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nolaterthannow

born as Seoulite, missing Boulder, and loving wife

모종린 | 골목길 자본론

나의 누나는 ‘강남’을 싫어하는 사람 중 하나다. ‘강남’으로 인식되는 동네에서는 절대 살지 않겠노라고 내 앞에서 선언까지 한 사람이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강남을 싫어하거나 경멸한다기 보다는 재미없어 하는 쪽에 가깝다. 그 동네는 그녀의 문화적 흥미를 자극할 만한 특출난 자산을 가지고 있지 못한 모양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강남역 대로변이나 신사동 가로수길을 갈 일이 생겨도 그리 신이 나지 않는다. 강남의 어느 동네에 갈 때마다 ‘간지럽다’는 표현을 머릿속에 되내이게 되는데, 그 곳의 문화적 공기가 너무나 이질적으로 느껴져 도저히 동화될 수 없는 거리감이 들 때 그런 표현이 떠오르는 것 같다. 아내도 최근 비슷한 말을 내게 한 적이 있다. “아랫 동네”보다는 “윗 동네”가 자기 취향에 더 맞는 것 같다며, 마포구나 종로구를 살고 싶은 곳으로 꼽았다. 운이 좋게도 두 곳 모두 내가 10년 넘게 살았던 동네들이다.

누나, 아내, 그리고 내가 서울의 특정한 공간을 유별나게 사랑하는 이유, 혹은 그 곳과 물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공간을 유독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공간들이 가지고 있는 ‘골목’의 이질성 때문일 것이다. 버스나 차를 타고 가면 보이는 대로변에 있는 가게들은 홍대입구 앞이나 강남역 주변이나 비슷하다. 올리브 영과 베스킨 라빈스 따위의 가게들이 줄지어 정렬해 있는 모습은 서울이나, 대전이나, 오송이나 크게 차이가 없다. 하지만 큰 길가에서 한 두 블록 안쪽으로 들어가면 나타나는 길, 차 한대가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비로소 그 동네의 진짜 정체성이 드러난다. 어떤 동네의 골목에는 인디 뮤지션들이 태연하게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고, 다른 동네의 뒷골목에 가면 고시생들이 컵밥을 손에 들고 바삐 움직인다.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숨결이 담겨있는 골목의 얼굴이 그 동네의 얼굴인 셈이고, 타지에서 온 방문객들은 그 골목의 얼굴을 소비하고 싶어한다.

모종린 교수는 [골목길 자본론]에서 상권을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한다. 서울 등 대도시의 주요 상권을 명동, 건대입구와 같은 중심상권, 삼성역이나 동대문과 같은 몰링상권, 노량진, 종로 피맛골과 같은 대로변 상권, 그리고 성수동, 연남동, 경리단길과 같은 골목상권으로 나눈 저자는 골목상권이 발생하고 팽창하는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상세히 기술한다. 예컨대 설계된 도로의 구조라던가 스타벅스의 입점 여부, 대중교통의 접근성 등이 골목상권을 필연적으로 탄생시키는 여러가지 요소 중 하나로 작용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사러가마트를 보유한 연희동의 주민들이 부러워지고, 대중교통 시스템을 개혁하여 젊은 도시로 다시 태어난 일본 도야마시의 주민들의 삶이 궁금해진다. 풍부한 사례를 들어 골목상권의 현재를 응시하는 저자의 시선이 탁월하다고 느껴지는 몇몇 지점이 발견되기도 한다.

하지만 책을 계속 읽다보면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순간이 점점 늘어남을 느끼게 된다. 우선 책의 구성이 엉망이다. 저자가 여기저기 매체에 기고한 글을 주제별로 묶어 출판한 듯 보이는데, 그래서 그런지 같은 내용이 몇 번씩 반복된다. 정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책으로서의 가치가 크게 떨어지는 셈이다. 사진은 또 어떠한가. 사진 출처가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들을 실은 모양인데, 보기 부끄러울 정도의 낮은 수준을 보이는 사진을 당당하게 실은 저자의 호연지기에 감탄할 때 쯤 뜬금없은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옹호의 글을 발견하자 마음이 답답해지기 시작한다. “창조경제”라는 단어가 곳곳에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심증은 확증으로 바뀌어간다. 일본 사례에 대한 노골적인 찬양, (“서울은 도쿄가 될 것이다” 등의 주장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된다) 골목상권을 지키기 위한 정책적 제언으로 주장한 일본식 도제시스템을 살짝 바꾼 듯해 보이는 “장인 공동체”, 혹은 “장인대학”, 젠트리피케이션은 건전한 전치과정이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듯한 늬앙스까지. 저자의 이름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뜨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본 뒤 무릎을 탁 치며 책을 덮었다.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까지 가는 길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헛똑똑이 학자의 브루주아 골목 탐방기 잘 읽었습니다.

