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떠나며

내일 서울을 떠나 세종으로 이사한다. 세종시에 집을 구하기 위해 50채는 족히 넘을 수의 아파트들을 구경했다. 그 과정에서 정말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우야든동 우리 부부는 앞으로 2년동안 세종시의 한 아파트에서 전세살이를 하게 되었다.

주거지를 이전한다는 결정은 우리 부부에게 상당히 큰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미국에서 보낸 6년과 군복무를 위해 강원도에서 보낸 2년여의 시간을 제외하면 한평생을 서울과 그 주변 위성도시에서만 살아온 나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지방생활’에 대한 나름의 두려움이 있었다. 경상남도 출신으로 ‘서울 입성’이 십대시절 꿈이었던 아내 역시 갖은 고생 끝에 서울 한복판에 어렵사리 마련한 신혼집을 홀연히 떠나 직장마저 관둔 채 남편 하나 믿고 연고 하나 없는 도시로 내려간다는 결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임용이 된 후 학교 기숙사에 머물며 첫 학기를 보낼 수 있는 분에 넘치는 행운을 얻었는데, 우리는 이 석달 남짓한 기간을 대전이라는 이 도시가 과연 살만한 곳인지 여기저기 둘러보며 탐색하는 기회로 삼았다. 우리의 결론은 ‘세종으로 가자’였다. 세종이 압도적으로 뛰어난 생활환경을 제공해서는 아니었다. 세종은 현재 막 시작하는 단계의 계획도시이고, 정말 많은 면에서 부족함이 많은 도시다. (심지어 도미노피자도 없다 ->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는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대전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혹은 현재의 ‘좋은 이웃’이라는 관점에서 대전이 세종보다 더 나은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물론 전적으로 우리 부부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렇다는 이야기다. 예컨대, 서울과의 접근성, 우리 부부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젊은 인구 비중, 아이를 낳고 키우기 적당한 환경, 운전이 서툰 아내에게 적합한 도로 환경 등을 고려할 때 세종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존재한 단 하나의 걸림돌은 자가운전으로 30분 정도 걸리는 통근거리였는데, 금요일 퇴근시간 여의도-금호동 구간을 70여분에 걸쳐 운전하고 난 뒤 시큰한 무릎을 안고 귀가하던 나에게 그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매매가 아닌 전세를 택한 이유는 복합적이다. 탐색 초기 우리는 매매만을 고집했다. 당시 세종시의 아파트 매매가격도 서울만큼이나 치솟고 있었기 때문이다. 투자의 관점에서, 서울의 중심지역을 제외하면 전국의 거의 모든 부동산 시장이 당분간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 내다봤는데, 단 하나의 예외지역으로 세종시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행정수도 문제부터 국회 분원 설치까지 호재만이 가득해보였다. 마침 가격대도 우리 부부가 영혼까지 끌어모으면 간신히 도달 가능한 수준이었다. 이미 서울 중심부에 있는 아파트들은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으로 승천한 이후라 세종시의 상대적으로 저렴한 아파트 가격이 우리 부부에게 손을 내미는 마지막 동앗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집을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시장을 깊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미심쩍은 구석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우선 수많은 공인중개사, 혹은 “떳다방”이라고 부르는 곳들을 돌아다니며 부동산 버블이 형성되고 파급되는 경로를 눈으로 확인했다. 아무런 근거없이 ‘프리미엄’을 덕지덕지 붙여 나가며 투기심리를 집단적으로 키워나가는 과정은 충분히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높아져가는 가격구조를 떠받드는 지지기반이 취약해보였다. 아주 약한 충격에도 무너질 수 있다고 느꼈다.

관건은 이 시장에 가해질 수 있는 가능한 ‘충격’의 성격이었다. 나는 이 충격이 외생적일 뿐 아니라 견고한 구조를 가질 것이라 생각했다. 미국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금리 인상 기조는 우리가 막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무역전쟁은 트럼프가 집권하는 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보호무역주의 기조가 강해지면 세계경기가 둔화될 수 밖에 없다.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나라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니다. 한껏 강화된 LTV/DTI 규제가 부동산시장 경기에 미치는 영향은 역사적으로 6개월~1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발생했다. 이제 슬슬 그 여파가 발생할 지점이다. 조금 더 지엽적으로 바라보면, 이미 대전, 공주, 청주 등으로부터 인구를 빨아들인 세종이 추가적인 인프라를 갖추기 전 단기적으로 수도권 인구를 흡수할 수 있을 것 같아보이지 않았다. (어제 밤 늦게 세종청사 부근에서 학교 기숙사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이동해보았는데 정확히 한시간 반이 걸렸다) 이런 저런 환경들을 따지고 보니 부동산 시장에서 유동성을 걷어갈 요인밖에는 보이지 않았고, 그 요인들은 일시적이기 보다는 최소한 몇 년은 지속되는 항구성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부동산 시장 참가자가 내재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닌 외생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즉, 앞으로 2년동안 세종시의 부동산 시장은 상당히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변동성도 큰 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당장 ‘지금’ 아파트를 급하게 구입해야 할 이유를 찾기 힘들어진 것이다. 이에 더해, 해당 지역에 1년 이상 거주하면 주어지는 신혼부부 특별공급의 신청자격을 포기하는 것도 아까웠다. 세종시는 분양가 제한 지역이라 상대적으로 현재 시장가치에 비해 저렴한 수준에 분양매물이 공급된다. 공급매물도 전국 최고 수준이다. 신혼부부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한번쯤은 노려보자는 생각이 그리 허황되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상대적으로 아주 저렴한 세종시의 전세가격은 우리 부부로 하여금 당분간 ‘빚’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아도 되게끔 만들어주었다. 아내에게 세종시에서 가장 살아보고 싶은 동네를 선택해줄 것을 부탁했고, 아내는 장기적인 투자 가능성도 높고 단기적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며 살 수 있는 편안하고 안정적인 동네를 골랐다. 우선 실내 구조가 가장 마음에 들었고, 청과물 가게부터 스타벅스까지 도보로 접근 가능한 거리에 있다는 점도 만족스러웠다. 서울에 비해 각종 편의시설은 당연히 많이 부족하지만, 자가운전을 하지 않으면 생활이 몹시 불편한 ‘지방 도시’라는 본질적 한계를 세종시 역시 가지고 있는바, 아내의 운전솜씨가 조금씩 늘다 보면 움직일 수 있는 영역도 조금씩 확장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새로 지은 아파트라 주차장도 넉넉해보였고 운동시설도 단지내에 있을 뿐 아니라 요가 등 각종 프로그램을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는 커뮤니티 센터도 단지 바로 근처에 있었다. 내가 출근한 이후 일과시간을 친구 하나 없는 도시에서 혼자 보내야 하는 아내에게 그나마 가장 나은 환경을 고르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리 출퇴근이 자유로운 직업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업무가 계속 존재하기 때문에 아내가 혼자 보내야 하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외롭고 쓸쓸하지 않기를 바랐다.

