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지하철 1호선]은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2001년, 혹은 2002년 무렵 어느 겨울날 이 뮤지컬을 처음 접했고, 큰 충격에 빠졌다. 내가 알던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충격은 아마도, 애써 무시하고 있던 세상의 밑바닥을 날것 그대로 접해야 했던 어린날의 성장통이었을 것이다. 이후 두 세번 정도 더 관람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관람 후 계단에서 기다리던 출연진과 일일이 악수를 하는 여유도 생겼지만, 관람 중 어느 순간 맞닥뜨렸던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듯한 감동은 여전한 크기로 전해져왔다. 유학을 나와있던 중 [지하철 1호선]이 4천회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다고 했을 때 느꼈던 서운함도 아직 잊지 못한다. 영원히 달릴 것 같았던, 마냥 씩씩해보였던 작품이 갑자기 운행을 종료한다는 통보를 해왔을 때 느꼈던 서늘하고 먹먹한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게 가슴 한구석에 살아남아있다. 연속 공연을 중단한 김민기 대표가 이후 아동극에 천착하는 모습을 보며 [지하철 1호선]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할 수 조차 없게 된 것은 오히려 인상적이었다. 매일 이 작품을 기억하며 살지는 않았지만, 첫번째 관람 이후 이 작품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말도 거짓은 아니다.

그런 작품이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마음 속으로 16,17년 전 감정이 살아나는 듯 해 묘한 반가움을 느꼈다. (사실은 뛸 듯 기뻤다) 그 때 들었던 노래들은 여전한 감동으로 다가올지도 궁금했고, 그 당시 이 작품을 통해 발견했던 마음 속 깊숙한 곳부터 시작된 아우성은 이제 어떤 모습으로 반응할지도 궁금했다. 나는 [지하철 1호선]을 비롯한 몇몇 예술 작품과 서적들을 통해 현재의 자아를 획득한 경우다.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십대 시절 읽지 않았다면, 머큐리 레브(Mercury Rev)의 [Deserter’s Songs]를 수험생 시절 듣지 않았다면, 로버트 하일브로너의 책들을 유학을 떠나기 전 읽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하철 1호선] 역시 마찬가지다. 입대 전 방탕한 대학생 시절에 만난 이 작품을 통해 세상을 보는 시선은 분명한 변화를 겪었다. 지금의 나는 그 때로부터도 멀리 달아나 있지만, 최소한 그 뿌리는 아직도 굳건히 자리잡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기에 이 작품을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관람하는 것은 최소한 개인적으로는 나에게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아내와 함께 찾았다. 아내가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지금 우리가 함께 보는 공연에서 어떤 것들을 공유할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다시 찾은 학전블루 소극장은 여전히 낡고 좁았다. 좌석은 세시간 가까이 진행되는 공연 시간동안 내 뾰족한 엉덩이를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딱딱했다. 하지만 앞좌석에 무릎이 닿을 정도로 좁고 불편한 좌석도, 매캐한 냄새가 은근히 퍼지는 지하의 공연장도 그저 반갑고 고맙기만 할 뿐, 공연을 기다리는 들뜬 마음을 식혀버리는 걸림돌이 되지는 못했다.

