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nolaterthannow

born as Seoulite, missing Boulder, and loving wife

Susanne Bier | Bird Box

[Bird Box]

영화의 구조는 단순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무엇’을 본 사람은 자살하게 되는 세계가 도래한다. 그것을 보면 반드시 죽는다. 죽지 않기 위해 문을 걸어잠그고 창문의 커튼을 내린다. 음식 등을 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갈 때에는 눈을 가린채 여기저기를 손으로 더듬어가며 길을 찾아야 한다. 주인공 멀로리(산드라 불록 扮)는 그 와중에 아기까지 출산했다. 한 집에서 함께 위기를 겪어나가던 여자는 동시에 아이를 낳고 숨졌다. 그녀와 한 집에 우연히 모여 함께 위기를 헤쳐나가던 동료들은 ‘그것’을 보아도 죽지 않는 미치광이에 의해 살해당했다. 멀로리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동료 톰(트레반테 로즈 扮)과 함께 두 아이를 데리고 외딴 곳에서 5년 동안 생존한다. 하지만 톰마저 미치광이들에 의해 숨지고, 멀로리는 우연히 무전교신을 통해 연락이 닿은 신원불명의 남자 ‘릭’이 가르쳐준 방향대로 눈을 가린채 작은 보트에 몸을 싣고 무작정 그 ‘유토피아’로 나아간다.

영화의 매력도 단순하다. 영화는 산드라 불록이 가진 미덕을 최대한 전시하는데 집중한다. 그녀는 [그래비티]에서 보여준 강인한 육체적 매력을 자신있게 보여줌과 동시에, 동 영화에서 주인공 라이언이 극복해야 했던 대상이자 채워지지 않는 공백이었던 모성애를 마음껏 드러낸다. 갑자기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해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디스토피아적 세계, 바깥 세상은 아무 것도 볼 수 없기 때문에 집 안에서만 생활할 수 있는 폐쇄적인 공간성, 그 좁은 공간을 공유하는 동료조차 믿을 수 없게 만드는 다양한 상황설정 등 영화는 스릴러의 기본공식을 충실히 따라간다.

영화의 단점도 명확하다. 우선 서사구조가 엉성하다. 설정 상 모순이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등장인물의 성격도 하나같이 일차원적이다. 스릴러 장르 영화에 대한 클리셰로 가득차있다. 심지어 무언가를 보면 반드시 죽는다는 기본 설정조차 어디에서 본 듯 하다. (영화는 조쉬 메일러맨(Josh Malerman)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넥플릭스에서 만들어진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텔레비전이라는 한정된 전달매체 안에서 지속적으로 시청자의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한 장치를 끊임없이 삽입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손쉬운 장치가 스릴러 구조다. [버드 박스] 또한 예외는 아니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심지어 앞도 보지 못하는 포스트-아포칼립틱 세계에서 두 아이를 건사해야 하는 어머니의 사투라는 주제는 끝까지 영화를 보게 만드는 원천이다. 영화의 매력도 딱 거기까지고, 그 외 새로운 매력을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다.

하지만 [눈먼 자들의 도시] 등의 관련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주제의식을 [버드 박스]에서도 동일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은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영화에서는 사람들의 시각을 지배하여 목숨을 잃게 만드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정체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주인공이 거주하는 집에 침입한 미치광이의 그림에 의해 대략적인 형태를 짐작할 수 있지만, 우스꽝스러운 그 모습을 보면 더이상 중요하지 않은 존재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초월적 존재와 인간 사이의 대립관계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관계는 ‘그것’을 보아도 눈이 멀거나 죽지 않는 미치광이 집단과 ‘그것’을 보면 죽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 사이의 사투일 것이다. 미치광이는 주인공이 거주하는 집에 침입한 뒤 창문을 개방하여 동료들을 하나씩 죽게 만든다. “넌 저것을 봐야해. 얼마나 아름다운지.”라는 대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억지로 바깥 세상을 보도록 강요한다. 모두가 시력을 가진 세계에서 눈먼 자들은 비정상이라고 취급당한다. 하지만 모두가 시력을 빼앗긴 채 살아가는 영화 속 세계에서 ‘그것’을 볼 수 있는 자들은 미치광이, 혹은 폭력적 존재로 그려진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현실의 세계에 사는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당연’한 일이자, 가끔은 퍽 낭만적이거나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현실에서 눈먼 자들이 사는 세상은 세심하게 보살펴지지 못할 때가 많다. 어쩌면 영화속에서 눈을 가린 자들에게 바깥 세상을 보라고 강요하는 미치광이의 모습이, 현실에서 눈먼자들에게 동등한 세계를 공유할 것을 강요하는 시력을 가진 이들의 행동을 은유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속 미치광이에게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는 그 모습이 평범한 이들에게는 죽음으로 가는 독약이듯, 현실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이 다수에 의한 폭력이 되어서는 안된다.

[버드 박스]가 성취하고 있는 가장 훌륭한 주제의식이 위와 같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영화의 결말은 두배로 실망스럽다. 모든 고난을 뚫고 멀로리와 두 아이가 도착한 곳은 실제 눈을 먼 이들과 시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에 의해 바깥 세상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함께 사는 일종의 유토피아인데, 그곳에서 어떻게 식량은 조달하는지 등 설정, 그곳에서의 삶이 미치광이 집단과의 대립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등에 대한 설명 등 꼭 필요한 정보를 전혀 제공하지 않고 뭉클한 감동을 강요한 뒤 성급하게 엔딩 크레딧을 올려버린다. 전형성에 대한 비판을 담은 영화인데 서사구조나 영화적 장치는 너무나 전형적이다. 이런 모순도 가 설계된 것이라면 실로 대단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지만, 솔직히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1월 결산

