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 | 불황의 경제학

폴 크루그먼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지만(그리고 그를 싫어할 만한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지만), 그 중 딱 세 가지만 꼽아보라고 하면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첫째, 문장이 쉽고 간결하며, 꼭 필요한 단어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둘째, 항상 자신만만하며 충분히 공격적이지만 결코 위트를 잃지 않는다. 셋째, 경제학의 꼭대기에 올라선 사람이 쓴 글이지만, 경제학원론 조차 경험하지 않는 독자도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하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이후 크루그먼은 주류 경제학계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칼럼과 저서를 다수 발표해 왔다. 나 역시 오직 크루그먼의 칼럼을 읽기 위해 한동안 뉴욕 타임즈를 구독한 경험이 있다. 그의 칼럼은 대부분 신랄하고 공격적인 비판으로 가득차 있으며, 반드시 비판의 대상을 반 시체 수준으로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놓은 뒤에야 끝을 맺는다. 논리적으로 완벽할 뿐 아니라 물고 늘어지는 집념 또한 대단해서, 왠만한 정신력이 아니고서는 쉽게 그의 타겟에 걸리면 어느 정도의 상처는 각오해야 할 정도다.

그가 집요하게 공격하는 주 대상은 한때 그가 속해 있던 주류 경제학계와, 그 주류 경제학의 자장 안에서 만들어지는 여러 경제정책들이다. 1980년대 이후 발생한 굵직한 경제위기에 대해 해석하고 그 위기의 해법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크루그먼과 주류 경제학계는 현저한 시각적 차이를 보여왔다. 현대 국제무역이론을 정립하고 국제금융 분야의 권위자로 이름을 떨친 그가 바라보는 세계화와 경제위기는 어떤 모습일까. [불황의 경제학]에서 어느 정도 힌트를 찾을 수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후, 고도로 복잡화된 현대의 금융상품과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선진국의 거대 자본, 그리고 은행처럼 강력한 규제를 받지 않는 그림자금융(shadow banking) 등이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많은 정책가들과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낸 근본적인 원인을 제도와 역사에서 찾지 않고 시간과 장소를 한정시켜 국소적인 원인만을 치유하는 방향으로 논리를 전개시켜 나갔다. 크루그먼의 눈에는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브레튼우즈 체제가 무너지고 변동환율제가 실시된 이후 국제금융시장을 통한 자본의 국제적 이동이 심화되고 국가 간 연결고리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이미 위기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조지 소로스와 같이 한 나라의 중앙은행이 가진 외환보유고와 거의 동등한 수준의 자본력을 동원할 수 있는 거대 투기세력이 한 나라의 통화가치를 떨어뜨려 거대한 수익을 올리는 동안 그 나라의 실물경제는 파탄이 나고 그 나라에 살던 시민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국가 채무불이행 사태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했던 IMF 구제금융은 선진국의 경제논리를 개발도상국에 주입시키는 결과로 나타났다. IMF는 위기에 처한 국가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신 노동시장 자율화와 금융시장 개방 등 선진국의 자본이 보다 손쉽게 침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강요했고, 당장 위기를 끝내야만 했던 작은 국가들은 이에 복종해야만 했다. 크루그먼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시장만이 가진 국소적 문제때문에 발생한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며, 당장 그 어느 나라, 그 어느 때에도 발생할 수 있는 공통적인 위험 인자가 아직도 도처에 존재한다고 역설한다. 공황은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현재의 국제통화제체를 유지하고 국제금융시장이 계속 팽창하는 이상, 불황은 주기적으로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으며, 호황과 불황 사이의 진폭은 세계 경제의 긴밀한 연결성 속에서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나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경제는 한 나라에서 발생한 아주 미세한 사건에도 많은 나라가 민감하게 반응할 정도로 지나치게 신경질적인 이웃들이 사는 공간으로 변했다. 한 나라의 통화정책은 그 나라의 실물경기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환율을 방어하거나 혹은 미국의 금리정책을 쫓아가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스나 포르투갈처럼 미국으로부터 시작된 위기에 노출되어 실물경기가 후퇴한 국가들은 국제기구로부터 원조를 받을 때 재정적자를 일정 수준 이하로 유지할 것을 약속해야 했다. 변동환율제도의 가장 큰 장점은 각국의 통화 및 재정 정책에 독립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국제적 자본거래가 겉잡을 수 없이 커진 요즘의 세상에서는 거시경제정책의 독립성이 여러 측면에서 큰 도전에 직면해있는 것이 사실이다. 크루그먼은 IMF와 WTO 등 국제기구가 편향적임을 지적하고, 최근 발생한 경제위기의 본질적 원인을 치유하지 않는 이상 유사한 위기가 또다시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구 반대편에 사는 거대 자본가의 이익 편취행위로 인해 실질적인 피해를 보는 사람은 이와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온 중산층 이하 직장인들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체제는 과감히 종식되어야 한다. 크루그먼의 가르침은 나로 하여금 앞으로 발생할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최적의 시스템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로버트 쉴러 | 버블 경제학

우리 부부는 최근 디지털피아노를 하나 구입했다. 60만원 정도 되는 나름의 고가(!) 장비였기에 주 사용자인 아내 뿐 아니라 나 역시 이번 기회에 피아노에 대한 의욕이 꽤 크게 불타올랐다. 피아노를 전공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꽤 진지한 학습 경험을 가진 아내와 달리 나는 왼손과 오른손이 따로 놀아야 하는 지점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주저앉은, 아주 전형적인 ‘피아노 바보’ 중 하나라는 사실이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관계로 이번 설 연휴에 창원 부모님댁으로 간 큰 이유 중 하나는 그 곳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되었던 [바이엘 피아노 교본] 상, 하권을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곳에는 바이엘 교본이 없었고, 먼지 쌓인 책장을 구경하다 엉뚱하게 꽂혀서 세종까지 가지고 온 책이 [버블 경제학]이다.

로버트 쉴러(Robert J. Shiller) 교수는 현시대의 많은 거시/금융 경제학자들에게 롤모델과도 같은 존재다. 금융시장의 비효율성을 증명한 연구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학자로서의 경력 뿐 아니라 케이스-쉴러 지수(Case-Shiller Index)를 개발하여 미국 부동산 시장의 가격수준 및 변동성 수치를 정책에 반영한 정책가로서의 역량, 그리고 뉴욕 타임즈 등에 꾸준히 글을 기고하는 등 일반인을 상대로 한 활발한 저작활동까지, 다방면에 걸친 그의 활약상은 거시경제학자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지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융시장의 불완전성과 경제주체의 비이성적 판단이 미치는 결과 – 예컨대 버블 – 에 대해서는 세계 최고의 권위자인 쉴러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전후로 더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쉴러에게 금융위기에 대한 해답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버블 경제학](원제는 [Subprime Solution])은 금융위기 직후 이 새로운 형태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쉴러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한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반부의 명쾌한 진단과 후반부의 뜬구름 잡는 낙관주의가 뒤엉켜버려서 전체적으로 썩 좋은 책이라고는 말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특히 뉴딜 정책에 대한 찬양은 낯뜨거울 정도인데, 만약 지구상에 케인즈교가 있다면 쉴러는 케인즈교 코네티컷 지부의 주교 정도 자리는 차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비경제학자가 번역하고 감수한 책답게 전문용어에 대한 사려깊은 고려가 담겨져 있지 않은 점도 아쉬운 부분인데, 역설적으로 지나치게 쉽게 번역된 탓에 (짧은 책의 분량과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여) 큰 어려움 없이 빠르게 읽어내려갈 수 있다는 점은 장점으로 치부할 수 있겠다.

쉴러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딱 두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부동산 시장은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그리 뒷맛이 좋은 시장이 되지 못한다. 부동산가격은 딱 물가상승률 만큼, 혹은 물가상승률보다 조금 더 낮은 수준으로 상승해왔다. 하지만 사람들이 여전히 부동산시장에서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쉴러에 의하면, 금융시장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버블-버스트 구조는 경제주체의 비이성적 판단이 집단적으로 합쳐진 결과이며, 최근 지나치게 고도화된 금융상품의 특성과 대리인 비용(agency cost) 등 정보의 비대칭성 등에 의해 이러한 시스템적 영향이 증폭되어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불러 일으켰다. 쉴러에 의하면,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우선 금융시장에 존재하는 정보의 비대칭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이를 위해 개인별 맞춤 재무상담 서비스를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고 각종 공시시스템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 이와 함께 금융소비자 보호 정책도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이 어려운 퍼즐은 모두 퀀트(quant)가 풀어줄 것이다!)

