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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 as Seoulite, missing Boulder, and loving wife

Boygenius | Boygenius EP

2018년 발매된 뛰어난 음반들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Boygenius EP]를 꼽고 싶다. 이 음반이 나의 ‘Top 5’ 음반 목록에서 제외된 단 하나의 이유는 정규음반이 아니라는 사실때문인데, 이 역시 지금 돌이켜보면 썩 합당한 이유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만큼 이 음반이 가진 파괴력은 엄청나다. 아마도 2018년에 발명된 모든 화음 중 가장 조화롭고 아름다운 화음을 간직한 음반일 것이고, 2018년에 등장한 모든 음반을 통털어 가장 자신만만한 음반이자 동시에 가장 젠체하지 않는 음반일 것이다.

줄리엔 베이커(Julien Baker)와 피비 브릿저스(Phoebe Bridgers), 루시 데커스(Lucy Dacus)는 필라델피아의 한 음악 페스티벌에서 만나 친해진 이후 함께 투어를 돌자는 약속을 한다. 이 약속은 이후 몇 번의 만남과 끝도 없이 이어진 이메일들, 그리고 긴 전화통화들을 거친 후 공동 음악작업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단 두 장의 음반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줄리엔 베이커 뿐 아니라 피비 브릿저스와 루시 데커스 역시 나름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뮤지션들이었으니, 음악계에서 이 프로젝트를 두고 “인디수퍼그룹”이라고 표현한 것도 그리 큰 무리는 아니다. NPR에서 진행하는 [Tiny Desk Concert] 등에서 몇 곡을 처음으로 선보인 후 발매된 EP는 평단과 팬들 모두에게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이후 이들은 처음의 약속처럼 – 하지만 이제는 자작곡과 함께 – 열심히 투어를 돌고 있다.

음반은 총 6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곡의 갯수 뿐 아니라 각 노래의 구성도 단촐하다. 인디 포크와 인디 록을 기반으로 하는 이들의 음악은 최소한의 악기만을 동반한 채 이들의 목소리에 꽤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다. 세 명이 각각의 이야기를 들려준 뒤 후렴구에서 하나로 합치되는 구조로 진행되는 곡들이 많은데, 이 지점에서 꽤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우선 세 명의 호흡이 놀라울 정도로 좋기 때문에 그 자체로 귀가 즐겁기 때문이고(마음껏 내지르는 베이커의 목소리가 요정처럼 속삭이는 브릿저스의 목소리와 어울릴 때의 황홀함이란!), 이들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생각보다 훨씬 묵직하고 설득력이 있어 귀 뿐 아니라 머리와 마음까지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음악을 한마디로 설명하라고 한다면, 여성 개인으로서의 정체성(identity)과 주체성(independence)의 확립이라고 말할 것이다. 타인을 통한, 혹은 타인을 거친 자신의 모습은 떳떳하지 못할 때가 많다. 오히려 내재적인 성찰과 반성, 그 이후 드러나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을 통해 보다 단단한 개인 뿐 아니라 세상과의 온전한 관계가 완성될 수 있다. 보이지니어스의 음악은 아주 아름다운 방식으로, 불편함과 충돌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도 그러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음반의 첫 곡 “Bite the Hand”는 타인에 휘둘리지 않는 사랑의 방식을 직접적으로 선언하고 있는데,

난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널 사랑할 수 없어
난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널 사랑할 수 없어
난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널 사랑할 수 없어

여기 너를 최대한 배려한 사랑이 있어
하지만 너는 내가 줄 수 없는 것을 원하고 있어
내 손은 묶여 있는데, 너의 손은 중력과도 같네


이러한 선언은 철저한 자기고백 위에서 조금 더 숭고한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다. ‘센 척’하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의 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은 더 나은 관계를 위한 첫걸음이다. 음반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 “Souvenir”는 줄리엔 베이커를 괴롭혀온 악몽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브릿저스가 “공동묘지”와 “병원”으로 받고, 이걸 다시 데커스가 “손에 박힌 가시”와 “새벽 수술”로 공명함으로써 공감과 연대의 서사를 써내려간다. 후렴구는 단지 “Ooh-ooh-ooh-ooh”일 뿐이지만, 충분히 아름답다. 폭력에 대한 절묘한 시선은 또 어떠한가. “Stay Down”에서 이들은 스스로를 “villian”이라 칭함으로써 폭력의 방향이 일방적일 수 없음을 역설한다. 이를 통해 폭력을 멈추기 위한 흐름 역시 일방적일 수 없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음반의 타이틀곡 격인 “Me & My Dog”은 그저 그 자체로 아름다운데,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앤드루 포터(Andrew Porter)의 초창기 단편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줄리엔 베이커의 음반들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 프로젝트 역시 베이커의 투어 일정을 확인하던 중 알게 되었다. 하지만 30분이 채 되지 않는 이 짧은 EP를 몇 번 반복해서 듣고 난 후 뒤늦게 나머지 두 명의 멤버인 피비 브릿저스와 루시 데커스의 음악세계 역시 베이커 못지 않게 아름답고 단단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마 나처럼 일부로부터 시작하여 보이지니어스의 세계를 확장시켜 나간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 과정 역시 즐겁고 유쾌한 경험이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잘 할 필요는 없다. 배우고 생각하며 조금씩 나아지면 되는 것이다. 보이지니어스는 나의 이런 생각에 왠지 동의해줄 것만 같은 음악이다.

