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 백의 그림자

SNS의 내 타임라인에는 독서광인 친구들의 계정이 몇 있다. 요즘에는 그들이 극찬한 책을 즐겨찾기에 저장해두었다가 어느 정도 쌓이면 한꺼번에 주문하는 패턴으로 책을 산다. 소설가 황정은의 2010년작 [백의 그림자] 역시 그런 방식으로 읽게된 책들 중 하나다. 170쪽 남짓한 짧은 소설인데, 읽는 내내 책을 손에서 뗄 수 없을 정도로 문장이 쫀뜩하게 맛이 있고, 책을 다 읽고 덮은 후에도 마음 속에 묵직하게 생각할 것들을 남겨주는, 좋은 소설이다. 황정은의 소설은 이 책이 처음인데, 작가 특유의 문장이나 서사구조, 글에 색을 입혀 나가는 방식이 가히 ‘황정은풍’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독창적이고 압도적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무척 ‘영화적’이라고 느꼈다. 시각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좋은 영화, 예컨대 허우샤오시엔이나 미하엘 하네케의 영화를 볼 때 관객은 영화의 전체적인 서사를 따라감과 동시에 곳곳에 뿌려진 많은 단서들로부터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를 함께 파악하게 된다. 흔히 말하는 구조주의적 색채가 있는 영화들에서 말이다. [백의 그림자]는 문장과 문장이 연결되는 구조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를 헤아리게 된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은 영화를 보는 경험과 상당히 유사한 예술적 경험을 제공하는 것 같다. 그런데 거의 모든 문장이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쓰여 소설 전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장시처럼 읽히기도 한다. 흐름이 끊어지지 않고 매끄럽게 이어지는 과정에서 독특한 리듬마저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막스 리히터나 닐스 프람의 음악을 듣는 것 같기도 하다. 형식적인 면에서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다른 차원으로 날라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 형식 안에 담고 있는 내용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소설 뒤에 함께 실린 신형철의 평처럼 이 소설은 대단히 윤리적인데, 그 예술에서의 윤리성이란 것이 사실 조금만 흐트러져도 우스꽝스러워지거나 또다른 폭력으로 탈바꿈할 위험성을 지니고 있어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백의 그림자]는 예술작품에서 윤리성이 담보해야 하는 최대한의 것을 성취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누구도 해하지 않지만, 피상적이지도 않은, 가만히 어루만져 주지만 깊은 위로가 되는, 절묘한 그 어딘가를 찾은 느낌이다. 책을 덮자마자 작가의 다른 작품도 얼른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여선 | 레몬

장편보다는 중편에 가까운, 스릴러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탓에 더 빠르게 읽히는 책으로 권여선이 돌아왔다. 그의 책을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다.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서를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하지만, 지나치게 감상에 젖어 현실을 흐리게 보는 우를 저지르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의 문장은 따뜻하지만 서늘하고, 포근하지만 날카롭다.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레가토], [분홍 리본의 시절] 모두 그런 문장으로 쓰인 이야기들을 품고 있었다. [안녕 주정뱅이]는 권여선이 동시대 가장 중요한 작가라는 사실을 만인에 각인시킨 의미있는 소설집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여기저기 찾아보니 [레몬]은 권여선이 과거에 연재한 중편을 다듬은 결과물이라 하고, 원작은 지금보다 더 짧았다고 한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은 복수에 대한 이야기다. 의문의 사고로 형제를 잃은 한 사람이 16,7년에 걸쳐 복수의 길을 걷는 한편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설은 몇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마다 화자가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사건을 조금씩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스릴러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고 분량이 짧은 편이며 화자의 구성 또한 다양하기 때문에 책장은 술술 넘어간다. 기존의 권여선 소설과 다르게 서사구조 그 자체만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 또한 흥미로운데, 사건의 본질에 접근해가며 서서히 변해가는 주인공의 심리와 함께 책을 덮은 후에도 꽤 묵직한 생각할 꺼리를 남겨둔다. 많은 이들이 언급한 바와 같이 사회적 문제를 적극적으로 껴안고 있기도 하다. 세월호 이후 남겨진 심리적 채무, 극복될 수 없는 계급 간 차이, 신에의 의지를 통한 현실의 망각과 왜곡 등의 문제가 작품 곳곳에 꽤 묵직하게 스며들어가 전체적인 주제를 형성하는데 일조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결국 자신의 방식대로 복수를 완수한다. 하지만 복수의 책임은 여전히 남아 있다. 사랑하는 형제를 온전히 떠나보내는 데에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이후 남겨진 이들이 가지고 가야 할 짐의 무게는 많이 줄어들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앞서 이야기한 권여선 특유의 연민의 정서가 소설속 낮은 계급에 속한 이들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면, [레몬]의 마지막 부분에서 연민에 더한 애도의 정서가 분출된다. 떠나보내도 떠나지 않는 것이 남아 있다. 애도는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품는 것이 아닐까. 소설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줌파 라히리 | 내가 있는 곳