  • 1월 1일은 남해에서 시작했다. 이동에너지 만땅에 여행에너지는 측정 불가능 수준인 아내의 영향권 아래 산다는 것은, 언제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충만함을 의미한다. 당일 새벽 세시에 출발하여 어두운 고속도로를 긴장감 넘치게 달린 끝에 늦지 않게 남해 해안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퍽 괜찮은 일출을 보면서 소원을 하나 빌었다. 이 가족의 개체수가 증가하게 해달라는. 기복신앙 참 좋아하는 이 나라에 살다보면 소원을 빌 수 있는 기회를 상당히 많이 접하게 되는데 그 때마다 내가 비는 소원은 항상 같다. 아기를 갖는 것에 대한 간절함은 꽤 오래된 것 같다. 부디 지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1월에도 우리는 임신에 실패했다.
  • 남해에서 이틀 정도 머물렀는데, 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생각의 계절’ 민박집 신세를 졌다. 이 블로그와도 얕은 인연을 가진 집이다. 이 곳에 썼던 음악 이야기를 발견한 웹진의 편집장님이 연락을 주셨고, 여자저차한 끝에 그 매체에 블러드 오렌지에 대한 글을 한 편 실을 수 있었다. 아마추어로 남고 싶은 마음에 그 매체와의 인연은 거기에서 끝났고, 당시 편집장님은 “저희 부부는 이제 남해로 가서 민박집합니다~”라는 인사말을 남기시고 홀연히 사라지셨다. 이후 지금까지 그 민박집에 언제 한번 가보나, 마음속으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아내 덕분에 비로소 그 곳에 가게 된 것이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조용했고, 마을은 참 예뻤다. 딱히 아는 척을 하지는 못했는데, 낯가림이 심한 인트로벗의 전형적인 특징이기도 하고, 과거는 과거의 좋은 추억으로 남겨두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 남해에 다녀온 후 베트남 출장까지 논문에 매진했다. 지난 학기는 정말 너무 힘들었는데, 나를 힘들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지 못하게 만드는 각종 행정업무들이었다. 정작 연구와 교육이 가장 중요한 임무인 직업을 가지게 되었는데 역설적으로 그 둘 외의 것들에 신경을 더 많이 써야 하는 구조가 답답했다. 방학만을 기다렸고,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무조건 논문 한 편 쓴다는 다짐 하에 맹렬히 써내려갔다. 한국 경제에 대한 이야기라 한국어로 썼고, 모교에서 운영하는 학술지에 투고했다. 아직 소식이 오지 않았다.
  • 베트남 출장은 이 학교로 온 후 겪은 많은 이상한(weird) 경험 중 거의 탑을 달리지 않을까 싶다. 글로벌 현장학습이라는 이름으로 몇 달 전부터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어쩌구 예산을 확인하고 저쩌구 하며 고생했는데, 내가 이 여행에 동참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학부생 스무명 정도를 데리고 하노이와 하롱 베이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무능하고 무식한 나 때문에 우리과 행정조교 선생님과 그녀의 친구 여행사 직원분이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나는 무식하고 무능한 덕분에 여행사에서 준비한 가이드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3박 4일동안 ‘나는 대체 왜 여기 있는가’를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한가지 얻고 온 것이 있는데, 베트남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남아 국가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이 나라들에 대해 별다른 생각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베트남은 이유 없이 호감을 갖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말도 안될 정도로 혼란스러운 교통문화와 그보다 조금 나은 수준인 질서의식, 서울은 비교도 안될 정도로 혼탁한 하노이의 대기오염 등 내가 싫어하는 모든 요소를 다 가지고 있음에도 싫어할 수가 없었다. 신기한 나라였다.
  • 정신없는 학기와 극적으로 대비되는 방학의 삶은 늦잠과 느린 아침식사로 시작하여 커피와 산책으로 이어졌다. 아내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삶에 늘 감사하고 있다. 이번 겨울은 그리 추운 편이 아니어서 추위를 싫어하는 아내도 그럭저럭 무난하게 보낼 수 있었다. 우리는 항상 늦게 일어났으며, 게으르게 아침식사를 준비해서 천천히 먹었다. 커피는 거의 대부분 직접 내려 마셨으며, 이틀에 한번 꼴로 저녁마다 동네 한바퀴를 돌았다. 아내는 요가와 그림 등 본인이 하고 싶었던 것에 조금 더 매진했으며, 나는 논문 하나를 끝낸 뒤 잠시 풀어져 게으르게 보냈다.
  • 그 와중에 짧은 직장생활 경력에 한줄기 오점(?)을 남기는 이벤트도 있었다. 지연도, 학연도, 그럴듯한 동앗줄도 없이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처럼 묵묵히 시키는 일 열심히 하기’가 거의 유일한 생존방법일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았다. 이런 삶의 가장 큰 부작용이라면 결코 가지고 싶지 않은 ‘명성’이 하나 생긴다는 것인데, 바로 ‘저 친구에겐 어떤 일이든 시켜도 잘 해낼거야’라는 부정확한 집단적 맹신이 그것이다. 이 학교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지 초짜 조교수에게 모든 행정업무가 쏟아져 들어왔고, 이를 더이상 참을 수 없던 나는 공식 회의 자리에서 큰 목소리로(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계속 커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를 줄이면 왠지 지는 것 같아서 그럴 수 없었다) 이에 대해 항의했고, 뒷담화를 즐기는 교수사회의 특성을 고려할 때 아마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찍히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약간의 현자타임이 온 것은 사실이다. 지난 두 번의 이직 경험과 이번 일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다른 직장인들에 비해 ‘분노의 임계치’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사실이다. 분노의 임계치를 통과하면 보통 술을 마시면서 잊는다던가 꾹 참고 다시 웃으며 출근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삶을 이어나가는데, 나는 바로 이직을 준비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고, 이번에는 제발 전의 사례와는 다르기만을 바랄 뿐이다.
  • 2019년 1월은 세종시대 이후 서울을 한번도 방문하지 않은 첫 달로 기억될 것이다.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올라가지 않았다는 것은 상당히 유의미하지 않은가.. 스스로 대견해하고 있다(사실 세미나 참석차 올라가려고 했는데 교수회의에 발목 잡혀서 올라가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세종의 조용한 분위기가 퍽 마음에 든다. ‘문화’가 전무하다는 점은 여전히 치명적으로 다가오지만, 세종시에도 이제 꽤 좋은 커피숍이 몇 들어왔고, 음식은 대부분 집에서 해먹게 되었으니 조금 더 건강해질 뿐 아니라 외식을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세종의 불 꺼진 공실 상가들에 큰 불만은 없다. ‘동네’라고 할만한 정체성이 없다는 점이 제일 뼈아픈데, 아파트만이 존재하는 환경은 필연적으로 삭막한 이웃관계를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사실 이 점은 서울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은 부분이어서 이조차 불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Girlpool | What Chaos is Imaginary

Girlpool | What Chaos is Imaginary

뮤지션의 음악적 여정을 데뷔 시절부터 눈을 떼지 않고 계속 지켜보는 과정은 흥미롭다. 뮤지션이 슬럼프에 빠졌을 때는 내 마음이 다 안타깝고, 음악적으로 큰 진보를 이루어냈을 때에는 아무 것도 보태준 것이 없지만 괜히 뿌듯해진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엘에이 지역 출신 인디록 듀오 걸풀(Girlpool)은 십대 시절인 2014년 발표한 첫번째 음반 [Before the World was Big]부터 지금까지 애정을 가지고 지켜봐 온 밴드다. 이들을 마음 깊숙히 응원해오고 있는 이유는 단지 짧은 기간 이루어낸 음악적 성취 때문만은 아니다. 음악보다 먼저인 삶 자체를 응원하게 되었다.

물론, 데뷔 음반에서 보여준 깔끔하고 산뜻한 미니멀리즘 펑크 음악에 매료되어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기타와 베이스로만 구성된 단순한 구성 위에 켜켜이 쌓아올린 카랑카랑한 두 목소리의 하모니는 꽤 근사했다. 2017년 발표한 2집 [Powerplant]에서 이들은 이미 좋은 평가를 받은 데뷔 음반의 미덕을 상당 부분 포기하고 다채로운 악기구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을 택했는데, 이에 대해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었을지언정 이 듀오의 재능이나 가능성이 퇴보했다고 생각하는 이는 적었을 것이다. 여전히 이들의 음악이 가진 특이성, 혹은 유일성은 존재했다. 오히려 내게 가장 의아했던 부분은 상당히 우울해진 음반의 분위기였다. 이들에게 안좋은 일이 있나, 하는 걱정이 들기까지 했다. 1집에서 보여준 호기, 혹은 패기를 찾기 힘들었다.