Jeff Tweedy: WARM

지난해에는 블로그에 글을 열심히 쓰지 못했다. 음악을 꾸준히 듣지 않았던 것은 아닌데, 꾸준히 듣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할 마음의 여유가 부족했다. 여기에 더해, 지난해는 ‘물리적 매체(CD든, LP든)의 형식으로 구입한 음반에 대해서만 블로그에서 이야기한다’는 나름의 원칙이 위기에 봉착한 첫 해이기도 하다. 어느 순간부터 물리적 음반을 구입하지 않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 물리적 음반을 구입할 수 있는 음반가게가 주변에 전무하기 때문이고, 둘째, 세종시로 내려온 뒤 우리 가족의 수입이 줄어드는 바람에 ‘문화적 낭비’를 더이상 이어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애플뮤직에 한달에 만원 정도를 내고 거의 대부분의 음악을 무한정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살면서 음반 한 장을 만원 넘게 주고 산다는 것은 낭비에 가까운 행위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자책을 끝까지 거부하는 독서광의 취향과도 같은 이 고지식함에는 음반을 손으로 직접 고르는 디깅(digging)과 턴테이블에 음반을 걸고 치직, 거리는 잡음을 듣는 아날로그적 감성 등 낭비되는 금액보다 더 큰 행복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인데, 나는 지난해부터 과감히 이 행복을 던져버리기로 결심했다. 일종의 사치재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굳이 이러한 행복이 없어도 음악을 진실되게 듣는 과정은 전혀 손상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 마지막 남은 고집조차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위와 같은 나름의 혼란기(?)를 겪으며 가장 후회되는 것은 지난해 발매된 좋은 음반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가장 좋게 들었던 다섯장의 음반을 인스타그램에 짤막하게 남겨 놓았는데,

김해원: 바다와 나의 변화
Snail Mail: Lush
Mitski: Be the Cowboy
The Beach House: 7
Khruangbin: Con Todo El Mundo

2018년은 위의 다섯장 외에도 정말 좋은 음반이 꽤 많이 나온 해라서,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조금이라도 기록을 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중 2019년 1월 가장 많이 들었던 음반 [WARM]은 ‘올해의 음반’에 필적할 정도로 좋아서 반드시 언급을 할 필요가 있다.

윌코(Wilco)는 내 세대의 인디음악 팬들에게나, 나 개인에게나 무척 특별하게 다가오는 그룹이다. 내 인생 최고의 공연을 하나만 꼽으라면 언제나 2009년 7월 3일 콜로라도주 모리슨(Morrison)의 레드락스 야외공연장(Red Rocks Amphitheatre)에서 관람했던 윌코의 공연을 꼽는데, 그 이유는 물론 여러가지가 있겠지만(그 날이 내 생일이었고, 제프 트위디가 직접 “오늘 생일인 사람들 모두 축하합니다”라는 멘트를 했다는 점이 물론 가장 큰 이유일 수 있겠지만 이건 너무 개인적이라 공식적(?)인 이유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이들이 음악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음반 중 하나를 발표한 예술가임과 동시에 음악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퍼포먼스 그룹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이 공연을 본 뒤 이제 햇수로 10년 째이지만 아직까지 이에 필적할 정도로 좋은 공연은 보지 못했다. 윌코 정도 되는 엄청난 커리어를 남긴 밴드가 앵콜을 두 번, 세 번씩 열정적으로 서비스하는 모습을 아직 보지 못했고, 곡과 곡 사이에 트위디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로 관객들의 호응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훌륭한 무대 매너와 비교될 정도의 입담을 자랑하는 뮤지션도 아직 무대에서 만나보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전통적인 로큰롤 악기 구성에 별다른 무대장치도 없이 공기의 밀도를 꽉 채우는 압도적인 사운드메이킹 능력을 보여준 연주실력을 가진 뮤지션도 아직 목격하지 못했다. 윌코의 음악을 좋아하는 한국팬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공연을 보라”고 강력 추천하는 이유는 이미 충분한 셈이다. 그들의 공연을 본 사람이라면, 가장 미국적인 음악을 하는 밴드 중 하나이자 밥 딜런과 브루스 스프링스틴 이후 노동자 계층을 대변하는 음악을 꾸준히 해온 밴드, 거기에 더해 미국 인디씬의 흐름을 정의내리고 한 시대의 기틀을 확립한 밴드라는 타이틀이 그리 거창하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제프 트위디(Jeff Tweedy)는 윌코의 보컬이자 리더이자 알파요 오메가인 아티스트다. 일리노이의 작은 마을에서 노동자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여섯살 때 기타를 선물받고 12살 무렵 자전거 사고로 한동안 집에서 휴식을 취해야 했던 시기에 본격적으로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로커빌리와 컨트리 음악을 연주하던 로컬 밴드의 보컬로 음악 커리어를 시작한 뒤 윌코라는 영광의 시기로 접어들기 시작하던 무렵부터 그는 약물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지난해 첫번째 솔로 음반 [WARM]을 발매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출간한 (역시) 첫번째 회고록 [Let’s Go]에서 그는 한평생 공황장애와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이로 인해 약물(주로 진통제를 언급하고 있다)을 5주 이상 끊은 적이 단 한차례도 없음을 밝힌바 있다. 어쩌면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은 팬들을 기다리게 만든 그의 첫번째 솔로 음반은 모두의 예상만큼이나 개인적이고, 많은 이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둡다. 그리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경지에 다다르고 있다. 이 음반으로 인해 트위디가 윌코의 보컬리스트라는 이미 높은 명성에서 한단계 더 높은 단계로 진화하였음을 직감한다. 음반의 형태로 시현된 제프 트위디의 자서전이자 그를 평생 괴롭혀온 정신질환과 약물중독, 그로 인한 죽음에 대한 깊은 공포감을 솔직하고 과감하게 담아낸 섬뜻한 수필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이런 나도 아직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여러분도 다시 한번 힘을 내보는 것이 어떨까”라고 묵직하게 던지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메시지가 아무리 좋아도 음악이 별로면 말짱 꽝이기 마련이다. [WARM]의 수록곡은 메시지와 음악적 형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의 음악적 커리어의 근간이자 뿌리인 컨트리와 포크 음악에 두 발을 단단히 디딘 채 새로운 시도를 하기 보다는 가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악기 연주는 제프 트위디가 직접 했는데, 그의 두 아들인 스펜서와 새미 트위디가 각각 드럼과 백킹 보컬로 참여한 점이 이채롭다. (제프 트위디는 2014년 아들 스펜서와 함께 [Sukierae]를 발매한 적이 있다) 가족의 참여는 그로 하여금 조금 더 진실된 목소리를 내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보게 된다. (아래 지미 키멜 라이브 영상에서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백킹 보컬을 하는 이가 아들 새미다) 11곡의 수록곡은 격정적인 정점이나 화려한 편곡같은 ‘할리우드적 포인트’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의 목소리를 조근조근 따라가다보면 결코 지루하지 않게 몇 번을 반복해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밀도가 높다. “Having Been Is No Way to Be”에서는 약물 중독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네가 과거에 했던 마약은 뭐야?
왜 그걸 다시 시작하지 않지?
하지만 그건 내 친구들이 아니야
그리고 만약 내가 죽으면
마약때문에 기분이 좋아진다는게 다 무슨 소용이야


