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nolaterthannow

born as Seoulite, missing Boulder, and loving wife

황정은 | 백의 그림자

SNS의 내 타임라인에는 독서광인 친구들의 계정이 몇 있다. 요즘에는 그들이 극찬한 책을 즐겨찾기에 저장해두었다가 어느 정도 쌓이면 한꺼번에 주문하는 패턴으로 책을 산다. 소설가 황정은의 2010년작 [백의 그림자] 역시 그런 방식으로 읽게된 책들 중 하나다. 170쪽 남짓한 짧은 소설인데, 읽는 내내 책을 손에서 뗄 수 없을 정도로 문장이 쫀뜩하게 맛이 있고, 책을 다 읽고 덮은 후에도 마음 속에 묵직하게 생각할 것들을 남겨주는, 좋은 소설이다. 황정은의 소설은 이 책이 처음인데, 작가 특유의 문장이나 서사구조, 글에 색을 입혀 나가는 방식이 가히 ‘황정은풍’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독창적이고 압도적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무척 ‘영화적’이라고 느꼈다. 시각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좋은 영화, 예컨대 허우샤오시엔이나 미하엘 하네케의 영화를 볼 때 관객은 영화의 전체적인 서사를 따라감과 동시에 곳곳에 뿌려진 많은 단서들로부터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를 함께 파악하게 된다. 흔히 말하는 구조주의적 색채가 있는 영화들에서 말이다. [백의 그림자]는 문장과 문장이 연결되는 구조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를 헤아리게 된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은 영화를 보는 경험과 상당히 유사한 예술적 경험을 제공하는 것 같다. 그런데 거의 모든 문장이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쓰여 소설 전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장시처럼 읽히기도 한다. 흐름이 끊어지지 않고 매끄럽게 이어지는 과정에서 독특한 리듬마저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막스 리히터나 닐스 프람의 음악을 듣는 것 같기도 하다. 형식적인 면에서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다른 차원으로 날라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 형식 안에 담고 있는 내용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소설 뒤에 함께 실린 신형철의 평처럼 이 소설은 대단히 윤리적인데, 그 예술에서의 윤리성이란 것이 사실 조금만 흐트러져도 우스꽝스러워지거나 또다른 폭력으로 탈바꿈할 위험성을 지니고 있어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백의 그림자]는 예술작품에서 윤리성이 담보해야 하는 최대한의 것을 성취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누구도 해하지 않지만, 피상적이지도 않은, 가만히 어루만져 주지만 깊은 위로가 되는, 절묘한 그 어딘가를 찾은 느낌이다. 책을 덮자마자 작가의 다른 작품도 얼른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여선 | 레몬

장편보다는 중편에 가까운, 스릴러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탓에 더 빠르게 읽히는 책으로 권여선이 돌아왔다. 그의 책을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다.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서를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하지만, 지나치게 감상에 젖어 현실을 흐리게 보는 우를 저지르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의 문장은 따뜻하지만 서늘하고, 포근하지만 날카롭다.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레가토], [분홍 리본의 시절] 모두 그런 문장으로 쓰인 이야기들을 품고 있었다. [안녕 주정뱅이]는 권여선이 동시대 가장 중요한 작가라는 사실을 만인에 각인시킨 의미있는 소설집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여기저기 찾아보니 [레몬]은 권여선이 과거에 연재한 중편을 다듬은 결과물이라 하고, 원작은 지금보다 더 짧았다고 한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은 복수에 대한 이야기다. 의문의 사고로 형제를 잃은 한 사람이 16,7년에 걸쳐 복수의 길을 걷는 한편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설은 몇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마다 화자가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사건을 조금씩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스릴러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고 분량이 짧은 편이며 화자의 구성 또한 다양하기 때문에 책장은 술술 넘어간다. 기존의 권여선 소설과 다르게 서사구조 그 자체만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 또한 흥미로운데, 사건의 본질에 접근해가며 서서히 변해가는 주인공의 심리와 함께 책을 덮은 후에도 꽤 묵직한 생각할 꺼리를 남겨둔다. 많은 이들이 언급한 바와 같이 사회적 문제를 적극적으로 껴안고 있기도 하다. 세월호 이후 남겨진 심리적 채무, 극복될 수 없는 계급 간 차이, 신에의 의지를 통한 현실의 망각과 왜곡 등의 문제가 작품 곳곳에 꽤 묵직하게 스며들어가 전체적인 주제를 형성하는데 일조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결국 자신의 방식대로 복수를 완수한다. 하지만 복수의 책임은 여전히 남아 있다. 사랑하는 형제를 온전히 떠나보내는 데에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이후 남겨진 이들이 가지고 가야 할 짐의 무게는 많이 줄어들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앞서 이야기한 권여선 특유의 연민의 정서가 소설속 낮은 계급에 속한 이들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면, [레몬]의 마지막 부분에서 연민에 더한 애도의 정서가 분출된다. 떠나보내도 떠나지 않는 것이 남아 있다. 애도는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품는 것이 아닐까. 소설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줌파 라히리 | 내가 있는 곳