공연은 1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배경은 여전히 1998년 IMF 위기가 터진 직후였고, 선녀는 여전히 제비를 찾아 1호선을 타고 이곳 저곳을 배회한다. 그 와중에 만나는 사람들 역시 여전히 1998년을 살고 있었다. 혼혈로 태어나 사창가에서 포주 노릇을 하는 철수도, 그런 철수를 주워다 키운 곰보할매도, 곰보할매의 가게에서 우동을 외상으로 먹는 안경도, 그런 안경을 사랑하는 걸레도 모두 그대로였다. 지하철에서 UFO에 대한 믿음을 설파하는 교주와 고무장갑을 파는 잡상인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공연에서 2018년을 느낄 수 있었던 유일한 부분은 음악이었다. 밴드 ‘무임승차’의 구성이 조금 달라졌다. 드럼과 색소폰이 빠지고 바이올린과 건반, 퍼커션이 들어왔다. 그러다보니 모든 곡에서 약간의 편곡이 이루어졌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공연에서 정말 크게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사람이다. 공연을 올리는 배우들이 바뀌었고, 그 공연을 보는 나와 내 주변의 관람객이 바뀌었다. 우리는 이 작품이 무대 위에서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1998년의 공기에서 20년이나 떨어져 있었다. 그 당시의 무겁고 우울한 공기에서 조금씩 벗어난 우리는 이제 조금 다른 형태의 삶의 고단함으로 옮겨온 터였다. 비록 기억은 하고 있을지언정 더이상 그 순간을 살지 않은 우리들이 공연장에서 가장 서서히, 하지만 기어코 가장 극적으로 변해버린 존재가 아니었을까. 한 인터뷰에서 이번 [지하철 1호선]에 참여한 배우 중 과거에 공연되었던 [지하철 1호선]을 직접 경험한 배우는 딱 한 명 뿐이라는 이야기를 읽었다. 1998년이 2018년의 우리에게 ‘역사’로 기억되는 것처럼, 이 공연의 무대에 서는 배우들에게도 이 작품은 하나의 역사였던 것일까. 그래서인지 배우들의 연기에서 작지않은 이질감을 느꼈다.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선녀와 철수, 걸레와 안경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한 것이, 이번에 무대에 오른 젊은 배우들이 받아들였을 1998년과 나를 비롯한 객석의 많은 ‘늙은’ 관객이 기억하는 1998년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12월 쯤 되어 예정된 100회 공연의 막바지에 다다를 때, 이 배우들은 어떤 공기를 내뿜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관객으로부터 어떤 공기를 받아들일 것이며, 1998년을 반복해서 상기시키는 대사와 몸짓을 통해 무엇을 체화할 것인지 궁금해졌다. 아마도 적지 않은 것들이 달라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 1호선]은 4,000회에서 100을 더해 딱 4,100회까지만 운행한다고 한다. 김민기 대표의 인터뷰에 따르면 “정리하고 가야 할” 작품들이 학전에 쌓여 있고, [지하철 1호선]은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 가장 먼저 털고 넘어가기로 했다고 한다. 이제 이 작품이 정말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셈이다. 이 작품의 2008년, 2018년 버전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대표의 말처럼 만약 그렇게 시대를 한번 더 옮겨야 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번안이 아니라 새로운 작품이어야만 할 것이다. 2018년을 살아가는 철수와 걸레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 시대가 변했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변했으며, 우리와 시대 안에 존재하는 공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8년을 그리고 있는 [지하철 1호선]은 여전히 넘치는 생명력으로 펄떡거렸다. 오프닝에서 선녀가 독창을 할 때부터 이미 시작된 짜릿한 기운은 한 이름없는 술취한 직장인이 남산 아래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느껴지는 먹먹한 감정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되었다. 선녀의 이야기가, 걸레의 이야기가, 빨간바지의 이야기가 관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 개개인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 여전히 눈 앞에서 펼쳐졌다. 좁고 불편한 객석에서 세시간 만에 몸을 일으키며 고맙다는 생각만 계속 들었다. 다시 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단 100회 뿐이라 해도, 이렇게라도 다시 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Mitski | Be the Cowboy

mitski
미츠키(Mitski)의 네번째 정규 음반이자 그녀의 이름을 전세계 음악팬들에게 각인시킨 2016년작  [Puberty 2]는 분명 그 해 발매된 음반 중 가장 손꼽히는 작품이었지만, 나는 선뜻 그 해 가장 뛰어난 음반이었다고 말하기를 주저했다. 이건 전적으로 내가 그녀와 비슷한 지역성(locality)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다. 즉, 나의 입장에서 그녀와 그녀의 음악을 어떤 범주에 넣을지(categorize) 지나치게 고민한 것 같다. “Your Best American Girl”같은 곡은 디아스포라(diaspora) 음악으로 볼 수도 있고 그냥 가벼운 인디-아이돌 팝넘버로 볼 수도 있었다. 음반 전체적으로는 아주 좋은 로-파이 음악으로 볼 수도 있었지만 여성성(femininity)과 경계인으로서의 삶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문학작품으로 해석할 여지도 다분했다. 그녀의 음악이 가진 다층적인 구조때문에 음악을 음악 자체로 100% 즐기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많은 기대 속에 올해 발매된 다섯번째 음반 [Be the Cowboy]는 그녀의 음악적 세계관이 한층 넓어지고 깊어졌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전작의 어디에선가 형식적으로 ‘아마추어적’으로 느껴지는 지점이 있었다면, 이번 음반에서 그러한 걱정이 말끔히 사라지는 지점 또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 로-파이 음악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껴안는 기존의 색채는 전체적으로 유지하되 디스코, 신스팝, 흑인음악 등 다양한 장르로 예쁘게 치장했다. 80년대, 때로는 6,70년대 스탠다드 팝 넘버의 영향력까지 느껴지는 곡들이 존재한다. 덕분에 음악은 훨씬 말끔한 옷을 입었고 다양성까지 획득했다. 미츠키가 들려주는 이야기들도 전작 [Puberty 2]의 연장선상에서 그 주제를 조금씩 확대한 느낌이다. 음반의 제목은 [Be the Cowboy]이지만, 그 어떤 노래에서도 카우보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다만 미국의 한복판에서 아시아-여성-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녀가 전달하는 삶의 파편들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미츠키가 이번 음반에서 획득한 이러한 형식적, 내용적인 측면에서의 발전된 모습은 첫곡 “Geyser”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이 곡 하나만으로 이미 “Your Best American Girl”의 무게감을 넘어선 것 같다. 이 외에도 “Nobody”에서는 전작에서 느낄 수 없었던 미츠키의 클래식한 매력을 확인할 수 있고, “Why didn’t You Stop Me?”, “Two Slow Dancers”와 같은 좋은 곡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34분 남짓한 짧은 러닝타임이 음악의 감상을 방해하는 유일한 요소인데, 스트리밍 서비스의 확산 등 음악 산업이 변화하면서 정규 음반(“Full-length” album)의 정의와 개념도 서서히 변화하는 시점이니 만큼 이 것이 절대적인 흠은 되지 못할 것 같다.

