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룬다티 로이: 작은 것들의 신

대학생들을 데리고 베트남으로 짧은 출장을 다녀왔다. (그들에겐 ‘여행’이었겠지만 나에게 그것은 너무나도 확실한 ‘business trip’이었다)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을 끝낼 수 있었다. 결혼기념일(12월 17일)을 맞이해서 즉흥적으로 계획한 부산여행 중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손목서가에 들려 샀던 이 책을 그 이후 한달 동안 질질 끈 나에게 넌지시 올해의 고구마상을 수여하고 싶다. 그 사이에 있었던 기말고사니, 서울여행이니, 논문이니, 출장이니 등등 자질구레한 핑계들을 댈 수 있겠지만, 그냥 이 책을 끝내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이 소설 한 권으로 아룬다티 로이가 부커상과 같은 곳에서 권위를 인정받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거나, 몇백만명이 이 책에 열광했다거나 하는 부가적인 정보때문에 이 책을 구입한 것은 아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책 제목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이 이랑의 음반 제목인줄로만 알고 책을 샀는데(하지만 그것은 [신의 놀이]였다..) 알고보니 넉살의 음반 제목이었다. 어쨌든,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 [작은 것들의 신]은 넉살의 그 아주 뛰어난 음반보다 훨씬 소화하기 힘든 빽빽함을 가지고 있다. 한 줄도 허투루 읽어내려갈 수 없게 만드는 엄격함을 느끼게 하는데, 꽤 두꺼운 책 두께에 숨막힐 정도의 밀도에도 불구하고 책을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흡인력 또한 대단한 편이다. 이 책이 뛰어난 이유는 첫째, 아룬다티 로이만의 독특한 문체가 이미 완벽하게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고, 둘째, 그 문체가 소설의 내용과 조응하며 형식과 내용이 완벽하게 어우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그 와중에 소설 속에 작가 자신을 거리낌 없이 투영하며 세상을 비추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로 치면 미하엘 하네케의 후기작들에서 보이는 작가적 솜씨가 이미 소설 데뷔작에 치밀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세간의 칭송도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나 개인에게 이 작가나 이 소설이 그렇게 크게 강렬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유는 먼저 역설적이게도 그 독특한 문체때문이다. 나는 이런 문체가 기본적으로 버겁다. 같은 인도 출신 작가 중에서 꼽자면 줌파 라히리 쪽이 나에게 더 맞는다. 많은 이들이 로이를 라히리와 비교하던데, 내 눈에는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계열의 작가로 보인다. 오히려 로이는 주노 디아즈와 같은 통통 튀는 문체로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작가들과 함께 묶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큰 것들’에 억압당하는 슬픈 사랑을 위로하기 위해 ‘작은 것들의 신’이 살포시 내려와 이들에게 아주 얄팍한 미소 한줄기를 선사해주고 가는 이 소설의 이야기 구조는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강력한 한 방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을 생각하게 만들고 느끼게 만드는 그 강렬함이 이 소설의 가치를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유지시켜 줄 것이다.

모종린 | 골목길 자본론

나의 누나는 ‘강남’을 싫어하는 사람 중 하나다. ‘강남’으로 인식되는 동네에서는 절대 살지 않겠노라고 내 앞에서 선언까지 한 사람이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강남을 싫어하거나 경멸한다기 보다는 재미없어 하는 쪽에 가깝다. 그 동네는 그녀의 문화적 흥미를 자극할 만한 특출난 자산을 가지고 있지 못한 모양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강남역 대로변이나 신사동 가로수길을 갈 일이 생겨도 그리 신이 나지 않는다. 강남의 어느 동네에 갈 때마다 ‘간지럽다’는 표현을 머릿속에 되내이게 되는데, 그 곳의 문화적 공기가 너무나 이질적으로 느껴져 도저히 동화될 수 없는 거리감이 들 때 그런 표현이 떠오르는 것 같다. 아내도 최근 비슷한 말을 내게 한 적이 있다. “아랫 동네”보다는 “윗 동네”가 자기 취향에 더 맞는 것 같다며, 마포구나 종로구를 살고 싶은 곳으로 꼽았다. 운이 좋게도 두 곳 모두 내가 10년 넘게 살았던 동네들이다.

