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꿈 꾸는 것 같아요”

‘시간강사’라고 불리우는 직업이 있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책을 통해 사회적인 관심도가 높아졌고, 이 직업을 가진 사람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나온 뒤 “강사법”으로 불리우는(정식 명칭은 “고등교육법 개정안”이다) 법안이 발의되어 올 여름부터 실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 법안의 핵심은 시간강사에게 교원의 지위를 부여하여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장치를 마련해주자는 것인데, 실제 이 법을 운영해야 하는 대학본부부터 이 법안의 수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강사들까지 반대하고 있는, 헛점이 상당히 많은 법안이다.

딱딱한 법안 이야기는 짧게 하고 싶다. 2010년 한 시간강사가 세상을 등진 뒤 2011년 처음 발의된 법이 8년동안 유예된 끝에 누더기가 되어 시행된 것부터가 문제였다. 실제로 이들의 삶에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 사립대는 안정적인 강사채용에 들어가는 비용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임교원에게 대형강의를 맡기거나 엉뚱한 강의를 묶어 한 명의 강사에게 몰아주는 등 편법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개인사업자로 등록한 사람에 한해 강사 대신 겸임교원 등의 자리를 제안해 4대보험 등 정식교원으로서 누려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를 최대한 주지 않으려 한다. 재정적 어려움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국립대는 기존에 채용하던 강사들의 자리를 그대로 보전해주는 선에서 행정적인 부담을 최소화하려 한다. 전임교원 채용과정과 같이 공개채용 및 심사위원회 구성을 거치도록 법으로 명시했지만, 실제로는 결국 주먹구구식으로 알음알음 처리될 가능성이 높다. 법은 바뀌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 일이 종종 일어나는데, 이 강사법의 경우 그렇게 될 확률이 상당히 높아보인다.

아버지는 시간강사라는 직업에 대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여러번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당신 제자들이 졸업 후 정규직을 구하지 못할 것을 걱정해 아예 제자를 받지 않으려고 했다. 아버지 밑에서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것이라고 자신하는 젊은이들에게 졸업 후 강사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에 대해 잔인할 정도로 현실적인 조언을 한 뒤 그들을 빈 손으로 돌려보냈다. 아버지는 운이 좋은 편이어서 박사 학위를 받음과 동시에 지방의 한 사립대에 전임교원으로 임용이 되었고, 나 역시 운이 굉장히 좋은 편이어서 박사 학위를 받은 직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강사경험 없이 지금의 학교에 전임교원으로 바로 오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 부자는 강사 생활을 삶 속에 체화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뿐 아니라 나 역시 강사생활이 “사람이 할 짓이 아닐” 정도로 힘들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하는 이유는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그 직업이 얼마나 끔찍한지 충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올 여름 내내 학교의 교원 채용 과정에 이리저리 불려다녀야 했다. 순순히 말도 잘 듣고 그럴듯한 감투도 있으니 여러모로 써먹기 좋은 대상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학교의 민낯, 혹은 내부 속사정을 가감없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높은 분들의 결정에 논리를 만들어 드리거나 얼굴마담으로 참석하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부담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있을 경우 이야기는 달라진다. 올 여름이 특별히 더 힘들었던 이유는, 누군가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초빙교원과 시간강사 등 학교 내에 존재하는 많은 비정규직, 계약직 교원을 내 손으로 뽑아야 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도 있듯 사람을 뽑는 과정은 무척 복잡하고 힘들다. 채용 분야, 채용 대상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 그 누구도 크게 손해보지 않게 그림을 만드는 와중에 미래의 관계까지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아야 하고, 학과의 발전과도 연계시켜야 한다. 상당히 어려운 고차방정식을 푸는 문제와 같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모든 과정을 다 통과한 뒤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나의 결정과 책임이다. 모든이가 책임을 회피하려 하는 상황에서(불만은 토해내고 이익은 나누기 바라지만 책임 이야기가 나오면 모두 슬그머니 목소리를 낮춘다) 모든 사람의 의견을 종합한 뒤 내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결정된 자리가, 즉 시간강사와 초빙교원 자리가, 그렇게 좋은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닌”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지원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 쉽지 않은 일인데, 그 과정을 무사히 통과하고 자리를 득한 사람이 앞으로 감내해야 할 고달픈 삶의 과정을 ‘제안’한다는 것 역시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것 같았다.

나름대로 짱구를 굴려 최선의 해결책을 마련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 의견에 대해 설명하고 설득했다. 얼마 되지 않는 작은 파이를 한번 더 잘게 쪼개어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자는 것이 내 해결책의 대략적인 줄거리인데, 사과 껍질과도 같은 보잘 것 없는 혜택을 받게 된 사람에게 문자가 왔다.

“교수님, 그럼 저 혹시 통과된 것인가요? 확정이 된 것인가요? 아직 꿈 꾸는 것 같아요.”

이 문자를 받은 뒤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내 마음에 무겁게 남아 있다. 이 문자가 가끔은 나를 무너뜨리고, 가끔은 나를 다시 일으켜세운다. 버티기 힘들어 스스로 목숨을 버릴 정도로 고달픈 직업을, 다른 누군가는 ‘꿈을 꾸는 것 같은’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세상이 얼마나 더 엿같이 변할지 감도 잡을 수 없지만, 이런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내가 한없이 무력하게 느껴진다.