그 ‘무슨일’이 있긴 있었다. ‘안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삶의 큰 변곡점인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2019년 발표한 3집 [What Chaos is Imaginary]의 첫곡 “Lucy’s”를 듣고 ‘멤버가 바뀌었나?’라고 생각했다면, 반은 맞고 반을 틀리다. 먼저 멤버는 전과 동일하다. 고등학교 동기동창인 클레오 터커(Cleo Tucker)와 하모니 티비대드(Harmony Tividad)가 여전히 걸풀의 주인공이다. 다만, 이 중 클레오 터커의 성(性)이 여자에서 남자로 변화했다. 사춘기 소년의 목소리를 연상시키는 알토의 보이스톤은 클레오 터커의 것이다. 이제 이 밴드는 여성듀오가 아닌 혼성듀오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밴드에 생긴 변화는 생각보다 컸다고 한다.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듯, 이들은 기존에 발표한 모든 걸풀의 노래를 두 옥타브는 낮아진 터커의 목소리에 맞추어 다시 다듬는 작업을 해야했다. 지난 음반들, 특히 데뷔 음반이 가진 매력 중 상당 부분은 여성 소프라노 두명이 만들어내는 유쾌한 화음에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자신의 목소리가 어색하게 들린다는 것은 나같은 일반인이 생각하기 힘든 큰 도전이었을 것이다. 2집의 우울한 분위기, 3집의 도전적이면서도 드리미한 사운드는 이들 삶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아보인다.

이러한 큰 변화에도 불구하고 큰 용기를 낸 이 젊은 듀오는 [What Chaos is Imaginary]에서 여전히 근사한 음악을 들려준다. 이제 이들의 음악은 더이상 미니멀하지도 않고, 펑크의 범주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오히려 비치하우스(The Beach House)를 연상시키는 드림팝 계열에서 논의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 매체가 “슬리터-키니에서 비치 하우스로의 변화”라고 표현했듯, 이들은 여전히 아름다운 보컬 하모니를 간직한 채 디스토션과 퍼즈가 잔뜩 걸린 기타를 치고 드럼과 키보드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며 사운드케이프를 광활한 차원으로 넓혀버린다. 타이틀곡 “What Chaos is Imaginary”나 “Pretty”같은 곡은 영락없는 잘 만든 드림팝 넘버이고, 달라진 터커의 목소리가 전면에 등장하는 “Hire”나 “Lucy’s”도 드리미한 사운드가 강하게 느껴진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운드라는 점은 약점이자 강점이다. 3집에서 이들은 새로운 변화에 여전히 적응해나가는 듯 보인다. 비단 달라진 목소리 톤때문만은 아니다. 1집과 비교하면 같은 밴드의 음악인가, 싶을 정도로 작법까지 많이 달라졌다. 미완성인채 앞으로 달려나가는 듯한 모습이 불안하기 보다는, 이들의 음악세계가 어떤 완성판으로 빚어질지 궁금증을 자아낸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지점이 더 많지 않나 생각한다.

로버트 쉴러 | 버블 경제학

우리 부부는 최근 디지털피아노를 하나 구입했다. 60만원 정도 되는 나름의 고가(!) 장비였기에 주 사용자인 아내 뿐 아니라 나 역시 이번 기회에 피아노에 대한 의욕이 꽤 크게 불타올랐다. 피아노를 전공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꽤 진지한 학습 경험을 가진 아내와 달리 나는 왼손과 오른손이 따로 놀아야 하는 지점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주저앉은, 아주 전형적인 ‘피아노 바보’ 중 하나라는 사실이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관계로 이번 설 연휴에 창원 부모님댁으로 간 큰 이유 중 하나는 그 곳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되었던 [바이엘 피아노 교본] 상, 하권을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곳에는 바이엘 교본이 없었고, 먼지 쌓인 책장을 구경하다 엉뚱하게 꽂혀서 세종까지 가지고 온 책이 [버블 경제학]이다.

로버트 쉴러(Robert J. Shiller) 교수는 현시대의 많은 거시/금융 경제학자들에게 롤모델과도 같은 존재다. 금융시장의 비효율성을 증명한 연구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학자로서의 경력 뿐 아니라 케이스-쉴러 지수(Case-Shiller Index)를 개발하여 미국 부동산 시장의 가격수준 및 변동성 수치를 정책에 반영한 정책가로서의 역량, 그리고 뉴욕 타임즈 등에 꾸준히 글을 기고하는 등 일반인을 상대로 한 활발한 저작활동까지, 다방면에 걸친 그의 활약상은 거시경제학자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지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융시장의 불완전성과 경제주체의 비이성적 판단이 미치는 결과 – 예컨대 버블 – 에 대해서는 세계 최고의 권위자인 쉴러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전후로 더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쉴러에게 금융위기에 대한 해답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버블 경제학](원제는 [Subprime Solution])은 금융위기 직후 이 새로운 형태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쉴러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한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반부의 명쾌한 진단과 후반부의 뜬구름 잡는 낙관주의가 뒤엉켜버려서 전체적으로 썩 좋은 책이라고는 말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특히 뉴딜 정책에 대한 찬양은 낯뜨거울 정도인데, 만약 지구상에 케인즈교가 있다면 쉴러는 케인즈교 코네티컷 지부의 주교 정도 자리는 차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비경제학자가 번역하고 감수한 책답게 전문용어에 대한 사려깊은 고려가 담겨져 있지 않은 점도 아쉬운 부분인데, 역설적으로 지나치게 쉽게 번역된 탓에 (짧은 책의 분량과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여) 큰 어려움 없이 빠르게 읽어내려갈 수 있다는 점은 장점으로 치부할 수 있겠다.

쉴러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딱 두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부동산 시장은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그리 뒷맛이 좋은 시장이 되지 못한다. 부동산가격은 딱 물가상승률 만큼, 혹은 물가상승률보다 조금 더 낮은 수준으로 상승해왔다. 하지만 사람들이 여전히 부동산시장에서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쉴러에 의하면, 금융시장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버블-버스트 구조는 경제주체의 비이성적 판단이 집단적으로 합쳐진 결과이며, 최근 지나치게 고도화된 금융상품의 특성과 대리인 비용(agency cost) 등 정보의 비대칭성 등에 의해 이러한 시스템적 영향이 증폭되어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불러 일으켰다. 쉴러에 의하면,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우선 금융시장에 존재하는 정보의 비대칭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이를 위해 개인별 맞춤 재무상담 서비스를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고 각종 공시시스템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 이와 함께 금융소비자 보호 정책도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이 어려운 퍼즐은 모두 퀀트(quant)가 풀어줄 것이다!)

