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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 as Seoulite, missing Boulder, and loving wife

박훈정 | 마녀

마녀 포스터
영화를 나보다 훨씬 좋아하는 아내덕분에 예전에는(즉, 아내를 만나기 전에는) 보지 않았을 작품들도 종종 보게 된다. 박훈정 감독의 최근작 [마녀] 역시 이런 연유로 보게 되었다. [신세계]는 채널을 돌리다 발견하면 꼭 끝까지 보게 되는 영화다. 이런 류의 오락영화(즉, 아주 편한 마음으로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영화)로 [본] 시리즈가 있는데, 잘 만든 오락영화는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는 좋은 미덕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영화를 만든 박훈정 감독의 근작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사실 박훈정의 능력 중 상당 부분이 과거 명작의 장점을 매끄럽게 베낀다는 데에 기대고 있었으니, 그가 창의적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이라고 예상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스타파워나 대기업 자본에 기대지 않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만든 [마녀]는 [신세계]에서 보여준 장기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작품이다. B급 영화에서 만날 수 있을 법한 서사구조와 클리셰들이 판치는 가운데 한국영화 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소녀 히어로, 혹은 안티-히어로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미 어느정도의 성취를 이룬 셈이다. 영화적으로 많은 단점들이 존재하기에 결코 단단한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는 작품이지만, 어디선가 베낀듯한 요소들을 잘 버무려 이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아우라를 만들어냈다는 점도 칭찬할 만 하다. 주연 배우 김다미는 박훈정의 그러한 어설픈 작가주의를 거의 완벽하게 드러내는 페르소나로 손색이 없다. 어색한 듯한 표정과 몸짓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Mitski | Be the Cowboy

mitski
미츠키(Mitski)의 네번째 정규 음반이자 그녀의 이름을 전세계 음악팬들에게 각인시킨 2016년작  [Puberty 2]는 분명 그 해 발매된 음반 중 가장 손꼽히는 작품이었지만, 나는 선뜻 그 해 가장 뛰어난 음반이었다고 말하기를 주저했다. 이건 전적으로 내가 그녀와 비슷한 지역성(locality)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다. 즉, 나의 입장에서 그녀와 그녀의 음악을 어떤 범주에 넣을지(categorize) 지나치게 고민한 것 같다. “Your Best American Girl”같은 곡은 디아스포라(diaspora) 음악으로 볼 수도 있고 그냥 가벼운 인디-아이돌 팝넘버로 볼 수도 있었다. 음반 전체적으로는 아주 좋은 로-파이 음악으로 볼 수도 있었지만 여성성(femininity)과 경계인으로서의 삶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문학작품으로 해석할 여지도 다분했다. 그녀의 음악이 가진 다층적인 구조때문에 음악을 음악 자체로 100% 즐기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많은 기대 속에 올해 발매된 다섯번째 음반 [Be the Cowboy]는 그녀의 음악적 세계관이 한층 넓어지고 깊어졌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전작의 어디에선가 형식적으로 ‘아마추어적’으로 느껴지는 지점이 있었다면, 이번 음반에서 그러한 걱정이 말끔히 사라지는 지점 또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 로-파이 음악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껴안는 기존의 색채는 전체적으로 유지하되 디스코, 신스팝, 흑인음악 등 다양한 장르로 예쁘게 치장했다. 80년대, 때로는 6,70년대 스탠다드 팝 넘버의 영향력까지 느껴지는 곡들이 존재한다. 덕분에 음악은 훨씬 말끔한 옷을 입었고 다양성까지 획득했다. 미츠키가 들려주는 이야기들도 전작 [Puberty 2]의 연장선상에서 그 주제를 조금씩 확대한 느낌이다. 음반의 제목은 [Be the Cowboy]이지만, 그 어떤 노래에서도 카우보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다만 미국의 한복판에서 아시아-여성-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녀가 전달하는 삶의 파편들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미츠키가 이번 음반에서 획득한 이러한 형식적, 내용적인 측면에서의 발전된 모습은 첫곡 “Geyser”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이 곡 하나만으로 이미 “Your Best American Girl”의 무게감을 넘어선 것 같다. 이 외에도 “Nobody”에서는 전작에서 느낄 수 없었던 미츠키의 클래식한 매력을 확인할 수 있고, “Why didn’t You Stop Me?”, “Two Slow Dancers”와 같은 좋은 곡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34분 남짓한 짧은 러닝타임이 음악의 감상을 방해하는 유일한 요소인데, 스트리밍 서비스의 확산 등 음악 산업이 변화하면서 정규 음반(“Full-length” album)의 정의와 개념도 서서히 변화하는 시점이니 만큼 이 것이 절대적인 흠은 되지 못할 것 같다.

