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나 노르베리-호지 | 행복의 경제학

행복의경제학
올해 초부터 학교에서 경제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지난 학기에는 경제학의 기본원리와 무역/통상정책의 여러 갈래에 대해 강의했고, 이번 학기에는 국제무역의 이론적 토대와 국제금융의 기본원리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내가 강의하는 내용의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시장은 가장 효율적인 경제시스템이며 자유무역은 모두를 이롭게 할 것이다. 이건 내가 주장하는 소수의견이 아니라, 내가 속한 경제학의 세계에서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여지는 명제다. 이 명제는 누군가에게 ‘신자유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것이며,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교과서에 나오는 뻔하고 흔한 말, 즉 지극히 당연한 자연법칙처럼 받아들여질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불평등을 가속화시키고 극소수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중력의 법칙과도 같은 자연스러운 사회적 규칙으로 이해된다는 것이 일견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나의 명제를 이토록 극명하게 엇갈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이 것 외에도 또 존재하는지 궁금할 정도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오래된 미래]를 통해 국제무역과 세계화가 평화로웠던 지역경제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실증적으로 증명한 바 있다. [행복의 경제학]은 세계화에 반대하고 지역화를 추구하는 노르베리-호지의 사상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책이다. 그녀가 제작한 동명의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요약하고 그녀가 기고한 여러 칼럼의 내용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완성된 책이어서 전체적인 완성도는 떨어지는 편이지만, 노르베리-호지의 세계화에 대한 뚜렷한 반대 입장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이 책에서 세계화를 거부하고 지역화를 추구하자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치고 있으며, 그 근거로 세계화의 경제적 효과는 과장되어 있으며 부정적 영향은 과소평가되어 있음을 다양한 수치로 확인시켜 주고 있다. 세계화를 진전시키는 ‘주범’으로 IMF와 WTO 등 국제금융과 국제무역을 총괄하는 국제기구를 지목하며, GDP 등 지역사회의 ‘행복지수’를 측정할 수 있는 계량지표를 배척하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지표를 개발하자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어찌 보면 상당히 과격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의 내용은 사실 세계화에 반대하는 학자들의 의견을 잘 모아놓은 서베이 보고서이기도 하다. 즉, 노르베리-호지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반대하는 비주류 경제학자들의 주장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오래된 미래] 단 한 권으로 내 머릿속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이름으로 자리잡았다. 이 책에서 그녀가 설파했던 지역화, 혹은 지역주의는 참 매력적이고 아름다워 보이는 개념이었다. 그녀의 주장에 영향을 받아 지금까지도 동네서점, 동네커피숍, 동네빵집 등 다양한 형태로 지역성(locality)을 담보하는 상업시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행복의 경제학]을 읽으며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노르베리-호지가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수단으로 비판하는 그 주류 경제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 단 한번도 특정 이데올로기를 위해 살아왔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주류 경제학이 물리학처럼 일반적인 자연법칙이 인간사회에도 깃들어 있다고 믿는, 순수학문에 가까운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주류 경제학의 기본 가정 중 하나인 인간의 이기심때문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가정은, 이 사회의 여러 병폐들의 원인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고 쿨하게 인정하며 출발하는 지점으로 기능한다. 주류 경제학이 논리적으로 엄밀한 전개과정 속에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인간의 의지’라는 치트키의 사용 가능성 자체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노르베리-호지처럼 세계화에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에 결여되어 있는 치명적인 약점 역시 이 부분에 있다. 이들은 사회가 인간의 선한 의지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대안적인 지역주의적 경제시스템이 윤리적으로, 그리고 생태경제학적으로 ‘옳은’ 명제로 판명난다면 사람들이 이 명제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이데올로기다. 주류 경제학은 ‘사람들은 ~해야 한다’와 같은 규범적인(normative) 주장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학문이다. 주류 경제학이 특정 이데올로기에 봉사한다는 노르베리-호지의 주장이 편견으로 판명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의 선한 의지가 반드시 존재하며, 이 선한 의지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저자의 속박된 시선에서부터 출발하는 셈이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이기심이 나쁜 것일까? 주류경제학은 그 반대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인구가 증가하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멜서스의 우울한(dismal) 경제학을 물리치고- 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어했던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며, 영국이 다른 나라들을 제치고 산업혁명의 주역이 되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발명 특허권을 폭넓게 보장하여 떼돈을 벌고 싶어하는 인간의 이기심을 충실히 자극했던 국가 시스템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이기심은 열등한 신체조건을 가진 인간이라는 종(種)을 지구에서 가장 우등한 존재로 탈바꿈시킨 주된 인자일 수 있다. 이기심에 의해 인류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유전적 형질은 선한 의지에 의해 결코 제거될 수 없다. 인간이라는 종이 존재하는 한, 이들은 끊임없이 더 높은 수준의 물질적 쾌락을 탐할 것이며, 국가 등에 의해 강제로 제재당하기 전까지 자신보다 조금 더 약한 존재를 약탈하는 것에 몰두할 것이다. 그 부작용 중 하나가 지나친 세계화, 혹은 지역사회의 몰락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리 틀린 주장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세계화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최소한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노르베리-호지는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경덕 | 처음 만나는 북유럽 신화

북유럽신화
시작은 운전연습이었다. 세종시는 서울과 달리 자가운전이 필수인 곳이기 때문에, 서울에서 운전을 전혀 하지 않았던 아내도 운전을 새로 배워야 했다. 꽤 잘 가르친다는 선생님을 소개 받아 여름방학 중 며칠 개인교습을 받았다. 아내가 운전연습을 받는 동안 혼자 집을 지키고 있자니 조금 심심해졌다. 그러던 와중 서랍정리가 하고 싶어졌고, 텔레비전이 놓인 TV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쪽 구석에서 플레이스테이션이 나왔다. 1년에 몇 번 하지 않아 구석에 처박아놓은 게임기였다. 갑자기 게임이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게임을 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우리 부부는 자연스럽게 각종 게임을 하나씩 마스터 해나가기 시작했다.

