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슬리 제이미슨 | 공감 연습

[공감 연습]은 미국의 소설가이자 수필가인 레슬리 제이미슨이 주요 매체에 기고한 에세리 11편을 모은 에세이집이라고 할 수 있다. 굉장히 러프하게 표현하면 이와 같지만, 사실 나는 이 책을 어떤 범주에 포함시켜야 할지 지금도 망설이고 있다. 자신이 집적 체험한 바를 적나라하게 기술한 수필이기도 하였다가, 그 지점으로부터 이야기의 층위를 확장시켜 전반적인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화비평처럼 읽히기도 한다. 특정 공간에 있는, 혹은 특정 병명을 가진 사람을 인터뷰하여 이를 정리하기도 했다가, 어떤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재해석하고 그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드는 매체비평이 들어가 있기도 하다. 실로 다양한 방식으로 글을 쓰는 제이미슨이 거의 모든 에세이에서 공통적으로 다루는 주제는 ‘고통’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에세이에서 제이미슨이 공통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바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이다. 본문에서 몇차레 인용한 수잔 손택이 그녀의 직계스승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양한 글쓰기 방식을 다양한 대상에 적용하되 11개의 이야기가 산만하게 퍼져나가지 않고 가지런하게 모여 하나를 비추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라는 선명한 주제의식이 모든 글에서 또렷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라는 주제의식만큼이나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제이미슨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다. 그녀는 그녀만의 문체를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한국어로 번역된 글에서도 강하게 제이미슨의 색깔이 묻어나온다. 제이미슨의 글은 직설적이되 사려깊고, 풍부하게 쓰이되 독자가 스스로 생각한 의견을 삽입할 수 있을 정도의 여지는 남겨둔다. 그래서 읽는 과정이 즐겁고, 지적으로 흥미로우며,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이 있다고 느낀다. 좋은 에세이인 셈이다. 제이미슨이 택한 에세이의 대상 역시 매우 흥미로운데, 이 책의 제목인 [공감 연습]과 같은 제목을 가진 에세이에서는 의대생의 수업을 도와주는 의료 배우로 일한 경험을 살려 의료과정을 객관화하는 과정을 택하되, 본인이 직접 경험한 낙태라는 사건을 삽입함으로써 타인의 감정을 내재화시키는 작업의 중요성을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에세이는 “악마의 미끼”였는데, 모겔론스병(morgellons)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객관화하려는 시도의 다층적인 의미를 깊게 탐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11편의 에세이 모두 훌륭한 것은 아니다. 가끔은 너무 따분해서 페이지를 넘겨버리고 싶은 글도 있었고, 제이미슨 본인의 욕심에 의해 과도하게 일을 벌리다보니 논리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글도 있었다. 하지만 [공감 연습]이 최근 읽은 논픽션 중 꽤 괜찮은 축에 속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안은별 엮음 | IMF 키즈의 생애


“IMF 외환위기”라는 이름으로 주로 불리우는 이벤트가 있었다. 1997년에서 1999년까지, 한국 전역 쯤으로 대충 그 기간과 공간이 정의되고, 대외부채를 감당하지 못한 기업이 연속적으로 도산하는 가운데 금융기관과 정부기관으로까지 그 여파가 미쳐 자칫하다 국가수준의 채무불이행 사태를 맞이할 뻔 했다는 것이 이 이벤트의 전개과정에 대한 거친 요약이며, IMF라는 국제기구를 통해 (그 이름도 ‘치욕적’인) 구제금융을 공급받음으로써 단기적인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단기적인 결론이다. 구제금융의 대가로 IMF로부터 요구받은 노동시장 유연화, 주요기업에 대한 강도높은 구조조정 등의 정책에서 일종의 굴욕감을 느낀 이들은 위의 이야기에 더해 “나의 돌반지를 녹여내어 위기를 극복하는데 일조했다” 따위의, 일제시대에서나 나올법한 무용담을 추가함으로써 나름의 자존감을 유지하려고도 해볼 것이다. 이 이벤트에 대한 해석은 각자 다를 수 있지만, 1998년 이전과 이후 한국사회의 얼굴이 상당히 큰 폭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아마 모두가 공통적인 명백한 사실로써 받아들일 것이다. 그 중 누군가는 이 거대한 사회적 변화기에 자신의 경험을 녹여내어, 예컨대 ‘IMF 외환위기가 발생하지 않았다면’과 같은 부질없는 가정을 덧대는 방식으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데 꽤나 많은 시간을 허비할 수도 있다.

[IMF 키즈의 생애]는 프레시안 기자 출신으로 현재 일본에서 유학중인 안은별이 1980년대에 태어난 7명의 일반인을 인터뷰한 결과물을 엮어놓은 책이다. 위의 문단에 IMF에 대한 간단한 요약을 실어놓은 이유는, [IMF 키즈의 생애]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된 이 책이, 사실상 ‘IMF 키즈’를 전혀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부각하기 위함이다. 안은별은 1980년대에 태어나 다양한 경로를 통해 현재까지 인생을 살아내고 있는 평범한 사람의 인생사를 수집함으로써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어떤 층위의 공통점을 반드시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데, 안은별은 그 공통점을 IMF 외환위기라는 하나의 사건을 프리즘처럼 사용하여 정리해보고자 했던 것 같다. 결과는 대실패다. 나는 7명의 이야기를 읽으며, 대체 왜 이들이 ‘IMF’라는 키워드로 묶여야 하는지, 그 당위성을 파악할 수 없었다. 서문에 쓰인 저자의 변을 읽어보면 대충 이러하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러한 IMF 서사를 거부하는 데서 시작한다. IMF 위기를 단순한 외환 부족에서 일어난, 그것을 갚은 뒤에 진화된 단기간의 사건이 아니라, 전 지구적 변동 속에서 그때까지 한국을 이끌어온 권위주의 개발국가 시스템 자체가 문제시된 사태,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야기한 핵심 계기로 파악하고자 한다.