Serpentwithfeet | Soil

soil
음반 자켓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이 음반을 구매하게 된 첫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본능적으로 느낀 범상치 않음은 음반을 반복해서 재생시킬수록 확신으로 바뀌어갔다. 뉴욕 출신 음악가 조시아 와이즈(Josiah Wise)가 세크리틀리 캐내디안(Secretly Canadian) 음반사와 손잡고 내놓은 첫번째 음반이자 메이저에서 발표한 첫번째 정규음반 [Soil]은 R&B와 찬송가, 클래식과 소울음악, 전자음악 등이 묘한 분위기로 뒤섞여있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혼란스러움 속에서 기묘한 질서를 이루고 있는 느낌이다. 진성과 가성을 오가는 와이즈의 보컬은 가스펠 코러스와 어울려 그만의 독특한 아우라를 뽐내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음악은 흑인음악과 클래식이라는 양 극단(?)이 전자음악과 만나 요즘말로 ‘힙’한 색채를 한껏 드러낸다.

조시아 와이즈의 성장배경은 설펀트위드핏(Serpentwithfeet)의 음악세계를 이해하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될 것 같다. 와이즈는 뉴욕의 유복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클래식을 배우기 시작했고, 필라델피아의 음악전문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대학원 입시에서 낙방한 후 빠리와 필라델피아 등을 여행하다 필라델피아의 네오-소울 씬에 정착했고, 2013년 뉴욕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음악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2014년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샘플링하여 자신의 보컬을 입힌 “Curiosity of Other Man”을 발표했는데, 이 곡에는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아프리칸-어메리칸 동성애자라는 정체성과 클래식을 전공한 소울 뮤지션이라는 정체성을 모두 내포하고 있는 상징적인 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2015년 설펀트위드핏의 이름으로 발표한 데뷔 EP [Blisters]가 나왔고, 뷰욕(Bjork), 타이 달라 사인(Ty Dolla $ign) 등을 그의 팬으로 만들었다. 어쩌면 그의 데뷔작은 예견된 성공을 담보로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음악은 깊은 내적 성찰을 바탕으로 하는 소울 계열 음악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한다. 무대이름인 ‘Serpent with Feet’도 기독교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는 다리 달린 뱀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종교적이다.  그는 거의 모든 노래에서 사회의 통념과 배치되는 자신의 본능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자로 태어나 남자를 사랑하는 가운데 겪은 내적인 갈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의 의지를 아름다운 목소리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프랭크 오션(Frank Ocean)과 맞닿아 있는 부분도 발견된다. 와이즈 본인은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예술가로 브랜디(Brandy), 뷰욕(Bjork), 클래식 작곡가 드보르작(Antonin Dvorak), 그리고 소설가인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 등을 꼽았는데, [Soil]을 듣다보면 도저히 하나로 합쳐질 것 같지 않은 위의 예술가들이 설펀트위드핏의 음악 안에 고스란히 녹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올해 들었던 가장 신선한 음악이었다.

윤종빈 | 공작

공작 포스터
[용서받지 못한 자] 이후 윤종빈 감독의 작품 중 딱히 마음에 든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그가 본격적으로 블록버스터 영화만 찍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흥미도 거의 완전히 식어버렸다고 할 수 있고, [군도]나 [범죄와의 전쟁]에서 구시대적이고 남성주의적인 시각이 여전히 발견되는 것을 보고 그가 한계를 극복해나가며 성장하는 감독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만 강해졌다. [공작] 역시 그리 인상깊게 본 영화는 아니다. 여전히 남성중심적인데 심지어 등장하는 배우가 황정민이나 조진웅같은 사람들이다. 내 아버지보다 더 자주 만나게 되는 황정민같은 배우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영화를 보며 식상함을 느끼지 않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서사구조 역시 단순하다. 차라리 이 영화로 인해 새롭게 조명받게 된 실존인물의 실제 생애가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이 영화가 가진 미덕을 두 개 쯤 꼽아보라면 하나는 영화적으로 편집이 무척 잘 되어 있어서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 속 북한사회의 모습을 꽤나 그럴듯 하게, 다른 말로 하면 영화를 보는 일반 관객이 상상하는 그 모습 그대로 잘 형상화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실제 북한사회가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할 방법이 당장은 없다. 그러니 관객이 대충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부분만 잘 끄집어내어 돈을 처발처발하면 그럴듯한 그림이 나오는 것 같다. 이제 정말 당분간 황정민이 나오는 영화는 보고 싶지 않다.