이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친한 형 부부가 세종시를 방문했다. 그는 게임의 고수였다. 두어개 정도의 게임을 추천해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마침 여름맞이 할인기간이어서 거의 반값에 좋은 게임들을 구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 두 게임 중 먼저 시작한 게임이 바로 [갓 오브 워 4]였다. 이 게임은 스파르탄에서 건너온 한 무시무시하고 무뚝뚝한 사나이가 아들과 함께 고대 북유럽 신화 속 세계를 탐험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컨트롤러의 조작능력이 중요한 액션게임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구성이 탄탄해서 한 편의 영화를 보듯 몰입해서 하느라 며칠 밤을 뜬 눈으로 보내야 했다. 그렇게 무사히(물론 ‘무사히’는 아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죽음’을 맞이했지만, 게임 속 주인공은 그 때마다 불굴의 의지로 다시 부활하여 나로 하여금 계속 전진하게 만들었다) 엔딩을 보았고, ‘파밍(farming)’이라고 불리우는 엔딩 후 플레이는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게임창을 닫았다. 하지만 마음 속 어딘가에 아쉬움이 남아 있음을 발견했다.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다보면, 등장인물들이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하여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각종 신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알 수 없는 깊은 소외감을 느껴야했다. 나는 북유럽 신화를 잘 모르기 때문에! 왜 재미있어 보이는 이야기를 자기네들끼리만 저리도 열심히 하는가, 왜 나에게 그 신화속 세계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 것이지? 심통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택하게 된 책, [처음 만나는 북유럽 신화]는 나처럼 고대 북유럽 신화를 잘 모르는 초심자를 위한 친절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각종 신화에 대한 전문가이자 문화인류학자로서 세상을 조망하는 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고대 북유럽 신화의 세계관 및 주요 등장인물을 차분하고 정갈하게 전달하고 있다.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토르의 무적 망치, 묠니르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부터 한쪽 눈을 잃으면서까지 지혜를 갈구했던 최고신 오딘, 사고를 일으키지만 미워할 수 없는 장난꾸러기이자 기어코 그 장난끼를 주체하지 못해 신들의 세계를 멸망시키고야 마는 로키의 이야기까지, 개성 넘치는 신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200쪽 남짓한 분량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읽어내려가게 된다. 나처럼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비해 북유럽 신화에 대한 지식이 짧은 사람이라면, 혹은 [토르]나 [반지의 제왕]을 즐겁게 보았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메타포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답답했던 사람이라면 한번쯤 가볍게 읽어볼만한 책이다.

다니엘 켈만 | 명예

명예
내 독서습관 중 별로 좋지 못한 부분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한 권의 책을 끝내지 못하면 쉽게 다른 책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머뭇거림이다. 책을 읽다 중간에 멈추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 탓에 쉽게 진도를 빼지 못하는 어려운 책을 만나면 전체적인 독서 계획이 한꺼번에 꼬여버린다. 올 여름 나를 가로막은 책은 대런 에이스모글루(Daron Acemoglu)의 [Why Nations Fail]이었다. (최근 한 학생에게 전해 듣기로 이 책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로도 번역이 되어 있다고 한다) 거의 대부분의 주요한 내용은 처음 몇 장에 다 나옴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이야기꾼인 저자의 엄청난 필력때문에 계속 책을 읽어내려가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을 느꼈는데, 문제는 학기가 시작하면서 진득히 앉아 영어로 쓰인 책을 집중해서 읽을 정도의 여유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학기가 시작한 후 지금까지 단 한권의 책도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나는 [Why Nations Fail]을 끝까지 읽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말인즉슨 이 블로그에도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을 쓰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스스로 정한 굵직한 원칙 중 하나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책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것) 책 한 권을 다 읽지 못했다는 열패감에 사로잡혀 이번에는 최대한 얇은 책을 읽기로 결심했고, 책장에 꽂혀있는 빳빳한 책들 중 가장 얇아보이는 책을 골랐는데 그 것이 바로 독일작가 다니엘 켈만의 [명예]였다.