“Bombs Above”에서는 지나온 삶을 회고하며 참회한다.

내가 살아온 인생의 대부분은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 위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일과 같았어
정식으로 사과하고 싶네
전쟁을 멈추기 위해 조금 더 많이 노력해야 했어
정말 미안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이 내 손을 잡고 이야기했어
고통은 모든 이에게 마찬가지라고
그는 옳았어.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기엔 너무 잘못되었지


제프 트위디의 통렬한 자기고백은 거의 모든 곳에서 너무나 직설적이고도 시적인 방식으로 반복된다. 아름다운 선율과 단촐한 악기구성,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얹혀 전달되는 가사는 침울한 진실성으로 가득차 있다. 이것이 절망인지, 희망인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그는 가라앉아 있지만, 그의 따뜻한 목소리는 노래를 듣는 타인까지 가라앉히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나만 더 예를 들어볼까. 노아의 방주 신화를 차용한 “Let’s Go Rain”은 시니컬한 자기비하와 리스너에 대한 존중이 함께 들어있는 전형적인 트위디 풍의 가사로 이루어져 있다.

오, 나는 노아의 홍수에 대해 들은 적이 있어
세상의 모든 죄를 씻어버렸지
누군가는 파괴가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고 이야기하지
그리고 난 그게 한번 더 일어날거라고 생각해

내가 한때 크리스찬일 때는 말야(역자주: 트위디는 그의 유대인 아내를 따라 최근 유대교로 개종했다)
그걸 알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어
그런데 지금에서야, 하늘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 나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
하늘이 오줌을 갈길 때 비로소 난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겠지

오, 난 나무배를 만들어야겠네
나와 함께 기타의 바다에 살지 않겠어?


음악은 아름답다. 가사는 진솔되다. 좋은 음반이 아닐 이유가 없다.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어야 하는 음반이다.




아룬다티 로이: 작은 것들의 신

대학생들을 데리고 베트남으로 짧은 출장을 다녀왔다. (그들에겐 ‘여행’이었겠지만 나에게 그것은 너무나도 확실한 ‘business trip’이었다)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을 끝낼 수 있었다. 결혼기념일(12월 17일)을 맞이해서 즉흥적으로 계획한 부산여행 중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손목서가에 들려 샀던 이 책을 그 이후 한달 동안 질질 끈 나에게 넌지시 올해의 고구마상을 수여하고 싶다. 그 사이에 있었던 기말고사니, 서울여행이니, 논문이니, 출장이니 등등 자질구레한 핑계들을 댈 수 있겠지만, 그냥 이 책을 끝내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이 소설 한 권으로 아룬다티 로이가 부커상과 같은 곳에서 권위를 인정받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거나, 몇백만명이 이 책에 열광했다거나 하는 부가적인 정보때문에 이 책을 구입한 것은 아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책 제목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이 이랑의 음반 제목인줄로만 알고 책을 샀는데(하지만 그것은 [신의 놀이]였다..) 알고보니 넉살의 음반 제목이었다. 어쨌든,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 [작은 것들의 신]은 넉살의 그 아주 뛰어난 음반보다 훨씬 소화하기 힘든 빽빽함을 가지고 있다. 한 줄도 허투루 읽어내려갈 수 없게 만드는 엄격함을 느끼게 하는데, 꽤 두꺼운 책 두께에 숨막힐 정도의 밀도에도 불구하고 책을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흡인력 또한 대단한 편이다. 이 책이 뛰어난 이유는 첫째, 아룬다티 로이만의 독특한 문체가 이미 완벽하게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고, 둘째, 그 문체가 소설의 내용과 조응하며 형식과 내용이 완벽하게 어우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그 와중에 소설 속에 작가 자신을 거리낌 없이 투영하며 세상을 비추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로 치면 미하엘 하네케의 후기작들에서 보이는 작가적 솜씨가 이미 소설 데뷔작에 치밀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세간의 칭송도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나 개인에게 이 작가나 이 소설이 그렇게 크게 강렬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유는 먼저 역설적이게도 그 독특한 문체때문이다. 나는 이런 문체가 기본적으로 버겁다. 같은 인도 출신 작가 중에서 꼽자면 줌파 라히리 쪽이 나에게 더 맞는다. 많은 이들이 로이를 라히리와 비교하던데, 내 눈에는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계열의 작가로 보인다. 오히려 로이는 주노 디아즈와 같은 통통 튀는 문체로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작가들과 함께 묶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큰 것들’에 억압당하는 슬픈 사랑을 위로하기 위해 ‘작은 것들의 신’이 살포시 내려와 이들에게 아주 얄팍한 미소 한줄기를 선사해주고 가는 이 소설의 이야기 구조는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강력한 한 방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을 생각하게 만들고 느끼게 만드는 그 강렬함이 이 소설의 가치를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유지시켜 줄 것이다.