여기까지는 아주 상식적인 주장이고, 이 책이 나온 뒤 10여년의 기간동안 책에서 주장된 많은 부분이 실제 정책으로 이행되어왔다. 하지만 책의 가장 뒷부분에서 쉴러가 주장하는 내용은 조금 결이 다르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파생상품시장 등을 통해 부동산 시장에 조금 더 많은 유동성을 불어넣어 투기꾼들이 장난을 치지 못하게 만들자는 쉴러의 주장은, 몇가지 지점에서 지나치게 낙관적이지는 않은지 걱정을 하게 만든다. 첫째, 쉴러는 시장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과연 쉴러가 가진 선의를 시장의 참가자들도 가지고 있을 것인가. 다양한 시장 참가자 모두에게 적절한 경제적 유인이 주어져 자산시장의 변동성 완화 및 리스크관리라는 최종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나에겐 되게 어려운 문제처럼 느껴졌는데 쉴러는 당연히 될 것처럼 이야기한다. 둘째, 쉴러는 정부정책 역시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신뢰하는 것처럼 보인다. 위와 같은 정책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인내심 넘치고 꾸준한 성미를 가진 정책가가 과연 존재하는가. TARP 등의 대규모 구제금융 정책이 실제로 시행되었던 과정을 살펴보면, 쉴러와 같은 이성적 경제학자가 굵직한 금융정책 결정 과정에서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는 여지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셋째, 쉴러는 인간의 마음 역시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1주택자와 같은 소규모 투자자가 과연 자기집 한번 마련해보자는 선한 마음만으로 주택담보대출을 받았을까? 월가에서 수조원을 굴리는 펀드 매니저부터 동네 계모임에 수십만원을 넣는 사람까지 모두의 욕망은 동일하다. 기회만 된다면 타인의 피해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가능성을 충분히 통제함과 동시에 투기적 수요까지 잠재울 수 있는 새로운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시장의 파이를 키우는 방향으로 설정하자는 쉴러의 주장은 나같은 초짜 경제학자의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이 책에서 내 눈에 미친 쉴러는 금융과 시장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경제위기는 정부정책으로 극복 가능하다는 케인즈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땅에서 2cm 정도 발을 떼고 떠 있는 숭고한 인격체처럼 보인다. 책에 적힌 그의 주장 중 가슴에 와닿는 것도 많았다. 아니, 거의 대부분의 주장에 동의했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특히 인플레이션에 연동된 물가지수를 개발하여 이를 지속적으로 대중에게 교육시키자는 주장은 꽤 참신했다. 명목가치와 실질가치를 구분짓는 일은 경제학이 세상에 해줄 수 있는 가장 선한 행동 중 하나인 것 같다.

KIRARA | Sarah

KIRARA | Sarah

공연을 할 때마다 청하를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뮤지션 키라라(KIRARA)가 “음반 안에서 개연성을 가지게 만든 첫번째 결과물”이라고 이야기하는 [Sarah]는 그녀의 세번째 정규음반이다. 키라라의 표현에 따르면 앞선 두 장의 정규음반이 기존에 작업했던 곡들을 음반의 형태를 갖추어 발매한 “모음집”의 형태였다면, [Sarah]는 ‘Sarah’라는 한 인물을 중심으로 슬픔, 외로움, 절망과 같은 감정을 녹여내고 있다. 여기서 ‘Sarah’는 아마도 당연히 키라라 자신이겠지만, 키라라와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친구들’이기도 할 것이다.

키라라의 음악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생각보다 훨씬 따뜻하다. 음반의 첫 곡이자 음반의 전체적인 방향을 정립하는 곡 “걱정”에는 이 뮤지션의 사려깊고 섬세한 마음씀씀이가 잘 드러나있다. 한 친구의 자살로부터 시작된 염려와 걱정의 관념은 [Sarah]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잘 지내냐”는 한 마디가 입 밖으로 나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번민과 얼마나 복잡한 생각들이 마음 속을 오고 나갔을까. 이러한 절절한 마음에 대한 표현은 이어지는 노래인 “Wish”에까지 그대로 이어져 [Sarah]만이 가지는 어떤 하나의 얼굴 표정을 만들어낸다. 그녀와 그녀 주변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쁘고 강해” 보이기도 하고, 웨이브에 실린 표현처럼 “뿌숨과 감화”의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Sarah]에 대해 이야기하는 다양한 층위의 시각과 주제가 있을 것이다. 하우스와 빅비트, 시부야케이와 같은 장르, 캐미컬 브라더스, 이디오테잎, 코넬리우스와 같은 뮤지션, “Rain Dance” 등에서 드러나는 재미있는 실험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할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인터넷 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키라라의 음악에 대한 반응 중 상당 부분이 청자와 뮤지션 간에 발생하는 감정적인 교감에 대한 고백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꽤 크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전자음악만큼 뮤지션과 청자 간 존재하는 감정적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장르를 찾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전자음악을 흔히 “기계적”이라는 이유로 멀리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인간의 목소리를 포함해 음반의 형태로 청자의 귀에 전달되는 음악의 대부분은 0과 1의 신호로 변환된 기계음이다. 오히려 전자음악은 상대적으로 조금 더 추상적이라는 특징을 지니며, 이 지점에서 성공적인 성취를 이루어내는 뮤지션의 경우 본인의 감정을 상대적으로 더 직관적이고 직접적으로 청자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추상화를 볼 때 아무런 단어를 떠올리지 않고, 혹은 현실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고도 화가의 마음속에 순간적으로 들어갈 수 있을 때가 있듯 말이다. 말도 안되는 허무맹랑한 궤변이지만, 아무튼 나의 이런 가정에 따르면 [Sarah]가 유독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키라라가 전자음악이 가진 추상성을 잘 이해하고 있고 소리의 분해와 조립의 과정을 통해 본인만의 특유한 질감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음반이고 고마운 음반이다.

Yorgos Lanthimos | The Lobster


저녁식사를 위해 고기를 구워야 해서 짧게 감상평을 남긴다. (무려 창원에서 공수된 등심 소고기다. 아내를 실망시킬 수 없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에 대한 명성은 오래 전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그의 영화를 본 것은 이 [랍스터]가 처음이다. 이 영화가 개봉되었던 2015년 당시에서 주변의 많은 이들이 칭찬했던 기억이 난다. 깔끔하고 똑똑하다는 평가가 적절할 것 같다.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고, 지적으로 까탈스러운 평론가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영리하다.