여기까지는 아주 상식적인 주장이고, 이 책이 나온 뒤 10여년의 기간동안 책에서 주장된 많은 부분이 실제 정책으로 이행되어왔다. 하지만 책의 가장 뒷부분에서 쉴러가 주장하는 내용은 조금 결이 다르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파생상품시장 등을 통해 부동산 시장에 조금 더 많은 유동성을 불어넣어 투기꾼들이 장난을 치지 못하게 만들자는 쉴러의 주장은, 몇가지 지점에서 지나치게 낙관적이지는 않은지 걱정을 하게 만든다. 첫째, 쉴러는 시장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과연 쉴러가 가진 선의를 시장의 참가자들도 가지고 있을 것인가. 다양한 시장 참가자 모두에게 적절한 경제적 유인이 주어져 자산시장의 변동성 완화 및 리스크관리라는 최종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나에겐 되게 어려운 문제처럼 느껴졌는데 쉴러는 당연히 될 것처럼 이야기한다. 둘째, 쉴러는 정부정책 역시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신뢰하는 것처럼 보인다. 위와 같은 정책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인내심 넘치고 꾸준한 성미를 가진 정책가가 과연 존재하는가. TARP 등의 대규모 구제금융 정책이 실제로 시행되었던 과정을 살펴보면, 쉴러와 같은 이성적 경제학자가 굵직한 금융정책 결정 과정에서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는 여지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셋째, 쉴러는 인간의 마음 역시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1주택자와 같은 소규모 투자자가 과연 자기집 한번 마련해보자는 선한 마음만으로 주택담보대출을 받았을까? 월가에서 수조원을 굴리는 펀드 매니저부터 동네 계모임에 수십만원을 넣는 사람까지 모두의 욕망은 동일하다. 기회만 된다면 타인의 피해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가능성을 충분히 통제함과 동시에 투기적 수요까지 잠재울 수 있는 새로운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시장의 파이를 키우는 방향으로 설정하자는 쉴러의 주장은 나같은 초짜 경제학자의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이 책에서 내 눈에 미친 쉴러는 금융과 시장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경제위기는 정부정책으로 극복 가능하다는 케인즈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땅에서 2cm 정도 발을 떼고 떠 있는 숭고한 인격체처럼 보인다. 책에 적힌 그의 주장 중 가슴에 와닿는 것도 많았다. 아니, 거의 대부분의 주장에 동의했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특히 인플레이션에 연동된 물가지수를 개발하여 이를 지속적으로 대중에게 교육시키자는 주장은 꽤 참신했다. 명목가치와 실질가치를 구분짓는 일은 경제학이 세상에 해줄 수 있는 가장 선한 행동 중 하나인 것 같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 불평등의 대가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는 정보의 비대칭(information asymmetry) 문제를 구조화하여 경제모형 안에 도입하고, 독점적 경쟁시장(monopolistic competition)의 형태를 정의하는 한 축인 딕싯-스티글리츠 효용함수를 고안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주류 경제학계에서는 더이상 이룰 것이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다다른 학자다. 미시경제학이든 거시경제학이든, 이론이든 실증분석이든 자신이 속한 학문분야와 상관없이 경제학에 발을 들인 사람이라면 위의 두 경제적 개념을 들어보지 않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의 박사학위 논문주제이자 평생 천착한 연구주제가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을 것 같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다;) 그가 다룬 시장의 비대칭성, 혹은 독점적 경쟁시장 모두 현대 시장경제에 존재하는 불완전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특징들이다. 스티글리츠는 이러한 시장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기업은 이상적인 균형상태보다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하여 추가적인 수입을 확보하고(mark-up revenue), 개별 소비자의 후생은 감소하며, 그 결과 경제적 불평등은 더 심화된다고 주장해왔다.

[불평등의 대가]는 주류 경제학계를 떠남과 동시에 가열차게 주류경제학의 시장중심적, 기업중심적 이론을 비판해온 스티글리츠 사상의 한 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책의 해제를 무려 선대인씨가 썼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이 책의 신뢰도가 확 떨어지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으나,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어내려가다 보면 감히 선대인 따위가 비빌 수 없는 단단하고도 강렬한 그의 사상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다. 최근 읽은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책에서 느꼈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급하게 집어들었지만, 노르베리-호지의 관점과 일부 맥락을 같이 하면서도(세계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등) 전세계적 지역화를 주장하는 노르베리-호지와 달리 기본적인 세계 경제구조의 패턴은 인정하되 그 안에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자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스티글리츠의 시각은 반세계화 주의자들에게 이론적인 배경을 제공해주는 차원을 넘어 경제학의 지평을 넓히는 차원에서 해석되어질 여지가 충분하다. 다만, 미국이라는 단일한 국가에 한정하여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국가별 상이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고(선대인씨처럼 “미국 다음으로 심각한 나라가 한국이다!”라고 주장하면 할 말이 없다), 그가 지속적으로 비판하는 대상인 대기업의 “약탈적” 경제행위의 근간이 되는 이기심, 혹은 ‘애니멀 스피릿’에 대한 구조적 분석이 부재하다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 함께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론 부분에서 그가 제시하는 다양한 정책적 제안들은 현실의 경제구조 안에서 충분히 실현 가능한 것들이다. 본문의 내용 중 인상 깊었던 지대 추구(rent seeking) 행위를 잡아내기 위한 지원금 폐지, 독점금지법 강화, 금융부문 규제강화같은 주장들은 실제로 민주당 정권 시절 신중하게 추구된 전례가 있고, 세계화의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경상수지 적자 해소는 지금 트럼프 행정부가 무역전쟁을 통해(물론 스티글리츠가 원한 방법은 아니었을 것이다)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이 또한 현실에서 정책으로 반영이 된 부분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금융부문의 과도한 위험추구행위를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에 적극 동감하는 편인데, 경제적 호황기에 지나친 신용공급을 추구하지만 불황기에 시작되면 이렇게 과잉공급된 신용을 순식간에 거두어 들여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금융산업의 경기순응성(procyclicality)이 최근 전세계적 경제위기를 발생시킨 주원인 중 하나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금융기관의 경제적 유인을 전환시킬 수 있는 정책적 도구를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신고하는 사회를 바라며

대전-세종 지역에서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발견한 흥미로운 현상이 하나 있다. 좁은 왕복 2차선 도로의 양 변에 불법주차되어 있는 차들때문에 불필요한 교통체증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인데, 이러한 불법주차 문제야 서울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것은 없지만, 서울과의 차이점이라면 세종은 물론이고 대전도 서울에 비하면 주차 여건이 매우 양호한 편이라는 점이고, 서울에 비해 이러한 불법 주정차 행위가 일반 시민들의 습관적인 행위로 거의 고착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감히’ 서울에 비교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시 이야기해야겠지만) 공용주차장이나 대형 주차빌딩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길가에 불법주차를 ‘기어코’ 하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선량해 보이는 시민의 얼굴에서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 가끔 놀랍게 다가온다. 텅텅 빈 주차빌딩 앞을 가득 메운 불법주차 차량을 보면 그로테스크한 기분까지 느낀다. 세종시의 경우 아직 대부분의 빌딩 주차장이 요금을 부과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금전적인 부분이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고, 더 나아가 주차요금을 부과한다고 해도 몇 천원 차이로 불법을 감행할 정도로 이 지역 주민의 소득수준이 서울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굳이 해답을 생각해본다면 첫째, 지하 2,3층 주차장까지 차를 끌고 내려가는 것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 혹은 ‘귀차니즘’이 큰 영향을 발휘했을 가능성이 높고, 둘째, 그 귀차니즘을 현실화시키는 과정에서 불법행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이들을 좁은 도로의 양 변으로 인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경제학적으로, 주차장에 주차를 하지 않는 현상이 개별 경제주체에게 올바른 경제적 유인을 부여하지 않아 발생한 시장실패의 문제라면, ‘이성적인 판단’ 아래 불법주차를 하는 개별 경제주체에게 정확한 처벌을 가하지 않는 정책당국의 게으름으로 인해 교통체증이 발생하고 도로 위 사고발생 위험이 증가하는 공공성 훼손의 문제는 정부실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판단 아래 나는 최근 신고를 하기 시작했다. 먼저 장애인 주차장 불법주차 차량에 대한 신고부터 시작했다. 불법 주정차 신고는 ‘생활불편신고’ 앱에서 가능한데, 휴대폰으로 바로 사진을 찍어 업로드한 뒤 간단한 신고 사유를 덧붙이면 바로 신고가 완료된다. 불법행위를 발견하고 5분 안에 신고가 끝나기 때문에 따로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며, 문자 등을 통해 신고 경과를 알려주기 때문에 피드백 또한 신속하게 이루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참고로 불법 유턴이나 난폭운전, 보복운전 등 운전 상 발생한 불법행위에 대한 신고는 경찰청에서 발행한 ‘스마트 국민제보’ 앱에서 가능한다. 이 앱의 경우 운전 중 휴대폰 촬영을 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차량에 부착된 블랙박스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불법행위 발견 후 귀가하여 녹화된 파일을 일일이 검색하고 편집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동영상으로 확실한 증거를 획득한 경우 사고 위험이 높은 행위에 대해 신고할 수 있기 때문에 비용-편익 분석 측면에서도 충분히 할만한 가치가 있는 셈이다.

나와 같이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신고행위는 장기적으로 사회를 이롭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크게 세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위와 같은 교통법규 위반행위에 대한 신고는 초범의 경우 대부분 계도 수준에서 마무리되며, 실제로 벌금부과까지 가는 사례는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법행위자에게 실질적인 ‘신호’를 보내게 된다.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고, 자신의 불법행위에 대해 어떤 이가 신고를 할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정부당국으로부터 지적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겨주는 것이다. 이 신호는 생각보다 중요한데, 경제주체가 미래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거짓말로 인한 이득이 거짓말을 들켰을 때 감당해야 하는 비용보다 크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이 잘못된 행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잘못된 행동이 실제로 발생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올바른 경제적 유인 제공이고, 다수의 신고는 일정한 수준 이상의 신호를 발생시켜 경제주체에게 ‘규칙을 위반할 경우 발생하는 잠재적 비용’을 높게 상정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온다.

