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졸데 카림 | 나와 타자들

우리는 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익명성이 보장된 온라인상에서 독설을 내뱉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이제 오프라인으로 나와 혐오의 대상에게 실제적인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남성과 여성이 갈라져 싸우고 경상도와 전라도가 갈라져 싸우는 모습은 오래 전부터 보아온 익숙한 광경이지만, 그 ‘결’이 최근 달라졌다. 과거에는 특정 언론사 및 정당이 내세운 가치에 ‘맞추어’ 일정한 갈등의 규칙이 정해졌다면, 요즘에는 뜻이 맞는 개인과 개인이 모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다. 이들은 기존에 존재하는 제도권 세력에게 거꾸로 그 혐오의 색깔을 주입시키고 제도권 세력은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한다. 사회에 흐르는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이 바뀐 것이다. 티파티(Tea Party)의 혼란기를 지나 미국에서는 트럼프라는 괴물이 탄생했고, 이민정책과 극우주의의 몸살을 겪고 난 유럽에는 마크롱이라는 신예가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었다. 이 둘은 기존의 정치문법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포퓰리스트라는 공통점이 있다. 일베와 메갈리아는 한국에만 있는 특수한 집단이 아니다. 전 세계의 정치흐름을 바꾸고 있는 극단주의와 포퓰리즘을 이해하는 핵심은 무엇일까?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이졸데 카림(Isolde Charim)은 그의 저서 [나와 타자들(원제:Ich Und Die Anderen)]에서 포퓰리즘 득세의 본질적 원인을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개인 안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자아 정체성이 사회와 호응하는 방식의 변화로 설명한다. 카림은 먼저 개인을 사회의 일부로 환원시키는 몇가지 장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대표적이다. 민족은 허구이며 허상이지만, 그 어떤 개념보다 개인에게 강한 소속감을 부여하는 효과적인 장치다. 현대사회의 민주정치는 민족과 같은 몇가지 장치를 통해 개인으로 하여금 사회와 감정적인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며, 이 감정적 동질감을 개인별로 동등하게 부여된 표로 환산하여 권력화한다. 카림은 이러한 민주사회의 속성이 개인이 정체성을 느끼는 방식에 따라 조금씩 변해왔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카림에 의하면, 1세대 개인주의가 사회에 개인을 맞추는 방식이었고 2세대 개인주의가 개인의 개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었다면, 3세대 개인주의는 개방과 세계화, 정보의 과다공급에 따른 우연과 불확실, 자신에 대한 불안감 등이 주가 된다. 즉 ‘다원화’된 세계에 사는 개인은 확고한 정체성을 유지해나가기 힘들다. 다양한 종교를 인정해야 하고, 다양한 민족의 공존을 받아들여야 하며, 기존에 누리던 특권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사회가 공고히 유지하고 있던 몇가지 개념들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보며 개인은 ‘감소한 정체성’ 속에서 극심한 불안감을 느낀다. 우리나라로 치면 패미니즘이 각광받는 요즘 이에 대한 반발로 20대 남성이 극단적으로 우경화하는 경우가 이에 속한다.

위축된 자아, 혹은 다원화된 세계에서 근본주의는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오히려 다원화에 대한 퇴행적 반동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고 불안해하는 개인에게 억지로 이상적인 똘레랑스를 강요하는 좌파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 3세대 개인주의는 이성의 영역이 아닌 감정과 공감의 영역에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틈을 파고든 최초의 인물이 마크롱이다. 그는 좌도 우도 아닌 중도의 길로 자신을 정의내리며, 불안감을 느끼는 많은 이들을 ‘공명 공간’으로 불러냈다. 새로운 형태의 개인주의는 기존의 제도권에 자신을 맞추려 하지 않는다. 제도권이 개인에게 다가가 새로운 공간에서 화합되어야 한다. 카림에 의하면 마크롱은 이러한 대중의 성향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한 최초의 정치인이다. 가난한 이민자들이 넘쳐나는 유럽에서 박탈감을 느끼는 이들은 이제 ‘원한’을 ‘혐오’의 언어로 풀어내려 한다. 우리나라는 이 원한과 혐오의 언어가 남성 대 여성의 대결에서 드러난다. 마크롱, 혹은 트럼프는 몇가지 극단적인 이민정책을 실제적으로 전시함으로써 대중이 가진 원한이 씻김굿으로 풀어질 수 있음을 효과적으로 증명해냈다. 이들이 아마추어적인 정치기술을 가지고도 아직까지 위치를 공고히 하는 이유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가장 올바른 길, 가장 지향해야 할 길이 아님을 카림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운동이 상처받기 쉬운 개인의 정체성을 “도덕적 개혁주의”를 통해 하나 하나 보듬어 나가는 동시에 그 연약함을 ‘인정’해준다는 측면에서 새로운 시도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 정치적 올바름 운동도 결국 “지나친 감정화”의 위험에 빠져 그 본질적 가치를 상실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트위터 등의 공간에서 꽤 의미있는 정치적 올바름 운동을 발견할 수 있었으나, 결국 현 시대의 개인의 정체성이 위축된 감정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채 지나친 감정적 대립을 야기하는 바람에 그 성취가 목표한 수준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증오와 광신이 넘실거리는 이 포퓰리즘 시대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질문은 무엇일까? 카림은 책의 말미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충분히 징후적이라고 선언한다. 대중의 감소한 정체성을 간파하고 그 배고픔을 해소해주는 포퓰리즘을 넘어선, 그 포퓰리즘을 극복한 더 나은 형태의 민주주의는 실제적인 ‘무엇’에 대해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은 추상적인 이 책의 결말이 미진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삶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혐오와 광신의 에너지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해보는 것으로 그 공백을 조금이나마 채워보려 한다.

