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ational | I am Easy to Find

더 내셔널(The National)의 신보 [I am Easy to Find]는 [비기너스(Beginners)]와 [우리들의 20세기(20th Century Women)]를 감독한 마이크 밀스(Mike Mills)가 감독한 동명의 단편영화의 영화음악, 즉 OST의 형식으로 발매되었다. 그러니까 우선 영화를 봐야 하는 셈이다.

[Sleep Well Beast] 투어를 2년 넘게 소화한 밴드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히 고갈된 상태였고, 밴드의 계획에는 장기간 휴식(hiatus)이 잠정적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던 와중 [우리들의 20세기]를 마친 마이크 밀스와 밴드의 보컬리스트 맷 버닌저(Matt Berninger)가 만나 함께 “비디오를 하나” 찍어보자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고, 밴드의 작곡을 책임지는 데스너 형제가 달라붙어 드랍박스를 통해 음악과 영상 콘티를 밀스 감독과 주고 받기에 이르렀다. 작업을 구상하던 감독에게 다정하게 접근하여 로비를 펼친 배우가 하나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알리시아 비칸데르(Alicia Vikander)다. 이 영화는 밀스 감독이 그의 전작에서 즐겨 사용한 영화적 기법, 즉 주인공의 개인사를 시대사와 뒤섞어 일종의 콜라쥬 형식으로 ‘전시’하는 방식을 극대화하고 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흑백의 무성영화처럼 진행되며 한 여성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다루고 있는데, 갓난 아기부터 죽기 전 늙은 여성까지 모두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분장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소화한다. 영화의 내용은 전형적인 밀스표 ‘인생 회고전’이다. 감독은 별다를 것 없는 인생을 살아간 한 여성의 삶을 담담히 복기함으로써 그 안에 큰 호흡 하나를 불어 넣으려고 한다. ‘여전하다’라고 칭찬할 수도 있고 ‘지루하다’라고 불평할 수도 있는, 변하지 않는 감독의 색깔이 그대로 뭍어 있다.

영화 내내 내셔널의 음악이 주인공처럼 전면에 등장하며, 배우들의 대사는 아주 가끔 거의 들리지 않는 수준에서 처리된다. 이 쯤 되면 밀스 감독의 영상에 내셔널의 음악이 덧입혀진 것이 아니라 -밀스 감독의 인터뷰에서 발견할 수 있듯- 내셔널의 음악에 영상을 맞춘 것처럼 보일 정도다. 사실 내셔널의 음악과 밀스의 영상이 기대했던 것만큼 긴밀하고 유기적으로 호흡을 주고 받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밀스의 영상은 내셔널의 음악보다 훨씬 더 차분하고 고요한 편이어서, 20분이 조금 넘는 시간 내내 음악의 리듬이 영상보다 훨씬 앞서나가 보는 사람의 숨이 가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내셔널의 음악이 구린 것은 아니다. 다만 전작들과 색깔이 많이 다르다는 점은 분명하게 해두고 싶다. 이 음반은 일종의 사이드 프로젝트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물론 밴드는 이 음반도 정규음반에 포함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전작과의 연속성을 고려하기 보다는 새로운 뮤지션들과의 협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캐린 베서(Carin Besser)가 음반의 모든 곡에 직접 참여하였으며, 거의 모든 트랙이 버닌저와 여성 보컬리스트의 듀엣으로 불리워진다. 상당히 많은 여성 보컬리스트가 참여했다: 가장 많은 노래를 부른 게일 앤 돌시(Gail Ann Dorsey), 리사 해니건(!), 샤론 반 에뗀(!!), 이브 오웬(Eve Owen), 케이트 스테이블스(Kate Stables) 등 7명의 여성 보컬리스트와 브루클린 소년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까지 참여했다. 음반의 색깔은 전작보다 밝고, 훨씬 밝고, 풍성하고, 훨씬 풍성하다. 그래서 내셔널의 골수팬들은 이 음반을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발전이 전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양한 뮤지션들과의 협업은 통일된 분위기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항상 앞으로만 직진하는 느낌으로 진화를 거듭해왔던 밴드의 음악에 오점으로 남을 수도 있는 시도인 셈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좋게 들었다. 먼저 첫째, 밝은 내셔널의 음악도 충분히 환영할만 하다. [Sleep Well Beast]에서 무너져가는 미국사회에 대한 근심과 연민을 한껏 담아낸 덕분에 역대급으로 어두웠던 내셔널의 음악세계가 여성 보컬리스트들의 목소리와 함께 조금은 밝아진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둘째, 다른 그 어떤 내셔널의 음악보다 훨씬 가시적이고(picturesque) 영화적(cinematographic)이라는 점에서 그다지 실패한 시도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충분히 해볼만한 시도였고, 모든 멤버가 완전히 지쳐 나가 떨어진 시점에서 밴드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있는 시도였다. 셋째, 이번 음반에서도 “I am Easy to Find”와 같은 명곡이 많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자랑스러운 디스코그래피로 기억될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재미있는 시도였고, 꽤 좋은 결과물로 돌아왔다.