이 지원자가 그동안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얼마나 괜찮은 박사 논문을 썼는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지원자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상대할지도 잘 알고 있다. 그런 것은 걱정이 전혀 되지 않는다. 훌륭한 사람들이 그에 합당하지 못한 대우를 받고 있는 현상이 너무나 당연하게 일상으로 스며들어 마치 그 사회적 지위가 복에 겨운 것처럼 인식되는 것이 문제다. 점점 그런 세상이 되어가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물론 그 누구도 이 지원자에게 공부를 하라고 강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든 이들에게 왜 국가적인 차원에서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개인의 선택과 책임 문제가 아니다. 비용/편인 분석과 같은 경제논리도 아니다.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최소한의 직업적 안정성을 보장받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생각이 그리 크게 잘못된 생각인가 싶다. 학생 입장에서는 똑같은 “교수님”인 모든 교원에게 동등한 법적 지위와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정도의 금전적 보상을 제공하는 것이 대학 곳간을 바닥내는 어리석은 행위라고 주장하는 것이 정말 맞는 주장인가 싶다. 교육은 빈곤을 탈출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기 때문에 교육의 사회적 가치는 결코 낮게 평가되어서는 안된다. 그 교육을 최전선에서 수행하는 교육자의 지위 역시 마찬가지다. 인적자원 하나로 버텨 나가야 하는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졸속으로 처리되어야 하는 부분이 아니며, 행정가들의 편의에 맞게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향에서 진행되어야 하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 대학 시절 수많은 “교수님”을 만났다. 그 중 누군가는 총장이나 장관처럼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고 얼굴에서도 반질반질 빛이 났다. 그 중 다른 누군가는 늘 허름한 차림에 어두운 표정으로 강의실에 들어왔다. 항상 입는 옷이 같았고, 학생식당에서 우리와 함께 식사를 했다. 학생들도 대부분 그 “교수님”들의 사정을 알음알음 알고 있었다. 저 사람 강사라며, 학과장이 싫어해서 곧 짤릴거래, 저 교수님은 청와대에서 곧 부를거래, 저 교수님 이혼했대, 등등. 나는 대학 시절 운이 좋아 참 좋은 강의를 많이 들었다. 그 중 시간강사의 강의도 많았다. 아직도 내 머릿속에 박혀 있는 ‘펀치라인’이 몇 있을 정도다. 강의가 너무 좋아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학기가 끝난 뒤 따로 식사자리를 청했던 분도 강사였고, 철학에 관심을 갖게 만들어 나를 도서관으로 보내버린 사람도 강사였다. 선형대수학과 미적분학 수업도 강사들에게 들었는데, 그들이 가르쳐준 공식과 기술은 지금까지도 나를 먹여 살리고 있다. 나를 가르쳤던 그 강사분들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지금은 그들과 함께 일하고 있고, 그들의 사정을 모른 척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알게 되어 버렸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책임지고 있는 몇 안되는 시간강사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강의실로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손에 돈을 더 쥐어드릴 수는 없겠지만, 교원으로서의 자긍심, 권위, 보람, 이런 낭만적인 단어들만이라도 우스워보이지 않도록, 거친 세상에 훼손당하지 않도록 최대한 예를 갖추고 싶다. 그들이 나와 함께 학생들을 위해 일하는 동등한 동료이고, 함께 고민하여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동지라고 느끼게 해주고 싶다. 요즘같은 세상에 그들에게 남은 것은 그런 낭만적인 것들 뿐이니까, 그것들만이라도 온전하게 가져가게 하고 싶다. 그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면 정말 “사람이 할 짓이 아니”게 되어 버릴 것만 같다.

지루하고 평화로운 생활

최근, 그러니까 이번 여름방학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 생활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정형화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정형화된 생활의 패턴은 몹시 지루하고 반복적인데, 소소한 일상의 연속 중에 묘한 리듬을 획득하게 되면서 지난 몇 년 간 내 삶에서 결여되었던 것을 되찾은 느낌이 든다. 되돌려 받고 싶었던 결핍은 우습게도 대학원생 시절 지겹도록 벗어나고 싶었던 일종의 개미지옥, 혹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생각의 굴레다.

거창한 것은 아니다. 논문에 대해 생각하고, 하나의 논문이 끝나면 다음 논문에 대해 생각한다. 논문과 논문 사이에는 강의 준비에 대해 생각하고, 예고 없이 학생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잠시 생각의 문 밖으로 나가 세상을 접하고 돌아온다. 요즘에는 꽤 높은 빈도로 세상에 발목 잡혀 오랜 시간 생각의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때가 많다. 학교에서 보직을 맡고 있기 때문인데, 금감원과 국회 시절처럼 일하다 보니(몹시 게으르고 어리버리한 내가 5급 사무관 흉내를 조금 내어보니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어느새 단과대 내의 잡다한 일이 모두 내 앞으로 모이게 되었다. 남들처럼(그러니까 다른 교수님들처럼) 잡일을 미루거나 피하는 성격은 아니어서 묵묵히 해나가다보면 어느새 세상이 나를 떠나보내 주어 다시 논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통계 프로그램을 돌리면서 숫자에 집중하거나, 수식을 손으로 풀면서 미분과 사칙연산의 재미에 흠뻑 빠지거나, 한 줄의 문장을 멋들어지게 쓰기 위해 대가들이 쓴 책과 논문을 뒤적거리다 보면 어느새 몇 시간이 훌쩍 지나 있다. 그렇게 생각의 숲 속에서 헤매다 가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아내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떠 있다.

아내와 함께 청소를 하고, 밥을 해먹고, 커피를 내려 마신다. 아내는 나의 세상이자 나의 생각, 혹은 나 그 자체일 때도 있어서 그저 옆에 있을 뿐이지만, 그 어디에도 있기에 모든 것을 함께 한다. 내가 생각 속에 빠져 있을 때 아내는 방해가 되지 않을만한 거리에서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거나(트위터도 하더라 요즘은) 영화를 본다. 그녀도 그녀만의 집이 있기를 바란다. 나는 비로소 내 집을 올렸다. 지루하고 심심한 방이지만, 그 안에서 나는 마음껏 뛰어놀 수 있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 논문을 쓸 뿐이지만 장님 코끼리 만지듯 세상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누군가는 반드시 불만을 가지겠지만 혹시라도 모를 한 명의 학생을 위해 수업 준비를 하는 일은 묘한 사명감을 불러 일으킨다. 아무도(그러니까 그 어떤 교수님도) 원치 않는 잡일은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기에, 청소를 하는 심정으로 뒤치닥거리를 하다 보면 그 안에서 또 배우는 것이 많다. 정말 정말 지루해서 더이상 생각의 진도가 나가지 않을 때에는 서울에 올라간다. 하루 반나절 고향의 동네에서 실컷 놀고 나면 다시 책상에 앉고 싶어져 몸이 근질거린다.

생활은 단순하고 지루하지만, 머릿 속은 몹시 바쁘고 숨가쁘다. 이런 삶이 나에게 맞는다. 서울에서도 이런 생활이 가능할 수 있을까, 요즘 가끔 상상한다.