켈만 역시 타고난 이야기꾼인 것처럼 보인다. [명예]는 표지를 젖힌 후 한 번도 쉬지 않고 끝까지 읽어내려갈 수 밖에 없는 매력을 가진 소설이다. 형식적으로는 총 아홉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처럼 보이지만, 각각의 단편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조금 특이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 단편에 등장한 주인공이 다른 작품에서는 스쳐지나가는 인물로 다시 나오고, 한 작품의 주인공이 다른 작품을 창작하는 창작자가 되어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탄생시킨다. 어떤 작품에서는 원 저자(켈만)가 창조한 작품 속 작가와 그 작가가 창조한 작품의 인물이 만나 대화하기도 한다. 이처럼 교묘하게 비틀어놓은 플롯과 서브플롯의 향연 속에서 아홉 편의 단편은 하나의 작품으로 재탄생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 혹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매개체는 휴대폰과 인터넷, 편지와 같은 비대면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아홉편의 단편 중 꽤 많은 작품이 주인공의 자아가 함몰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익명성’을 담보로 한 비대면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단편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혹은 도구적 목적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주제로 기능하는 측면이 강하다.

소설의 처음을 장식하는 ⌈목소리⌋에서 주인공 에블링은 ‘랄프’라는 사람과 똑같은 전화번호를 가지게 되고, 어느날부터 자신을 ‘랄프’로 인식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전화를 받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에블링은 자신을 랄프처럼 인식하기 시작한다. 다른 작품 ⌈탈출구⌋는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게 된 ‘진짜’ 랄프에 대해 다룬다. 유명한 배우였던 랄프는 더이상 자신을 찾지 않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 진짜 배우 랄프가 아닌 그를 흉내내는 가짜 배우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동양⌋의 주인공 마리아는 휴대폰 배터리를 챙겨가지 않은 사소한 실수로 인해 동양의 한 나라에서 순식간에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사건을 마주하게 되고, ⌈토론에 글 올리기⌋의 주인공 몰비츠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행위가 유일한 존재의 가치인 것처럼 여기며 익명성에 집착한다. 이처럼 [명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현실’과 ‘형식’ 사이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잃어버린 듯한 착각에 공통적으로 빠진다. 그리고 이러한 인물들의 모습은 진짜 현실 속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소셜네트워크의 네모난 화면 안에 예쁜 모습을 담기 위해 그 네모 밖의 추악한 것들을 감추려고 하는 우리들,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주인공에 투표하며 화면 속 밝게 웃고 있는 아이돌의 얼굴에 자신을 투영하는 우리들, 현실에서 직접 마주치는 이름없는 타인에게 비소 한 줌 내어주지 않으면서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다니엘 켈만이 [명예]에서 그리고자 했던 모습일런지도 모른다.

 

 

 

알레산드로 보파 |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비스코치브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는 흥미로운 우화(寓話)집이다. 스무편의 짤막한 이야기가 모여있는데, 모든 단편의 주인공 수컷의 이름은 비스코비츠로 통일되어 있다. 비스코비츠는 전갈로 태어나기도 하고 쇠똥구리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각각의 삶에서 비스코비츠는 종(種)의 특성과 본능에 충실하지만, 그안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며 인간 세상을 거울처럼 비추기도 한다. 그 거울 안에는 한 치 앞의 인생도 알지 못하면서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마냥 떠들어대는 인간의 나약함과 자만심이 동물의 모습으로 현현하여 독자를 비추고 있다. 야생의 동물들을 한없이 가여운 존재, 혹은 본능에 충실한 단순한 존재로 바라보는 인간 역시 그 한계와 나약함이 다른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작가는 각각의 동물이 가지는 주요한 특성을 과학적으로 친절하게 설명하며 어렵지 않게 전달한다.

생물학자로 평생을 살다 염증을 느끼던 와중 폭등한 주식가격을 핑계로 긴 휴가를 떠난 저자 알레산드로 보파는 친구들에게 들려주던 짤막한 이야기들을 묶어 이 책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가 전달하는 동물의 삶에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도 있고(뻐꾸기의 산란 행태같은 것들)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는데(해면동물의 생식과정 등) 사실 그러한 생물학적 상식의 전달 유무가 이 책을 읽는데 그리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오히려 짧은 길이의 스무편의 단편에(어떤 단편은 한국어 번역본 기준으로 두 쪽을 넘지 못한다) 서-본-결 구조가 단단하게 짜인 재미있는 서사가 완성된다는 점이 놀랍게 다가온다. 각각의 단편이 가진 특성도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읽는 내내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다. 타고난 이야기꾼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김혼비 |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김혼비
‘한국에서 여성이 취미로 축구를 한다’