서울에 지나치게 쏠려있는 문화적 불평등 현상은 우리 부부가 극복해 나가야할 과제 중 하나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거대도시 서울이 한국에서 가장 높은 문화적 다양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모순은 지방 중소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뼈아프게 다가오는 부분이다. 좋은 커피숍 뿐 아니라 셰프와 주인장의 개성이 살아있는 작은 음식점들을 찾아다니는 재미는 서울생활의 백미 중 하나였다. 이제 쉑쉑버거를 먹으려면 11,000원과 한시간 반의 비용을 지불하고 고속버스에 몸을 실어야 한다. 이때문인지 아내는 현명하게도 얼마전부터 부쩍 직접 요리하는 시간을 늘려왔다. 맛있는 음식을 예쁘게 차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내를 만난 덕분에 서울을 떠나면서 오히려 더 건강한 요리를 자주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내 삶에 찾아온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

다행히 세종시에는 좋은 도서관이 있고 교보문고와 영풍문고도 있다. 서가에 서서 책을 둘러보는 재미는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더이상 김밥레코즈에서 음반을 뒤적거리는 재미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지만, 유비쿼터스한 세상에 살고 있는 덕분에 어디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음악은 계속 들을 수 있다. 놀랍게도 세종시에도 영화관이 하나 있으며, 블록버스터 영화를 좋아하는 아내를 위한 영화는 거의 대부분 극장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상영관을 확보하고 있는 듯 보인다. 굳이 예술영화를 보고 싶다면 대전 시내에 있는 극장까지 차로 슬슬 나가면 된다. 백화점이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데(우리 부부는 백화점 산책(?)을 좋아한다), 이 역시 11,000원과 한시간 반의 비용을 지불하면 고속터미널역에 위치한 한국 최대 규모의 백화점까지 한번에 갈 수 있으니 나름의 궁색한 대비책이 있는 셈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공연이다. 서울에 머무른 기간동안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공연을 보려고 노력했다. 결혼한 이후에는 그조차 쉽지 않게 되었지만, 어찌 되었든 마음만 먹으면 홍대로 달려가 표를 끊고 공연을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제는 정말 큰 마음을 먹어야 공연 하나를 겨우 볼 수 있을 것 같다.

문화적 다양성을 포기한 대신 우리 부부가 기대하는 것은 조금 더 여유로워지는 생활이다. 이미 임용 이후 우리 부부의 생활은 큰 폭으로 바뀌고 있다. 시간은 더 느리게 흘러간다. 원하기만 하면 새벽 두시까지 나른한 자세로 누워 텔레비전을 볼 수 있다. 물론 현실은 새벽 두시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 일쑤지만.. 아홉시 쯤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고 커피를 내려 마신 뒤 열시가 넘어서야 씻기 시작한다. 그래도 생활이 가능하다니! 물론 이번 학기에는 대전과 서울을 바쁘게 오가느라 길바닥에 버리는 시간과 돈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제는 그런 부스러기 시간조차 아낄 수 있게 됐다. 그 시간과 돈을 모으고 모아 여기저기 놀러가볼 생각이다. 아직 한국에서 가보지 못한 좋은 곳이 많이 있다. 대전이 우리 부부에게 주는 거의 유일한 축복은 전국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접근성이다. 이것을 최대한 활용해볼 생각이다.

서울을 떠나는 대신 서울에서 어쩔 수 없이 유지해야 했던 관계들도 함께 조금 더 멀리 할 수 있다는 점도 기쁘게 받아들인다. 우리는 아마 조금 더 고립되겠지만, 그만큼 조금 더 우리 가족 안에서의 깊은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고 싶다면 마음만 먹으면 되는 직업을 가지게 되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할 뿐이다.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것들과 조금 더 많이 작별할 수 있게 되었음에 감사한다.

2년 뒤, 세종에 대해, 또 서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게 될지 지금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지방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애쓰고 있을 수 있고, 목가적인 지방생활에 취해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혹은, 지금보다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또다시 갖은 고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어떤 가능성이든 열려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부부에게는 앞으로의 2년이 큰 도전이다. 이곳에서 잘 사는 것은 그 어떤 가능성으로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열심히 살고, 많이 배우는 2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조교수, 첫 학기

어제 2018년 봄학기 마지막 수업을 끝냈다. 이제 남은 것은 기말고사와 성적입력 정도인 것 같다. 지난 3월 이 곳으로 이직한 이후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하루 하루가 시트콤이라고 할 정도로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쉴새없이 터지는 가운데 서울과 대전을 오가느라 몸은 점점 피곤으로 찌들어갔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실감했고, 보통의 국가기관과는 많이 다른 조직문화를 바닥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시키는 만큼 일하고 일하는 만큼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을 받으며 (최소한 먹고 사는 문제에 관해서는) 큰 걱정 없이 살았던 과거의 회사생활과 달리 중장기적인 ‘먹거리’를 찾아 ‘영업’을 해야하는 과정이 어색하기도 했다.

‘열심히 일하는 20%가 적당히 게으름 피우며 일하는 80%를 먹여 살리는 구조’는 이 곳에서도 비슷해보였지만, 개별적으로 주어진 연구실이 상징하는 것처럼 철저하게 독립적이고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교수사회에서 그 누구도 나를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더 나아가 나 하나만 믿고 멀쩡히 잘 다니던(사실 그리 잘 다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좋은 회사를 관둔 아내를 경제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절박함이 나를 움직이는 추동력으로 작용했다. 그 누구도 나의 출근과 퇴근시간을 신경쓰지 않았지만, 나를 밤 늦게까지 컴퓨터 앞에서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내가 오빠를 보아온 이래 가장 열심히 사는 것 같아.”라는 아내의 평가에 으쓱해할 틈도 없이 3개월이 지나갔다.

부족함을 절실히 깨닫는 계기가 된 첫학기였다. 앞으로 당분간 게으름 피울 시간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다음 학기 나의 수업을 수강할 학생들에게 질 좋은 강의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방학 기간 내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지식이 일천한 상태에서 그저 ‘말빨’ 정도로 수업시간을 때우는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다. 죄책감을 많이 느꼈다. 강의와 연구를 병행하는 요령도 얼른 터득해야 한다. 교수사회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유일한 방법은 연구활동 뿐이라는 사실을 절감하는 경험을 몇차례 겪었다. 좋은 논문을 쓰지 못하면 순식간에 정체되어 소멸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생각보다 논문에 집중할 시간이 생기지 않아 적지 않게 당황한 학기이기도 했다. 틈틈이 부정기적으로 등장하는 각종 행정업무도 능숙하고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학교에서의 행정처리 과정은 전에 다니던 회사들처럼 체계적이고 신속하지 못하기 때문에 눈치껏 스스로를 잘 지켜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충분히 똑똑한 학생들과 배울 점이 많은 선배교수들, 그리고 헌신적인 교직원이 주변에 있기 때문에 교육이든, 연구든, 행정업무든 나의 부족함이 노력으로 극복될 희망이 존재한다.