Vampire Weekend | Father of the Bride

뱀파이어 위켄드(Vampire Weekend)가 6년 만에 돌아왔다.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만난 네 명의 똘망똘망한 젊은이가 귀여운 스웨터를 입고 통통 튀는 아프리카 리듬 위에 쟁글쟁글한 기타 사운드를 얹은 음악을 처음 세상에 내놓았을 때부터 나는 항상 이들의 팬이었다. 덕질을 할 정도로 아주 충성스럽지는 않았지만, 모든 신곡을 빠짐 없이 챙겨 들을 정도의 애정은 가지고 있었다. 고맙게도 이들은 꽤 꾸준히 정규 음반을 발표했고, 발표한 정규 음반들은 모두 수준급의 완성도와 딱 적당한 정도의 변화상을 담고 있기에 이들에 대한 신뢰도에는 아무런 손상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로스탐(Rostam Batmanglij)이 밴드를 정식으로 탈퇴한 이후 이들로부터는 가끔 대형 음악축제에 참여한다는 소식 말고는 거의 아무런 뉴스도 들려오지 않았고, 그렇게 6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 6년 사이에 나는 박사학위를 받았고, 보나루 축제에서 프랭크 오션과 잭 화이트를 만났으며, 한국으로 돌아와 회사를 두 번 옮겼고, 최종적으로 서울을 벗어나 새로운 곳에 자리잡았다. 한 개인에게도 참 많은 일이 일어나는 6년이기에, 음악 산업에도 꽤 많은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뮤지션이 오랜 기간 음반을 발표하지 않고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높은 리스크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트렌드는 이미 많이 변했고, 충성스러웠던 팬들은 다른 음악들을 들으며 뮤지션에 대한 기억을 지웠을 수 있다. 음반기획사와 나이가 든 팬들, 그리고 새로운 음악들로 귀를 무장한 평론가들은 오랜 휴식기 끝에 복귀하는 뮤지션에게 많은 것을 기대한다. 얼마나 준비를 철저하게 했길래, 한 번 들어보자, 하는 식으로.

벰파이어 위켄드의 신작 [Father of the Bride]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밴드의 작곡을 책임지는 에즈라 코에닉(Ezra Koenig)이 뉴욕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는 사실을 알아두어야 할 것 같다. 그는 헐리우드 근처에 살며 넷플릭스와 함께 애니메이션을 제작했고, 케이시 머스그레이브스(Kacey Musgraves) 등 뉴 컨트리 뮤직에 빠졌다. 로스탐은 밴드를 탈퇴한 후 칼리 레 잽슨(Carly Rae Jepsen) 등의 음반을 프로듀스했다. 로스탐이 벰파이어 위켄드의 전작 [Modern Vampires of the City]를 프로듀스한 사실을 여기서 새삼스래 다시 기억해야 겠다. 밴드는 메인 프로듀서를 잃은 셈이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과 음악을 만나고 옛 동료와는 조금 더 멀어진 거리를 유지하며 에즈라 코에닉은 밴드의 음악이 결코 전과 같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을 것이다. 실제로 [Father of the Bride]는 전작에서 발견할 수 없는 새로운 시도들이 많이 눈에 띈다. 우선 밴드 하임(Haim)의 리드 보컬 다니엘 하임(Danielle Haim)과 듀엣을 이룬 노래 세 곡이 전면에 포진해 있다. 이 노래들은 초기 밥 딜런의 음악이 연상될 정도의 전형적인 포크 넘버들인데, 음반의 포문을 여는 “Hold You Now”는 다니엘 하임과의 포크 듀엣에 더해 영화 [씬 레드라인]에 삽입된 멜라네시아 민요인 “God Yu Takem Laef Blong Mi”가 샘플링되어 후렴구를 꾸미고 있다. 코에닉은 포크와 함께 샘플링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2021”에 호소노 하루오미가 1984년에 발표한 노래 “Watering Flower”을 삽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다니엘 하임은 음반을 마무리짓는 노래 “Jerusalem, New York, Berlin”에 다시 등장하며 음반의 성격을 규정 짓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사실 코에닉과 하임의 목소리가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는 흥겨운 가락의 일렉트로-포크 음악 “Married in a Gold Rush”일 것이다. 음반은 포크와 샘플링, 그리고 밴드의 정체성 중 하나인 아프리칸 민속음악 외에도 꽤 다양한 장르를 편식 없이 섭취하고 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사랑할 사이키델릭 넘버 “Sunflower”에는 인터넷(The Internet)의 스티브 레이시(Steve Lacey)가 참여하여 음악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이 노래에 등장하는 기타리프는 아마 꽤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 발매 초기 팬들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은 “Harmony Hall”과 “This Life”는 세 명의 코러스, 세 명의 기타리스트, 두 명의 퍼커션, 그리고 건반까지 합쳐진 빅밴드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여전히 잡식성이지만, 그 섭취 범위가 전보다 훨씬 넓어지고 깊어졌다.

이러한 음반의 다양성을 두고 피치포크는 “마치 컴필레이션 음반을 듣는 것 같다”며 [Modern Vampires of the City]에서 밴드가 보여준 집중력과 응집력이 보이지 않아 약간 아쉽다는 의견을 보였고, 올뮤직은 “조금 더 복잡해졌지만 이와 동시에 전에 없이 직선적이다”라는 호의적인 평을 내렸다. 나는 벰파이어 위켄드가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어 가는 것 같아 그리 나빠보이지 않는다. 물론 [Contra]나 전작에서 보여준 천재성이 많이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게 된 뮤지션 중 보다 깊게 파고들어가는 집중력을 높은 수준에서 보여줄 수 있는 이는 소수의 천재들 뿐이다. (그 천재적인 테임 임팔라 조차 [Currents] 발매 이후 아직까지 버벅거리고 있는 점을 상기하자) 대다수의 ‘조금 덜 천재인’ 이들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약간의 너그러움 정도일텐데, 벰파이어 위켄드는 그리 신경질적이지 않게, 그리고 게으르지도 않게 명민하게 좋은 균형점을 발견했고, 이를 한시간 가까운 러닝타임 위에 성실하게 구현해냈다.

Big Thief | U.F.O.F.