억지로 한 문장에 우겨넣은 이 책의 요약은 그 자체로 사회적인 의미를 가진다. 에세이스트 김혼비는 자신이 경험한 여성 사회인 축구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것 자체로 독자들에게 생각할 지점을 여럿 던진다. 남성의 전유물과 같이 여겨지는 스포츠, 그 중에서도 과격한 축에 드는 축구를 여성이 한다는 것, 더 나아가 2,30대 젊은 여성이 아닌 4,50대의 나이 지긋한 여성이 주축이 된 사회인 체육의 형태로 스포츠를 향유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나를 포함한 한국인 대다수에게 익숙하지 않은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이 ‘익숙하지 않음’의 이유를 하나씩 파고들다 보면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축적되어온 불평등과 억압의 역사가 숨어있음을 알게 된다. 그 불편한 현실을 불편하지 않게, 무겁지 않고 유쾌하게 전달한다는 점이 이 책의 첫번째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전세계적으로 볼 때 축구는 여성의 운동으로 자리잡은지 꽤 되는 편이다. 전체적인 프로스포츠 시장 자체가 남성 편향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이건 스포츠 활동을 함에 있어 남성의 육체적 능력이 상대적 우위에 있다는 생물학적 특성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한 결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학원체육이나 사회인 체육 쪽에서는 축구가 여성에게도 많이 열려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축구를 좋아하는 초등학생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다만 이 ‘전세계적 추세’가 한국을 중심으로 살아온 30대 이상의 기성세대에게 ‘인식’되는지의 문제로 한정짓는다면, 아마도 이 책의 저자가 동호회에 처음 가입할 때의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이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야구장을 가득 메운 여성 관중들을 보며 “규칙도 모르면서 치킨이나 먹으러 간다”고 비아냥거리는 자칭 ‘야구매니아’ 남성이 도처에 깔려 있는 현실에서(아니, 그리고 말 나온 김에, 야구 규칙 잘 모르면서 치킨 먹으러 야구장 가는게 그렇게 분하게 생각할 일인가?), 인사이드킥을 연습하고 아웃사이드 드리블을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여성의 모습이 마냥 편하고 자연스럽게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것이다. 저자는 독자의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그 불편한 현실에 대한 인식을 예의바르게 건드린다. 이건 축구 자체에 대한 저자의 절대적인 애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글쓰기 방식이었을 것이다.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좌도 우도, 남도 여도 없다는 간단한 진리를 에세이의 형식을 통해 성공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도 여름이 끝나갈 때 쯤 집 근처에 있는 대전월드컵경기장에 한번 가보기로 결심했다. 2부리그에 있는 대전 시티즌에 소속된 선수 중 아는 선수라고는 한 명도 없지만, 로컬 스포츠팀을 응원하는 기쁨을 너무 잊고 산 것 같아 많은 반성을 했다.

클라이브 제임스 | 죽음을 이기는 독서

죽음을 이기는 독서
이번 여행에서 가지고 간 책은 이 [죽음을 이기는 독서], 달랑 한권이다. 아내와 가진 첫번째 여행은 남해로 떠나 한 곳에서 머무는 3박 4일 일정이었는데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 세 권을 가지고 갔다. 이번 여행은 3주 가까이 되는 긴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한 권 이상 가져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여행이라 일정을 빡빡하게 잡은 탓이 크고, 긴 일정과 잦은 이동으로 짐을 최대한 간편하게 싸야할 필요성도 컸으며, 무엇보다 햇반과 김치, 라면에 가방의 공간을 상당부분 양보해야 했다.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고 오자는 작은 소망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겨우 현실화시킬 수 있었다. 그만큼 이번 여행은 빡빡했고, 또 체력적으로 많은 부담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곳을 다니면서 다양한 기억들을 남길 수 있었으니 ‘인생은 항상 트레이드 오프(trade-off)가 있다’는 격언이 이번에도 맞아떨어진 셈이다.

클라이브 제임스는 호주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비평가라고 한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2010년에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 중에 있으며, [죽음을 이기는 독서]는 [Latest Readings]라는 원제를 달고 2018년 출간됐다. 투병 중에도 끊임없기 독서를 해온 작가의 생각을 담은 에세이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시점에서 아직 사망하지 않은 작가에게 “숭고함”과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은 실례일 것 같다. 작가는 몸이 쇠약해진 투병 생활 중에도 독서 생활을 멈추지 않는다. 평생을 비평가로 활동해온 그가 나열하는 책의 제목들을 읽는 것만으로 숨이 찰 지경이고 그가 읽은 책의 10%도 들어보지조차 못했지만, 그가 묘사하는 책의 내용을 세심하게 따라가기 보다는 책을 읽으며 삶을 버티어내는 그의 자세에 조금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물론 그가 소개하는 책들 중에는 꽤나 높은 흥미를 느껴 리딩 리스트에 포함시키고 싶은 것들도 눈에 띈다. 서양인들에게는 거대한 트라우마로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는 히틀러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이 그렇고, 필립 라킨의 작품들이 그러하며, 나이폴의 책이 그러하다. (물론 클라이브 제임스가 찬양하는 책들 중 상당수가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어떤 책에 대해 떠들든, 그가 떠드는 모습 그 자체가 하나의 서사가 되고 작품이 되며 상징이 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된다.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한 지식인의 열정적인 마지막 모습들은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하는 나에게 좋은 지침서가 될 것 같다.

허주영 엮음 | 성매매 안 하는 남자들

성매매 안 하는 남자들 표지
이 책은 2016년 시작된 ‘수요자 모임’에 참석한 남성들이 성매매와 관련된 각자의 사연들, 주장들, 혹은 상념들을 풀어놓은 에세이 모음집이다. ‘수요자 모임’은 성매매의 공급 측면이 아닌 수요 측면의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2016년 만들어진 일종의 토론 모임으로, 이 포럼의 참가자는 대부분 성매매 경험이 없는 남성들이라고 한다. 이 책에 의하면, 참가자들은 함께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거나 특정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하는 방식으로 우리나라 성매매 시장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공유해오고 있다고 한다.