어제 저녁에는 같은 단과대학에서 함께 일하는 교수 및 교직원 분들과 종강식을 가졌다.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하는 교수님의 은퇴식을 겸하는 자리였는데, 평생의 일터를 떠나는 분의 고별사와 그 분과 수십년을 함께 일한 동료들의 환송사를 차례로 듣고 있자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 분은 내가 태어나던 해보다 한 해 일찍 이 대학교에 교수로 임용되었다. 약 37년 정도 한 곳에서 직장생활을 한 셈이다. 인품이 훌륭하셨던 덕분인지 많은 전,현직 교수들이 자리를 빛내기 위해 참석했다. 그 분이 고별사에서 남긴 말 중 인상 깊은 구절이 두어개 있었다. 하나는 “공부에만 매몰되지 않기 위해 다른 일을 반드시 하나 이상 해라. 개인적으로 꽃을 가꾸는 일이 마음을 다잡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후배들을 위한 조언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신들과 함께 해서 참 행복하게 일하다 간다”는 동료들에게 바치는 감사의 인사였다.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말이었지만, 그 분이 오랜 시간 걸어간 기나긴 길의 초입에 이제 막 선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끝이 까마득해서 차마 보이지 않는 높은 산을 올려다보는 느낌이었다. 다른 교수님들의 덕담에서 “자식농사를 잘 지은 것”에 대한 찬사가 끊이지 않았던 점이 재미있었는데, 과연 나의 아버지에게 나는 어떤 아들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져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 저녁이기도 했다. 아버지에게 오랜만에 카톡이나 하나 보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괜히 머쓱하기도 했고, 직접 얼굴을 보며 이런 이야기를 드리고 싶은 생각도 함께 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걸어간 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제는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대전에서 약배전 커피 마시기

2월말 대전으로 내려온 이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생각들 중 하나는 ‘좋은 로컬 로스터리 커피숍’을 찾는 일이었다. 정확하게 두달동안 대전의 좋다는 커피숍을 찾아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나이브했던 것 같기도 하다. ‘로컬’에 집착한 나머지 내가 사는 ‘동네’에서 로스팅한 커피를 일상에서 즐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특히 대전이라는 ‘지방’에서 살기로 작정한 이상, ‘서울’에서 문화적으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하고 싶은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의 이러한 시도는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며칠전 블랙워터포트에서 주문한 비로소커피의 약배전 블렌드인 ‘너의 이름’이 오늘 오후 도착했고, 바로 학교 기숙사로 가지고 들어가 서울에서 챙겨온 도구들을 이용해 급하게 한 잔을 내렸다. 푸어 오버로 내린 그 한 잔의 커피는, 대전의 수많은 커피숍에서 마신 그 어떤 커피보다 맛있었다. 깊은 한숨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대체 왜 그렇게 고생(과 돈낭비)을 했지, 라는 자책감과 5월 1일 로스팅했다는 낙인을 보며 신선한 원두를 빠르게 보내준 비로소커피에 대한 고마움이 함께 했다.

톨드어스토리, 곰에스프레소, 비터앤스위트, 싱크커피로스터스, 커피살림팩토리, 커피인터뷰같은 대전의 유명한 로컬 로스터리에서 대표 메뉴라고 내놓는 커피는 대부분 중, 강배전이다. 하지만 내가 방문했을 때에는 원두의 신선함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는지 강배전 커피에서 느낄 수 있는 달콤한 다크초콜렛 풍미나 묵직한 바디가 전혀 느껴지지 않고 그냥 기분 나쁜 쓴 맛과 짠 맛이 가득할 뿐이었다. 목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오일리한 느낌도 전혀 없었다. 어쨌든 연남동의 리이슈 커피를 제외하면 서울의 핫한 커피숍들이 대부분 원두 본연의 과일향 풍미를 극대화시킨 약배전 커피를 주로 내세우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것이 서울에서 지방으로 일방향으로 진행되는 트렌드의 전파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체현상인지, 대전 로컬숍들의 완고함에 기인한 이 지역 특유의 풍토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편, 듁스커피나 프릳츠에서 원두를 제공받는 앤아워페이스나 몇몇커피 등 젊은 감성의 커피숍에서 제공하는 커피는 신맛이 지나치게 강해서 입안이 얼얼할 정도였다. 입안의 감각이 상처받을 정도로 산미를 강조한 커피는 다시 찾고 싶지 않다. 신선하지 않은 원두로 내린 커피가 주는 불쾌한 느낌과 결과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그동안 정말 많은 대전 로컬 커피숍을 다녔고, 로컬숍을 소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때문에 최대한 전향적인 자세에서 커피의 맛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결과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완벽한 실패였다. 그 어떤 커피숍도 나의 취향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좋은 커피’라는 생각조차 갖지 못하게 했다. 대부분의 커피숍에서 커피를 다 마시지 못하고 나올 정도였다. 한 잔의 좋은 커피를 마실 때 받는 수많은 감정적인 위로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절망스럽게도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듁스, 프릳츠, 리브레, 테일러와 같은 유명한 서울의 로스터리숍들이 온라인 유통망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펠트나 비로소 등 내가 사랑하는 공간들도 블랙워터포트 플랫폼을 통해 신선한 원두를 온라인으로 공급하고 있다. 나는 비로소커피의 원두를 오늘 받아들고 구원을 받았다고 느꼈다. 그 정도로 대전에서 좋은 산미를 느끼는 일은 힘들다.

조교수, 한 달

지난 3월 1일자로 임용되었으니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기 시작한지 이제 막 한 달을 채웠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순간에도 내 이름 앞(혹은 뒤)에 붙는 교수라는 수식어가 몹시 어색하여 실실 웃음이 나오고 있지만, 현실은 방금전에도 강의 하나를 막 마치고 나온 엄연한 교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서울에 있는 회사들을 다닐 때에는 떠올리지 않았던 것들을 요즘 많이 생각한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여기까지 왔고, 또 여기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인생에 대한 심오한 고민 따위로서의 생각이 아니라, 그냥 정말 너무 궁금하기 때문에 자꾸 떠오른다. 왜 이렇게 됐지? 왜 여기까지 왔지?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만큼 서울에서의 삶과 이 곳에서의 삶 사이에 흐르는 간극이 무척 크게 느껴지나보다.