줌파 라히리가 모국어인 영어를 버리고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겠다고 선언했을 때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문장과 글에 인생을 걸고, 결국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두루 쓰이는 언어를 가장 아름답게 직조한다는 찬사를 받게 된 사람이 어느 순간 다른 언어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언어적 이민을 선택할 수 있다니, 대단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자 꽤 뜨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건 라히리 개인에 대한 찬사와 존경이지, 라히리의 글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다른 온도로 다가온다. 특히나 한국어가 모국어인 나와 같은 변방의 독자에게는, 조금 차갑게 표현하자면 라히리가 영어로 글을 쓰든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든 대수롭지 않은 변화로 느껴질 수 있다. 어차피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읽는 입장에서는 정말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한국어와 영어 외에는 읽을 수 있는 언어가 없는 나에게는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를 그녀의 모국어인 영어로 읽는 것이 그녀의 문학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었다. 마찬가지 차원에서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도, 이언 매큐언의 책도, 코맥 맥카시의 책도, 이창래의 책도, 주노 디아즈도, 크리스 리도, 앤드루 포터도… 최소한 한 권의 책은 그들의 모국어인 영어로 읽었다. 그래야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읽는다 해도 번역되기 전 원어 상태의 문장이 가지고 있던 질감을 조금이나마 유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어로 쓰인 책을 읽는 데에는 시간도 더 오래 걸리고 머리도 아프다. 휴대폰 영어사전을 옆에 펼쳐 놓고 모르는 단어를 계속 찾아가며 읽어야 하기 때문에 집중력도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장은 그 지역의 특산품이기 때문이다. 지역을 떠난 언어는 갈 길을 잃고 방황하기 마련이다. 날 것의 문장을 발견하는 것은 그 지역을 방문하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만든다.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위와 같은 차원에서, 라히리와 나의 사이가 조금 더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가 쓴 글의 원문을 찾아낸다 해도 더이상 읽어낼 능력이 없다. 그녀의 문장들은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렸다. 이탈리아어로 쓴 첫번째 소설 [내가 있는 곳]이 더 쓸쓸하게 느껴지는 개인적인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

이 소설은 아주 짧은 호흡의 챕터들도 엮어 있다. 짧은 것은 한 쪽, 긴 챕터라고 해봐야 일곱 쪽이나 될까. 호흡이 너무 짧아 쉽게 몰입할 수 없다는 단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이렇게 소설을 구성했다는 것은 그 짧은 분량 안에서도 충분히 라히리 특유의 풍성한 감정을 녹여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소설은 라히리의 세계에서 익히 보아온 쓸쓸한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 주인공 여성은 40대를 넘긴 여성 학자다. 학교에서 일하며 결혼을 하지 않았다. 더이상 다가갈 수 없는 친구를 사모하며, 유부남과의 뜨거운 기억도 가지고 있지만, 부모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과 몇 번의 실패한 사랑 등이 얽혀 현재는 고독을 친구 삼아 평생 살아온 도시를 방랑자처럼 경험하고 있다. 충분히 라히리의 소설이라 할만한 색깔을 지니고 있다.

소설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장소를 중심으로 주인공의 심리를 표현하고 있지만 결코 특정 장소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정 지명 등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장점으로 풀이될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의 경우 그보다는 조금 상투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라히리 소설의 주독자층인 30대 이상의 여성이 쉽게 공감할만한 내용을 도구처럼 여기저기 배치시킴으로써 짧은 챕터 구성으로 인한 몰입도 저하를 상쇄하고자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모든 남자를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는 아닌” 주인공이 행하는 거의 모든 행동은 너무나 범세계적이어서 독자는 스스로를 주인공에 투영시키기가 무척 쉽게 느껴질 것이다. 마치 “넌 소심하니까 A형이지?” 와 같은 혈액형 맞추기 게임을 보는 느낌도 든다.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범용적이고 모범적인 답변지의 인상.

[내가 있는 곳]은 줌파 라히리의 전작들과 비교하면 범작에 가깝다. 그가 오랜만에 신작 소설을 내준 것 자체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탈리아어로 떠난 그의 언어가 더이상 내게 감동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약간 서글퍼졌다. 나는 그녀의 영어 문장을 사랑했다. 과거형이다.

에이미 골드스타인 | 제인스빌 이야기

학부 시절 경제학을 처음 배울 때 한 교수님이 일제 강점기의 생활상을 경제학적으로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이야기하며 당시 측정된 학생들의 신체조건의 비약적인 발전을 예로 든 적이 있다. 즉, 일제강점기 초기에 비해 후기로 갈수록 한국인의 신장 및 체중이 유의한 수준에서 지속적으로 개선되었다는 통계분석 결과는 당시 피지배계층이었던 한국인의 영양상태가 전반적으로 개선되었다는 가정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결과는 일제 강점기를 바라보는 두 완전히 다른 시각 – 식민지 근대화론과 식민지 수탈론 – 중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가 한반도의 경제적 근대화를 촉진시켰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될 여지가 있었다. 대학 시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일제 강점기에 대한 ‘상식’과 대치되는 내용이어서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이와 함께, 식민지화, 혹은 독립운동과 같은 ‘거시적’인 사회담론이 같은 시대를 살다간 이름 없는 민초의 ‘미시적’인 삶과 얼마나 괴리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고민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는 거시경제정책을 전공으로 삼아 공부하고 있지만, 재정정책이나 통화정책과 같은 거대하고 뭉툭한 정책이 그 영향력 아래 있는 서민 개개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꾸게 되는지 추적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결코 게을리 해서는 안되는 고민의 영역이기도 하다.

[제인스빌 이야기]의 원제는 [Janesville: An American Story]다.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 에이미 골드스타인이 쓴 르포르타주인데, 금융위기 직후인 2008년부터 금융위기의 여파로 제인스빌의 GM공장이 공식적으로 폐쇄된 2013년까지 5년 간 제인스빌에 사는, 혹은 이 도시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의 원제가 상징하듯, 이 책은 제인스빌이라는 위스컨신의 작은 도시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경제대공황 이후 미국사회가 겪은 가장 큰 경제위기였던 2008년 금융위기가 어떻게 미국인의 평균적인 삶을 바꾸어놓았는지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기도 하다.