김세희 | 가만한 나날


김세희의 단편소설 모음집 [가만한 나날]을 읽었다. 조금 긴 호흡으로 읽었다. 일부러 하루에 한 편 이상 읽지 않았다. 학기 중에는 아무래도 두꺼운 영문 전공서적을 읽을 일이 많은데, 그것때문인지 내 안의 ‘읽기 자아’가 약간의 무거움을 느꼈나보다. 그럴 때에는 의도적으로 한국어로 쓰인 현대소설을 찾는다. 가장 최근의 한국어가 가장 모범적으로 사용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에 선택한 [가만한 나날]은 무척 유려하게 쓰인 한국어 문장들로 가득하다. 마음에 거슬리는 순간 없이 쉽게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책의 판형 역시 가볍고 산뜻하게 만들어져 있어, 책장을 넘기는 손과 글씨를 따라가는 눈 모두 즐거웠다.

하지만 이 소설집에서 다루는 주제는 그리 즐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여덟편의 단편 중 일곱편의 화자는 2,30대로 추정되는 여성이다. 이들은 직장에서 힘겹게 생존을 위해 살아가거나, 남성 중심 사회가 공고히 쌓아올린 벽에 가로막혀 좌절하거나, 가만히 자리잡은 욕망을 인정받지 못해 아파한다. 1987년생인 지은이와 그 또래 여성이 한국사회에서 겪을 법한 일을 담담한 필치로 묘사해나간다. 지은이가 창조한 세계는 좁다. 젊은, 한국인, 여성, 에서 한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않는다. 그 세계의 주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다만 세계의 중심을 명확히 확정한 후 화자의 내면 속으로 깊게 파고들어간다. 다행히 이 소설집이 공유하는 세계는 한국 현대소설의 주된 독자인 젊은, 한국인, 여성, 에게 매우 익숙한 공간이고,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리얼리즘’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타겟이 되는 독자층으로부터 꽤 많은 공감을 이끌어낼 것이다. 이 소설집에서 빈번하게 발견되는 몇 가지 흥미로운 특징이 있다. 먼저 남성은 이 세계에서 적대적인 존재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위기에 빠진 아내를 두고 숙소로 먼저 돌아가버리는 무심한 남편이거나, 밑도 끝도 없이 역정부터 내는 심약한 아버지이거나, 주인공이 애써 쌓아올린 작은 세계를 무시하는 직장 동료이거나, 혹은 그와 동등한 위치의 어떤 유리벽이거나. 패미니즘적 시선이 느껴진다. 둘째, 같은 여성이라 할지라도 소설 속 화자가 처한 위치보다 높은 곳에 자리잡은 다른 ‘계급’의 여성은 억압적인 기제로 등장한다. 터무니없는 행동을 요구하는 직장 상사이거나, 자신이 갖지 못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인기 많은 웹툰 작가이거나. 불안정한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오늘날의 젊은, 한국인, 여성의 심리를 꽤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이 소설집의 많은 부분에서 지루함을 느꼈다. 순간 순간 번뜩이는 문장들이 발견되긴 하지만, 소설의 전체적인 구조가 유기적으로 짜여져 있다는 느낌을 받기 힘들었고 인물들이 평면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특히 많은 부분에서 소설 속 화자, 혹은 중심인물의 중요한 행동을 설득력 있게 담아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표제작인 “가만한 나날”은 구조적으로 잘 정돈이 되어 있고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게 그려져 있어 재미있게 읽었다. “드림팀”의 경우 많은 여성들이 공감할 만한 내용이라는 의견에 동의하며, 관찰자적인 시선이 퍽 괜찮게 드러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얕은 잠”의 경우 주인공의 황망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그를 돕는 퉁명스러운 외국인 남성과 메모만을 남기고 사라진 남편 등 주변인물이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묘사되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힘들 것으로 보이며, “말과 키스”는 꽤 야심찬 시도라고 하기엔 그 전개과정이 너무 어설퍼서 쉽게 읽어내려갈 수 없었다. 최근 읽었던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단편 중 “지난 주 월요일에”를 참고한다면 좋았을 것 같다. 밀도의 차이가 너무 명확하게 느껴진다.

Niall Ferguson | The Ascent of Money

국내에는 [금융의 지배]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출판된 [The Ascent of Money] 외에도 영국 출신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의 책이 꽤 여러 권 번역되어 시중에 출간되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조금 놀랐다. 나는 [The Ascent of Money]가 대중적으로 널리 읽힐 만큼 친절하게 쓰인 책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보의 비대칭이나 행동 경제학, 케인즈의 일반균형 이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주택저당증권(mortgage backed security; MBS)과 블랙-숄즈 모형의 복잡한 공학적 원리 등이 책의 이곳 저곳에서 튀어나오기 때문에 기본적인 경제학 지식이 없다면 책장을 넘기는 것이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유려하고 쉽게 쓰인 문장과 독자를 쉽게 몰입시키는 훌륭한 스토리텔링 능력은 니얼 퍼거슨이 속한 ‘장르’인 경제사(economic history)가 우리나라에서 가지는 초라한 위상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이 국내 일반 대중에게 널리 소개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작용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장점이 [The Ascent of Money]에서 극대화되어, 이 책의 주 목적인 인류의 금융사 개관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수반해야 하는 다소 어려운 경제학 이론조차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게 돕고 있다. 그 미덕을 인정받아 에미 상 등 굵직한 상도 수상하며 퍼거슨의 명성이 한껏 높아질 수 있었을 것이다.