모종린 | 골목길 자본론

나의 누나는 ‘강남’을 싫어하는 사람 중 하나다. ‘강남’으로 인식되는 동네에서는 절대 살지 않겠노라고 내 앞에서 선언까지 한 사람이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강남을 싫어하거나 경멸한다기 보다는 재미없어 하는 쪽에 가깝다. 그 동네는 그녀의 문화적 흥미를 자극할 만한 특출난 자산을 가지고 있지 못한 모양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강남역 대로변이나 신사동 가로수길을 갈 일이 생겨도 그리 신이 나지 않는다. 강남의 어느 동네에 갈 때마다 ‘간지럽다’는 표현을 머릿속에 되내이게 되는데, 그 곳의 문화적 공기가 너무나 이질적으로 느껴져 도저히 동화될 수 없는 거리감이 들 때 그런 표현이 떠오르는 것 같다. 아내도 최근 비슷한 말을 내게 한 적이 있다. “아랫 동네”보다는 “윗 동네”가 자기 취향에 더 맞는 것 같다며, 마포구나 종로구를 살고 싶은 곳으로 꼽았다. 운이 좋게도 두 곳 모두 내가 10년 넘게 살았던 동네들이다.

누나, 아내, 그리고 내가 서울의 특정한 공간을 유별나게 사랑하는 이유, 혹은 그 곳과 물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공간을 유독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공간들이 가지고 있는 ‘골목’의 이질성 때문일 것이다. 버스나 차를 타고 가면 보이는 대로변에 있는 가게들은 홍대입구 앞이나 강남역 주변이나 비슷하다. 올리브 영과 베스킨 라빈스 따위의 가게들이 줄지어 정렬해 있는 모습은 서울이나, 대전이나, 오송이나 크게 차이가 없다. 하지만 큰 길가에서 한 두 블록 안쪽으로 들어가면 나타나는 길, 차 한대가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비로소 그 동네의 진짜 정체성이 드러난다. 어떤 동네의 골목에는 인디 뮤지션들이 태연하게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고, 다른 동네의 뒷골목에 가면 고시생들이 컵밥을 손에 들고 바삐 움직인다.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숨결이 담겨있는 골목의 얼굴이 그 동네의 얼굴인 셈이고, 타지에서 온 방문객들은 그 골목의 얼굴을 소비하고 싶어한다.

모종린 교수는 [골목길 자본론]에서 상권을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한다. 서울 등 대도시의 주요 상권을 명동, 건대입구와 같은 중심상권, 삼성역이나 동대문과 같은 몰링상권, 노량진, 종로 피맛골과 같은 대로변 상권, 그리고 성수동, 연남동, 경리단길과 같은 골목상권으로 나눈 저자는 골목상권이 발생하고 팽창하는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상세히 기술한다. 예컨대 설계된 도로의 구조라던가 스타벅스의 입점 여부, 대중교통의 접근성 등이 골목상권을 필연적으로 탄생시키는 여러가지 요소 중 하나로 작용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사러가마트를 보유한 연희동의 주민들이 부러워지고, 대중교통 시스템을 개혁하여 젊은 도시로 다시 태어난 일본 도야마시의 주민들의 삶이 궁금해진다. 풍부한 사례를 들어 골목상권의 현재를 응시하는 저자의 시선이 탁월하다고 느껴지는 몇몇 지점이 발견되기도 한다.

하지만 책을 계속 읽다보면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순간이 점점 늘어남을 느끼게 된다. 우선 책의 구성이 엉망이다. 저자가 여기저기 매체에 기고한 글을 주제별로 묶어 출판한 듯 보이는데, 그래서 그런지 같은 내용이 몇 번씩 반복된다. 정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책으로서의 가치가 크게 떨어지는 셈이다. 사진은 또 어떠한가. 사진 출처가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들을 실은 모양인데, 보기 부끄러울 정도의 낮은 수준을 보이는 사진을 당당하게 실은 저자의 호연지기에 감탄할 때 쯤 뜬금없은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옹호의 글을 발견하자 마음이 답답해지기 시작한다. “창조경제”라는 단어가 곳곳에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심증은 확증으로 바뀌어간다. 일본 사례에 대한 노골적인 찬양, (“서울은 도쿄가 될 것이다” 등의 주장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된다) 골목상권을 지키기 위한 정책적 제언으로 주장한 일본식 도제시스템을 살짝 바꾼 듯해 보이는 “장인 공동체”, 혹은 “장인대학”, 젠트리피케이션은 건전한 전치과정이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듯한 늬앙스까지. 저자의 이름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뜨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본 뒤 무릎을 탁 치며 책을 덮었다.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까지 가는 길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헛똑똑이 학자의 브루주아 골목 탐방기 잘 읽었습니다.