줌파 라히리가 모국어인 영어를 버리고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겠다고 선언했을 때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문장과 글에 인생을 걸고, 결국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두루 쓰이는 언어를 가장 아름답게 직조한다는 찬사를 받게 된 사람이 어느 순간 다른 언어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언어적 이민을 선택할 수 있다니, 대단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자 꽤 뜨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건 라히리 개인에 대한 찬사와 존경이지, 라히리의 글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다른 온도로 다가온다. 특히나 한국어가 모국어인 나와 같은 변방의 독자에게는, 조금 차갑게 표현하자면 라히리가 영어로 글을 쓰든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든 대수롭지 않은 변화로 느껴질 수 있다. 어차피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읽는 입장에서는 정말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한국어와 영어 외에는 읽을 수 있는 언어가 없는 나에게는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를 그녀의 모국어인 영어로 읽는 것이 그녀의 문학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었다. 마찬가지 차원에서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도, 이언 매큐언의 책도, 코맥 맥카시의 책도, 이창래의 책도, 주노 디아즈도, 크리스 리도, 앤드루 포터도… 최소한 한 권의 책은 그들의 모국어인 영어로 읽었다. 그래야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읽는다 해도 번역되기 전 원어 상태의 문장이 가지고 있던 질감을 조금이나마 유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어로 쓰인 책을 읽는 데에는 시간도 더 오래 걸리고 머리도 아프다. 휴대폰 영어사전을 옆에 펼쳐 놓고 모르는 단어를 계속 찾아가며 읽어야 하기 때문에 집중력도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장은 그 지역의 특산품이기 때문이다. 지역을 떠난 언어는 갈 길을 잃고 방황하기 마련이다. 날 것의 문장을 발견하는 것은 그 지역을 방문하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만든다.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위와 같은 차원에서, 라히리와 나의 사이가 조금 더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가 쓴 글의 원문을 찾아낸다 해도 더이상 읽어낼 능력이 없다. 그녀의 문장들은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렸다. 이탈리아어로 쓴 첫번째 소설 [내가 있는 곳]이 더 쓸쓸하게 느껴지는 개인적인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

이 소설은 아주 짧은 호흡의 챕터들도 엮어 있다. 짧은 것은 한 쪽, 긴 챕터라고 해봐야 일곱 쪽이나 될까. 호흡이 너무 짧아 쉽게 몰입할 수 없다는 단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이렇게 소설을 구성했다는 것은 그 짧은 분량 안에서도 충분히 라히리 특유의 풍성한 감정을 녹여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소설은 라히리의 세계에서 익히 보아온 쓸쓸한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 주인공 여성은 40대를 넘긴 여성 학자다. 학교에서 일하며 결혼을 하지 않았다. 더이상 다가갈 수 없는 친구를 사모하며, 유부남과의 뜨거운 기억도 가지고 있지만, 부모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과 몇 번의 실패한 사랑 등이 얽혀 현재는 고독을 친구 삼아 평생 살아온 도시를 방랑자처럼 경험하고 있다. 충분히 라히리의 소설이라 할만한 색깔을 지니고 있다.

소설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장소를 중심으로 주인공의 심리를 표현하고 있지만 결코 특정 장소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정 지명 등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장점으로 풀이될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의 경우 그보다는 조금 상투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라히리 소설의 주독자층인 30대 이상의 여성이 쉽게 공감할만한 내용을 도구처럼 여기저기 배치시킴으로써 짧은 챕터 구성으로 인한 몰입도 저하를 상쇄하고자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모든 남자를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는 아닌” 주인공이 행하는 거의 모든 행동은 너무나 범세계적이어서 독자는 스스로를 주인공에 투영시키기가 무척 쉽게 느껴질 것이다. 마치 “넌 소심하니까 A형이지?” 와 같은 혈액형 맞추기 게임을 보는 느낌도 든다.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범용적이고 모범적인 답변지의 인상.

[내가 있는 곳]은 줌파 라히리의 전작들과 비교하면 범작에 가깝다. 그가 오랜만에 신작 소설을 내준 것 자체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탈리아어로 떠난 그의 언어가 더이상 내게 감동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약간 서글퍼졌다. 나는 그녀의 영어 문장을 사랑했다. 과거형이다.