이 책은 크게 세 축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한 축은 제인스빌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던 중산층 가족들이다. GM와 리어, 파커 펜 등 우리도 알 법한 글로벌 대기업의 공장에서 착실히 모기지 대출을 갚아나가던 이들이 금융위기라는 외부충격으로 인해 순식간에 직장을 잃어버린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실직자가 된 이들은 새로운 밥벌이 수단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좌절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희망을 움켜쥔다. 십만명이 채 되지 않는 인구의 소도시 제인스빌이 공동체의식을 기반으로 큰 위기를 버티어내는 과정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이 책이 전달하는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다. 이들을 돕기 위해 애쓰는 위스컨신 지역의 공동체 리더들이 이 책의 두번째 축을 담당한다. 이들은 직업학교를 확장하여 실직자들의 재취업을 돕고, 실직자 부모를 둔 학생들이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학교 안에 생필품을 제공하는 작은 창고를 운영하며, 워싱턴의 정치인들이 위스컨신의 작은 마을에 아주 약간의 관심이라도 둘 수 있도록 동분서주한다. 이들의 노력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다. 수천명이 직업을 잃었지만 직업학교를 통해 재취업에 성공한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GM공장은 결국 영구적으로 폐쇄되었고, 제인스빌 공동체는 정치적으로 분열되었다. 작은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 성공적이지 못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워싱턴의 거대 정치가 지역사회의 실체적 삶과 괴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인스빌 출신의 정치인 폴 라이언과 위스컨신 주지사 스캇 워커 등으로 대변되는 정치인들이 이 책의 다른 한 축을 차지한다. 예산통인 폴 라이언은 고향의 민심을 등지고 워싱턴 중앙정치로 나아간다. ‘선동가’ 스캇 워커는 경기침체의 직격탄을 받은 위스컨신의 서민들을 위한 예산을 대폭 삭감한다. 지역사회의 외침은 이들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선거 전 제인스빌 연설에서 공장을 반드시 살려 내겠다고 공언한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결국 그 도시에서 가장 큰 공장들을 폐쇄했다.

이 책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며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 영민함을 보여주면서도 르포르타주의 생생함과 금융위기 이후 시행된 경제회생 정책의 비현실성을 향한 비판의 날카로움은 놓치지 않는다. 극한 상황에 처한 개인이 가족과 공동체를 포기하기 않고 존엄성을 유지하는 과정을 과장되지 않은 묘사를 통해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한편, 이들이 그런 어려운 상황까지 되지 않게 할 수도 있었을, 혹은 이후 회생의 속도를 더 빠르게 할 수도 있었을, 아니면 이 책에 등장하는 한 여인이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지 않게 할 수도 있었을 수많은 기회들이 허무하게 사라진 현상의 본질을 맹렬하게 파고든다. 5년이 넘는 밀착취재와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터뷰, 각종 정책에 대한 깊은 이해 등이 어우러져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긴박함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즈와 뉴욕 타임즈, 월스트릿저널 등 각종 매체에서 그 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하였고, 이 책의 조연(?) 중 한 명인 오바마 전 대통령 등으로부터도 찬사를 받았다.

이 책은 지금까지 경제학자들이 믿고 있던 통념들 중 상당 부분이 실제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일깨워준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실업자에 대한 직업교육의 효과성이다. 제인스빌 주민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 그 지역에 있는 블랙호크 직업학교를 수료한 실직자보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은 고졸 실직자가 재취업에 성공한 사례가 더 많으며, 재교육 과정을 수료한 실직자 중 상대적으로 더 많은 비율이 간헐적 노동에 종사하며 더 낮은 임금을 받았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실업과 관련된 정책을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는 부분이 실직자 재교육을 통한 구직기간의 단축인데, 제인스빌에서는 이 정책이 제대로 먹히지 않은 것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먼저 숙련노동자(skilled labor)와 비숙련노동자(unskilled labor)간 직업이동의 차별성이 존재할 수 있다. 변호사나 대학교수는 숙련노동자에 해당하며, 상대적으로 직업안정성이 뛰어나다. 편의점 파트타이머와 같은 비숙련노동자는 언제든 비슷한 수준의 다른 노동자로 대체될 수 있기 때문에 직업안정성이 떨어진다. 때문에 비숙련노동자에 대해 직업안정성을 높여주는 정책이 사회 전체적인 실업률 억제를 위해서 효과적일 수 있다. 제인스빌에서 일하던 GM공장 노동자들은 대부분 고졸이었다. 하지만 길게는 30년 가까이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일한 경험을 가진 이들을 비숙련노동자로 분류할 수 있을까? 고도로 분업화된 생산체계에서 10년 넘게 장기간 하나의 기술에만 종사해왔다면, 이들이 갑작스러운 실직 이후 약 2년여의 재교육기간을 거쳐 완전히 다른 직종에 지속적인, 혹은 정규직 직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까? 차라리 지금까지 해왔던 같은 일을 지속할 수 있는 다른 지역으로 터전을 옮기는 쪽을 택하는 것이 더 현명할 수 있다. 다시말해 노동이동(labor immigration)이 자연스럽게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온 맷의 예가 이에 해당한다. 고소득을 보장받는 숙련노동자도, 대체성이 높은 대신 다른 직종으로 변환하기도 쉬운 비숙련노동자도 아닌 이 장기 제조업 종사자들은 기존의 이론대로 직업교육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한다는 결과는, 결국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터전인 특정 지역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직업적 전문성을 계속 발휘하는 일은 금융위기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의미인데, 이는 지역사회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 책의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우선 군산의 예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GM 군산공장은 2015년 공장의 폐쇄를 통보했다. 이 공장에서 일하던 500여명의 노동자와 GM 하청업체에서 일하던 500여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지역사회 경기는 꽁꽁 얼어붙었다.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은 당장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해했다. 평생을 컨베이어 벨트에서 살아온 이들이 갑자기 학원을 차리거나 간호사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은 실업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라다. 또한 직종간 이동이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나라다. 아직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유효하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2019년 5월, 폐쇄된 GM 군산공장을 국내 한 컨소시엄이 인수한다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지역 상공회의소와 중앙정부가 노력한 결과다. 고용은 대부분 승계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세금이 들어갔다. 사기업의 경영판단으로 인한 사회적 파장을 정부가 어디까지 관여해야 하는가는 지금도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첨예한 논쟁거리다. 한국사회는 대기업의 회생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정부의 과감한 개입을 요구하여 왔다.