[The Ascent of Money]는 금융의 기원과 발전을 시대순으로 따라가며 금융이 인류의 발전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강조하는데 집중한다. 다만 요즘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big history’ 의 대표 저작답게 금융사의 모든 측면을 세심하게 다루는 것은 아니고, 은행의 탄생, 보험의 탄생, 버블, 부동산 시장의 명과 암, 국제금융과 퀀트 등 금융사의 중요한 지점을 관통하며 부문별로 가장 중요한 사례를 한두가지 씩 소개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퍼거슨의 훌륭한 점은 독자의 입장에서 각각의 사례로부터 중요 개념으로 일반화시키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별로 느끼지 않게 친절한 안내문을 곳곳에 설치해준다는 점이다. 금융처럼 추상적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개념도 드문데, 상식 수준에서 널리 알려진 서양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과 연결시켜 가시성을 확보해준다는 점도 그의 책이 왜 대중적인지 쉽게 알게 되는 대목이다. 예컨대 현대 금융감독기관이나 중앙은행이 행하는 세부적인 매커니즘을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라 하더라도, 메디치 가문의 영특한 재산불리기 방식과 영란은행의 탄생 비화 등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주요 금융정책기관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탄생했고 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큰 흐름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식이다.

단순히 금융사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낸 책은 아니다. 퍼거슨의 번뜩이는 통찰력은 쉬운 문장 속에서도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중-미 간 활발한 무역-금융 거래를 통한 자본의 국제적 이동의 부활을 언급하며, 현재(이 책은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발간되었다)의 추세가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다시 한번 위기에 봉착할 수 있는 잠재요인으로 양 국 간 정치적 갈등, 더 구체적으로 무역 부문에서의 갈등을 지적하는 대목에 다다르면 그의 혜안에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역사를 통해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처럼 보이지만, 그 누구도 쉽게 해내지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누구나 역사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단 5년 간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문제 없다’는 판단을 내린 블랙-숄즈/VaR 모형의 실패 사례를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퍼거슨은 당시 VaR 모형이 만약 11년 이상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리스크를 추정했다면 실제 발생한 규모의 손실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5년과 11년은 어찌 보면 매우 짧은 기간 차이지만, 그 6년의 차이만으로 현대 금융사의 방향이 통째로 틀어지게 되었다. 이런 방식의 비판은 경제사학자만이 할 수 있는 성격의 비판이다.

책이 가지고 있는 한계도 명확하다. 은행과 보험, 주식 버블과 자산시장의 한계를 차근차근 살펴보는 책의 중반부까지는 완벽에 가까운 균형과 호흡을 보이지만, 국제금융시장과 2000년대 이후의 금융 흐름을 짚어내는 6장 및 결론 부분에 다다르면 중심을 잃고 흔들린다. 이것은 책이 출판되었던 시기가 2009년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불완전성이기도 하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이 간신히 규명되던 시기였고, 이후 세계경제의 방향성이 시계제로인 시기였다. 석학 퍼거슨이라고 해도 2008년 이후의 세계경제가 지금처럼 굼뜨게 회복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버낸키가 헬리콥터에서 달러를 뿌려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며, 바젤III 등 시스템리스크를 체계적으로 잡아내기 위한 국제적 공조가 어떤 방향으로 설계될지 그 구체성까지는 살펴보지 못했을 것이다. 퍼거슨은 금융경제학자, 혹은 경제예측론자보다는 역사학자에 가까운 시선을 보여준다. 때문에 그의 책에서 배워야 할 교훈도 그의 문장만큼이나 간단, 명료하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은 필연적이었으며, 모든 경제적 사건은 그 필연성 위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퍼거슨이 가진 정치적 스탠스(그는 미트 롬니를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오바마를 호되게 비판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금융의 순기능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책은 급하게 마무리되지만, 이 책을 바탕으로 조금 더 공부해야 할 부분들이 발견된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고맙고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황승택 | 저는 암병동 특파원입니다

[저는 암병동 특파원입니다]는 기자생활을 오래 한 지은이가 암투병생활을 하면서 페이스북에 연재한 글을 모은 에세이집이다. [숨결이 바람 될 때]와 같은 전문성이나 숭고함은 발견할 수 없지만, 기자 특유의 조사근성에 기반한 디테일한 묘사가 글 곳곳에서 묻어나온다. 이 책에 대한 감상은 이게 끝이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잘 정돈된 글을 읽을 때의 감흥이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가치다. 다만 이 책을 통해 독자가 개인의 삶에 투영할 수 있는 부분은 별도로 존재할 수 있다. 나의 경우, 이 책을 택한 이유는 크게 두가지였다. ‘죽음에 대한 취재’에 대한 관심이 첫번째 이유이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개인에 대한 역사(史)를 최대한 많이 읽고 싶다는 욕망이 두번째였다. 내가 늙어감에 따라 가장 빠른 속도로 떠오른 걱정거리는 나의 죽음이 아닌, 내 부모의 죽음이었다. 내가 죽는 것보다 내 부모가 죽었을 때의 상황이 두렵다.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고, 어디까지 마음이 무너져 내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죽음과 가깝게 다가간 사람의 에세이에서 최대한 많은 힌트를 찾으려고 한다. 트위터를 하던 당시, 어떤 계정의 주인이(젊은 사람이었다) 암으로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그 분의 언니가 대신 트위터에 짤막하게 “사망하였습니다”라는 인사를 남겼고, 그 계정은 한동안 계속 살아 있었다. 그 당시 느낌이 참 기묘하고 서늘했다. 한 개인의 삶과 죽음을 세밀하게 다룬 글에서만 찾을 수 있는 찐함과 서늘함이 있다. 공인의 역사는 사회의 역사로 편입되는 경향이 강한 반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개인의 역사는 여전히 낮은 기저에 머무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조금 더 많은 개인 역사서가 나왔으면 좋겠다.