둘째, 신고가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더 굳건히 믿게 된다. 규칙을 어기면 신고를 당할 것이고, 그래서 규칙을 어기면 안된다는 생각이 모두의 머릿속에 강하게 자리잡게 되면, 그 다음에는 서로가 서로를 ‘규칙을 지키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규칙을 어기게 되는 이유는 위에서 설명했듯 규칙을 어길 경우 발생하는 이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건 기본적으로 ‘상대방도 규칙을 어길 것이다’라는 가정을 깔고 시작한다. 즉, 달리 말하면 모두가 규칙을 어기는 가운데 혼자만 규칙을 지키면 오히려 손해를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덩달아 규칙을 어기게 되는 것이다. 신고가 일상화되고 규칙 위반자에 대한 처벌 역시 일상화된다면 규칙을 어기는 사람이 소수로 보일 수 있으며, 이러한 소수의 규칙 위반자에 대한 시선 역시 달라질 수 있다. 변질된 유교사회에서 신고행위는 ‘이웃을 믿지 못하게 한다’는 그릇된 통념으로 비추어질 때가 많다. 하지만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신고를 하지 않는 동네에서는 모두가 불법을 저지르며,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무법천지가 되어버린다. 이웃이 잘못을 저지르는 모습을 뻔히 보면서도 아무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 제대로 된 이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은 적법한 절차를 거쳐 그 행위에 대해 정확하게 지적하는 사람이 더 나은 이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한 공동체가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다면, 둘 중 어떤 행위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공동체를 나아가게 만들까. 상식적으로 너무 명백한 문제인 것 같다.

셋째, 공무원들에게 일을 시키는 효과가 발생한다. 국가가 정한 여러가지 규칙 중 실제로 잘 시행되지 않고 있는 것들을 들여다보면 이에 대한 감시와 처벌이 미흡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불법 주정차를 예로 들면, 하루에도 수백건 씩 발생하는 이러한 규칙위반 행위를 담당 공무원 한두명이 완벽하게 처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담당 공무원 본인의 경제적 혜택과 거의 상관이 없는 일이기도 해서 모럴 헤저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일반화된 신고행위는 공무원들을 강제로 일하게 함으로써 정책당국에게도 일정한 신호를 보낸다는 장점이 있다. 즉, 시장실패 뿐 아니라 정부실패 차원에서도 일정 부분 교정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자발적으로 모든 규칙을 준수하는 시민의식이 완전히 자리잡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강제적으로라도 규칙을 준수하게끔 만드는 여러가지 장치들이 필요하다. 시민의식이나 공동체의식같은 개념은 단기간에 교육이나 훈육을 통해 발전된다기 보다는 장기간 사회적 유전자 속에 주입됨으로써 서서히 습득해나간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나는 우선 내가 사는 동네 주변부터 신고를 통한 효과가 어느정도인지 실험해나가기로 했다. 동네에서 가장 불법행위가 만연하여 불필요한 번잡스러움이 일상화된 한 골목을 타겟으로 정했다. 앞으로 6개월에서 1년동안 지속적으로 그곳에 불법 주정차된 차량에 대해 신고를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몇 명만 더 있다면, 그 효과는 조금 더 커질 수 있을까.

소득주도 성장론이 그렇게 욕 먹을 일인가

요즘 나라가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현 정부의 첫번째 위기가 온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최근 발표된 7월 ‘고용 쇼크’ 자료를 바탕으로 언론과 야당은 집중포화를 퍼붓고 있고, 이로 말미암아 대통령과 청와대에 대한 지지도는 취임 후 최저치를 연일 갱신하고 있다. 북한과의 관계가 개선이 되든 말든, 결국 필부필부의 최대 관심사는 먹고 사는 문제에 집중될 수 밖에 없다. 막연히 추측만 할 수 있었던 사안이 숫자로 뚜렷하게 제시되는 순간 자신의 추정이 객관적으로 증명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고, 이러한 확신은 눈과 귀를 조금 더 닫히게 만들고 주장하는 목소리에는 힘을 실어준다. 사실 숫자가 나온 순간부터 본격적인 검증과 고민이 시작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현 정부의 정책 중 요즘 가장 큰 비판을 받는 부분은 소위 소득주도 성장론이라고 부르는, 대통령 취임 후 주요한 경제정책으로 추진되어온 성장방식이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그 이름도 생소한 방식의 경제 성장론이기 때문에 도입 당시부터 말이 많았고, 많은 경제학자와 정책 전문가들이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명한 정책적 방법론이기도 하다. 현재 이 소득주도 성장론을 기반으로 행해진 주요한 정책으로 크게 세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최저임금의 가파른 인상,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 그리고 재정정책의 확대를 통한 보조금 지급이 그것이다.

이 중 최저임금 인상이 가장 큰 저항에 부딪힌 것처럼 보인다. 비판의 근거는 크게 세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자영업이라는 제3의 영역을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은 정책이라는 비판이다. 최저임금의 직접적인 영향은 대부분 일용 근로자(1개월 미만의 일일 단위 계약 노동자), 혹은 임시 근로자(1개월 이상 1년 미안의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에게 돌아간다. 최저임금이 빠르게 상승하면 이들 일용 근로자, 혹은 임시 근로자를 고용하는 영세한 자영업자의 비용이 상승하여 고용률이 오히려 하락하고 영세 자영업자의 파산 확률을 높일 수 있다. 최저임금에 대한 비판의 두번째 근거는 내부자-외부자 이론 등에 근거한 실업률 상승에 대한 기여도 부분이다. 즉 비판자들은 최저임금의 상승은 기 고용된 근로자의 임금을 증가시켜주는 역할을 하지만, 구직자에 대한 진입장벽을 높여 실업률을 오히려 상승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판의 세번째 근거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현재의 어려운 경제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이라는 주장이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이 1%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수출에 비해 내수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경제상황에서 최저임금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도,소매업 및 숙박, 판매업 등의 경제지표를 세밀히 관찰하지 않고 노동계측의 의견만을 받아들여 인상의 폭을 적절히 조절하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세 비판 모두 일견 타당한 논거를 가지고 있지만, 최저임금만이 최근 고용 쇼크의 유일한 근거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 또한 희박해보인다. 먼저 내수 시장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는 특정 산업 내 존재하는 가격 경직성을 고려해야 한다. 코인 노래방을 생각해보자. 한 곡 당 보통 500원의 요금을 받는다. 임대료가 비싼 곳은 1,000원을 받을 수도 있다. 어쨌든, 한 곡 당 500원을 받는 가게에서 최저임금이 인상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요금을 한 곡 당 1,000원으로 인상할 수는 없다. ‘메뉴 비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게 주인은 근처 노래방 가격은 물론, 코인 노래방과 전혀 상관없는 분야의 가격들이 일반적으로 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가격에 대한 소비자의 저항심리를 최소화시키며 기존 고객을 계속 유치할 수 있다. 최저임금의 부정적 충격을 상쇄할 정도의 가격인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어느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셈이다. 이 가격 상승은 당연히 최저임금 인상의 혜택을 보는 근로소득자의 소비 증가를 필요로 한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해 내수가 살아나고, 살아난 내수를 기반으로 가격이 상승하여 국가 전체적인 소비자물가상승률로 이어지는 선순환구조(이게 소득주도 성장론의 핵심이다)를 확인할 때까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현재는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다음으로, 경기변동 상 국면전환과 최저임금 인상 중 어느 쪽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구분해야 한다. 현재 한국의 경기흐름이 호황기에서 침체기로 전환되고 있다는 신호를 여러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정 대기업의 특정 수출품목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제구조는 그 자체로 큰 리스크를 안고 있는데, 올해 하반기부터 그 특정 품목의 경기조차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소비자물가에서는 올해 들어 지속적으로 수요측면의 상승압력을 발견할 수 없다. 미국과 중국, 유로존 간 통상마찰로 인해 신흥국의 ‘발작(tantrum)’이 발생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와 터키가 무너지고 있는데, 이정도 덩치의 국가들의 화폐가치가 폭락하는 현상은 가벼운 감기 정도로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기준금리 인상기조를 이어가고 있지만 한국은 금리 동조화를 시킬 수 없을 정도로 국내경기가 살아나지 않고 있다. 내외부에서 진퇴양난에 빠져있는 형국이다. 즉, 이미 한국의 경기가 올해 초부터 침체국면으로 접어들었다면, 고용에 영향을 주는 주된 요인은 최저임금이라기 보다는 경기변동 그 자체일 가능성이 있다. 경기가 좋지 않으면 고용이 되지 않는다. 물론 최저임금이 복합적으로 고용에 악영향을 주었다는 추정조차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저임금의 가파른 인상이 마치 영세 자영업자에게 내려진 사형선고 마냥 절대악으로 비춰지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일 가능성이 높다.