… 후자는 IMF 경제위기의 해법의 결과로 효율화되고 유연화된 노동시장 구조에서 가장 약한 고리에 있는 노동자로서, 자전적 이야기의 주체로서 주목하고 있다는 데서도 차이가 있다. 물론 이 책은 후자의 의미에 훨씬 가깝다.

… 여기서 IMF는 인터뷰이 각자에게 자신이 시간을 보내온 혹은 시간을 보냄으로써 형성되는 ‘사회’라는 것을 떠올리고 자신의 생애를 그것과의 관련 속에서 말하게 만드는 매개장치다.

정신을 부여잡고 저자가 하려고 했던 말을 이해하려고 애써보면, 저자는 ‘IMF를 기억할 수 있을 정도의 나이를 가진 자’를 인터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트위터에서 만난 저자 나이 또래의 ‘트친’들을 인터뷰하고 이를 책으로 내려는 욕망을 솔직하게 밝혔다면, 서문에서와 같은 지면낭비는 최소한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IMF를 개인의 삶에서 떠올리는 것만으로 매개체가 되고 이를 통해 이들을 ‘IMF 키드’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면, 이 세상의 IMF 키드는 너무나 많을 뿐 아니라, 그 많은 IMF 키드의 생애에서 건져올려낼 수 있는 IMF 외환위기에 대한 함의는 거의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역사적인 사건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자에 대한 전기가 아니라(여기에서는 IMF 외환위기 전개과정에 주로 등장하는 이름들이 될 것이다) 단지 그 시대를 살아낸 필부필부의 삶이 하나의 이야기로서 읽혀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일반적이고 미시적인 삶에서 효과적으로 건져올려낼 수 있는 확실한 교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오직 그럴 수 있을 때에만 어떤 세대에게 합당한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 여기서는 ‘IMF 키즈’ 세대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7명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IMF라는 이벤트는 이미 저만치 사라지고 희미해져버린다. 하나만 예를 들어보자. 이 책에 등장하는 7명 중 상당수가 공무원이나 교사 등, IMF 외환위기로 인해 피해를 받지 않은 가정에서 성장했다.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유복하게 자란 사람의 이야기가 여기저기 등장한다. 김괜저의 경우에는 뉴욕대까지 유학을 갔는데 2008년 금융위기때문에 집으로부터 송금받는 금액이 많이 줄어서 고생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1998년도 아니고 2008년 당시의 환율때문에 고생했다는 것이.. 왜 IMF 키드인지 모르겠다. 황당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중에는 심지어 본인의 선택에 의해 자퇴와 휴학을 반복하다 치과의사로 성공한 여성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고소득자의 삶이 IMF 키즈를 일반화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여성’이라는 억지스러운 개념까지 끌어들인다. 여성이니까 조금 더 힘들게 살았다는 것이다. 맞는 말인데, 그게 여기서 왜 나와! 한마디로 나는 이 책에 ‘낚여’ 버린 셈이다. IMF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 읽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책이다.

물론, 이 책에도 분명 의미있는 부분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홍스시의 기구한 가족사는 그 자체로 뭉툭하게 건드리는 지점이 있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사는 IMF 이전부터 기구했다. IMF가 무언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힘들다. 서유진은 외고를 나와 대안학교에서 공부한 경험이 있다. 저자의 주장대로 IMF 외환위기가 “권위주의적 개발국가 시스템”에서 “신자유주의적 전환”과정을 설명하고 있다면, 그 큰 그림 안에서 서유진의 삶은 어떻게 이해될 것인가. 그녀의 엄마가 그녀를 두고 “실패한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IMF가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그녀의 엄마는 IMF 이전부터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부분에서, 이 책은 등장인물의 삶과 IMF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데에 실패한다. 그냥, 그냥 솔직하게 말했으면 좋겠다. 회사생활 관두고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트위터하는 것이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인데, 기자생활하면서, 또 트위터 하면서 만난 친구들과 깊게 이야기하고 이를 책으로 엮어내면서 유학 스트레스를 풀고 싶었다고. 그냥 그 정도로만 책의 목표를 삼았어도 충분히 재미있는 인터뷰 모음집이 될 수 있었다. 괜히 어줍잖은 어려운 용어 써가면서 애써 정당성을 부여하는 모습이 애처롭다.

김현섭, 김기훈 | 오예! 스페셜티 커피!

[오예! 스페셜티 커피]

금호동에 살던 때, 근처에 있는 성수동은 우리 부부에게 재미있는 놀이터였다. 콘크리트건물과 아스팔트 도로에 둘러싸인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숨쉴 곳을 제공하는 몇 안되는 큰 공원인 서울숲이 있고, 대기업 상권이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성동구 조례에 의해 어느정도 보호되는 골목상권이 있으며, (이제는 그 표현이 민망한 정도에 다다른) “서울의 윌리엄스버그” 핫플레이스들까지 있으니, 호기심 많은 신혼부부 입장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구경을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세종으로 내려온지 꽤 시간이 지난 지금도 소규모 자본을 바탕으로 한 그 곳의 좋은 가게들이 가끔 생각나 문득 그리워지곤 한다.