영화는 부조리로 가득찬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벌어지는 감정에 대한 억압의 문제를 블랙 코미디 장르 위에서 유려하게 풀어낸다. 주인공은 반드시 짝을 찾아야 하는 세계와 절대 짝을 찾으면 안되는 세계 사이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두 세계는 대립하고 있고, 주인공은 딱히 굳건한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나름 자신이 속한 세계의 규칙에 순종하기 위해 애쓴다. 짝을 반드시 찾아야 하는 세계든, 그렇지 않은 세계든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규칙, 혹은 주인공이 필사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상대방과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일이다.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것에 대한 집착은 결국 주인공과 그의 파트너를 일종의 감정적 파멸로까지 이끌게 되는데, 영화는 이 외에도 자연스럽게 피어나야 하는 다양한 감정들을 규제와 억압의 대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부조리극의 설계를 탄탄히 한다. 관객은 ‘왜’ 그런 세계가 만들어졌고 유지되어야 하는지 알 길이 없는데, 이건 사실 알 필요가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집요하게 파고드는 지점은 일상의 관계에서 우리가 알게모르게 집착하게 되는 감정의 규범화, 혹은 상대방에 대한 감정의 강요 등의 문제다. 상대방에게 사랑의 언어를 자신의 원하는 형식으로 강요한 적은 없는지, 상대방과의 관계 그 자체가 목적인 나머지 억지로 공유지점을 창조하여 관계의 지속을 스스로에게 강요한 적은 없는지, 감정의 소멸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점에서 이를 거부하며 상대방에게 그 책임을 떠밀었던 적은 없는지 생각해볼만 하다.

영화에서 가장 섬뜩한 부분은 한 세계의 지도자에 의해 신체의 일부분을 잃은 등장인물 중 하나가 “내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이런 짓을) 해도 되는 거잖아요!” 라고 절규하는 장면이었다. 이 등장인물은 이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불행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그 결과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욕망을 정당화한다. 이런 장면들의 반복만으로 영화를 보는 즐거움은 충분했다. 어른을 위한 우화로 꽤 괜찮은 만듦새를 가진 영화다.

Jay Bulger | CounterPunch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영화 [카운터펀치(Counterpunch)]를 기획하고 감독한 제이 벌저(Jay Bulger)는 복싱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놓았는지 회고하는 것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전국적인 인기를 끈 스포츠 종목이자 가난한 이들에게는 ‘어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의 상징과도 같았던 복싱은 이제 NFL이나 NBA에게 그 영광을 내어주고 관심의 뒷편으로 밀려난지 오래다. 반쯤 벌거벗은 몸뚱아리가 전시의 전부인 오락물이자 육체적 강인함을 바탕으로 상대방을 쓰러뜨려야 승리의 달콤함을 맛볼 수 있다는 원시성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 스포츠 종목인 복싱에 가진 것이라곤 몸뚱아리 밖에 없던 가난한 흑인사회가 더 열광적으로 반응한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그 흑인사회마저 등을 돌릴 정도로 쇠락의 길로 빠져든 이 원초적 스포츠의 속살을 담담하게 비추고자 하는 이 영화의 시선은 오히려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복싱을 담아내는 영화의 카메라 렌즈는 대부분 역동적인 각도를 잡아내기 위해 애쓰고, 복싱을 담아내는 영화의 시놉시스는 대부분 가난과 영광, 그 이후의 몰락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도구로써 이 종목을 활용하고자 노력하는데 반해 다큐멘터리 [카운터펀치]는 각기 다른 위치에서 시작한 복서 세 명의 이야기를 독립적으로 다루되, 감독의 시선은 철저히 배제한다는 원칙을 끝까지 유지한다는 점에서 색다른 복싱 영화로 기억될 만 하다.

영화는 “Lil B-Hop”이라는 애칭으로 불리우는 유망주 소년 복서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크리스토퍼 콜버트(Christopher Colbert)는 뉴욕주 브루클린의 가난한 집에서 성장했고, 이 지역의 불우한 청소년들을 계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역 경찰들이 합심하여 문을 연 무료 체육관 ‘Atlas Cops & Kids Boxing Gym’에서 복싱을 처음 접했다. 이후 이 스포츠에서 재능을 발견하고 화려한 아마추어 커리어를 마무리한 뒤 본격적인 프로 세계의 문을 두드린다. 콜버트의 이야기가 드러내는 것은 복싱이 지역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성이다. 이 무료 체육관은 영화를 제작하던 시기 브루클린 지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청소년 대상 무료 체육관이었다. 이제 경찰복을 벗고 체육관 운영에만 매달리는 운영자들은 매일 운영난에 허덕인다. 복싱은 점점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고, 가끔 콜버트와 같은 유능한 인재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 역시 알 헤이먼(Al Haymon)과 같은 거물 프로모터가 거절할 수 없는 금전적 제안을 해오며 냉큼 빼내간다. 콜버트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고, 자신이 가진 재능을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를 부와 명예의 길로 가장 빠르게 안내해줄 사람은 헤이먼과 같은 유능한 프로모터다.

알 페이먼과 같은 프로모터가 현 복싱계에 미치는 파급력은 영화의 다른 주인공, “Kid Chocolate”으로 불리우는 피터 퀼린(Peter Quillin)의 이야기에서 조금 더 명확하게 부각된다. 피터 퀼린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복서다. 미시건의 가난한 마을에서 성장하여 뉴욕에서 복싱을 연마한 뒤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자신의 고향 그랜드 래피즈(Grand Rapids)에 멋진 저택을 짓고 가족을 부양할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다. 밝은 앞날만이 가득해보였던 그가 돌연 챔피언 의무 방어전을 포기하고 벨트를 스스로 내려놓는 선택을 한다. 젊은 나이의 전도유망한 챔피언이 스스로 벨트를 포기했다는 뉴스는 전세계적인 화제의 대상이 되고, 곧 그의 비상식적 선택의 뒷편에 알 헤이먼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헤이먼이 자신의 구미에 맞는 대진을 짜기 위해 퀼린에게 거액의 돈을 주고 도전자와의 경기를 포기하라고 종용한 것이다. 이후 퀼린은 1년 간의 공백을 끝개고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재기전에서 체중을 맞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TKO로 패배하게 된다.

콜버트와 퀼린의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알 헤이먼은 플로이드 메이웨더(Floyd Mayweather)와 각별한 관계이며, 현 복싱계의 패러다임을 형성한 사람 중 하나로 지목받는 사람이다. 콜버트와 퀼린 모두 메이웨더를 우상으로 대한다. 첫번째 패배를 당하기 전까지 퀼린은 자신과 메이웨더의 공통점으로 ‘무패 전적’을 꼽으며 그와의 관계를 주기적으로 상기시킨다. 콜버트는 “어린 시절 메이웨더를 보는 것과 같다”는 복싱계 평단의 평가에 흡족해하며 링 위에서 쇼맨쉽을 기르기 위해 애쓴다. 메이웨더와 같은 수퍼스타 복서의 경기에 걸린 베팅 금액은 천문학적 수준이며 경기 입장권 금액 역시 상상을 초월한다. 복싱이 몇몇 소수 프로모터와 수퍼스타 복서에 의한 돈잔치가 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카운터펀치]는 복싱을 처음 시작하는 어린 흑인선수와 이미 거물이 되었지만 여전히 프로모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베테랑 복서의 예를 통해 복싱계가 선정성을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구조가 고착화되어 더이상 그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돈잔치 복싱계에서 한발자국 떨어진, 영화의 세번째 주인공이 있다. 캠 F. 어썸(Cam F. Awesome)은 베테랑 아마추어 복서다. 영화제작 중이던 2015년 당시 캠 어썸은 2016년 리우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기 위해 고군분투중이었다. 그는 전국의 유명한 아마추어 대회를 휩쓸었지만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려야 한다. 협회에서 어느정도 생활비를 보조해주긴 하지만 한 달에 두번 헌혈을 해야 복싱을 계속할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프로행을 권유하지만 그는 올림픽이라는 큰 꿈을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올림픽 역시 완전히 순수한 아마추어리즘을 포기한지 오래다. 대표선수 선발전에서는 갑자기 헤드기어 착용을 금지하는 규칙이 통과된다. 복싱이 가진 원시성과 야만성이 흥행을 위한 좋은 도구임을 잘 알고 있는 협회의 결정에 어썸은 분통을 터뜨리지만, 돌아온 것은 눈 위에 크게 생긴 상처였다. 우여곡절 끝에 대표선수 자격을 획득하지만, 해외 대회에서 일정 기준 이상의 포인트를 쌓지 못한 그는 결국 올림픽 출전권을 박탈당한다.