최저임금은 소득의 인위적 성장을 통해 성장을 꾀하는 경제정책이라기보다는, 한국사회의 ‘최저 생계 기준’을 상징적으로 설정함으로써 서민의 삶의 질을 최소한으로 보호하려는 사회복지정책에 가까운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즉, 현 정부는 경제와는 별개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는 최소한의 철학을 가지고 있고, 이를 ‘숫자’로 확실하게 보장해주려는 정책적 움직임이 최저임금의 가파른 인상으로 현실화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주 52시간 근무제도 마찬가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최저임금과 주 52시간 근무제는 국가 경제활동이라는 게임의 방향을 결정짓는 결과론적 평등주의 정책이라기 보다는 게임의 규칙을 재설정하는 쪽에 가깝다. 이제 모든 플레이어는 새로운 게임의 규칙 아래에서 ‘이익의 극대화’라는 목표를 다시 찾아나서야 한다. 기업은 근로자의 최저임금과 최대근무시간을 보장해주는 한도 내에서 이익을 최대화시키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컴퓨터를 끄고 근무를 시키거나 최저임금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는 장기적인 이익 극대화를 성취할 수 없다. 당장은 힘들어지겠지만, 장기적으로 더 나은 기술을 발전시키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게 생산성 향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국가 경쟁력 확보의 원천이다.

결국 소득주도 성장론에 기반한 위의 두 정책은 현 정부의 경제정책 중 다른 한 축인 ‘혁신성장론’으로 귀결된다.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던져 주었으니, 그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더 나은 기술을 만들어내자는게 혁신성장론이다. 기업들에게 더 높은 경쟁력을 요구하되, ‘더 높은 경쟁력’은 ‘인건비 절감’이 아닌 ‘생산성 증가’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혁신성장론의 핵심 논리다. 정부는 이를 위해 생산성 향상을 저해하는 각종 규제를 철폐하고 재정정책을 통해 지속적인 기술 및 생태계 혁신을 지원해야 한다. 이제 관건은 과연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국가 경쟁력 확보를 효율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있느냐이다. 만약 한국의 최근 경제상황을 소득주도 성장론과 결부시켜 비판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비판의 초점을 재정정책 쪽에 맞추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소득주도 성장론을 기반으로 한 약 세 개의 주된 정책 중 가장 비효율적으로, 철학 없이 진행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재정정책을 통한 보조금 지급이기 때문이다. 이 보조급 지급은 ‘원 샷’ 정책에 가까워보인다. 당장 취업을 하지 못한 청년 구직자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 중장기적으로 얼마나 많은 부가가치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 0에 가깝다. 그들은 용돈 등 생계비로 이 보조금을 사용할 것이고, 그렇게 세금은 허공으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최저 생계비 수준에 머물고 있는 노인들에게 지급하는 보조금도 마찬가지다. 어르신들 용돈 챙겨드리는 정도일 뿐, 이들이 이 돈을 생산적으로 다른 일에 쓸 확률은 0에 가깝다. 중소기업에 지급하는 고용 보조금도 2년, 혹은 4년 내의 단기적인 고용효과만이 있을 뿐 장기적으로 중소기업이 고용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렇게 낭비되는 세금은 중소기업의 기술 혁신, 혹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존재하는 비합리적인 하청 관계를 청산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스타트업 기업이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지원을 함으로써 젊은 기업가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보다 창의적인 모험에 뛰어들도록 유도해야 한다. 대학이 단기 실적에 얽메이거나 연구비 수주에 목메지 않고 연구실 안에서 고유한 원천기술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충분한 여유를 확보해주어야 한다. 일개 기업이 수출확로를 뚫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국가가 나서서 큰 판에서 해결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확대 재정정책, 혹은 재정적자 정책이다.

결국, 현 정부의 가장 큰 패착은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이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최저임금 인상은 현 정부의 철학을 대표하는 주요한 정책으로 포기하지 말고 추진해야 한다. 단기적으로 최저임금 인상을 감당해내지 못하는 한계 기업이 있다면 이들을 억지로 되살려 ‘좀비 기업’으로 만들지 말고, 재빠르게 청산하고 업종 전환을 할 수 있도록 재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이 합리적이다. 주 52시간 근무제는 근로자가 최소한으로 누려야 하는 인간다움을 보장해주는 제도이기 때문에 이 역시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퇴근 후 극장에 가고 차 한잔을 마실 수 있는 여유 정도는 근로자가 누려야 하는 당연한 삶의 질이다. 오히려 이 제도를 편법적으로 악용하려 하는 일부 기업을 보다 강력하게 단속하여 그 어떤 상황에서도 더이상 일을 시킬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정부는 근로자에게 더 높은 임금을 주고 더 적게 부려 먹어야 해서 울상을 짓는 기업을 도울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많다는 것을 신속하게 깨달아야 한다. 현재 한국의 세수는 역대 최고 수준이다. 이렇게 국고로 흘러 들어오는 세수를 효율적으로 쓰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재정적자를 실현하되,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실시되어야 하지, 이 세금을 고용창출이나 보조금 지급 등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낭비해서는 안된다. 이건 게임의 방향을 정부가 정해버리겠다는 말과 다름 없는 것으로, 오히려 시장에 좋지 않은 신호를 줄 수 있다. 일한 만큼 월급을 주고 받되, 일하는 시간만큼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해보자, 라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책상에 앉는 순간 일에만 집중하되, 정해진 시간 외에는 업무에 대해서는 언급 조차 하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의 노동 생산성은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에 속한다. 전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한다는 한국인의 명성이 무색해지는 지표 중 하나다. 어쩌면 우리가 ‘근면성실함’이라는 자부심에 취해서 현실을 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월급루팡’이 더이상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의 상징이 되는 날이 온다면, 한국의 생산성도 다시 세계적 수준으로 회복될 수 있을 것이고, 경제성장률도 3%대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며, 한국의 경제상황도 빠르게 호황기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가상화폐 거래소 폐쇄 문제

최근 법무부와 금융위에서 가상화폐 거래소를 폐쇄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중이라는 언론보도가 나온 뒤 투자자들을 중심으로 강한 반발여론이 형성되었고, 정치권에서도 4차산업 흐름에 역행하는 정부정책이라는 비판여론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이 해프닝으로 끝날지 더 깊은 수준의 논쟁으로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이번 갈등이 최근 한국을 중심으로 불고 있는 가상화폐 투기 문제가 불러 일으킨 또 하나의 사회적 비용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듯 하다.

우선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등 다양한 형태의 블록체인 기반 암호화폐, 혹은 가상화폐는 ‘화폐’가 아니다. 이 상품에 대한 시장가격의 변화가 극심하여 가치의 저장수단으로 활용이 거의 불가능하고, 공급량이 제한적이므로 물물교환 수단으로서의  활용가치도 극히 제한적이다. 화폐의 가장 본질적인 기능은 노동으로부터 발생하는 잉여생산물, 혹은 우리가 실질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주관적 가치들을 명목적이고 객관적인 가치, 즉 시장가격으로 환산해주는 것이다. 암호화폐는 그 자체의 시장가치의 변화가 너무 극심하므로 다른 가치를 환산해주는 객관성을 내재하기 어렵다. 더 나아가, 이 암호화폐의 가치(일반 화폐로 치면 기준금리)를 적절히 조절해줄 권위적인 화폐 공급자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암호화폐가 화폐가 아니라면 이것이 투자인지 투기인지 구분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투기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암호화폐를 구입함으로써 발생시킬 수 있는 경제적 파생효과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암호화폐를 구입하고 판매하는 행위를 반복할 때 발생하는 경제적 이득은 차익실현 정도만이 있을 뿐, 그 과정에서 투입된 금액으로 경제에 도움이 되는 경제활동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차익실현을 통해 돈을 벌 것이고, 그 돈으로 아마 소비 등 다른 경제활동을 하게 되어 행복감을 추가적으로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암호화폐 거래행위가 투자의 영역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암호화폐에 투입된 금액이 GDP에 잡히는 어떤 생산적 경제활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즉 암호화폐 생산자가 암호화폐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무언가를 하던가, 암호화폐 자체가 무언가 일을 하던가 해야 한다. 하지만 암호화폐는 그 자체로 어떠한 경제행위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암호화폐로 할 수 있는 경제활동이란 것이..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더 나아가, 암호화폐의 가격형성 과정을 지켜보면 시장의 과도한 ‘기대감’이 가격상승을 부추기는, 전형적인 폰지스킴(Ponzi scheme)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심리적 요인에 의해 내재적 가치보다 더 높은 가격이 형성되고 이로 인해 반복적인 차익실현만이 존재할 뿐 어떠한 실질적인 경제효과로 이어지지 못할 때, 이 현상을 투기로 판단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화폐의 역할도 할 수 없고 투기양상을 보이고 있는 시장이라면 정책당국 입장에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판단할 여지가 생긴다. 관건은 이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이고, 정책적 해결책은 정확한 원인분석에 기인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경제불황기에 발생하는 ‘유동성 선호이론(liquidity preference hypothesis)’가 발현된 현상이라고 본다. 유동성 선호이론에 따르면 경기가 불황기에 접어들면 통화당국에서 시중에 돈을 풀기 위해 이자율을 낮추고, 낮아진 이자율로 인해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게 된다. 떨어진 화폐가치로 인해 안전자산에 대한 투자수요가 감소하게 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안전자산이란 은행예금부터 선진국의 우량채권까지를 의미한다. 그러다 경기 불황이 심해지면 소위 ‘안전자산 함정(safety asset trap)’에 빠지게 되는데, 이는 시장에서 우량채권이라고 믿었던 선진국의 채권이 극심한 경기불황으로 인해 비우량채권으로 평가절하되면서 시장에 안전자산의 공급이 급격히 줄어드는 현상을 의미한다. 실제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포르투갈과 같은 서유럽 국가의 채권 등급이 급락하면서 위험자산으로 평가받은 전례가 있다. 투자자의 입장에서는 시중에 풀린 값싼 투자자금을 저장해둘 좋은 안전자산이 씨가 마르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위험자산에 대한 투자비중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유동성 선호이론의 핵심이다. 즉, 통화당국의 정책적 판단에 의해 시중에 공급된 유동성이 위험자산에 대한 투자로 이어져 경제적 불안정성을 증대시키고 변동성을 높인다는 이론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몇년간 이어진 저성장과 저금리기조로 인해 시중에 유동성이 과잉공급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렇게 과잉공급된 유동성은 지금까지 부동산시장으로 흘러들어가 최근 몇년간 수도권을 중심으로 부동산 가격의 폭등을 유발시키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정책당국에서는 LTV와 DTI를 조절하고 신규분양과 재개발 등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등 부동산 시장으로의 유동성 쏠림현상을 막기 위한 다양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부동산 시장의 특징 중 하나는 주식시장과 달리 목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소 몇억원의 종잣돈이 있어야 시장 진입이 가능하다. 막 대학을 졸업한 청년층이나 목돈이 없는 서민층은 애초에 게임 플레이어로 참가할 수 없는 구조다. 하지만 이러한 소규모 자본을 가진 이들 역시 유동성 선호이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노동에 대한 대가인 임금은 갈수록 박해지는 환경에서 수중에 가진 돈도 몇푼 없는 이들이 발견한 시장이 바로 암호화폐 시장이다. 암호화폐는 몇십만원, 혹은 몇백만원으로도 시장진입이 가능하며, 현재까지 세금도 붙지 않고, 계좌 개설 등에 있어서도 그 과정이 매우 간편하다. 별다른 금융지식이 없어도 쉽게 돈을 넣고 불릴 수 있는 낮은 진입장벽의 시장인 셈이다. 암호화폐 시장에 돈을 넣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한 이들을 “개미”라고 칭한다면, 한국의 암호화폐 시장을 굵직하게 움직이는 “기관”은 유산상속 등 거액의 거래를 세금 부과 없이 하려 하는 중산층 이상의 자본가들일 것이다. 암호화폐의 형태로 증여할 경우 손쉽게 탈세가 가능하다. 이들이 움직이는 큰 덩치의 돈이 암호화폐 시장의 평균가격을 움직이고 있을 확률이 높다.