김상아 | 우리는 안아주는 사람일 뿐

아주 어린 나이였을 때부터 나의 부모님은 항상 개와 함께 살아왔다. 아마도 ‘화정리 시대’부터였을 것이다. 지금은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이라는 공식 명칭을 가진 옛 화정리는, 우리가족이 콘크리트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처음으로 흙냄새의 소중함을 깨달은 곳이다. 이 곳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흙을 만지며 농작물을 일구는 기쁨을 만끽했고, 누나와 나는 동네 친구들과 함께 논두렁을 뛰어다니거나 계곡에서 가재를 잡으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누나가 이마에 작지 않은 크기의 흉터를 갖게 된 것은 그 시절 하수구로 굴러 떨어졌기 때문이고, 내가 아버지와 누나에게 시계 읽는 법을 배운 것도 그 즈음이다. 그리고 그 즈음부터 우리 가족 주변에는 항상 개가 있었다. 진돗개일 때도 있었고 ‘잡종’일 때도 있었지만, 아버지에게 항상 개를 선물해주는 지인이 있었고, 그 분 덕분에 우리는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새로운 가족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단 1년도 쉬지 않고 우리는 개와 함께 살아왔다. 우리 가족을 거쳐간 개의 수는 두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지금은 함양 산골자락에 자리잡은 부모님댁에 잡종견 두마리와 골든리트리버 한마리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나는 열마리가 넘는, 한 때 우리의 가족이었던 그 개들의 이름을 아직도 모두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가족이었으니까. 무척 사나워서 쉽게 다가갈 수 없었던 진돌이, 유난히 듬직하고 속이 넓어서 함께 살던 다른 개들까지 보듬어 주었던 복실이, ‘아픈 손가락’이었던, 작고 작고 작았던 미니, 인간만큼이나, 아니 대부분의 인간보다도 더 지혜로웠던 뽀미.. 어느 카툰에서처럼, 그들은 나를 하늘나라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가끔 생각해보게 된다. 나의 결론은 항상 명확하다. 그들은 인간 가족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지만, 그 가족은 아버지나 어머니일 확률이 높다. 최소한 나는 아닐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매일 밥을 주던 사람도 아니었고, 매일 그들의 목을 끌어 안고 잔디밭에서 뒹굴며 사랑을 나누던 사이도 아니었다. 개보다는 친구들과 노는 것이 더 좋았고,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면 나를 보고 꼬리를 흔들어대는 개에게 살짝 인사만 한 뒤 방 안으로 쏙 들어가 문을 닫아버리기 일쑤였다. 나는 그들의 사랑에 제대로 보답하지 못한, 못난 가족이었다. 아마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천국에서 개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낼 권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살면서 부모님께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는 대체로 이런 형식이었다.

“개들때문에 일찍 들어가봐야 해”

“개들 밥줘야 해서 너 못 만난다.”

“개가 심심해 하니까 좀 와서 놀아주면 안되겠니?”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누나와 나, 그리고 개는 하나의 가족으로 이어진 존재였을 것이다. 물론 아버지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개는 개일 뿐, 인간과 결코 동급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듯한 개집을 매 계절 새로 만들어주는 사람도 아버지이고, 늦은 밤 목줄을 끊고 산속으로 산책나간 개를 찾아 몇시간을 헤매는 사람도 아버지이다. ‘서양식’으로 인간과 개가 반드시 동등한 위치에 있어야만 가족으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버지와 같은 많은 한국인은 개를 가축의 한 종류로 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개에게 쏟는 애정이 결코 적다고 말할 수 없다. 아무튼, 아버지와 어머니는 누나와 나를, 그리고 캐를 키우셨다. 누나와 내가 독립된 가족을 만들어 곁을 떠난 뒤에도 부모님은 계속 개를 키우신다. 개와 함께 살아가신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숨겨진 모습을, 함께 사는 개들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살짝 질투가 나기도 하고, 그분들의 곁에 있어주어서 고맙기도 하다.

[우리는 안아주는 사람일 뿐]은 개와 아기를 함께 키우는 한 여성의 이야기다. 글 쓰는 일을 퍽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지은이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녀의 아기가 툭툭 던지는 보석같은 말들과 늙은 개가 가지런하게 보내는 따뜻한 눈빛이다. 단지 그것들을 엮는 것만으로 이 책은 많은 것을 느끼게 만든다. 책을 읽으며 오랜만에 옛 추억에 잠겨보았다. 나의 가족이었던 그 개들은, 지금 잘 지내고 있을까. 많이 보고 싶다.