신도시가 생기면 가장 먼저 상권을 장악하는 수많은 치킨집도 떠오른다. 대기업 본사의 경영지침에 따라 자유도가 허락되지 않는 환경에서 치킨집을 운영하는 이들은 대부분 평생 치킨을 튀기는 일과 무관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들의 실패에 대해서는 본사가 책임지지 않는다. 전문성을 충분히 획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은퇴자금을 쏟아부은 이들은 대부분 2년 안에 수익을 회수하지 못한다. 남들보다 조금 빠른 은퇴를 선택했거나 은퇴로 내몰린 이들이 가지고 있던 선택지 중 치킨집이 정말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을까? 대우조선과 같은 대기업에 천문학적 세금을 쏟아부으며 회생절차를 돕고 있는 정부는 하루에도 몇백개의 치킨집이 문을 닫는 현상에 대해서는 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것일까? ‘대마불사’가 아니라 ‘소마불사’의 시각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Chloe Aridjis | Asunder

이 책을 산 건 2013년이다. 어떤 경로로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주말 섹션의 책소개 코너에서 리뷰를 읽었을 수도 있고, 당시 살던 볼더의 볼더 서점(Boulder Bookstore)을 어슬렁거리다가 점원 추천 코너에서 덥석 이 책을 집어 들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이후 최근까지 약 6년의 세월동안 이 책을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끝내지 못했다 함은 최소한 시작은 해봤다는 이야기다. 최근 이 책에 재도전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책에 꽂혀 있던 책갈피는 과거의 내가 99쪽까지 힘겨운 여정을 걸어 왔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당연히 책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에 1쪽부터 다시 읽어야 했다. 참고로 책은 꽤 짧다. 200쪽이 채 되지 않는다.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영국 옥스포드에서 프랑스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런던에 거주 중인 작가 클로에 아리히스(Chloe Aridjis)는 두번째 장편 소설 [Asunder]에서 그녀가 가진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십분 발휘한다. 소설의 주인공 마리는 영국 내셔널 갤러리에서 감시원으로 10년째 일하고 있다. 소설의 주된 서사 구조는 세 축으로 구성된다. 그녀가 감시원으로 일하는 미술관에 존재하는 오래된 작품과 그 작품에 다가가려는 관람객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경계가 한 축이다. 감시원인 마리는 배경을 알 수 없는 신원미상의 관람객이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에 지나치게 깊게 접근하는 것을 막는 것이 주된 임무다. 이와 함께 마리는 10년 동안 같은 장소에서 근무하면서 그 곳에 걸린 오래된 작품이 아주 느린 속도로 미세하게 늙어가는 것을 감지하기도 한다. 마리 본인은 작품의 작은 변화까지 감지할 정도로 예민하지만, 그 변화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느끼고 싶은 관람객을 막아야 하는 입장에 서있기도 하다. 소설의 두번째 축은 마리와 그녀의 오랜 친구 다니엘 간의 관계다. 시인을 자처하는 다니엘은 마리에게 박물관에 걸린 작품과 같다. 더 깊게 다가가고 싶지만 경계를 넘는 순간 작품을 훼손하는 관람객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이 두렵다.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우연찮게 발생하게 된 파리 여행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둘만의 여행일 줄 알았던 이 여행에 불청객 피에르가 합류하게 되고, 잔뜩 뿔이 난 마리는 오래된 고성에서 사회성을 잃고 오랜 시간 홀로 은둔하던 성주를 지나치게 자극하다 그로부터 공격을 받고 상처를 입는다. 천천히, 미세하게 홀로 무너져 가는 오래된 작품이 둘러친 경계선을 넘어선 셈이다. 이 여행이 소설의 세번째 축으로 기능한다. 간단히 정리해보면, 이 소설은 다가감과 망설임 사이의 경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주인공이 가진 직업의 특수성을 주인공의 심리와 긴밀히 연결하고, 그 미묘한 떨림을 외부로부터의 충격을 통해 상징화하는 서사구조는 특별할 것 없이 솔직하고 명쾌하다. 소설 중간에 등장하는 최면술사(hypnotist)의 일화는 ‘인생의 모든 순간에는 상충관계(trade-off)가 존재한다’는 이 소설의 주제의식을 함축하고 있다.

이 소설이 가진 최고의 미덕은 문장의 아름다움에 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입장에서 거의 모든 문장이 하나의 숙제처럼 읽힐 정도로 어려웠다. 문장구조도 어려웠고 단어도 어려웠다. 물론 그만큼 작가가 타협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단어는 정의 그대로 완벽하게 쓰이고 있고, 문장은 다양한 변주를 통해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제이디 스미스(Jadie Smith)처럼 지나치게 현학적으로 쓰이지도 않았고, 주노 디아즈(Junot Diaz)처럼 화려한 언변을 잔뜩 뽐내지도 않는다. 문제는 이 소설의 장점이 이게 다라는 것이다. 특별할 것 없는 주제와 특별할 것 없는 사건을 평범한 서사구조로 묶어내기 위해 200쪽이나 낭비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싶을 정도로 이 소설은 무척 지루하다. 작가가 자신의 문장력을 연습하는 연습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이 소설을 구상했다는 심증을 확실케 하는 순간이 너무 많다. 묘사는 치밀하지만 지나치게 수다스럽고, 불필요하며, 심지어 쓸모도 없다. 열 세개 챕터 중 아홉개 정도는 소설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설의 종반부까지 켜켜이 쌓아올린 주인공 마리의 인격은 마지막 두 쳅터에서 갑자기 질투심에 눈이 먼 십대 소녀처럼 주저앉아 버리고, 이와 함께 소설의 장르적 특성 역시 갈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한다. (끝나기 20쪽 전부터 갑자기 소설은 정체성에 대해 방황하기 시작한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이 소설을 끝까지 읽어내려갔다. 문장은 참 좋은데, 딱 그 뿐인 소설이었다.