즉, 현재 한국의 암호화폐 시장이 과열된 투기 현상으로 변질된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통화당국의 정책실패때문이지, 소규모 투기자들의 비이성적 판단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정책당국이 암호화폐시장을 “도박판”으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현재 암호화폐 시장의 비정상적 과열현상은 장기간에 걸친 저금리기조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경제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사회적 문제로까지 인식된 암호화폐 시장 과열 문제를 거래소 폐쇄 등의 방법으로 풀고자 한다면 이는 근시안적 미봉책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암호화폐 시장에 쏠린 유동성을 실물가치 생산에 대한 투자가 가능한 주식시장 등으로 돌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초단기매매 등 차익거래에 지나치게 집중한 거래형태에 대한 강력한 세금부과라던지, 거래횟수 제한이라던지, 거래 규모 제한이라던지, 방법은 많다. 이 시장이 탈세 등의 목적을 위해 음성적으로 사용되지 않게 막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블록체인 기반의 암호화폐를 보다 생산적인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전문적인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 투기에서 투자로 전환시킬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이건 시장에서도 함께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출생률이 낮아지는 이유가 여성의 경제활동이 늘어나서일까?

많은 이들이 최근 한국사회가 당면한 출산율 저하 문제의 원인을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 증가에서 찾는다. 선진국의 사례를 바탕으로 한 연구결과가 그렇게 나왔고,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증가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그러한 연구결과가 일관성있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소한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 증가는 두번째 출산을 막는 기제로 작용될 수 있다는 연구결과까지는 나와있다.

우선 한가지 확실한 점은 출생률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변수는 혼인율이라는 것이고, 혼인율은 경제성장률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인구 천명당 출생한 인구 비율을 추정한 조출생률은 1990년 15.2명에서 2016년 7.9명으로 거의 반토막 가까이 떨어졌다. 지속적인 하락추세 속에서 눈에 띄는 지점이 두군데 있는데, 하나는 2000년 13.3명에서 2001년 11.6명으로 급격하게 하락하던 시기이고, 다른 하나는 2006년에서 2007년 잠시 반등하던 지점이다. 19987년 IMF 위기가 발생한 뒤 실직 및 임금하락이 충분이 발생한 시점이 2000년에서 2001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면 출생률의 급격한 하락은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또한,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경기가 반등하는 시점이 반드시 오기 마련이고, 그러한 시기에 일시적으로 출생률이 회복될 수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어쨌든 출생률은 혼인율과 확실한 비례관계를 지닌다. 조출생률이 반토막나는 동안 조혼인율도 1990년 9.3명에서  2016년 5.5명으로 많이 떨어져다. 조이혼율은 1990년 1.1명에서 2016년 2.1명으로 두배 가까이 증가했다. 행복하지 않은 부부가 이혼을 하지 못하는 잠재적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이 아마 자녀양육 문제일 것이다. 이혼의 증가가 출생률에 영향을 미쳤다기 보다는 출생률의 저하로 인해 이혼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고 추정하는 편이 조금 더 나을 것 같다.

출생률 이혼율

한국의 조출생률, 조혼인율, 조인혼율 추이. 자료는 통계청에서 구했고, 단위는 (명)이다.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부터다. 하지만 우리는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과 출생률 간 상관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채 1998년 경제위기를 맞이했다. 이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출생률은 약 1.8명에서 1.4명으로 떨어졌다. 이렇게 경제위기가 한번씩 발생할 때마다 여성이 집으로 돌아갈 확률이 남성보다 높다. 이는 뒤에 다시 이야기하겠다. 아무튼, IMF 위기가 마무리된 2000년 이후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꾸준히 증가해왔고 출생률은 꾸준히 감소해왔다. 남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꾸준히 73~74% 대를 나타내고 있다.

출생률 경제활동참가율

성별 경제활동참가율과 조출생률 추이. 자료는 통계청에서 구했고 단위는 참가율은 (%), 출생률은 (명)이다. 

위의 그래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두가지 중요한 지점이 있다. 첫째,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2000년 48.8%에서 2016년 52.1%로 약 3.3%p 증가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성의 경제활동참가율 73.9%에는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격차가 21.8%p에 달한다. 참고로 월드뱅크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가 닮고 싶어하는 독일의 남녀간 경제활동참가율 격차는 약 11%p, 중국은 15%p, 우리의 우상 미국은 12%p다. OECD 국가 중 우리가 노동부문에서 유일하게 이기고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인 멕시코의 경우 격차가 35%p에 달하며, 우리와 비슷한 경제규모를 가진 칠레의 경우 24%p로 우리와 비슷한 수준이다. 한국의 올드버전 일본은 21%p로 우리와 같다. 둘째, 16년 간 3.3%p의 증가율만을 나타낸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 증가추세가 절반 가까이 떨어진 출생률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라는 주장을 하려면 선진국 수준으로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임계치 이상을 지속적으로 기록하여왔다는 가정이 필요하다. 미국의 경우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55~57% 수준에서 장기간 정체현상을 보여 왔고, 독일의 경우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경우 여성의 참가율이 50% 이상으로 올라온 시기가 4년밖에 되지 않는다. 출생율에 영향을 줄 만큼 충분한 증가율, 혹은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단순히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만을 유의미한 설명변수처럼 이야기하려는 시도보다는, 조금 더 큰 그림, 혹은 조금 더 세밀한 그림을 함께 봐야 한다. 아래 그래프를 보면 월평균가계수지 등락률과 조출생률은 추세적으로 비슷한 하락세를 나타내고 있다. 중간에 큰 경제위기를 겪는 통에 가계수지 곡선이 심한 변동성을 나타내고 있지만, 5년 단위로 끊어 보면 (IMF 위기가 있던 1996~2000년 기간을 제외하면) 1991~95년 기간에 연평균 7.94%, 2001~05년 기간에 연평균 6.5% 증가했던 월평균가계수지가 2006~2010년에는 1.54%, 2011~2016년 기간에는 1.5% 상승하는데 그쳤다. 1980년대부터로 기간을 연장해봐도 이러한 추세는 비슷할 것이다. 장기적으로, 그러니까 약 20년 이상 지속적인 가계수지 등락률의 하락세를 경험한 사회라면 아이를 낳는 것이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추측을 상식 수준에서 받아들이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니까 여성이 더 바빠져서 아이를 적게 낳는 것이 아니라, 가구단위로 더 먹고살기 힘들어지니까 아이를 적게 낳는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 덜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출생률 가계수지

조출생률과 월평균가계수지를 연평균으로 환산한 수치의 추이. 자료는 통계청과 한국은행에서 구했고, 단위는 좌축이 모두 (명)과 (%)를 나타낸다.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 증가를 출생률 저하의 한 원인으로 해석하는 데 따르는 위험은 다음 자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래 그래프는 임금근로자 중 비정규직 비율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눈 것이다. 남성 임금근로자의 경우 2017년 3월 현재 약 26.4% 정도가 비정규직으로 등록되어 있다. 여성의 경우 그 비율은 41.1%에 달한다. 남성의 경우 2007년 3월 비정규직 비율이 32.6%에서 10년동안 약 6.2%p 그 비율이 하락했는데, 여성의 경우 2007년 3월 42.3%에서 단 1.2%p 하락하는데 그쳤다. 여성의 비정규직 비율이 남성보다 약 10%p 이상 높을 뿐 아니라 그 비율이 장기적으로도 하락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경제활동참가율

임금근로자 중 비정규직 비율 추이. 자료는 통계청에서 구했고, 단위는 (%)다. 

