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없는 삶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이다. 전날 밤 우리는 각각 따로 잠자리에 들었다. 제출기한이 코 앞으로 다가온 연구계획서를 마무리하느라 나는 새벽 늦은 시간까지 책상 앞에 붙들려 있어야 했고, 아내는 그런 나를 기다리다 소파에서 잠들어버렸고 이후 침대로 옮겨졌다. 나는 새벽 세시 쯤 늦은 잠을 청했지만 세시간 쯤 뒤 강제로 깨어나야 했다. 아내의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눈물을 곧잘 흘리는 그녀지만 그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무척 슬픈 꿈을 꾼 모양이었다.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채 통곡하는 그녀를 겨우 진정시킨 뒤, 어떤 꿈을 꾸었는지 물었다. 그녀가 잠시 살았던 지난 밤의 꿈에서 나는 이미 죽은 뒤였다고 한다. 고향 친구의 집을 방문하여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이미 죽은 남편’ 생각이 났고,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는 것이 아내가 기억하는 꿈의 내용이었다. 다만 그 아픔의 크기가 너무 커서 실제로 울기 시작했고, 잠에서 깨어난 뒤 자신을 달래는 남편의 얼굴을 보고 잠시 어리둥절했으며, 약간의 적응시간을 거친 뒤 다시 살아난(!) 남편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서야 울음을 그쳤다는 사실이 그녀가 수도 없이 꾸었을 다른 슬픈 꿈과의 극적인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내를 그토록 슬프게 만든 것은 ‘남편이 없는 삶’이었다. 우리는 가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른 편인데, 나는 내 자신의 죽음을 꽤 쉽게 가정하는 반면(“오늘 출근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지, 뭐.”), 아내는 우리 둘 중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하는 편이다(“말이 씨가 된다. 함부로 그렇게 말하지 마라!”). 진지하게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정 반대다. 나는 죽는 것이 두렵고, 죽음 이후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두렵다. 현재의 삶을 충실히 잘 살아낸다고 해도 그에 따른 보상(‘천국’과 같은)이 없다면 지금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과연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아내는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개념을 생각보다 잘 받아들였다. 어린 시절 불교신자였다가 싱가폴 체류 시절에는 개신교 신자가 되었고, 남편을 만난 뒤 천주교로 개종하는 등 화려한 종교적 편력을 가진 그녀였지만, 의외로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은 약한 편이다. 그래서 현재에 집중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지금 당장의 삶을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이 그녀에게는 꽤나 중요한 소명이다. 그런 그녀에게 ‘남편과의 사별’은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가장 좋은 친구이자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는 동반자, 머릿속과 마음속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또다른 나. 그런 존재를 상실하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나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죽음만이 서로를 갈라놓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천주교식 결혼을 한 우리는, 그 문장 안에 스스로를 가둔채 살아가고 있다. 천주교에서는 법적인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대충 짐작해보면 신의 이름으로 허락한 결혼을 인간들끼리 합의하에 무를 수는 없다는 논리같다. 실제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친한 형은 이혼 후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몇년 후 ‘복권’되기는 했지만, 교회법상 형은 그 몇년동안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던 셈이다. 이러한 천주교의 논리가 아내의 눈에는 꽤 신선하게 비추어졌는지, “죽기 전에는 나랑 헤어질 수 없어”라는 말을 꽤 자주 한다. 하지만 그 말의 이면에는 “둘 중 누군가가 죽으면 영원히 혼자가 된다”는 두려움이 깔려있기도 하다. 아내보다 내가 먼저 죽는 것도 두렵고, 나를 두고 아내가 먼저 떠나버리는 것도 두렵다. 나는 아내를 마음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무한히 사랑하지만, 아내와의 동반자살을 택한 프랑스 철학자 앙드레 고르(André Gorz)처럼 아내가 없는 삶을 완전히 포기할 만큼 강단이 있지는 못하다. 아내가 나보다 먼저 죽는다면, 나는 아마 자연이 삶을 허락할 때까지 계속 삶을 이어갈 것이다. 그 혼자된 삶을 상상하면 가슴이 먹먹해져서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을 정도다. 아내를 두고 먼저 떠나는 마음은 또 얼마나 비참하고 죄스러울까. 아빠의 가장 친한 친구 교수님이 돌아가실 때, 아빠와 다른 친구 교수님께 당신의 아내인 여사님을 부탁하며 “아내가 술을 좋아하니 가끔 술을 함께 마셔달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이후 우리 집에서 그분들이 다 함께 모이는 일이 있었는데, 아빠와 다른 친구 교수님이 그렇게 열심히 술을 마시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평소에 술을 잘 드시지 못하는 분들인데, 그날만큼은 미망인이 되신 여사님 앞에서 술잔을 꺾지도 않았다.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답고 슬퍼보였다.

오늘 아내는 하루종일 내 옆에 꼭 붙어 있었다. 잠시 함께 외출을 할 때에는 이미 퉁퉁 부은 두 눈때문인지 유난히 화장에 공을 들이기도 했다. 평소에도 내 옆에 꼭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그 꼭 붙어 있던 오늘의 그녀 모습은 전과는 조금 달라보였다. 전과 같이 맹렬하게 나를 사랑하고 있지만, 꿈 속에서나마 내가 없는 삶을 조금 느껴보았기 때문일까. 전과는 다른 애틋함과 절실함이 조금 더 깊게 느껴진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그릇, 채움, 소비

생존을 유지하는 차원을 넘어서 개인의 효용을 증대시키기 위한 소비행위는 인간을 인간답게 존재케 하는 주요한 특징 중 하나다. 나 역시 소비를 무척 좋아하는 인간으로서 나름의 소비 규칙을 가지고 있다. 거창하게 말하면 ‘플랫폼 소비는 최소화하고 컨텐츠 소비에 집중하자’인데, 간단하게 말하면 한 때의 호기심에 의한 장비류 구매는 최대한 자제하는 것이다. 구매를 극도로 경계하는 제품군이 몇 있는데,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오디오, 시계, 고가의류, 자전거, 등산, 캠핑, 자동차튜닝, 덩치 큰 주방기기(에어프라이나 착즙기같은)…

이것들은 그 자체로 구매자의 효용을 증대시킨다기 보다는, 이걸 이용해서 무언가를 꾸준히 해야 효용이 발생하는 제품들이다. 예를 들어 좋은 오디오는 음악을 계속 들어야 귀가 맑아지는 효과를 느끼고, 자전거도 계속 라이딩을 해야 하고, 착즙기로 매일 쥬스를 갈아 마셔야 행복해진다. 다시 말하면 구매자의 선호도가 변하는 순간 쓸모 없어지는, 고가의 쓰레기로 변질될 확률이 높다. 이런 것들이 소위 ‘플랫폼’에 해당한다. 나의 선호도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나 자신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므로, 불확실성을 굳이 떠안으며 돈을 쓸 이유가 적은 셈이다. 최근 약간의 예외가 있었는데, 아내를 위해 구입한 전자피아노와 나를 위해 구입한 수영복이 그것이다. 피아노는 아내가 즐기지 않으면 값비싼 건조대가 될 위험이 있긴 한데, 다행히 아직까지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 어릴 적 배운 경험을 살려내는 맛이 쏠쏠한가보다. 나는 올해 생존을 위해 수영을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으므로, 아직까지 지치지 않고 열심히 수영을 배우고 있다.