에이미 골드스타인 | 제인스빌 이야기

학부 시절 경제학을 처음 배울 때 한 교수님이 일제 강점기의 생활상을 경제학적으로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이야기하며 당시 측정된 학생들의 신체조건의 비약적인 발전을 예로 든 적이 있다. 즉, 일제강점기 초기에 비해 후기로 갈수록 한국인의 신장 및 체중이 유의한 수준에서 지속적으로 개선되었다는 통계분석 결과는 당시 피지배계층이었던 한국인의 영양상태가 전반적으로 개선되었다는 가정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결과는 일제 강점기를 바라보는 두 완전히 다른 시각 – 식민지 근대화론과 식민지 수탈론 – 중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가 한반도의 경제적 근대화를 촉진시켰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될 여지가 있었다. 대학 시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일제 강점기에 대한 ‘상식’과 대치되는 내용이어서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이와 함께, 식민지화, 혹은 독립운동과 같은 ‘거시적’인 사회담론이 같은 시대를 살다간 이름 없는 민초의 ‘미시적’인 삶과 얼마나 괴리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고민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는 거시경제정책을 전공으로 삼아 공부하고 있지만, 재정정책이나 통화정책과 같은 거대하고 뭉툭한 정책이 그 영향력 아래 있는 서민 개개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꾸게 되는지 추적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결코 게을리 해서는 안되는 고민의 영역이기도 하다.

[제인스빌 이야기]의 원제는 [Janesville: An American Story]다.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 에이미 골드스타인이 쓴 르포르타주인데, 금융위기 직후인 2008년부터 금융위기의 여파로 제인스빌의 GM공장이 공식적으로 폐쇄된 2013년까지 5년 간 제인스빌에 사는, 혹은 이 도시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의 원제가 상징하듯, 이 책은 제인스빌이라는 위스컨신의 작은 도시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경제대공황 이후 미국사회가 겪은 가장 큰 경제위기였던 2008년 금융위기가 어떻게 미국인의 평균적인 삶을 바꾸어놓았는지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기도 하다.

이 책은 크게 세 축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한 축은 제인스빌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던 중산층 가족들이다. GM와 리어, 파커 펜 등 우리도 알 법한 글로벌 대기업의 공장에서 착실히 모기지 대출을 갚아나가던 이들이 금융위기라는 외부충격으로 인해 순식간에 직장을 잃어버린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실직자가 된 이들은 새로운 밥벌이 수단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좌절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희망을 움켜쥔다. 십만명이 채 되지 않는 인구의 소도시 제인스빌이 공동체의식을 기반으로 큰 위기를 버티어내는 과정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이 책이 전달하는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다. 이들을 돕기 위해 애쓰는 위스컨신 지역의 공동체 리더들이 이 책의 두번째 축을 담당한다. 이들은 직업학교를 확장하여 실직자들의 재취업을 돕고, 실직자 부모를 둔 학생들이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학교 안에 생필품을 제공하는 작은 창고를 운영하며, 워싱턴의 정치인들이 위스컨신의 작은 마을에 아주 약간의 관심이라도 둘 수 있도록 동분서주한다. 이들의 노력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다. 수천명이 직업을 잃었지만 직업학교를 통해 재취업에 성공한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GM공장은 결국 영구적으로 폐쇄되었고, 제인스빌 공동체는 정치적으로 분열되었다. 작은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 성공적이지 못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워싱턴의 거대 정치가 지역사회의 실체적 삶과 괴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인스빌 출신의 정치인 폴 라이언과 위스컨신 주지사 스캇 워커 등으로 대변되는 정치인들이 이 책의 다른 한 축을 차지한다. 예산통인 폴 라이언은 고향의 민심을 등지고 워싱턴 중앙정치로 나아간다. ‘선동가’ 스캇 워커는 경기침체의 직격탄을 받은 위스컨신의 서민들을 위한 예산을 대폭 삭감한다. 지역사회의 외침은 이들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선거 전 제인스빌 연설에서 공장을 반드시 살려 내겠다고 공언한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결국 그 도시에서 가장 큰 공장들을 폐쇄했다.

이 책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며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 영민함을 보여주면서도 르포르타주의 생생함과 금융위기 이후 시행된 경제회생 정책의 비현실성을 향한 비판의 날카로움은 놓치지 않는다. 극한 상황에 처한 개인이 가족과 공동체를 포기하기 않고 존엄성을 유지하는 과정을 과장되지 않은 묘사를 통해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한편, 이들이 그런 어려운 상황까지 되지 않게 할 수도 있었을, 혹은 이후 회생의 속도를 더 빠르게 할 수도 있었을, 아니면 이 책에 등장하는 한 여인이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지 않게 할 수도 있었을 수많은 기회들이 허무하게 사라진 현상의 본질을 맹렬하게 파고든다. 5년이 넘는 밀착취재와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터뷰, 각종 정책에 대한 깊은 이해 등이 어우러져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긴박함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즈와 뉴욕 타임즈, 월스트릿저널 등 각종 매체에서 그 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하였고, 이 책의 조연(?) 중 한 명인 오바마 전 대통령 등으로부터도 찬사를 받았다.