누나, 아내, 그리고 내가 서울의 특정한 공간을 유별나게 사랑하는 이유, 혹은 그 곳과 물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공간을 유독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공간들이 가지고 있는 ‘골목’의 이질성 때문일 것이다. 버스나 차를 타고 가면 보이는 대로변에 있는 가게들은 홍대입구 앞이나 강남역 주변이나 비슷하다. 올리브 영과 베스킨 라빈스 따위의 가게들이 줄지어 정렬해 있는 모습은 서울이나, 대전이나, 오송이나 크게 차이가 없다. 하지만 큰 길가에서 한 두 블록 안쪽으로 들어가면 나타나는 길, 차 한대가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비로소 그 동네의 진짜 정체성이 드러난다. 어떤 동네의 골목에는 인디 뮤지션들이 태연하게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고, 다른 동네의 뒷골목에 가면 고시생들이 컵밥을 손에 들고 바삐 움직인다.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숨결이 담겨있는 골목의 얼굴이 그 동네의 얼굴인 셈이고, 타지에서 온 방문객들은 그 골목의 얼굴을 소비하고 싶어한다.

모종린 교수는 [골목길 자본론]에서 상권을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한다. 서울 등 대도시의 주요 상권을 명동, 건대입구와 같은 중심상권, 삼성역이나 동대문과 같은 몰링상권, 노량진, 종로 피맛골과 같은 대로변 상권, 그리고 성수동, 연남동, 경리단길과 같은 골목상권으로 나눈 저자는 골목상권이 발생하고 팽창하는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상세히 기술한다. 예컨대 설계된 도로의 구조라던가 스타벅스의 입점 여부, 대중교통의 접근성 등이 골목상권을 필연적으로 탄생시키는 여러가지 요소 중 하나로 작용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사러가마트를 보유한 연희동의 주민들이 부러워지고, 대중교통 시스템을 개혁하여 젊은 도시로 다시 태어난 일본 도야마시의 주민들의 삶이 궁금해진다. 풍부한 사례를 들어 골목상권의 현재를 응시하는 저자의 시선이 탁월하다고 느껴지는 몇몇 지점이 발견되기도 한다.

하지만 책을 계속 읽다보면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순간이 점점 늘어남을 느끼게 된다. 우선 책의 구성이 엉망이다. 저자가 여기저기 매체에 기고한 글을 주제별로 묶어 출판한 듯 보이는데, 그래서 그런지 같은 내용이 몇 번씩 반복된다. 정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책으로서의 가치가 크게 떨어지는 셈이다. 사진은 또 어떠한가. 사진 출처가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들을 실은 모양인데, 보기 부끄러울 정도의 낮은 수준을 보이는 사진을 당당하게 실은 저자의 호연지기에 감탄할 때 쯤 뜬금없은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옹호의 글을 발견하자 마음이 답답해지기 시작한다. “창조경제”라는 단어가 곳곳에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심증은 확증으로 바뀌어간다. 일본 사례에 대한 노골적인 찬양, (“서울은 도쿄가 될 것이다” 등의 주장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된다) 골목상권을 지키기 위한 정책적 제언으로 주장한 일본식 도제시스템을 살짝 바꾼 듯해 보이는 “장인 공동체”, 혹은 “장인대학”, 젠트리피케이션은 건전한 전치과정이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듯한 늬앙스까지. 저자의 이름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뜨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본 뒤 무릎을 탁 치며 책을 덮었다.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까지 가는 길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헛똑똑이 학자의 브루주아 골목 탐방기 잘 읽었습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 불평등의 대가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는 정보의 비대칭(information asymmetry) 문제를 구조화하여 경제모형 안에 도입하고, 독점적 경쟁시장(monopolistic competition)의 형태를 정의하는 한 축인 딕싯-스티글리츠 효용함수를 고안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주류 경제학계에서는 더이상 이룰 것이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다다른 학자다. 미시경제학이든 거시경제학이든, 이론이든 실증분석이든 자신이 속한 학문분야와 상관없이 경제학에 발을 들인 사람이라면 위의 두 경제적 개념을 들어보지 않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의 박사학위 논문주제이자 평생 천착한 연구주제가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을 것 같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다;) 그가 다룬 시장의 비대칭성, 혹은 독점적 경쟁시장 모두 현대 시장경제에 존재하는 불완전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특징들이다. 스티글리츠는 이러한 시장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기업은 이상적인 균형상태보다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하여 추가적인 수입을 확보하고(mark-up revenue), 개별 소비자의 후생은 감소하며, 그 결과 경제적 불평등은 더 심화된다고 주장해왔다.