tell me what you live for

교수라는 직업이 기대했던 것보다 매력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두 학기가 채 끝나지 전에 알아버렸다. 하지만 싫증을 느끼고 이직을 알아보던 전과 다르게 나는 이 직업에 계속 머무르려고 한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오늘 상당히 중요한 이유 하나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국립대는 서울에 있는 명문 사립대와 달리 조기교육 및 사교육의 수혜를 듬뿍 받아 예쁜 수능 점수와 아름다운 학생부 기록을 완성한 학생들만이 오는 곳은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비효율성의 고통 속에서도 어떤 공무원들이 조금씩 쌓아올린 다양한 입시전형을 통해 꽤 다양한 배경을 지닌 학생들이 국립대로 진학한다. 그 중에는 집이 가난해서, 부모가 도움을 충분히 주지 못해 서울로 올라가지 못한 이들도 있고,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학업이 더이상 유지되지 못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들 중 정말 똑똑하고 영특한데 공부에 대한 열정까지 뛰어난 학생을 발견할 때에는 말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을 느낀다. 눈물도 나고,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어떤 감정인데, 공무원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는 몇 안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며칠 전 막내 교수로서는 쉽지 않은 시도를 하나 했다. 조금 용기를 내어 의견 하나를 개진했다. 학과에서 책정된 아주 작은 규모의 장학금이 있는데, 면담을 하던 중 사정을 알게 된 한 학생을 추천했다. 오늘 그 학생에게 장학금 혜택이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그 학생 말고도 형편이 어려운 수많은 학생들이 존재한다. 그들 모두를 충분히 도울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에 좌절도 많이 하게 된다. 내 월급을 쪼개서 누군가를 도와준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학생과의 상담 과정에서 어려운 상황을 캐채해내지 못했다면, 그 학생은 아마도 이 적은 금액의 장학금에 대한 존재 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 정도의 행동에 대해 딱 그 정도의 뿌듯함을 느꼈다.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이 공부를 마음껏 했으면 좋겠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국립대 교직원이라면 교육서비스에 대한 관점을 조금 달리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값비싼 사적 재화가 아닌, 누구나 접근 가능한 공공재에 가까운 성격을 지니는 것이 국립대에서의 교육서비스가 되어야 한다. 국립대 도서관에는 지역 시민까지 누구나 들어갈 수 있어야 하고, 국립대 강의는 영상으로 녹화되어 인터넷에 무료로 배포되어야 한다. 교육 기회의 불평등은 계층 간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역사적으로 아주 명확하게 규명되어 있다. 한국의 국립대는 그러한 불평등을 완화시킬 수 있는 몇 안되는 수단 중 하나다. 

그 학생은 아주 명석한 학생이다. 공부도 잘하고 교우관계도 좋고 성격도 좋다. 그 친구가 부디 마음껏 공부했으면 좋겠다. 그런 학생을 가르친다는 것은 선생 입장에서 굉장히 큰 영광이다. 그런 영광스러운 기회를 쉽게 포기할 수 없다. 계속 교수라는 직업에 머무르려는 이유다. 


윤미현 작, 최용훈 연출 | 텍사스 고모

최근 한 공중파 채널에서 유쾌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전라도의 한 시골 마을에 사는 소녀 몇명이 의기투합하여 밴드를 만든 뒤 고군분투(?) 끝에 동네의 작은 축제에서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가진다는 내용이었는데, 정작 눈길을 끈 건 멤버 중 가장 밝고 적극적이던 한 소녀의 생활상이었다. 그 친구가 사는 집에는 엄마가 없었다. 그 소녀의 어머니는 근처 도시의 공장에서 합숙을 하며 일을 하고 있었고, 그로인해 이 모녀는 주말에 딱 하루 반나절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 소녀의 어머니는 필리핀 사람, 즉 결혼이주 여성이었다.

지방 시골 마을에 가면 두세집 건너 한 가정 꼴로 다문화가족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가 가진 기형적인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수입’되어온 이주 여성들의 삶은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의도적인 무관심’에 힘입어 주변적으로만 다루어져왔다. 이들에 대한 무관심의 뿌리는 어디일까. 몇십년 전, 주한미군과의 결혼을 통해 미국에서의 행복한 삶을 꿈꾸던 “양공주”들이 미국에서 겪은 불행과 고통의 이야기들은, 그들의 후손인 앤더슨 팍(Anderson .Paak)이나 하인즈 워드(Hines Ward) 등을 통해 불쑥 불쑥 한국 사회로 튀어나왔다. 그 당시 한국 여성들이 경험한 삶의 굴곡이 현대 한국에서 동남아시아 이주 여성들의 삶을 통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당시 피해자라면 피해자에 속했던 한국 사회가 이제는 가해자의 터전으로 기능하는, 역사의 아이러니한 수레바퀴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텍사스 고모]는 이 지점을 타격한다. “원조를 받는 국가에서 원조를 주는 국가로 변신한 유일한 국가”라는 자랑은, ‘이주 여성을 수출하던 국가에서 이주 여성을 받아들이는 국가’로의 전이를 인정한다는 말이기도 하고, 이걸 다른 말로 바꾸면 ‘고통을 수출하면서도 아무말 할 수 없었던 힘 없는 국가에서 개인의 고통을 수입하고 이를 노동력으로 치환하려 하는 힘 있는 국가’로의 변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인공 ‘텍사스 고모’의 조카가 목에 힘을 주고 이야기하는 “전국가적 위기상황”이란, 최소한의 인격적 존중조차 받지 못하고 부족한 농촌의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짐승처럼 부려지는 삶을 사는 결혼 이주여성이 30만명을 넘어선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대다수 한국인들의 무관심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푸른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간 고모는 돈 한푼 받지 못하고 옥수수밭과 목화밭에서 일만 하다 아이 셋을 남기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의정부 양말공장에서 일하며 살아오던 고모는 환갑이 가까운 자신의 오빠가  키르기스스탄에서 열아홉 여성을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 곳 고향에는 남겨진 아이들이 있다. 집을 떠난 부탄 출신 엄마와 고기 잡으러 배를 타고 떠난 아빠를 잊지 못해 밝은 곳만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소년, 시어머니에게 국자로 머리를 맞아가면서도 아들을 위해 버텼지만 끝끝내 시댁 식구들의 인격적 모독을 견디지 못하고 존재를 감추어버린 엄마를 기다리는 소년, 그리고 고모의 기구한 삶을 그대로 반복하려 하는 위기의 키르기스스탄 여성이 있다.  이 두 여성이 어떤 연대를 이루어낼 수 있을까, 를 기대했지만 연극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현실을 직시하는 결말을 통해 저릿한 충격을 안긴다. 이들에게 “모닝커피 한 잔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수영장 딸린 주택”과 같은 판타지는 없다. 하고 싶은 공부는 꿈도 꾸지 못하고, 이 일이 끝나면 저 일로 끌려 다니며 노동력을 제공하고 남자가 원하는 수 만큼의 아이를 낳기 위해 자궁을 제공하는 임무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 안타까움이 배우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날 때, 바라보는 관객 역시 무너져내릴 수 밖에 없다. 