이 책은 지금까지 경제학자들이 믿고 있던 통념들 중 상당 부분이 실제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일깨워준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실업자에 대한 직업교육의 효과성이다. 제인스빌 주민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 그 지역에 있는 블랙호크 직업학교를 수료한 실직자보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은 고졸 실직자가 재취업에 성공한 사례가 더 많으며, 재교육 과정을 수료한 실직자 중 상대적으로 더 많은 비율이 간헐적 노동에 종사하며 더 낮은 임금을 받았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실업과 관련된 정책을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는 부분이 실직자 재교육을 통한 구직기간의 단축인데, 제인스빌에서는 이 정책이 제대로 먹히지 않은 것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먼저 숙련노동자(skilled labor)와 비숙련노동자(unskilled labor)간 직업이동의 차별성이 존재할 수 있다. 변호사나 대학교수는 숙련노동자에 해당하며, 상대적으로 직업안정성이 뛰어나다. 편의점 파트타이머와 같은 비숙련노동자는 언제든 비슷한 수준의 다른 노동자로 대체될 수 있기 때문에 직업안정성이 떨어진다. 때문에 비숙련노동자에 대해 직업안정성을 높여주는 정책이 사회 전체적인 실업률 억제를 위해서 효과적일 수 있다. 제인스빌에서 일하던 GM공장 노동자들은 대부분 고졸이었다. 하지만 길게는 30년 가까이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일한 경험을 가진 이들을 비숙련노동자로 분류할 수 있을까? 고도로 분업화된 생산체계에서 10년 넘게 장기간 하나의 기술에만 종사해왔다면, 이들이 갑작스러운 실직 이후 약 2년여의 재교육기간을 거쳐 완전히 다른 직종에 지속적인, 혹은 정규직 직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까? 차라리 지금까지 해왔던 같은 일을 지속할 수 있는 다른 지역으로 터전을 옮기는 쪽을 택하는 것이 더 현명할 수 있다. 다시말해 노동이동(labor immigration)이 자연스럽게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온 맷의 예가 이에 해당한다. 고소득을 보장받는 숙련노동자도, 대체성이 높은 대신 다른 직종으로 변환하기도 쉬운 비숙련노동자도 아닌 이 장기 제조업 종사자들은 기존의 이론대로 직업교육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한다는 결과는, 결국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터전인 특정 지역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직업적 전문성을 계속 발휘하는 일은 금융위기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의미인데, 이는 지역사회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 책의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우선 군산의 예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GM 군산공장은 2015년 공장의 폐쇄를 통보했다. 이 공장에서 일하던 500여명의 노동자와 GM 하청업체에서 일하던 500여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지역사회 경기는 꽁꽁 얼어붙었다.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은 당장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해했다. 평생을 컨베이어 벨트에서 살아온 이들이 갑자기 학원을 차리거나 간호사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은 실업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라다. 또한 직종간 이동이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나라다. 아직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유효하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2019년 5월, 폐쇄된 GM 군산공장을 국내 한 컨소시엄이 인수한다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지역 상공회의소와 중앙정부가 노력한 결과다. 고용은 대부분 승계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세금이 들어갔다. 사기업의 경영판단으로 인한 사회적 파장을 정부가 어디까지 관여해야 하는가는 지금도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첨예한 논쟁거리다. 한국사회는 대기업의 회생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정부의 과감한 개입을 요구하여 왔다.

신도시가 생기면 가장 먼저 상권을 장악하는 수많은 치킨집도 떠오른다. 대기업 본사의 경영지침에 따라 자유도가 허락되지 않는 환경에서 치킨집을 운영하는 이들은 대부분 평생 치킨을 튀기는 일과 무관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들의 실패에 대해서는 본사가 책임지지 않는다. 전문성을 충분히 획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은퇴자금을 쏟아부은 이들은 대부분 2년 안에 수익을 회수하지 못한다. 남들보다 조금 빠른 은퇴를 선택했거나 은퇴로 내몰린 이들이 가지고 있던 선택지 중 치킨집이 정말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을까? 대우조선과 같은 대기업에 천문학적 세금을 쏟아부으며 회생절차를 돕고 있는 정부는 하루에도 몇백개의 치킨집이 문을 닫는 현상에 대해서는 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것일까? ‘대마불사’가 아니라 ‘소마불사’의 시각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알리체 로르와커 | 행복한 라짜로