Natalie Prass | The Future and the Past

natalie prass
올해 날씨가 조금 더워지기 시작한 이후 최근까지 가장 즐겨 들었던 여성 보컬리스트 음반은 단연코 나탈리 프래스(Natalie Prass)의 새 음반 [The Future and the Past]였다. 파이스트(Feist)나 샬롯 갱스부르(Charlotte Gainsbourg)같은 인디 감성의 여성 팝보컬리스트의 음악을 꽤 좋아하는 편인데(취향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정도다), 이런 일군의 여성 아티스트들의 최근작들을 들으며 성에 차지 않는 아쉬움을 꽤 크게 느꼈다. 올해는 ‘이들도 역시 늙어가는 것인가’라는 슬픔에 빠질 무렵 ‘다음 세대’ 여성 아티스트들이 꽤 많이 등장한 해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 같다. US 걸스(US Girls), 사커 미미(Soccer Mommy), 스네일 메일(Snail Mail)처럼 로-파이 록음악에 기반을 둔 아티스트들의 음악도 정말 좋았지만, 팝에 기반을 둔 나탈리 프래스의 두번째 음반만큼 감성적으로 자극적이고 상쾌한 작품은 올해 아직 없었던 것 같다.

나탈리 프래스는 2015년 동명의 데뷔음반에서 그녀의 배경(남부 버지니아 출신, 멤피스에서 음악을 배우고 제니 루이스(Jenny Lewis)의 투어링 밴드 멤버로 참여한 경력 등등)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미국 남부의 정서를 한껏 드러내고도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을 뿐 아니라 힙하고 트렌디한 팝의 느낌또한 잘 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한껏 묻어난 수작이었다. 두번째 음반 [The Future and the Past]에서는 보다 담대한 그녀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이 음반에서 그녀는 트럼프 시대 이후 미국에서 여성이 살아가는 법, 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대해 훅이 넘치는 팝넘버와 위트 있는 가사를 통해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다. 형식적으로도 훨씬 단단해졌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볍지만 그래서 더 수월하게 전달될 수 있다. 80년대 디스코와 90년대 시스팝 등을 환기시키는 복고풍의 사운드는 통통 튀는 멜로디와 합쳐져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진다. 익숙한 것들을 섞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훨씬 단단해진 느낌이다. 그녀의 음악적 경력이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확신을 갖게 만드는 음반이다.

Kamasi Washington | Heaven and Earth

Kamasi Washington_ Heaven and Earth
카마시 워싱턴의 전작 [The Epic]에서 특히 좋았던 부분은 그가 드뷔시를 해석하는 방식이었다. 드뷔시의 피아노 연주곡을 꽤 많이 좋아하는 편인데, [The Epic]에서 카마시 워싱턴이 연주한 “Clair de Lune”은 최근 들었던 그 어떤 드뷔시 연주보다 따뜻한 온도와 농밀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무려 세 장으로 구성된 이 괴물같은 데뷔 음반을 2015년에 발표한 1981년생의(얼굴로 사람 판단하지 맙시다) LA 출신 재즈 색소포니스트가 3년만에 [Heaven and Earth]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청자의 귀를 조금 고려해주었는지 다행히(?) 두 장짜리 음반이다. 한 장은 “Heaven”, 다른 한 장은 “Earth”에 대한 음악으로 구성되어 있다. 재즈라는 하나의 장르에 가둬둘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장르에 대한 편식없는 소화능력을 이번 음반에서도 유감없이 보여준다. 허비 행콕부터 켄드릭 라마까지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와 협연한 경력이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새 음반에서 눈에 띄는 점이라면 음악적으로 조금 더 풍부해졌다는 것이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라는 기본 바탕에 네 명으로 구성된 보컬 그룹과 열 명 남짓한 중창단이 더해졌다. 악기의 수가 늘어난 만큼 이를 통제하는 지휘자의 역할도 중요할텐데, 카마시 워싱턴은 능숙한 솜씨로 이 메인 쉐프의 역할을 단단하게 성취해낸다. 전작에 비해 눈에 띄는 또다른 점이라면 서사의 확장을 들 수 있다. “Heaven”을 지나 “Earth”로 가는 길을 따라 걷다보면 워싱턴이 깔아놓은 다양한 풍경들을 어깨 너머로 구경할 수 있다. 가사로 구구절절히 서사를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가 조절하는 음악의 호흡과 리듬만으로 충분한 서사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압도적이고 황홀한 체험을 지루하지 않게 긴 시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은 단지 재능이 넘치는 뮤지션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아주 짧은 기간동안만 가능한 빛나는 절정이다. 스포츠 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폼”이라는 단어를 여기에서 사용할 수 있을까. 음악을 스포츠 경기에 비유하자면 요즘 “폼”이 가장 좋은 선수는 카마시 워싱턴이 아닐까 싶다.