좋은 극본과 좋은 연출, 그리고 뛰어난 연기와 사려깊은 무대연출을 경험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 불평등의 대가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는 정보의 비대칭(information asymmetry) 문제를 구조화하여 경제모형 안에 도입하고, 독점적 경쟁시장(monopolistic competition)의 형태를 정의하는 한 축인 딕싯-스티글리츠 효용함수를 고안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주류 경제학계에서는 더이상 이룰 것이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다다른 학자다. 미시경제학이든 거시경제학이든, 이론이든 실증분석이든 자신이 속한 학문분야와 상관없이 경제학에 발을 들인 사람이라면 위의 두 경제적 개념을 들어보지 않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의 박사학위 논문주제이자 평생 천착한 연구주제가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을 것 같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다;) 그가 다룬 시장의 비대칭성, 혹은 독점적 경쟁시장 모두 현대 시장경제에 존재하는 불완전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특징들이다. 스티글리츠는 이러한 시장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기업은 이상적인 균형상태보다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하여 추가적인 수입을 확보하고(mark-up revenue), 개별 소비자의 후생은 감소하며, 그 결과 경제적 불평등은 더 심화된다고 주장해왔다.

[불평등의 대가]는 주류 경제학계를 떠남과 동시에 가열차게 주류경제학의 시장중심적, 기업중심적 이론을 비판해온 스티글리츠 사상의 한 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책의 해제를 무려 선대인씨가 썼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이 책의 신뢰도가 확 떨어지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으나,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어내려가다 보면 감히 선대인 따위가 비빌 수 없는 단단하고도 강렬한 그의 사상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다. 최근 읽은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책에서 느꼈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급하게 집어들었지만, 노르베리-호지의 관점과 일부 맥락을 같이 하면서도(세계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등) 전세계적 지역화를 주장하는 노르베리-호지와 달리 기본적인 세계 경제구조의 패턴은 인정하되 그 안에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자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스티글리츠의 시각은 반세계화 주의자들에게 이론적인 배경을 제공해주는 차원을 넘어 경제학의 지평을 넓히는 차원에서 해석되어질 여지가 충분하다. 다만, 미국이라는 단일한 국가에 한정하여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국가별 상이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고(선대인씨처럼 “미국 다음으로 심각한 나라가 한국이다!”라고 주장하면 할 말이 없다), 그가 지속적으로 비판하는 대상인 대기업의 “약탈적” 경제행위의 근간이 되는 이기심, 혹은 ‘애니멀 스피릿’에 대한 구조적 분석이 부재하다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 함께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론 부분에서 그가 제시하는 다양한 정책적 제안들은 현실의 경제구조 안에서 충분히 실현 가능한 것들이다. 본문의 내용 중 인상 깊었던 지대 추구(rent seeking) 행위를 잡아내기 위한 지원금 폐지, 독점금지법 강화, 금융부문 규제강화같은 주장들은 실제로 민주당 정권 시절 신중하게 추구된 전례가 있고, 세계화의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경상수지 적자 해소는 지금 트럼프 행정부가 무역전쟁을 통해(물론 스티글리츠가 원한 방법은 아니었을 것이다)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이 또한 현실에서 정책으로 반영이 된 부분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금융부문의 과도한 위험추구행위를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에 적극 동감하는 편인데, 경제적 호황기에 지나친 신용공급을 추구하지만 불황기에 시작되면 이렇게 과잉공급된 신용을 순식간에 거두어 들여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금융산업의 경기순응성(procyclicality)이 최근 전세계적 경제위기를 발생시킨 주원인 중 하나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금융기관의 경제적 유인을 전환시킬 수 있는 정책적 도구를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아빠, 교수

두번째 학기임에도 결코 나아지는 법이 없이 점점 더 바빠져만 간다. 강의 준비와 내 논문 작성에만 시간을 쏟아도 모자랄 판에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계속 튀어나오는 점이 제일 성가시다. 대학원생들의 논문 지도나 학부생들의 진로 상담은 당연한 의무라 생각하지만, 각종 연구사업을 따오기 위해 제안서를 작성하는 일이나 학내외 정치를 위해 동원되는 일은 아무리 적응해보려고 해도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힘이 들어 몸과 마음이 지쳐갈 때 아빠, 아버지 생각이 자주 난다. 그 분은 대체 어떻게 이런 위기를 수도 없이 잘 넘길 수 있었을까? 그 분도 나처럼 힘들었을까?