tell me what you live for

교수라는 직업이 기대했던 것보다 매력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두 학기가 채 끝나지 전에 알아버렸다. 하지만 싫증을 느끼고 이직을 알아보던 전과 다르게 나는 이 직업에 계속 머무르려고 한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오늘 상당히 중요한 이유 하나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국립대는 서울에 있는 명문 사립대와 달리 조기교육 및 사교육의 수혜를 듬뿍 받아 예쁜 수능 점수와 아름다운 학생부 기록을 완성한 학생들만이 오는 곳은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비효율성의 고통 속에서도 어떤 공무원들이 조금씩 쌓아올린 다양한 입시전형을 통해 꽤 다양한 배경을 지닌 학생들이 국립대로 진학한다. 그 중에는 집이 가난해서, 부모가 도움을 충분히 주지 못해 서울로 올라가지 못한 이들도 있고,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학업이 더이상 유지되지 못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들 중 정말 똑똑하고 영특한데 공부에 대한 열정까지 뛰어난 학생을 발견할 때에는 말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을 느낀다. 눈물도 나고,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어떤 감정인데, 공무원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는 몇 안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며칠 전 막내 교수로서는 쉽지 않은 시도를 하나 했다. 조금 용기를 내어 의견 하나를 개진했다. 학과에서 책정된 아주 작은 규모의 장학금이 있는데, 면담을 하던 중 사정을 알게 된 한 학생을 추천했다. 오늘 그 학생에게 장학금 혜택이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그 학생 말고도 형편이 어려운 수많은 학생들이 존재한다. 그들 모두를 충분히 도울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에 좌절도 많이 하게 된다. 내 월급을 쪼개서 누군가를 도와준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학생과의 상담 과정에서 어려운 상황을 캐채해내지 못했다면, 그 학생은 아마도 이 적은 금액의 장학금에 대한 존재 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 정도의 행동에 대해 딱 그 정도의 뿌듯함을 느꼈다.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이 공부를 마음껏 했으면 좋겠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국립대 교직원이라면 교육서비스에 대한 관점을 조금 달리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값비싼 사적 재화가 아닌, 누구나 접근 가능한 공공재에 가까운 성격을 지니는 것이 국립대에서의 교육서비스가 되어야 한다. 국립대 도서관에는 지역 시민까지 누구나 들어갈 수 있어야 하고, 국립대 강의는 영상으로 녹화되어 인터넷에 무료로 배포되어야 한다. 교육 기회의 불평등은 계층 간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역사적으로 아주 명확하게 규명되어 있다. 한국의 국립대는 그러한 불평등을 완화시킬 수 있는 몇 안되는 수단 중 하나다. 

그 학생은 아주 명석한 학생이다. 공부도 잘하고 교우관계도 좋고 성격도 좋다. 그 친구가 부디 마음껏 공부했으면 좋겠다. 그런 학생을 가르친다는 것은 선생 입장에서 굉장히 큰 영광이다. 그런 영광스러운 기회를 쉽게 포기할 수 없다. 계속 교수라는 직업에 머무르려는 이유다. 


윤미현 작, 최용훈 연출 | 텍사스 고모

최근 한 공중파 채널에서 유쾌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전라도의 한 시골 마을에 사는 소녀 몇명이 의기투합하여 밴드를 만든 뒤 고군분투(?) 끝에 동네의 작은 축제에서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가진다는 내용이었는데, 정작 눈길을 끈 건 멤버 중 가장 밝고 적극적이던 한 소녀의 생활상이었다. 그 친구가 사는 집에는 엄마가 없었다. 그 소녀의 어머니는 근처 도시의 공장에서 합숙을 하며 일을 하고 있었고, 그로인해 이 모녀는 주말에 딱 하루 반나절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 소녀의 어머니는 필리핀 사람, 즉 결혼이주 여성이었다.