Serpentwithfeet | Soil

soil
음반 자켓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이 음반을 구매하게 된 첫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본능적으로 느낀 범상치 않음은 음반을 반복해서 재생시킬수록 확신으로 바뀌어갔다. 뉴욕 출신 음악가 조시아 와이즈(Josiah Wise)가 세크리틀리 캐내디안(Secretly Canadian) 음반사와 손잡고 내놓은 첫번째 음반이자 메이저에서 발표한 첫번째 정규음반 [Soil]은 R&B와 찬송가, 클래식과 소울음악, 전자음악 등이 묘한 분위기로 뒤섞여있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혼란스러움 속에서 기묘한 질서를 이루고 있는 느낌이다. 진성과 가성을 오가는 와이즈의 보컬은 가스펠 코러스와 어울려 그만의 독특한 아우라를 뽐내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음악은 흑인음악과 클래식이라는 양 극단(?)이 전자음악과 만나 요즘말로 ‘힙’한 색채를 한껏 드러낸다.

조시아 와이즈의 성장배경은 설펀트위드핏(Serpentwithfeet)의 음악세계를 이해하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될 것 같다. 와이즈는 뉴욕의 유복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클래식을 배우기 시작했고, 필라델피아의 음악전문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대학원 입시에서 낙방한 후 빠리와 필라델피아 등을 여행하다 필라델피아의 네오-소울 씬에 정착했고, 2013년 뉴욕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음악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2014년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샘플링하여 자신의 보컬을 입힌 “Curiosity of Other Man”을 발표했는데, 이 곡에는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아프리칸-어메리칸 동성애자라는 정체성과 클래식을 전공한 소울 뮤지션이라는 정체성을 모두 내포하고 있는 상징적인 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2015년 설펀트위드핏의 이름으로 발표한 데뷔 EP [Blisters]가 나왔고, 뷰욕(Bjork), 타이 달라 사인(Ty Dolla $ign) 등을 그의 팬으로 만들었다. 어쩌면 그의 데뷔작은 예견된 성공을 담보로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음악은 깊은 내적 성찰을 바탕으로 하는 소울 계열 음악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한다. 무대이름인 ‘Serpent with Feet’도 기독교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는 다리 달린 뱀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종교적이다.  그는 거의 모든 노래에서 사회의 통념과 배치되는 자신의 본능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자로 태어나 남자를 사랑하는 가운데 겪은 내적인 갈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의 의지를 아름다운 목소리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프랭크 오션(Frank Ocean)과 맞닿아 있는 부분도 발견된다. 와이즈 본인은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예술가로 브랜디(Brandy), 뷰욕(Bjork), 클래식 작곡가 드보르작(Antonin Dvorak), 그리고 소설가인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 등을 꼽았는데, [Soil]을 듣다보면 도저히 하나로 합쳐질 것 같지 않은 위의 예술가들이 설펀트위드핏의 음악 안에 고스란히 녹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올해 들었던 가장 신선한 음악이었다.

Natalie Prass | The Future and the Past

natalie prass
올해 날씨가 조금 더워지기 시작한 이후 최근까지 가장 즐겨 들었던 여성 보컬리스트 음반은 단연코 나탈리 프래스(Natalie Prass)의 새 음반 [The Future and the Past]였다. 파이스트(Feist)나 샬롯 갱스부르(Charlotte Gainsbourg)같은 인디 감성의 여성 팝보컬리스트의 음악을 꽤 좋아하는 편인데(취향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정도다), 이런 일군의 여성 아티스트들의 최근작들을 들으며 성에 차지 않는 아쉬움을 꽤 크게 느꼈다. 올해는 ‘이들도 역시 늙어가는 것인가’라는 슬픔에 빠질 무렵 ‘다음 세대’ 여성 아티스트들이 꽤 많이 등장한 해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 같다. US 걸스(US Girls), 사커 미미(Soccer Mommy), 스네일 메일(Snail Mail)처럼 로-파이 록음악에 기반을 둔 아티스트들의 음악도 정말 좋았지만, 팝에 기반을 둔 나탈리 프래스의 두번째 음반만큼 감성적으로 자극적이고 상쾌한 작품은 올해 아직 없었던 것 같다.