성수동에서 가장 좋아했던, 그리고 지금도 좋아하는 가게는 서울숲 뒷편 택시회사 옆에 자리잡은 작은 커피숍, 매쉬커피다. 다섯명 정도 되는 손님이 들어오면 가게가 꽉 찰 정도로 자그만한 공간을 가진 이 가게는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몇가지 큰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커피 맛이 끝내준다. 산미를 강조하지만 연하고 은은하게 풀어낸 이 가게만의 특유한 추출방식이 내 취향과 딱 맞았다. 둘째, 바리스타 분들이 무척 친절했다. 아내와 가게를 처음 방문했을 때에는 젊은 여성 바리스타분이 우리를 반겼는데, 서울에서 방문한 그 어떤 스페셜티 커피숍보다 융숭한 환대를 받았다. 처음 보는 얼굴인 우리를 웃으면서 맞이해주었고, 커피 문외한의 엉뚱한 질문에 상냥하고 자세하게 답변해주었으며, 좋은 자리를 추천해주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에게 가게를 맡기고(?) 근처 가게에 놀러가던 그 자유롭고 편안했던 ‘환대’의 색깔과 온도가 참 좋았다. 매쉬커피를 혼자 방문할 때도 있었는데, 그 때에는 이 [오예! 스페셜티 커피!]의 저자인 남성 바리스타 두 분이 나를 반겼다. 그 때 매쉬커피의 핸드드립 공식(1대 20!)을 직접 배울 수 있었고, 세심하고 친절하게 원두의 특성 및 향미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참 좋은 느낌으로 남아있다. 셋째, 멋을 부리지 않아서 좋았다. ‘힙’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서울과, 한국인과, 한국문화와 동떨어진 공간디자인과 커피향미를 소비자에게 강요하는 커피숍이 요즘 너무 많다. 물론 그렇게 해야만 매출이 확보된다면 굳이 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매쉬커피는 공간에서 특별히 멋을 부리지 않고 털털하게 커피맛 하나만으로 소비자를 응대한다는 점에서 ‘서울에만 존재할 수 있는 진짜 커피숍’이라는 인상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런 매쉬커피의 두 바리스타가 스페셜티 커피에 대한 에세이를 썼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그 책을 읽고 싶어 안달이 났다. 서울카페쇼에 갔을 때 살 기회가 있었지만 일부러 뒤로 미루었다. 그 당시에는 오히려 언젠가는 반드시 읽게 될 것을 알았기에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 비로소 이 책을 이틀만에 다 읽어버렸다. 기대만큼 재미있고, 기대보다 훨씬 더 좋은 정보를 많이 얻어갈 수 있는 책이다. ‘이렇게 솔직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영업비밀(?)을 가감없이 풀어놓는데, 아마도 한국에서 커피숍을 운영하는 일의 고단함을 충분히 전달하고 싶었던 저자의 마음씀씀이때문인 것 같다. 젠트리피케이션, 과당경쟁, 까다로운 생두수입절차 등 커피숍 운영자로서 경험해야 하는 씁슬한 현실에 대해 너무 무겁지 않게, 시종일관 밝고 따뜻한 느낌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미덕 중 하나다. 커피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문장마다 절절하게 느껴지지만 책의 어떤 부분에서도 절박함이나 비참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커피를 정말 사랑하기에 커피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저자의 마음가짐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문장을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커피사랑에 동참하게 되어, 어느새 나도 집에 있는 커피도구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되고, 저자가 추천해준 방식으로 커피를 내리면 어떤 맛이 날까 궁금해 조바심이 나기 시작한다(파나마 게이샤! 파나마 게이샤를 맛보고 싶다!). 한국의 커피업계에서 작지 않은 위치를 가진 저자가 여전히 순수한 마음으로 커피를 대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이 책은, 한국에서 자영업을 고려하는 모든 사람이 읽을 가치가 있을 정도로 꽤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라. 비록 힘들더라도.

요즘에도 가끔 인터넷을 통해 매쉬커피의 원두를 주문해 세종에서 내려마신다. “우리가 다시 금호동에 살 일이 있을까?”라고 아내에게 물어보면, 아내는 단호히 그럴 일은 없다고 대답한다. 금호동보다 집값이 비싸고 공기도 더 나쁜 성수동에서는 더더욱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살 일은 없을 것이다. 매쉬커피와 멀리 떨어진 곳에 살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삶이 조금은 서글프게 느껴질 때도 있다. 마을버스를 타고, 혹은 살살 걸어서 ‘동네 단골’ 매쉬커피에 가는 상상을 가끔 한다. 반갑게 맞이하는 바리스타의 얼굴을 보는 그 순간이 참 좋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받아 들고 서울숲으로 향하는 그 길이 참 좋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숨통

[숨통] 표지

이주자 문학, 혹은 디아스포라(diaspora) 문학을 읽을 기회가 생기면 피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읽은 디아스포라 문학의 대부분이 원문으로 영어를, 문학의 배경공간으로 미국을 택했다. 그만큼 미국이 상대적으로 열려있기 때문일까, 강한 자성을 가진 커다란 행성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국부때문일까. 미국에서 오랜 기간 (어떤 종류든) 이민자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더군다나 소수인종으로서 주류 백인사회를 지근거리에서 경험해보았다면, 그 나라가 대외적으로 자랑하는 문화적 다양성과 다인종간 공존의 사회적 가치가 실상은 구조적으로 묘하게 뒤틀려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류와 비주류가 인종, 성별, 학벌에 의해 확연히 구분되고, 주류사회로의 편입과정에서 두꺼운 ‘유리장벽’이 존재하며, 백인중심의 획일적인 문화의 강요가 다양한 방식으로 교묘하게 취해지는 사회가 내가 경험한 미국이다. 최근의 디아스포라 문학은 이민 생활의 고단함과 문화적 이질성에서 오는 충격을 전시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차원을 넘어, 위와 같은 미국사회의 이중성을 폭로하는 프리즘으로도 작동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집 [숨통]은 최근 몇년 간 읽은 모든 디아스포라 문학을 통털어 가장 인상깊은 작품이었다.