레슬리 제이미슨 | 공감 연습

[공감 연습]은 미국의 소설가이자 수필가인 레슬리 제이미슨이 주요 매체에 기고한 에세리 11편을 모은 에세이집이라고 할 수 있다. 굉장히 러프하게 표현하면 이와 같지만, 사실 나는 이 책을 어떤 범주에 포함시켜야 할지 지금도 망설이고 있다. 자신이 집적 체험한 바를 적나라하게 기술한 수필이기도 하였다가, 그 지점으로부터 이야기의 층위를 확장시켜 전반적인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화비평처럼 읽히기도 한다. 특정 공간에 있는, 혹은 특정 병명을 가진 사람을 인터뷰하여 이를 정리하기도 했다가, 어떤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재해석하고 그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드는 매체비평이 들어가 있기도 하다. 실로 다양한 방식으로 글을 쓰는 제이미슨이 거의 모든 에세이에서 공통적으로 다루는 주제는 ‘고통’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에세이에서 제이미슨이 공통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바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이다. 본문에서 몇차레 인용한 수잔 손택이 그녀의 직계스승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양한 글쓰기 방식을 다양한 대상에 적용하되 11개의 이야기가 산만하게 퍼져나가지 않고 가지런하게 모여 하나를 비추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라는 선명한 주제의식이 모든 글에서 또렷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라는 주제의식만큼이나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제이미슨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다. 그녀는 그녀만의 문체를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한국어로 번역된 글에서도 강하게 제이미슨의 색깔이 묻어나온다. 제이미슨의 글은 직설적이되 사려깊고, 풍부하게 쓰이되 독자가 스스로 생각한 의견을 삽입할 수 있을 정도의 여지는 남겨둔다. 그래서 읽는 과정이 즐겁고, 지적으로 흥미로우며,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이 있다고 느낀다. 좋은 에세이인 셈이다. 제이미슨이 택한 에세이의 대상 역시 매우 흥미로운데, 이 책의 제목인 [공감 연습]과 같은 제목을 가진 에세이에서는 의대생의 수업을 도와주는 의료 배우로 일한 경험을 살려 의료과정을 객관화하는 과정을 택하되, 본인이 직접 경험한 낙태라는 사건을 삽입함으로써 타인의 감정을 내재화시키는 작업의 중요성을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에세이는 “악마의 미끼”였는데, 모겔론스병(morgellons)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객관화하려는 시도의 다층적인 의미를 깊게 탐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11편의 에세이 모두 훌륭한 것은 아니다. 가끔은 너무 따분해서 페이지를 넘겨버리고 싶은 글도 있었고, 제이미슨 본인의 욕심에 의해 과도하게 일을 벌리다보니 논리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글도 있었다. 하지만 [공감 연습]이 최근 읽은 논픽션 중 꽤 괜찮은 축에 속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안은별 엮음 | IMF 키즈의 생애


“IMF 외환위기”라는 이름으로 주로 불리우는 이벤트가 있었다. 1997년에서 1999년까지, 한국 전역 쯤으로 대충 그 기간과 공간이 정의되고, 대외부채를 감당하지 못한 기업이 연속적으로 도산하는 가운데 금융기관과 정부기관으로까지 그 여파가 미쳐 자칫하다 국가수준의 채무불이행 사태를 맞이할 뻔 했다는 것이 이 이벤트의 전개과정에 대한 거친 요약이며, IMF라는 국제기구를 통해 (그 이름도 ‘치욕적’인) 구제금융을 공급받음으로써 단기적인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단기적인 결론이다. 구제금융의 대가로 IMF로부터 요구받은 노동시장 유연화, 주요기업에 대한 강도높은 구조조정 등의 정책에서 일종의 굴욕감을 느낀 이들은 위의 이야기에 더해 “나의 돌반지를 녹여내어 위기를 극복하는데 일조했다” 따위의, 일제시대에서나 나올법한 무용담을 추가함으로써 나름의 자존감을 유지하려고도 해볼 것이다. 이 이벤트에 대한 해석은 각자 다를 수 있지만, 1998년 이전과 이후 한국사회의 얼굴이 상당히 큰 폭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아마 모두가 공통적인 명백한 사실로써 받아들일 것이다. 그 중 누군가는 이 거대한 사회적 변화기에 자신의 경험을 녹여내어, 예컨대 ‘IMF 외환위기가 발생하지 않았다면’과 같은 부질없는 가정을 덧대는 방식으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데 꽤나 많은 시간을 허비할 수도 있다.

[IMF 키즈의 생애]는 프레시안 기자 출신으로 현재 일본에서 유학중인 안은별이 1980년대에 태어난 7명의 일반인을 인터뷰한 결과물을 엮어놓은 책이다. 위의 문단에 IMF에 대한 간단한 요약을 실어놓은 이유는, [IMF 키즈의 생애]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된 이 책이, 사실상 ‘IMF 키즈’를 전혀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부각하기 위함이다. 안은별은 1980년대에 태어나 다양한 경로를 통해 현재까지 인생을 살아내고 있는 평범한 사람의 인생사를 수집함으로써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어떤 층위의 공통점을 반드시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데, 안은별은 그 공통점을 IMF 외환위기라는 하나의 사건을 프리즘처럼 사용하여 정리해보고자 했던 것 같다. 결과는 대실패다. 나는 7명의 이야기를 읽으며, 대체 왜 이들이 ‘IMF’라는 키워드로 묶여야 하는지, 그 당위성을 파악할 수 없었다. 서문에 쓰인 저자의 변을 읽어보면 대충 이러하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러한 IMF 서사를 거부하는 데서 시작한다. IMF 위기를 단순한 외환 부족에서 일어난, 그것을 갚은 뒤에 진화된 단기간의 사건이 아니라, 전 지구적 변동 속에서 그때까지 한국을 이끌어온 권위주의 개발국가 시스템 자체가 문제시된 사태,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야기한 핵심 계기로 파악하고자 한다.

… 후자는 IMF 경제위기의 해법의 결과로 효율화되고 유연화된 노동시장 구조에서 가장 약한 고리에 있는 노동자로서, 자전적 이야기의 주체로서 주목하고 있다는 데서도 차이가 있다. 물론 이 책은 후자의 의미에 훨씬 가깝다.

… 여기서 IMF는 인터뷰이 각자에게 자신이 시간을 보내온 혹은 시간을 보냄으로써 형성되는 ‘사회’라는 것을 떠올리고 자신의 생애를 그것과의 관련 속에서 말하게 만드는 매개장치다.