바버라 립스카 | 나는 정신병에 걸린 뇌 과학자입니다

인터넷 시대가 열리고 난 뒤 신간 도서 정보를 얻는 방법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졌지만, 모순적이게도 넘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취향에 꼭 들어맞거나 질이 무척 좋은 도서를 찾아내는 일은 그에 비례해서 더 힘들어지는 느낌이다. 요즘에는 인스타그램으로 신간 정보를 얻는다. 유명출판사, 독립출판사, 혹은 독립서점의 계정을 잘 따라 다니다 보면 발견하게 되는 꽤 괜찮은 소개글을 즐겨찾기에 차곡차곡 모아 놓았다가 목록이 어느 정도 쌓이면 일괄적으로 결제해서 받아보는 식이다. 따끈따끈한 새책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찾아낼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아무래도 광고글에 가깝다 보니 ‘낚일’ 위험이 큰 것도 사실이다.

미국 국립정신보건원 산하 인간두뇌수집원(Human Brain Collection Core) 원장인 바버라 립스카(Barbara K. Lipska)가 저널리스트인 일레인 맥아들(Elaine McArdle)의 도움을 받아 공저 형식으로 쓴 [나는 정신병에 걸린 뇌 과학자입니다(원제: The Neuroscientist Who Lost Her Mind)] 는 강렬한 제목과 출판사의 효과적인 광고에 제대로 낚인 케이스다. 낚였다고 표현했지만 허위, 과장 광고를 한 것은 아니다. 책의 제목은 내용을 성실하게 반영한다. 학계에서 저명한 뇌과학자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었던 저자는 어느날 치료하기 힘든 피부암질환 중 하나인 흑색종 판정을 받게 되는데, 이 암이 그만 뇌로 전이되어 그 쪽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뇌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은 인지, 감정, 신체기관 조절 등에 있어 장애가 발생한다는 의미다. 뇌과학자로 평생을 살아온 저자는 자신의 뇌에 발생한 문제에 대해 전문가적 식견을 발휘하여 조근 조근 짚어나가기 시작한다. 뇌의 어느 부분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뇌의 어떤 기능이 어떻게 되어 인간의 행동이 어떻게 변한다, 는 식이다. 책의 내용 대부분은 이런 식이다. 뇌과학에 대해 흥미가 있었지만 깊게 접근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독자에게는 가벼운 소개서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이 책이 저널리스트의 손을 거쳐 일반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뇌과학적 설명은 결코 깊게 들어가지 않는다. 대충 이런게 있어, 그래서 우리의 뇌가 이렇게 되는거야, 신기하지? 정도다. 학구적 소양을 가진 독자는 불만스러울 수 있다. 그렇다고 수필로써 묵직한 감동을 선사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은 뻔한 자기 자랑과 자기 변명으로 가득하다. 몇 번의 암투병을 이겨낸 인간승리자인 나에게 찬사를 보내라! 그런데 난 심지어 똑똑하기까지 함, 이라는 메시지가 노골적으로 읽힌다. 저자는 폴란드에서 건너온 이민 1세대인데, 이 때문에 이 책은 디아스포라적 색채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수준이 높지 못한 이민자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국에 대한 환멸과 미국에 대한 찬양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미국 중산층 계급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동유럽계 지식인이 보여주는 가장 뻔하고 시시한 모습이다. 심지어 두 자식을 낳은 전 남편을 두고 바람을 피운 부분까지 두루뭉실하게 넘어간다. 이 정도면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느라 도덕개념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다.

폴 크루그먼 | 불황의 경제학

폴 크루그먼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지만(그리고 그를 싫어할 만한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지만), 그 중 딱 세 가지만 꼽아보라고 하면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첫째, 문장이 쉽고 간결하며, 꼭 필요한 단어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둘째, 항상 자신만만하며 충분히 공격적이지만 결코 위트를 잃지 않는다. 셋째, 경제학의 꼭대기에 올라선 사람이 쓴 글이지만, 경제학원론 조차 경험하지 않는 독자도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하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이후 크루그먼은 주류 경제학계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칼럼과 저서를 다수 발표해 왔다. 나 역시 오직 크루그먼의 칼럼을 읽기 위해 한동안 뉴욕 타임즈를 구독한 경험이 있다. 그의 칼럼은 대부분 신랄하고 공격적인 비판으로 가득차 있으며, 반드시 비판의 대상을 반 시체 수준으로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놓은 뒤에야 끝을 맺는다. 논리적으로 완벽할 뿐 아니라 물고 늘어지는 집념 또한 대단해서, 왠만한 정신력이 아니고서는 쉽게 그의 타겟에 걸리면 어느 정도의 상처는 각오해야 할 정도다.