올 해 최고의 음반이 도착했다. 빅 띠프(Big Thief)는 앞서 발표한 두 장의 음반 [Masterpiece]와 [Capacity]를 통해 인디 포크씬에서 꽤 중요한 존재로 자리잡았다. 프런트워먼 에이드리앤 렝커(Adrianne Lenker)의 개인사를 중심으로 풀어낸 [Capacity]는 개인적으로 2017년 최고의 음반 중 하나였다. 렝커는 2018년 개인 이름으로 [Abysskiss]를 발표하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갔고, 밴드는 렝커의 이 음반을 끝으로 Saddle Creek Records에서 4AD로 플랫폼을 갈아탔다. 밴드가 4AD에서 발표한 첫번째 음반이자 밴드의 세번째 음반 [U.F.O.F.]는 2019년 인디 포크씬 뿐 아니라 현대음악계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음반으로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그 정도로 명료하고 굵직하게 하나의 완전한 음악적 세계를 구현해내는 음반이다. 이 음반은 아케이드 파이어(Arcade Fire)의 [Suburbs] 음반과 같은 인상을 주는데, 음악의 형식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밴드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즉, ‘기존에 해오던 것을 반복했음에도 대중음악계가 새삼스레 호들갑떨며 발견하는 음반’이 될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U.F.O.F.] 역시 기존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렝커의 우울한 과거사에서 많은 모티브를 가져오고 있고, 나즈막한 렝커의 목소리와 격하지 않은 통기타 연주 등 포크음악의 형식으로 기본적으로 따르고 있다. 하지만 전작과 달라진 점, 혹은 이 음반을 ‘완전하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가 두어가지 정도 발견된다. 첫째,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다 밴드 형태에 가까운 음악이 완전한 수준으로 진화했다. 내가 여기서 사용하는 ‘완전(complete)’이라는 단어는 ‘완벽(perfect)’과 미묘하게 다른 개념이다. 음악과 같은 예술의 영역에서 절대적 완벽함이란 쉽게 존재할 수 없는 차원이다. 하지만 한 예술가의 내재적인 발전과정에서 부족함이 메워지고 한계가 극복되는 과정이 반복적으로 발생하여 기존의 차원에서 더이상 논의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움이 어느정도 ‘완성’되었을 때 완전하다, 라고 표현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U.F.O.F.]는 그 정도 수준의 음반이다. 먼저 렝커에게 의존적이었던 음악적 구성이 밴드 멤버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형태로 변화했다. 렝커를 포함한 밴드의 모든 멤버들이 음반 크레딧에 ‘ambience’라는 역할로 올라가 있는 점이 흥미롭다. 즉, 이 음반은 하나의 장르로 읽히기 보다는 특유한 ‘분위기’로 이해되어야 하는 측면이 강한데, 이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있어 멤버들의 허밍이라던가 나지막한 코러스 등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Century”같은 곡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전형적인 포크 넘버인 이 노래는 밴드 멤버 벅 믹(Buck Meek)의 코러스 참여로 인해 빅 띠프의 음악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금은 로킹한 트랙인 “Contact”에서는 물이 오른 합주실력을 엿볼 수 있다.

둘째, 보다 깊어지고 포용적이 된 음반의 철학이 독보적인 수준으로 올라섰다. 음반의 제목 ‘U.F.O.F.’는 ‘미확인 비행물체’를 가리키는 약어 ‘U.F.O.’에 ‘friend’를 상징하는 F를 붙인 것이라고 한다. 음반에는 여전히 상처와 죽음의 흔적이 가득하다. 렝커의 개인 음반에 수록된 곡을 리메이크한 “Terminal Paradise”에서는 죽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렝커와 친구들은 자신 안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외부로 묵묵히 걸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이 음반을 듣는 청자에게도 그렇게 외부의 이방인과 친구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 위에 언급한 “Terminal Paradise”를 다시 들여다 보면 의미심장한 구절이 발견된다.

터미널
우리 둘 다 알고 있어
내 남은 것들 모두 떠나게 해줘
내 죽음이 하나의 흔적이 되고
그 흔적이 한송이 꽃을 피우는 모습을 지켜봐줘
나는 너의 여정 속에서 피어날 것이고
모든 꿈에서 함께 할거야

음반의 타이틀곡인 “U.F.O.F.”는 약간은 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마치 나쁜 꿈을 꾼 것 같이
넌 사라지겠지
다른 지도는 파란색으로 바뀌고

거울에서 거울로(위의 두 구절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난 너를 상상해
우리의 사랑을 더 깊게 하기 위해
나를 밖으로 이끌어내는 너의 모습을
우린 더이상 떨어지지 않을거야

렝커의 가사는 한 편의 시가 되고, 청자는 그의 목소리에 위로받고 그의 목소리를 위로한다. 절망적이지 않지만 대책없이 긍정하지 않는 침착함. 여전히 세상은 어둡고 우울하지만 서로의 손을 잡음으로써 담담히 걸어나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 음반의 시각 역시 완전하다.

렝커의 개인 음반에서 건너온 곡이 하나 더 있다. “From” 역시 [Abysskiss]에 수록된 곡인데 “Terminal Paradise”처럼 보다 더 아름다운 밴드곡으로 잘 편곡되어 실려있다. “From”과 “Terminal Paradise”는 렝커와 빅 띠프의 음악에 연속성을 부여하며 이들의 이야기가 일반적인 삶처럼 긴 시간 굽이굽이 흐르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이 음반에는 앞서 언급한 노래 들 외에도 빅 띠프 특유의 절절한 멜로디라인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노래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Orange”는 렝커가 가장 잘하는 것을 극대화하는 좋은 트랙이며, “Cattaills”와 “Jenni” 역시 오직 빅 띠프만이 구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U.F.O.F.]는 버릴 곡이 하나도 없고 놓치고 싶은 순간이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올해의 음반’ 타이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Anderson .Paak | Ventura