후원자로서의 삶

최근 아내는 그림을 그리는 일에 흠뻑 빠져있다. 학교로부터 강의용으로 얻어온 아이패드 위에 그림을 그리며 손을 풀더니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내 눈에는) 별로 어렵지 않게 수채화 그림을 몇 점 그려낸 후, 올해부터는 일주일에 두 번 학교 평생교육원에 나가 유화를 그리고 있다. 덕분에 우리집은 점점 화실처럼 변해가고 있다. 2015년 처음 혼자 살기 시작할 때부터 함께 한 6인용 테이블은 이제 아내의 작업공간으로 탈바꿈했고, 집 안 복도는 전시회 공간처럼 캔버스로 가득 채워졌다. 요즘 나의 즐거움 중 하나는 학교와 집을 오가며 그림을 그리는 아내를 위해 무거운 화구가방을 대신 들어주는 일이다. 그림에 소질이 전혀 없는 나의 눈에는 무척 아름다운 그림을 척척 그려내는 아내의 손재주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 그녀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내가 다른 걱정 없이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게 환경을 조성해주는 일 정도이며, 그 중에서도 화구가방을 들어주는 일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축에 속한다. 다행히 우리 부부는 맞벌이를 반드시 해야 할 정도로 형편이 어렵지는 않다. 최근 종합소득세 신고를 하며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이지만, 국립대 교수로 ‘열심히’ 살면 지방 대도시 부근에서 큰 부족함 없이 살아갈 정도의 수입은 올릴 수 있다. 부부 중 한 명이 돈벌이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환경은 큰 축복이다. 나는 이 축복을 제 발로 걷어차고 싶지 않다. 어차피 나는 좋아하는 공부를 하며 돈도 받을 수 있는 직업을 운좋게 얻었으니, 내가 건강을 유지하며 본분에 충실한 삶을 살면 아내는 평생 좋아하는 일에만 집중하며 살아도 될 것이다. (마음같아서는 요리도 하고 싶을 때만 했으면 좋겠지만, 요리를 일종의 창작활동으로 여기는 아내에게는 그림이나 피아노연주처럼 요리도 ‘필을 받으면’ 넘치는 에너지로 한상 그득하게 차려내는 대상이 된다) 그래서 겉으로든 속으로든 그녀에게 돈과 관련된 부담을 전혀 지우지 않기 위해 나름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무엇보다 서울에서 맞벌이 회사생활을 하던 시절, 즉 평일이면 저녁에 녹초가 되어 만나 대화도 몇마디 나누지 못하고 지쳐 쓰러지고, 주말이면 쉬기 바빠 근처로 산책 한번 나가기 힘들었던 그 생활로 ‘스스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아내는 미술을 전공했다. 고등학교 기간동안 입시미술을 준비하고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그녀는 생뚱맞게 첫 직장은 일반 경영직으로 들어갔다. 대학 졸업 후 나를 만나 서울을 떠나기 전까지 마케팅과 같은 경영 업무만을 해온 그녀에게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는 환경은 무척 반가웠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고 또 가장 잘하는 일을 마음껏 하기를 바란다. 나는 비로소 원하는 직업을 얻어 꿈을 향해 (조금 늦었지만) 걸어가기 시작했으니, 아내 역시 자신의 꿈을 향해 걸어나갔으면 한다. 그 과정에서 돈을 벌면 기분 좋은 것이고, 돈이 전혀 생기지 않는 일을 한다 하더라도 꿈을 성취할 수 있다면, 혹은 그 꿈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된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단기적인 목표는 전시회를 여는 것이다. 작은 규모의 전시회를 열기에 충분한 개수의 그림을 완성하는 것, 그리고 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쌓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다. 그 과정에서 내가 어떠한 형태로든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큰 영광이고 기쁨일 것이다. 우선 몇 년이 걸리든 꾸준하게 화구가방을 들어줄 수 있는 체력을 유지해야 한다. 아내가 그림을 그리는데 집중하기 위해 다른 집안일을 떠맡는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또 아내가 좋은 영감을 얻기 위해 이곳 저곳을 여행할 수 있도록 충분한 지원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논문도 더 열심히 써야 할 것이다.

후원자로서의 삶에 강한 애착을 보이는 이유는 아내가 타의로 포기해야 했던 ‘꿈’때문이다. 아내는 원래 피아노를 전공하려 했다. 피아노학원을 운영하시던 어머니와 큰어머니를 따라 어린 나이부터 피아노 연주에 대해 재능을 보인 그녀는 착실하게 피아노 영재로 교육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덟살 무렵 동생이 태어나면서 더이상 집중적인 훈련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몇 년 후 동생이 어느 정도 성장한 후 어머니는 다시 아내의 피아노 교육에 집중하려 하셨지만, 약간의 공백도 치명적인 그쪽 세계에서 몇 년의 공백은 이미 더이상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상실을 안겨주었다. 결국 아내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피아노 못지않게 재능이 있었던 그림 쪽으로 목표 전공을 선회했고, 그 결과 미대에 입학하여 나름 치열하게 대학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결국 그 그림조차 구직활동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여 원치 않는 경영 업무로 청년 시절을 흘려보낸 것이다. 나는 그녀의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충분히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고, 또 즐겼을 것이다. (아내의 성격을 감안하면, 맞다, 그녀는 확실히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몸에 잘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처럼 원치 않는 일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던 그녀의 모습 역시 생생하게 기억한다. 철도 씹어 먹을 정도의 왕성한 소화력을 보이는 아내가 역류성 식도염에 걸려 밤마다 헛구역질을 할 정도로 그녀는 원치 않는 일을 할 때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 식도염은 직장을 관둔 뒤 거짓말처럼 완전히 사라졌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이제부터라도 그녀가 가장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나는 그녀가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뒤에서 서포트해주는 일을 맡을 것이다. 어쩌면 내 직업은 그러한 역할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이렇게 후원자로 살아가는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고 보람차다. 재능있는 사람이 그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최적의 환경을 조성해주는 일은, 별다른 재능이 발견되지 않는 일에서 억지로 무언가를 실현해보기 위해 발버둥치는 일보다 훨씬 가치있는 일이다. 어쩌면 나는 전자에 더 재능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untouched by Notre Dame fire