나탈리 프래스는 2015년 동명의 데뷔음반에서 그녀의 배경(남부 버지니아 출신, 멤피스에서 음악을 배우고 제니 루이스(Jenny Lewis)의 투어링 밴드 멤버로 참여한 경력 등등)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미국 남부의 정서를 한껏 드러내고도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을 뿐 아니라 힙하고 트렌디한 팝의 느낌또한 잘 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한껏 묻어난 수작이었다. 두번째 음반 [The Future and the Past]에서는 보다 담대한 그녀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이 음반에서 그녀는 트럼프 시대 이후 미국에서 여성이 살아가는 법, 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대해 훅이 넘치는 팝넘버와 위트 있는 가사를 통해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다. 형식적으로도 훨씬 단단해졌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볍지만 그래서 더 수월하게 전달될 수 있다. 80년대 디스코와 90년대 시스팝 등을 환기시키는 복고풍의 사운드는 통통 튀는 멜로디와 합쳐져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진다. 익숙한 것들을 섞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훨씬 단단해진 느낌이다. 그녀의 음악적 경력이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확신을 갖게 만드는 음반이다.

Kamasi Washington | Heaven and Earth

Kamasi Washington_ Heaven and Earth
카마시 워싱턴의 전작 [The Epic]에서 특히 좋았던 부분은 그가 드뷔시를 해석하는 방식이었다. 드뷔시의 피아노 연주곡을 꽤 많이 좋아하는 편인데, [The Epic]에서 카마시 워싱턴이 연주한 “Clair de Lune”은 최근 들었던 그 어떤 드뷔시 연주보다 따뜻한 온도와 농밀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무려 세 장으로 구성된 이 괴물같은 데뷔 음반을 2015년에 발표한 1981년생의(얼굴로 사람 판단하지 맙시다) LA 출신 재즈 색소포니스트가 3년만에 [Heaven and Earth]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청자의 귀를 조금 고려해주었는지 다행히(?) 두 장짜리 음반이다. 한 장은 “Heaven”, 다른 한 장은 “Earth”에 대한 음악으로 구성되어 있다. 재즈라는 하나의 장르에 가둬둘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장르에 대한 편식없는 소화능력을 이번 음반에서도 유감없이 보여준다. 허비 행콕부터 켄드릭 라마까지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와 협연한 경력이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새 음반에서 눈에 띄는 점이라면 음악적으로 조금 더 풍부해졌다는 것이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라는 기본 바탕에 네 명으로 구성된 보컬 그룹과 열 명 남짓한 중창단이 더해졌다. 악기의 수가 늘어난 만큼 이를 통제하는 지휘자의 역할도 중요할텐데, 카마시 워싱턴은 능숙한 솜씨로 이 메인 쉐프의 역할을 단단하게 성취해낸다. 전작에 비해 눈에 띄는 또다른 점이라면 서사의 확장을 들 수 있다. “Heaven”을 지나 “Earth”로 가는 길을 따라 걷다보면 워싱턴이 깔아놓은 다양한 풍경들을 어깨 너머로 구경할 수 있다. 가사로 구구절절히 서사를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가 조절하는 음악의 호흡과 리듬만으로 충분한 서사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압도적이고 황홀한 체험을 지루하지 않게 긴 시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은 단지 재능이 넘치는 뮤지션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아주 짧은 기간동안만 가능한 빛나는 절정이다. 스포츠 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폼”이라는 단어를 여기에서 사용할 수 있을까. 음악을 스포츠 경기에 비유하자면 요즘 “폼”이 가장 좋은 선수는 카마시 워싱턴이 아닐까 싶다.

Snail Mail | Lush

snail mail
최근 음악 일기가 많이 밀렸다. 좋은 음악은 끊임없이 듣고 있는데, 그 감상을 차분히 글로 풀어내는 일은 항상 해야할 일들 중 우선 순위가 가장 뒤로 밀리게 된다. 물론 나의 게으름 외에 다른 이유를 가져다 붙이기에 민망한 일이지만, 어찌 되었든 이 블로그에 기록하지 못한 좋은 음반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픈 것도 사실이다.