가끔 빨리 페이지를 넘기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천천히 심호흡하며 읽고 싶어지는 작품을 만날 때가 있다. 코맥 맥카시의 장편소설이 그랬고, 줌파 라히리의 단편들이 그러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들은 또 어떠한가. 한 문장도 허투루 읽을 수 없게 만드는 이 작가들의 작품에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먼저 문학적으로 무척 아름답다. 문학이 예술의 범주에 속하는 이유는, 더 나아가 예술의 최전선에서 인간애를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이유는 언어가 가진 아름다움을 가장 극적인 형태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맥카시의 건조하지만 가슴을 후벼파는 문체, 사려깊고 속정 많은 라히리의 문체, 낭비되는 단어가 하나도 없어 보일 정도로 간결하고 완벽한 이시구로의 문체는 모두 그 자체로 하나의 차원을 형성한다. 둘째, 이들의 작품은 세상을 비추는 투명한 창이다. 미학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내딛는 그 발걸음이 언뜻 보기에도 무척 무거워, 한 문장이라도 게으르게 읽는 것이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에는 내가 있고, 나의 주변이 있고, 내가 속한 사회가 있다. 그 안에서 공감하고 위로받고 반성하게 된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숨통]은 위와 같은 대가의 미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젊은 작가만이 뿜어낼 수 있는 강렬한 숨결을 추가적으로 드러내는 소설집이다.

[숨통]의 단편들은 사려깊게 쓰였고, 용기있게 발언하며, 슬픈 현실에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문학적으로 무척 아름다우면서 나이지리아와 미국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비춘다. 단순히 묘사하고 풍자하는데 그치지 않고 문장 안에 작가의 시선을 녹여내는 시도가 가히 ‘예술적’이다. [숨통]에서 창조된 세계는 결코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작가가 경험한 세계를 조금씩 변주해갈 뿐이다. 작가가 성장한 나이지리아의 어지러운 상황과 미국으로 이주한 뒤 경험한 필라델리파와 프린스턴 주변의 이중적인 미국백인사회, 그리고 작가와 작가의 아버지가 살아온 터전인 대학과 교수사회가 대부분의 작품에서 주된 배경으로 존재한다. 이토록 좁은 배경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는 이야기들이 불특정 다수의 독자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획득하는 과정은 문학적으로 마법적이기 까지 한데, 이건 순전히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개인의 특출난 재능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별다른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음에도 한 여성의 내면을 깊숙히 따라가는 것만으로 하나의 거대한 감정적 격랑을 만들어내는 ‘지난 월요일에’는 여러 뛰어난 단편들 중에서도 가장 아디치에의 재능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가 개인의 경험이 솔직하게 드러난 듯한 ‘전율’은 소수자에 대한 작가의 따스한 시선을 확인할 수 있는 또다른 작품이다. ‘미국대사관’은 [숨통]을 관통하는 여러 가치들, 예컨대 아프리카 이민자의 고단한 삶, 나이지리아의 어지러운 정치상황, 아프리카 여성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수많은 차별과 학대를 모두 응집한 폭발적인 작품이며, ‘중매인’은 미국사회에서 이민자가 살아가는 두가지 얼굴(철저하게 미국사회에 복종하던지, 철저하게 이방인으로서만 살아가던지)을 극명하게 대비하며 보여주는 현명한 작품이다. 버릴 단편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놀랍고, 책장을 넘기는 것이 무척 아까울 정도로 모든 문장이 사랑스럽다는 사실도 놀랍다.

정세랑 | 피프티 피플

몇주 전 아내가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을 추천해주었을 때, 나중에 읽어볼게, 하고 건성으로 대답한 뒤 결국 지금까지 읽지 않았다. 당시 읽고 있던 다른 책이 있기도 했지만, 이 책이 왠지 [82년생 김지영]과 대구로 읽히는 것 같아 괜히 마뜩치 않았기 때문이다. 조남주의 화제작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꼭 존재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제목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읽기를 거부할 정도면 [82년생 김지영]의 서투르고 억센 문학성과 폭력적인 일반화에 대한 거부감이 생각보다 컸던 것 같다. [보건교사 안은영]이 퇴마사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안 것은 그로부터 며칠 지난 뒤였다.

[피프티 피플]은 주인공이 없는, 혹은 51명의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인 장편소설이다. 표지에 장편소설이라고 적혀있지만, 실제로 책을 읽다보면 50여편의 짤막한 단편소설이 조금의 공통분모를 두고 계속 이어지는 형태임을 알 수 있다. 호흡이 무척 짧은 단편이 각각 주인공을 한 명씩 가지고 있고, 나머지 50여명 중 누군가가 그 주변을 스쳐지나가는 방식이다. 미리 말하지만, 다음 문단에서 하게 될 두어개 정도의 사소한 불평을 고려하더라도 나는 이 소설집을 무척 좋게 읽었다. 각각의 등장인물에서 나의 한 조각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고, 51명의 인물의 이야기가 산만하게 흐트러지지 않고 응집력 있게 잘 뭉쳐져 있는 소설(집)의 짜임새도 마음에 들었다. 짤막한 이야기를 연속적으로 읽는 과정에서 특유의 은율감이 느껴지는 것도 좋았다. 소네트 연작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글의 리듬이 뛰어나서 읽는 동안 지루함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정세랑은 문장을 참 잘 만들어내고, 이야기도 참 잘 직조해내는 것 같다. 이 많은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스쳐가는 주요한 공간으로 병원 응급실을 택한 것도 현명해보인다. 좋은 상징성을 지닌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재를 열심히 한 티도 많이 난다. 많은 이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것 같고, 그 이야기를 다시 자기만의 이야기로 훌륭하게 재탄생시켰다.