비교적 담담하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는 영화의 공기를 환기시켜 주는 일은 슈가레이 레너드(Sugar Ray Leonard)와 같은 복싱계 전설들의 인터뷰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현 복싱계가 과거와 달리 지나치게 편파적이고 선정적임을 비판한다. 복싱의 역사이기도 한 이들은 메이웨더로 상징되는 현금인출기능만이 강조되는 현 세대의 복싱 관계자들의 태도를 책망한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콜버트는 2018년 말 현재까지 10승 무패를 기록하며 잘 나가고 있다. 퀼린은 충격적인 패배 후 다음 경기에서 승리를 챙기며 재기를 위한 발판을 다지고 있다. 어썸은 올림픽 출전권을 박탈당한 후 체육관을 운영하며 프로 전향을 저울질하고 있다. 복싱이 가진 순수성, 원시성이 누군가의 노력에 의해 지켜질 수 있다면,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카운터펀치’가 제대로 꽂힐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해보이지 않는다. 메이웨더가 추진하는 ‘돈이 되는’ 이벤트성 경기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전통있는 아마추어 대회인 ‘골든 글로브(Golden Glove)’는 그 권위를 점점 상실해가고 있다. 콜버트를 키워낸 아틀라스 체육관은 전국으로 그 규모를 확대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브루클린에서 이 체육관 외에 빈민가 흑인 청소년을 위한 다른 복싱 체육관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Adrianne Lenker | Abysskiss

Adrianne Lenker | Abysskiss

[Masterpiece]와 [Capacity], 두 장의 정규음반으로 인디록/포크 씬에 확고히 그 이름을 아로새긴 빅 띠프(Big Thief)의 메인보컬이자 리더인 에이드리앤 렌커(Adrianne Lenker)는 자신이 이끄는 밴드가 높은 명성을 얻는 과정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날 것 그대로 세상에 드러내야 했다. 물론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다그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이상 그녀의 음악이 아니게 되니까, 아마도 그것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당연하게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작업을 묵묵히 해냈다. 그 과정을 묵묵히 지나왔다. 이미 무척 강인한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성공을 자축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도 않은 것 같은데 솔로 음반을 툭 던지며 다시 돌아왔다. 심지어 이번에는 조금 더 깊이 들어갔다. 조금 더 자유롭게 뛰어놀고, 조금 더 어둡게 침잠한다. 에이드리앤 렌커는 첫번째 솔로 음반 [Abysskiss]를 통해 또다른 차원으로 올라간 듯 보인다. 꽤 훌륭한 밴드를 이끄는 메인 보컬에서 씬 전체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는 독립적인 뮤지션으로.

그녀의 이름 앞에 같은 카테고리로 묶일 수 있는 뮤지션들의 이름을 나열해볼까. 조니 미첼(Joni Mitchell), 엘리엇 스미스(Elliot Smith), 조아나 뉴섬(Joanna Newsome), 그리고 그루퍼(Grouper)와 마운트 이리(Mount Eerie), 어쩌면 선길문(Sun Kil Moon)까지. 인디포크씬의 쟁쟁한 이름들과 비교해도 에이드리앤 렌커의 음악세계는 결코 무르거나 작아보이지 않는다. 읊조리는 그녀의 목소리로 전달되는 노랫가락은 차라리 ‘spoken words’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는 다른 일을 하며 가볍게 듣는 ‘배경음악’으로 그녀의 음악을 취급하는 것을 애초에 차단시킨다. 높라운 집중력이 음반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단촐한 악기구성이지만, 프로듀싱부터 악기연주, 믹싱까지 빅 띠프의 멤버들이 함께 했다. 탄탄한 팀워크가 렌커 개인의 이야기에 올인되었을 때 발휘되는 깊이와 밀도는 상상 이상이다.

[Abysskiss]에는 심지어 위에 열거한 뮤지션들의 음악에서 발견할 수 없는 유머까지 포함하고 있다. 음반의 수록곡 중 빅 띠프의 기존 노래들과 가장 비슷한 색깔을 지닌(그래서 많은 이들이 사랑할) “Cradle”과 “Symbol”을 앞뒤로 감싸고 있는 두 곡, “Out of Your Mind”와 “Blue and Red Horses”는 의도적인 불협화음과 엇박자로 뒤덮여 있다. 렌커가 결코 노래를 잘 못 부르는 보컬리스트가 아니기 때문에 처음 들을 때에는 꽤 의아한 부분으로 느껴질 법 한데, 이건 렌커식 유머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녀는 이 음반에서 상처와 악몽에 집착하여 끝도 없이 밑으로 파고드는 절망과 자기비하로 점철된 시니컬한 유머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덜레덜레 걸어가며 지나가는 행인에게 미소도 지어주는, 그래서 인생의 진정한 ‘승리자’가 되는 길을 택한 렌커의 강인한 주체성은 이렇게 청자의 기대를 거스르는 부분들에서 조금 더 도드라진다.

2017년 최고의 음반으로 빅 띠프의 [Capacity]를 꼽았는데, 그 선택에 대해서는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 들어도 “미쳤다”라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는 흡인력을 지닌 음반이다. 렌커의 세계로 가득찬 [Abysskiss]는 빅 띠프의 전작에 비해 한껏 힘을 뺀 작품이다. 그래서 그런지 팽팽한 긴장감보다는 사색을 위한 공백과 쉼표, 말줄임표들이 더 눈에 띈다. 가사를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웅얼거리는(murmur) 부분도 많고, [Capacity]에서 정점에 달했던 뛰어난 훅이 아예 거세된 노래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bysskiss]는 렌커의 세계를 가장 또렷하고 솔직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2018년 가장 중요한 음반 중 하나로 기억되어야 할 이유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Boygenius | Boygenius EP

2018년 발매된 뛰어난 음반들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Boygenius EP]를 꼽고 싶다. 이 음반이 나의 ‘Top 5’ 음반 목록에서 제외된 단 하나의 이유는 정규음반이 아니라는 사실때문인데, 이 역시 지금 돌이켜보면 썩 합당한 이유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만큼 이 음반이 가진 파괴력은 엄청나다. 아마도 2018년에 발명된 모든 화음 중 가장 조화롭고 아름다운 화음을 간직한 음반일 것이고, 2018년에 등장한 모든 음반을 통털어 가장 자신만만한 음반이자 동시에 가장 젠체하지 않는 음반일 것이다.