정신을 부여잡고 저자가 하려고 했던 말을 이해하려고 애써보면, 저자는 ‘IMF를 기억할 수 있을 정도의 나이를 가진 자’를 인터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트위터에서 만난 저자 나이 또래의 ‘트친’들을 인터뷰하고 이를 책으로 내려는 욕망을 솔직하게 밝혔다면, 서문에서와 같은 지면낭비는 최소한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IMF를 개인의 삶에서 떠올리는 것만으로 매개체가 되고 이를 통해 이들을 ‘IMF 키드’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면, 이 세상의 IMF 키드는 너무나 많을 뿐 아니라, 그 많은 IMF 키드의 생애에서 건져올려낼 수 있는 IMF 외환위기에 대한 함의는 거의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역사적인 사건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자에 대한 전기가 아니라(여기에서는 IMF 외환위기 전개과정에 주로 등장하는 이름들이 될 것이다) 단지 그 시대를 살아낸 필부필부의 삶이 하나의 이야기로서 읽혀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일반적이고 미시적인 삶에서 효과적으로 건져올려낼 수 있는 확실한 교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오직 그럴 수 있을 때에만 어떤 세대에게 합당한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 여기서는 ‘IMF 키즈’ 세대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7명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IMF라는 이벤트는 이미 저만치 사라지고 희미해져버린다. 하나만 예를 들어보자. 이 책에 등장하는 7명 중 상당수가 공무원이나 교사 등, IMF 외환위기로 인해 피해를 받지 않은 가정에서 성장했다.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유복하게 자란 사람의 이야기가 여기저기 등장한다. 김괜저의 경우에는 뉴욕대까지 유학을 갔는데 2008년 금융위기때문에 집으로부터 송금받는 금액이 많이 줄어서 고생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1998년도 아니고 2008년 당시의 환율때문에 고생했다는 것이.. 왜 IMF 키드인지 모르겠다. 황당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중에는 심지어 본인의 선택에 의해 자퇴와 휴학을 반복하다 치과의사로 성공한 여성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고소득자의 삶이 IMF 키즈를 일반화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여성’이라는 억지스러운 개념까지 끌어들인다. 여성이니까 조금 더 힘들게 살았다는 것이다. 맞는 말인데, 그게 여기서 왜 나와! 한마디로 나는 이 책에 ‘낚여’ 버린 셈이다. IMF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 읽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책이다.

물론, 이 책에도 분명 의미있는 부분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홍스시의 기구한 가족사는 그 자체로 뭉툭하게 건드리는 지점이 있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사는 IMF 이전부터 기구했다. IMF가 무언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힘들다. 서유진은 외고를 나와 대안학교에서 공부한 경험이 있다. 저자의 주장대로 IMF 외환위기가 “권위주의적 개발국가 시스템”에서 “신자유주의적 전환”과정을 설명하고 있다면, 그 큰 그림 안에서 서유진의 삶은 어떻게 이해될 것인가. 그녀의 엄마가 그녀를 두고 “실패한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IMF가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그녀의 엄마는 IMF 이전부터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부분에서, 이 책은 등장인물의 삶과 IMF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데에 실패한다. 그냥, 그냥 솔직하게 말했으면 좋겠다. 회사생활 관두고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트위터하는 것이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인데, 기자생활하면서, 또 트위터 하면서 만난 친구들과 깊게 이야기하고 이를 책으로 엮어내면서 유학 스트레스를 풀고 싶었다고. 그냥 그 정도로만 책의 목표를 삼았어도 충분히 재미있는 인터뷰 모음집이 될 수 있었다. 괜히 어줍잖은 어려운 용어 써가면서 애써 정당성을 부여하는 모습이 애처롭다.

김현섭, 김기훈 | 오예! 스페셜티 커피!

[오예! 스페셜티 커피]

금호동에 살던 때, 근처에 있는 성수동은 우리 부부에게 재미있는 놀이터였다. 콘크리트건물과 아스팔트 도로에 둘러싸인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숨쉴 곳을 제공하는 몇 안되는 큰 공원인 서울숲이 있고, 대기업 상권이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성동구 조례에 의해 어느정도 보호되는 골목상권이 있으며, (이제는 그 표현이 민망한 정도에 다다른) “서울의 윌리엄스버그” 핫플레이스들까지 있으니, 호기심 많은 신혼부부 입장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구경을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세종으로 내려온지 꽤 시간이 지난 지금도 소규모 자본을 바탕으로 한 그 곳의 좋은 가게들이 가끔 생각나 문득 그리워지곤 한다.