많은 이들에게 조금 불편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최근 빠리의 노틀담 성당에 화재가 발생했다. 많은 빠리 시민들이 애도의 뜻을 표했고, 오바마나 트럼프같은 세계 유명인사들도 노틀담 성당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며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프랑스가 아닌 다른 곳에 살고 있는 세계 시민들도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명소이자 소중한 인류 문화유산 중 하나인 성당의 일부가 소실되었으니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스타그램에는 저마다 개인적으로 간직한 노틀담 성당의 모습을 올리며 이제는 다시 돌아가지 못할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빠리에서 노틀담 성당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 역시 대부분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 그들의 마음을 전적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그다지 마음이 많이 움직이지 않았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만큼 안타까워 하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이유는 나의 경험 때문이다. 나는 빠리가 무척 아름다운 도시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보도블럭 한장까지 도시의 역사로 소중하게 간직하려고 하고 스카이라인을 보존하기 위해 고층건물조차 허락하지 않는 빠리 시민의 완고함을 존중한다. 아침 길거리 공기 위에 스며드는 빵 냄새와 지하철 역사에 울려퍼지는 악사의 음악을 사랑한다. 하지만 몇백년 전에 지어진 웅장한 건축물에 대해서는 경외감보다는 두려움과 역겨움을 느꼈다. ‘역겨움’이라는 표현이 조금 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생제르망 데 프레 성당(Church of Saint-Germain-des-Prés) 앞에서 에서 문자 그대로의 메스꺼움을 느꼈다.

몇백년 전 대성당이 건축되는 과정을 상상해본다. 수천명의 노역이 동원되었다. 대부분 가난한 서민들이었을 것이다. 수십년, 때로는 백년이 넘게 걸리는 건축과정에서(노틀담 성당은 정확하게 100년이 걸렸다)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역사책에 제대로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이들의 노력은 정확하게 평가되지 않았다. 성당이 완성된 후 프랑스 혁명 전까지 일반인은 이 성당에 출입할 수 없었다. 이후에도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치루는 등 여전히 노틀담은 상위계층의 전유물로 남아 있었다. 신에 대한 찬양을 증거하기 위해 지어진 건축물이 성당이다. 그 성당에서 신을 향해 찬양할 수 있는 자격은 계급에 의해 철저히 제한되었다. 당시의 신은 계급주의를 신봉하는 신이었다.

노틀담 성당을 비롯한 많은 중세시대 대형 건축물이 인구의 99%를 차지하는 서민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는 증거는 외부 장식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노틀담 성당의 정문 주변에는 상당히 정교하게 설계되고 조각된 예술품이 도처에 깔려있다. 정문 그 자체도 마찬가지다. 문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품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이 모든 예술적인 장식물은 모두 권위적인 표정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내려보는 듯한 고압적인 태도,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 앞에서 나약한 모습의 인간을 심판하는 절대 권력자이자 권위자로서의 신의 모습, 다양한 형태로 노려보는 듯한 악마와 괴물들의 모습이 성당의 거의 모든 외관을 휘감고 있다. 12사도와 천사의 표정은 이들이 우리 편인지, 혹은 우리를 지배하러 온 이들인지 헷갈릴 정도다. 당시 성당은, 그 앞을 지나다니던 피지배계층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절대적인 신 앞에 복종하라. 단, 당신의 왕과 귀족은 신의 권력을 대신 행사하고 있으니, 왕과 귀족에게도 복종하라. 대충 이런 메시지로 읽힌다. 즉 신과 지배계층의 모습을 일치시킨 것이다. 이런 노틀담 성당이 내 눈에는 전혀 아름답지 않다.

이와 같은 이유로, 나는 노틀담 성당을 비롯한 유럽의 대부분의 대형 건축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99%의 확률로 나의 조상은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를 귀족이라고 생각해본 적 역시 한번도 없다. 지금은 일반 시민들이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변했다고 해도, 그 공간의 역사적 유래는 변하지 않는다. 서양 건축물에 대한 내 불호의 예외가 있다면 프라하에서 확인한 카프카의 생가, 혹은 니스에서 찾아가본 세잔의 아뜰리에 정도일 것이다. 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삶을 살다 간 예술인의 개인적인 공간 정도가 내가 유럽에서 사랑하는 역사적인 공간이다. 그외 대부분의 관광명소에서는 욕지거리가 나올 정도의 폭압적인 권위주의가 읽혀져 더이상 있기 싫어진다. 노틀담 성당이 불탄 것이 경사로운 일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최소한 슬퍼할 일도 아니다.

안아주는 사람

[우리는 안아주는 사람일 뿐]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고 있다. 유기견 센터에서 데려온 개 하나와, 자신의 몸에서 태어난 딸 하나, 이렇게 둘과 함께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다(물론 남편도 있는데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책에는 유기견 센터에 존재하는 ‘뜬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유기견센터의 우리는 배설물을 처리하기 위해 바닥에 구멍을 뚫어놓았기 때문에 그 안에 갇힌 유기견들은 제대로 걷기도, 서있기도 힘든 상태에서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러 오거나, 2주 뒤로 정해진 안락사를 통해 고통을 끝낼 때까지.

몇달 전, ‘강아지 병’에 걸린 아내와 함께 대전의 유기견 센터에 잠시 방문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 때의 경험이 잊혀지지 않는다. 직원의 안내를 따라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격렬하게 우리를 향해 짖어대는 수많은 유기견들의 울음소리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 울음소리는 적대감이나 두려움의 표현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처음 보는 이 사람들이 자신을 지금 당장이라도 데려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이들을 따라 이 고통 속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그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 집단적인 절실함에 압도당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한채 도망치듯 그 곳을 나와야 했다.