대학원생 시절에도 학교 구성원들 사이에서 ‘조교수의 삶’은 희화화의 대상이자 연민의 대상이었다. 대학원생보다 일찍 출근하여 대학원생보다 늦게 퇴근하는 젊은 조교수들의 모습을 보며 ‘참 열심히 일하시는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지, 그들을 강의실이나 연구실에서의 교수가 아닌 일상 속에서 한 가정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으로 바라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작 내가 그들과 비슷한 삶을 잠깐이나마 살아보니, 강의실과 연구실 안과 밖의 균형을 절묘하게 조절해 나가야 하는 생각보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의 숙제를 받아들게 되었다. 연고가 전혀 없는 곳으로 오는 바람에 흡사 외국에 다니 나온 것과 같은 기분을 가끔 느끼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가족과 함께, 밥벌이 수단으로 왔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당장 살 집을 구하는 단기적인 문제부터 새로운 지역사회에 정착하는 조금 더 긴 호흡의 숙제까지 처리해나가느라 지난 한 달여의 시간동안 연구실과 강의실 밖에서 오히려 더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여기에 더해, 학생 신분으로는 자세히 알기 힘든 교원으로서의 다양한 고충과 고난이 조교수라는 특정 직위에 상대적으로 집중되는 현상이 비단 미국만의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최근 이 직업을 새롭게 시작하며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평등하고 독립적인 교원 간 관계는 개별 교원에게 주어지는 책임의 무게를 타인에게 양도할 빈틈도 그만큼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에게 주어진 책임의 양은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신입 직원’에게 주어지는 혜택같은 것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특히 교육 부문에 있어, 실수해도 괜찮아, 신입이니까, 와 같은 너그러움을 학생들에게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당장 오늘을 살아내야 하는 존재들이고, 나는 그들에게 최선의 교육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 뿐이었다. 지금도 내가 잘 모르는데 감히 누구를 가르치나, 라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죄스러움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새벽 늦게까지 강의준비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대학의 전임교원이라는 직업이 주는 다양한 형태의 매력을 음미할 여유는 아직까지 주어지지 않았다. 이 ‘매력’에는 일반적으로 익히 알려진 출퇴근 시간의 자유, 방학이 주는 여유로움, 조직 내에서 절대 복종해야하는 절대적인 ‘갑’의 부재 등이 해당된다. 나도 학교에 임용되기 전 이러한 환상에 빠져 잔뜩 기대를 부풀렸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 사람, 저 모임, 그리고 다시 이 업무에 불려다니는 와중에 매주 새로운 강의노트를 만들고 수업준비를 해야 하는 하루살이와 같은 삶에 허덕이며 지난 한 달을 보냈다. 논문은 아직 한 편도 읽지 못했다. 게으르게 보내기로 마음 먹는다면 한없이 게을러질 수 있는 직업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어렴풋하게 들었지만, 나의 경우 아마도 은퇴하기 전까지 게으르게 살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운명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힘든 한 달이었지만, 즐겁고 행복한 한 달이기도 했다. 이 곳에서, 이 직업으로 앞으로 30년을 더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대한 답은 (당연히) 찾지 못했지만, 최소한 서울에 있는 회사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는 것을 보면 지금 현재의 삶이 조금 더 나아진 것만큼은 확실하다. 강의 실력이 앞으로 조금씩이나마 나아져 학생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줄어들고, 그 와중에 조금씩 시간을 더 잘 활용하게 되어 논문을 계속 써나갈 수 있게 된다면, 그래서 남은 시간을 오롯이 가족에게 할애할 수만 있다면, 그 지점부터 내 삶이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슴프레한 희망을 가져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신임교수 연수 첫날

1박 2일 일정으로 신임교수 연수를 받기 위해 지방에 내려와 있다. 아내와 떨어져 혼자 잠자리에 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불편하고 울적한 일인데, 연수 첫날 일정이 일곱시가 채 되기 전 끝나버리는 바람에 이곳에서 굳이 1박을 할 필요가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어 더 우울해졌다. 오늘밤을 보낼 곳은 옛 관광지 근처에 자리잡은 관광호텔이어서 그런지 욕실이 무척 크다. 목욕에 모든 것을 양보한 듯한 객실 구조가 지역적 특색을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쇠락한 온천 관광지여서 과거의 영광을 초라하게 간직한 유흥가와 온천에 더이상 관심없는 젊은이들을 위한 카페거리가 어지럽게 뒤섞인 호텔 주변을 내일 아침 시간이 닿는대로 둘러볼 생각이다.

나와 함께 이번 학기에 새로 임용되신 분은 모두 열두명 정도인데, 공대쪽 분들은 나보다 훨씬 더 너디한 것 같아 역시 아직 나는 갈 길이 멀구나 싶었고, 의대쪽에서 오신 분들은 일반적인 교수와는 많은 면에서 차이를 보여 흥미로웠다. 대부분 나처럼 사회성이 현저히 떨어지지만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똘망똘망해진 눈망울을 내비치며 거침없이 의견을 쏟아내는 모습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조금 더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직장을 옮긴 것 같아 반가운 마음이 컸다. 바쁜 연수 와중에도 쉬는 시간마다 어디론가 열심히 전화를 돌리며 네트워킹에 열중하는 남다른 부류도 물론 있었다.

오늘 아마도 이 학교에 있는 보직자 중 높은 분들은 거의 다 본 것 같다. 보직자들의 모습만 보면 이 곳도 한국에 있는 회사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교육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며 돈을 벌고 연구 업적을 쌓아 자리를 보전받는 것까지는 기본, 여느 회사와 마찬가지로 위계가 높은 사람에게 신임을 얻고 아래로부터는 덕망을 쌓아 더 높은 곳으로 차근차근 올라가고자 하는 사회생활하는 사람이 갖는 기본적인 욕망과, 그래서 우리가 ‘정치’라고 부르는 오묘한 관계의 기술을 갈고닦고자 하는 근면한 삶의 자세를 학교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나의 멘토 교수님은 연구업적도 훌륭하시고 보직도 너끈하게 소화하시는 멀티플레이어 유형이신 것 같다. 그 분의 연구실을 물려받아 사용하게 될 것 같은데, 나는 과연 어느쪽으로 가닥을 잡아 나가게 될지 궁금하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당시 내가 회사생활에 이렇게 잘 적응(?)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막상 학교로 돌아온다고 해서 반드시 연구에 몰두할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물론 지금은 연구비를 어떻게 타낼지에 대해서만 집중하고 있다.

총장님의 인사말씀을 듣다가 문득 [보이후드] 생각이 났다. 영화에서 주인공의 어머니는 각고의 노력 끝에 교수로 일하게 되는데, 집을 수리하러 온 막노동꾼에게 “너는 재능이 있으니 공부를 해보라”고 조언한다. 몇년 뒤, 고급 레스토랑에서 매니저로 일하게 된 그 막노동꾼을 다시 만나게 되고, 매니저가 된 그는 “당신이 내 인생을 바꾸었어요”라고 말하며 그날 식사비를 대신 내겠다고 말한다. 그 장면이 왠지 나에게 하나의 중요한 레슨을 주는 것만 같았다. 이제 인생에서 별다른 반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반평생을 교수로 살아가게 될텐데, 죽기 전까지 [보이후드]에서처럼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만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기회를 딱 한번이라도 얻고 싶다. 교수가 되기 전까지는 인정을 받고 명성을 쌓고 싶은 욕심이 컸다. 그런데 막상 교수가 되어 어떻게 커리어를 꾸려갈지 고민하기 시작하자 단 한명이라도 좋으니 누군가의 인생을 더 나은 길로 이끌고 싶다는 욕심이 스물스물 기어나오는 것을 느낀다. 이런걸 보면 아직 나 자신에 대한 연구도 너무 부족해보인다.