밀린 일기를 해소해야 할 때 주로 하게 되는 고민은 ‘무엇부터 쓸 것인가?’이다. 나는 보통 가장 좋게 들었던 음악부터 적어나간다. 최근 몇 달 사이에 가장 감명깊게 들었던 음반은 만 18세의 여성 싱어송라이터가 발매한 데뷔 음반, [Lush]였다. 스네일 메일(Snail Mail)이라는 무대명을 가진 린지 조던(Lindsey Jordan)은 2018년 볼티모어 교외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마타도어(Matador) 음반사와 계약을 맺고 데뷔 음반 [Lush]를 발매했다. 이 음반은 올 해 가장 인상깊은 데뷔 음반으로 기록될 것이 확실하며,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올해의 음반으로 칭송받을 것이다. 최근 사커 마미(Soccer Mommy)나 US 걸스(US Girls) 등 미국 로 파이(Lo-Fi)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젊은 뮤지션들이 주목받고 있는데, 스네일 메일은 이러한 흐름의 끝판왕격으로 등장한 충격적인 신예 뮤지션이다.

5살 때부터 기타를 잡기 시작했다고 하며, 십대 시절 가족과 함께 파라모어(Paramore)와 피오나 애플의 공연을 본 이후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하며 두 장의 EP를 발매했다. (볼티모어 교외에 살던 린지 조던은 워싱턴DC의 NPR 사무실에서 열린 파라모어의 Tiny Desk 공연을 직접 가서 관람했고,  이후 2017년 본인이 직접 Tiny Desk에서 공연을 하게 된다) 인터뷰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음반으로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의 [Loaded] 음반을 언급하는 이 뮤지션은 결코 애늙은이처럼 90년대 음악을 답습하지 않는다. [Lush]는 십대의 펄떡거리는 정서가 날것 그대로 담겨 있다. 학교와 가족, 사랑과 이별, 우정 등 십대 시절 경험하게 되는 여러가지 성장통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이 음반은 그렇다고 여느 십대 갤러지 밴드의 음악들처럼 아마추어적이지도 않다. 그녀는 이미 뛰어난 기타리스트이며, 아주 뛰어난 작곡가이자 작사가이다. “Pristine”, “Heat Wave”, “Stick”같은 노래를 들어보면 도저히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탄탄하고 쫀득한 구성과 훅을 가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음반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은 “Full Control”인데, 90년대 로 파이 음악에 대한 애정이 진득하게 느껴지면서도 스네일 메일만이 가지고 있는 폭발적인 정서가 형식적으로 잘 구현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나른하고, 또 가끔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이 시절의 정서가 감각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표현되어 있다.

요즘 힙합 음악이 대세인 것은 아마도 힙합이 가진 뛰어난 서사 전달 능력이 한 목 하지 않았나 싶다. 우리가 흔히 스토리텔링이라고 부르는 힙합 음악의 서사 전달 기능은 최근 록음악으로도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Lyrical Rock’이라고 불리는 이 장르에서 성공한 뮤지션으로는 최근의 코트니 바넷(Courtney Barnett) 정도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고, 그 이전에는 아마도 홀드 스테디(Hold Steady)가 어느 정도의 기반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스네일 메일은 대중음악에서 왜 가사가 여전히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자, 가사와 음악이 어우러지는 음악적 공간(soundscape)이 어떻게 더 진화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 그 자체이기도 하다. 10월 3일 내한공연을 가진다고 한다. 김밥레코즈가 주관하는 내한공연은 러닝타임이 지나치게 짧고 구성이 지나치게 단촐하다는 공통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데뷔 음반을 이제 막 발매한, 로 파이를 기반으로 하는 뮤지션의 공연은 김밥 레코즈와 함께 해도 관중 입장에서 별로 잃을 것이 없어보인다. 꼭 가서 볼 생각이다.

Father John Misty | God’s Favorite Custo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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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더 존 미스티(Father John Misty)가 서브팝(Sub Pop)에서 발표한 네번째 정규 음반 [God’s Favorite Customer]는 예상보다 조금 이른 시점에 발매되었다. 75분에 가까운 러닝타임에 꾹꾹 눌러담은 역작 [Pure Comedy]가 불과 1여년전 이맘때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영미 인디씬에서 활동하는 뮤지션은 일반적으로 새 음반을 발표한 후 꽤 오랜 기간 투어를 다니기 마련인데, 파더 존 미스티 정도 되는 스타급 뮤지션은 북미 지역과 유럽 지역의 주요 도시들만 돌아다녀도 1년이 훌쩍 넘는 기간을 버스와 비행기 안에서 보내게 된다. 기나긴 투어 기간과 이후 재충전을 위한 휴식 기간, 그리고 새로운 음반 작업을 위한 기간까지 고려하면 음반과 음반 사이 간격이 2,3년 쯤 된다고 해도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이 불세출의 유머감각(!)을 가진 뮤지션이 불과 1년만에 새로운 음반을 발매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번아웃 증후군’까지 떠올리며 걱정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의 그러한 근심(?)과는 달리, 그리고 1년이라는 짧은 음반 발매 간격이 무색하게, 2018년 발매된 새 음반 [God’s Favorite Customer]은 전작과 비교해도 결코 뒤쳐진다고 할 수 없는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다. 전작 [Pure Comedy]가 음악가가 과시할 수 있는 ‘과잉’의 가장 현명한 방법 중 하나를 제시한 작품이라면, 이번 작품 [God’s Favorite Customer]는 파더 존 미스티가 쇳소리 나는 둔탁한 소리들을 잠시 옆에 개켜두고 가벼운 옷을 걸쳐 입어도 충분히 그 다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또다른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짧은 러닝타임과 (역시 상대적으로) 단촐한 악기 구성, 그리고 조금 더 자기 내면으로 침잠한 ‘솔직한 목소리’로 무장한 이번 음반은 파더 존 미스티가 여전히 성장 중이라는 생각에 확신을 더하게 만든다.