사소한 불만이 없을 수 없다. 먼저, 물론 쉽지 않은 작업이었겠지만, 51편의 단편 사이에 존재하는 밀도의 차이가 꽤 있는 편이다. 어떤 단편에서는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먹먹해지거나 실제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행복한 진심이 잘 전달되는 반면, 다른 단편에서는 억지로 머릿수를 맞추기 위해 끼워넣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피상적인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이건 두번째 불평, 즉 작가가 가진 편향성, 혹은 편견이 글의 곳곳에서 드러난다는 사실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이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나이, 혹은 성별, 혹은 그 언저리의 삶에 대한 현명한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주변’에 대해서는 피상적인 편견으로 대충 얼버무리는 태도를 취한다. 소설의 종반부에 등장하는 몇 개의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노골적인 이데올로기, 혹은 프로파간다도 재미없고 따분했다. 갑자기 대학생의 리포트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정세랑보다 더 넓은 스펙트럼으로 더 다양한 인간군상에게 더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한국작가는 지금도 많다.

로버트 쉴러 | 버블 경제학

우리 부부는 최근 디지털피아노를 하나 구입했다. 60만원 정도 되는 나름의 고가(!) 장비였기에 주 사용자인 아내 뿐 아니라 나 역시 이번 기회에 피아노에 대한 의욕이 꽤 크게 불타올랐다. 피아노를 전공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꽤 진지한 학습 경험을 가진 아내와 달리 나는 왼손과 오른손이 따로 놀아야 하는 지점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주저앉은, 아주 전형적인 ‘피아노 바보’ 중 하나라는 사실이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관계로 이번 설 연휴에 창원 부모님댁으로 간 큰 이유 중 하나는 그 곳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되었던 [바이엘 피아노 교본] 상, 하권을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곳에는 바이엘 교본이 없었고, 먼지 쌓인 책장을 구경하다 엉뚱하게 꽂혀서 세종까지 가지고 온 책이 [버블 경제학]이다.

로버트 쉴러(Robert J. Shiller) 교수는 현시대의 많은 거시/금융 경제학자들에게 롤모델과도 같은 존재다. 금융시장의 비효율성을 증명한 연구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학자로서의 경력 뿐 아니라 케이스-쉴러 지수(Case-Shiller Index)를 개발하여 미국 부동산 시장의 가격수준 및 변동성 수치를 정책에 반영한 정책가로서의 역량, 그리고 뉴욕 타임즈 등에 꾸준히 글을 기고하는 등 일반인을 상대로 한 활발한 저작활동까지, 다방면에 걸친 그의 활약상은 거시경제학자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지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융시장의 불완전성과 경제주체의 비이성적 판단이 미치는 결과 – 예컨대 버블 – 에 대해서는 세계 최고의 권위자인 쉴러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전후로 더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쉴러에게 금융위기에 대한 해답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버블 경제학](원제는 [Subprime Solution])은 금융위기 직후 이 새로운 형태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쉴러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한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반부의 명쾌한 진단과 후반부의 뜬구름 잡는 낙관주의가 뒤엉켜버려서 전체적으로 썩 좋은 책이라고는 말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특히 뉴딜 정책에 대한 찬양은 낯뜨거울 정도인데, 만약 지구상에 케인즈교가 있다면 쉴러는 케인즈교 코네티컷 지부의 주교 정도 자리는 차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비경제학자가 번역하고 감수한 책답게 전문용어에 대한 사려깊은 고려가 담겨져 있지 않은 점도 아쉬운 부분인데, 역설적으로 지나치게 쉽게 번역된 탓에 (짧은 책의 분량과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여) 큰 어려움 없이 빠르게 읽어내려갈 수 있다는 점은 장점으로 치부할 수 있겠다.

쉴러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딱 두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부동산 시장은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그리 뒷맛이 좋은 시장이 되지 못한다. 부동산가격은 딱 물가상승률 만큼, 혹은 물가상승률보다 조금 더 낮은 수준으로 상승해왔다. 하지만 사람들이 여전히 부동산시장에서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쉴러에 의하면, 금융시장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버블-버스트 구조는 경제주체의 비이성적 판단이 집단적으로 합쳐진 결과이며, 최근 지나치게 고도화된 금융상품의 특성과 대리인 비용(agency cost) 등 정보의 비대칭성 등에 의해 이러한 시스템적 영향이 증폭되어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불러 일으켰다. 쉴러에 의하면,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우선 금융시장에 존재하는 정보의 비대칭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이를 위해 개인별 맞춤 재무상담 서비스를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고 각종 공시시스템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 이와 함께 금융소비자 보호 정책도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이 어려운 퍼즐은 모두 퀀트(quant)가 풀어줄 것이다!)

여기까지는 아주 상식적인 주장이고, 이 책이 나온 뒤 10여년의 기간동안 책에서 주장된 많은 부분이 실제 정책으로 이행되어왔다. 하지만 책의 가장 뒷부분에서 쉴러가 주장하는 내용은 조금 결이 다르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파생상품시장 등을 통해 부동산 시장에 조금 더 많은 유동성을 불어넣어 투기꾼들이 장난을 치지 못하게 만들자는 쉴러의 주장은, 몇가지 지점에서 지나치게 낙관적이지는 않은지 걱정을 하게 만든다. 첫째, 쉴러는 시장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과연 쉴러가 가진 선의를 시장의 참가자들도 가지고 있을 것인가. 다양한 시장 참가자 모두에게 적절한 경제적 유인이 주어져 자산시장의 변동성 완화 및 리스크관리라는 최종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나에겐 되게 어려운 문제처럼 느껴졌는데 쉴러는 당연히 될 것처럼 이야기한다. 둘째, 쉴러는 정부정책 역시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신뢰하는 것처럼 보인다. 위와 같은 정책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인내심 넘치고 꾸준한 성미를 가진 정책가가 과연 존재하는가. TARP 등의 대규모 구제금융 정책이 실제로 시행되었던 과정을 살펴보면, 쉴러와 같은 이성적 경제학자가 굵직한 금융정책 결정 과정에서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는 여지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셋째, 쉴러는 인간의 마음 역시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1주택자와 같은 소규모 투자자가 과연 자기집 한번 마련해보자는 선한 마음만으로 주택담보대출을 받았을까? 월가에서 수조원을 굴리는 펀드 매니저부터 동네 계모임에 수십만원을 넣는 사람까지 모두의 욕망은 동일하다. 기회만 된다면 타인의 피해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가능성을 충분히 통제함과 동시에 투기적 수요까지 잠재울 수 있는 새로운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시장의 파이를 키우는 방향으로 설정하자는 쉴러의 주장은 나같은 초짜 경제학자의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이 책에서 내 눈에 미친 쉴러는 금융과 시장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경제위기는 정부정책으로 극복 가능하다는 케인즈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땅에서 2cm 정도 발을 떼고 떠 있는 숭고한 인격체처럼 보인다. 책에 적힌 그의 주장 중 가슴에 와닿는 것도 많았다. 아니, 거의 대부분의 주장에 동의했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특히 인플레이션에 연동된 물가지수를 개발하여 이를 지속적으로 대중에게 교육시키자는 주장은 꽤 참신했다. 명목가치와 실질가치를 구분짓는 일은 경제학이 세상에 해줄 수 있는 가장 선한 행동 중 하나인 것 같다.