이에 반해, 지출에 있어 거리낌이 없는 몇 제품군이 있다.

책, 영화, 음반(요즘엔 음반을 사지 않고 월정액 스트리밍 상품을 구입한다), 해외스포츠 시청권(MLB, NFL, NBA..), 유니클로 계절 옷, 커피원두, 카페에서의 커피…

대부분 ‘컨텐츠’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확고하게 자리잡은 나의 취향(영화, 음악, 스포츠, 커피 등)을 지속적으로 구입해주는 것은 그릇에 물을 채우는 것과 비슷하다. 나에게 플랫폼은 컨텐츠의 발전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도구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음악을 듣는 과정에서 내 귀가 극도로 민감하게 발달해버렸다면, 그래서 음표 하나 하나, 악기 하나 하나를 분쇄해서 들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티볼리 오디오 시스템은 나에게 역부족일 수 있고, 오디오 시스템의 교체를 고려해볼만 하다. 더이상 책을 꽂을 공간이 없을 때 책장을 사는 것이고, 수영을 마스터하여 수영장에서 더이상 배울 것이 없다면 골프나 다른 운동으로 넘어가기 위해 골프채를 보러 상점으로 나가볼 수 있는 것이다. 섣부른 흥미와 호기심에 의해 장비부터 구입하고 셋업에 집중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지칠 수 있다. 그릇 안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고, 더이상 그릇이 감당하지 못할 때 쯤 그릇을 바꾸는 방식의 소비패턴이 내 삶에 서서히 자리잡고 있다. 결혼 후 돈 모으는 일에 관심이 생기다보니 더 빠르게 자리잡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아내에게 맥북프로를 사달라고 조르고 있는데 잘 먹히지 않고 있다. 그래서 어제 밤 늦게까지 외부연구비 프로포절을 작성했다. 효율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반드시 노트북 구매가 필요합니다! 라고 역설하며.. 아내와 연구재단 중 누가 더 까탈스러운 구매자인지 시험해볼 좋은 기회다.

1월 결산

  • 1월 1일은 남해에서 시작했다. 이동에너지 만땅에 여행에너지는 측정 불가능 수준인 아내의 영향권 아래 산다는 것은, 언제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충만함을 의미한다. 당일 새벽 세시에 출발하여 어두운 고속도로를 긴장감 넘치게 달린 끝에 늦지 않게 남해 해안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퍽 괜찮은 일출을 보면서 소원을 하나 빌었다. 이 가족의 개체수가 증가하게 해달라는. 기복신앙 참 좋아하는 이 나라에 살다보면 소원을 빌 수 있는 기회를 상당히 많이 접하게 되는데 그 때마다 내가 비는 소원은 항상 같다. 아기를 갖는 것에 대한 간절함은 꽤 오래된 것 같다. 부디 지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1월에도 우리는 임신에 실패했다.
  • 남해에서 이틀 정도 머물렀는데, 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생각의 계절’ 민박집 신세를 졌다. 이 블로그와도 얕은 인연을 가진 집이다. 이 곳에 썼던 음악 이야기를 발견한 웹진의 편집장님이 연락을 주셨고, 여자저차한 끝에 그 매체에 블러드 오렌지에 대한 글을 한 편 실을 수 있었다. 아마추어로 남고 싶은 마음에 그 매체와의 인연은 거기에서 끝났고, 당시 편집장님은 “저희 부부는 이제 남해로 가서 민박집합니다~”라는 인사말을 남기시고 홀연히 사라지셨다. 이후 지금까지 그 민박집에 언제 한번 가보나, 마음속으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아내 덕분에 비로소 그 곳에 가게 된 것이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조용했고, 마을은 참 예뻤다. 딱히 아는 척을 하지는 못했는데, 낯가림이 심한 인트로벗의 전형적인 특징이기도 하고, 과거는 과거의 좋은 추억으로 남겨두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 남해에 다녀온 후 베트남 출장까지 논문에 매진했다. 지난 학기는 정말 너무 힘들었는데, 나를 힘들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지 못하게 만드는 각종 행정업무들이었다. 정작 연구와 교육이 가장 중요한 임무인 직업을 가지게 되었는데 역설적으로 그 둘 외의 것들에 신경을 더 많이 써야 하는 구조가 답답했다. 방학만을 기다렸고,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무조건 논문 한 편 쓴다는 다짐 하에 맹렬히 써내려갔다. 한국 경제에 대한 이야기라 한국어로 썼고, 모교에서 운영하는 학술지에 투고했다. 아직 소식이 오지 않았다.
  • 베트남 출장은 이 학교로 온 후 겪은 많은 이상한(weird) 경험 중 거의 탑을 달리지 않을까 싶다. 글로벌 현장학습이라는 이름으로 몇 달 전부터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어쩌구 예산을 확인하고 저쩌구 하며 고생했는데, 내가 이 여행에 동참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학부생 스무명 정도를 데리고 하노이와 하롱 베이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무능하고 무식한 나 때문에 우리과 행정조교 선생님과 그녀의 친구 여행사 직원분이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나는 무식하고 무능한 덕분에 여행사에서 준비한 가이드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3박 4일동안 ‘나는 대체 왜 여기 있는가’를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한가지 얻고 온 것이 있는데, 베트남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남아 국가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이 나라들에 대해 별다른 생각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베트남은 이유 없이 호감을 갖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말도 안될 정도로 혼란스러운 교통문화와 그보다 조금 나은 수준인 질서의식, 서울은 비교도 안될 정도로 혼탁한 하노이의 대기오염 등 내가 싫어하는 모든 요소를 다 가지고 있음에도 싫어할 수가 없었다. 신기한 나라였다.
  • 정신없는 학기와 극적으로 대비되는 방학의 삶은 늦잠과 느린 아침식사로 시작하여 커피와 산책으로 이어졌다. 아내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삶에 늘 감사하고 있다. 이번 겨울은 그리 추운 편이 아니어서 추위를 싫어하는 아내도 그럭저럭 무난하게 보낼 수 있었다. 우리는 항상 늦게 일어났으며, 게으르게 아침식사를 준비해서 천천히 먹었다. 커피는 거의 대부분 직접 내려 마셨으며, 이틀에 한번 꼴로 저녁마다 동네 한바퀴를 돌았다. 아내는 요가와 그림 등 본인이 하고 싶었던 것에 조금 더 매진했으며, 나는 논문 하나를 끝낸 뒤 잠시 풀어져 게으르게 보냈다.
  • 그 와중에 짧은 직장생활 경력에 한줄기 오점(?)을 남기는 이벤트도 있었다. 지연도, 학연도, 그럴듯한 동앗줄도 없이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처럼 묵묵히 시키는 일 열심히 하기’가 거의 유일한 생존방법일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았다. 이런 삶의 가장 큰 부작용이라면 결코 가지고 싶지 않은 ‘명성’이 하나 생긴다는 것인데, 바로 ‘저 친구에겐 어떤 일이든 시켜도 잘 해낼거야’라는 부정확한 집단적 맹신이 그것이다. 이 학교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지 초짜 조교수에게 모든 행정업무가 쏟아져 들어왔고, 이를 더이상 참을 수 없던 나는 공식 회의 자리에서 큰 목소리로(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계속 커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를 줄이면 왠지 지는 것 같아서 그럴 수 없었다) 이에 대해 항의했고, 뒷담화를 즐기는 교수사회의 특성을 고려할 때 아마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찍히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약간의 현자타임이 온 것은 사실이다. 지난 두 번의 이직 경험과 이번 일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다른 직장인들에 비해 ‘분노의 임계치’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사실이다. 분노의 임계치를 통과하면 보통 술을 마시면서 잊는다던가 꾹 참고 다시 웃으며 출근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삶을 이어나가는데, 나는 바로 이직을 준비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고, 이번에는 제발 전의 사례와는 다르기만을 바랄 뿐이다.
  • 2019년 1월은 세종시대 이후 서울을 한번도 방문하지 않은 첫 달로 기억될 것이다.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올라가지 않았다는 것은 상당히 유의미하지 않은가.. 스스로 대견해하고 있다(사실 세미나 참석차 올라가려고 했는데 교수회의에 발목 잡혀서 올라가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세종의 조용한 분위기가 퍽 마음에 든다. ‘문화’가 전무하다는 점은 여전히 치명적으로 다가오지만, 세종시에도 이제 꽤 좋은 커피숍이 몇 들어왔고, 음식은 대부분 집에서 해먹게 되었으니 조금 더 건강해질 뿐 아니라 외식을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세종의 불 꺼진 공실 상가들에 큰 불만은 없다. ‘동네’라고 할만한 정체성이 없다는 점이 제일 뼈아픈데, 아파트만이 존재하는 환경은 필연적으로 삭막한 이웃관계를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사실 이 점은 서울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은 부분이어서 이조차 불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tell me what you live for