몇 년 전부터 스포츠 팬들 사이에서 ‘폼(form)’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마치 추신수가 ‘그린라이트(green light)’라는 야구 관용어를 한국에 소개했듯, 누군가에 의해서 소개된 이 단어는 지금까지 그 쓰임새를 관찰할 때, 운동선수의 컨디션, 역량, 성장곡선, 나이 등을 고려한 총체적인 퍼포먼스 지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음악인에게도 이 ‘폼’ 개념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음악계에서 단순히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비례적으로 더 나은 음악적 산출물을 보여주는 경향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음악인 개인의 노력과 영감, 주변 상황에 따라 성과물의 수준이 들쭉날쭉한 경우가 대부분이며, 한 뮤지션의 디스코그래피를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일정 기간 침체기를 겪은 후 음악적 역량이 반등하는 뮤지션도 심심치 않게 발견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그런 경우를 발견할 때 재기에 성공한 운동선수를 보는 것 같아 반갑고 고마운 감정을 느낀다.

OBE 레이블에서 [Venice]와 [Malibu], 두 장의 음반을 발표하고 평단과 대중 양단으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미국 서부 출신 뮤지션 앤더슨 팍(Anderson .Paak)은 전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해온 닥터 드레와 본격적으로 함께 하기 위해 큰 둥지인 애프터매스(Aftermath)로 옮겨간다. OBE에서 발매한 두 장의 음반 중 특히 [Malibu]는 미 서부 힙합을 레트로풍의 알엔비, 훵크와 절묘하게 엮어내 힙합이라는 장르의 현재 영역을 한 걸음 확장시킨, 정말 좋은 음반이었다. 그런데 애프터매스에서 발매된 첫 음반이자 닥터 드레가 직접 프로듀스한 음반 [Oxnard]는 그 의미심장한 음반명에도 불구 – 앤더슨 팍의 고향이다 – 상당히 산만한 분위기로 가득찬, 한마디로 재미없는 음반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음반의 전체적인 에너지 레벨이 무척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인데, 나중에 들려온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드레의 프로듀싱이 앤더슨 팍의 창의력을 조금 억누른 것은 아닌가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음반에서 앤더슨 팍은 어딘가 불편해보였다. 가장 잘하는 것에 힘을 쏟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그닥 잘하지 못하는 것에 억지로 최선을 다하는 느낌이었다. 아주 구린 음반은 아니었지만, 결코 뛰어난 음반은 아니었다.

2019년에 발표된 새음반 [Ventura]는, 팍에 따르면 전작 [Oxnard]를 제작할 당시 함께 만들어둔 노래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당시 팍은 이 [Ventura] 음반에 수록된 노래들도 함께 발표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번 음반을 제작하면서 닥터 드레로부터 조금 더 많은 재량권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Oxnard] 시절 만들어진 결과물치고는 [Malibu]의 분위기를 조금 더 많이 닮아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결론부터 말하면 [Ventura]는 [Malibu] 시절로 돌아간 앤더슨 팍의 ‘폼’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좋은 음반이다. 조금 더 자유롭게 드리블과 슛의 재량권을 부여받은 농구선수를 보는 느낌이다. 감독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쏘고 싶을 때 쏘고, 패스하고 싶을 때 패스할 수 있기 때문에 코트 위에서의 움직임이 활기차보이는 농구선수처럼, 앤더슨 팍은 이번 음반에서 자신이 들어갈 때 정확히 들어가고 나와야 할 때 적절하게 빠져주는 유연함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음반의 수록곡 중 “King James”는 농구선수 르브론 제임스와 풋볼선수 콜린 캐퍼닉에 대한 이야기다) 어깨에 힘을 쭉 빼서인지 음악은 여유롭고 흥겹다. 듣는이도 긴장감보다는 즐거움과 기쁨을 먼저 느끼게 된다. 음반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존재는 라라 해서웨이(Lalah Hathaway), 브랜디(Brandy), 재즈민 설리반(Jazmine Sullivan)과 같은 여성 보컬리스트의 목소리다. 이들이 참여한 트랙에서 앤더슨 팍은 조금 더 편안하게 보이고 음악은 조금 더 단단하게 느껴진다. 그가 가장 잘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나 싶다. 아직도 더 올라갈 곳이 존재하는 성장하는 음악인임을 증명한 음반이다. 올 여름을 이 음반과 함께 보낼 리스너들이 무척 많을 것 같다. 나 역시 그 중 한 명이다.