건이로부터 배우는 것들

지난 주말에는 조카 건이를 만나러 갔다. 그가 사는 집에는 하나뿐인 누나도 있고 늘 인자한 자형도 있고 건이의 사랑스러운 여동생 은호도 있지만, 나는 그 집에 갈 때마다 “건이를 보러 간다”라고 이야기한다. 실제 마음가짐도 그러하다. 35년을 형제로 살아온 누나에 대한 애틋함이 조카 건이를 생각할 때의 뭉클함보다 크지 않다고 느낄 때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만큼 나는 건이를 조금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나의 가장 큰 스승 중 한명이기 때문이다. 건이는 그의 삶 자체로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처음에는 그의 여리고 부드러운 마음씨가 세상을 받아들이기에 지나치게 연약하다고 생각해 걱정을 많이 했다. 우는 모습을 참 많이 본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섬세한 마음이 가진 아름다운 색깔이 본격적으로 발현되기 시작했다.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여동생에게 하루종일 시달리면서도 우애라는 것을 천천히 배워나가고 있다. 장난감 하나를 동생에게 빼앗기면 다른 하나를 더 내어준다. 거절당하고 무시당하면서도 꿋꿋하게 동네 놀이터에서 처음 만난 형아들의 뒷꽁무니를 줄기차게 쫓아다니는 용기도 가지게 되었다. 동년배의 친구에게 예쁘다고, 아름답다고 칭찬할 줄 아는 여유로운 마음, 지구본에 비친 별자리 하나하나에게 애칭을 지어주고 그것을 까먹지 않고 기억하려는 열린 마음은 최근에야 발견한 그의 놀라운 부분이다.

그저 평범해보이는 위와 같은 행동들을 목격할 때마다 나는 감동과 충격을 받는다. 왜냐하면, 나와 같은 어른들은, 아니 최소한 나는, 건이처럼 마음먹고 건이처럼 행동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를 빼앗겼을 때 다른 하나마저 내어줄 수 있는가, 용기를 내어 마음을 건넨 상대에게 매몰차게 거절당했을 때, 전과 같이 순수하게 마음을 열고 다가갈 수 있는가, 질투와 시기심을 완전히 거둔채 상대방의 아름다운 면을 발견하고 칭찬할 수 있는가, 아주 미미한 존재에게도 애정을 나누어 주고 개별적인 존재로서 존중해줄 수 있는가. 나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가. 혹은 그렇게 살아 왔는가. 부끄럽지만 자신있게 그렇다, 라고 대답할 수 없다. 나는 건이보다 훨씬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건이가 존경스럽고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그가 세상을 껴안는 방법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쩌면 오래전에 나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주 오랜시간동안 완전히 잊고 있었을 수도 있는 소중한 가치들을 건이를 통해 다시 발견한다. 2년 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건이의 입학식에 꼭 참석하고 싶다. 세상을 향해 본격적으로 달려나가는 시작점에서 그의 앞날을 축복해주고 싶다. 작년 세상을 떠난 하나뿐인 삼촌은 나의 국민학교 입학식에 와주었고, 나는 둘이 함께 나온 입학식 사진을 아직 가지고 있다. 당시 삼촌이 어떤 생각으로 대구에서 서울까지 먼 길을 달려와주었는지 이제 더이상 알 길이 없지만, 나의 조카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점점 다가오자 나 역시 나의 삼촌처럼 간절한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건이의 인생에서 중요한 한 순간을 직접 지켜보고 싶은 마음, 그래서 조카의 머릿속에 기억되고 싶은 그런 마음. 건이덕분에 더이상 만날 수 없는 삼촌의 마음 속을 아주 조금 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대전 첫인상

지난 월요일에는 아내와 함께 당일치기로 대전에 다녀왔다. 임용절차를 마무리짓기 위한 서류 묶음을 제출하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아직 대전을 한 번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아내에게 학교와 그 주변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마침 내가 속하게 될 학과의 학과장님도 내게 대전 내려올 일 있으면 한번 보자는 연락을 주시기도 해서 겸사겸사 내려간김에 인사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서울과 대전 사이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체험(?)해보기 위해 차를 끌고 갔다. 강북지역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한남대교부터 만남의 광장까지의 구간은 단 한번도 시원하게 뚫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서울은 절대적인 크기도 매우 큰 도시지만, 면적에 비해 너무 많은 사람이 살다보니 더 거대하게 느껴지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버겁게 느껴진다. 서울을 빠져나가는데 걸리는 시간을 세금이라고 한다면 그 값이 결코 작지 않은 셈이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진입하는 것도, 그 도시를 빠져 나가는 것도 쉽지 않다. 비단 고속도로 위에서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곧게 뻗어있는 경부고속도로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지 않는 도로 중 하나인데, 차를 타고 달리는 재미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도로 주변에 어지럽게 들어선 건물들에서 서울로 향하는 욕망의 탑을 읽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한남대교에서 양재IC를 지나다보면 발견할 수 있는 반포자이아파트는 그러한 욕망을 가장 명확하게 상징하는 건물이다. 한국에서 아마도 공기가 가장 나쁜 곳에 들어선 이 아파트 단지의 평당 매매가격은 나라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서울을 벗어날수록 한적해지는 풍경은(그리고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낮아지는 평당 매매가격은) 그래서 다행스러우면서도 처연하게 느껴진다.

고속도로를 따라 하염없이 내려다가 보니 대전이 생각보다 멀게 느껴졌다. 옆에 앉은 아내의 근심이 본격적으로 느껴진 것도 이 즈음부터였다. 우리 부부의 느릿한 생활 리듬에 견주어볼때 서울과 대전 간 거리는 결코 당일 생활권이 될 수 없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길바닥에서 하루 네시간여의 시간을 고스란히 낭비하면서 사는 것은 우리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주거지를 이동하는 것이 유일한 답처럼 느껴졌다. 어디로 어떻게 옮기느냐의 문제로 넘어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난 월요일 날씨가 매우 추웠기 때문에 우리가 대전에서 받은 첫인상도 당연히 ‘춥다’는 것이다. 창원이나 부산처럼 서울보다 완연하게 따뜻하다고 느끼는 지역이 있는데, 대전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서울만큼 추웠다. 아마 여름에도 서울만큼 덥고 습할 것이다. 문제는 춥고 더운 날씨를 얼마나 피할 수 있느냐일 것인데, 싱가폴은  서울보다 훨씬 덥고 훨씬 습하지만 에어컨이 나오는 실내로만 살살 피해다니면 더위도 크게 느낄 수 없다는 아내의 설명에 ‘싱가폴에서도 살 수 있겠다’라는 희망을 품었던 적이 있다. 불행히도 대전은 더위와 추위를 잘 피해다닐 수 있을 정도로 대중교통이 발달한 도시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지하철 노선은 단 하나뿐인데 그마저도 많은 구설수를 낳은 엉뚱한 정차역들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유성온천역(충남대, 목원대)에서 충남대와 목원대는 걸어서 갈 수 없는 거리에 있고, 월평역(KAIST)에서 카이스트는 보이지도 않는다. 갤러리아 백화점이 있는 둔산동 신시가지에는 아예 지하철역이 다니지 않는다. 그렇다고 버스 노선이 서울처럼 활발하게 발달해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주위에서 듣기로는 많은 이들이 자가용 자동차를 이용해 이동한다고 한다. 나중에 도시를 조금 더 살펴본 뒤에야 자가용이 더 잘 어울리는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일하게 될 대학교는 넓고 광활했다. 서울에 있는 사립대학교들이 좁은 부지 위에 높은 층수의 건물들을 옹기종기 배치한 것에 비해 이 대학교는 넓은 부지 위에 낮고 넓은 건물들을 띄엄띄엄 배치한 점이 인상깊었다. 규모가 큰 국립대여서 그런지 기숙사 건물도 여러채가 있었고 학교 안으로 다니는 버스도 보았는데, 이러한 점에서 콜로라도 대학교의 풍경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어서 약간 반갑기도 했다. 앞으로 속할 단과대에서 학과장님과 학과의 다른 교수님 한분을 만나 뵈었다. 그 분들은 나보다 내 아내에게 더 큰 인상을 받으신 것처럼 보였다. 아내가 대화를 주도했기 때문에 내가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대전의 부동산 시장 현황과 그곳에서의 교수로서의 생활 등 여러가지 귀한 조언을 받고 나왔다.