가임기 연령이라고 할 수 있는 20~29세, 30~39세 자료만을 따로 추려내었을 경우 조금 더 확실한 모양새를 확인할 수 있다. 20~29세 남성의 비정규직 비율은 여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30~39세 남성의 경우 2017년 3월 현재 15.4%로 같은 연령대의 여성(28.8%)에 비해 상당히 낮은 수준의 비정규직 비율을 나타낸다. 30~39세 여성의 경우에도 지난 10년 간 비정규직 비율이 하락하는 추세에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동년배 남성에 비해 비정규직에 속할 확률이 많이 높은 편이다. 30대 이후 남성의 경우 정규직에 속할 확률이 다른 모든 연령대보다 높고, 같은 연령대의 여성보다도 월등히 높다고 할 수 있다.

경제활동참가율_연령별

임금근로자 중 비정규직 비율 추이. 성별, 연령별로 쪼갰다. 자료는 통계청에서 구했고 단위는 (%)다.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은 근로자보다는 사용자 중심으로 이해하는 편이 빠르다. 즉, 언제든지 근로자가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임금을 받고 옮길 수 있는 자유로운 계약조건을 보장하는 위치라는 의미보다는 사용자가 언제든지 쉽게 해고할 수 있는 불안정한 지위라고 해석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자료에 따르면 2017년 8월 현재 비정규직의 월평균임금은 156.5만원, 정규직은 284.3만원이다. 쉽게 잘릴 수 있으니 경력이 단절되기 쉽고, 경력이 자꾸 단절되다 보니 호봉제가 주류인 한국의 기업문화에서 임금이 정규직을 따라가지 못한다. 비정규직 임금근로자의 가장 큰 어려움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기인한다. 언제 잘릴지 모르니 미래를 함부로 계획할 수 없다. 집을 마련할 수도, 세간살이를 마련할 수도 없는 형편에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한국의 가임기 여성은 동년배 남성에 비해 비정규직에 속할 확률이 월등히 높으며, 더 낮은 임금과 더 불안정한 미래에 직면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출생률이 증가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남성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여성에 대한 경제적 처우를 남성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전까지는 출생률의 제고를 바랄 수 없는 것이다.

여성의 경력이 단절되는 중요한 시점이 임신과 출산이라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여성의 임신과 출산이 경력의 단절로 이어지지 않는 장치만 마련된다면 가임기 여성이 비정규직으로 전환될 확률이 그만큼 줄어들 것이고, 여성의 직업 안정성과 평균임금 역시 급격하게 떨어지는 위험에서도 어느정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을 더 남성 의존적으로 만든다고 해서 출생률이 장기적으로 살아나지는 않는다. 남성이 고학력일수록, 고소득자일수록 여성의 직업안정성에 상관없이 출생률이 제고된다는 연구결과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이러한 현상이 유지될거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가장 중요한 잠재적 노동생산성을 희생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여성이 발휘하는 노동생산성이 남성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는 찾기 힘들다. 현재와 같은 산업구조, 현재와 같은 학력수준에서라면 말이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쓸데없이 야근하는 남성의 비율과 아이의 양육때문에 바삐 일을 하고 칼퇴근해야 하는 여성의 비율을 생각해보면 답이 바로 나올 것이다. 여성을 더 독립적으로 만드는 사회구조가 오히려 출생률을 제고할 수 있다. 결혼은 더이상 필수가 아닌 선택의 문제가 됐다. 싱글맘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 대안가정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 남편이 일을 하지 않아도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남성과 동등한 수준의 노동생산성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질적으로 더 낮은 처우를 감수해야만 하는 현재의 여성 노동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그러니까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출생률은 낮추는 요인이라기 보다는 장기적으로 경제성장률을 높이고 가계소득을 증진시키기 위한 변수로 고려되어야 하고, 그래서 현재 수준보다 더 높게 증가해야 한다. 이와 함께 여성의 정규직 비율도 남성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낮은 출산율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출산율 문제에 대해 이래저래 말들이 많은데, 내가 항상 주장하는 바는 젊은 부부들이 생각이 모자라서 애를 낳지 않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에서 애를 낳으라고 아무리 쪼아도 본인들이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애를 낳을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낳지 않는 것이다. 내집 한 채 마련하기 어려운 형편에 맞벌이는 당연히 해야 하고 아이를 낳으면 ‘이모님’이나 친정 어머니가 돌봐주셔야 하는데 그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아이를 어찌어찌 학교에 들여보낸다고 해도 초등학생이 미적분학을 공부해야 살아남는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거의 미친 짓에 가깝다. 그 과정까지 또 어찌어찌 성공적으로 살아남고 아이를 좋은 대학에 들여보낸다고 해도 졸업 후에는 5천만명이 살지만 2%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는 나라에서 150만원을 받는 1년짜리 인턴으로 취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미래가 뻔히 보이는데 누가 아이를 낳으려고 하겠는가? 아이를 낳지 않으면 맞벌이 부부가 열심히 노력해서 집 한채 얻는 것은 그나마 가시권으로 들어올 수 있다. 모성애, 부성애를 억지로 억누르고 너희끼리 잘 사는게 더 낫지 않겠느냐고 강요하는 사회가 정상적인가?

그리고 우리나라가 애를 낳지 않는 것은 어제오늘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1990년대 초반, 그러니까 거의 한세대 전부터 애를 적게 낳아 왔고 최근 그 경향이 더 두드러진 것도 아니다. IMF 위기 전까지 1.6명대였던 것이 위기 후 1.2~4명대로 떨어진 것이 전부다. 이게 엄청난 변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장기간 ‘유교 탈레반’에 의해 억압되면서 마치 우리나라에서 2~3명씩 순풍순풍 낳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으로 받아들여져 온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사회활동을 하기 시작하면 국가가 정책적으로 출산을 해도 괜찮다는 안전장치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그게 전혀 되지 않았다. 여성의 사회활동은 가시화되는데 정부는 여전히 출산과 육아를 여성에게 일임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낮은 출산율이다. 이게 아이를 낳는 사람들의 탓인지 그들을 둘러싼 전근대적인 사회적 공기와 후퇴적인 정부 정책 탓인지 따져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최근 이 문제가 마치 심각한 사회문제인 것처럼 대두되는 것이 약간 불편할 정도다. 곧 은퇴시기로 접어드는 베이비붐 세대와 그 바로 밑 세대가 자신들의 노후를 떠받들어 줄 연금제도의 부실화가 걱정되어 출산율을 독려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랫 세대가 계속 돈을 벌어야 지급되는 것이 윗 세대의 연금이다. 2008년을 기점을 경제성장률이 7%대에서 2%대로 뚝 떨어지면서 연금 재원의 급속한 고갈은 예상되기 시작했다. 이게 급속한 고령화와 맞물려 ‘혹시 내가 죽기 전에 연금이 떨어지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늙은이들의 온 몸을 휘감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더해, 아이를 낳지 않으면서 역삼각형으로 변해가는 인구구조에서 대부분의 베이비붐 세대가 수도권에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된다. 즉, 이들은 자신들의 자산 가격이 떨어질 것을 두려워해 ‘잠재적 아파트 구매자’를 만들어내라고 닥달하고 있는 것이다. 창의적인 생각 1도 안보태고 그저 시키는대로 묵묵히 노예처럼 일한 대가로 받아든 것이 수도권 아파트 한채가 전부다. 이걸로 어떻게든 죽기전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누군가는 내 아파트를 비싼 값을 치루고 사야 하는데 점점 잠재적 수요층이 줄어드니 어찌 불안하지 않겠는가. 이들은 아파트를 팔아 창조적인 사업을 꾸릴만한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후배 사원 닥달하고 종업원 닥달하고 자식새끼 닥달해서 무언가를 짜내는 것이 이들이 가진 유일한 재능이다. 현재 연금도 그렇게 짜내려고 하고 있다.

낮은 출산율은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결과다. 젊은 부부들은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사회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수준의 신생아를 만들어내어 왔다.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것은 노인들이 생각보다 일찍 죽지 않는 고령화 현상이다. 생각보다 더 오래 살아남게 되니 골칫거리가 된 셈이다. 문제는 이들이 생산활동에 기여하는 바가 현격히 낮다는 점이다. 폐지를 줍는 일을 아직까지 노인들이 하고 있다는 사실은 비극이다. 이들이 적극적으로 생산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데에 모든 역량이 집중되어야 한다. 50세만 되어도 대기업에서 나가야 하는 환경 자체가 비정상이다. 아파트 경비를 남성노인이 독점하는 구조도 이상해보인다. 능력있는 30대 부장이 70대 대리에게 명령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더 낫지 않겠는가. 내 마음속의 꼰대 유교문화만 거세할 수 있다면 고령화 문제의 대부분이 풀릴 수 있다.