각종 통계자료에 의하면 한국 남성 중 약 절반 정도가 성매매 경험이 있고, 한국의 성매매 시장 규모는 1년에 (보수적으로 추산해도) 약 6조원 정도 규모로 국내 커피시장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한국인 중 성매매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되지 않은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성매매는 남·녀 간 젠더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데, 왜냐하면 통계적으로 성매매의 수요자-공급자 관계가 남-녀 관계로 고정될 때가 많으며, 성매매 거래의 특성 상 육체의 직·간접적 통제와 구속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기 때문에, 사회에 만성적으로 퍼진 성매매 문화가 남·녀 간 젠더 불평등성 심화에 미치는 영향이 존재한다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책 [성매매 안 하는 남자들]의 배경이 되는 ‘수요자 모임’은 기본적으로 성매매로 인해 피해를 받는 여성을 보호하고자 하는 성매매 반대운동의 기본적인 목적에 더해 성매매를 구매하는 남성의 자발적인 반성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양성 평등적 가치 아래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성매매가 만성화된 한국사회에서 성매매를 ‘자발적으로’ 하지 않은 남성들이 갖는 상식적 수준의 합의를 무난하게 이끌어내고 있다. 이 책은 성매매 합법화 반대 논리가 지나치게 귀납적이고 추상적이며 윤리적인 차원에 갇혀 있다는 비판과, 그 비판에 논리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주최측의 한계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군대에서 흔히 받게 되는 성매매 유혹이나 이후 사회생활에서 강요받게 되는 ‘2차’ 문화 등을 개인적 차원의 ‘위기’로 인식하고 이를 나름 슬기롭게 피해다녔다고 생각하는 나 조차 한국의 성매매 산업을 너무 얕게 이해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의 말처럼,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멍청해서, 혹은 젠더 감성이 부족해서 성매매를 합법화시킨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성매매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성적 불평등 현상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사회적 모럴을 가지고 있었기에 시장논리 아래 탄생할 수 밖에 없는 그 산업을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변질된 유교문화의 압박 속에서 여성이 누리는 사회적 지위는 유럽국가들보다 한참 뒤처져 있다. 성매매의 변질된 형태가 직장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폭력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이런 사회에 존재하는 성매매 산업은 다른 시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흔히 성매매에 찬성하는 남자들은 “못생긴 남자는 어떻게 푸냐?”는 주장을 한다. 여성에게 충분히 성적인 어필을 할 수 없는 남자는 돈을 지급하고 시장에서 성을 구매할 수 있게 허락해야 한다는 논리다. 나의 답은 조금 다르다. “섹스를 못(안)하시면 됩니다” 못생긴 수컷은(혹은 암컷은)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평생 짝짓기를 한 번도 하지 못하고 생명을 다하는 동물도 많다. 그리고 이것은 시장의 법칙이기도 하다. 매력이 없는 상품은 팔리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고, 팔리지 않는 것이 맞고, 팔리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상품의 경쟁력을 제고하고 산업의 경쟁력을 제고하고 나라의 경쟁력을 제고하는 가장 쉬운 법칙이다. 이걸 정부가 인위적으로 나서서 구제해 줘도 괜찮을 정도로 성적 평등성에 대한 우리사회의 모럴이 엄청 단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대기업에 들어가냐?”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이 사람이 돈을 내면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는 시장이 존재하는가. 평생 대기업에 들어가지 못하는 쪽이 더 자연스럽다. 성욕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에 정부가 관심을 더 가져야 한다는 주장… 을 백번 수용한다고 해도, 쌍방의 육체적 관계를 전제로 하는 성관계를 합법화해야 한다는 주장까지는 갈 길이 멀다. 우리나라에서는 말이다.

이명옥·김동훈 | 이명옥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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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 시절 자주 들락날락거렸던 동네 서점이 하나 있다. 영어로 쓰인 책을 빨리 읽지도 못하면서 그 곳을 자주 찾았던 이유의 절반은 (당연히) 허세였고, 나머지 절반은 한국의 서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분야의 서적들에 대한 흥미로움이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분야는 역사쪽이었다. 그 서점의 역사 코너는 꽤나 자세히 세분화되어 정리되어 있었다. 전쟁사(戰爭史) 부분이 따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흥미로웠고, 한 인물에 대한 평전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대형 서점에서 역사 서적들이 어떻게 몰개성화된 상태로 전시되어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더 나아가 한국과 미국이 가진 역사의 물리적 ‘시간’만을 고려한다면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국 사람들이 역사 분야에 보여주는 열정은 한국보다 더 뜨거워보였다.