이후 우리 부부는 결국 유기견을 데려오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번달에도 임신에 실패했다. 그 결과 우리는 여전히 둘이서 살고 있다. 아이를 갖기를 원하지만 갖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어린아이를 만날 때마다, 교수 휴게실에서 동료, 선배 교수들의 육아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지인들의 아이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너무 고통스럽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밝은 미소로 인사를 하고, 친구나 동료의 육아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위로와 부러움을 건네고, 인스타그램 속에서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에는 늘 like 버튼으로 화답하지만, 그렇게 사회적 활동을 하는 순간 순간마다 나는 너무 고통스럽고 슬프다. 내가 아직 새로운 가족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인지 궁금하고, 삼신할매가 우리 부부를 많이 질투해서 이런 것인지 그녀를 만나 따져 묻고 싶다. 나의 부족함과 못남이 결국 우리 부부를 이 고통 속에 빠트린 것 같아 죄책감에 고개를 들기 힘들 때도 많다. 최근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마음 속의 괴로움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내 삶은 이미 아내만으로 충만하게 채워졌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새로운 가족을 절실히 원하지 않게 만든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절실하게 새 가족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가족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면, 하는 상상만으로 이미 너무나 행복해져서 실제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런 내 모습을 볼 때마다 놀라기도 한다. 단지 상상만으로 그렇게 기분이 좋아지는 일은 흔치 않다. 그 새로운 가족이 개였어도, 혹은 아내의 몸에서 태어날 우리를 닮은 사람이었어도, 우리는 너무나 기쁘고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유기견 센터에서 눈이 마주친 유기견들의 얼굴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동시에 너무나 적막해서 음악이나 TV볼륨같은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집 안의 빈 공간이 내 탓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너무 무겁다. 얼마나 더 절실해져야 하는지, 얼마나 더 절실하게 새로운 가족을 원해야 하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막막하다.

당신이 없는 삶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이다. 전날 밤 우리는 각각 따로 잠자리에 들었다. 제출기한이 코 앞으로 다가온 연구계획서를 마무리하느라 나는 새벽 늦은 시간까지 책상 앞에 붙들려 있어야 했고, 아내는 그런 나를 기다리다 소파에서 잠들어버렸고 이후 침대로 옮겨졌다. 나는 새벽 세시 쯤 늦은 잠을 청했지만 세시간 쯤 뒤 강제로 깨어나야 했다. 아내의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눈물을 곧잘 흘리는 그녀지만 그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무척 슬픈 꿈을 꾼 모양이었다.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채 통곡하는 그녀를 겨우 진정시킨 뒤, 어떤 꿈을 꾸었는지 물었다. 그녀가 잠시 살았던 지난 밤의 꿈에서 나는 이미 죽은 뒤였다고 한다. 고향 친구의 집을 방문하여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이미 죽은 남편’ 생각이 났고,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는 것이 아내가 기억하는 꿈의 내용이었다. 다만 그 아픔의 크기가 너무 커서 실제로 울기 시작했고, 잠에서 깨어난 뒤 자신을 달래는 남편의 얼굴을 보고 잠시 어리둥절했으며, 약간의 적응시간을 거친 뒤 다시 살아난(!) 남편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서야 울음을 그쳤다는 사실이 그녀가 수도 없이 꾸었을 다른 슬픈 꿈과의 극적인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내를 그토록 슬프게 만든 것은 ‘남편이 없는 삶’이었다. 우리는 가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른 편인데, 나는 내 자신의 죽음을 꽤 쉽게 가정하는 반면(“오늘 출근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지, 뭐.”), 아내는 우리 둘 중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하는 편이다(“말이 씨가 된다. 함부로 그렇게 말하지 마라!”). 진지하게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정 반대다. 나는 죽는 것이 두렵고, 죽음 이후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두렵다. 현재의 삶을 충실히 잘 살아낸다고 해도 그에 따른 보상(‘천국’과 같은)이 없다면 지금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과연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아내는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개념을 생각보다 잘 받아들였다. 어린 시절 불교신자였다가 싱가폴 체류 시절에는 개신교 신자가 되었고, 남편을 만난 뒤 천주교로 개종하는 등 화려한 종교적 편력을 가진 그녀였지만, 의외로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은 약한 편이다. 그래서 현재에 집중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지금 당장의 삶을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이 그녀에게는 꽤나 중요한 소명이다. 그런 그녀에게 ‘남편과의 사별’은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가장 좋은 친구이자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는 동반자, 머릿속과 마음속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또다른 나. 그런 존재를 상실하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나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죽음만이 서로를 갈라놓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천주교식 결혼을 한 우리는, 그 문장 안에 스스로를 가둔채 살아가고 있다. 천주교에서는 법적인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대충 짐작해보면 신의 이름으로 허락한 결혼을 인간들끼리 합의하에 무를 수는 없다는 논리같다. 실제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친한 형은 이혼 후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몇년 후 ‘복권’되기는 했지만, 교회법상 형은 그 몇년동안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던 셈이다. 이러한 천주교의 논리가 아내의 눈에는 꽤 신선하게 비추어졌는지, “죽기 전에는 나랑 헤어질 수 없어”라는 말을 꽤 자주 한다. 하지만 그 말의 이면에는 “둘 중 누군가가 죽으면 영원히 혼자가 된다”는 두려움이 깔려있기도 하다. 아내보다 내가 먼저 죽는 것도 두렵고, 나를 두고 아내가 먼저 떠나버리는 것도 두렵다. 나는 아내를 마음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무한히 사랑하지만, 아내와의 동반자살을 택한 프랑스 철학자 앙드레 고르(André Gorz)처럼 아내가 없는 삶을 완전히 포기할 만큼 강단이 있지는 못하다. 아내가 나보다 먼저 죽는다면, 나는 아마 자연이 삶을 허락할 때까지 계속 삶을 이어갈 것이다. 그 혼자된 삶을 상상하면 가슴이 먹먹해져서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을 정도다. 아내를 두고 먼저 떠나는 마음은 또 얼마나 비참하고 죄스러울까. 아빠의 가장 친한 친구 교수님이 돌아가실 때, 아빠와 다른 친구 교수님께 당신의 아내인 여사님을 부탁하며 “아내가 술을 좋아하니 가끔 술을 함께 마셔달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이후 우리 집에서 그분들이 다 함께 모이는 일이 있었는데, 아빠와 다른 친구 교수님이 그렇게 열심히 술을 마시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평소에 술을 잘 드시지 못하는 분들인데, 그날만큼은 미망인이 되신 여사님 앞에서 술잔을 꺾지도 않았다.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답고 슬퍼보였다.