성수동에서 가장 좋아했던, 그리고 지금도 좋아하는 가게는 서울숲 뒷편 택시회사 옆에 자리잡은 작은 커피숍, 매쉬커피다. 다섯명 정도 되는 손님이 들어오면 가게가 꽉 찰 정도로 자그만한 공간을 가진 이 가게는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몇가지 큰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커피 맛이 끝내준다. 산미를 강조하지만 연하고 은은하게 풀어낸 이 가게만의 특유한 추출방식이 내 취향과 딱 맞았다. 둘째, 바리스타 분들이 무척 친절했다. 아내와 가게를 처음 방문했을 때에는 젊은 여성 바리스타분이 우리를 반겼는데, 서울에서 방문한 그 어떤 스페셜티 커피숍보다 융숭한 환대를 받았다. 처음 보는 얼굴인 우리를 웃으면서 맞이해주었고, 커피 문외한의 엉뚱한 질문에 상냥하고 자세하게 답변해주었으며, 좋은 자리를 추천해주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에게 가게를 맡기고(?) 근처 가게에 놀러가던 그 자유롭고 편안했던 ‘환대’의 색깔과 온도가 참 좋았다. 매쉬커피를 혼자 방문할 때도 있었는데, 그 때에는 이 [오예! 스페셜티 커피!]의 저자인 남성 바리스타 두 분이 나를 반겼다. 그 때 매쉬커피의 핸드드립 공식(1대 20!)을 직접 배울 수 있었고, 세심하고 친절하게 원두의 특성 및 향미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참 좋은 느낌으로 남아있다. 셋째, 멋을 부리지 않아서 좋았다. ‘힙’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서울과, 한국인과, 한국문화와 동떨어진 공간디자인과 커피향미를 소비자에게 강요하는 커피숍이 요즘 너무 많다. 물론 그렇게 해야만 매출이 확보된다면 굳이 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매쉬커피는 공간에서 특별히 멋을 부리지 않고 털털하게 커피맛 하나만으로 소비자를 응대한다는 점에서 ‘서울에만 존재할 수 있는 진짜 커피숍’이라는 인상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런 매쉬커피의 두 바리스타가 스페셜티 커피에 대한 에세이를 썼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그 책을 읽고 싶어 안달이 났다. 서울카페쇼에 갔을 때 살 기회가 있었지만 일부러 뒤로 미루었다. 그 당시에는 오히려 언젠가는 반드시 읽게 될 것을 알았기에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 비로소 이 책을 이틀만에 다 읽어버렸다. 기대만큼 재미있고, 기대보다 훨씬 더 좋은 정보를 많이 얻어갈 수 있는 책이다. ‘이렇게 솔직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영업비밀(?)을 가감없이 풀어놓는데, 아마도 한국에서 커피숍을 운영하는 일의 고단함을 충분히 전달하고 싶었던 저자의 마음씀씀이때문인 것 같다. 젠트리피케이션, 과당경쟁, 까다로운 생두수입절차 등 커피숍 운영자로서 경험해야 하는 씁슬한 현실에 대해 너무 무겁지 않게, 시종일관 밝고 따뜻한 느낌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미덕 중 하나다. 커피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문장마다 절절하게 느껴지지만 책의 어떤 부분에서도 절박함이나 비참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커피를 정말 사랑하기에 커피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저자의 마음가짐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문장을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커피사랑에 동참하게 되어, 어느새 나도 집에 있는 커피도구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되고, 저자가 추천해준 방식으로 커피를 내리면 어떤 맛이 날까 궁금해 조바심이 나기 시작한다(파나마 게이샤! 파나마 게이샤를 맛보고 싶다!). 한국의 커피업계에서 작지 않은 위치를 가진 저자가 여전히 순수한 마음으로 커피를 대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이 책은, 한국에서 자영업을 고려하는 모든 사람이 읽을 가치가 있을 정도로 꽤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라. 비록 힘들더라도.

요즘에도 가끔 인터넷을 통해 매쉬커피의 원두를 주문해 세종에서 내려마신다. “우리가 다시 금호동에 살 일이 있을까?”라고 아내에게 물어보면, 아내는 단호히 그럴 일은 없다고 대답한다. 금호동보다 집값이 비싸고 공기도 더 나쁜 성수동에서는 더더욱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살 일은 없을 것이다. 매쉬커피와 멀리 떨어진 곳에 살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삶이 조금은 서글프게 느껴질 때도 있다. 마을버스를 타고, 혹은 살살 걸어서 ‘동네 단골’ 매쉬커피에 가는 상상을 가끔 한다. 반갑게 맞이하는 바리스타의 얼굴을 보는 그 순간이 참 좋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받아 들고 서울숲으로 향하는 그 길이 참 좋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숨통

[숨통] 표지

이주자 문학, 혹은 디아스포라(diaspora) 문학을 읽을 기회가 생기면 피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읽은 디아스포라 문학의 대부분이 원문으로 영어를, 문학의 배경공간으로 미국을 택했다. 그만큼 미국이 상대적으로 열려있기 때문일까, 강한 자성을 가진 커다란 행성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국부때문일까. 미국에서 오랜 기간 (어떤 종류든) 이민자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더군다나 소수인종으로서 주류 백인사회를 지근거리에서 경험해보았다면, 그 나라가 대외적으로 자랑하는 문화적 다양성과 다인종간 공존의 사회적 가치가 실상은 구조적으로 묘하게 뒤틀려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류와 비주류가 인종, 성별, 학벌에 의해 확연히 구분되고, 주류사회로의 편입과정에서 두꺼운 ‘유리장벽’이 존재하며, 백인중심의 획일적인 문화의 강요가 다양한 방식으로 교묘하게 취해지는 사회가 내가 경험한 미국이다. 최근의 디아스포라 문학은 이민 생활의 고단함과 문화적 이질성에서 오는 충격을 전시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차원을 넘어, 위와 같은 미국사회의 이중성을 폭로하는 프리즘으로도 작동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집 [숨통]은 최근 몇년 간 읽은 모든 디아스포라 문학을 통털어 가장 인상깊은 작품이었다.

가끔 빨리 페이지를 넘기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천천히 심호흡하며 읽고 싶어지는 작품을 만날 때가 있다. 코맥 맥카시의 장편소설이 그랬고, 줌파 라히리의 단편들이 그러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들은 또 어떠한가. 한 문장도 허투루 읽을 수 없게 만드는 이 작가들의 작품에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먼저 문학적으로 무척 아름답다. 문학이 예술의 범주에 속하는 이유는, 더 나아가 예술의 최전선에서 인간애를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이유는 언어가 가진 아름다움을 가장 극적인 형태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맥카시의 건조하지만 가슴을 후벼파는 문체, 사려깊고 속정 많은 라히리의 문체, 낭비되는 단어가 하나도 없어 보일 정도로 간결하고 완벽한 이시구로의 문체는 모두 그 자체로 하나의 차원을 형성한다. 둘째, 이들의 작품은 세상을 비추는 투명한 창이다. 미학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내딛는 그 발걸음이 언뜻 보기에도 무척 무거워, 한 문장이라도 게으르게 읽는 것이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에는 내가 있고, 나의 주변이 있고, 내가 속한 사회가 있다. 그 안에서 공감하고 위로받고 반성하게 된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숨통]은 위와 같은 대가의 미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젊은 작가만이 뿜어낼 수 있는 강렬한 숨결을 추가적으로 드러내는 소설집이다.