[불평등의 대가]는 주류 경제학계를 떠남과 동시에 가열차게 주류경제학의 시장중심적, 기업중심적 이론을 비판해온 스티글리츠 사상의 한 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책의 해제를 무려 선대인씨가 썼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이 책의 신뢰도가 확 떨어지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으나,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어내려가다 보면 감히 선대인 따위가 비빌 수 없는 단단하고도 강렬한 그의 사상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다. 최근 읽은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책에서 느꼈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급하게 집어들었지만, 노르베리-호지의 관점과 일부 맥락을 같이 하면서도(세계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등) 전세계적 지역화를 주장하는 노르베리-호지와 달리 기본적인 세계 경제구조의 패턴은 인정하되 그 안에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자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스티글리츠의 시각은 반세계화 주의자들에게 이론적인 배경을 제공해주는 차원을 넘어 경제학의 지평을 넓히는 차원에서 해석되어질 여지가 충분하다. 다만, 미국이라는 단일한 국가에 한정하여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국가별 상이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고(선대인씨처럼 “미국 다음으로 심각한 나라가 한국이다!”라고 주장하면 할 말이 없다), 그가 지속적으로 비판하는 대상인 대기업의 “약탈적” 경제행위의 근간이 되는 이기심, 혹은 ‘애니멀 스피릿’에 대한 구조적 분석이 부재하다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 함께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론 부분에서 그가 제시하는 다양한 정책적 제안들은 현실의 경제구조 안에서 충분히 실현 가능한 것들이다. 본문의 내용 중 인상 깊었던 지대 추구(rent seeking) 행위를 잡아내기 위한 지원금 폐지, 독점금지법 강화, 금융부문 규제강화같은 주장들은 실제로 민주당 정권 시절 신중하게 추구된 전례가 있고, 세계화의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경상수지 적자 해소는 지금 트럼프 행정부가 무역전쟁을 통해(물론 스티글리츠가 원한 방법은 아니었을 것이다)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이 또한 현실에서 정책으로 반영이 된 부분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금융부문의 과도한 위험추구행위를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에 적극 동감하는 편인데, 경제적 호황기에 지나친 신용공급을 추구하지만 불황기에 시작되면 이렇게 과잉공급된 신용을 순식간에 거두어 들여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금융산업의 경기순응성(procyclicality)이 최근 전세계적 경제위기를 발생시킨 주원인 중 하나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금융기관의 경제적 유인을 전환시킬 수 있는 정책적 도구를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 행복의 경제학