아룬다티 로이: 작은 것들의 신

대학생들을 데리고 베트남으로 짧은 출장을 다녀왔다. (그들에겐 ‘여행’이었겠지만 나에게 그것은 너무나도 확실한 ‘business trip’이었다)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을 끝낼 수 있었다. 결혼기념일(12월 17일)을 맞이해서 즉흥적으로 계획한 부산여행 중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손목서가에 들려 샀던 이 책을 그 이후 한달 동안 질질 끈 나에게 넌지시 올해의 고구마상을 수여하고 싶다. 그 사이에 있었던 기말고사니, 서울여행이니, 논문이니, 출장이니 등등 자질구레한 핑계들을 댈 수 있겠지만, 그냥 이 책을 끝내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이 소설 한 권으로 아룬다티 로이가 부커상과 같은 곳에서 권위를 인정받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거나, 몇백만명이 이 책에 열광했다거나 하는 부가적인 정보때문에 이 책을 구입한 것은 아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책 제목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이 이랑의 음반 제목인줄로만 알고 책을 샀는데(하지만 그것은 [신의 놀이]였다..) 알고보니 넉살의 음반 제목이었다. 어쨌든,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 [작은 것들의 신]은 넉살의 그 아주 뛰어난 음반보다 훨씬 소화하기 힘든 빽빽함을 가지고 있다. 한 줄도 허투루 읽어내려갈 수 없게 만드는 엄격함을 느끼게 하는데, 꽤 두꺼운 책 두께에 숨막힐 정도의 밀도에도 불구하고 책을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흡인력 또한 대단한 편이다. 이 책이 뛰어난 이유는 첫째, 아룬다티 로이만의 독특한 문체가 이미 완벽하게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고, 둘째, 그 문체가 소설의 내용과 조응하며 형식과 내용이 완벽하게 어우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그 와중에 소설 속에 작가 자신을 거리낌 없이 투영하며 세상을 비추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로 치면 미하엘 하네케의 후기작들에서 보이는 작가적 솜씨가 이미 소설 데뷔작에 치밀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세간의 칭송도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나 개인에게 이 작가나 이 소설이 그렇게 크게 강렬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유는 먼저 역설적이게도 그 독특한 문체때문이다. 나는 이런 문체가 기본적으로 버겁다. 같은 인도 출신 작가 중에서 꼽자면 줌파 라히리 쪽이 나에게 더 맞는다. 많은 이들이 로이를 라히리와 비교하던데, 내 눈에는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계열의 작가로 보인다. 오히려 로이는 주노 디아즈와 같은 통통 튀는 문체로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작가들과 함께 묶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큰 것들’에 억압당하는 슬픈 사랑을 위로하기 위해 ‘작은 것들의 신’이 살포시 내려와 이들에게 아주 얄팍한 미소 한줄기를 선사해주고 가는 이 소설의 이야기 구조는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강력한 한 방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을 생각하게 만들고 느끼게 만드는 그 강렬함이 이 소설의 가치를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유지시켜 줄 것이다.

모종린 | 골목길 자본론

나의 누나는 ‘강남’을 싫어하는 사람 중 하나다. ‘강남’으로 인식되는 동네에서는 절대 살지 않겠노라고 내 앞에서 선언까지 한 사람이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강남을 싫어하거나 경멸한다기 보다는 재미없어 하는 쪽에 가깝다. 그 동네는 그녀의 문화적 흥미를 자극할 만한 특출난 자산을 가지고 있지 못한 모양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강남역 대로변이나 신사동 가로수길을 갈 일이 생겨도 그리 신이 나지 않는다. 강남의 어느 동네에 갈 때마다 ‘간지럽다’는 표현을 머릿속에 되내이게 되는데, 그 곳의 문화적 공기가 너무나 이질적으로 느껴져 도저히 동화될 수 없는 거리감이 들 때 그런 표현이 떠오르는 것 같다. 아내도 최근 비슷한 말을 내게 한 적이 있다. “아랫 동네”보다는 “윗 동네”가 자기 취향에 더 맞는 것 같다며, 마포구나 종로구를 살고 싶은 곳으로 꼽았다. 운이 좋게도 두 곳 모두 내가 10년 넘게 살았던 동네들이다.