오늘 아내는 하루종일 내 옆에 꼭 붙어 있었다. 잠시 함께 외출을 할 때에는 이미 퉁퉁 부은 두 눈때문인지 유난히 화장에 공을 들이기도 했다. 평소에도 내 옆에 꼭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그 꼭 붙어 있던 오늘의 그녀 모습은 전과는 조금 달라보였다. 전과 같이 맹렬하게 나를 사랑하고 있지만, 꿈 속에서나마 내가 없는 삶을 조금 느껴보았기 때문일까. 전과는 다른 애틋함과 절실함이 조금 더 깊게 느껴진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그릇, 채움, 소비

생존을 유지하는 차원을 넘어서 개인의 효용을 증대시키기 위한 소비행위는 인간을 인간답게 존재케 하는 주요한 특징 중 하나다. 나 역시 소비를 무척 좋아하는 인간으로서 나름의 소비 규칙을 가지고 있다. 거창하게 말하면 ‘플랫폼 소비는 최소화하고 컨텐츠 소비에 집중하자’인데, 간단하게 말하면 한 때의 호기심에 의한 장비류 구매는 최대한 자제하는 것이다. 구매를 극도로 경계하는 제품군이 몇 있는데,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오디오, 시계, 고가의류, 자전거, 등산, 캠핑, 자동차튜닝, 덩치 큰 주방기기(에어프라이나 착즙기같은)…

이것들은 그 자체로 구매자의 효용을 증대시킨다기 보다는, 이걸 이용해서 무언가를 꾸준히 해야 효용이 발생하는 제품들이다. 예를 들어 좋은 오디오는 음악을 계속 들어야 귀가 맑아지는 효과를 느끼고, 자전거도 계속 라이딩을 해야 하고, 착즙기로 매일 쥬스를 갈아 마셔야 행복해진다. 다시 말하면 구매자의 선호도가 변하는 순간 쓸모 없어지는, 고가의 쓰레기로 변질될 확률이 높다. 이런 것들이 소위 ‘플랫폼’에 해당한다. 나의 선호도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나 자신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므로, 불확실성을 굳이 떠안으며 돈을 쓸 이유가 적은 셈이다. 최근 약간의 예외가 있었는데, 아내를 위해 구입한 전자피아노와 나를 위해 구입한 수영복이 그것이다. 피아노는 아내가 즐기지 않으면 값비싼 건조대가 될 위험이 있긴 한데, 다행히 아직까지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 어릴 적 배운 경험을 살려내는 맛이 쏠쏠한가보다. 나는 올해 생존을 위해 수영을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으므로, 아직까지 지치지 않고 열심히 수영을 배우고 있다.

이에 반해, 지출에 있어 거리낌이 없는 몇 제품군이 있다.

책, 영화, 음반(요즘엔 음반을 사지 않고 월정액 스트리밍 상품을 구입한다), 해외스포츠 시청권(MLB, NFL, NBA..), 유니클로 계절 옷, 커피원두, 카페에서의 커피…

대부분 ‘컨텐츠’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확고하게 자리잡은 나의 취향(영화, 음악, 스포츠, 커피 등)을 지속적으로 구입해주는 것은 그릇에 물을 채우는 것과 비슷하다. 나에게 플랫폼은 컨텐츠의 발전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도구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음악을 듣는 과정에서 내 귀가 극도로 민감하게 발달해버렸다면, 그래서 음표 하나 하나, 악기 하나 하나를 분쇄해서 들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티볼리 오디오 시스템은 나에게 역부족일 수 있고, 오디오 시스템의 교체를 고려해볼만 하다. 더이상 책을 꽂을 공간이 없을 때 책장을 사는 것이고, 수영을 마스터하여 수영장에서 더이상 배울 것이 없다면 골프나 다른 운동으로 넘어가기 위해 골프채를 보러 상점으로 나가볼 수 있는 것이다. 섣부른 흥미와 호기심에 의해 장비부터 구입하고 셋업에 집중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지칠 수 있다. 그릇 안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고, 더이상 그릇이 감당하지 못할 때 쯤 그릇을 바꾸는 방식의 소비패턴이 내 삶에 서서히 자리잡고 있다. 결혼 후 돈 모으는 일에 관심이 생기다보니 더 빠르게 자리잡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아내에게 맥북프로를 사달라고 조르고 있는데 잘 먹히지 않고 있다. 그래서 어제 밤 늦게까지 외부연구비 프로포절을 작성했다. 효율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반드시 노트북 구매가 필요합니다! 라고 역설하며.. 아내와 연구재단 중 누가 더 까탈스러운 구매자인지 시험해볼 좋은 기회다.