이번 음반의 주요한 특징 두가지로 파더 존 미스티 스타일의 발라드가 거의 완성되었다는 점과 드디어 자신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올뮤직(allmusic.com)은 이번 음반을 초기 엘튼 존(Elton John)의 음악과 비교하며 발라드에 대한 파더 존 미스티의 애정이 무척 잘 드러난 음반이라고 평하고 있는데, 나도 이 점에 적극 동의한다. 그는 분명 고전적인 장르를 현대적으로 재창조해내는 데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쉬 틸먼(Josh Tilman)만의 스토리텔링 기법이 더해져 ‘파더 존 미스티 워드’를 점점 확장해나가고 있다. 이번 음반은 지금까지 그의 음반에 등장한 많은 이야기들이 품고 있던 위악적 유머와는 조금 결이 다르다. “Mr. Tilman”과 “Just Dumb Enough to Try” 등 음반의 베스트트랙을 듣고 있다 보면 픽션보다는 논픽션에 가까운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내면으로 파고드는 대신 음반의 색깔은 조금 더 어두워졌다. 하지만 절망스러워보이진 않는다. 걱정스럽다기 보다는 당연히 따라오는 수순처럼 느껴진다.

파더 존 미스티가 발표한 세 장의 전작들 모두 나는 무척 좋게 들었다. 그가 점점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해왔고, [Pure Comedy]에 이르러 인디씬을 대표하는 맹주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God’s Favorite Customer]는 나의 그러한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좋은 음반이다. 누군가에게는 이 음반이 충분히 올해의 음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Beach House | 7

beach house
2015년 한 해에만 두 장의 음반을 발표하는 등 이례적인 생산성을 보여주었던 비치 하우스(Beach House)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2018년에 엄청난 음반을 발표해버렸다. 이들의 일곱번째 정규 음반 [7]은 [Bloom] 이후 오랜만에 비치 하우스의 음악이 지체없이 내뿜는 폭발력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드림팝, 혹은 슈게이징에는 두 개의 양가적 세계가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방구석’이다. 신발이 뚫어져라 땅바닥만 쳐다보며 연주하는 방구석 덕후들이 만드는 음악이 드림팝이다. 비치 하우스의 음악을 ‘흑백’이라고 느꼈다면 그건 아마 이 방구석에서 스물스물 풍겨져 나오는 곰팡이 냄새때문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방구석 안에서 무한히 뻗어나가는 꿈나라 속 ‘신세계’다. 이들은 방구석 안에서 세계를 꿈꾸고 우주를 꿈꾸고 환상을 만들어낸다. 방구석 안 원더랜드가 덕후들이 뛰어노는 낙원이다. 비치 하우스의 음악을 출렁이는 물결처럼 느꼈다면 그건 아마 뮤지션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는 무한한 신세계를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7]은 전자보다 후자에 가까운 세계를 드러낸다. 고개를 조금 더 치켜 들었고 목소리에도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사운드는 전에 없이 탄탄하고 화려하다.