누나, 아내, 그리고 내가 서울의 특정한 공간을 유별나게 사랑하는 이유, 혹은 그 곳과 물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공간을 유독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공간들이 가지고 있는 ‘골목’의 이질성 때문일 것이다. 버스나 차를 타고 가면 보이는 대로변에 있는 가게들은 홍대입구 앞이나 강남역 주변이나 비슷하다. 올리브 영과 베스킨 라빈스 따위의 가게들이 줄지어 정렬해 있는 모습은 서울이나, 대전이나, 오송이나 크게 차이가 없다. 하지만 큰 길가에서 한 두 블록 안쪽으로 들어가면 나타나는 길, 차 한대가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비로소 그 동네의 진짜 정체성이 드러난다. 어떤 동네의 골목에는 인디 뮤지션들이 태연하게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고, 다른 동네의 뒷골목에 가면 고시생들이 컵밥을 손에 들고 바삐 움직인다.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숨결이 담겨있는 골목의 얼굴이 그 동네의 얼굴인 셈이고, 타지에서 온 방문객들은 그 골목의 얼굴을 소비하고 싶어한다.

모종린 교수는 [골목길 자본론]에서 상권을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한다. 서울 등 대도시의 주요 상권을 명동, 건대입구와 같은 중심상권, 삼성역이나 동대문과 같은 몰링상권, 노량진, 종로 피맛골과 같은 대로변 상권, 그리고 성수동, 연남동, 경리단길과 같은 골목상권으로 나눈 저자는 골목상권이 발생하고 팽창하는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상세히 기술한다. 예컨대 설계된 도로의 구조라던가 스타벅스의 입점 여부, 대중교통의 접근성 등이 골목상권을 필연적으로 탄생시키는 여러가지 요소 중 하나로 작용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사러가마트를 보유한 연희동의 주민들이 부러워지고, 대중교통 시스템을 개혁하여 젊은 도시로 다시 태어난 일본 도야마시의 주민들의 삶이 궁금해진다. 풍부한 사례를 들어 골목상권의 현재를 응시하는 저자의 시선이 탁월하다고 느껴지는 몇몇 지점이 발견되기도 한다.

하지만 책을 계속 읽다보면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순간이 점점 늘어남을 느끼게 된다. 우선 책의 구성이 엉망이다. 저자가 여기저기 매체에 기고한 글을 주제별로 묶어 출판한 듯 보이는데, 그래서 그런지 같은 내용이 몇 번씩 반복된다. 정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책으로서의 가치가 크게 떨어지는 셈이다. 사진은 또 어떠한가. 사진 출처가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들을 실은 모양인데, 보기 부끄러울 정도의 낮은 수준을 보이는 사진을 당당하게 실은 저자의 호연지기에 감탄할 때 쯤 뜬금없은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옹호의 글을 발견하자 마음이 답답해지기 시작한다. “창조경제”라는 단어가 곳곳에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심증은 확증으로 바뀌어간다. 일본 사례에 대한 노골적인 찬양, (“서울은 도쿄가 될 것이다” 등의 주장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된다) 골목상권을 지키기 위한 정책적 제언으로 주장한 일본식 도제시스템을 살짝 바꾼 듯해 보이는 “장인 공동체”, 혹은 “장인대학”, 젠트리피케이션은 건전한 전치과정이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듯한 늬앙스까지. 저자의 이름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뜨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본 뒤 무릎을 탁 치며 책을 덮었다.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까지 가는 길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헛똑똑이 학자의 브루주아 골목 탐방기 잘 읽었습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 불평등의 대가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는 정보의 비대칭(information asymmetry) 문제를 구조화하여 경제모형 안에 도입하고, 독점적 경쟁시장(monopolistic competition)의 형태를 정의하는 한 축인 딕싯-스티글리츠 효용함수를 고안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주류 경제학계에서는 더이상 이룰 것이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다다른 학자다. 미시경제학이든 거시경제학이든, 이론이든 실증분석이든 자신이 속한 학문분야와 상관없이 경제학에 발을 들인 사람이라면 위의 두 경제적 개념을 들어보지 않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의 박사학위 논문주제이자 평생 천착한 연구주제가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을 것 같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다;) 그가 다룬 시장의 비대칭성, 혹은 독점적 경쟁시장 모두 현대 시장경제에 존재하는 불완전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특징들이다. 스티글리츠는 이러한 시장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기업은 이상적인 균형상태보다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하여 추가적인 수입을 확보하고(mark-up revenue), 개별 소비자의 후생은 감소하며, 그 결과 경제적 불평등은 더 심화된다고 주장해왔다.

[불평등의 대가]는 주류 경제학계를 떠남과 동시에 가열차게 주류경제학의 시장중심적, 기업중심적 이론을 비판해온 스티글리츠 사상의 한 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책의 해제를 무려 선대인씨가 썼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이 책의 신뢰도가 확 떨어지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으나,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어내려가다 보면 감히 선대인 따위가 비빌 수 없는 단단하고도 강렬한 그의 사상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다. 최근 읽은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책에서 느꼈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급하게 집어들었지만, 노르베리-호지의 관점과 일부 맥락을 같이 하면서도(세계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등) 전세계적 지역화를 주장하는 노르베리-호지와 달리 기본적인 세계 경제구조의 패턴은 인정하되 그 안에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자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스티글리츠의 시각은 반세계화 주의자들에게 이론적인 배경을 제공해주는 차원을 넘어 경제학의 지평을 넓히는 차원에서 해석되어질 여지가 충분하다. 다만, 미국이라는 단일한 국가에 한정하여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국가별 상이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고(선대인씨처럼 “미국 다음으로 심각한 나라가 한국이다!”라고 주장하면 할 말이 없다), 그가 지속적으로 비판하는 대상인 대기업의 “약탈적” 경제행위의 근간이 되는 이기심, 혹은 ‘애니멀 스피릿’에 대한 구조적 분석이 부재하다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 함께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론 부분에서 그가 제시하는 다양한 정책적 제안들은 현실의 경제구조 안에서 충분히 실현 가능한 것들이다. 본문의 내용 중 인상 깊었던 지대 추구(rent seeking) 행위를 잡아내기 위한 지원금 폐지, 독점금지법 강화, 금융부문 규제강화같은 주장들은 실제로 민주당 정권 시절 신중하게 추구된 전례가 있고, 세계화의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경상수지 적자 해소는 지금 트럼프 행정부가 무역전쟁을 통해(물론 스티글리츠가 원한 방법은 아니었을 것이다)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이 또한 현실에서 정책으로 반영이 된 부분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금융부문의 과도한 위험추구행위를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에 적극 동감하는 편인데, 경제적 호황기에 지나친 신용공급을 추구하지만 불황기에 시작되면 이렇게 과잉공급된 신용을 순식간에 거두어 들여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금융산업의 경기순응성(procyclicality)이 최근 전세계적 경제위기를 발생시킨 주원인 중 하나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금융기관의 경제적 유인을 전환시킬 수 있는 정책적 도구를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 행복의 경제학