[숨통]의 단편들은 사려깊게 쓰였고, 용기있게 발언하며, 슬픈 현실에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문학적으로 무척 아름다우면서 나이지리아와 미국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비춘다. 단순히 묘사하고 풍자하는데 그치지 않고 문장 안에 작가의 시선을 녹여내는 시도가 가히 ‘예술적’이다. [숨통]에서 창조된 세계는 결코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작가가 경험한 세계를 조금씩 변주해갈 뿐이다. 작가가 성장한 나이지리아의 어지러운 상황과 미국으로 이주한 뒤 경험한 필라델리파와 프린스턴 주변의 이중적인 미국백인사회, 그리고 작가와 작가의 아버지가 살아온 터전인 대학과 교수사회가 대부분의 작품에서 주된 배경으로 존재한다. 이토록 좁은 배경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는 이야기들이 불특정 다수의 독자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획득하는 과정은 문학적으로 마법적이기 까지 한데, 이건 순전히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개인의 특출난 재능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별다른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음에도 한 여성의 내면을 깊숙히 따라가는 것만으로 하나의 거대한 감정적 격랑을 만들어내는 ‘지난 월요일에’는 여러 뛰어난 단편들 중에서도 가장 아디치에의 재능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가 개인의 경험이 솔직하게 드러난 듯한 ‘전율’은 소수자에 대한 작가의 따스한 시선을 확인할 수 있는 또다른 작품이다. ‘미국대사관’은 [숨통]을 관통하는 여러 가치들, 예컨대 아프리카 이민자의 고단한 삶, 나이지리아의 어지러운 정치상황, 아프리카 여성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수많은 차별과 학대를 모두 응집한 폭발적인 작품이며, ‘중매인’은 미국사회에서 이민자가 살아가는 두가지 얼굴(철저하게 미국사회에 복종하던지, 철저하게 이방인으로서만 살아가던지)을 극명하게 대비하며 보여주는 현명한 작품이다. 버릴 단편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놀랍고, 책장을 넘기는 것이 무척 아까울 정도로 모든 문장이 사랑스럽다는 사실도 놀랍다.

정세랑 | 피프티 피플

몇주 전 아내가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을 추천해주었을 때, 나중에 읽어볼게, 하고 건성으로 대답한 뒤 결국 지금까지 읽지 않았다. 당시 읽고 있던 다른 책이 있기도 했지만, 이 책이 왠지 [82년생 김지영]과 대구로 읽히는 것 같아 괜히 마뜩치 않았기 때문이다. 조남주의 화제작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꼭 존재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제목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읽기를 거부할 정도면 [82년생 김지영]의 서투르고 억센 문학성과 폭력적인 일반화에 대한 거부감이 생각보다 컸던 것 같다. [보건교사 안은영]이 퇴마사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안 것은 그로부터 며칠 지난 뒤였다.

[피프티 피플]은 주인공이 없는, 혹은 51명의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인 장편소설이다. 표지에 장편소설이라고 적혀있지만, 실제로 책을 읽다보면 50여편의 짤막한 단편소설이 조금의 공통분모를 두고 계속 이어지는 형태임을 알 수 있다. 호흡이 무척 짧은 단편이 각각 주인공을 한 명씩 가지고 있고, 나머지 50여명 중 누군가가 그 주변을 스쳐지나가는 방식이다. 미리 말하지만, 다음 문단에서 하게 될 두어개 정도의 사소한 불평을 고려하더라도 나는 이 소설집을 무척 좋게 읽었다. 각각의 등장인물에서 나의 한 조각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고, 51명의 인물의 이야기가 산만하게 흐트러지지 않고 응집력 있게 잘 뭉쳐져 있는 소설(집)의 짜임새도 마음에 들었다. 짤막한 이야기를 연속적으로 읽는 과정에서 특유의 은율감이 느껴지는 것도 좋았다. 소네트 연작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글의 리듬이 뛰어나서 읽는 동안 지루함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정세랑은 문장을 참 잘 만들어내고, 이야기도 참 잘 직조해내는 것 같다. 이 많은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스쳐가는 주요한 공간으로 병원 응급실을 택한 것도 현명해보인다. 좋은 상징성을 지닌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재를 열심히 한 티도 많이 난다. 많은 이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것 같고, 그 이야기를 다시 자기만의 이야기로 훌륭하게 재탄생시켰다.

사소한 불만이 없을 수 없다. 먼저, 물론 쉽지 않은 작업이었겠지만, 51편의 단편 사이에 존재하는 밀도의 차이가 꽤 있는 편이다. 어떤 단편에서는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먹먹해지거나 실제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행복한 진심이 잘 전달되는 반면, 다른 단편에서는 억지로 머릿수를 맞추기 위해 끼워넣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피상적인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이건 두번째 불평, 즉 작가가 가진 편향성, 혹은 편견이 글의 곳곳에서 드러난다는 사실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이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나이, 혹은 성별, 혹은 그 언저리의 삶에 대한 현명한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주변’에 대해서는 피상적인 편견으로 대충 얼버무리는 태도를 취한다. 소설의 종반부에 등장하는 몇 개의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노골적인 이데올로기, 혹은 프로파간다도 재미없고 따분했다. 갑자기 대학생의 리포트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정세랑보다 더 넓은 스펙트럼으로 더 다양한 인간군상에게 더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한국작가는 지금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