오늘 우리 부부는 오랜만에 대전역 부근으로 나들이를 떠났다. 중앙시장 부근에 차를 주차해두고 대전아트시네마에서 [행복한 라짜로]를 보았고, 중앙로역 부근에 있는 오래된 식당에서 두부 두루치기와 부추전을 먹은 후 다시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왔다. 대전역에서 세종시까지 오는 길은 차로 운전하면 대략 50분 정도 걸리는데, 대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인 대전의 동쪽 끝에서 출발하여 입주가 시작된지 10년이 채 되지 않은 서쪽 끝 세종으로 오는 길은 몇십년의 세월을 단 몇십분만에 축약해서 경험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대전의 도시개발이 대전역을 중심으로 한 동쪽의 구도심을 그대로 방치해 둔 채 서쪽으로 옮겨가며 이루어졌고, 대전 내에서 가장 신도시라고 할 수 있는 도안과 반석의 바로 왼쪽에 세종시가 또다시 새로 만들어졌으니, 어쩌면 그런 경험이 아주 틀렸다고도 할 수 없는 셈이다.

[행복한 라짜로]를 보면서도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우리가 흔히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르는 경험이 가능한 작품이다. 소작농들을 착취하는 농장주와 주인공 라짜로를 착취하는 농부들, 그리고 아무도 착취하지 않는 라짜로의 모습이 영화의 전반부를 채운다. 근대적인 방식의 착취가 죄책감 없이 이루어지는 작은 지옥에서 라짜로는 타인을 의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저 선한 존재로 존재한다. 농장주의 아들과 우애를 맺은 후 라짜로의 일상에는 미묘한 균열이 발생하는데, 그의 새로운 친구가 작은 소동을 일으키며 영화의 전반부는 작은 지옥의 갑작스러운 종말로 마무리된다. 라짜로가 사고를 겪은 후 다시 깨어나면서 시작되는 영화의 후반부는 조금 더 크고 현대적인 지옥의 모습을 전시한다. 농장주로부터 착취당하던 농부들은 차가운 도시에서 조금 더 크고 세련된 시스템에 여전히 착취당하는 한편, 마찬가지 방식으로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착취하고 있었다. 농부들을 착취하던 근대적 귀족 역시 은행과 자본이라는 현대 자본주의의 전도사에 착취당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지옥을 살아가기 위해 인간성을 버려야 했던 이들의 눈 앞에 몇십년 전과 똑같은 모습의 라짜로가 나타났을 때, 성자로 현현한 그의 존재를 알아본 이는 시골마을에서 성자의 그림에 입을 맞추던 여자 한 명 뿐이었다. 영화의 후반부는 성자 라짜로의 수난과 기적을 리얼리즘의 색채 안에 담아내며 영화를 다른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먹고 먹히는 나선의 지옥도에서는 성자를 알아보는 것조차 쉽지 않다. 이토록 갸날픈 영혼을 지닌 현대의 이웃들에게 라자로는 결코 절망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고, 착취의 시스템에 포섭되어 약자를 내치는 위치에 서버린 교회에서 음악을 훔쳐내어 공기 중에 흩뜨려 주며, 수난의 십자가를 기꺼이 떠안으며 모두를 위해 고통을 감수한다. 라짜로의 존재는 세상을 대신 바꾸어주는 영웅이 아닌, 세상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성자의 모습 그 자체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1988년작 [안개속의 풍경]이 떠올랐다. 아빠를 찾아 그리스의 거친 현실 이곳 저곳을 떠도는 어린 남매의 순례기는 이 영화를 처음 보던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는데, 이 영화가 한없이 아름다운 곳이라고만 생각했던 그리스의 뒷골목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준 것처럼 [행복한 라짜로]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한없이 아름다울 것만 같았던 이탈리아라는 나라에 깊숙히 자리잡은 절망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선 두 영화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교차 지점은 두 영화 모두 지독한 절망 속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절대적인 희망의 존재를 무척 영화적인 방법으로 아름답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우리는 늘 신에게 기도한다. 기도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자신의 안위를 부탁한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 신을 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기도 중에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기독교적 세계관을 상정하지 않더라도, 라짜로처럼 깨끗한 영혼이 우리 주변에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빵 한조각을 떼어 내어 줄 수 있을 정도의 넉넉함을 가지고 있을까. 끊임없이 그의 이름을 불러대며 잡일을 시키지는 않을까. 내 마음에 낀 때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되는 영화다. 올해 남은 기간동안 어떤 영화를 더 보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그와 상관없이 이 영화는 올해 최고의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데이미언 셔젤 | 퍼스트맨