알레산드로 보파 |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비스코치브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는 흥미로운 우화(寓話)집이다. 스무편의 짤막한 이야기가 모여있는데, 모든 단편의 주인공 수컷의 이름은 비스코비츠로 통일되어 있다. 비스코비츠는 전갈로 태어나기도 하고 쇠똥구리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각각의 삶에서 비스코비츠는 종(種)의 특성과 본능에 충실하지만, 그안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며 인간 세상을 거울처럼 비추기도 한다. 그 거울 안에는 한 치 앞의 인생도 알지 못하면서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마냥 떠들어대는 인간의 나약함과 자만심이 동물의 모습으로 현현하여 독자를 비추고 있다. 야생의 동물들을 한없이 가여운 존재, 혹은 본능에 충실한 단순한 존재로 바라보는 인간 역시 그 한계와 나약함이 다른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작가는 각각의 동물이 가지는 주요한 특성을 과학적으로 친절하게 설명하며 어렵지 않게 전달한다.

생물학자로 평생을 살다 염증을 느끼던 와중 폭등한 주식가격을 핑계로 긴 휴가를 떠난 저자 알레산드로 보파는 친구들에게 들려주던 짤막한 이야기들을 묶어 이 책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가 전달하는 동물의 삶에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도 있고(뻐꾸기의 산란 행태같은 것들)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는데(해면동물의 생식과정 등) 사실 그러한 생물학적 상식의 전달 유무가 이 책을 읽는데 그리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오히려 짧은 길이의 스무편의 단편에(어떤 단편은 한국어 번역본 기준으로 두 쪽을 넘지 못한다) 서-본-결 구조가 단단하게 짜인 재미있는 서사가 완성된다는 점이 놀랍게 다가온다. 각각의 단편이 가진 특성도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읽는 내내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다. 타고난 이야기꾼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소득주도 성장론이 그렇게 욕 먹을 일인가

요즘 나라가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현 정부의 첫번째 위기가 온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최근 발표된 7월 ‘고용 쇼크’ 자료를 바탕으로 언론과 야당은 집중포화를 퍼붓고 있고, 이로 말미암아 대통령과 청와대에 대한 지지도는 취임 후 최저치를 연일 갱신하고 있다. 북한과의 관계가 개선이 되든 말든, 결국 필부필부의 최대 관심사는 먹고 사는 문제에 집중될 수 밖에 없다. 막연히 추측만 할 수 있었던 사안이 숫자로 뚜렷하게 제시되는 순간 자신의 추정이 객관적으로 증명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고, 이러한 확신은 눈과 귀를 조금 더 닫히게 만들고 주장하는 목소리에는 힘을 실어준다. 사실 숫자가 나온 순간부터 본격적인 검증과 고민이 시작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현 정부의 정책 중 요즘 가장 큰 비판을 받는 부분은 소위 소득주도 성장론이라고 부르는, 대통령 취임 후 주요한 경제정책으로 추진되어온 성장방식이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그 이름도 생소한 방식의 경제 성장론이기 때문에 도입 당시부터 말이 많았고, 많은 경제학자와 정책 전문가들이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명한 정책적 방법론이기도 하다. 현재 이 소득주도 성장론을 기반으로 행해진 주요한 정책으로 크게 세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최저임금의 가파른 인상,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 그리고 재정정책의 확대를 통한 보조금 지급이 그것이다.