[Depression Cherry]와 [Thank You Lucky Star]는 비치 하우스만의 독특한 ‘방구석’ 냄새를 잘 담아낸 음반이다. 즉, 멜랑꼴리하면서도 달콤쌉싸름한 비치 하우스식 발라드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구성이었다. [7]은 조금 결이 다르다. 첫곡 “Dark Spring”부터 위풍당당하고 화려하며 거침이 없다. 물론 이들의 가사는 여전히 [Teen Dream] 시절부터 고유하게 유지해온 십대의 멜랑꼴리한 정서를 충실히 담아내고 있지만, 그릇의 크기와 모양이 예사롭지 않다. 첫곡에서 “Pay No Mind”로 이어지는 연결지점에서 본이베어(Bon Iver)의 [Bon Iver] 음반이 떠올랐다. 그만큼 청량하면서도 쓸쓸한 정서를 탁월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Lemon Glow”까지 이어지는 음반의 전반부는 나무랄데 없이 훌륭하다. 개인적으로는 [Teen Dream] 이후 이들이 보여준 집중력 중 최고 수준이 아닌가 생각한다. 비치 하우스 멤버들이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프랑스어로 만든 “L’Inconnue”는 음반 내에서 조금 특이한 곡인데, 비치 하우스의 최근 작품들보다는 서브팝(SubPop) 레코드와의 계약 전 인디 시절의 색채가 조금 더 강하게 드러난다. 아마 첫녹음 이후 5년 만에 공개된 노래여서 더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Drunk in LA,” “Dive”로 이어지는 음반의 중반부를 지나 “Lose Your Smile”에 다다르면 비치 하우스만이 간직한 ‘신세계’가 무엇인지 조금 더 확실하게 실감할 수 있다. R&B, 디스코 등 새로운 장르와의 적극적인 교배는 이 음반이 가진 또다른 매력이다. “Black Car”에서는 전위적인 신디 사운드가 노래의 첫 1분을 지배한다. “Dive”에서는 비치 하우스만의 멜랑꼴리한 정서가 하나의 장르로 거의 정착되었음을 확신케 만드는 강한 에너지를(그만큼 강한 드럼 비트와 함께) 느낄 수 있다.

[7]은 비치 하우스의 긴 음악 커리어에서 하나의 전환점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각각의 노래는 고유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이건 아마도 이들의 변화한 녹음방식덕분일 것이다. 모든 곡을 한꺼번에 녹음하던 전과 다르게 멤버들은 하나의 노래에 대한 작곡, 작사 작업이 끝나면 그 즉시 녹음을 시작했다. 작곡과 녹음 작업을 꾸준히 병행한 결과 각각의 노래가 가진 개성이 조금 더 잘 살아날 수 있었다. 이것이 음반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다는 점이 음반이 가진 또다른 미덕이다. 음반 전체가 펄떡펄떡 살아 숨쉬고 있다. 그만큼 이들의 능력은 원숙해졌고 조금 더 여유로워졌지만,  결코 힘은 빠지지 않았다. 좋은 드림팝 음반이다.

김해원 | 바다와 나의 변화

김해원
김사월X김해원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 이들의 음악은 함께 음악을 듣던 친구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김사월X김해원 들어봤어요?” “네, 완전 대박” 따위의 대화를 자주 주고받았다. 이들의 음악에 심장이 뛰었던 사람들은 비단 우리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포크씬에 일으킨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것을 넘어 한국 음악계 전체에 신선한 충격을 안긴 이들의 음악은 서늘하면서도 뜨거웠고, 명쾌하면서도 다차원적이었으며, 매혹적이지만 마냥 살갑게 굴지도 않는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김사월은 두 장의 솔로 음반을 통해 인디씬에 확고한 자기만의 위치를 만들었다. 주체적인 여성의 목소리를 명료하게 들려준다는 점에서 그녀의 음악은 단순히 잘 만든 음악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김사월의 목소리를 꾸준히 접하는 동안 김해원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프로듀싱과 영화음악 등을 통해 음악가와 청자, 감독과 관객의 매개자로 활동”해온 그가 “스스로 텍스트가 되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돌아왔다.  결론부터 말하면, 작곡, 작사는 물론 연주와 녹음, 편곡과 믹싱까지 음반 제작에 필요한 거의 모든 작업을 혼자 힘으로 해낸 [바다와 나의 변화]는 놀라운 수준의 들끓는 에너지가 절제된 목소리 안에 고요히 담겨 있는 묘한 작품이다. 도시를 떠나 바다를 가까이 하며 내면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김해원은 이번 음반에서 오롯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성찰은 깊은 수준까지 내려간다. 연인 사이에도 드러내기 힘든 마음의 밑바닥까지 남김없이 긁어내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연주는 심장을 도려내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소리의 빈공간조차 농밀하게 채워져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될 정도로 작곡은 빈틈이 없다. 홈레코딩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녹음도 깔끔하다.