그 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계속 잡아 끌었던 부분은 한국에서는 그 개념도 생소한 가족사(家族史) 코너였다.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인물부터 전혀 그렇지 않은 인물까지 다루고, 짧게는 한 세대부터 길게는 몇 세대를 아우르는 긴 시간까지 포괄하는 등 이 분야가 가지는 범위의 확장성도 놀라웠지만, 그 가족을 둘러싼 이야기만으로 하나의 역사 서적이 완성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당시 나에겐 획기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내 곧 이러한 가족사적 담화가 매우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가족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나가다 보면 그 가족을 둘러싼 환경이 보인다. 가족의 구성원이 대물림되며 핏줄이 이어지는 과정을 따라가다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대의 변화상이 보인다. 통계수치나 전쟁같은 거대담론만을 나열하면 절대 발견할 수 없는 역사의 미시적 변화상은 시대를 직접 살아낸 민초 개개인의 삶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고, 그러한 미시적 역사를 정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가 가족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가족이 평범하면 평범할수록 거시적-미시적 역사의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있는 훌륭한 케이스 스터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어머니와 고속버스를 타고 하동에서 서울까지 함께 올라온 적이 있다. 네시간 가까이 되었던 그 시간동안 어머니로부터 외갓집 식구들의 역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 이후 시간이 꽤 흐른 뒤에야 당시 어머니의 목소리를 녹음해둘걸,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이후 지금까지, 기회가 허락된다면 어머니의 회고를 녹취해서 글로 풀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해왔다. 어머니의 기력이 쇠해지는 모습이 최근 눈에 띌 정도로 확연히 느껴지는 최근 그러한 생각이 더 강해지고 있다. 어머니의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 지금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녀가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과 어머니 그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의 완성된 글로 정리하여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평생 조연으로, 조력자로만 살아온 삶이기에 더 그런 것 같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한국에 또 있었나보다. [이명옥 회고록]은 공주와 대전, 경기도 광주 등에서 살아온 ‘평범한’ 여자 이명옥이 그녀의 아들 김동훈과 행한 인터뷰를 글로 정리한 책이다. 이 책에서 이명옥은 자신의 삶과 함께 주로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그녀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홀홀단신 넘어와 맨주먹 하나로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일구어냈다. 이명옥의 증언대로 그녀의 아버지가 유독 가족에 집착하며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었던 것은 그가 탄생시킨 가족이 또 누구로부터도 이어받지 않은, 온전히 그와 그의 아내(이명옥의 어머니)가 0의 상태에서부터 만들어낸 가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가족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 시대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이명옥이 어린 시절을 보낸 대전의 판자촌부터 이명옥의 아버지가 숨을 거둔 서울의 지하철까지, 영화보다 더 극적인 삶의 순간들이 숨쉬는 일만큼 평범한 일상 속에 고르게 펴 발라져 있다.

이명옥의 담담한 말투가 상상될 정도로 평온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이 짧은 책은 그녀가 10여년간 모시고 살아온 시어머니의 죽음 장면에 이르러 짤막한 절정과 시큰한 감동을 선사한다. 먹고 살기 위해 젊음을 희생하고 낭만을 포기했던 나의 윗 세대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격한 감정의 파고는 아마도 부모의 죽음이 아니었을까. 나는 평생 무뚝뚝하게 가족을 대해온 아버지가 내 앞에서 처음으로 흘린 눈물을 아직도 기억한다. 할머니의 시신을 염하는 장소였다. 차마 가까이 다가가 마지막 인사를 하지도 못하고 귀퉁이 어딘가에 기대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아버지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이후로 다시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해서 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명옥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길거리에서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죽음을 묘사하며 “걔들(이명옥의 손자·손녀를 가리킨다) 보면 얼마나 예뻐하셨을까” 안타까워 하면서도 “시간이 다 그렇다”며 너무 일찍 떠는 부친을 향한 그리움을 애써 시간 속으로 묻어버린다.

기쁨과 슬픔을 억누르며 살기를 강요받아온 윗 세대가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소중한 것들과 이별을 해야 할 때, 그들은 마치 감정을 능숙하게 다루어온 장인처럼 행세하려 한다. 그 모습이 참으로 애처롭고 애닲게 느껴져 조용히 어루만져 주는 일은 그들을 바라보는 자녀들의 몫이다. 이 책은 그러한 어루만짐이 느껴져서 좋았다. 작가 김동훈은 아주 간단한 질문을 던지는 것 만으로 평범한 사람 이명옥의 특별한 삶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다. 마음을 가만히 움직이는 좋은 책을 읽었다.

김은덕, 백종민 | 사랑한다면 왜

사랑한다면왜
[사랑한다면 왜]는 재미있는 에세이 모음집이다. “지독한 개인주의자”이자 “비혼주의자”였던 두 저자가 결혼이라는 제도를 택해 한 집에 함께 살게 되면서 겪게 된 일들, 그리고 생각들을 정리한 책이다. 이 부부가 지금까지 함께 해 온 삶을 살펴보면 약간 독특하다고 할만한 특징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 결혼식을 치루어냈으며, 결혼 후 1년 간 맞벌이 생활로 돈을 모은 후 2년동안 ‘한 달에 한 도시’ 컨셉으로 세계여행을 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책 세 권을 함께 집필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통장잔고 0원”의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다시 회사에 취직하는 방법 대신 함께 글을 쓰는 삶을 택했다. 그러는 와중에 텔레비전에도 몇 번 나오고 강연 초청도 제법 받게 되는 등 나름의 터를 잘 닦아 나가고 있다. 청담동의 고급 웨딩홀에서 식을 치룬 뒤 서울 변두리 어딘가에 살고 있을 보통의 젊은 부부에게는 다소 의아한 삶의 방식일테지만, 달리 말하면 망원동이나 합정동 어딘가에 머물며 제도권 문화의 영향력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려는 한국판 힙스터 부부가 지속하고자 하는 삶의 전형적인 형태다.