데이미언 셔젤의 [퍼스트맨]도 지난 3월 중순 사우스캐롤라이나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본 영화다. [위플래쉬]는 굉장히 안좋게 봤고 [라라랜드]는 나쁘지 않게 봤다. 데이미언 셔젤은 분명 재능 넘치는 영화감독이지만, 그가 영화라는 예술 분야의 본질을 깊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영상, 혹은 음향과 같은 기술적인 부분이 관객에서 어떤 육체적 효과를 불러오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그 쪽의 ‘재주’를 이용해 관객의 심리에까지 영향을 미치려는 노력을 해왔다고 판단한다. 그런 그가 [퍼스트맨]을 통해 닐 암스트롱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내면으로 들어가보려는 노력을 했다는 점에서 우선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기특했지만, 역시 결과적으로는 실패할 것이라는 예상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많은 평론가들이 평가한 것과 내 생각은 조금 많이 다르다. 촬영 및 음향 등 기술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탁월한 성취를 이루었으며, 라이언 고슬링이 연기한 닐 암스트롱이 가진 내면의 고충 역시 나름의 설득력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드러내고자 했던 철학적 깊이는 얄팍하다. 영화의 결말에서 무언가 깊은 성찰을 이끌어내려 했지만, 감독이 가진 이해의 폭 자체가 피상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 보니 동명의 원작 평전 이상의 깊이를 결코 보여줄 수 없었던 듯 보인다. 세상을 떠난 딸의 팔찌를 우주로 떠나보내며 눈물을 흘리는 닐 암스트롱의 모습에서 관객은 감동도, 깨달음도 얻을 수 없다. 그저 개인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써가며 국가적인 차원에서 달에 가려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미국이 달에 간 이유는 지극히 정치적이며 도구적이었다. 이걸 개인의 극복 서사로 포장하여 영화적으로 그럴듯하게 표현하는 것은 그 자체로 현실을 외면한 기만이다. 달에 가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지만, 그 안에서 철학적인 성찰을 이끌어내고 싶었다면 달 착륙과 관련된 거시적 컨텍스트를 완전히 지워버리면 안되는 것이었다. 결국 관객은 ‘또 미국식 가족 신파야? 달 위에서 울려고 두시간동안 그렇게 고뇌한거야?’라는 하품 섞인 하소연만을 할 뿐이다.

셔젤이 닐 암스트롱을 주제로 액션 SF 어드벤처를 찍을 것이라고 기대한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고색창연한 필름을 이용해 영웅의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시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아폴로 11호와 관련된 모든 영화들 중 가장 사색적인 영화일 것이다. 다만 꽤 괜찮은 시도만이 있을 뿐, 의도했던 성과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 이 영화가 가진 뼈아픈 실책이다. 이건 감독이 조금 모자라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을 것이다.

Peter Farrelly | Green Book

3월 중순,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본 또다른 영화는 [그린북]이다. 이 영화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한 클래식/재즈 피아니스트 돈 셜리(Don Shirley)와 그가 미국의 남부(“Deep South”) 지역 순회공연을 위해 고용한 프랭크 발레롱가(Frank Vallelonga)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를 감독한 피터 패럴리의 전작들이 [덤 앤 더머],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와 같은 코메디물이고, 프랭크 발레롱가의 아들 닉 발레롱가(Nick Vallelonga)가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여 돈 셜리라는 실존 인물을 왜곡하여 다루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등, [그린북]을 둘러싼 잡음과 의구심이 상당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충분한 사회적 의미와 영화적 매력을 가지고 있다.

먼저 의미라 함은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가 그리 가볍지 않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돈 셜리는 흑인이었고, 그가 발레롱가와 함께 남부지역을 여행한 때는 1960년대였다. 즉, 비교적 인종차별에서 자유로웠던 미 동북부 지역이나 서부 지역과 달리, 당시 우리가 ‘”Deep South”라고 부르는 남부 7개 주에서는 흑인이 백인 밀집지역을 돌아다니면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때였다. 셜리가 클럽 기도 등 ‘해결사’ 역할로 생계를 유지하던 덩치 발레롱가를 운전기사 겸 보디가드로 고용한 이유도 이때문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공항에 내렸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곳에 남부군 깃발(Confederate Flag)이 걸려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고, 실제 친구 스캇의 결혼식 뒷풀이에서 그곳에 살던 몇몇 백인들이 나에게 다가와 “네가 들었던 악명과 비교해 실제 남부에 와보니 어때?” 라고 농담 반 진담 반 질문을 던졌다. 당연히, 스캇의 성대한 결혼식에 참석한 아시안은 나 하나였다. 비록 지금은 흑인과 백인이 함께 길거리에서 공존할 수 있는 환경까지 조성이 되었다고 하지만, 흑인 입장에서 ‘내 조상이 저기 보이는 백인의 조상의 노예였다’ 라는 사실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며, 그건 백인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가 선거운동을 할 당시 흑인 인구비율이 가장 높은 이 남부지역에 한번도 오지 않았다는 기록은(그는 백인 인구비율이 압도적이었던 콜로라도나 아이오와 주에 10번 이상 들렸다), 그 많은 남부지역 흑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의 주인’이었던 농장주의 후손들이 지지하는 보수정당에 투표한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슬픈 통계지표일 것이다. [그린북]은 현재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미국 남부지역의 이 슬픈 사회적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진중하고 조심스러운 자세로 접근한다. 물론 감독의 성향(..) 상 어이 없는 지점에서 도덕적 기준을 상실하는 순간도 발견되긴 하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밑도 끝도 없는 헤피엔딩’은 아닌 것이다.