그가 집요하게 공격하는 주 대상은 한때 그가 속해 있던 주류 경제학계와, 그 주류 경제학의 자장 안에서 만들어지는 여러 경제정책들이다. 1980년대 이후 발생한 굵직한 경제위기에 대해 해석하고 그 위기의 해법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크루그먼과 주류 경제학계는 현저한 시각적 차이를 보여왔다. 현대 국제무역이론을 정립하고 국제금융 분야의 권위자로 이름을 떨친 그가 바라보는 세계화와 경제위기는 어떤 모습일까. [불황의 경제학]에서 어느 정도 힌트를 찾을 수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후, 고도로 복잡화된 현대의 금융상품과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선진국의 거대 자본, 그리고 은행처럼 강력한 규제를 받지 않는 그림자금융(shadow banking) 등이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많은 정책가들과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낸 근본적인 원인을 제도와 역사에서 찾지 않고 시간과 장소를 한정시켜 국소적인 원인만을 치유하는 방향으로 논리를 전개시켜 나갔다. 크루그먼의 눈에는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브레튼우즈 체제가 무너지고 변동환율제가 실시된 이후 국제금융시장을 통한 자본의 국제적 이동이 심화되고 국가 간 연결고리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이미 위기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조지 소로스와 같이 한 나라의 중앙은행이 가진 외환보유고와 거의 동등한 수준의 자본력을 동원할 수 있는 거대 투기세력이 한 나라의 통화가치를 떨어뜨려 거대한 수익을 올리는 동안 그 나라의 실물경제는 파탄이 나고 그 나라에 살던 시민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국가 채무불이행 사태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했던 IMF 구제금융은 선진국의 경제논리를 개발도상국에 주입시키는 결과로 나타났다. IMF는 위기에 처한 국가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신 노동시장 자율화와 금융시장 개방 등 선진국의 자본이 보다 손쉽게 침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강요했고, 당장 위기를 끝내야만 했던 작은 국가들은 이에 복종해야만 했다. 크루그먼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시장만이 가진 국소적 문제때문에 발생한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며, 당장 그 어느 나라, 그 어느 때에도 발생할 수 있는 공통적인 위험 인자가 아직도 도처에 존재한다고 역설한다. 공황은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현재의 국제통화제체를 유지하고 국제금융시장이 계속 팽창하는 이상, 불황은 주기적으로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으며, 호황과 불황 사이의 진폭은 세계 경제의 긴밀한 연결성 속에서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나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경제는 한 나라에서 발생한 아주 미세한 사건에도 많은 나라가 민감하게 반응할 정도로 지나치게 신경질적인 이웃들이 사는 공간으로 변했다. 한 나라의 통화정책은 그 나라의 실물경기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환율을 방어하거나 혹은 미국의 금리정책을 쫓아가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스나 포르투갈처럼 미국으로부터 시작된 위기에 노출되어 실물경기가 후퇴한 국가들은 국제기구로부터 원조를 받을 때 재정적자를 일정 수준 이하로 유지할 것을 약속해야 했다. 변동환율제도의 가장 큰 장점은 각국의 통화 및 재정 정책에 독립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국제적 자본거래가 겉잡을 수 없이 커진 요즘의 세상에서는 거시경제정책의 독립성이 여러 측면에서 큰 도전에 직면해있는 것이 사실이다. 크루그먼은 IMF와 WTO 등 국제기구가 편향적임을 지적하고, 최근 발생한 경제위기의 본질적 원인을 치유하지 않는 이상 유사한 위기가 또다시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구 반대편에 사는 거대 자본가의 이익 편취행위로 인해 실질적인 피해를 보는 사람은 이와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온 중산층 이하 직장인들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체제는 과감히 종식되어야 한다. 크루그먼의 가르침은 나로 하여금 앞으로 발생할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최적의 시스템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이졸데 카림 | 나와 타자들

우리는 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익명성이 보장된 온라인상에서 독설을 내뱉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이제 오프라인으로 나와 혐오의 대상에게 실제적인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남성과 여성이 갈라져 싸우고 경상도와 전라도가 갈라져 싸우는 모습은 오래 전부터 보아온 익숙한 광경이지만, 그 ‘결’이 최근 달라졌다. 과거에는 특정 언론사 및 정당이 내세운 가치에 ‘맞추어’ 일정한 갈등의 규칙이 정해졌다면, 요즘에는 뜻이 맞는 개인과 개인이 모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다. 이들은 기존에 존재하는 제도권 세력에게 거꾸로 그 혐오의 색깔을 주입시키고 제도권 세력은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한다. 사회에 흐르는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이 바뀐 것이다. 티파티(Tea Party)의 혼란기를 지나 미국에서는 트럼프라는 괴물이 탄생했고, 이민정책과 극우주의의 몸살을 겪고 난 유럽에는 마크롱이라는 신예가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었다. 이 둘은 기존의 정치문법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포퓰리스트라는 공통점이 있다. 일베와 메갈리아는 한국에만 있는 특수한 집단이 아니다. 전 세계의 정치흐름을 바꾸고 있는 극단주의와 포퓰리즘을 이해하는 핵심은 무엇일까?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이졸데 카림(Isolde Charim)은 그의 저서 [나와 타자들(원제:Ich Und Die Anderen)]에서 포퓰리즘 득세의 본질적 원인을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개인 안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자아 정체성이 사회와 호응하는 방식의 변화로 설명한다. 카림은 먼저 개인을 사회의 일부로 환원시키는 몇가지 장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대표적이다. 민족은 허구이며 허상이지만, 그 어떤 개념보다 개인에게 강한 소속감을 부여하는 효과적인 장치다. 현대사회의 민주정치는 민족과 같은 몇가지 장치를 통해 개인으로 하여금 사회와 감정적인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며, 이 감정적 동질감을 개인별로 동등하게 부여된 표로 환산하여 권력화한다. 카림은 이러한 민주사회의 속성이 개인이 정체성을 느끼는 방식에 따라 조금씩 변해왔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카림에 의하면, 1세대 개인주의가 사회에 개인을 맞추는 방식이었고 2세대 개인주의가 개인의 개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었다면, 3세대 개인주의는 개방과 세계화, 정보의 과다공급에 따른 우연과 불확실, 자신에 대한 불안감 등이 주가 된다. 즉 ‘다원화’된 세계에 사는 개인은 확고한 정체성을 유지해나가기 힘들다. 다양한 종교를 인정해야 하고, 다양한 민족의 공존을 받아들여야 하며, 기존에 누리던 특권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사회가 공고히 유지하고 있던 몇가지 개념들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보며 개인은 ‘감소한 정체성’ 속에서 극심한 불안감을 느낀다. 우리나라로 치면 패미니즘이 각광받는 요즘 이에 대한 반발로 20대 남성이 극단적으로 우경화하는 경우가 이에 속한다.