아주 어린 나이부터 나는 아버지의 직업이 교수, 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 직업이 무엇을 하는 일인지 제대로 알기 전부터 어른들이 물어볼 때마다 또박또박 “교수”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교수라는 직업이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인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익숙해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훨씬 지난 시점부터다. 아버지는 주로 집에서 일을 하셨기 때문에 내 눈에 비친 아버지는 가족으로서의 아버지와 공적인 직업인으로서의 아버지의 이미지가 항상 겹쳐져 있었다. 어머니와 즐겁게 수다를 떨다가도 갑자기 책상 앞에 앉아 한참동안 책만 바라보시던 모습, 마당에서 잡초를 뽑다가 퍼뜩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갑자기 방으로 돌아와 이것저것 찾아보시던 보습, 제자들을 집으로 불러 왁자지껄하게 고기를 구워먹다가 문득 역사 이야기로 빠지면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쉬지 않고 수다를 이어 나가시던 모습. 나에게 아버지는 늘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교수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 두 정체성이 지금도 잘 분리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아는 교수로서의 아버지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은 또 한참 뒤의 일이다. 인터넷이 발달한 세상에서 검색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 분이 그동안 내가 생각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대단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분이 쓰신 책이 한국과 중국 사학계에서 큰 논란을 일으키고, 더 나아가 어떤 유의미한 영향을 지속적으로 끼치게 되었음을 발견했을 때, 나는 자랑스럽고 뿌듯하기 보다는 당혹스럽고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상처를 받지 않았을지 걱정이 되는 마음이 더 컸는데, 이런걸 보면 역시 가족은 가족이지 않나 싶다. 비전공자로서 깊은 수준에서 이해할 수 없는 나는 그저 방관자였을 뿐 결코 큰 힘이 되어드릴 수 없었을텐데, 아버지의 생각에 깊이 동의하는 다른 역사학자들의 지지 선언을 볼 때마다 뭉클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그 분들이 아버지에게 있어 또다른 가족이자 형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젊은 나이에 교수로 임용되어 무사히 정년퇴임하시던 순간까지, 위와 같은 격랑이 한두번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고통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집에서 내색 한번 하지 않으시고 무던하게 그 긴 세월을 넘긴 분의 단단한 마음의 굳기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나는 어제도 아내에게 징징거렸고, 그걸로도 채 만족하지 못해 전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또 징징거렸다. 40년 가까이 교수의 아내로 살아오신 엄마는 “사치스럽다”라는 일침을 날리셨다. 학기중에 바쁜 일이 계속 터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고, 그렇게 바쁜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꾸지람이 나의 정신을 버쩍 들게 했다. 대학원생들의 논문을 읽고 코멘트를 주는 일, 연구실적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지만 한푼의 사업비라도 더 타와서 학부생들에게 좋은 경험 하게 해주는 일,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지식을 활용하여 코멘트를 드리는 일 등등, 내 레쥬메에 기록될 연구실적과 하등 상관없는 많은 임무들이 주변에 산적해 있다. 이걸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저 억울하고 답답할 뿐이다.

나는 아버지처럼 훌륭한 학자가 아니다. 학계의 변방에 억지로 매달려 기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거인은 되지 못한 채 거인의 어깨에 숨어 세상을 바라보는 척 흉내만 내고 있는 셈이다. 남들보다 배로 노력해서 따라잡으려고 해도 뱁새가 다리 찢어지는 격인데, 다른 업무들때문에 공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어서 잠시 가슴이 답답했나보다. 별 시덥지도 않은 가치도 없어보이는 논문을 써서 학회 자리나 채워주려는 시도에 스스로 화가 났나보다. 아버지도 내 나이 때 쯤 비슷한 생각을 하셨을까. 왠지 아닐 것만 같아서, 왠지 그 분은 그 시절에도 분명한 확신을 가지셨을 것만 같아서 한 편으로 분하고 부럽고, 다른 한 편으로 기쁘고 뭉클하다. 학자로서 분하고, 아들로서 기쁘다. 이 두 감정이 쉽게 분리가 되지 않는다.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 내 인생에서 가장 가까이 존재할 때, 그 열패감과 안도감은 결코 지워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만 같다. 아마도 평생 이럴 것 같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 행복의 경제학

행복의경제학
올해 초부터 학교에서 경제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지난 학기에는 경제학의 기본원리와 무역/통상정책의 여러 갈래에 대해 강의했고, 이번 학기에는 국제무역의 이론적 토대와 국제금융의 기본원리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내가 강의하는 내용의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시장은 가장 효율적인 경제시스템이며 자유무역은 모두를 이롭게 할 것이다. 이건 내가 주장하는 소수의견이 아니라, 내가 속한 경제학의 세계에서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여지는 명제다. 이 명제는 누군가에게 ‘신자유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것이며,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교과서에 나오는 뻔하고 흔한 말, 즉 지극히 당연한 자연법칙처럼 받아들여질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불평등을 가속화시키고 극소수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중력의 법칙과도 같은 자연스러운 사회적 규칙으로 이해된다는 것이 일견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나의 명제를 이토록 극명하게 엇갈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이 것 외에도 또 존재하는지 궁금할 정도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오래된 미래]를 통해 국제무역과 세계화가 평화로웠던 지역경제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실증적으로 증명한 바 있다. [행복의 경제학]은 세계화에 반대하고 지역화를 추구하는 노르베리-호지의 사상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책이다. 그녀가 제작한 동명의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요약하고 그녀가 기고한 여러 칼럼의 내용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완성된 책이어서 전체적인 완성도는 떨어지는 편이지만, 노르베리-호지의 세계화에 대한 뚜렷한 반대 입장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이 책에서 세계화를 거부하고 지역화를 추구하자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치고 있으며, 그 근거로 세계화의 경제적 효과는 과장되어 있으며 부정적 영향은 과소평가되어 있음을 다양한 수치로 확인시켜 주고 있다. 세계화를 진전시키는 ‘주범’으로 IMF와 WTO 등 국제금융과 국제무역을 총괄하는 국제기구를 지목하며, GDP 등 지역사회의 ‘행복지수’를 측정할 수 있는 계량지표를 배척하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지표를 개발하자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어찌 보면 상당히 과격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의 내용은 사실 세계화에 반대하는 학자들의 의견을 잘 모아놓은 서베이 보고서이기도 하다. 즉, 노르베리-호지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반대하는 비주류 경제학자들의 주장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오래된 미래] 단 한 권으로 내 머릿속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이름으로 자리잡았다. 이 책에서 그녀가 설파했던 지역화, 혹은 지역주의는 참 매력적이고 아름다워 보이는 개념이었다. 그녀의 주장에 영향을 받아 지금까지도 동네서점, 동네커피숍, 동네빵집 등 다양한 형태로 지역성(locality)을 담보하는 상업시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행복의 경제학]을 읽으며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노르베리-호지가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수단으로 비판하는 그 주류 경제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 단 한번도 특정 이데올로기를 위해 살아왔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주류 경제학이 물리학처럼 일반적인 자연법칙이 인간사회에도 깃들어 있다고 믿는, 순수학문에 가까운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주류 경제학의 기본 가정 중 하나인 인간의 이기심때문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가정은, 이 사회의 여러 병폐들의 원인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고 쿨하게 인정하며 출발하는 지점으로 기능한다. 주류 경제학이 논리적으로 엄밀한 전개과정 속에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인간의 의지’라는 치트키의 사용 가능성 자체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노르베리-호지처럼 세계화에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에 결여되어 있는 치명적인 약점 역시 이 부분에 있다. 이들은 사회가 인간의 선한 의지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대안적인 지역주의적 경제시스템이 윤리적으로, 그리고 생태경제학적으로 ‘옳은’ 명제로 판명난다면 사람들이 이 명제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이데올로기다. 주류 경제학은 ‘사람들은 ~해야 한다’와 같은 규범적인(normative) 주장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학문이다. 주류 경제학이 특정 이데올로기에 봉사한다는 노르베리-호지의 주장이 편견으로 판명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의 선한 의지가 반드시 존재하며, 이 선한 의지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저자의 속박된 시선에서부터 출발하는 셈이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이기심이 나쁜 것일까? 주류경제학은 그 반대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인구가 증가하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멜서스의 우울한(dismal) 경제학을 물리치고- 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어했던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며, 영국이 다른 나라들을 제치고 산업혁명의 주역이 되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발명 특허권을 폭넓게 보장하여 떼돈을 벌고 싶어하는 인간의 이기심을 충실히 자극했던 국가 시스템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이기심은 열등한 신체조건을 가진 인간이라는 종(種)을 지구에서 가장 우등한 존재로 탈바꿈시킨 주된 인자일 수 있다. 이기심에 의해 인류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유전적 형질은 선한 의지에 의해 결코 제거될 수 없다. 인간이라는 종이 존재하는 한, 이들은 끊임없이 더 높은 수준의 물질적 쾌락을 탐할 것이며, 국가 등에 의해 강제로 제재당하기 전까지 자신보다 조금 더 약한 존재를 약탈하는 것에 몰두할 것이다. 그 부작용 중 하나가 지나친 세계화, 혹은 지역사회의 몰락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리 틀린 주장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세계화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최소한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노르베리-호지는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경덕 | 처음 만나는 북유럽 신화