재미도 있다. 전형적인 버디 무비가 될 뻔한 이 영화를 구워한 것은 다름 아닌 두 주연배우, 비고 모르텐슨(Viggo Mortenssen)과 마허샬라 알리(Marhershala Ali)다. 비고 모르텐슨은 아주 자연스럽게 인종차별을 체득한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분해 돈 셜리와의 여행을 통해 성장하는 캐릭터를 훌륭히 연기해냈다. 물론 캐릭터의 전형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교양 없는 서민계층 백인이 훌륭한 음악에 감화되어 그동안 고수해온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꾼다는 설정도 약간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능청맞게 이탈리아식 영어 억양을 구사하는 그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절로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문라이트]에서 매우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 마허샬라 알리는 [그린북]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역량에 걸맞는 주목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연기하는 교양 넘치는 흑인 피아니스트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연기 교본으로 쓰일 수 있을 것 같다. 실제 돈 셜리는 클래식 피아니스트로 출발했지만 유리장벽 등으로 인해 그 바닥에서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그나마 흑인 뮤지션이 활동할 폭이 넓은 재즈/크로스오버 장르로 넘어왔다고 한다. 심지어 당시 상당한 탄압을 받던 성정체성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방대한 역사적 컨텍스트를 절제된 연기에 담아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걸 알리가 해냈다! 그의 연기를 보며 ‘탁월하다’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린북]은 완벽한 영화는 아니다. 헛점도 많고 한계도 분명하다. 생각보다 가볍다고 느끼는 관객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꽤 모범적인 수준에서 주제를 잘 형상화했고, 두 배우의 인상깊은 연기가 영화에 깊이를 더해주며 나쁘지 않은 영화적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Marielle Heller | Can You ever Forgive Me?

지난 3월 중순, 1박 4일(?)의 끔찍한 여정을 소화하며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다녀 왔다. 미국 유학시절 사귄 친구 스캇의 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는데, 학기 중이라 주말 밖에 시간을 내지 못해 기형적인 여정이 나와버렸다. 친한 친구의 행복한 날을 축복해주기 위해서라면 얼마를 쓰든 며칠을 길 위에서 허비하든 크게 개의치 않지만, 이제 더이상 청년이라고 우길 수 없는 나이대로 접어들어서인지 육체적으로 쌓이는 피로는 피할 길이 없었다. 비행기 소음에 취약해 기내에서 잠을 잘 자지 못하는 치명적인 약점까지 겹쳐져 이번 여행은 오고 가는 길이 유난히 힘들었다. 덕분에(..) 기내에서 많은 영화를 보았는데, 지금까지 생각나는 영화가 몇 편 있다. 그 중 하나가 실존인물이 직접 쓴 회고록을 기반으로 만든 [Can You ever Forgive Me?]다.

영화속 리 이스라엘(Lee Israel)은 괴팍한 성격을 가진 실패한 작가다. 일은 잘 풀리지 않고 술만 늘어간다. 비사교적인 성격은 그를 점점 고립시킨다. 그녀의 삶에 작지 않은 변화를 불러일으킨 건 우연히 발견한 유명작가의 서명이 들어간 편지였다. 중고서점 등을 통해 유명작가의 서명이 들어간 편지가 고가에 거래된다는 사실을 알아낸 리 이스라엘은 작가적 능력을 발휘하며 직접 위조편지를 작성하여 여러 서점에 팔아 넘기기 시작한다. 명백한 범죄인 셈인데, 영화는 당연히 순리에 맞는 결말로 침착하게 나아간다. 큰 반전 없이 처벌을 받게 된 주인공은 투닥거리는 와중에도 그녀를 위로해주던 하나 뿐인 게이 친구가 에이즈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개인적인 고통도 경험한다. 사실 특별할 것 없이 뻔한 이 영화를 피로가 켜켜이 쌓인 빨간 눈을 부릅뜨고 끝까지 본 이유는 주인공 리 이스라엘 역을 소화한 배우 멜리사 맥카시(Melissa McCarthy)의 연기때문이다. 그녀의 연기는 너무도 탁월하여 알콜 중독에 성격까지 고약한 범죄자 여성을 특별한 캐릭터로 탈바꿈시켜버린다. 영화는 결코 리 이스라엘의 삶에 동정이나 연민의 시선을 보내지 않지만, 맥카시의 연기를 통해 한번쯤 주변에 있을 법한 이웃의 모습을 성공적으로 그려낸다. 영화에서 연기자의 힘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조던 필 | 어스(2019)