Nilüfer Yanya | Miss Universe

“나만 알고 싶은 뮤지션”이라는 농담은 혁오가 [무한도전]에 출연하던 무렵부터 대중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 같다. 남다른 센스와 부지런함으로 단련된 감각적인 리스너들은 꽤 괜찮은 음악을 누구보다 먼저 찾아내어 남모를 뿌듯함을 느끼는 것을 삶의 기쁨 중 하나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음악을 찾아 듣다보면 가끔 ‘음, 이 음악은 조만간 한국의 힙스터들에게 사랑받겠군’과 같은 직감을 느낄 때가 있다. 신선하고 감각적인 음악적 외형은 기본이다. 한국의 젊고 부지런한 힙스터 리스너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남다른 외모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또래 뮤지션들과 구분되는 확실한 정체성을 몇가지 상징체를 통해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영국 런던 첼시 출신의 1996년생 아티스트 닐루퍼 얀야(Nilüfer Yanya)는 그 까다로운 요건을 거뜬히 통과하고도 남을 정도로 인상적인 데뷔음반 [Miss Universe]를 내놓았다. 터키 음악을 전공한 아버지와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얀야는 12살 무렵부터 클래식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하였으며, One Direction을 프로듀스한 회사에서 걸그룹으로 데뷔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계속 추구해왔다. 몇 장의 EP를 내고 올 해 정식으로 데뷔 음반을 발표했는데 평단의 평은 무척 호의적인 편이고, 벌써부터 나의 몇 안되는 힙스터 친구들은 얀야의 음악을 끼고 살기 시작했다. 김밥레코드 사장님은 “올해의 앨범급 데뷔작”이라고 칭찬했는데, 닐루퍼 얀야의 음악이 한국과 미국 등에서 널리 들려질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ATO 레이블에서 발매된 [Miss Universe]는 데뷔 음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고 통통 튀는 노래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영향을 받았다고 그녀가 언급한 뮤지션을 열거해보면 큐어(The Cure), 픽시스(Pixies), 제프 버클리(Jeff Buckley), 니나 사이먼(Nina Simone) 등이 있는데, 이 종잡을 수 없는 레퍼런스처럼 [Miss Universe]도 ‘이보다 더 잡탕밥일 수 없다’고 느낄 정도로 다양한 장르가 뒤섞여 있다. 인디록, 재즈, 힙합, 트립합, 디스코, 신스팝 등 갖가지 장르가 닐루퍼 얀야의 입맛에 맞게 맛있게 비벼져 있다. 싱글로 발매되어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훅을 자랑하는 곡만 다섯 손가락에 다 꼽기 힘들 정도로 많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곡은 “Paralysed”, “Melt”, “The Unordained”, “Heavyweight Champion of the Year” 등인데, 기타와 드럼 등 최소화된 악기 구성에 중독성 있는 멜로디를 얹는 것만으로 훌륭한 노래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충실히 증명해내고 있는 노래들이다. 세인트 빈센트(St.Vincent)가 노래를 진행해 나가는 방식도 떠오르고, 킹 크룰(King Krule)의 분위기도 조금 느껴진다. 초창기 파이스트(Feist)의 색깔도 난다. 나 역시 그녀의 음악을 묘사하기 위해 종잡을 수 없는 레퍼런스를 꺼내들게 된다. 완전히 새로운 음악이다. 이런 신인을 만난다는 것은 항상 기분 좋은 일이다. 연말에 많이 언급될 음반이다.

Chai | Punk

지난 3월 가장 즐겁고 유쾌하게 들었던 음반은 일본 나고야 출신의 4인조 여성 밴드 차이(Chai)의 두번째 정규 음반 [Punk]였다. 이 음반을 듣게 된 이유는 음반 표지가 너무 귀여워서였는데, 음반을 플레이시키면 기대를 무참히 깨뜨리는(지금 이 시점에서 그 순간을 돌이켜보았을 때 당시 무엇을 기대했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지만) 소리가 튀어나와 우선 헛웃음이 터졌고, 이후 음반을 들어보니 거의 모든 곡이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완성도가 뛰어나서 한번 더 웃음이 나왔다. 두번째 웃음은 감탄, 혹은 경탄의 웃음이었다. 이들은 첫번째 정규음반 [Pink]를 발표하며 함께 공개한 뮤직비디오를 통해 이미 그 정체성을 확고하게 각인시킨 바 있다. 뮤직비디오에서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귀여워!”를 외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십대-이십대 여성에게 부여되는 “가와이”한 이미지와는 또 미묘하게 결이 다르다는 점이 이 밴드의 핵심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밴드는 공개적으로 “안티-가와이”가 밴드음악의 핵심적인 요소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들이 발표한 두 장의 음반을 주의깊게 듣지 않으면 십대 여성 스쿨밴드의 전형성이 답습되어 있다고 피상적으로 느낄 수도 있지만, 두번 세번 반복해서 듣다보면 이들이 무척 실험적일 뿐 아니라 음악 역시 상당히 진지하고 깊게 밑으로 깔려 들어간다는 인상을 어렵지 않게 받게 될 것이다. 개별 노래가 가지고 있는 싱글로서의 매력도 매력이지만, 가볍게 몸을 푸는 듯한 초반부를 지나 음반의 중후반으로 갈수록 예상치 못한 익스페리멘탈 넘버가 연속적으로 나오기 시작할 때 범상치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90년대 힙합과 포스트펑크 씬에서 받은 영향을 숨기지 않는 가운데, 그 와중에도 펑크가 가진 원천적인 매력, 즉 직관적으로 터져 나오는 훅과 펀치라인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부지런함과 명민함은 여전하다. [Punk]는 [Pink]에 비해 팝적인 달콤함이 조금 부족해보일 수도 있지만, 밴드로서의 정체성이 보다 확립되어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 하며, 무엇보다 음반 전체적인 밸런스 역시 훨씬 좋아졌다는 점에서 분명 발전이라고 평할 만한 요소가 존재한다.

나는 이 음반을 ‘미국 버전’으로 접했다. 즉, 이 음반은 소니 뮤직 재팬이 일본에서 발매했지만, 북미에서는 버거 레코드(Burger Records)를 통해 공개되었다. 밴드가 ‘글로벌 뮤지션’으로 성장하게 된 역사를 간단히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나고야에서 고등학교에서 밴드를 결성한 마나와 카나 쌍둥이 자매는 드러머 유나와 베이시스트 유키를 불러들여 4인조 밴드 구성을 완성한다. ‘차이’로 이름을 결정한 이들은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위해 도쿄로 상경하여 2015년 첫번째 EP를 발매했는데, 핑크색 옷을 맞춰 입고 이상한 춤을 추며 노래를 하는 이들이 곧 소니 뮤직의 눈에 띄게 되어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본에서 무사히 데뷔 음반 [Pink]를 발매하고 성공적으로 일본무대에 안착하나 싶었지만… 사우스 바이 사우스 웨스트(SXSW) 아시아 오디션에 합격해 오스틴으로 날아가버린다. 미국에서의 강렬한 데뷔 공연과 데뷔 음반, 뮤직비디오 등은 캘리포니아 기반 음반사인 버거 레코드를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이 곳을 통해 2018년 [Pink]의 북미버전을 재발매하게 된다. 이후 수퍼올가니즘(Superorganism)의 투어에 오프닝 밴들 참여하면서 미국을 한바퀴 돌았고, 그 결과 두번째 음반 [Punk]는 미국(버거 레코드), 영국(헤븐리 레코드(Heavenly Records)), 그리고 일본(오테모얀 레코드(Otemoyan Records))에서 동시에 발매될 수 있었다. 이 겁없는 여성 네명의 앞날에 부디 즐겁고 행복한 날들만 가득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나는 이들의 음악을 들으며 너무 즐겁고 행복했기 때문이다.