행복의경제학
올해 초부터 학교에서 경제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지난 학기에는 경제학의 기본원리와 무역/통상정책의 여러 갈래에 대해 강의했고, 이번 학기에는 국제무역의 이론적 토대와 국제금융의 기본원리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내가 강의하는 내용의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시장은 가장 효율적인 경제시스템이며 자유무역은 모두를 이롭게 할 것이다. 이건 내가 주장하는 소수의견이 아니라, 내가 속한 경제학의 세계에서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여지는 명제다. 이 명제는 누군가에게 ‘신자유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것이며,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교과서에 나오는 뻔하고 흔한 말, 즉 지극히 당연한 자연법칙처럼 받아들여질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불평등을 가속화시키고 극소수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중력의 법칙과도 같은 자연스러운 사회적 규칙으로 이해된다는 것이 일견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나의 명제를 이토록 극명하게 엇갈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이 것 외에도 또 존재하는지 궁금할 정도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오래된 미래]를 통해 국제무역과 세계화가 평화로웠던 지역경제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실증적으로 증명한 바 있다. [행복의 경제학]은 세계화에 반대하고 지역화를 추구하는 노르베리-호지의 사상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책이다. 그녀가 제작한 동명의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요약하고 그녀가 기고한 여러 칼럼의 내용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완성된 책이어서 전체적인 완성도는 떨어지는 편이지만, 노르베리-호지의 세계화에 대한 뚜렷한 반대 입장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이 책에서 세계화를 거부하고 지역화를 추구하자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치고 있으며, 그 근거로 세계화의 경제적 효과는 과장되어 있으며 부정적 영향은 과소평가되어 있음을 다양한 수치로 확인시켜 주고 있다. 세계화를 진전시키는 ‘주범’으로 IMF와 WTO 등 국제금융과 국제무역을 총괄하는 국제기구를 지목하며, GDP 등 지역사회의 ‘행복지수’를 측정할 수 있는 계량지표를 배척하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지표를 개발하자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어찌 보면 상당히 과격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의 내용은 사실 세계화에 반대하는 학자들의 의견을 잘 모아놓은 서베이 보고서이기도 하다. 즉, 노르베리-호지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반대하는 비주류 경제학자들의 주장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오래된 미래] 단 한 권으로 내 머릿속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이름으로 자리잡았다. 이 책에서 그녀가 설파했던 지역화, 혹은 지역주의는 참 매력적이고 아름다워 보이는 개념이었다. 그녀의 주장에 영향을 받아 지금까지도 동네서점, 동네커피숍, 동네빵집 등 다양한 형태로 지역성(locality)을 담보하는 상업시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행복의 경제학]을 읽으며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노르베리-호지가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수단으로 비판하는 그 주류 경제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 단 한번도 특정 이데올로기를 위해 살아왔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주류 경제학이 물리학처럼 일반적인 자연법칙이 인간사회에도 깃들어 있다고 믿는, 순수학문에 가까운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주류 경제학의 기본 가정 중 하나인 인간의 이기심때문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가정은, 이 사회의 여러 병폐들의 원인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고 쿨하게 인정하며 출발하는 지점으로 기능한다. 주류 경제학이 논리적으로 엄밀한 전개과정 속에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인간의 의지’라는 치트키의 사용 가능성 자체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노르베리-호지처럼 세계화에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에 결여되어 있는 치명적인 약점 역시 이 부분에 있다. 이들은 사회가 인간의 선한 의지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대안적인 지역주의적 경제시스템이 윤리적으로, 그리고 생태경제학적으로 ‘옳은’ 명제로 판명난다면 사람들이 이 명제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이데올로기다. 주류 경제학은 ‘사람들은 ~해야 한다’와 같은 규범적인(normative) 주장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학문이다. 주류 경제학이 특정 이데올로기에 봉사한다는 노르베리-호지의 주장이 편견으로 판명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의 선한 의지가 반드시 존재하며, 이 선한 의지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저자의 속박된 시선에서부터 출발하는 셈이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이기심이 나쁜 것일까? 주류경제학은 그 반대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인구가 증가하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멜서스의 우울한(dismal) 경제학을 물리치고- 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어했던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며, 영국이 다른 나라들을 제치고 산업혁명의 주역이 되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발명 특허권을 폭넓게 보장하여 떼돈을 벌고 싶어하는 인간의 이기심을 충실히 자극했던 국가 시스템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이기심은 열등한 신체조건을 가진 인간이라는 종(種)을 지구에서 가장 우등한 존재로 탈바꿈시킨 주된 인자일 수 있다. 이기심에 의해 인류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유전적 형질은 선한 의지에 의해 결코 제거될 수 없다. 인간이라는 종이 존재하는 한, 이들은 끊임없이 더 높은 수준의 물질적 쾌락을 탐할 것이며, 국가 등에 의해 강제로 제재당하기 전까지 자신보다 조금 더 약한 존재를 약탈하는 것에 몰두할 것이다. 그 부작용 중 하나가 지나친 세계화, 혹은 지역사회의 몰락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리 틀린 주장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세계화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최소한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노르베리-호지는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경덕 | 처음 만나는 북유럽 신화

북유럽신화
시작은 운전연습이었다. 세종시는 서울과 달리 자가운전이 필수인 곳이기 때문에, 서울에서 운전을 전혀 하지 않았던 아내도 운전을 새로 배워야 했다. 꽤 잘 가르친다는 선생님을 소개 받아 여름방학 중 며칠 개인교습을 받았다. 아내가 운전연습을 받는 동안 혼자 집을 지키고 있자니 조금 심심해졌다. 그러던 와중 서랍정리가 하고 싶어졌고, 텔레비전이 놓인 TV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쪽 구석에서 플레이스테이션이 나왔다. 1년에 몇 번 하지 않아 구석에 처박아놓은 게임기였다. 갑자기 게임이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게임을 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우리 부부는 자연스럽게 각종 게임을 하나씩 마스터 해나가기 시작했다.