앞으로 우리가 살 곳을 둘러보기 위해 미리 인터넷으로 찾아본 주거지역을 차를 끌고 휘휘 둘러보았다. 우리 모두 둔산동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 이미 잘 갖추어진 주거환경과 널찍하고 곧게 뻗은 도로사정이 아직 운전이 서툰 아내가 자동차를 이용해 돌아다니기에 나쁘지 않은 곳처럼 느껴졌다. 1990년대 지어진 아파트의 노후화와 그에 따른 투자가치 하락 정도가 마음에 걸렸다. 도안신도시와 노은동은 새로 조성된 주거지역이어서 둔산동에 비하면 조금 횡한 느낌이 들었지만 삶의 질, 생활 편의성만 따진다면 깔끔하고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려는 경향이 있는 아내에게는 대충 둘러본 이번 방문이 불충분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 세종시로 향했다. 세종시는 태어나서 처음 가보았는데, 그야말로 국가의 욕망, 투기꾼의 욕망, 그리고 그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타기해보려는 서민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얽혀있는 공간이었다. 아이를 키우기에는 더할나위없이 좋아보이는 환경이었지만, ‘한국에서 아기를 키우는 부모’가 원래 정상적인 곳이었다면 당연히 누렸어야 할 다양한 조건들을 모두 포기한다는 전제조건에서만 가능한 환경같아보이기도 했다.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약간 더 많이 포기하고 부모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기를 강요하는 도시처럼 보였다. 그래서 출산율이 그렇게 높은건지도 모르겠지만. 예쁘게 만들어진 도서관에서 오후 시간을 보내다 오면 좋겠다는 대책없는 낭만적인 생각도 해보았다.

어찌보면 대전과 그 주변은 미국 대도시의 다운타운과 그 주변 교외거주지역을 아우르는 구조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대전은 대전역 주변에 걸쳐 형성된 역사 깊은 구도심과 정부청사를 주변으로 형성된 신도심으로 중심부를 나눌 수 있는데, 구도심과 신도심, 그리고 유성구로 대표되는 신주거지역과 대덕연구단지가 갑천과 유등천이라는 작은 천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지역을 아우르는 대전시는 세개의 고속도로로 둘러싸여 있다. 신도심 가까이에는 90년대 지어진 아파트들이 밀집한 둔산동이 있는데, 이 곳의 이미지는 분당이나 과천과 흡사하다. 대덕연구단지와 정부청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형성한 군락답게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이들을 포함한 대전의 ‘상류층’ 상당수가 새롭게 조성된 노은지구와 도안지구로 이주했는데, 이곳의 모습은 수도권의 위례지구, 혹은 판교와 닮아있다. 세종은 대전에서 차로 20여분 떨어져 있는 독립적인 도시인데, 아직 자급자족 능력을 완전히 갖춘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직 계획의 절반도 채 개발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앞으로 국가 및 기업의 막강한 자금이 계속 투입될 것이라는 점에서 투자가치는 상당해보였다. 대전 신시가지와 비슷한 모양새를 한 도시는 아내의 고향이기도 한 창원이다. 널찍하고 곧게 뻗은 도로와 그 사이에 위치한 성냥갑같은 아파트들, 감히 주민의 미래 소비수준을 정확히 맞추어보겠다는 공무원의 터무니없는 자신감이 충분히 예상된 실패의 모습으로 스며들어가 있는 부족한 주차장과 복잡하게 난립한 상가건물들이 차곡차곡 쌓여져 있는 모습이 많이 닮아있다.

결국 우리 부부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에 살 것이냐와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인데, 우선 어디에 살지에 대해서는 이번 대전 방문으로 후보지를 두세곳 정도로 추릴 수 있었다. 아직 세종시를 완전히 포기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세종시가 대전 주변에서 거의 유일한 투자가치를 지닌 곳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노무현이 꿈꾸었던 그 도시에서 잠시라도 살아보고 싶은 욕심도 있고, 부동산을 투자수단으로 삼아 어떻게든 돈을 모아보겠다는 욕망도 완전히 포기하지 못했다. 어쨌든 후보지 중 어디를 가더라도 서울과 비교해 절반 정도의 가격에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부동산가격에는 사람들의 집단적인 욕망이 투영되기 마련이다. 특히 수도권 주요지역을 중심으로 단순히 수요와 공급의 논리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가격결정구조가 존재한다. 요즘 부동산시장의 화두는 양극화라고 한다. 서울로만 강남으로만 은마아파트로만 돈이 몰린다. 강남의 중심부로부터 시작되는 돈의 욕망이 주변부로 조금씩 퍼져나가 전염시키는 와중에 그 욕망의 크기가 희미해지기도 하는데, 그러한 돈의 중독성 강한 냄새는 동탄 즈음에 이르러 거의 소멸된다. 그래서 대전에는 그런 불로소득의 욕망이 서울처럼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 살고 있는 성동구 금호동 집은 1년 전에 비해 1억원이 훨씬 넘게 올랐다. 대전에서 요즘 가장 핫한 곳이라는 도안동의 비슷한 연식의 아파트는 그 절반도 오르지 않았다. 둔산동은 거의 제자리 걸음이다. 돈의 욕망에서 해방되면 차라리 살기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집으로 부자될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면, 서울의 중심부에서 아둥바둥 버티고 있는 사람들의 불어나는 자산과 얌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나의 것을 비교하지 않을 용기만 있다면, 우리 가족이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대전에 있을 것만 같다.