교수라는 직업이 기대했던 것보다 매력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두 학기가 채 끝나지 전에 알아버렸다. 하지만 싫증을 느끼고 이직을 알아보던 전과 다르게 나는 이 직업에 계속 머무르려고 한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오늘 상당히 중요한 이유 하나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국립대는 서울에 있는 명문 사립대와 달리 조기교육 및 사교육의 수혜를 듬뿍 받아 예쁜 수능 점수와 아름다운 학생부 기록을 완성한 학생들만이 오는 곳은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비효율성의 고통 속에서도 어떤 공무원들이 조금씩 쌓아올린 다양한 입시전형을 통해 꽤 다양한 배경을 지닌 학생들이 국립대로 진학한다. 그 중에는 집이 가난해서, 부모가 도움을 충분히 주지 못해 서울로 올라가지 못한 이들도 있고,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학업이 더이상 유지되지 못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들 중 정말 똑똑하고 영특한데 공부에 대한 열정까지 뛰어난 학생을 발견할 때에는 말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을 느낀다. 눈물도 나고,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어떤 감정인데, 공무원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는 몇 안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며칠 전 막내 교수로서는 쉽지 않은 시도를 하나 했다. 조금 용기를 내어 의견 하나를 개진했다. 학과에서 책정된 아주 작은 규모의 장학금이 있는데, 면담을 하던 중 사정을 알게 된 한 학생을 추천했다. 오늘 그 학생에게 장학금 혜택이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그 학생 말고도 형편이 어려운 수많은 학생들이 존재한다. 그들 모두를 충분히 도울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에 좌절도 많이 하게 된다. 내 월급을 쪼개서 누군가를 도와준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학생과의 상담 과정에서 어려운 상황을 캐채해내지 못했다면, 그 학생은 아마도 이 적은 금액의 장학금에 대한 존재 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 정도의 행동에 대해 딱 그 정도의 뿌듯함을 느꼈다.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이 공부를 마음껏 했으면 좋겠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국립대 교직원이라면 교육서비스에 대한 관점을 조금 달리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값비싼 사적 재화가 아닌, 누구나 접근 가능한 공공재에 가까운 성격을 지니는 것이 국립대에서의 교육서비스가 되어야 한다. 국립대 도서관에는 지역 시민까지 누구나 들어갈 수 있어야 하고, 국립대 강의는 영상으로 녹화되어 인터넷에 무료로 배포되어야 한다. 교육 기회의 불평등은 계층 간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역사적으로 아주 명확하게 규명되어 있다. 한국의 국립대는 그러한 불평등을 완화시킬 수 있는 몇 안되는 수단 중 하나다. 

그 학생은 아주 명석한 학생이다. 공부도 잘하고 교우관계도 좋고 성격도 좋다. 그 친구가 부디 마음껏 공부했으면 좋겠다. 그런 학생을 가르친다는 것은 선생 입장에서 굉장히 큰 영광이다. 그런 영광스러운 기회를 쉽게 포기할 수 없다. 계속 교수라는 직업에 머무르려는 이유다. 


아빠, 교수

두번째 학기임에도 결코 나아지는 법이 없이 점점 더 바빠져만 간다. 강의 준비와 내 논문 작성에만 시간을 쏟아도 모자랄 판에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계속 튀어나오는 점이 제일 성가시다. 대학원생들의 논문 지도나 학부생들의 진로 상담은 당연한 의무라 생각하지만, 각종 연구사업을 따오기 위해 제안서를 작성하는 일이나 학내외 정치를 위해 동원되는 일은 아무리 적응해보려고 해도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힘이 들어 몸과 마음이 지쳐갈 때 아빠, 아버지 생각이 자주 난다. 그 분은 대체 어떻게 이런 위기를 수도 없이 잘 넘길 수 있었을까? 그 분도 나처럼 힘들었을까?