“생산인구가 급속히 줄고 있는 것이 문제다”라는 주장은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을 할 수 있는 인구의 비중이 줄어들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 경제 전체가 주저앉게 될(뿐 아니라 일 안하는 노년층을 먹여살릴 방법이 줄어들게 될) 것이라는 가정을 근거로 하고 있다. 불투명한 미래로 인해 출산을 하지 않는 젊은이들은 ‘선택’의 문제이니 어떻게든 애를 낳으라고 닥달해야 하고, 죽지 않는 노인들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니 그저 어쩔 수 없이 공짜 지하철이나 타고 다니며 소일이나 할 수 밖에 없다는 기본 가정 자체가 틀렸다. 먼저 노인들은 실제로 가난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연금 등 노후수단을 확보하지 못하고 충분한 국가 보조금을 받지 못하는 극빈층 노인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비참하다. 죽지 않는 노인들도 일을 계속 할 수 있다. ‘일’이라는 것이 육체노동을 의미하는 시대는 이미 예전에 지났다. ‘노인’의 정의부터 달라져야 한다.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고정관념도 바뀔 때가 왔다. 사회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노인들의 노동력을 활용해야 한다. 오히려 고령사회로 접어드는 경제구조에서 노인들의 노동력은 보다 더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고통분담’은 노인들도 함께 해야 한다. ‘은퇴’라는 개념은 2%대 성장률을 기록하는 나라에서는 사라져야 한다. 고령화한 노년층이 계속 일을 할 수 있다면 생산인구도 줄어들지 않을 것이고 낮은 출산율을 해결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낮은 출산율이 ‘문제’라는 생각을 기어코 바꾸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낮은 출산율은 문제의 원인이라기 보다는 원인의 결과 중 하나일 뿐이다. 낮은 출산율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결과는 너무 많은 가정과 추측이 필요한 상상 속 세상일 뿐이지만, 낮은 출산율을 만든 원인들은 이 사회의 안좋은 모든 것을 농축해 놓은 액기스와도 같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관찰대상이다. 여성에 대한 수십, 수백년간의 비논리적인 탄압을 정당화시키고 나이 그 자체로 사회적 지위를 약탈하려고 하는 유교적 세계관에 의해 탄생한 숫자일 뿐이다. 모성애와 부성애는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지만, 최소한 여성에게 조금 더 높은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허락되었다면 지금보다는 더 많은 아이들이 태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낮은 출산율을 해결하고 싶다면 어느 정당에서 주장했던 바와 같이 해외에서 노동력을 수입해오면 된다. 하지만 지금도 구로나 안산을 슬럼이라 칭하며 노골적인 인종차별 기질을 드러내는 한국인의 습성을 볼 때 이조차 요원한 일이다. 뿌리깊은 유교적 세계관에 ‘단일민족’이라는 허구적 믿음이 더해지니 답이 없다. 문화적으로 열려 있지도 않고 기득권을 포기할 생각도 없다. 우리나라가 먹고 살기 어렵다면 해외로 나가면 되는데 그 잘난 유교적 세계관에 기초한 엄청난 교육열은 토플 만점은 받을 수 있지만 해외에서 영어회화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들만 잔뜩 만들어냈다. 이 뛰어난 젊은 친구들은 먹고 살기는 힘든데 기술로 돈 버는 것은 천하다고 생각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일단 아무 대학이나 가서 등록금 꼴아박고 150만원 받으며 인턴으로 일한다. 아파트를 소유한 부모에 기생해서 30대 중반까지 비정규직으로 전전한다. 친기업 정서가 팽배한 사회에서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처우는 “국격”이라는 단어 하나로 가볍게 정리된다.

결국 유교적 질서에 갇혀 버린 폐쇄적 사회가 그 비용을 지금 톡톡히 치루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사태를 이렇게 심각하게 만든 주범들은 여전히 아파트를 부여잡고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그 책임을 지금 막 사회로 나온 젊은 세대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능력에 걸맞는 직업을 갖지 못하고 그만한 수입도 보장받을 수 없는 이 세대는 아이조차 마음대로 낳을 수 없다. 이미 많이 늦어버린 것 같지만, 그래도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고쳐야 한다. 정신머리부터 고쳐야 한다.

동성애혐오의 경제적 비용

동성애혐오 문제는 전세계적으로도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골치아픈 일이지만, 우리나라에 국한하여 동성애혐오자들의 정신세계를 탐구해보는 일은 나름의 독특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유교 근본주의, 불교 근본주의에 더해 개신교 근본주의까지 더해져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가 상당한 사회적 정당성을 부여받고 있는 실정이고 한발 더 나아가 동성애자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행위 등 실질적인 문제를 야기시키는 위험요인으로 발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내 일이 아니면 절대 나서지 않는다’는 한국인 특유의 국민성과 정책 당국자의 개인적인 ‘입장'(개신교 신자라던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 동성애혐오자에 대한 집단적이고도 강력한 대응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결국 연구자들이 앞장서서 한국식 동성애혐오론이 갖는 논리적 허구성을 적극적으로 논파해나가는 것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주로 심리학이나 사회학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경제학적으로도 접근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동성애혐오로 인한 경제적 비용을 추산하는 작업을 우선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미 캐나다에서 2001년 발간된 정책보고서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The Cost of Homophobia: Literature Review of the Economic Impact of Homophobia on Canada], submitted by Christopher Banks, submitted to Gay and Lesbian Health Service, 2001.)

위의 보고서는 동성애혐오, 혹은 성적소수자 혐오로 인해 성적소수자들이 받는 피해를 경제학적으로 추산한 작업들을 모아놓은 서베이페이퍼다. 방법론은 간단하다. 성적소수자에 대한 혐오로 인해 성적소수자들이 이성애자들과 동등한 의료혜택을 누리지 못할 때 발생하는 비용을 만약 이들이 동등한 의료혜택을 누렸다면 얻게 되었을 효과를 추정함으로써 역산하는 과정을 거친다. 환경경제학이나 보건경제학처럼 어떤 정책, 혹은 집단적 행위의 경제적 효과를 직접적인 통계자료로 추산하기 어려운 경우 주로 취하는 방법이다. 보고서는 성적소수자들이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진 혐오로 인해 “일반적인” 이성애자들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와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고  사회적인 장벽으로 인해 성적소수자에게 필요한 의료행위가 적시에 제공되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 사용한 지표는 자살률, 흡연률, 기대수명, 우울증, 실업률, 범죄율, 에이즈 발생률 등 8가지 항목이다. 보고서는 만약 호모포비아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성적소수자들이 나타내는 위 8가지 지표의 수치와  “일반적” 이성애자들의 수치는 통계적으로 유의한 수준에서 거의 동등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보고서에서 추정한 호모포비아의 연간 경제적 비용은 다음과 같다.

homiphobia costy

예를 들어 자살률의 경우, 2001년 캐나다 기준으로 호모포비아가 발생하는 경제적 비용이 약 8억달러 정도로 추산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즉, 호모포비아가 없었다면 더 적은 성적소수자가 자살했을 것이고, 이들이 만약 살아서 경제활동을 정상적으로 영위했을 경우 발생하는 경제적 순효과가 연간 8억 달러에 이르는 것이다. 이 결과를 두고 “동성애혐오자들이 우리나라 경제를 갉아먹고 있다!”라고 주장해도 사실 그리 크게 잘못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성적소수자의 ‘존재’ 자체만으로 사회에 발생시키는 경제적 비용은 정확히 추산할 수도 없을 뿐더러 아무런 논리적 근거도 없다. 성적소수자가 더 많은 범죄를 저지른다는 통계도 없고, 더 열등한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도 없다. 오히려 동성애결혼 합법화 등이 발생시키는 경제적 순효과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성적소수자들을 ‘양성화’시킬 때 그 사회가 부담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은 일부 종교인의 심리적 ‘불편함’ 정도일 것이다. 이건 거의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무시되어야 한다) 이에 반해 성적소수자들의 경제활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내고 이들에게 동등한 사회적, 의료적 혜택을 부여할 때 돌아오는 경제적 효과는 직관적으로 생각해도 상당한 수준이다. 더 나아가, 성적소수자와 같은 극단적으로 소외받는 계층을 사회적 장치 안으로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환경에서는 대부분의 소수자, 약자가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동성애자에게 사회적 혜택을 적극적으로 베푸는 사회가 빈민층이나 장애인에게 인색할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이다. 즉, 사회복지의 전체적인 ‘bar’ 자체가 한단계 높아지는 효과도 추가적으로 얻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와 비슷한 연구는 찾아볼 수 없다. dbpia나 kiss, kipris 등 국내 논문 검색 사이트에서 동성애 혐오를 경제적 효과와 연결짓는 논문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분명 누군가는 관심을 가지고 있을텐데 아직 발표가 되지 않은 것이라고 믿고 싶다.