[겟아웃]으로 세상을 놀래킨 감독 조던 필(Jordan Peele)의 신작 [어스(Us)]는 국내 개봉 당시 극장에서 본 영화다. 아내와 함께 [겟아웃]을 보았을 때 꽤 신선하고 기분 좋은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조던 필의 신작을 손꼽아 기다리던 터였다. [어스]는 그의 담대한 시선이 조금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갔을 때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전작이 서스펜스의 형식을 띠고 있다면 [어스]는 조금 더 기존 공포영화의 틀에 가까운 외형을 띠고 있다. 관객 심리를 들었다 놨다 하는 장르적 특성을 십분 발휘하여 서사를 본인이 원하는 지점까지 무리 없이 끌고 간 후, 영화가 품고 있는 가장 큰 반전을 영화의 주제의식과 한 몸처럼 꽉 끼워맞추는 재주는 이번 영화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 점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제목 [어스(Us)]는 주인공 가족, 그리고 그 가족과 대립하는 또다른 가족을 구분 짓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The United States)을 상징하는 약어(US)로도 읽힌다는 점에서 감독이 영화에서 제기하고 싶어했을 미국사회의 양면성, 즉 계급 갈등과 인종 갈등 문제에 대해 머뭇거리는 태도 등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고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영화는 비록 끔찍한 비극으로 마무리되지만, 조던 필 특유의 낄낄거리게 만드는 유머는 이번에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미국사회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수록 그의 디테일한 비유와 풍자가 영화 곳곳에 스며들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요즘 사회에 꼭 필요한 감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트럼프로 대변되는 미국 주류 백인사회에 대항하는 공격수로 이만한 예술가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극장 밖을 나선 후에도 꽤 오랜 기간 곱씹어볼만한 이슈를 제시한다. 영화라는 장르를 이용하여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고민할 때 가장 먼저 참고해야 할 레퍼런스다. 주인공 역을 맡은 루피타 은용고(Lupita Nyong’o)의 참담한 표정과 목소리가 아직도 생각난다.

수잔 존슨 |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2018년 넷플릭스 월드에서 뜨거운 화제를 모았던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는 화제성만큼 충분히 귀엽고 재미있는 영화다. 한국계 작가 제니 한(Jenny Han)의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영화적 상상력이라는 방어막을 영리하게 활용하며 십대 소녀의 달뜬 마음을 유쾌하고 거침없이 풀어낸다. 주인공 라라 진은 한국계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지만 백인 아버지, 두 자매와 함께 씩씩하게 생활하는 전형적인 아시안-어메리칸 십대 소녀다. 주인공의 ‘전형성’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꾸준하게 드러나는데, 이건 백인 주류사회가 바라보는 모습이기도 하고 실제 한국계 미국인 학생들이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나름의 당위성을 부여받는 측면이 크다. 라라 진 뿐 아니라 이 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주요 캐릭터들이 사회적 관습과 고정관념에 기반한 전형성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데, 겉으로는 자상한 아버지이지만 딸들의 개인사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 백인 가장 아버지, 백인-미남-운동선수-인기남 vs (역시)백인-(역시)미남-내성적인 독서광-비인기남 구도의 남자친구 선택 결정 과정, 주인공의 든든한 지원군인 친구들은 화장을 짙게 한 별난 동성친구와 흑인-게이 이성친구라는 점 등이 그러하다. 물론 영화는 이런 전형성을 그대로 물려받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문화적 관습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면서 캐릭터 구성에 쏟을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한편, 서사구조를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비트는 쪽에 집중하여 나름의 독창성을 구현해냈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사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관객의 ‘공감’일텐데, 그 부분에서 훌륭하게 성공한 듯한 인상을 받는다. 곁가지 없이 깔끔하게 구성된 서사구조 위에 주인공 역을 맡은 베트남계 라나 콘도르(Lana Condor)가 훌륭한 연기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