이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친한 형 부부가 세종시를 방문했다. 그는 게임의 고수였다. 두어개 정도의 게임을 추천해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마침 여름맞이 할인기간이어서 거의 반값에 좋은 게임들을 구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 두 게임 중 먼저 시작한 게임이 바로 [갓 오브 워 4]였다. 이 게임은 스파르탄에서 건너온 한 무시무시하고 무뚝뚝한 사나이가 아들과 함께 고대 북유럽 신화 속 세계를 탐험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컨트롤러의 조작능력이 중요한 액션게임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구성이 탄탄해서 한 편의 영화를 보듯 몰입해서 하느라 며칠 밤을 뜬 눈으로 보내야 했다. 그렇게 무사히(물론 ‘무사히’는 아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죽음’을 맞이했지만, 게임 속 주인공은 그 때마다 불굴의 의지로 다시 부활하여 나로 하여금 계속 전진하게 만들었다) 엔딩을 보았고, ‘파밍(farming)’이라고 불리우는 엔딩 후 플레이는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게임창을 닫았다. 하지만 마음 속 어딘가에 아쉬움이 남아 있음을 발견했다.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다보면, 등장인물들이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하여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각종 신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알 수 없는 깊은 소외감을 느껴야했다. 나는 북유럽 신화를 잘 모르기 때문에! 왜 재미있어 보이는 이야기를 자기네들끼리만 저리도 열심히 하는가, 왜 나에게 그 신화속 세계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 것이지? 심통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택하게 된 책, [처음 만나는 북유럽 신화]는 나처럼 고대 북유럽 신화를 잘 모르는 초심자를 위한 친절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각종 신화에 대한 전문가이자 문화인류학자로서 세상을 조망하는 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고대 북유럽 신화의 세계관 및 주요 등장인물을 차분하고 정갈하게 전달하고 있다.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토르의 무적 망치, 묠니르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부터 한쪽 눈을 잃으면서까지 지혜를 갈구했던 최고신 오딘, 사고를 일으키지만 미워할 수 없는 장난꾸러기이자 기어코 그 장난끼를 주체하지 못해 신들의 세계를 멸망시키고야 마는 로키의 이야기까지, 개성 넘치는 신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200쪽 남짓한 분량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읽어내려가게 된다. 나처럼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비해 북유럽 신화에 대한 지식이 짧은 사람이라면, 혹은 [토르]나 [반지의 제왕]을 즐겁게 보았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메타포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답답했던 사람이라면 한번쯤 가볍게 읽어볼만한 책이다.

다니엘 켈만 | 명예

명예
내 독서습관 중 별로 좋지 못한 부분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한 권의 책을 끝내지 못하면 쉽게 다른 책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머뭇거림이다. 책을 읽다 중간에 멈추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 탓에 쉽게 진도를 빼지 못하는 어려운 책을 만나면 전체적인 독서 계획이 한꺼번에 꼬여버린다. 올 여름 나를 가로막은 책은 대런 에이스모글루(Daron Acemoglu)의 [Why Nations Fail]이었다. (최근 한 학생에게 전해 듣기로 이 책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로도 번역이 되어 있다고 한다) 거의 대부분의 주요한 내용은 처음 몇 장에 다 나옴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이야기꾼인 저자의 엄청난 필력때문에 계속 책을 읽어내려가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을 느꼈는데, 문제는 학기가 시작하면서 진득히 앉아 영어로 쓰인 책을 집중해서 읽을 정도의 여유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학기가 시작한 후 지금까지 단 한권의 책도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나는 [Why Nations Fail]을 끝까지 읽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말인즉슨 이 블로그에도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을 쓰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스스로 정한 굵직한 원칙 중 하나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책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것) 책 한 권을 다 읽지 못했다는 열패감에 사로잡혀 이번에는 최대한 얇은 책을 읽기로 결심했고, 책장에 꽂혀있는 빳빳한 책들 중 가장 얇아보이는 책을 골랐는데 그 것이 바로 독일작가 다니엘 켈만의 [명예]였다.

켈만 역시 타고난 이야기꾼인 것처럼 보인다. [명예]는 표지를 젖힌 후 한 번도 쉬지 않고 끝까지 읽어내려갈 수 밖에 없는 매력을 가진 소설이다. 형식적으로는 총 아홉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처럼 보이지만, 각각의 단편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조금 특이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 단편에 등장한 주인공이 다른 작품에서는 스쳐지나가는 인물로 다시 나오고, 한 작품의 주인공이 다른 작품을 창작하는 창작자가 되어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탄생시킨다. 어떤 작품에서는 원 저자(켈만)가 창조한 작품 속 작가와 그 작가가 창조한 작품의 인물이 만나 대화하기도 한다. 이처럼 교묘하게 비틀어놓은 플롯과 서브플롯의 향연 속에서 아홉 편의 단편은 하나의 작품으로 재탄생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 혹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매개체는 휴대폰과 인터넷, 편지와 같은 비대면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아홉편의 단편 중 꽤 많은 작품이 주인공의 자아가 함몰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익명성’을 담보로 한 비대면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단편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혹은 도구적 목적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주제로 기능하는 측면이 강하다.