또하나 걱정인 점은 우리가 ‘문화’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서울의 무형의 인프라스트럭처다. 홍대와 성수, 이태원과 서촌, 신사동과 압구정 부근에 ‘고유명사’처럼 조성된 상권이 과연 대전에도 있을 것인가. (나는 궁동 대학가에서 ‘홍대떡볶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가게를 보았다. 홍대에서 떡볶이를 사 먹은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서울과 애매하게 가까운 나머지 인구에 비해 상권이 역설적으로 발달하지 못한 대전 지역에서 과연 프릳츠나 테일러처럼 나름의 브랜드파워를 지키며 살아남아 있는 커피숍체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서울과 지방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선택의 다양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에서는 요즘 유행하는 산미 강한 커피가 싫다면 리이슈에서 전통적인 스타일의 캐러맬화가 많이 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진다. 롯데백화점이 싫으면 현대백화점이나 신세계백화점을 가면 되고, 이 바버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와 비슷한 수준의 다른 바버샵을 찾아가면 된다. 우래옥과 을밀대 중 좋아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자유는 그것을 일상 속에서 누려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큰 부러움의 대상일 것이다. 그 다양한 선택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그 다음에 고민할 문제다. 대전에 과연 이러한 선택지가 존재할지는 그곳에 살아봐야만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곳에는 그곳의 문화가 있을 것이고, 그 지역에서만 소비되는 문화가 있을 것이다. 지역 커뮤니티 안으로 들어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호흡할 때에만 진실되게 느낄 수 있는 공기가 있다. 서울은 덩치가 너무나 큰 나머지 그러한 공동체 문화가 거의 완벽하게 소멸되어버린 케이스다. 대전은 어떨까. 궁금하다. 그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차곡차곡 해나가고 있다.

블로그 정보 수정

블로그 유저이름과 도메인이름을 수정했다. 이제 더이상 내 영어이름으로 구성된 블로그 주소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내 영어이름을 통해 이 블로그에 들어오던 분들은 당황하셨을 수 있다. 하지만 유입이 가능한 연관검색어 또한 익히 알고 계실거라 생각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기작성된 댓글에 표시된 이름은 수정이 되지 않는다 ㅠ)

약 25년 전 한 여행사 직원의 실수로 인해 탄생하게 된 나의 영어이름은 그 자체로 너무 특이해서 쉽게 검색에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블로그를 만들고 글을 쓸 경우, 회사의 직원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사내기밀을 블로그를 통해 유출하지 않는 한 크게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관리가 불가능한 수준의 불특정 다수에게 이름이 노출된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조금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아내의 의견이었다. 교수라는 직업의 특성 상 어쩔 수 없이 많은 검색을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어쩌다 블로그나 SNS를 접하게 된다면 의도치 않은 사생활 공개를 감수해야 할 확률이 높다. 나뿐만 아니라 내 인스타 계정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 아내의 계정까지 털릴 수 있었기에, 인스타그램도 비공개 계정으로 전환했다.

가끔 아버지의 이름을 검색해보곤 했다.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던 아버지는 당신에 대한 근거없는 비판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해명하려 하지 않았다. 대중을 상대로 책을 거의 쓰지 않았고 대부분 비슷한 수준의 전문가를 대상으로 글을 써왔기에 인터넷에 퍼진 아버지에 대한 평가와 학계에서 받는 평가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나이에는 그런 글을 보면 화가 나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의 저서를 한권 한권 이해할 수 있게 되자 근거없는 비판에 대해 굳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던 아버지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교수는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돈을 받으며 한다는 큰 이점을 챙기는 대신 그렇게 획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더 나은 교육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사회적 책무도 가지고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글에 대한 근거 없는 오해와 비판이 발생한다면 그 과정에서 잘못된 것은 무엇인지 설득시켜야 할 의무도 일정부분 있는 셈이다. 어쨌든, 학문적 내용이 아닌 사생활과 관련하여 논란을 만드는 것은 교수가 가장 먼저 피해야 할 부분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한 곳

볼더에서의 마지막 1년은 무척 단조로웠다. 입학 시절부터 함께 했던 친구들은 먼저 볼더를 떠났고 새로운 친구를 만들기에는 마음이 너무 어지러웠다. 수업을 맡지 않고 학과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타인과 대화할 기회 역시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도서관이나 집에서 논문을 마무리하는 일에만 집중했지만, 조여오는 시간의 압박 속에서 글이 제대로 나올리 없었고 볼더를 떠난 지도교수님은 연락이 잘 닿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번씩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안식처는 학과 건물 근처에 있는 작은 커피숍이었다.

이니스프리 북스토어(Innisfree Bookstore). 가게 이름만큼이나 아늑하고 조용했던 그곳은 어지러운 내 마음을 조용하게 다독여주는 공간이었다. 안개가 자욱한 어두운 호수 한가운데에서 허우적거리는 나에게 잠시 쉬어갈 여유를 제공해주는 작은 섬. 그곳의 주인은 내가 막연하게 그려왔던 전형적인 시인(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예이츠)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성공한 비지니스맨의 얼굴을 한 중년의 남자였다. 내가 가게에 들릴 때 그는 거의 항상 가게에 있었는데, 단 한번도 커피를 직접 내리거나 계산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저 가게 안을 가득 채운 시집들 사이에서 손님을 응대하며 여러가지를 묻고 답할 뿐이었다. 나에게도 몇번 말을 걸어주었다. 매일 같은 시간 가게에 들려 같은 메뉴(핫초콜렛)를 시키는 동양인 남자를 기억하지 않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날은 내가 입구에 들어가서 인사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 바로 핫초콜렛을 내어준 적도 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일하던 직원 한명은 나를 “핫초콜렛 보이”로 불렀다.

그곳을 떠날 때 가게 이름이 적힌 텀블러를 꼭 하나 사오고 싶었다. 그 가게를 기억하며 매일 커피를 담아 출근하고 싶었다. 그런데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 한국에서의 생활이 1년, 2년 길어질수록 다시 볼더로 돌아갈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일주일에 다섯번 아침 아홉시에 출근하고 소주와 맥주를 섞은 맛없는 술을 마시면서도 웃으며 이야기해야 하는 삶이 반복될수록 볼더에서의 마지막 1년이 꿈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그랬던가, 싶어서 쓴웃음이 나왔다.