아주 어린 나이부터 나는 아버지의 직업이 교수, 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 직업이 무엇을 하는 일인지 제대로 알기 전부터 어른들이 물어볼 때마다 또박또박 “교수”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교수라는 직업이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인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익숙해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훨씬 지난 시점부터다. 아버지는 주로 집에서 일을 하셨기 때문에 내 눈에 비친 아버지는 가족으로서의 아버지와 공적인 직업인으로서의 아버지의 이미지가 항상 겹쳐져 있었다. 어머니와 즐겁게 수다를 떨다가도 갑자기 책상 앞에 앉아 한참동안 책만 바라보시던 모습, 마당에서 잡초를 뽑다가 퍼뜩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갑자기 방으로 돌아와 이것저것 찾아보시던 보습, 제자들을 집으로 불러 왁자지껄하게 고기를 구워먹다가 문득 역사 이야기로 빠지면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쉬지 않고 수다를 이어 나가시던 모습. 나에게 아버지는 늘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교수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 두 정체성이 지금도 잘 분리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아는 교수로서의 아버지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은 또 한참 뒤의 일이다. 인터넷이 발달한 세상에서 검색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 분이 그동안 내가 생각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대단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분이 쓰신 책이 한국과 중국 사학계에서 큰 논란을 일으키고, 더 나아가 어떤 유의미한 영향을 지속적으로 끼치게 되었음을 발견했을 때, 나는 자랑스럽고 뿌듯하기 보다는 당혹스럽고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상처를 받지 않았을지 걱정이 되는 마음이 더 컸는데, 이런걸 보면 역시 가족은 가족이지 않나 싶다. 비전공자로서 깊은 수준에서 이해할 수 없는 나는 그저 방관자였을 뿐 결코 큰 힘이 되어드릴 수 없었을텐데, 아버지의 생각에 깊이 동의하는 다른 역사학자들의 지지 선언을 볼 때마다 뭉클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그 분들이 아버지에게 있어 또다른 가족이자 형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젊은 나이에 교수로 임용되어 무사히 정년퇴임하시던 순간까지, 위와 같은 격랑이 한두번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고통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집에서 내색 한번 하지 않으시고 무던하게 그 긴 세월을 넘긴 분의 단단한 마음의 굳기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나는 어제도 아내에게 징징거렸고, 그걸로도 채 만족하지 못해 전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또 징징거렸다. 40년 가까이 교수의 아내로 살아오신 엄마는 “사치스럽다”라는 일침을 날리셨다. 학기중에 바쁜 일이 계속 터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고, 그렇게 바쁜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꾸지람이 나의 정신을 버쩍 들게 했다. 대학원생들의 논문을 읽고 코멘트를 주는 일, 연구실적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지만 한푼의 사업비라도 더 타와서 학부생들에게 좋은 경험 하게 해주는 일,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지식을 활용하여 코멘트를 드리는 일 등등, 내 레쥬메에 기록될 연구실적과 하등 상관없는 많은 임무들이 주변에 산적해 있다. 이걸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저 억울하고 답답할 뿐이다.

나는 아버지처럼 훌륭한 학자가 아니다. 학계의 변방에 억지로 매달려 기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거인은 되지 못한 채 거인의 어깨에 숨어 세상을 바라보는 척 흉내만 내고 있는 셈이다. 남들보다 배로 노력해서 따라잡으려고 해도 뱁새가 다리 찢어지는 격인데, 다른 업무들때문에 공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어서 잠시 가슴이 답답했나보다. 별 시덥지도 않은 가치도 없어보이는 논문을 써서 학회 자리나 채워주려는 시도에 스스로 화가 났나보다. 아버지도 내 나이 때 쯤 비슷한 생각을 하셨을까. 왠지 아닐 것만 같아서, 왠지 그 분은 그 시절에도 분명한 확신을 가지셨을 것만 같아서 한 편으로 분하고 부럽고, 다른 한 편으로 기쁘고 뭉클하다. 학자로서 분하고, 아들로서 기쁘다. 이 두 감정이 쉽게 분리가 되지 않는다.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 내 인생에서 가장 가까이 존재할 때, 그 열패감과 안도감은 결코 지워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만 같다. 아마도 평생 이럴 것 같다.

아이를 위한 나라

세종시를 조금씩 더 좋아하게 되는 이유로 여러가지를 꼽을 수 있을텐데, 그 중 하나는 이 도시가 아이들을 중심으로 설계된 동네라는 점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인 한국에서 아이가 중심이 된 도시를 그리 많이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을 생각해볼 때, 반가움을 넘어 고마움까지 느끼게 만드는 작은 배려들을 도시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설계자가 고려한 여러가지 장치들을 이 곳에 실제로 거주하는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고 무시해버린다면 그것처럼 슬픈 일도 없겠지만, 서울과 같은 기존의 대도시들이 겪고 있는 것처럼 타인과의 불쾌한 경쟁을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환경으로까지 악화되지만 않는다면 최소한의 배려는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을 가지고 있게 된다. 그런 작은 기대들이 이웃을 향해 한번은 더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마음 속 작은 여유를 만드는 원천이 된다. 타인을 반드시 이기지 않아도, 이웃을 반드시 미워하지 않아도 내 가족과 내 아이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조금씩 더 강해질때, 비로소 ‘공동체’의 한국적인 재해석이 가능해질런지도 모른다.

말은 이렇게 거창하게 하지만, 나는 오늘도 공동체의식을 지켜내기 위한 위기를 한차례 넘겼다. 아내가 잠시 한국을 떠난 이번 주말 내내 혼자 집을 지키고 있다. 집에 혼자 있을 때에는 영화도, TV프로그램도 잘 보지 않고 심지어 음악도 잘 듣지 않는다. 침묵이 흐르는 넓은 집에 하루종일 혼자 있다보면 작은 소음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기 마련인데, 오늘따라 유독 그동안 잘 참아왔던 윗층으로부터의 층간 소음에 온 정신을 사로잡혀버렸다. 어린 아이가 쿵쾅쿵쾅 뛰어다니는 소리에 스트레스를 받아본 적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는데 오늘은 그만 육체적인 고통, 즉 두통이 오고 말았던 것이다. 책상 앞에 앉아 이것저것 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에게 머리와 관련된 고통은 꽤나 성가신 존재다. 늦은 저녁까지 쉬지 않고 뛰어다니는 윗층의 어린 친구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는 와중에 그만 과연 나는 오늘 밤까지 이 소음을 참아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뇌에 빠져버렸다. 마침내 내가 그동안 그렇게 많이 들어왔던, 윗층 계단을 올라가서 초인종을 누르는 꼰대 아저씨가 되어 버리는 것인가 싶어 두려움까지 밀려왔다.