John Coltrane | Both Directions at Once: The Lost Album

지난 해 가장 즐겨 들었던 음반이지만 블로그에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 음반이 하나 있다. 작년 재즈씬 뿐 아니라 음악계 전체를 들썩이게 만든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의 신작 [Both Directions at Once: The Lost Album]은 음반 제목에서 추측할 수 있듯 1963년 녹음된 이후 50여년 넘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묻혀 있다 2018년이 되어서야 공개된, 기적과 같은 작품이다. 이 음반은 1963년 3월 6일, 뉴저지 주의 반 젤더 스튜디오(Van Gelder Studio)에서 녹음되었다. 존 콜트레인이 색소폰을 연주했고, 1963년 당시 콜트레인과 함께 했던 그 유명한 “Classic Quartet” 멤버인 지미 개리슨(Jimmy Garrison, double bassist), 엘빈 존슨(Elvin Jones, drummer), 맥코이 타이너(McCoy Tyner, pianist)가 함께 했다. 녹음 이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임펄스 레코드(Impulse Records)에서 음반의 마스터 테잎을 파괴했고, 콜트레인은 반 젤더 스튜디오에서 개인 감상용으로 받은 복사본 중 하나를 그의 첫번째 아내인 주아니타 나이마(Juanita Naima)에게 주었다. 2005년, 건지 경매회사(Guernsey’s auction house)에서 콜트레인과 관련된 물품으로 경매행사를 주최하였고, 이 행사에서 복사본의 판권 및 저작권을 획득한 반 젤더 스튜디오와 프로듀서 켄 드러커(Ken Druker), 콜트레인의 아들 래비(Ravi) 콜트레인은 합심하여 이 음반을 완성시키기로 결심한다. 루디 반 젤더가 믹싱을 담당했고, 미국음악사가 애슐리 칸(Ashley Kahn)이 음반의 라이너 노트를 집필했다.

음반은 총 7개의 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Vilia”를 제외한 모든 곡이 전에 공개된 적이 없는 신곡이다. 음반이 최초 공개된 것은 2018년 6월이지만, 지금에 와서 이 음반이 개인적을 새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최근 발매된 콜트레인의 다른 음반 [Coltrane ’58: The Prestige Recordings]를 최근에 듣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58년에서 63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콜트레인은 상당히 흥미롭다. 1958년은 콜트레인이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하던 시절이다. 음악사에 가장 중요하게 기록될 음반 중 하나인 [Blue Train]이 발표된 해이고, 텔로니어스 몽크와의 협업 등을 통해 발전된 특유의 코드 진행 방식인 “Coltrane changes”이 형식적으로 완성된 해이기도 하다. 최근 발표된 58년 음반은 그래서 그런지 무척 감미롭고 여유롭게 들린다. 콜트레인의 미적 감수성이 극대화되어 안정적인 코드 진행 속에서 마음껏 뛰어논다. 춤으로 치면 왈츠나 발레가 떠오른다. 1963작은 이와 여러가지 측면에서 대비된다. 음반의 타이틀곡인 “Impressions”의 첫소절을 들으면 정신이 버쩍 든다. 음반의 모든 부분에서 콜트레인의 광기가 펄떡거리고 있다.음반은 그의 정규음반들과 달리 정제되어 있지 않고 거칠게 진행되지만, 음반 전체에 살아 숨쉬는 생명력 만큼은 어느 정규음반 못지 않게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춤으로 치면 열정적이고 즉흥적인 탭댄스가 떠오른다. 1965년부터 콜트레인은 아방가르드 재즈에 대한 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데, 이 1963년 녹음은 그러한 콜트레인의 변화하는 감수성을 발견할 수 있는 소중한 사료이기도 하다. 여러 부분에서 밴드는 쉬지 않고 실험을 한다. 가끔은 그 실험이 너무 난해하게 느껴지고 가끔은 그 과정에서 성긴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콜트레인 역사의 ‘missing link’를 발견한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재즈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최소한 콜트레인은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뮤지션으로 남아 있다.

Jenny Lewis | On the Line

결혼 전, 여의도에 있는 회사에서 근무할 당시 나는 돈을 멍청하게 낭비하는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셔츠 빨래가 귀찮아 세탁소에 열 장이 넘는 셔츠를 한꺼번에 맡겨버리는가 하면 아무 이유 없이 “내가 쏜다!”를 외치기도 했다. 그 중 제일 가관이었던 낭비는 퇴근 길 싱글몰트 바에 들려 한 잔에 몇 만원씩 하는 위스키를 마시는 일을 ‘루틴’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친해진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당시 자주 듣던 음악을 바에서 틀곤 했는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순간은 제니 루이스(Jenny Lewis)의 [The Voyager] 를 듣던 어느날 밤이다. 당시에도 제니 루이스는 완벽했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점이 하나 있는데, 제니 루이스는 첫번째 음반 [Rabbit Fur Coat]부터 [Acid Tongue], [The Voyager]까지 단 한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국인 중 제니 루이스를 ‘최애’로 꼽는 이는 극히 드물겠지만, 최소한 그녀의 음악은 항상 기대 이상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개인적으로는 2008년 유학을 시작하던 시기부터 지금까지 인생의 변곡점을 함께 해온 뮤지션이라는 점에서 조금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그녀는 무척 ‘미국적’이지만, 그래서 한국인들에게는 ‘잘 팔리지 않는 메뉴를 고집하는 원테이블 레스토랑 사장님’같은 느낌으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지만, 그녀의 그런 ‘미국스러움’은 내가 사랑하는 미국의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뮤지션이기도 하다.