이 중 최저임금 인상이 가장 큰 저항에 부딪힌 것처럼 보인다. 비판의 근거는 크게 세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자영업이라는 제3의 영역을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은 정책이라는 비판이다. 최저임금의 직접적인 영향은 대부분 일용 근로자(1개월 미만의 일일 단위 계약 노동자), 혹은 임시 근로자(1개월 이상 1년 미안의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에게 돌아간다. 최저임금이 빠르게 상승하면 이들 일용 근로자, 혹은 임시 근로자를 고용하는 영세한 자영업자의 비용이 상승하여 고용률이 오히려 하락하고 영세 자영업자의 파산 확률을 높일 수 있다. 최저임금에 대한 비판의 두번째 근거는 내부자-외부자 이론 등에 근거한 실업률 상승에 대한 기여도 부분이다. 즉 비판자들은 최저임금의 상승은 기 고용된 근로자의 임금을 증가시켜주는 역할을 하지만, 구직자에 대한 진입장벽을 높여 실업률을 오히려 상승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판의 세번째 근거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현재의 어려운 경제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이라는 주장이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이 1%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수출에 비해 내수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경제상황에서 최저임금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도,소매업 및 숙박, 판매업 등의 경제지표를 세밀히 관찰하지 않고 노동계측의 의견만을 받아들여 인상의 폭을 적절히 조절하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세 비판 모두 일견 타당한 논거를 가지고 있지만, 최저임금만이 최근 고용 쇼크의 유일한 근거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 또한 희박해보인다. 먼저 내수 시장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는 특정 산업 내 존재하는 가격 경직성을 고려해야 한다. 코인 노래방을 생각해보자. 한 곡 당 보통 500원의 요금을 받는다. 임대료가 비싼 곳은 1,000원을 받을 수도 있다. 어쨌든, 한 곡 당 500원을 받는 가게에서 최저임금이 인상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요금을 한 곡 당 1,000원으로 인상할 수는 없다. ‘메뉴 비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게 주인은 근처 노래방 가격은 물론, 코인 노래방과 전혀 상관없는 분야의 가격들이 일반적으로 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가격에 대한 소비자의 저항심리를 최소화시키며 기존 고객을 계속 유치할 수 있다. 최저임금의 부정적 충격을 상쇄할 정도의 가격인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어느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셈이다. 이 가격 상승은 당연히 최저임금 인상의 혜택을 보는 근로소득자의 소비 증가를 필요로 한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해 내수가 살아나고, 살아난 내수를 기반으로 가격이 상승하여 국가 전체적인 소비자물가상승률로 이어지는 선순환구조(이게 소득주도 성장론의 핵심이다)를 확인할 때까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현재는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다음으로, 경기변동 상 국면전환과 최저임금 인상 중 어느 쪽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구분해야 한다. 현재 한국의 경기흐름이 호황기에서 침체기로 전환되고 있다는 신호를 여러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정 대기업의 특정 수출품목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제구조는 그 자체로 큰 리스크를 안고 있는데, 올해 하반기부터 그 특정 품목의 경기조차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소비자물가에서는 올해 들어 지속적으로 수요측면의 상승압력을 발견할 수 없다. 미국과 중국, 유로존 간 통상마찰로 인해 신흥국의 ‘발작(tantrum)’이 발생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와 터키가 무너지고 있는데, 이정도 덩치의 국가들의 화폐가치가 폭락하는 현상은 가벼운 감기 정도로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기준금리 인상기조를 이어가고 있지만 한국은 금리 동조화를 시킬 수 없을 정도로 국내경기가 살아나지 않고 있다. 내외부에서 진퇴양난에 빠져있는 형국이다. 즉, 이미 한국의 경기가 올해 초부터 침체국면으로 접어들었다면, 고용에 영향을 주는 주된 요인은 최저임금이라기 보다는 경기변동 그 자체일 가능성이 있다. 경기가 좋지 않으면 고용이 되지 않는다. 물론 최저임금이 복합적으로 고용에 악영향을 주었다는 추정조차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저임금의 가파른 인상이 마치 영세 자영업자에게 내려진 사형선고 마냥 절대악으로 비춰지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일 가능성이 높다.

최저임금은 소득의 인위적 성장을 통해 성장을 꾀하는 경제정책이라기보다는, 한국사회의 ‘최저 생계 기준’을 상징적으로 설정함으로써 서민의 삶의 질을 최소한으로 보호하려는 사회복지정책에 가까운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즉, 현 정부는 경제와는 별개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는 최소한의 철학을 가지고 있고, 이를 ‘숫자’로 확실하게 보장해주려는 정책적 움직임이 최저임금의 가파른 인상으로 현실화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주 52시간 근무제도 마찬가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최저임금과 주 52시간 근무제는 국가 경제활동이라는 게임의 방향을 결정짓는 결과론적 평등주의 정책이라기 보다는 게임의 규칙을 재설정하는 쪽에 가깝다. 이제 모든 플레이어는 새로운 게임의 규칙 아래에서 ‘이익의 극대화’라는 목표를 다시 찾아나서야 한다. 기업은 근로자의 최저임금과 최대근무시간을 보장해주는 한도 내에서 이익을 최대화시키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컴퓨터를 끄고 근무를 시키거나 최저임금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는 장기적인 이익 극대화를 성취할 수 없다. 당장은 힘들어지겠지만, 장기적으로 더 나은 기술을 발전시키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게 생산성 향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국가 경쟁력 확보의 원천이다.