이 음반은 다분히 감정적이지만, 지극히 냉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엘리엇 스미스를 삼촌으로 둔 수프얀 스티븐스가 빅 띠프의 멤버들과 음반을 만든다면 이런 느낌일까. 첫곡 “Hungry Boy”에서 김해원은 ‘소리’를 직조하는 과정에서 단 일보도 후퇴할 생각이 없음을 명확히 드러낸다. “헝클어진 머리”와 “불길”에서는 이 음반을 듣는 청자에게 어떤 자세를 요구하는 것 같아 보인다. 나는 이만큼 솔직해질테니, 나의 음악을 듣는 당신도 진실해지길, 하고 속삭이는 느낌이다. “Television” 쯤에 이르면 김해원의 세계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어제 네가 나오는 텔레비전을 봤어”라는 단 한 줄의 가사를 두 번 읊조리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후 묵묵히 이어지는 연주를 통해 화자의 감정을 절절하게 노출한다.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냐, 라고 반문하는 이 노래를 듣는 청자의 마음도 함께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불길”과 “새벽녘”에서 보여주는 김해원의 기타 연주는 탄성을 자아낼 정도인데, 이는 단순히 악기를 아름답게 연주하는 차원을 넘어 악기연주를 통해 어떤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인상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Listener”와 “종달새”에서는 그의 음악적 뿌리가 여전히 포크에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잊고 있었다!), “Why So Hard?”에서는 김해원식 아름다움의 한 절정을 느낄 수 있다. 왜 후반부에 배치되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하면 절로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이 노래는 무척 아름답다. 순수하게 아름답다. 이 곡에 이어지는 음반의 타이틀곡 “바다와 나의 변화”과 음반을 마무리짓는 “오늘”에서는 가슴을 시리게 만드는 화자의 서늘한 고백을 마주해야 한다. “차가워지는 물”과 “짐이 되어가는 자신”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아끼는 것들과 사람을 위해” “무거운 옷”을 입어도 힘이 들지 않는다고 되내이는 김해원의 고백을 듣다보면 얼굴의 솜털이 삐죽 곤두설 정도로 서늘함을 느끼면서도 그 안에 가만히 자리잡고 있는 뭉클하고 뜨거운 힘을 발견할 수 있다. 좀처럼 갖기 힘든 기이한 체험이다. 아름답고 아름답다.

우리가 김사월X김해원의 음악을 통해 상상하고 기대했던 김해원의 음악보다 훨씬 더 깊고 더 풍부하고 더 맑은 음악을 [바다와 나의 변화]를 통해 전달받을 수 있었다. 윤영배 이후 언제 이토록 좋은 포크 음반을 접해보았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나에게는 현재까지 이 음반이 ‘올해의 음반’이다. 최소한, 상반기 최고의 음반이다. 최소한. 반드시 헤드폰으로 들어보기를 추천한다.

Julien Baker | Turn Out the Lights

줄리엔 베이커
오직 ‘감정’ 하나로 자신의 음악에 승부를 보려는 아티스트들이 있다. 예술가로서 쌓아올린 자아의 내면을 가감없이 밖으로 드러냄으로써 예술 세계를 완성시키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몹시 예술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감정의 온도와 모양이 청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위험성 역시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감정으로 노래하는 사람의 음악이 대중음악 시장에서 인정받기 위한 중요한 요소는 그 감정의 전달(delivery)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테네시주 멤피스 출신의 젊은 여성 싱어송라이터 줄리엔 베이커(Julien Baker)가 작은 음반사 6131에서 데뷔 음반 [Sprained Ankle]을 내놓았을 때 많은 이들이 흥분을 하고 상찬을 보낸 것은 그녀가 고백하는 감정의 조각들이 진실성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감정이 청자에게 전달되는 과정 역시 매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마타도어(Matador)에 픽업되어 발매한 두번째 음반 [Turn Out the Lights]은 더 큰 기대와 함께 ‘혹시나’하는 걱정을 수반했다.

결과적으로 새음반에서 그녀가 전달하는 울림의 폭은 더 커졌다. 드럼과 베이스같은 리듬파트 악기를 거세한 상태에서 오직 기타와 피아노에 의지해서 울려퍼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음악의 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있다. 후렴구는 코러스와 중첩되어 더 두꺼워졌고, 강하게 내지르는 부분도 더 많아졌다. 떨림은 더 심해졌다. 세심해졌다기 보다는 그 낙폭이 몸으로 느껴질 정도로 커졌다. ‘절창’이라고 표현해도 좋을만큼 아름다운 순간들이 복수의 곡들에서 스쳐 지나간다. 흡사 플릿 폭시스의 후렴구를 듣는 듯한 드라마틱한 순간들이 많이 느껴진다. 다만, 전작에 존재했던 본이베어와 같은 나른하고 나긋한 자기반성적 모습은 많이 줄어들었다.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전달방식은 여전히 훌륭하다. 짧은 러닝타임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감정에 동화되어 함께 음반 커버와 비슷한 색깔의 어두운 보라색의 심연으로 가라앉게 된다. 그녀는 여전히 절실하고 또 여전히 갈구한다. 그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난다. 그녀의 절실함을 청자가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은 축복받은 음악적 재능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새로운 레코딩 환경에서 명민하게 ‘요령’을 공부한 부지런함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