위축된 자아, 혹은 다원화된 세계에서 근본주의는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오히려 다원화에 대한 퇴행적 반동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고 불안해하는 개인에게 억지로 이상적인 똘레랑스를 강요하는 좌파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 3세대 개인주의는 이성의 영역이 아닌 감정과 공감의 영역에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틈을 파고든 최초의 인물이 마크롱이다. 그는 좌도 우도 아닌 중도의 길로 자신을 정의내리며, 불안감을 느끼는 많은 이들을 ‘공명 공간’으로 불러냈다. 새로운 형태의 개인주의는 기존의 제도권에 자신을 맞추려 하지 않는다. 제도권이 개인에게 다가가 새로운 공간에서 화합되어야 한다. 카림에 의하면 마크롱은 이러한 대중의 성향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한 최초의 정치인이다. 가난한 이민자들이 넘쳐나는 유럽에서 박탈감을 느끼는 이들은 이제 ‘원한’을 ‘혐오’의 언어로 풀어내려 한다. 우리나라는 이 원한과 혐오의 언어가 남성 대 여성의 대결에서 드러난다. 마크롱, 혹은 트럼프는 몇가지 극단적인 이민정책을 실제적으로 전시함으로써 대중이 가진 원한이 씻김굿으로 풀어질 수 있음을 효과적으로 증명해냈다. 이들이 아마추어적인 정치기술을 가지고도 아직까지 위치를 공고히 하는 이유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가장 올바른 길, 가장 지향해야 할 길이 아님을 카림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운동이 상처받기 쉬운 개인의 정체성을 “도덕적 개혁주의”를 통해 하나 하나 보듬어 나가는 동시에 그 연약함을 ‘인정’해준다는 측면에서 새로운 시도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 정치적 올바름 운동도 결국 “지나친 감정화”의 위험에 빠져 그 본질적 가치를 상실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트위터 등의 공간에서 꽤 의미있는 정치적 올바름 운동을 발견할 수 있었으나, 결국 현 시대의 개인의 정체성이 위축된 감정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채 지나친 감정적 대립을 야기하는 바람에 그 성취가 목표한 수준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증오와 광신이 넘실거리는 이 포퓰리즘 시대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질문은 무엇일까? 카림은 책의 말미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충분히 징후적이라고 선언한다. 대중의 감소한 정체성을 간파하고 그 배고픔을 해소해주는 포퓰리즘을 넘어선, 그 포퓰리즘을 극복한 더 나은 형태의 민주주의는 실제적인 ‘무엇’에 대해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은 추상적인 이 책의 결말이 미진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삶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혐오와 광신의 에너지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해보는 것으로 그 공백을 조금이나마 채워보려 한다.

김세희 | 가만한 나날


김세희의 단편소설 모음집 [가만한 나날]을 읽었다. 조금 긴 호흡으로 읽었다. 일부러 하루에 한 편 이상 읽지 않았다. 학기 중에는 아무래도 두꺼운 영문 전공서적을 읽을 일이 많은데, 그것때문인지 내 안의 ‘읽기 자아’가 약간의 무거움을 느꼈나보다. 그럴 때에는 의도적으로 한국어로 쓰인 현대소설을 찾는다. 가장 최근의 한국어가 가장 모범적으로 사용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에 선택한 [가만한 나날]은 무척 유려하게 쓰인 한국어 문장들로 가득하다. 마음에 거슬리는 순간 없이 쉽게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책의 판형 역시 가볍고 산뜻하게 만들어져 있어, 책장을 넘기는 손과 글씨를 따라가는 눈 모두 즐거웠다.

하지만 이 소설집에서 다루는 주제는 그리 즐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여덟편의 단편 중 일곱편의 화자는 2,30대로 추정되는 여성이다. 이들은 직장에서 힘겹게 생존을 위해 살아가거나, 남성 중심 사회가 공고히 쌓아올린 벽에 가로막혀 좌절하거나, 가만히 자리잡은 욕망을 인정받지 못해 아파한다. 1987년생인 지은이와 그 또래 여성이 한국사회에서 겪을 법한 일을 담담한 필치로 묘사해나간다. 지은이가 창조한 세계는 좁다. 젊은, 한국인, 여성, 에서 한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않는다. 그 세계의 주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다만 세계의 중심을 명확히 확정한 후 화자의 내면 속으로 깊게 파고들어간다. 다행히 이 소설집이 공유하는 세계는 한국 현대소설의 주된 독자인 젊은, 한국인, 여성, 에게 매우 익숙한 공간이고,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리얼리즘’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타겟이 되는 독자층으로부터 꽤 많은 공감을 이끌어낼 것이다. 이 소설집에서 빈번하게 발견되는 몇 가지 흥미로운 특징이 있다. 먼저 남성은 이 세계에서 적대적인 존재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위기에 빠진 아내를 두고 숙소로 먼저 돌아가버리는 무심한 남편이거나, 밑도 끝도 없이 역정부터 내는 심약한 아버지이거나, 주인공이 애써 쌓아올린 작은 세계를 무시하는 직장 동료이거나, 혹은 그와 동등한 위치의 어떤 유리벽이거나. 패미니즘적 시선이 느껴진다. 둘째, 같은 여성이라 할지라도 소설 속 화자가 처한 위치보다 높은 곳에 자리잡은 다른 ‘계급’의 여성은 억압적인 기제로 등장한다. 터무니없는 행동을 요구하는 직장 상사이거나, 자신이 갖지 못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인기 많은 웹툰 작가이거나. 불안정한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오늘날의 젊은, 한국인, 여성의 심리를 꽤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이 소설집의 많은 부분에서 지루함을 느꼈다. 순간 순간 번뜩이는 문장들이 발견되긴 하지만, 소설의 전체적인 구조가 유기적으로 짜여져 있다는 느낌을 받기 힘들었고 인물들이 평면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특히 많은 부분에서 소설 속 화자, 혹은 중심인물의 중요한 행동을 설득력 있게 담아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표제작인 “가만한 나날”은 구조적으로 잘 정돈이 되어 있고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게 그려져 있어 재미있게 읽었다. “드림팀”의 경우 많은 여성들이 공감할 만한 내용이라는 의견에 동의하며, 관찰자적인 시선이 퍽 괜찮게 드러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얕은 잠”의 경우 주인공의 황망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그를 돕는 퉁명스러운 외국인 남성과 메모만을 남기고 사라진 남편 등 주변인물이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묘사되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힘들 것으로 보이며, “말과 키스”는 꽤 야심찬 시도라고 하기엔 그 전개과정이 너무 어설퍼서 쉽게 읽어내려갈 수 없었다. 최근 읽었던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단편 중 “지난 주 월요일에”를 참고한다면 좋았을 것 같다. 밀도의 차이가 너무 명확하게 느껴진다.