북유럽신화
시작은 운전연습이었다. 세종시는 서울과 달리 자가운전이 필수인 곳이기 때문에, 서울에서 운전을 전혀 하지 않았던 아내도 운전을 새로 배워야 했다. 꽤 잘 가르친다는 선생님을 소개 받아 여름방학 중 며칠 개인교습을 받았다. 아내가 운전연습을 받는 동안 혼자 집을 지키고 있자니 조금 심심해졌다. 그러던 와중 서랍정리가 하고 싶어졌고, 텔레비전이 놓인 TV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쪽 구석에서 플레이스테이션이 나왔다. 1년에 몇 번 하지 않아 구석에 처박아놓은 게임기였다. 갑자기 게임이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게임을 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우리 부부는 자연스럽게 각종 게임을 하나씩 마스터 해나가기 시작했다.

이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친한 형 부부가 세종시를 방문했다. 그는 게임의 고수였다. 두어개 정도의 게임을 추천해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마침 여름맞이 할인기간이어서 거의 반값에 좋은 게임들을 구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 두 게임 중 먼저 시작한 게임이 바로 [갓 오브 워 4]였다. 이 게임은 스파르탄에서 건너온 한 무시무시하고 무뚝뚝한 사나이가 아들과 함께 고대 북유럽 신화 속 세계를 탐험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컨트롤러의 조작능력이 중요한 액션게임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구성이 탄탄해서 한 편의 영화를 보듯 몰입해서 하느라 며칠 밤을 뜬 눈으로 보내야 했다. 그렇게 무사히(물론 ‘무사히’는 아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죽음’을 맞이했지만, 게임 속 주인공은 그 때마다 불굴의 의지로 다시 부활하여 나로 하여금 계속 전진하게 만들었다) 엔딩을 보았고, ‘파밍(farming)’이라고 불리우는 엔딩 후 플레이는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게임창을 닫았다. 하지만 마음 속 어딘가에 아쉬움이 남아 있음을 발견했다.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다보면, 등장인물들이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하여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각종 신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알 수 없는 깊은 소외감을 느껴야했다. 나는 북유럽 신화를 잘 모르기 때문에! 왜 재미있어 보이는 이야기를 자기네들끼리만 저리도 열심히 하는가, 왜 나에게 그 신화속 세계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 것이지? 심통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택하게 된 책, [처음 만나는 북유럽 신화]는 나처럼 고대 북유럽 신화를 잘 모르는 초심자를 위한 친절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각종 신화에 대한 전문가이자 문화인류학자로서 세상을 조망하는 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고대 북유럽 신화의 세계관 및 주요 등장인물을 차분하고 정갈하게 전달하고 있다.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토르의 무적 망치, 묠니르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부터 한쪽 눈을 잃으면서까지 지혜를 갈구했던 최고신 오딘, 사고를 일으키지만 미워할 수 없는 장난꾸러기이자 기어코 그 장난끼를 주체하지 못해 신들의 세계를 멸망시키고야 마는 로키의 이야기까지, 개성 넘치는 신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200쪽 남짓한 분량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읽어내려가게 된다. 나처럼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비해 북유럽 신화에 대한 지식이 짧은 사람이라면, 혹은 [토르]나 [반지의 제왕]을 즐겁게 보았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메타포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답답했던 사람이라면 한번쯤 가볍게 읽어볼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