일단 저녁미사를 보고 와서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이십몇층부터 내려오던 엘리베이터가 윗층에서 멈추더니, 떠들썩한 아이의 목소리와 그 아이를 진정시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함께 들렸다. 딱 봐도 윗층 식구들이었다. 바로 밑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다시 멈추었을 때, 떠들썩했던 엘리베이터에서 순간적으로 묘한 침묵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공룡을 좋아하는 아이와 함께하는 윗층 가족과 하필이면 오늘따라 예민한 아랫층 남자는 그렇게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첫번째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공룡을 두 손에 들고 있는 세살에서 네살 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의 옆에는 역시 공룡 하나를 들고 말상대를 열심히 해주고 있는 젊은 여자와 그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휴대폰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공룡을 들고 좁은 엘리베이터의 이구석과 저구석을 열심히 뛰어다니는 그 아이와, 혈기왕성한 아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진땀 흘리는 여자, 그리고 휴대폰만 열심히 보고 있던 남자로 구성된 그 가족을 보고 있자니, 오늘 하루종일 나를 괴롭힌 두통 따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의 두통은 그 아이가 오늘 윗층을 뛰어다니며 확장시켰을 공룡과의 대혈투 이야기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그 어린 친구의 세계가 큰 장애물 없이 계속 성장해나가기를 바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 가족을 다시 만난 것은 불과 10여분 후, 성당에서였다. 그 가족도 같은 성당 식구였던 것인데, 거기서도 여자의 사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아랫층으로의 소음전파에 대한 걱정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스트레스가 그 여자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그녀의 표정에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미사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휴대폰만을 보던(과연 그 휴대폰 안에는 무엇이 담겨져 있는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남자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는 다행히 큰 소음을 내지 않고 지겹고도 지루한 한시간 여의 시간을 견디어냈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을 다시 정리했다. 이 도시는 아이들을 위한 곳이다. 하지만 이 곳이 여성을 위한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설계자의 배려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필요해보였다. 나는 두통을 희생했지만, 최소한 그것보다는 더 큰 희생과 노력이 필요해보였다. 거의 확실하게 그렇게 느껴졌다.

서울을 떠나며

내일 서울을 떠나 세종으로 이사한다. 세종시에 집을 구하기 위해 50채는 족히 넘을 수의 아파트들을 구경했다. 그 과정에서 정말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우야든동 우리 부부는 앞으로 2년동안 세종시의 한 아파트에서 전세살이를 하게 되었다.

주거지를 이전한다는 결정은 우리 부부에게 상당히 큰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미국에서 보낸 6년과 군복무를 위해 강원도에서 보낸 2년여의 시간을 제외하면 한평생을 서울과 그 주변 위성도시에서만 살아온 나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지방생활’에 대한 나름의 두려움이 있었다. 경상남도 출신으로 ‘서울 입성’이 십대시절 꿈이었던 아내 역시 갖은 고생 끝에 서울 한복판에 어렵사리 마련한 신혼집을 홀연히 떠나 직장마저 관둔 채 남편 하나 믿고 연고 하나 없는 도시로 내려간다는 결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임용이 된 후 학교 기숙사에 머물며 첫 학기를 보낼 수 있는 분에 넘치는 행운을 얻었는데, 우리는 이 석달 남짓한 기간을 대전이라는 이 도시가 과연 살만한 곳인지 여기저기 둘러보며 탐색하는 기회로 삼았다. 우리의 결론은 ‘세종으로 가자’였다. 세종이 압도적으로 뛰어난 생활환경을 제공해서는 아니었다. 세종은 현재 막 시작하는 단계의 계획도시이고, 정말 많은 면에서 부족함이 많은 도시다. (심지어 도미노피자도 없다 ->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는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대전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혹은 현재의 ‘좋은 이웃’이라는 관점에서 대전이 세종보다 더 나은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물론 전적으로 우리 부부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렇다는 이야기다. 예컨대, 서울과의 접근성, 우리 부부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젊은 인구 비중, 아이를 낳고 키우기 적당한 환경, 운전이 서툰 아내에게 적합한 도로 환경 등을 고려할 때 세종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존재한 단 하나의 걸림돌은 자가운전으로 30분 정도 걸리는 통근거리였는데, 금요일 퇴근시간 여의도-금호동 구간을 70여분에 걸쳐 운전하고 난 뒤 시큰한 무릎을 안고 귀가하던 나에게 그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매매가 아닌 전세를 택한 이유는 복합적이다. 탐색 초기 우리는 매매만을 고집했다. 당시 세종시의 아파트 매매가격도 서울만큼이나 치솟고 있었기 때문이다. 투자의 관점에서, 서울의 중심지역을 제외하면 전국의 거의 모든 부동산 시장이 당분간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 내다봤는데, 단 하나의 예외지역으로 세종시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행정수도 문제부터 국회 분원 설치까지 호재만이 가득해보였다. 마침 가격대도 우리 부부가 영혼까지 끌어모으면 간신히 도달 가능한 수준이었다. 이미 서울 중심부에 있는 아파트들은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으로 승천한 이후라 세종시의 상대적으로 저렴한 아파트 가격이 우리 부부에게 손을 내미는 마지막 동앗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집을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시장을 깊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미심쩍은 구석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우선 수많은 공인중개사, 혹은 “떳다방”이라고 부르는 곳들을 돌아다니며 부동산 버블이 형성되고 파급되는 경로를 눈으로 확인했다. 아무런 근거없이 ‘프리미엄’을 덕지덕지 붙여 나가며 투기심리를 집단적으로 키워나가는 과정은 충분히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높아져가는 가격구조를 떠받드는 지지기반이 취약해보였다. 아주 약한 충격에도 무너질 수 있다고 느꼈다.