결국 소득주도 성장론에 기반한 위의 두 정책은 현 정부의 경제정책 중 다른 한 축인 ‘혁신성장론’으로 귀결된다.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던져 주었으니, 그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더 나은 기술을 만들어내자는게 혁신성장론이다. 기업들에게 더 높은 경쟁력을 요구하되, ‘더 높은 경쟁력’은 ‘인건비 절감’이 아닌 ‘생산성 증가’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혁신성장론의 핵심 논리다. 정부는 이를 위해 생산성 향상을 저해하는 각종 규제를 철폐하고 재정정책을 통해 지속적인 기술 및 생태계 혁신을 지원해야 한다. 이제 관건은 과연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국가 경쟁력 확보를 효율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있느냐이다. 만약 한국의 최근 경제상황을 소득주도 성장론과 결부시켜 비판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비판의 초점을 재정정책 쪽에 맞추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소득주도 성장론을 기반으로 한 약 세 개의 주된 정책 중 가장 비효율적으로, 철학 없이 진행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재정정책을 통한 보조금 지급이기 때문이다. 이 보조급 지급은 ‘원 샷’ 정책에 가까워보인다. 당장 취업을 하지 못한 청년 구직자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 중장기적으로 얼마나 많은 부가가치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 0에 가깝다. 그들은 용돈 등 생계비로 이 보조금을 사용할 것이고, 그렇게 세금은 허공으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최저 생계비 수준에 머물고 있는 노인들에게 지급하는 보조금도 마찬가지다. 어르신들 용돈 챙겨드리는 정도일 뿐, 이들이 이 돈을 생산적으로 다른 일에 쓸 확률은 0에 가깝다. 중소기업에 지급하는 고용 보조금도 2년, 혹은 4년 내의 단기적인 고용효과만이 있을 뿐 장기적으로 중소기업이 고용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렇게 낭비되는 세금은 중소기업의 기술 혁신, 혹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존재하는 비합리적인 하청 관계를 청산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스타트업 기업이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지원을 함으로써 젊은 기업가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보다 창의적인 모험에 뛰어들도록 유도해야 한다. 대학이 단기 실적에 얽메이거나 연구비 수주에 목메지 않고 연구실 안에서 고유한 원천기술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충분한 여유를 확보해주어야 한다. 일개 기업이 수출확로를 뚫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국가가 나서서 큰 판에서 해결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확대 재정정책, 혹은 재정적자 정책이다.

결국, 현 정부의 가장 큰 패착은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이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최저임금 인상은 현 정부의 철학을 대표하는 주요한 정책으로 포기하지 말고 추진해야 한다. 단기적으로 최저임금 인상을 감당해내지 못하는 한계 기업이 있다면 이들을 억지로 되살려 ‘좀비 기업’으로 만들지 말고, 재빠르게 청산하고 업종 전환을 할 수 있도록 재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이 합리적이다. 주 52시간 근무제는 근로자가 최소한으로 누려야 하는 인간다움을 보장해주는 제도이기 때문에 이 역시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퇴근 후 극장에 가고 차 한잔을 마실 수 있는 여유 정도는 근로자가 누려야 하는 당연한 삶의 질이다. 오히려 이 제도를 편법적으로 악용하려 하는 일부 기업을 보다 강력하게 단속하여 그 어떤 상황에서도 더이상 일을 시킬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정부는 근로자에게 더 높은 임금을 주고 더 적게 부려 먹어야 해서 울상을 짓는 기업을 도울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많다는 것을 신속하게 깨달아야 한다. 현재 한국의 세수는 역대 최고 수준이다. 이렇게 국고로 흘러 들어오는 세수를 효율적으로 쓰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재정적자를 실현하되,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실시되어야 하지, 이 세금을 고용창출이나 보조금 지급 등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낭비해서는 안된다. 이건 게임의 방향을 정부가 정해버리겠다는 말과 다름 없는 것으로, 오히려 시장에 좋지 않은 신호를 줄 수 있다. 일한 만큼 월급을 주고 받되, 일하는 시간만큼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해보자, 라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책상에 앉는 순간 일에만 집중하되, 정해진 시간 외에는 업무에 대해서는 언급 조차 하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의 노동 생산성은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에 속한다. 전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한다는 한국인의 명성이 무색해지는 지표 중 하나다. 어쩌면 우리가 ‘근면성실함’이라는 자부심에 취해서 현실을 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월급루팡’이 더이상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의 상징이 되는 날이 온다면, 한국의 생산성도 다시 세계적 수준으로 회복될 수 있을 것이고, 경제성장률도 3%대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며, 한국의 경제상황도 빠르게 호황기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Snail Mail | Lush

snail mail
최근 음악 일기가 많이 밀렸다. 좋은 음악은 끊임없이 듣고 있는데, 그 감상을 차분히 글로 풀어내는 일은 항상 해야할 일들 중 우선 순위가 가장 뒤로 밀리게 된다. 물론 나의 게으름 외에 다른 이유를 가져다 붙이기에 민망한 일이지만, 어찌 되었든 이 블로그에 기록하지 못한 좋은 음반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픈 것도 사실이다.

밀린 일기를 해소해야 할 때 주로 하게 되는 고민은 ‘무엇부터 쓸 것인가?’이다. 나는 보통 가장 좋게 들었던 음악부터 적어나간다. 최근 몇 달 사이에 가장 감명깊게 들었던 음반은 만 18세의 여성 싱어송라이터가 발매한 데뷔 음반, [Lush]였다. 스네일 메일(Snail Mail)이라는 무대명을 가진 린지 조던(Lindsey Jordan)은 2018년 볼티모어 교외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마타도어(Matador) 음반사와 계약을 맺고 데뷔 음반 [Lush]를 발매했다. 이 음반은 올 해 가장 인상깊은 데뷔 음반으로 기록될 것이 확실하며,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올해의 음반으로 칭송받을 것이다. 최근 사커 마미(Soccer Mommy)나 US 걸스(US Girls) 등 미국 로 파이(Lo-Fi)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젊은 뮤지션들이 주목받고 있는데, 스네일 메일은 이러한 흐름의 끝판왕격으로 등장한 충격적인 신예 뮤지션이다.