결국 참지 못하고 금감원을 박차고 나올때 많은 이들의 걱정을 전해들었다. 많은 이들이 높은 연봉과 안정된 생활을 왜 굳이 포기해야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했고, 아마도 나를 어리석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국회를 나올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가 부럽다”라는 말 속에서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냐는 부드러운 힐난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신의 직장”이라고 불리우는 두 곳에서 사표를 내고 제발로 걸어나왔다. 한국에 사는 많은 이들이 금감원에 들어가고 싶어하고 행정사무관이 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곳을 평생 직장으로 생각한다. 그만한 보상이 있어서일 것이다. 금전적이든 사회적 지위든 권력이든 그 무엇이든간에. 당시 나는 그 보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답게 사는 것. 내가 나다울 수 있는 것. 이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태어날때부터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모에게, 학교에서, 사회에서, 친구들에게, 책에서, 텔레비전에서 조금씩 인자를 받아 개인이 가지고 태어난 특유한 성정과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필연과 우연이 묘하게 결합되어 만들어진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결정체이다. 나는 단 한번도 내가 공부를 잘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공부를 일생의 업으로 삼기에 충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스무살 이후 내 삶은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질책의 연속이었다. 내가 정말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까, 내가 정말 논문을 쓸 수 있을까, 내가 정말 이 일로 돈을 벌어 먹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의심과 두려움 속에서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왔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단 한번도 남들보다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 남들보다 월등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고 자부하지도 못한다. 그저 누군가의 뒷꽁무니를 붙잡고 안간힘을 쓰며 살아남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렇게 괴로워하며 가까스로 학문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왔다.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렇게 살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매일 똑같은 커피숍에 들러 똑같은 메뉴를 주문하듯,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토록 되고 싶었던 ‘나다움’이 무엇이었을까. 어려운 공식 하나를 완전히 이해할 때 느껴지는 쾌감때문이었을까, 인류의 역사를 일군 지성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에서 황홀함을 느꼈기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그저 공부를 하는 순간만큼은 내가 살아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고, 그 펄떡이는 맥박과도 같은 확신이 서울의 더러운 공기 안에서도 나를 숨쉬게 만들었다. 그게 내가 발견한 ‘나다움’이었다. 그걸 막는 장애물을 만났을 때 숨이 막히는 듯한 절박함을 느꼈다. 공부를 더이상 하지 못하는 환경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그렇게 한국에서 제일 좋다는 직장 두개를 때려치우고 나왔다. 어쩌면 두번의 좋은 기회가 내 삶에 찾아왔고, 그것을 그냥 포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렵게 학위를 받은 나에게 안정적인 삶이라는 보상이 두 번이나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어제 한 학교로부터 최종합격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서울이 아닌 곳에 위치한 건실한 국립대인데 당장 올 3월부터 내려가 강의를 해야한다. 소식을 받은 어제는 매우 당황스러웠고 얼떨떨했다. 가족들이 오히려 흥분했는데, 정작 나는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어 별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아내와 나란히 앉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하는 말만 반복했다. 뛰어난 논문을 쓴 것도, 화려한 커리어를 가진 것도, 견실한 강의경력을 보여준 것도 없었다. 길고 힘든 길을 시작하는 마당에 경험이나 쌓아보자는 생각에서 지원한 학교였다. 교수로서의 삶이 이렇게 빨리 올지, 이런 방식으로 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교수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은 거의 매일 해왔다. 하지만 정작 교수가 된다고 생각하니 그 어떤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교수라는 직업을 갖기 위해 학문을 한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지만, 학문을 하는 와중에 교수라는 직업이 주어지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 큰 영광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 학교 근처에도 이니스프리 북스토어같은 커피숍이 있을까? 매일 머리를 쥐어뜯으며 어려운 논문을 읽고 하루에 하나의 문장이라도 제대로 쓰기 위해 애쓰는 와중에 잠시 들려 따뜻한 커피를(이젠 커피다!) 마실 수 있는 그런 곳이, 그 학교에도 있을까? 내가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다독여줄 수 있는 그런 곳이 있을까? 지금 이미 그런 곳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아내라는 든든한 커피숍이 내 옆에 있다. 그래서 이 길고 긴 여정이 더이상 외롭거나 힘들지 않다. 낯선 곳으로 또다시 이주해야 하는 현실도 두렵지 않다. 더이상 혼자가 아님에 감사한다. 그리고 아직 나의 여정이 끝나지 않았음에 감사한다. 여전히 공부를 못하고 머리도 좋지 못한 나이지만, 다시 한번 공부의 끈을 놓지 않고 이어나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 내가 나다울 수 있는 기회를 ,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음에 감사한다. 이렇게 또 열심히 살아보겠다.

결혼, 우리.

결혼한지 이제 막 1년이 지나 아직 경험이 일천하긴 하지만, 지난 1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1년이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던 부분에서 더 많은 행복이 찾아왔다. 그래서인지 결혼생활에 대해 묻는 주변 지인들에게 내가 경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주기만 해도 ‘결혼 전도사’처럼 비추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결혼은 철저히 개인의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하며, 그 누구에게도 결혼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결혼이라는 생활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잠재적 갈등 유발 요인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힐 수 있는 ‘합’이 맞는 사람과 결혼했기 때문에 결혼생활을 “행복하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지, 보편적인 결혼생활의 진리, 혹은 규칙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 아이 두명을 아파트 아래로 던져 살해하고 본인도 스스로 생명을 끊은 한 젊은 어머니에 관한 뉴스를 읽었다. 세 명의 생명을 포기할 정도로 절망적인 결혼생활도 있을 수 있다.

지난 1년 간 결혼생활을 행복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아 보자면, 먼저 ‘나’를 버리고 ‘우리’를 추구한 삶의 근원적인 변화를 들고 싶다. 지독한 개인주의자이자 가끔 이기적일 때도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보다 더 우선시되는 가치에 헌신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많은 이들이 퇴근 후 한잔의 술, 휴일 낮 한번의 게임, 월급의 일부분을 할애하면 살 수 있는 예쁜 옷 등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나의 경우, 결혼 이후 존재하기 시작한 가정이라는 가치가 그 모든 개인적인 욕망보다 상위에 존재할 수 있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친구를 만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 충실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멀어지게 된다. 무언가를 포기함으로써 얻게 되는 가치는 기회비용의 크기에 따라 후회나 아쉬움과 같은 감정적인 비용을 지불해야 할 때가 많다. 그래서 포기와 희생은 어렵고 힘들다. 그런데 가정에의 헌신, 혹은 ‘내’가 아닌 나와 아내로 구성된 ‘우리’라는 또다른 자아로부터 시작되는 주체적인 판단은 그 어떠한 희생이나 포기도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자아이며, 나를 버림으로써 새롭게 얻게 되는 놀라운 기회의 출발점이다. 가정 안에서 내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면 나를 지키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도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며, 나의 개인적인 욕심과 가정에 대한 의무 사이에서 갈등할 이유도 없다. 이러한 삶의 변화가 무척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직장에서의 나, 사회적 관계 안에서의 나, 부모나 형제와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나는 존재할지언정, 그 모든 나를 떠받드는 근원이자 본체인 가정에서의 나는 철저히 ‘우리’로부터 출발한다. 이 ‘서열’이 한번 정해지면 생활 속에서 개인적인 욕심과 가정에 대한 의무 사이에서 고민을 할 이유가 현격하게 줄어든다. 모든 것을 아내에게 이야기하고 아내와 함께 결정하면 될 일이다. 단순히 서로의 속내를 적당히 ‘공유’하는 사이가 아니라 ‘공동체’로서 함께 모든 것을 함께 결정하고 실천하는 관계로 부부를 정의하기 시작하면서 삶이 훨씬 편해지고 밝아졌다. 아내의 밝고 건강한 기운을 왜곡없이, 오롯이 전부 다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으며 나 역시 전과 다르게 세상을 보기 시작했고, 아내를 닮아가면서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다. 나의 절반은 아내로 채워질 것이고, 아내의 절반도 나로 채워질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우리’가 조금씩 완성되어 갈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결혼은 ‘우리’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다.

부모와 함께 지내는 시기부터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유학생활까지 삶이 늘 ‘혼자’였다고 느끼며 살아온 내게 아내를 만나 완전히 다른 자아로 새출발을 한다는 것은 전에 없는 삶의 큰 변화였다. 그래서 지금도 적응 중이고, 아직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있다. 한없이 부족하고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기에 이 거대한 변화를 단기간에 완벽하게 체화시키는 일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러하기 때문에 노력이 중요하고 또 중요하다.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진득하게 아내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나와는 너무나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고 많이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이기에 닮아가는 과정에도 많은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조금씩 더 가까워지고 닮아가는 과정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하다. 재미있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