관건은 이 시장에 가해질 수 있는 가능한 ‘충격’의 성격이었다. 나는 이 충격이 외생적일 뿐 아니라 견고한 구조를 가질 것이라 생각했다. 미국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금리 인상 기조는 우리가 막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무역전쟁은 트럼프가 집권하는 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보호무역주의 기조가 강해지면 세계경기가 둔화될 수 밖에 없다.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나라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니다. 한껏 강화된 LTV/DTI 규제가 부동산시장 경기에 미치는 영향은 역사적으로 6개월~1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발생했다. 이제 슬슬 그 여파가 발생할 지점이다. 조금 더 지엽적으로 바라보면, 이미 대전, 공주, 청주 등으로부터 인구를 빨아들인 세종이 추가적인 인프라를 갖추기 전 단기적으로 수도권 인구를 흡수할 수 있을 것 같아보이지 않았다. (어제 밤 늦게 세종청사 부근에서 학교 기숙사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이동해보았는데 정확히 한시간 반이 걸렸다) 이런 저런 환경들을 따지고 보니 부동산 시장에서 유동성을 걷어갈 요인밖에는 보이지 않았고, 그 요인들은 일시적이기 보다는 최소한 몇 년은 지속되는 항구성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부동산 시장 참가자가 내재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닌 외생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즉, 앞으로 2년동안 세종시의 부동산 시장은 상당히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변동성도 큰 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당장 ‘지금’ 아파트를 급하게 구입해야 할 이유를 찾기 힘들어진 것이다. 이에 더해, 해당 지역에 1년 이상 거주하면 주어지는 신혼부부 특별공급의 신청자격을 포기하는 것도 아까웠다. 세종시는 분양가 제한 지역이라 상대적으로 현재 시장가치에 비해 저렴한 수준에 분양매물이 공급된다. 공급매물도 전국 최고 수준이다. 신혼부부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한번쯤은 노려보자는 생각이 그리 허황되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상대적으로 아주 저렴한 세종시의 전세가격은 우리 부부로 하여금 당분간 ‘빚’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아도 되게끔 만들어주었다. 아내에게 세종시에서 가장 살아보고 싶은 동네를 선택해줄 것을 부탁했고, 아내는 장기적인 투자 가능성도 높고 단기적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며 살 수 있는 편안하고 안정적인 동네를 골랐다. 우선 실내 구조가 가장 마음에 들었고, 청과물 가게부터 스타벅스까지 도보로 접근 가능한 거리에 있다는 점도 만족스러웠다. 서울에 비해 각종 편의시설은 당연히 많이 부족하지만, 자가운전을 하지 않으면 생활이 몹시 불편한 ‘지방 도시’라는 본질적 한계를 세종시 역시 가지고 있는바, 아내의 운전솜씨가 조금씩 늘다 보면 움직일 수 있는 영역도 조금씩 확장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새로 지은 아파트라 주차장도 넉넉해보였고 운동시설도 단지내에 있을 뿐 아니라 요가 등 각종 프로그램을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는 커뮤니티 센터도 단지 바로 근처에 있었다. 내가 출근한 이후 일과시간을 친구 하나 없는 도시에서 혼자 보내야 하는 아내에게 그나마 가장 나은 환경을 고르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리 출퇴근이 자유로운 직업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업무가 계속 존재하기 때문에 아내가 혼자 보내야 하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외롭고 쓸쓸하지 않기를 바랐다.

서울에 지나치게 쏠려있는 문화적 불평등 현상은 우리 부부가 극복해 나가야할 과제 중 하나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거대도시 서울이 한국에서 가장 높은 문화적 다양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모순은 지방 중소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뼈아프게 다가오는 부분이다. 좋은 커피숍 뿐 아니라 셰프와 주인장의 개성이 살아있는 작은 음식점들을 찾아다니는 재미는 서울생활의 백미 중 하나였다. 이제 쉑쉑버거를 먹으려면 11,000원과 한시간 반의 비용을 지불하고 고속버스에 몸을 실어야 한다. 이때문인지 아내는 현명하게도 얼마전부터 부쩍 직접 요리하는 시간을 늘려왔다. 맛있는 음식을 예쁘게 차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내를 만난 덕분에 서울을 떠나면서 오히려 더 건강한 요리를 자주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내 삶에 찾아온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

다행히 세종시에는 좋은 도서관이 있고 교보문고와 영풍문고도 있다. 서가에 서서 책을 둘러보는 재미는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더이상 김밥레코즈에서 음반을 뒤적거리는 재미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지만, 유비쿼터스한 세상에 살고 있는 덕분에 어디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음악은 계속 들을 수 있다. 놀랍게도 세종시에도 영화관이 하나 있으며, 블록버스터 영화를 좋아하는 아내를 위한 영화는 거의 대부분 극장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상영관을 확보하고 있는 듯 보인다. 굳이 예술영화를 보고 싶다면 대전 시내에 있는 극장까지 차로 슬슬 나가면 된다. 백화점이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데(우리 부부는 백화점 산책(?)을 좋아한다), 이 역시 11,000원과 한시간 반의 비용을 지불하면 고속터미널역에 위치한 한국 최대 규모의 백화점까지 한번에 갈 수 있으니 나름의 궁색한 대비책이 있는 셈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공연이다. 서울에 머무른 기간동안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공연을 보려고 노력했다. 결혼한 이후에는 그조차 쉽지 않게 되었지만, 어찌 되었든 마음만 먹으면 홍대로 달려가 표를 끊고 공연을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제는 정말 큰 마음을 먹어야 공연 하나를 겨우 볼 수 있을 것 같다.

문화적 다양성을 포기한 대신 우리 부부가 기대하는 것은 조금 더 여유로워지는 생활이다. 이미 임용 이후 우리 부부의 생활은 큰 폭으로 바뀌고 있다. 시간은 더 느리게 흘러간다. 원하기만 하면 새벽 두시까지 나른한 자세로 누워 텔레비전을 볼 수 있다. 물론 현실은 새벽 두시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 일쑤지만.. 아홉시 쯤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고 커피를 내려 마신 뒤 열시가 넘어서야 씻기 시작한다. 그래도 생활이 가능하다니! 물론 이번 학기에는 대전과 서울을 바쁘게 오가느라 길바닥에 버리는 시간과 돈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제는 그런 부스러기 시간조차 아낄 수 있게 됐다. 그 시간과 돈을 모으고 모아 여기저기 놀러가볼 생각이다. 아직 한국에서 가보지 못한 좋은 곳이 많이 있다. 대전이 우리 부부에게 주는 거의 유일한 축복은 전국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접근성이다. 이것을 최대한 활용해볼 생각이다.

서울을 떠나는 대신 서울에서 어쩔 수 없이 유지해야 했던 관계들도 함께 조금 더 멀리 할 수 있다는 점도 기쁘게 받아들인다. 우리는 아마 조금 더 고립되겠지만, 그만큼 조금 더 우리 가족 안에서의 깊은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고 싶다면 마음만 먹으면 되는 직업을 가지게 되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할 뿐이다.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것들과 조금 더 많이 작별할 수 있게 되었음에 감사한다.