5살 때부터 기타를 잡기 시작했다고 하며, 십대 시절 가족과 함께 파라모어(Paramore)와 피오나 애플의 공연을 본 이후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하며 두 장의 EP를 발매했다. (볼티모어 교외에 살던 린지 조던은 워싱턴DC의 NPR 사무실에서 열린 파라모어의 Tiny Desk 공연을 직접 가서 관람했고,  이후 2017년 본인이 직접 Tiny Desk에서 공연을 하게 된다) 인터뷰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음반으로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의 [Loaded] 음반을 언급하는 이 뮤지션은 결코 애늙은이처럼 90년대 음악을 답습하지 않는다. [Lush]는 십대의 펄떡거리는 정서가 날것 그대로 담겨 있다. 학교와 가족, 사랑과 이별, 우정 등 십대 시절 경험하게 되는 여러가지 성장통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이 음반은 그렇다고 여느 십대 갤러지 밴드의 음악들처럼 아마추어적이지도 않다. 그녀는 이미 뛰어난 기타리스트이며, 아주 뛰어난 작곡가이자 작사가이다. “Pristine”, “Heat Wave”, “Stick”같은 노래를 들어보면 도저히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탄탄하고 쫀득한 구성과 훅을 가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음반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은 “Full Control”인데, 90년대 로 파이 음악에 대한 애정이 진득하게 느껴지면서도 스네일 메일만이 가지고 있는 폭발적인 정서가 형식적으로 잘 구현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나른하고, 또 가끔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이 시절의 정서가 감각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표현되어 있다.

요즘 힙합 음악이 대세인 것은 아마도 힙합이 가진 뛰어난 서사 전달 능력이 한 목 하지 않았나 싶다. 우리가 흔히 스토리텔링이라고 부르는 힙합 음악의 서사 전달 기능은 최근 록음악으로도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Lyrical Rock’이라고 불리는 이 장르에서 성공한 뮤지션으로는 최근의 코트니 바넷(Courtney Barnett) 정도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고, 그 이전에는 아마도 홀드 스테디(Hold Steady)가 어느 정도의 기반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스네일 메일은 대중음악에서 왜 가사가 여전히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자, 가사와 음악이 어우러지는 음악적 공간(soundscape)이 어떻게 더 진화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 그 자체이기도 하다. 10월 3일 내한공연을 가진다고 한다. 김밥레코즈가 주관하는 내한공연은 러닝타임이 지나치게 짧고 구성이 지나치게 단촐하다는 공통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데뷔 음반을 이제 막 발매한, 로 파이를 기반으로 하는 뮤지션의 공연은 김밥 레코즈와 함께 해도 관중 입장에서 별로 잃을 것이 없어보인다. 꼭 가서 볼 생각이다.

극단적 여성중심주의를 반대하는 이유

최근 기성 언론을 통해 보도된 ‘워마드’를 중심으로 한 두세개의 사건들이 내 관심을 끌었다. 하나는 가톨릭 성체 훼손 사건이었고, 또다른 하나는 지하철 남성 조롱 사건이었으며, 마지막 하나는 현직 대통령을 향해 “재기하라”고 발언한 사건이었다. “이게 ‘사건’ 정도나 되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요즘 한국사회의 한 단면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발생한 일련의 일들이 꽤나 상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워마드’가 어떤 곳인지는 해당 사이트를 여러 차례 방문해 관찰했기에 잘 알고 있다. ‘워마드’ 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정체성과 문화를 공유하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다수 존재하고, 최근 혜화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시위의 중요한 일원으로 이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이들이 인터넷 밖으로 나와 본격적으로 현실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여러가지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현재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과 ‘워마드’가 어떤 관계로 엮여 있는지 보다 분명하게 정리하고 가야하지 않을까 싶다.