소설의 처음을 장식하는 ⌈목소리⌋에서 주인공 에블링은 ‘랄프’라는 사람과 똑같은 전화번호를 가지게 되고, 어느날부터 자신을 ‘랄프’로 인식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전화를 받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에블링은 자신을 랄프처럼 인식하기 시작한다. 다른 작품 ⌈탈출구⌋는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게 된 ‘진짜’ 랄프에 대해 다룬다. 유명한 배우였던 랄프는 더이상 자신을 찾지 않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 진짜 배우 랄프가 아닌 그를 흉내내는 가짜 배우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동양⌋의 주인공 마리아는 휴대폰 배터리를 챙겨가지 않은 사소한 실수로 인해 동양의 한 나라에서 순식간에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사건을 마주하게 되고, ⌈토론에 글 올리기⌋의 주인공 몰비츠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행위가 유일한 존재의 가치인 것처럼 여기며 익명성에 집착한다. 이처럼 [명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현실’과 ‘형식’ 사이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잃어버린 듯한 착각에 공통적으로 빠진다. 그리고 이러한 인물들의 모습은 진짜 현실 속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소셜네트워크의 네모난 화면 안에 예쁜 모습을 담기 위해 그 네모 밖의 추악한 것들을 감추려고 하는 우리들,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주인공에 투표하며 화면 속 밝게 웃고 있는 아이돌의 얼굴에 자신을 투영하는 우리들, 현실에서 직접 마주치는 이름없는 타인에게 비소 한 줌 내어주지 않으면서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다니엘 켈만이 [명예]에서 그리고자 했던 모습일런지도 모른다.

 

 

 

알레산드로 보파 |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비스코치브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는 흥미로운 우화(寓話)집이다. 스무편의 짤막한 이야기가 모여있는데, 모든 단편의 주인공 수컷의 이름은 비스코비츠로 통일되어 있다. 비스코비츠는 전갈로 태어나기도 하고 쇠똥구리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각각의 삶에서 비스코비츠는 종(種)의 특성과 본능에 충실하지만, 그안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며 인간 세상을 거울처럼 비추기도 한다. 그 거울 안에는 한 치 앞의 인생도 알지 못하면서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마냥 떠들어대는 인간의 나약함과 자만심이 동물의 모습으로 현현하여 독자를 비추고 있다. 야생의 동물들을 한없이 가여운 존재, 혹은 본능에 충실한 단순한 존재로 바라보는 인간 역시 그 한계와 나약함이 다른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작가는 각각의 동물이 가지는 주요한 특성을 과학적으로 친절하게 설명하며 어렵지 않게 전달한다.

생물학자로 평생을 살다 염증을 느끼던 와중 폭등한 주식가격을 핑계로 긴 휴가를 떠난 저자 알레산드로 보파는 친구들에게 들려주던 짤막한 이야기들을 묶어 이 책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가 전달하는 동물의 삶에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도 있고(뻐꾸기의 산란 행태같은 것들)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는데(해면동물의 생식과정 등) 사실 그러한 생물학적 상식의 전달 유무가 이 책을 읽는데 그리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오히려 짧은 길이의 스무편의 단편에(어떤 단편은 한국어 번역본 기준으로 두 쪽을 넘지 못한다) 서-본-결 구조가 단단하게 짜인 재미있는 서사가 완성된다는 점이 놀랍게 다가온다. 각각의 단편이 가진 특성도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읽는 내내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다. 타고난 이야기꾼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김혼비 |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김혼비
‘한국에서 여성이 취미로 축구를 한다’