제니 루이스의 네번째 솔로 음반 [On the Line]은 마흔을 넘긴 뮤지션이 속한 장르를 극적으로 바꾸지 않은 채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는 놀라움을 선사하는 뛰어난 작품이다. 컨트리와 포크의 자기장 안에서 여전히 아주 전통적인 미국적 사운드를 들려주지만, 그 안에서 끊임없이 자기 성장을 하기 위해 노력해온 그간의 성과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느낌이다. NME와의 인터뷰 영상에서 진행자가 루이스를 “legendary” 라고 소개하는데, 이제 그 표현을 거리낌 없이 그녀의 이름 앞에 붙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확신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 음반에 수록된 “Do Si Do” 때문이다. 제니 루이스는 이번 음반 작업을 벡(Beck), 라이언 아담스(Ryan Adams) 등과 함께 했는데, (전설 링고 스타도 음반에 참여했다) 그 과정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진짜 락앤롤 음악을 처음 했던, 에너제틱하면서도 편안했던 작업”이었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거듭 강조했다. “Do Si Do”를 듣다 보면 뜬금없이 “rock and roll” 이라는 가사가 튀어 나온다. 거기서 느껴지는 묘한 카타르시스가 있다. 사운드는 더 없이 탄탄하고 그 위에 얹힌 루이스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단단하다. 유년 시절부터 끊임없이 미디어에 노출되고 그룹 활동과 여러 프로젝트 작업을 거친 베테랑 뮤지션이 갑자기 당당하게 이제 나는 록음악을 합니다, 라고 선언하는데 그 아우라가 대단하다. 이제 그녀는 새로운 경지로 나아갔다. 음반에는 “Do Si Do” 외에도 좋은 곡들이 무척 많다. 들으면 들을수록 감탄이 나올 정도로 거의 모든 곡들이 매끄럽고 단단하다. 십년 넘게 함께 해온 뮤지션이기에 그저 음악을 계속 해주는 것만으로 고마운데, 심지어 매 음반마다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존경심마저 우러 나온다. 더이상 벤 기바드(Ben Gibbard)와 찰랑거리는 사랑-이별 노래를 부르지는 않지만, 그 시절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성숙한 음악을 계속해서 공급하고 있다.

Stella Donnelly | Beware of the Dogs

호주(Australia) 출신 뮤지션 스텔라 도넬리(Stella Donnelly)의 첫번째 정규 음반 [Beware of the Dogs]는 기쁘지만 슬프고, 유쾌하지만 우울하고, 반갑고 소중하지만 답답하고 미안한 음반이다. 2019년 참 좋은 음반과 뮤지션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어서 기쁘지만 다시는 나오면 안되는 음반이기에 슬프고, 음반 곳곳에 깃든 그녀의 유머러스한 모습에 유쾌해지지만 그 밝은 표현이 성폭력과 성차별, 남성우월주의 등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에 우울해진다. 그래서 반갑지만 답답하고, 소중한 음반이지만 동시에 미안해지기도 하는 음반이다.

스텔라 도넬리는 2017년 그녀의 첫번째 EP [Thrush Metal] 을 발표할 당시 호주의 한 펍에서 접시를 닦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그녀는 “10명보다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게 될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고, NPR Tiny Desk Concert 에서 공연하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두고(하지만 절대 이루어질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채) 살고 있었다. EP가 생각보다 큰 호응을 얻으며 Secretly Canadian 레이블과 계약을 체결하고 데뷔 음반을 발표하게 되었는데, 이게 그만 대박이 터져버렸다. 결국 그녀는 최근 밥 보일린의 초대를 받아 NPR Tiny Desk Concert에서 공연을 했다. 물론 열명보다 더 많은 관객을 앞에 두고서.

단순히 도넬리의 음악을 맥 드마코(Mac Demarco) 류의 찰랑거리는 인디팝과 비교하는 것에는 무리가 조금 따를 것 같다. 그보다는 오히려 호주 출신 선배 뮤지션 코트니 바넷(Courtney Barnett)과 비교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기타를 중심으로 음악을 진행시켜 나가고, 곡마다 명확한 스토리 텔링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의 주제를 전달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음반은 성폭행을 당한 도넬리의 친구의 실화를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음반의 첫 곡 “Old Man”의 밝은 분위기에서 그것을 감지하기란 쉽지 않지만, 가사는 생각보다 훨씬 직설적이다.