우선 한국사회에서 사용하는 ‘페미니즘’이라는 용어 자체가 올바르게 정의내려지지도 않고 있으며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하나의 공통적인 가치로 공유되지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시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극단주의 페미니즘(radical Feminism)만을 뜻하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는 반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유주의적 페미니즘(liberal Feminism)까지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누군가에게는 페미니즘이 하나의 ‘운동’이라면, 다른 누군가에게 페미니즘은 ‘학문’의 영역에서 이해된다. 누군가에게는 페미니즘이 양성 평등을 위한 이데올로기라면, 다른 누군가에게 페미니즘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저항운동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나는 페미니즘이 “공부”를 해야만 받아들일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주장하는 순간 교조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고 페미니즘이 “믿음”의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충분한 논거가 뒷받침되지 않은 운동은 우스꽝스러워지기 쉽상이다. 중요한 점은 페미니즘이 사회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 사회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회 안에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페미니즘을 사회과학(social science)의 범주 안에 포함시키는지의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다. 페미니즘의 태동 자체가 사회와 떼어놓을 수 없었고, 지금까지 사회의 ‘질서’와 유기적인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며 성장해온 이데올로기이며, 이 사상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 역시 사회의 ‘질서’ – 를 수정하든, 재정의내리든 – 라는 개념 안에서만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나는 ‘워마드’가 여성우월주의, 혹은 극단적 여성중심주의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단체라고 생각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박근혜를 지지하고 남성이라는 이유로 현직 대통령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행위가 한 집단의 공통적인 입장으로 자리매김한다면 이건 더이상 개인의 장난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현상이 아니다. 이들의 원동력은 ‘혐오’에 기반하고 있다. 남성과 관련된, 남성이 포함된 거의 모든 집단을 향한 무차별적인 혐오. 현재 ‘워마드’가 가진 중요한 정서적 기반인 이 ‘혐오’의 집단화가 사회에 끼치는 해악은 그 어떠한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일베’로부터 현현하기 시작한 혐오와 편가르기의 정서는 ‘워마드’로 인해 특정 정치 세력의 차원에서 성별의 문제로 진화했다. 개인이 소신을 가지고 선택하는 정치성향과 달리 태어날 때 상당 부분이 결정되는 성 정체성을 혐오의 재료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워마드’의 현재 위치는 매우 서글프고 안타깝다.

‘워마드’의 구성원들이 자신을 페미니즘의 한 분파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큰 오류라고 할 수 있다. 페미니즘은 ‘워마드’가 해오는 방식처럼 편을 가르고 상대방을 혐오하고 깔아뭉개는 방식으로 발전해오지 않았다. 잘못된 사회 질서를 바로잡고 보다 나은 세상을 공유하기 위해 인류는 여러가지 이데올로기를 탄생시켰다. 그러한 목적의식 하에 발전되어 온 여러 시각 중 하나가 성적 차이로 인한 차별을 없애자는 목소리, 즉 페미니즘이다. ‘워마드’는 오히려 반(反)페미니즘적 시각을 가진 이들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으며, 페미니즘과 상충되는 개념을 공유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남성에 대한 혐오의 정서는 결국 여성에 대한 혐오의 정서를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다. 이것은 페미니즘에도 좋지 않으며, 양성평등의 방향성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이상향이 성적 차이로 인해 차별받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면, 극단적 여성중심주의가 나타내는 남성혐오 문화는 결코 그 해답이 될 수 없다.

상당수의 여성이 이러한 혐오의 정서에 편승하는 현상은 이들이 진정으로 혐오를 통한 남성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을 남녀 차별 극복을 위한 현실적인 대안으로 인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일베’가  유행할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한 성격의 단순하고 피상적인 본능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했노”라는 말투부터 특정 인물을 의도적으로 비하하고 희화화하여 조리돌림하는 과정까지, 올바른 사회화를 체득하지 못한 성인들의 집단적 퇴행현상이라고 볼만한 사례가 충분히 발견되고 있다. ‘워마드’가 내세우는 거의 유일한 존재 근거인 ‘미러링’이 (하필이면) ‘일베’를 그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한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일베’는 ‘남성 주류사회’를 대표하지도 않으며 페미니즘이 배척해야 할 남성주의적 정치성향을 가장 폭넓게 대변하는 단체도 아니다. ‘워마드’는 단지 ‘일베’가 발전시킨 집단적 혐오, 유아적 왕따의 정서를 도구적으로 차용하여 폭력의 대상을 상이하게 설정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워마드’가 ‘일베’를 혐오한다면, ‘미러링’의 조건대로 ‘워마드’ 역시 사라져야 할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셈이다.

2010년 이후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감정은 ‘혐오’의 정서다.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보다 결과적인 불평등을 납득하지 못해 상대방이 가진 것을 강제로 빼앗아오려는 배고픔의 정서가 혐오를 낳았다. 결국 이 사회가 조금 더 가난해졌기 때문에 발생한 사회현상이다. ‘워마드’로 상징되는 여성중심주의적 혐오의 정서는 이 사회에 발생하고 있는 다양한 혐오의 정서 중 한 예일 뿐이다. 이 외에도 공무원을 향한 분노, 정규직을 향한 분노, 장애인을 향한 분노, 성적 소수자를 향한 분노 등 다양한 방향과 크기를 가진 분노가 이 사회에 존재한다. 갈수록 한국에서 먹고 사는 것이 힘들고 피곤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그만큼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도 그만큼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씩 더 많이 미워하고, 더 많이 질투하고 있다. 한국이 살기 힘든 이유이자 이 사회가 더이상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