줄리엔 베이커(Julien Baker)와 피비 브릿저스(Phoebe Bridgers), 루시 데커스(Lucy Dacus)는 필라델피아의 한 음악 페스티벌에서 만나 친해진 이후 함께 투어를 돌자는 약속을 한다. 이 약속은 이후 몇 번의 만남과 끝도 없이 이어진 이메일들, 그리고 긴 전화통화들을 거친 후 공동 음악작업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단 두 장의 음반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줄리엔 베이커 뿐 아니라 피비 브릿저스와 루시 데커스 역시 나름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뮤지션들이었으니, 음악계에서 이 프로젝트를 두고 “인디수퍼그룹”이라고 표현한 것도 그리 큰 무리는 아니다. NPR에서 진행하는 [Tiny Desk Concert] 등에서 몇 곡을 처음으로 선보인 후 발매된 EP는 평단과 팬들 모두에게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이후 이들은 처음의 약속처럼 – 하지만 이제는 자작곡과 함께 – 열심히 투어를 돌고 있다.

음반은 총 6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곡의 갯수 뿐 아니라 각 노래의 구성도 단촐하다. 인디 포크와 인디 록을 기반으로 하는 이들의 음악은 최소한의 악기만을 동반한 채 이들의 목소리에 꽤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다. 세 명이 각각의 이야기를 들려준 뒤 후렴구에서 하나로 합치되는 구조로 진행되는 곡들이 많은데, 이 지점에서 꽤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우선 세 명의 호흡이 놀라울 정도로 좋기 때문에 그 자체로 귀가 즐겁기 때문이고(마음껏 내지르는 베이커의 목소리가 요정처럼 속삭이는 브릿저스의 목소리와 어울릴 때의 황홀함이란!), 이들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생각보다 훨씬 묵직하고 설득력이 있어 귀 뿐 아니라 머리와 마음까지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음악을 한마디로 설명하라고 한다면, 여성 개인으로서의 정체성(identity)과 주체성(independence)의 확립이라고 말할 것이다. 타인을 통한, 혹은 타인을 거친 자신의 모습은 떳떳하지 못할 때가 많다. 오히려 내재적인 성찰과 반성, 그 이후 드러나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을 통해 보다 단단한 개인 뿐 아니라 세상과의 온전한 관계가 완성될 수 있다. 보이지니어스의 음악은 아주 아름다운 방식으로, 불편함과 충돌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도 그러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음반의 첫 곡 “Bite the Hand”는 타인에 휘둘리지 않는 사랑의 방식을 직접적으로 선언하고 있는데,

난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널 사랑할 수 없어
난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널 사랑할 수 없어
난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널 사랑할 수 없어

여기 너를 최대한 배려한 사랑이 있어
하지만 너는 내가 줄 수 없는 것을 원하고 있어
내 손은 묶여 있는데, 너의 손은 중력과도 같네


이러한 선언은 철저한 자기고백 위에서 조금 더 숭고한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다. ‘센 척’하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의 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은 더 나은 관계를 위한 첫걸음이다. 음반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 “Souvenir”는 줄리엔 베이커를 괴롭혀온 악몽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브릿저스가 “공동묘지”와 “병원”으로 받고, 이걸 다시 데커스가 “손에 박힌 가시”와 “새벽 수술”로 공명함으로써 공감과 연대의 서사를 써내려간다. 후렴구는 단지 “Ooh-ooh-ooh-ooh”일 뿐이지만, 충분히 아름답다. 폭력에 대한 절묘한 시선은 또 어떠한가. “Stay Down”에서 이들은 스스로를 “villian”이라 칭함으로써 폭력의 방향이 일방적일 수 없음을 역설한다. 이를 통해 폭력을 멈추기 위한 흐름 역시 일방적일 수 없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음반의 타이틀곡 격인 “Me & My Dog”은 그저 그 자체로 아름다운데,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앤드루 포터(Andrew Porter)의 초창기 단편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줄리엔 베이커의 음반들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 프로젝트 역시 베이커의 투어 일정을 확인하던 중 알게 되었다. 하지만 30분이 채 되지 않는 이 짧은 EP를 몇 번 반복해서 듣고 난 후 뒤늦게 나머지 두 명의 멤버인 피비 브릿저스와 루시 데커스의 음악세계 역시 베이커 못지 않게 아름답고 단단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마 나처럼 일부로부터 시작하여 보이지니어스의 세계를 확장시켜 나간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 과정 역시 즐겁고 유쾌한 경험이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잘 할 필요는 없다. 배우고 생각하며 조금씩 나아지면 되는 것이다. 보이지니어스는 나의 이런 생각에 왠지 동의해줄 것만 같은 음악이다.

Jeff Tweedy: WARM

지난해에는 블로그에 글을 열심히 쓰지 못했다. 음악을 꾸준히 듣지 않았던 것은 아닌데, 꾸준히 듣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할 마음의 여유가 부족했다. 여기에 더해, 지난해는 ‘물리적 매체(CD든, LP든)의 형식으로 구입한 음반에 대해서만 블로그에서 이야기한다’는 나름의 원칙이 위기에 봉착한 첫 해이기도 하다. 어느 순간부터 물리적 음반을 구입하지 않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 물리적 음반을 구입할 수 있는 음반가게가 주변에 전무하기 때문이고, 둘째, 세종시로 내려온 뒤 우리 가족의 수입이 줄어드는 바람에 ‘문화적 낭비’를 더이상 이어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애플뮤직에 한달에 만원 정도를 내고 거의 대부분의 음악을 무한정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살면서 음반 한 장을 만원 넘게 주고 산다는 것은 낭비에 가까운 행위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자책을 끝까지 거부하는 독서광의 취향과도 같은 이 고지식함에는 음반을 손으로 직접 고르는 디깅(digging)과 턴테이블에 음반을 걸고 치직, 거리는 잡음을 듣는 아날로그적 감성 등 낭비되는 금액보다 더 큰 행복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인데, 나는 지난해부터 과감히 이 행복을 던져버리기로 결심했다. 일종의 사치재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굳이 이러한 행복이 없어도 음악을 진실되게 듣는 과정은 전혀 손상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 마지막 남은 고집조차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위와 같은 나름의 혼란기(?)를 겪으며 가장 후회되는 것은 지난해 발매된 좋은 음반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가장 좋게 들었던 다섯장의 음반을 인스타그램에 짤막하게 남겨 놓았는데,

김해원: 바다와 나의 변화
Snail Mail: Lush
Mitski: Be the Cowboy
The Beach House: 7
Khruangbin: Con Todo El Mundo

2018년은 위의 다섯장 외에도 정말 좋은 음반이 꽤 많이 나온 해라서,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조금이라도 기록을 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중 2019년 1월 가장 많이 들었던 음반 [WARM]은 ‘올해의 음반’에 필적할 정도로 좋아서 반드시 언급을 할 필요가 있다.