2년 뒤, 세종에 대해, 또 서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게 될지 지금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지방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애쓰고 있을 수 있고, 목가적인 지방생활에 취해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혹은, 지금보다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또다시 갖은 고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어떤 가능성이든 열려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부부에게는 앞으로의 2년이 큰 도전이다. 이곳에서 잘 사는 것은 그 어떤 가능성으로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열심히 살고, 많이 배우는 2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조교수, 첫 학기

어제 2018년 봄학기 마지막 수업을 끝냈다. 이제 남은 것은 기말고사와 성적입력 정도인 것 같다. 지난 3월 이 곳으로 이직한 이후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하루 하루가 시트콤이라고 할 정도로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쉴새없이 터지는 가운데 서울과 대전을 오가느라 몸은 점점 피곤으로 찌들어갔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실감했고, 보통의 국가기관과는 많이 다른 조직문화를 바닥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시키는 만큼 일하고 일하는 만큼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을 받으며 (최소한 먹고 사는 문제에 관해서는) 큰 걱정 없이 살았던 과거의 회사생활과 달리 중장기적인 ‘먹거리’를 찾아 ‘영업’을 해야하는 과정이 어색하기도 했다.

‘열심히 일하는 20%가 적당히 게으름 피우며 일하는 80%를 먹여 살리는 구조’는 이 곳에서도 비슷해보였지만, 개별적으로 주어진 연구실이 상징하는 것처럼 철저하게 독립적이고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교수사회에서 그 누구도 나를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더 나아가 나 하나만 믿고 멀쩡히 잘 다니던(사실 그리 잘 다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좋은 회사를 관둔 아내를 경제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절박함이 나를 움직이는 추동력으로 작용했다. 그 누구도 나의 출근과 퇴근시간을 신경쓰지 않았지만, 나를 밤 늦게까지 컴퓨터 앞에서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내가 오빠를 보아온 이래 가장 열심히 사는 것 같아.”라는 아내의 평가에 으쓱해할 틈도 없이 3개월이 지나갔다.

부족함을 절실히 깨닫는 계기가 된 첫학기였다. 앞으로 당분간 게으름 피울 시간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다음 학기 나의 수업을 수강할 학생들에게 질 좋은 강의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방학 기간 내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지식이 일천한 상태에서 그저 ‘말빨’ 정도로 수업시간을 때우는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다. 죄책감을 많이 느꼈다. 강의와 연구를 병행하는 요령도 얼른 터득해야 한다. 교수사회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유일한 방법은 연구활동 뿐이라는 사실을 절감하는 경험을 몇차례 겪었다. 좋은 논문을 쓰지 못하면 순식간에 정체되어 소멸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생각보다 논문에 집중할 시간이 생기지 않아 적지 않게 당황한 학기이기도 했다. 틈틈이 부정기적으로 등장하는 각종 행정업무도 능숙하고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학교에서의 행정처리 과정은 전에 다니던 회사들처럼 체계적이고 신속하지 못하기 때문에 눈치껏 스스로를 잘 지켜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충분히 똑똑한 학생들과 배울 점이 많은 선배교수들, 그리고 헌신적인 교직원이 주변에 있기 때문에 교육이든, 연구든, 행정업무든 나의 부족함이 노력으로 극복될 희망이 존재한다.

어제 저녁에는 같은 단과대학에서 함께 일하는 교수 및 교직원 분들과 종강식을 가졌다.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하는 교수님의 은퇴식을 겸하는 자리였는데, 평생의 일터를 떠나는 분의 고별사와 그 분과 수십년을 함께 일한 동료들의 환송사를 차례로 듣고 있자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 분은 내가 태어나던 해보다 한 해 일찍 이 대학교에 교수로 임용되었다. 약 37년 정도 한 곳에서 직장생활을 한 셈이다. 인품이 훌륭하셨던 덕분인지 많은 전,현직 교수들이 자리를 빛내기 위해 참석했다. 그 분이 고별사에서 남긴 말 중 인상 깊은 구절이 두어개 있었다. 하나는 “공부에만 매몰되지 않기 위해 다른 일을 반드시 하나 이상 해라. 개인적으로 꽃을 가꾸는 일이 마음을 다잡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후배들을 위한 조언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신들과 함께 해서 참 행복하게 일하다 간다”는 동료들에게 바치는 감사의 인사였다.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말이었지만, 그 분이 오랜 시간 걸어간 기나긴 길의 초입에 이제 막 선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끝이 까마득해서 차마 보이지 않는 높은 산을 올려다보는 느낌이었다. 다른 교수님들의 덕담에서 “자식농사를 잘 지은 것”에 대한 찬사가 끊이지 않았던 점이 재미있었는데, 과연 나의 아버지에게 나는 어떤 아들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져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 저녁이기도 했다. 아버지에게 오랜만에 카톡이나 하나 보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괜히 머쓱하기도 했고, 직접 얼굴을 보며 이런 이야기를 드리고 싶은 생각도 함께 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걸어간 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제는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대전에서 약배전 커피 마시기

2월말 대전으로 내려온 이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생각들 중 하나는 ‘좋은 로컬 로스터리 커피숍’을 찾는 일이었다. 정확하게 두달동안 대전의 좋다는 커피숍을 찾아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나이브했던 것 같기도 하다. ‘로컬’에 집착한 나머지 내가 사는 ‘동네’에서 로스팅한 커피를 일상에서 즐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특히 대전이라는 ‘지방’에서 살기로 작정한 이상, ‘서울’에서 문화적으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하고 싶은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의 이러한 시도는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며칠전 블랙워터포트에서 주문한 비로소커피의 약배전 블렌드인 ‘너의 이름’이 오늘 오후 도착했고, 바로 학교 기숙사로 가지고 들어가 서울에서 챙겨온 도구들을 이용해 급하게 한 잔을 내렸다. 푸어 오버로 내린 그 한 잔의 커피는, 대전의 수많은 커피숍에서 마신 그 어떤 커피보다 맛있었다. 깊은 한숨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대체 왜 그렇게 고생(과 돈낭비)을 했지, 라는 자책감과 5월 1일 로스팅했다는 낙인을 보며 신선한 원두를 빠르게 보내준 비로소커피에 대한 고마움이 함께 했다.