그는 뉴스의 스포츠 섹션을 읽고 있어
이상한 웃음을 짓는 하얀색 이빨을 가진 백인 남자
뭔가를 했군
집에 혼자 있네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길 원했거든
우리에게 미소를 보이며
이봐, 만약 그녀를 한번만 더 건드리면
당신의 아내와 아이에게 모두 이야기하겠어
그 시간에 대해
왜냐하면 지금은 1993년이 아니거든
넌 직장을 잃었고
이 사회에서도 아웃이야

오, 내가 두려운 거야, 늙은이?
아니면 내가 뭘 할지 두려운거야?
당신은 나를 두 손으로 잡았지
그리고 이제 세상이 당신을 잡으려 해

이 음반이 그렇다고 단순히 페미니즘의 메시지만으로 승부하려는 작품은 아니다. 음악이 우선 충분히 괜찮다. 타이틀곡 “Beware of the Dogs”와 “Boys will be Boys”는 도넬리의 기타와 목소리만으로 구성된 곡인데, 맑은 기타톤과 섬세한 도넬리의 목소리가 심금을 울린다. “Old Man”은 앞서 언급한 맥 드마코가 연상될 정도로 청량하고 아름다우며, “U Owe Me”는 싱글로도 손색 없을 정도로 간결하고 명쾌하다. “Lunch”는 정교하게 잘 짜여진 좋은 팝넘버다. 음반 전체적인 구성도 괜찮은 편이고, 트랙을 굳이 뛰어 넘고 싶을 정도로 구린 곡도 없다. 도넬리의 음악을 들으며 기타와 목소리, 이 두 요소가 완벽한 음악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음악을 직접 만들어내는 재능은 거의 없는 편인데, 그래서 이런 뮤지션의 음악을 들으면 부러움과 경탄이 동시에 터져나온다. 올해의 신인으로 꼽혀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데뷔 음반이다.

The Comet is Coming | Trust in the Lifeforce of the Deep Mystery

더 코멧 이즈 커밍(The Comet is Coming)을 단순히 재즈 트리오라고 소개하는 것은 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재즈를 기반으로 하는…” 과 같은 부연 설명을 붙이는 것도 조심스럽다. 이들의 음악을 정의내리기 위해서는 몇 개의 장르 이름보다는 촉각, 혹은 미각적 느낌을 설명하는 형용사에 집중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만큼 더 코멧 이즈 커밍의 음악은 강렬하고 직관적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이들의 음악은 정교하게 잘 짜여진 명품 옷처럼 탄탄하고 빈틈이 없다. 반복해서 들으면 들을수록 미리 설계된 미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재미가 있다. 혹자는 이들이 재즈의 미래라고 이야기하고, 다른 이들은 재즈 뿐 아니라 소울, 펑크, 힙합, 전자음악, 사이키델릭 등 현재 트렌드를 장악하고 있는 거의 대부분 장르를 아우르는 조금 더 큰 그림을 이들이 그리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흥분한다.

스스로의 음악을 “apocalyptic space funk”라고 정의하는 세 명의 런던 출신 뮤지션이 처음 만난 곳은 2015년 런던의 한 공연장에서였다. 드러머 맥스웰 할렛(Maxwell Hallet)과 키보디스트 댄 리버스(Dan Leavers)는 당시 퓨처리스틱한 음악을 하는 듀오 사커96(Soccer96)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었는데, 근처 공연장에서 연주하고 있던 색소포니스트 샤바카 허칭스(Shabaka Hutchings)를 만나 단숨에 의기투합하게 된다. 선 라(Sun Ra), 존 콜트레인과 같은 선대 뮤지션에 대한 애정을 공통분모로 하여 이들이 결성한 그룹의 이름은 그 이름도 요상한 더 코멧 이즈 커밍. 그룹을 만들면서 무대 이름도 새롭게 정했다. 할렛은 베타맥스(Betamax), 리버스는 다날로그(Danaloque), 허칭스는 킹 샤바카(King Shabaka). 컨셉도 확실했다. 세기말, 사이키델릭, 장르 불문. 이들이 2016년 발표한 데뷔 음반 [Channel the Spirits]는 내 귀에는 조금 버거웠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좋다는 확신은 있었지만 곁에 두고 즐겨 듣을 수 있는 그런 음반은 아니었다. 몇 번을 겨우 들은 후 뒤로 넘겨버렸던 기억이 있다. 컨셉이 확실한 뮤지션의 음악이 갖는 가장 큰 단점은 그 컨셉에 동의하지 못하는 청자의 마음을 돌리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되게 진한 산미를 가진 원두는 그 나름의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지만, 산미를 즐기지 않는 커피 애호가에게 결코 사랑받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그런 그들이 발표한 두번째 음반 [Trust of the liveforce in the Deep Mystery]는 그런 호불호조차 뛰어넘을만한 뛰어난 작품이다. 마치 호날두의 플레이스타일을 좋아하지 않는 축구팬조차, 르브론 제임스의 농구를 사랑하지 않는 안티-르브론 팬조차 결국 호날두나 제임스가 이룩한 업적에는 고개를 저으며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인 셈이다. (물론 코멧 이즈 커밍의 음악을 그정도로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 음반에서는 시각적 강렬함이 조금 더 빛을 발한다. 베타맥스의 스네어 소리와 킹 샤바카의 엘토 색소폰 음이 빚어내는 조화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여기에 더해 전체적인 사운드를 만지는 다날로그는 더 코멧 이즈 커밍의 음악을 조금 더 퓨처리스틱하게, 다른 말로 하면 때깔나게 꾸며놓았다. 이들과 가장 비슷한 색깔을 내는 뮤지션으로 테임 임팔라(Tame Impala)와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광기’가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는 점에서 콜트레인과 닮았고, 한도 끝도 없이 최면적이라는 점에서 테임 임팔라와 비슷하다. 음반의 베스트 트랙은 한 곡만 꼽기에는 너무 차고 넘친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곡인 “Summon the Fire”부터 “미쳤다”라는 표현 밖에는 나오지 않는 대단한 킬링 파트를 품고 있는 노래 “Birth of Creation”, 일렉트로닉의 차원으로 훌쩍 넘어가버리는 “Timewave Zero”, 음반에서 가장 사이키델릭한 “Blood of Past”, 심지어 명상적이기까지 한 “The Universe Wakes Up” 등,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노래가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