전개 1960~2000]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한 책이다.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대중음악이 어떻게 출발했고 또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한 눈에 조망해보자는 것이 이 책의 출판목적이라면, 단 한 권의 책에 그 방대한 역사를 균일하고 정밀하게 담아낼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 역시 기획 단계에서부터 충분히 예상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대중음악이라는 거대한 하나의 산업은 하나의 국가 내에서도 그 층위가 촘촘하게 나뉘어지기 마련이고, 국가별 저자의 시각 및 성향에 따라 선별적이고 편파적인 기술이 얼마든지 가능한 글쓰기 환경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언더그라운드 문화에만 집중하여 대안적인 사운드의 진화과정만 기술할 수 있고, 또 다른 이는 정치, 사회적 분위기가 대중음악 산업에 미친 전반적인 영향을 고려하여 글을 쓸 수도 있다. 이러한 한계를 충분히 인지한다면 이 책의 시도 자체가 그리 어리석어 보이지 않는다. 아시아를 “변방”으로 규정하며 시작한 이 모음집은 아시아 국가들이 서구사회의 팝 문화로부터 받은 지대한 영향을 부정하지도 않고,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겪은 냉전과 독재라는 어두운 사회분위기가 미친 절대적인 영향력을 과소평가하지도 않는다. 동시대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거울과 같은 성질이 대중음악이라는 상품이 갖는 본질 중 하나라면, 이 기획에 참여한 저자들은 그러한 본질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데에 인색함이 없다.

일본과 중국이라는 ‘큰’ 나라들이 음악산업에 있어서도 상대적으로 더 많은 주체성을 담보할 수 있었다는 점이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흥미로운 지점인데, 어쩌면 정치 및 경제 면에서 드러나는 ‘덩치’가 개별적인 문화산업의 발전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심증을 확보한 셈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과거 제조업 등에 기반하여 선진국을 ‘캐치업’하는 것이 경제적 필살기였던 이 나라는, 음악산업에 있어서도 이러한 캐치업 효과를 극단적인 차원에서 활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돌 문화를 연구하는 많은 이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현재 케이팝의 전세계적 성공이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 즉 ‘2등 중 최고의 2등이 되자’는 정서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이 나라는 혁신과 같은 창의성이 완전히 부재한 상태에서 외부로부터 주어진 ‘1등’의 모범적 사례를 비틀거나 발전시켜 나가며 경쟁력을 확보하는 틈새전략으로 생존해온 나라다. (예를 들어 서울을 보라. 이 곳에는 정말 맛있는 음식들이 많지만, 그 중 그 어떤 음식도 ‘서울만의’ 음식은 아니다) 아이돌 문화, 혹은 케이팝 컨텐츠도 이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말 흥미로운 것은 ‘1등’마저도 결국 이 아름답고 완벽한 ‘2등’에 홀딱 빠져버렸다는 역설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