1월 결산

  • 1월 1일은 남해에서 시작했다. 이동에너지 만땅에 여행에너지는 측정 불가능 수준인 아내의 영향권 아래 산다는 것은, 언제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충만함을 의미한다. 당일 새벽 세시에 출발하여 어두운 고속도로를 긴장감 넘치게 달린 끝에 늦지 않게 남해 해안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퍽 괜찮은 일출을 보면서 소원을 하나 빌었다. 이 가족의 개체수가 증가하게 해달라는. 기복신앙 참 좋아하는 이 나라에 살다보면 소원을 빌 수 있는 기회를 상당히 많이 접하게 되는데 그 때마다 내가 비는 소원은 항상 같다. 아기를 갖는 것에 대한 간절함은 꽤 오래된 것 같다. 부디 지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1월에도 우리는 임신에 실패했다.
  • 남해에서 이틀 정도 머물렀는데, 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생각의 계절’ 민박집 신세를 졌다. 이 블로그와도 얕은 인연을 가진 집이다. 이 곳에 썼던 음악 이야기를 발견한 웹진의 편집장님이 연락을 주셨고, 여자저차한 끝에 그 매체에 블러드 오렌지에 대한 글을 한 편 실을 수 있었다. 아마추어로 남고 싶은 마음에 그 매체와의 인연은 거기에서 끝났고, 당시 편집장님은 “저희 부부는 이제 남해로 가서 민박집합니다~”라는 인사말을 남기시고 홀연히 사라지셨다. 이후 지금까지 그 민박집에 언제 한번 가보나, 마음속으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아내 덕분에 비로소 그 곳에 가게 된 것이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조용했고, 마을은 참 예뻤다. 딱히 아는 척을 하지는 못했는데, 낯가림이 심한 인트로벗의 전형적인 특징이기도 하고, 과거는 과거의 좋은 추억으로 남겨두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 남해에 다녀온 후 베트남 출장까지 논문에 매진했다. 지난 학기는 정말 너무 힘들었는데, 나를 힘들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지 못하게 만드는 각종 행정업무들이었다. 정작 연구와 교육이 가장 중요한 임무인 직업을 가지게 되었는데 역설적으로 그 둘 외의 것들에 신경을 더 많이 써야 하는 구조가 답답했다. 방학만을 기다렸고,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무조건 논문 한 편 쓴다는 다짐 하에 맹렬히 써내려갔다. 한국 경제에 대한 이야기라 한국어로 썼고, 모교에서 운영하는 학술지에 투고했다. 아직 소식이 오지 않았다.
  • 베트남 출장은 이 학교로 온 후 겪은 많은 이상한(weird) 경험 중 거의 탑을 달리지 않을까 싶다. 글로벌 현장학습이라는 이름으로 몇 달 전부터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어쩌구 예산을 확인하고 저쩌구 하며 고생했는데, 내가 이 여행에 동참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학부생 스무명 정도를 데리고 하노이와 하롱 베이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무능하고 무식한 나 때문에 우리과 행정조교 선생님과 그녀의 친구 여행사 직원분이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나는 무식하고 무능한 덕분에 여행사에서 준비한 가이드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3박 4일동안 ‘나는 대체 왜 여기 있는가’를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한가지 얻고 온 것이 있는데, 베트남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남아 국가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이 나라들에 대해 별다른 생각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베트남은 이유 없이 호감을 갖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말도 안될 정도로 혼란스러운 교통문화와 그보다 조금 나은 수준인 질서의식, 서울은 비교도 안될 정도로 혼탁한 하노이의 대기오염 등 내가 싫어하는 모든 요소를 다 가지고 있음에도 싫어할 수가 없었다. 신기한 나라였다.
  • 정신없는 학기와 극적으로 대비되는 방학의 삶은 늦잠과 느린 아침식사로 시작하여 커피와 산책으로 이어졌다. 아내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삶에 늘 감사하고 있다. 이번 겨울은 그리 추운 편이 아니어서 추위를 싫어하는 아내도 그럭저럭 무난하게 보낼 수 있었다. 우리는 항상 늦게 일어났으며, 게으르게 아침식사를 준비해서 천천히 먹었다. 커피는 거의 대부분 직접 내려 마셨으며, 이틀에 한번 꼴로 저녁마다 동네 한바퀴를 돌았다. 아내는 요가와 그림 등 본인이 하고 싶었던 것에 조금 더 매진했으며, 나는 논문 하나를 끝낸 뒤 잠시 풀어져 게으르게 보냈다.
  • 그 와중에 짧은 직장생활 경력에 한줄기 오점(?)을 남기는 이벤트도 있었다. 지연도, 학연도, 그럴듯한 동앗줄도 없이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처럼 묵묵히 시키는 일 열심히 하기’가 거의 유일한 생존방법일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았다. 이런 삶의 가장 큰 부작용이라면 결코 가지고 싶지 않은 ‘명성’이 하나 생긴다는 것인데, 바로 ‘저 친구에겐 어떤 일이든 시켜도 잘 해낼거야’라는 부정확한 집단적 맹신이 그것이다. 이 학교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지 초짜 조교수에게 모든 행정업무가 쏟아져 들어왔고, 이를 더이상 참을 수 없던 나는 공식 회의 자리에서 큰 목소리로(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계속 커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를 줄이면 왠지 지는 것 같아서 그럴 수 없었다) 이에 대해 항의했고, 뒷담화를 즐기는 교수사회의 특성을 고려할 때 아마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찍히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약간의 현자타임이 온 것은 사실이다. 지난 두 번의 이직 경험과 이번 일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다른 직장인들에 비해 ‘분노의 임계치’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사실이다. 분노의 임계치를 통과하면 보통 술을 마시면서 잊는다던가 꾹 참고 다시 웃으며 출근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삶을 이어나가는데, 나는 바로 이직을 준비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고, 이번에는 제발 전의 사례와는 다르기만을 바랄 뿐이다.
  • 2019년 1월은 세종시대 이후 서울을 한번도 방문하지 않은 첫 달로 기억될 것이다.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올라가지 않았다는 것은 상당히 유의미하지 않은가.. 스스로 대견해하고 있다(사실 세미나 참석차 올라가려고 했는데 교수회의에 발목 잡혀서 올라가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세종의 조용한 분위기가 퍽 마음에 든다. ‘문화’가 전무하다는 점은 여전히 치명적으로 다가오지만, 세종시에도 이제 꽤 좋은 커피숍이 몇 들어왔고, 음식은 대부분 집에서 해먹게 되었으니 조금 더 건강해질 뿐 아니라 외식을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세종의 불 꺼진 공실 상가들에 큰 불만은 없다. ‘동네’라고 할만한 정체성이 없다는 점이 제일 뼈아픈데, 아파트만이 존재하는 환경은 필연적으로 삭막한 이웃관계를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사실 이 점은 서울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은 부분이어서 이조차 불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tell me what you live for

교수라는 직업이 기대했던 것보다 매력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두 학기가 채 끝나지 전에 알아버렸다. 하지만 싫증을 느끼고 이직을 알아보던 전과 다르게 나는 이 직업에 계속 머무르려고 한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오늘 상당히 중요한 이유 하나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국립대는 서울에 있는 명문 사립대와 달리 조기교육 및 사교육의 수혜를 듬뿍 받아 예쁜 수능 점수와 아름다운 학생부 기록을 완성한 학생들만이 오는 곳은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비효율성의 고통 속에서도 어떤 공무원들이 조금씩 쌓아올린 다양한 입시전형을 통해 꽤 다양한 배경을 지닌 학생들이 국립대로 진학한다. 그 중에는 집이 가난해서, 부모가 도움을 충분히 주지 못해 서울로 올라가지 못한 이들도 있고,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학업이 더이상 유지되지 못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들 중 정말 똑똑하고 영특한데 공부에 대한 열정까지 뛰어난 학생을 발견할 때에는 말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을 느낀다. 눈물도 나고,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어떤 감정인데, 공무원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는 몇 안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며칠 전 막내 교수로서는 쉽지 않은 시도를 하나 했다. 조금 용기를 내어 의견 하나를 개진했다. 학과에서 책정된 아주 작은 규모의 장학금이 있는데, 면담을 하던 중 사정을 알게 된 한 학생을 추천했다. 오늘 그 학생에게 장학금 혜택이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그 학생 말고도 형편이 어려운 수많은 학생들이 존재한다. 그들 모두를 충분히 도울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에 좌절도 많이 하게 된다. 내 월급을 쪼개서 누군가를 도와준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학생과의 상담 과정에서 어려운 상황을 캐채해내지 못했다면, 그 학생은 아마도 이 적은 금액의 장학금에 대한 존재 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 정도의 행동에 대해 딱 그 정도의 뿌듯함을 느꼈다.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이 공부를 마음껏 했으면 좋겠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국립대 교직원이라면 교육서비스에 대한 관점을 조금 달리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값비싼 사적 재화가 아닌, 누구나 접근 가능한 공공재에 가까운 성격을 지니는 것이 국립대에서의 교육서비스가 되어야 한다. 국립대 도서관에는 지역 시민까지 누구나 들어갈 수 있어야 하고, 국립대 강의는 영상으로 녹화되어 인터넷에 무료로 배포되어야 한다. 교육 기회의 불평등은 계층 간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역사적으로 아주 명확하게 규명되어 있다. 한국의 국립대는 그러한 불평등을 완화시킬 수 있는 몇 안되는 수단 중 하나다. 