Niall Ferguson | The Ascent of Money

국내에는 [금융의 지배]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출판된 [The Ascent of Money] 외에도 영국 출신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의 책이 꽤 여러 권 번역되어 시중에 출간되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조금 놀랐다. 나는 [The Ascent of Money]가 대중적으로 널리 읽힐 만큼 친절하게 쓰인 책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보의 비대칭이나 행동 경제학, 케인즈의 일반균형 이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주택저당증권(mortgage backed security; MBS)과 블랙-숄즈 모형의 복잡한 공학적 원리 등이 책의 이곳 저곳에서 튀어나오기 때문에 기본적인 경제학 지식이 없다면 책장을 넘기는 것이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유려하고 쉽게 쓰인 문장과 독자를 쉽게 몰입시키는 훌륭한 스토리텔링 능력은 니얼 퍼거슨이 속한 ‘장르’인 경제사(economic history)가 우리나라에서 가지는 초라한 위상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이 국내 일반 대중에게 널리 소개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작용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장점이 [The Ascent of Money]에서 극대화되어, 이 책의 주 목적인 인류의 금융사 개관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수반해야 하는 다소 어려운 경제학 이론조차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게 돕고 있다. 그 미덕을 인정받아 에미 상 등 굵직한 상도 수상하며 퍼거슨의 명성이 한껏 높아질 수 있었을 것이다.

[The Ascent of Money]는 금융의 기원과 발전을 시대순으로 따라가며 금융이 인류의 발전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강조하는데 집중한다. 다만 요즘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big history’ 의 대표 저작답게 금융사의 모든 측면을 세심하게 다루는 것은 아니고, 은행의 탄생, 보험의 탄생, 버블, 부동산 시장의 명과 암, 국제금융과 퀀트 등 금융사의 중요한 지점을 관통하며 부문별로 가장 중요한 사례를 한두가지 씩 소개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퍼거슨의 훌륭한 점은 독자의 입장에서 각각의 사례로부터 중요 개념으로 일반화시키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별로 느끼지 않게 친절한 안내문을 곳곳에 설치해준다는 점이다. 금융처럼 추상적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개념도 드문데, 상식 수준에서 널리 알려진 서양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과 연결시켜 가시성을 확보해준다는 점도 그의 책이 왜 대중적인지 쉽게 알게 되는 대목이다. 예컨대 현대 금융감독기관이나 중앙은행이 행하는 세부적인 매커니즘을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라 하더라도, 메디치 가문의 영특한 재산불리기 방식과 영란은행의 탄생 비화 등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주요 금융정책기관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탄생했고 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큰 흐름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식이다.

단순히 금융사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낸 책은 아니다. 퍼거슨의 번뜩이는 통찰력은 쉬운 문장 속에서도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중-미 간 활발한 무역-금융 거래를 통한 자본의 국제적 이동의 부활을 언급하며, 현재(이 책은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발간되었다)의 추세가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다시 한번 위기에 봉착할 수 있는 잠재요인으로 양 국 간 정치적 갈등, 더 구체적으로 무역 부문에서의 갈등을 지적하는 대목에 다다르면 그의 혜안에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역사를 통해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처럼 보이지만, 그 누구도 쉽게 해내지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누구나 역사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단 5년 간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문제 없다’는 판단을 내린 블랙-숄즈/VaR 모형의 실패 사례를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퍼거슨은 당시 VaR 모형이 만약 11년 이상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리스크를 추정했다면 실제 발생한 규모의 손실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5년과 11년은 어찌 보면 매우 짧은 기간 차이지만, 그 6년의 차이만으로 현대 금융사의 방향이 통째로 틀어지게 되었다. 이런 방식의 비판은 경제사학자만이 할 수 있는 성격의 비판이다.

책이 가지고 있는 한계도 명확하다. 은행과 보험, 주식 버블과 자산시장의 한계를 차근차근 살펴보는 책의 중반부까지는 완벽에 가까운 균형과 호흡을 보이지만, 국제금융시장과 2000년대 이후의 금융 흐름을 짚어내는 6장 및 결론 부분에 다다르면 중심을 잃고 흔들린다. 이것은 책이 출판되었던 시기가 2009년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불완전성이기도 하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이 간신히 규명되던 시기였고, 이후 세계경제의 방향성이 시계제로인 시기였다. 석학 퍼거슨이라고 해도 2008년 이후의 세계경제가 지금처럼 굼뜨게 회복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버낸키가 헬리콥터에서 달러를 뿌려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며, 바젤III 등 시스템리스크를 체계적으로 잡아내기 위한 국제적 공조가 어떤 방향으로 설계될지 그 구체성까지는 살펴보지 못했을 것이다. 퍼거슨은 금융경제학자, 혹은 경제예측론자보다는 역사학자에 가까운 시선을 보여준다. 때문에 그의 책에서 배워야 할 교훈도 그의 문장만큼이나 간단, 명료하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은 필연적이었으며, 모든 경제적 사건은 그 필연성 위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퍼거슨이 가진 정치적 스탠스(그는 미트 롬니를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오바마를 호되게 비판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금융의 순기능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책은 급하게 마무리되지만, 이 책을 바탕으로 조금 더 공부해야 할 부분들이 발견된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고맙고 다행스럽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