행복의경제학
올해 초부터 학교에서 경제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지난 학기에는 경제학의 기본원리와 무역/통상정책의 여러 갈래에 대해 강의했고, 이번 학기에는 국제무역의 이론적 토대와 국제금융의 기본원리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내가 강의하는 내용의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시장은 가장 효율적인 경제시스템이며 자유무역은 모두를 이롭게 할 것이다. 이건 내가 주장하는 소수의견이 아니라, 내가 속한 경제학의 세계에서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여지는 명제다. 이 명제는 누군가에게 ‘신자유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것이며,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교과서에 나오는 뻔하고 흔한 말, 즉 지극히 당연한 자연법칙처럼 받아들여질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불평등을 가속화시키고 극소수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중력의 법칙과도 같은 자연스러운 사회적 규칙으로 이해된다는 것이 일견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나의 명제를 이토록 극명하게 엇갈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이 것 외에도 또 존재하는지 궁금할 정도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오래된 미래]를 통해 국제무역과 세계화가 평화로웠던 지역경제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실증적으로 증명한 바 있다. [행복의 경제학]은 세계화에 반대하고 지역화를 추구하는 노르베리-호지의 사상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책이다. 그녀가 제작한 동명의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요약하고 그녀가 기고한 여러 칼럼의 내용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완성된 책이어서 전체적인 완성도는 떨어지는 편이지만, 노르베리-호지의 세계화에 대한 뚜렷한 반대 입장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이 책에서 세계화를 거부하고 지역화를 추구하자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치고 있으며, 그 근거로 세계화의 경제적 효과는 과장되어 있으며 부정적 영향은 과소평가되어 있음을 다양한 수치로 확인시켜 주고 있다. 세계화를 진전시키는 ‘주범’으로 IMF와 WTO 등 국제금융과 국제무역을 총괄하는 국제기구를 지목하며, GDP 등 지역사회의 ‘행복지수’를 측정할 수 있는 계량지표를 배척하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지표를 개발하자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어찌 보면 상당히 과격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의 내용은 사실 세계화에 반대하는 학자들의 의견을 잘 모아놓은 서베이 보고서이기도 하다. 즉, 노르베리-호지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반대하는 비주류 경제학자들의 주장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오래된 미래] 단 한 권으로 내 머릿속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이름으로 자리잡았다. 이 책에서 그녀가 설파했던 지역화, 혹은 지역주의는 참 매력적이고 아름다워 보이는 개념이었다. 그녀의 주장에 영향을 받아 지금까지도 동네서점, 동네커피숍, 동네빵집 등 다양한 형태로 지역성(locality)을 담보하는 상업시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행복의 경제학]을 읽으며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노르베리-호지가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수단으로 비판하는 그 주류 경제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 단 한번도 특정 이데올로기를 위해 살아왔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주류 경제학이 물리학처럼 일반적인 자연법칙이 인간사회에도 깃들어 있다고 믿는, 순수학문에 가까운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주류 경제학의 기본 가정 중 하나인 인간의 이기심때문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가정은, 이 사회의 여러 병폐들의 원인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고 쿨하게 인정하며 출발하는 지점으로 기능한다. 주류 경제학이 논리적으로 엄밀한 전개과정 속에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인간의 의지’라는 치트키의 사용 가능성 자체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노르베리-호지처럼 세계화에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에 결여되어 있는 치명적인 약점 역시 이 부분에 있다. 이들은 사회가 인간의 선한 의지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대안적인 지역주의적 경제시스템이 윤리적으로, 그리고 생태경제학적으로 ‘옳은’ 명제로 판명난다면 사람들이 이 명제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이데올로기다. 주류 경제학은 ‘사람들은 ~해야 한다’와 같은 규범적인(normative) 주장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학문이다. 주류 경제학이 특정 이데올로기에 봉사한다는 노르베리-호지의 주장이 편견으로 판명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의 선한 의지가 반드시 존재하며, 이 선한 의지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저자의 속박된 시선에서부터 출발하는 셈이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이기심이 나쁜 것일까? 주류경제학은 그 반대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인구가 증가하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멜서스의 우울한(dismal) 경제학을 물리치고- 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어했던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며, 영국이 다른 나라들을 제치고 산업혁명의 주역이 되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발명 특허권을 폭넓게 보장하여 떼돈을 벌고 싶어하는 인간의 이기심을 충실히 자극했던 국가 시스템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이기심은 열등한 신체조건을 가진 인간이라는 종(種)을 지구에서 가장 우등한 존재로 탈바꿈시킨 주된 인자일 수 있다. 이기심에 의해 인류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유전적 형질은 선한 의지에 의해 결코 제거될 수 없다. 인간이라는 종이 존재하는 한, 이들은 끊임없이 더 높은 수준의 물질적 쾌락을 탐할 것이며, 국가 등에 의해 강제로 제재당하기 전까지 자신보다 조금 더 약한 존재를 약탈하는 것에 몰두할 것이다. 그 부작용 중 하나가 지나친 세계화, 혹은 지역사회의 몰락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리 틀린 주장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세계화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최소한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노르베리-호지는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