그 학생은 아주 명석한 학생이다. 공부도 잘하고 교우관계도 좋고 성격도 좋다. 그 친구가 부디 마음껏 공부했으면 좋겠다. 그런 학생을 가르친다는 것은 선생 입장에서 굉장히 큰 영광이다. 그런 영광스러운 기회를 쉽게 포기할 수 없다. 계속 교수라는 직업에 머무르려는 이유다. 


아빠, 교수

두번째 학기임에도 결코 나아지는 법이 없이 점점 더 바빠져만 간다. 강의 준비와 내 논문 작성에만 시간을 쏟아도 모자랄 판에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계속 튀어나오는 점이 제일 성가시다. 대학원생들의 논문 지도나 학부생들의 진로 상담은 당연한 의무라 생각하지만, 각종 연구사업을 따오기 위해 제안서를 작성하는 일이나 학내외 정치를 위해 동원되는 일은 아무리 적응해보려고 해도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힘이 들어 몸과 마음이 지쳐갈 때 아빠, 아버지 생각이 자주 난다. 그 분은 대체 어떻게 이런 위기를 수도 없이 잘 넘길 수 있었을까? 그 분도 나처럼 힘들었을까?

아주 어린 나이부터 나는 아버지의 직업이 교수, 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 직업이 무엇을 하는 일인지 제대로 알기 전부터 어른들이 물어볼 때마다 또박또박 “교수”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교수라는 직업이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인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익숙해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훨씬 지난 시점부터다. 아버지는 주로 집에서 일을 하셨기 때문에 내 눈에 비친 아버지는 가족으로서의 아버지와 공적인 직업인으로서의 아버지의 이미지가 항상 겹쳐져 있었다. 어머니와 즐겁게 수다를 떨다가도 갑자기 책상 앞에 앉아 한참동안 책만 바라보시던 모습, 마당에서 잡초를 뽑다가 퍼뜩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갑자기 방으로 돌아와 이것저것 찾아보시던 보습, 제자들을 집으로 불러 왁자지껄하게 고기를 구워먹다가 문득 역사 이야기로 빠지면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쉬지 않고 수다를 이어 나가시던 모습. 나에게 아버지는 늘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교수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 두 정체성이 지금도 잘 분리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아는 교수로서의 아버지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은 또 한참 뒤의 일이다. 인터넷이 발달한 세상에서 검색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 분이 그동안 내가 생각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대단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분이 쓰신 책이 한국과 중국 사학계에서 큰 논란을 일으키고, 더 나아가 어떤 유의미한 영향을 지속적으로 끼치게 되었음을 발견했을 때, 나는 자랑스럽고 뿌듯하기 보다는 당혹스럽고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상처를 받지 않았을지 걱정이 되는 마음이 더 컸는데, 이런걸 보면 역시 가족은 가족이지 않나 싶다. 비전공자로서 깊은 수준에서 이해할 수 없는 나는 그저 방관자였을 뿐 결코 큰 힘이 되어드릴 수 없었을텐데, 아버지의 생각에 깊이 동의하는 다른 역사학자들의 지지 선언을 볼 때마다 뭉클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그 분들이 아버지에게 있어 또다른 가족이자 형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젊은 나이에 교수로 임용되어 무사히 정년퇴임하시던 순간까지, 위와 같은 격랑이 한두번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고통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집에서 내색 한번 하지 않으시고 무던하게 그 긴 세월을 넘긴 분의 단단한 마음의 굳기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나는 어제도 아내에게 징징거렸고, 그걸로도 채 만족하지 못해 전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또 징징거렸다. 40년 가까이 교수의 아내로 살아오신 엄마는 “사치스럽다”라는 일침을 날리셨다. 학기중에 바쁜 일이 계속 터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고, 그렇게 바쁜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꾸지람이 나의 정신을 버쩍 들게 했다. 대학원생들의 논문을 읽고 코멘트를 주는 일, 연구실적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지만 한푼의 사업비라도 더 타와서 학부생들에게 좋은 경험 하게 해주는 일,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지식을 활용하여 코멘트를 드리는 일 등등, 내 레쥬메에 기록될 연구실적과 하등 상관없는 많은 임무들이 주변에 산적해 있다. 이걸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저 억울하고 답답할 뿐이다.

나는 아버지처럼 훌륭한 학자가 아니다. 학계의 변방에 억지로 매달려 기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거인은 되지 못한 채 거인의 어깨에 숨어 세상을 바라보는 척 흉내만 내고 있는 셈이다. 남들보다 배로 노력해서 따라잡으려고 해도 뱁새가 다리 찢어지는 격인데, 다른 업무들때문에 공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어서 잠시 가슴이 답답했나보다. 별 시덥지도 않은 가치도 없어보이는 논문을 써서 학회 자리나 채워주려는 시도에 스스로 화가 났나보다. 아버지도 내 나이 때 쯤 비슷한 생각을 하셨을까. 왠지 아닐 것만 같아서, 왠지 그 분은 그 시절에도 분명한 확신을 가지셨을 것만 같아서 한 편으로 분하고 부럽고, 다른 한 편으로 기쁘고 뭉클하다. 학자로서 분하고, 아들로서 기쁘다. 이 두 감정이 쉽게 분리가 되지 않는다.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 내 인생에서 가장 가까이 존재할 때, 그 열패감과 안도감은 결코 지워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만 같다. 아마도 평생 이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