최저임금 인상 재원 마련을 위한 부자증세

평균임금상승률보다 월등히 높은 최저임금상승률을 정부 주도하에 인위적으로 실시하는 것은 그 효과를 고려할 때 정책적으로 많은 부담이 따른다. 우선 최저임금을 적용받는 임금노동자를 고용하는 고용주의 수익현황을 참고해야 한다. 사용자가 충분한 이익을 내고 있음에도 근로자에게 최저임금에 상응하는 수준의 임금만을 지불하고 있는지, 혹은 이들 기업의 최적임금이 최저임금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 즉, 지금 이 정책의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 자체가 이 정책이 사실상 한계기업을 다수 유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한다고 정치권이 인정하는 셈이다. 만약 노동비용을 과소하게 지불하는 노동시장이 넓게 존재한다면, 대부분의 기업은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해 큰 손실이 발생할 이유가 없으며, 최저임금을 큰 폭으로 인상하는 것은 지금까지 왜곡되어 왔던 최저임금을 정상화시키는 좋은 정책이 될 수 있다. 만약 영세업자가 근로자에게 최저임금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 혹은 두명이 나누어서 해야 할 일을 한명에게 과도하게 몰아줘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면 영세업자는 최저임금의 직격탄을 맞게 되어 부도위험, 즉 shut-down point 아래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 경우 한계기업이 부도가 나지 않는 수준까지 기업의 수익을 인위적으로 높여주거나 손실을 보전해주어야 한다. 즉 실제 기업의 재정건전성을 shut-down point 이상으로 올리기 위해 정부의 세금이 지원되어야 한다. 현 정부는 이를 위한 재원을 “부자”에 대한 증세를 통해 마련하겠다고 한다. 조세에서 가장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 과세 대상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조세정의, 혹은 조세의 목적이 달성되기에 부적절한 것이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부자에게 세금을 더 떼어서 최저임금의 인상으로 인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영세한’ 자영업자를 도와준다는 것이니 평등을 강조하는 정부의 철학이 이 정책 안에서 대체로 이해가 된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다. 우리나라 자영업자가 마주하게 되는 가장 큰 비용 두가지는 임대비용과 노동비용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노동비용은 지나치게 낮고 임대비용은 지나치게 높다고들 이야기한다. 노동비용이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인구가 지나치게 많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언제든지 쉽게 대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을 받는 비숙련 노동자의 경우 특히 더 그렇다. 건물임대비용이 높은 이유는 좁은 면적에 많은 사람이 살기 때문에 건물이 사람보다 더 귀하기 때문이다. 서울의 경우 땅, 혹은 건물을 보유하는 기회비용이 거의 무한대로 올라간다. 요즘같은 저금리, 저성장 시대에 흑사병 등에 의해 수천만명이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 이상 임대수익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낼 수 있는 투자처를 찾기란 쉽지 않다. 건물의 소유권으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수익은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인해 더 안정적인 투자처로 각광받고 있다.

높은 임대비용과 낮은 노동비용 중 낮은 노동비용이 정부정책에 의해 인위적으로 상승할 수 밖에 없다면 임대비용은 낮아질 것인가? 대체로 그렇지 않다. 정부의 바램대로 최저임금 인상이 경제 전체의 소비 활성화로 이어진다면, 자영업자의 수익도 늘어나서 결국 임대료도 함께 상승하게 될 것이다. 최저임금이 소비촉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래서 경기가 극단적으로 나빠지고  특정 지역의 소비가 급감하는 현상이 장기간 지속된다면 그 지역의 평균 임대료가 낮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과 같은 대도시 시내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임대업자는 공실을 감수하고 임대료의 하방경직성을 견디어낸다. 한두달 건물을 비우더라도 임대료를 낮춰서 신규 세입자를 유치하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한국의 경우 대부분의 기업이 정년을 보장해주지 않고 전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은퇴를 강요당한 중장년층이 새로운 근로소득자로 재취업하지 못하고 자영업으로 내몰리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영업자 비율은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이 바닥의 경쟁은 극심하고, 누군가 망한다면 그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빠르게 치고들어갈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건물주 입장에서 공실을 걱정할 이유도 사실 별로 없다. 임금이 경기변동에 받는 영향보다 임대료가 받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덜할 수 있는 것이 우리나라 대도시가 갖는 특수성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인구의 거의 대부분이 이 대도시와 그 주변에 밀집되어 있다.

그렇다면 결국 거의 모든 경우의 수에서 최저임금 상승의 최종 수혜자는 건물주, 혹은 임대사업자가 된다. 영세업자는 중간에서 정부의 지원을 건물주에게 전달하는 채널로만 기능할 것이고,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저축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높은 월세를 지불하며 생존을 위한 삶을 지속할 것이다. 거주지 임대료 역시 상업지 임대료 상승과 발맞추어 함께 상승할 것이므로. 최저임금의 경우 임금 전체평균보다 빠르게 상승하고는 있지만, 이들의 삶에서 월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중위소득자에 비해 월등히 높다. 즉 300만원 벌어서 50만원을 월세로 지출하는 사람이 느끼는 고통보다 150만원 벌어서 35만원 월세로 지출하는 사람이 받는 고통이 훨씬 클 것이다.

그렇다고 최저임금 인상이 나쁜 정책은 아니다. 최저임금은 분명 더 올라야 한다. 최저임금은 근로소득자가 영위해야 하는 최소한의 삶의 질을 정의하는 가장 적극적인 사회적 합의문이다. 이 사회가 사회적 약자에게 얼마나 많은 배려를 약속하는지 명시하는 징표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사회의 경제적 철학을 나타내는 중심 지표로 해석해도 크게 무리는 없다. 결국 최저임금의 인위적 인상을 버티어내는 건강한 경제구조를 만드는 것이 핵심인데, 이를 위해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부자’의 정의를 조금 더 세분화할 필요가 있으며, ‘최저임금’의 정의도 조금 더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

먼저 ‘부자’보다는 ‘전문 임대소득자’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사실 임대수익률을 인위적으로 낮추는 것이 최저임금을 높이는 것보다 경제적 평등을 위한 더 좋은 수단일 것이다. 임대수익에 대한 과세를 큰 폭으로 인상하여 부동산 시장을 위축시켜 버리는 것도 장기적으로는 결코 나쁜 선택이 아니다. 시중에 신용이 너무 많이 풀려 있고 이것이 부동산시장에 쏠려 있기 때문에 거시적 관점에서 이를 정상화할 필요가 있다. (이쯤에서 깨알 홍보..) 조심해야 할 부분은 임대소득자에게 과세되는 세금이 그대로 임대료에 반영되어 결국 말짱 도루묵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임대료의 상승률을 인위적으로 제어할 필요가 있다. 근원물가상승률, 혹은 최저임금의 상승률의 일정 범위 내에서 임대료 상승률을 묶을 수 있다면 임대사업자에 대한 증세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투기적 임대사업으로 인한 리스크를 막는 목적을 위해서라도 대출 공급을 제한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는 금융기관이 ‘건물주 꿈나무’에 공급하는 신용에 한해 추가적인 자본을 요구하는 방식 등으로 감독이 가능하다. 즉, 건물주가 되고 싶으면 자기 돈으로 하라는 소리다. 중앙은행이 부동산시장을 띄우기 위해 금리를 낮춘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중앙은행의 설립목적에도 맞지 않는다. 투기적 임대사업자에게만 더 강한 LTV, DSR 등을 적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역사적으로 LTV, DTI 등이 강하게 적용될 때마다 부동산 시장은 빠르게 안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문제는 ‘투기적 임대사업자’를 어떻게 식별해내느냐다. 이는 시중은행에 대한 강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금융당국의 의지에 달려 있다. 은행이 보유한 방대한 신용정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정책의 효과가 달라질 수 있다.

최저임금을 지역별, 업종별로 차등화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서울의 임대료는 아산의 임대료보다 비싸다. 이들 지역에 거주하는 자영업자의 상황도 판이하게 다르다. 교촌치킨 금호점 박사장님 고용하는 배달 알바생과 서부지검 근처 김변호사님이 고용하는 알바생은 겹치지 않을 것이다. 그 지역의 부동산시장 및 노동시장의 특성에 맞게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울에서 최저임금을 받으며 생활하는 젊은이가 고시원에 묵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이 천안에 사는 알바생이 지불하는 투룸 가격보다 비쌀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저임금 인상의 혜택이 최저임금 노동자에게 보다 많이 돌아갈 수 있도록 정책을 핀포인트로 운영해야 한다. 이를 위해 최저임금 노동자의 생활패턴과 소비패턴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느끼는 거주비용 부담감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중위소득자의 그것에 비해 더 높다. 장기적으로는 임대주택을 다량 공급하거나 정부 주도로 임대사업을 실시하여 거품을 뺀 가격으로 주거공간을 마련해주는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최저임금에 더해 현물로 교통카드나 식품권을 추가로 공급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한국인이 최소한 섭취해야 하는 쌀과 김치, 우유와 빵 등을 공급하여 식비를 절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들은 단기 계약 노동자들이기 때문에 대출 등을 통해 레버리지를 할 수도 없다. 미래가 없는 이들에게 정부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은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최소한을 짜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최저임금을 받으면서도 저축을 할 수 있을까? 저축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어떻게든 만들어주어야 한다. 하다 못해 최저임금을 받고 있다는 증빙서류를 가져오면 담배를 공짜로 준다던지 하는 식으로  이들의 삶의 질을 조금이라도 높여 주어야 한다. 그게 아니면 해외 취업이라도 알선해 주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