억지로 한 문장에 우겨넣은 이 책의 요약은 그 자체로 사회적인 의미를 가진다. 에세이스트 김혼비는 자신이 경험한 여성 사회인 축구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것 자체로 독자들에게 생각할 지점을 여럿 던진다. 남성의 전유물과 같이 여겨지는 스포츠, 그 중에서도 과격한 축에 드는 축구를 여성이 한다는 것, 더 나아가 2,30대 젊은 여성이 아닌 4,50대의 나이 지긋한 여성이 주축이 된 사회인 체육의 형태로 스포츠를 향유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나를 포함한 한국인 대다수에게 익숙하지 않은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이 ‘익숙하지 않음’의 이유를 하나씩 파고들다 보면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축적되어온 불평등과 억압의 역사가 숨어있음을 알게 된다. 그 불편한 현실을 불편하지 않게, 무겁지 않고 유쾌하게 전달한다는 점이 이 책의 첫번째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전세계적으로 볼 때 축구는 여성의 운동으로 자리잡은지 꽤 되는 편이다. 전체적인 프로스포츠 시장 자체가 남성 편향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이건 스포츠 활동을 함에 있어 남성의 육체적 능력이 상대적 우위에 있다는 생물학적 특성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한 결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학원체육이나 사회인 체육 쪽에서는 축구가 여성에게도 많이 열려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축구를 좋아하는 초등학생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다만 이 ‘전세계적 추세’가 한국을 중심으로 살아온 30대 이상의 기성세대에게 ‘인식’되는지의 문제로 한정짓는다면, 아마도 이 책의 저자가 동호회에 처음 가입할 때의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이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야구장을 가득 메운 여성 관중들을 보며 “규칙도 모르면서 치킨이나 먹으러 간다”고 비아냥거리는 자칭 ‘야구매니아’ 남성이 도처에 깔려 있는 현실에서(아니, 그리고 말 나온 김에, 야구 규칙 잘 모르면서 치킨 먹으러 야구장 가는게 그렇게 분하게 생각할 일인가?), 인사이드킥을 연습하고 아웃사이드 드리블을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여성의 모습이 마냥 편하고 자연스럽게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것이다. 저자는 독자의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그 불편한 현실에 대한 인식을 예의바르게 건드린다. 이건 축구 자체에 대한 저자의 절대적인 애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글쓰기 방식이었을 것이다.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좌도 우도, 남도 여도 없다는 간단한 진리를 에세이의 형식을 통해 성공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도 여름이 끝나갈 때 쯤 집 근처에 있는 대전월드컵경기장에 한번 가보기로 결심했다. 2부리그에 있는 대전 시티즌에 소속된 선수 중 아는 선수라고는 한 명도 없지만, 로컬 스포츠팀을 응원하는 기쁨을 너무 잊고 산 것 같아 많은 반성을 했다.

클라이브 제임스 | 죽음을 이기는 독서

죽음을 이기는 독서
이번 여행에서 가지고 간 책은 이 [죽음을 이기는 독서], 달랑 한권이다. 아내와 가진 첫번째 여행은 남해로 떠나 한 곳에서 머무는 3박 4일 일정이었는데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 세 권을 가지고 갔다. 이번 여행은 3주 가까이 되는 긴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한 권 이상 가져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여행이라 일정을 빡빡하게 잡은 탓이 크고, 긴 일정과 잦은 이동으로 짐을 최대한 간편하게 싸야할 필요성도 컸으며, 무엇보다 햇반과 김치, 라면에 가방의 공간을 상당부분 양보해야 했다.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고 오자는 작은 소망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겨우 현실화시킬 수 있었다. 그만큼 이번 여행은 빡빡했고, 또 체력적으로 많은 부담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곳을 다니면서 다양한 기억들을 남길 수 있었으니 ‘인생은 항상 트레이드 오프(trade-off)가 있다’는 격언이 이번에도 맞아떨어진 셈이다.

클라이브 제임스는 호주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비평가라고 한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2010년에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 중에 있으며, [죽음을 이기는 독서]는 [Latest Readings]라는 원제를 달고 2018년 출간됐다. 투병 중에도 끊임없기 독서를 해온 작가의 생각을 담은 에세이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시점에서 아직 사망하지 않은 작가에게 “숭고함”과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은 실례일 것 같다. 작가는 몸이 쇠약해진 투병 생활 중에도 독서 생활을 멈추지 않는다. 평생을 비평가로 활동해온 그가 나열하는 책의 제목들을 읽는 것만으로 숨이 찰 지경이고 그가 읽은 책의 10%도 들어보지조차 못했지만, 그가 묘사하는 책의 내용을 세심하게 따라가기 보다는 책을 읽으며 삶을 버티어내는 그의 자세에 조금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물론 그가 소개하는 책들 중에는 꽤나 높은 흥미를 느껴 리딩 리스트에 포함시키고 싶은 것들도 눈에 띈다. 서양인들에게는 거대한 트라우마로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는 히틀러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이 그렇고, 필립 라킨의 작품들이 그러하며, 나이폴의 책이 그러하다. (물론 클라이브 제임스가 찬양하는 책들 중 상당수가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어떤 책에 대해 떠들든, 그가 떠드는 모습 그 자체가 하나의 서사가 되고 작품이 되며 상징이 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된다.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한 지식인의 열정적인 마지막 모습들은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하는 나에게 좋은 지침서가 될 것 같다.