이들이 200쪽 남짓한 짤막한 책 안에 담아내고자 하는 이야기들은 진솔하고 치열하다. “며느리”, “시댁”과 같은 호칭부터 거부하는 여자의 태도는 완고하며, 주방을 ‘차지’하고 요리를 전담하는 남자의 태도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들의 개인주의적인 삶의 태도는 주변 관계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귀결되었다. 양가 부모님과 가까운 가족, 그리고 다섯명 정도의 친구 정도만 남게 된 이들의 삶에는 출산과 육아라는 선택지도 지워졌다. 때문에 이들이 지속하고자 하는 삶의 방식은 주변의 ‘방해’를 최소화시키는 작업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자의 부모는 각자 책임진다는 규칙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부모로부터의 속박을 최소화하고 싶어한다. 그와 동시에 자신들이 책임져야 할 식솔의 수도 ‘0’명으로 최소화시켰다. 그래서 이들의 삶은 이미 충분히 선택되어진 형태로 존재하고, 그렇게 잘 짜여진 조건 위에서 이들의 주장은 충분한 타당성을 획득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모순과 부딪히기도 한다. 예컨대 책을 읽는 내내 대체 ‘명절’의 권위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렇게 자신만만한 부부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인지 궁금했다. “가족 안에 매몰되는 것이 싫어서” 출산을 거부한 이들이 “비혼주의자 친구들과 평생 함께 하겠다”고 선언하는 모습에서 ‘적당한 거리의 관계만 취하며 살겠다’는 요즘 세대의 태도가 전형적으로 느껴져 갑자기 지루해지기도 했다. 아무튼, 최소한 이들은 지금까지 결혼이라는 제도와 한국사회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왔으며, 그 고민의 결과물을 나름의 실천을 통해 현실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 부부가 자신의 생각에 갇혀 이미 상당히 완고해져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비록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할 지언정 삶의 태도를 타의에 의해 바꿀 의지까지는 없어보인다. 나는 이 ‘완고함’이 대부분의 한국인이 가진 아주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닫혀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열려있지 못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부부는 자신의 부모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의 부모는 그 세대 안에서 나름 치열하게 살아왔을 것이다. 그 결과물이 그들의 아들과 딸이다. 그 아들과 딸은 지금 주어진 조건에서 다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그 결과물은 달라진 시대와 함께 그 외형만을 달리할 뿐 본질적으로 ‘우리가 맞아’라는 한국인 특유의 완고함을 1도 버리지 못했다. 이 완고함이 왜 나쁘냐 하면, 주변을 잘 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태도에서 이타적인 마음, 주변을 살피는 마음,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타인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1도 느껴지지 않는다. 부부가 서로 마주보고 꽁냥꽁냥하는 것에서 삶의 기쁨을 느꼈다면 이제 범위를 확대하여 그 기쁨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들이 포기한) 출산과 육아는 인간과 인간이 만나 깨달은 사랑이라는 가치를 사회로 환원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개인적인 이유에 의해 출산과 육아를 포기했다면(그것에 대해 뭐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방식으로 사회와의 공존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부는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경제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적으로 가난해서 마음도 가난해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부분을 중요시하는지 너무 가볍게 넘겨짚은 것 같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는 “지독한 개인주의자”가 저지르는 가장 기본적인 실수이기도 하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답답했나보다. 이 부부는 좋은 사람일지언정 아직 좋은 이웃은 아닌 것 같다. 나의 좋은 이웃이 아니라면, 페미니즘이고 뭐고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장강명 | 당선, 합격, 계급

장강명
장강명의 최근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꽤 재미있게 읽었다. 젊은 세대라면 한번쯤 들어보았고 생각해보았을 “헬조선”을 중심으로 풀어낸 주제의식도 마음에 들었고 빠르게 책장을 넘기게 되는 쉽고 쫀득한 문체도 좋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기대 이상으로 치밀하다고 느낀 작가의 취재능력이었다. 공중에 5cm 정도 떠 있는 다른 한국 소설들과 달리 현실의 밑바닥에 바짝 달라붙어 그 까칠한 촉감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이 소설의 진면목이 작가의 치밀한 사전 취재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역시나, 기자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픽션이 아닌 논픽션을 신작으로 내놓았다는 소식에 적지 않은 흥미를 느꼈다. 그것도 공채와 문학상으로 대표되는 ‘고인 물’을 정면으로 파고드는 르포 형식이라니, 국내 유력 일간지 공채 기자 출신으로 굵직한 문학상을 다수 수상한 그가 작심하고 소위 ‘내부 총질’을 하는데 어찌 기대가 되지 않겠는가.