윌코(Wilco)는 내 세대의 인디음악 팬들에게나, 나 개인에게나 무척 특별하게 다가오는 그룹이다. 내 인생 최고의 공연을 하나만 꼽으라면 언제나 2009년 7월 3일 콜로라도주 모리슨(Morrison)의 레드락스 야외공연장(Red Rocks Amphitheatre)에서 관람했던 윌코의 공연을 꼽는데, 그 이유는 물론 여러가지가 있겠지만(그 날이 내 생일이었고, 제프 트위디가 직접 “오늘 생일인 사람들 모두 축하합니다”라는 멘트를 했다는 점이 물론 가장 큰 이유일 수 있겠지만 이건 너무 개인적이라 공식적(?)인 이유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이들이 음악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음반 중 하나를 발표한 예술가임과 동시에 음악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퍼포먼스 그룹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이 공연을 본 뒤 이제 햇수로 10년 째이지만 아직까지 이에 필적할 정도로 좋은 공연은 보지 못했다. 윌코 정도 되는 엄청난 커리어를 남긴 밴드가 앵콜을 두 번, 세 번씩 열정적으로 서비스하는 모습을 아직 보지 못했고, 곡과 곡 사이에 트위디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로 관객들의 호응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훌륭한 무대 매너와 비교될 정도의 입담을 자랑하는 뮤지션도 아직 무대에서 만나보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전통적인 로큰롤 악기 구성에 별다른 무대장치도 없이 공기의 밀도를 꽉 채우는 압도적인 사운드메이킹 능력을 보여준 연주실력을 가진 뮤지션도 아직 목격하지 못했다. 윌코의 음악을 좋아하는 한국팬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공연을 보라”고 강력 추천하는 이유는 이미 충분한 셈이다. 그들의 공연을 본 사람이라면, 가장 미국적인 음악을 하는 밴드 중 하나이자 밥 딜런과 브루스 스프링스틴 이후 노동자 계층을 대변하는 음악을 꾸준히 해온 밴드, 거기에 더해 미국 인디씬의 흐름을 정의내리고 한 시대의 기틀을 확립한 밴드라는 타이틀이 그리 거창하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제프 트위디(Jeff Tweedy)는 윌코의 보컬이자 리더이자 알파요 오메가인 아티스트다. 일리노이의 작은 마을에서 노동자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여섯살 때 기타를 선물받고 12살 무렵 자전거 사고로 한동안 집에서 휴식을 취해야 했던 시기에 본격적으로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로커빌리와 컨트리 음악을 연주하던 로컬 밴드의 보컬로 음악 커리어를 시작한 뒤 윌코라는 영광의 시기로 접어들기 시작하던 무렵부터 그는 약물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지난해 첫번째 솔로 음반 [WARM]을 발매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출간한 (역시) 첫번째 회고록 [Let’s Go]에서 그는 한평생 공황장애와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이로 인해 약물(주로 진통제를 언급하고 있다)을 5주 이상 끊은 적이 단 한차례도 없음을 밝힌바 있다. 어쩌면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은 팬들을 기다리게 만든 그의 첫번째 솔로 음반은 모두의 예상만큼이나 개인적이고, 많은 이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둡다. 그리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경지에 다다르고 있다. 이 음반으로 인해 트위디가 윌코의 보컬리스트라는 이미 높은 명성에서 한단계 더 높은 단계로 진화하였음을 직감한다. 음반의 형태로 시현된 제프 트위디의 자서전이자 그를 평생 괴롭혀온 정신질환과 약물중독, 그로 인한 죽음에 대한 깊은 공포감을 솔직하고 과감하게 담아낸 섬뜻한 수필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이런 나도 아직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여러분도 다시 한번 힘을 내보는 것이 어떨까”라고 묵직하게 던지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메시지가 아무리 좋아도 음악이 별로면 말짱 꽝이기 마련이다. [WARM]의 수록곡은 메시지와 음악적 형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의 음악적 커리어의 근간이자 뿌리인 컨트리와 포크 음악에 두 발을 단단히 디딘 채 새로운 시도를 하기 보다는 가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악기 연주는 제프 트위디가 직접 했는데, 그의 두 아들인 스펜서와 새미 트위디가 각각 드럼과 백킹 보컬로 참여한 점이 이채롭다. (제프 트위디는 2014년 아들 스펜서와 함께 [Sukierae]를 발매한 적이 있다) 가족의 참여는 그로 하여금 조금 더 진실된 목소리를 내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보게 된다. (아래 지미 키멜 라이브 영상에서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백킹 보컬을 하는 이가 아들 새미다) 11곡의 수록곡은 격정적인 정점이나 화려한 편곡같은 ‘할리우드적 포인트’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의 목소리를 조근조근 따라가다보면 결코 지루하지 않게 몇 번을 반복해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밀도가 높다. “Having Been Is No Way to Be”에서는 약물 중독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네가 과거에 했던 마약은 뭐야?
왜 그걸 다시 시작하지 않지?
하지만 그건 내 친구들이 아니야
그리고 만약 내가 죽으면
마약때문에 기분이 좋아진다는게 다 무슨 소용이야


“Bombs Above”에서는 지나온 삶을 회고하며 참회한다.

내가 살아온 인생의 대부분은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 위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일과 같았어
정식으로 사과하고 싶네
전쟁을 멈추기 위해 조금 더 많이 노력해야 했어
정말 미안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이 내 손을 잡고 이야기했어
고통은 모든 이에게 마찬가지라고
그는 옳았어.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기엔 너무 잘못되었지


제프 트위디의 통렬한 자기고백은 거의 모든 곳에서 너무나 직설적이고도 시적인 방식으로 반복된다. 아름다운 선율과 단촐한 악기구성,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얹혀 전달되는 가사는 침울한 진실성으로 가득차 있다. 이것이 절망인지, 희망인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그는 가라앉아 있지만, 그의 따뜻한 목소리는 노래를 듣는 타인까지 가라앉히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나만 더 예를 들어볼까. 노아의 방주 신화를 차용한 “Let’s Go Rain”은 시니컬한 자기비하와 리스너에 대한 존중이 함께 들어있는 전형적인 트위디 풍의 가사로 이루어져 있다.

오, 나는 노아의 홍수에 대해 들은 적이 있어
세상의 모든 죄를 씻어버렸지
누군가는 파괴가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고 이야기하지
그리고 난 그게 한번 더 일어날거라고 생각해

내가 한때 크리스찬일 때는 말야(역자주: 트위디는 그의 유대인 아내를 따라 최근 유대교로 개종했다)
그걸 알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어
그런데 지금에서야, 하늘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 나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
하늘이 오줌을 갈길 때 비로소 난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겠지

오, 난 나무배를 만들어야겠네
나와 함께 기타의 바다에 살지 않겠어?


음악은 아름답다. 가사는 진솔되다. 좋은 음반이 아닐 이유가 없다.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어야 하는 음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