허주영 엮음 | 성매매 안 하는 남자들

성매매 안 하는 남자들 표지
이 책은 2016년 시작된 ‘수요자 모임’에 참석한 남성들이 성매매와 관련된 각자의 사연들, 주장들, 혹은 상념들을 풀어놓은 에세이 모음집이다. ‘수요자 모임’은 성매매의 공급 측면이 아닌 수요 측면의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2016년 만들어진 일종의 토론 모임으로, 이 포럼의 참가자는 대부분 성매매 경험이 없는 남성들이라고 한다. 이 책에 의하면, 참가자들은 함께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거나 특정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하는 방식으로 우리나라 성매매 시장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공유해오고 있다고 한다.

각종 통계자료에 의하면 한국 남성 중 약 절반 정도가 성매매 경험이 있고, 한국의 성매매 시장 규모는 1년에 (보수적으로 추산해도) 약 6조원 정도 규모로 국내 커피시장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한국인 중 성매매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되지 않은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성매매는 남·녀 간 젠더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데, 왜냐하면 통계적으로 성매매의 수요자-공급자 관계가 남-녀 관계로 고정될 때가 많으며, 성매매 거래의 특성 상 육체의 직·간접적 통제와 구속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기 때문에, 사회에 만성적으로 퍼진 성매매 문화가 남·녀 간 젠더 불평등성 심화에 미치는 영향이 존재한다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책 [성매매 안 하는 남자들]의 배경이 되는 ‘수요자 모임’은 기본적으로 성매매로 인해 피해를 받는 여성을 보호하고자 하는 성매매 반대운동의 기본적인 목적에 더해 성매매를 구매하는 남성의 자발적인 반성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양성 평등적 가치 아래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성매매가 만성화된 한국사회에서 성매매를 ‘자발적으로’ 하지 않은 남성들이 갖는 상식적 수준의 합의를 무난하게 이끌어내고 있다. 이 책은 성매매 합법화 반대 논리가 지나치게 귀납적이고 추상적이며 윤리적인 차원에 갇혀 있다는 비판과, 그 비판에 논리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주최측의 한계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군대에서 흔히 받게 되는 성매매 유혹이나 이후 사회생활에서 강요받게 되는 ‘2차’ 문화 등을 개인적 차원의 ‘위기’로 인식하고 이를 나름 슬기롭게 피해다녔다고 생각하는 나 조차 한국의 성매매 산업을 너무 얕게 이해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의 말처럼,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멍청해서, 혹은 젠더 감성이 부족해서 성매매를 합법화시킨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성매매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성적 불평등 현상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사회적 모럴을 가지고 있었기에 시장논리 아래 탄생할 수 밖에 없는 그 산업을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변질된 유교문화의 압박 속에서 여성이 누리는 사회적 지위는 유럽국가들보다 한참 뒤처져 있다. 성매매의 변질된 형태가 직장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폭력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이런 사회에 존재하는 성매매 산업은 다른 시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흔히 성매매에 찬성하는 남자들은 “못생긴 남자는 어떻게 푸냐?”는 주장을 한다. 여성에게 충분히 성적인 어필을 할 수 없는 남자는 돈을 지급하고 시장에서 성을 구매할 수 있게 허락해야 한다는 논리다. 나의 답은 조금 다르다. “섹스를 못(안)하시면 됩니다” 못생긴 수컷은(혹은 암컷은)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평생 짝짓기를 한 번도 하지 못하고 생명을 다하는 동물도 많다. 그리고 이것은 시장의 법칙이기도 하다. 매력이 없는 상품은 팔리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고, 팔리지 않는 것이 맞고, 팔리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상품의 경쟁력을 제고하고 산업의 경쟁력을 제고하고 나라의 경쟁력을 제고하는 가장 쉬운 법칙이다. 이걸 정부가 인위적으로 나서서 구제해 줘도 괜찮을 정도로 성적 평등성에 대한 우리사회의 모럴이 엄청 단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대기업에 들어가냐?”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이 사람이 돈을 내면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는 시장이 존재하는가. 평생 대기업에 들어가지 못하는 쪽이 더 자연스럽다. 성욕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에 정부가 관심을 더 가져야 한다는 주장… 을 백번 수용한다고 해도, 쌍방의 육체적 관계를 전제로 하는 성관계를 합법화해야 한다는 주장까지는 갈 길이 멀다. 우리나라에서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