[당선, 합격, 계급]은 치밀하게 전개하고 명쾌하게 쏟아내는 좋은 논픽션이다. 여기서 ‘좋은’이라는 단어는 ‘사회적으로 필요한’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이 책은 저자가 과거에 속한 사회적 집단(대기업, 정부, 공기업, 언론사를 포괄하는 주류 대기업)이 내부 구성원을 선발하고 육성하는 대표적인 방식인 ‘공채’와, 저자가 현재 속한 사회적 집단(문학계)이 구성원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대표적 방식인 ‘문학상’의 이면을 파고들어 그 명과 암을 제대로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국사회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인재 선발 양식인 공채와 문학상에 대해, 저자는 그 사회적 장점 – 예컨대 공정성과 같은 – 을 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형태의 인재선발 방식이 한국사회의 전체적인 역동성을 해치고 있음을 다각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수많은 인터뷰와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극소수의 인원을 선발하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가 장기간 에너지를 낭비해야 하는 비효율성, 기업이나 문학상이 원하는 인재상과 그 선발 기준 및 절차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 비논리성, 그리고 선발되지 못한 이들이 감수해야 하는 배타성과 차별까지 조목조목 제시한다. 결국 이러한 선발 방식은 사회의 계급을 분화시키고 고착화시키는 역할만 할 뿐, 제대로 된 인재를 발견하고 키워내기 위한 적합한 방식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지방 정부의 말단 공무원으로 평생 일해야 하는 사람이 어려운 국사 문제를 ‘완벽하게’ 풀어야 할 이유는 없다. 몇 년 뒤 자신들의 먹거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삼성그룹에서 몇십년 뒤의 먹거리까지 책임질 인재를 몇십개의 시험문제로 선발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문학계와 영화계 등 예술계에서 폐쇄적이고 배타적으로 행해지는 ‘등단’, 혹은 ‘입봉’의 과정이 갖는 불합리성 역시 본질적으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극히 상대적이고 우연적인 이유에 의해 선정된 작가에게 부여되는 ‘등단’이라는 특혜와 그 이후 문학계의 주류 안으로 편입시켜 내부자(insider)로 활동하게 하는 사다리 걷어차기는 기본이고, 문학상이라는 ‘고시’를 통과하지 못한, 혹은 그러한 방식을 거부한 다수의 작가들에게 가해지는 배타적 차별 현상 역시 만성적이고 노골적이다. 이러한 부조리함은 변호사와 의사, 공무원 등 특정 시험을 통과한 후 ‘자격’을 획득한 사람이 능력 부족 등을 이유로 결코 소속집단에서 누락되지 않는 현상으로 이어지며, 더 나아가 이들의 능력이 공적으로 평가되고 취합되어 공개되는 과정이 암묵적으로 생략되는 현상으로가지 나아간다. 어떤 변호사가 승률이 높은지, 어떤 의사가 어떤 병을 잘 고치는지 일반인이 알기가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네이버 영화 평점처럼 정보의 비대칭성을 완화시킬 수 있는 ‘정보의 민주화’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문학계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문학작품이 자신의 취향과 맞는지 판단할 적절한 기준이 공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평론가의 서평은 너무 현학적이고 언론사의 서평은 칭찬 일색이다. 이 분야 역시 정보의 비대칭성이 강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사회적 비용의 증가 원인이 바로 ‘공채’와 ‘문학상’으로 대변되는 선별적이고도 차별적인 시스템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명확하고 중대한 문제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많은 사람들이 공채와 문학상이 사라지기를 바랄까? 저자는 그조차 어둡게 본다. ‘로스쿨 vs 사시’와 같은 사회적 갈등이 좋은 예다. 사람들은 공채와 문학상으로 대변되는 비합리적인 ‘과거제도’ 방식이 여전히 존치되기를 원하고 있다. 갖은 고생을 해서라도 그 장벽만 넘는다면, 사회적으로 어마어마한 혜택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노량진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수십만명의 젊은이들이 취업을 포기한채 공시에 집착하는 현상부터 “기대치를 낮추어 중소기업에 취직하라”며 중소기업의 연봉구조나 복지혜택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어른들의 행태까지, 이 사회가 조금 더 보잘것 없어지는 현상의 이면에는 개인의 이기심을 부추기는 공채와 같은 사회적 장치가 존재하고 있다.

친구 중 한 명은 대학 졸업 후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공채로 입사했다. 승승장구하던 그 친구는 최근 어떤 이유에서인지 임원으로 올라갈 길이 막혔다는 생각이 들자 심각하게 이직을 고민 중이다. 그 친구의 말에 따르면 오직 공채 출신만이, 그 중에서도 윗선으로 선택을 받아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만이 그룹의 관리를 책임지는 임원 레벨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지인 한 명 역시 대학 졸업 후 국내 대기업에 들어갔는데, 지금도 여전히 ‘임원 코스’를 밟으며 잘 나가고 있다. 그가 가진 소속 그룹에 대한 충성심과 자부심은 대단한 수준이다. 각종 비리에 얽혀 뉴스에 그 회사가 등장하는 것 따위는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못하는 듯 보인다. 어쩌면 이 두 명의 사례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들에게는 국내 대기업의 공채 시험을 통과하여 그 기업의 주류가 되었다는 ‘업적’을 굉장히 중요하게 평가했다. 아직 기업 내부에서 관리직급으로 올라가지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채를 통과했다는 결과만으로 이미 다수의 다른 한국인들과 자신을 가르는 어떤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이들의 삶에서 ‘계급’의 발생은 대기업에 입사할 즈음, 이십대 중반 정도의 젊은 나이에 이미 역동적으로 분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계급 안으로 입성하기 위해 이들이 치루어야 했던 공채 시험이 과연 정말 효율적인 시험방식이었는지, 혹은 심지어 공정한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의심해보지는 않았을 확률이 높다.

이들과 비슷한 방식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계급의 분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장강명은 공채라는 특수한 시험 방식을 통해 계급의 분화와 고착화의 핵심을 잘 꼬집고 있다. 나는 그의 생각에 거의 대부분 동의한다. 그는 이 사회의 역동성을 저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를 잘 짚어냈다. 그의 답답함이 책의 이곳저곳에서 절실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