톨드어스토리, 곰에스프레소, 비터앤스위트, 싱크커피로스터스, 커피살림팩토리, 커피인터뷰같은 대전의 유명한 로컬 로스터리에서 대표 메뉴라고 내놓는 커피는 대부분 중, 강배전이다. 하지만 내가 방문했을 때에는 원두의 신선함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는지 강배전 커피에서 느낄 수 있는 달콤한 다크초콜렛 풍미나 묵직한 바디가 전혀 느껴지지 않고 그냥 기분 나쁜 쓴 맛과 짠 맛이 가득할 뿐이었다. 목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오일리한 느낌도 전혀 없었다. 어쨌든 연남동의 리이슈 커피를 제외하면 서울의 핫한 커피숍들이 대부분 원두 본연의 과일향 풍미를 극대화시킨 약배전 커피를 주로 내세우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것이 서울에서 지방으로 일방향으로 진행되는 트렌드의 전파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체현상인지, 대전 로컬숍들의 완고함에 기인한 이 지역 특유의 풍토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편, 듁스커피나 프릳츠에서 원두를 제공받는 앤아워페이스나 몇몇커피 등 젊은 감성의 커피숍에서 제공하는 커피는 신맛이 지나치게 강해서 입안이 얼얼할 정도였다. 입안의 감각이 상처받을 정도로 산미를 강조한 커피는 다시 찾고 싶지 않다. 신선하지 않은 원두로 내린 커피가 주는 불쾌한 느낌과 결과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그동안 정말 많은 대전 로컬 커피숍을 다녔고, 로컬숍을 소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때문에 최대한 전향적인 자세에서 커피의 맛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결과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완벽한 실패였다. 그 어떤 커피숍도 나의 취향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좋은 커피’라는 생각조차 갖지 못하게 했다. 대부분의 커피숍에서 커피를 다 마시지 못하고 나올 정도였다. 한 잔의 좋은 커피를 마실 때 받는 수많은 감정적인 위로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절망스럽게도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듁스, 프릳츠, 리브레, 테일러와 같은 유명한 서울의 로스터리숍들이 온라인 유통망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펠트나 비로소 등 내가 사랑하는 공간들도 블랙워터포트 플랫폼을 통해 신선한 원두를 온라인으로 공급하고 있다. 나는 비로소커피의 원두를 오늘 받아들고 구원을 받았다고 느꼈다. 그 정도로 대전에서 좋은 산미를 느끼는 일은 힘들다.

조교수, 한 달

지난 3월 1일자로 임용되었으니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기 시작한지 이제 막 한 달을 채웠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순간에도 내 이름 앞(혹은 뒤)에 붙는 교수라는 수식어가 몹시 어색하여 실실 웃음이 나오고 있지만, 현실은 방금전에도 강의 하나를 막 마치고 나온 엄연한 교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서울에 있는 회사들을 다닐 때에는 떠올리지 않았던 것들을 요즘 많이 생각한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여기까지 왔고, 또 여기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인생에 대한 심오한 고민 따위로서의 생각이 아니라, 그냥 정말 너무 궁금하기 때문에 자꾸 떠오른다. 왜 이렇게 됐지? 왜 여기까지 왔지?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만큼 서울에서의 삶과 이 곳에서의 삶 사이에 흐르는 간극이 무척 크게 느껴지나보다.

대학원생 시절에도 학교 구성원들 사이에서 ‘조교수의 삶’은 희화화의 대상이자 연민의 대상이었다. 대학원생보다 일찍 출근하여 대학원생보다 늦게 퇴근하는 젊은 조교수들의 모습을 보며 ‘참 열심히 일하시는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지, 그들을 강의실이나 연구실에서의 교수가 아닌 일상 속에서 한 가정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으로 바라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작 내가 그들과 비슷한 삶을 잠깐이나마 살아보니, 강의실과 연구실 안과 밖의 균형을 절묘하게 조절해 나가야 하는 생각보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의 숙제를 받아들게 되었다. 연고가 전혀 없는 곳으로 오는 바람에 흡사 외국에 다니 나온 것과 같은 기분을 가끔 느끼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가족과 함께, 밥벌이 수단으로 왔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당장 살 집을 구하는 단기적인 문제부터 새로운 지역사회에 정착하는 조금 더 긴 호흡의 숙제까지 처리해나가느라 지난 한 달여의 시간동안 연구실과 강의실 밖에서 오히려 더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여기에 더해, 학생 신분으로는 자세히 알기 힘든 교원으로서의 다양한 고충과 고난이 조교수라는 특정 직위에 상대적으로 집중되는 현상이 비단 미국만의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최근 이 직업을 새롭게 시작하며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평등하고 독립적인 교원 간 관계는 개별 교원에게 주어지는 책임의 무게를 타인에게 양도할 빈틈도 그만큼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에게 주어진 책임의 양은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신입 직원’에게 주어지는 혜택같은 것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특히 교육 부문에 있어, 실수해도 괜찮아, 신입이니까, 와 같은 너그러움을 학생들에게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당장 오늘을 살아내야 하는 존재들이고, 나는 그들에게 최선의 교육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 뿐이었다. 지금도 내가 잘 모르는데 감히 누구를 가르치나, 라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죄스러움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새벽 늦게까지 강의준비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대학의 전임교원이라는 직업이 주는 다양한 형태의 매력을 음미할 여유는 아직까지 주어지지 않았다. 이 ‘매력’에는 일반적으로 익히 알려진 출퇴근 시간의 자유, 방학이 주는 여유로움, 조직 내에서 절대 복종해야하는 절대적인 ‘갑’의 부재 등이 해당된다. 나도 학교에 임용되기 전 이러한 환상에 빠져 잔뜩 기대를 부풀렸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 사람, 저 모임, 그리고 다시 이 업무에 불려다니는 와중에 매주 새로운 강의노트를 만들고 수업준비를 해야 하는 하루살이와 같은 삶에 허덕이며 지난 한 달을 보냈다. 논문은 아직 한 편도 읽지 못했다. 게으르게 보내기로 마음 먹는다면 한없이 게을러질 수 있는 직업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어렴풋하게 들었지만, 나의 경우 아마도 은퇴하기 전까지 게으르게 살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운명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힘든 한 달이었지만, 즐겁고 행복한 한 달이기도 했다. 이 곳에서, 이 직업으로 앞으로 30년을 더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대한 답은 (당연히) 찾지 못했지만, 최소한 서울에 있는 회사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는 것을 보면 지금 현재의 삶이 조금 더 나아진 것만큼은 확실하다. 강의 실력이 앞으로 조금씩이나마 나아져 학생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줄어들고, 그 와중에 조금씩 시간을 더 잘 활용하게 되어 논문을 계속 써나갈 수 있게 된다면, 그래서 남은 시간을 오롯이 가족에게 할애할 수만 있다면, 그 지점부터 내 삶이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슴프레한 희망을 가져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