지방 시골 마을에 가면 두세집 건너 한 가정 꼴로 다문화가족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가 가진 기형적인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수입’되어온 이주 여성들의 삶은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의도적인 무관심’에 힘입어 주변적으로만 다루어져왔다. 이들에 대한 무관심의 뿌리는 어디일까. 몇십년 전, 주한미군과의 결혼을 통해 미국에서의 행복한 삶을 꿈꾸던 “양공주”들이 미국에서 겪은 불행과 고통의 이야기들은, 그들의 후손인 앤더슨 팍(Anderson .Paak)이나 하인즈 워드(Hines Ward) 등을 통해 불쑥 불쑥 한국 사회로 튀어나왔다. 그 당시 한국 여성들이 경험한 삶의 굴곡이 현대 한국에서 동남아시아 이주 여성들의 삶을 통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당시 피해자라면 피해자에 속했던 한국 사회가 이제는 가해자의 터전으로 기능하는, 역사의 아이러니한 수레바퀴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텍사스 고모]는 이 지점을 타격한다. “원조를 받는 국가에서 원조를 주는 국가로 변신한 유일한 국가”라는 자랑은, ‘이주 여성을 수출하던 국가에서 이주 여성을 받아들이는 국가’로의 전이를 인정한다는 말이기도 하고, 이걸 다른 말로 바꾸면 ‘고통을 수출하면서도 아무말 할 수 없었던 힘 없는 국가에서 개인의 고통을 수입하고 이를 노동력으로 치환하려 하는 힘 있는 국가’로의 변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인공 ‘텍사스 고모’의 조카가 목에 힘을 주고 이야기하는 “전국가적 위기상황”이란, 최소한의 인격적 존중조차 받지 못하고 부족한 농촌의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짐승처럼 부려지는 삶을 사는 결혼 이주여성이 30만명을 넘어선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대다수 한국인들의 무관심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푸른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간 고모는 돈 한푼 받지 못하고 옥수수밭과 목화밭에서 일만 하다 아이 셋을 남기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의정부 양말공장에서 일하며 살아오던 고모는 환갑이 가까운 자신의 오빠가  키르기스스탄에서 열아홉 여성을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 곳 고향에는 남겨진 아이들이 있다. 집을 떠난 부탄 출신 엄마와 고기 잡으러 배를 타고 떠난 아빠를 잊지 못해 밝은 곳만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소년, 시어머니에게 국자로 머리를 맞아가면서도 아들을 위해 버텼지만 끝끝내 시댁 식구들의 인격적 모독을 견디지 못하고 존재를 감추어버린 엄마를 기다리는 소년, 그리고 고모의 기구한 삶을 그대로 반복하려 하는 위기의 키르기스스탄 여성이 있다.  이 두 여성이 어떤 연대를 이루어낼 수 있을까, 를 기대했지만 연극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현실을 직시하는 결말을 통해 저릿한 충격을 안긴다. 이들에게 “모닝커피 한 잔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수영장 딸린 주택”과 같은 판타지는 없다. 하고 싶은 공부는 꿈도 꾸지 못하고, 이 일이 끝나면 저 일로 끌려 다니며 노동력을 제공하고 남자가 원하는 수 만큼의 아이를 낳기 위해 자궁을 제공하는 임무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 안타까움이 배우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날 때, 바라보는 관객 역시 무너져내릴 수 밖에 없다. 

좋은 극본과 좋은 연출, 그리고 뛰어난 연기와 사려깊은 무대연출을 경험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 불평등의 대가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는 정보의 비대칭(information asymmetry) 문제를 구조화하여 경제모형 안에 도입하고, 독점적 경쟁시장(monopolistic competition)의 형태를 정의하는 한 축인 딕싯-스티글리츠 효용함수를 고안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주류 경제학계에서는 더이상 이룰 것이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다다른 학자다. 미시경제학이든 거시경제학이든, 이론이든 실증분석이든 자신이 속한 학문분야와 상관없이 경제학에 발을 들인 사람이라면 위의 두 경제적 개념을 들어보지 않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의 박사학위 논문주제이자 평생 천착한 연구주제가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을 것 같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다;) 그가 다룬 시장의 비대칭성, 혹은 독점적 경쟁시장 모두 현대 시장경제에 존재하는 불완전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특징들이다. 스티글리츠는 이러한 시장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기업은 이상적인 균형상태보다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하여 추가적인 수입을 확보하고(mark-up revenue), 개별 소비자의 후생은 감소하며, 그 결과 경제적 불평등은 더 심화된다고 주장해왔다.

[불평등의 대가]는 주류 경제학계를 떠남과 동시에 가열차게 주류경제학의 시장중심적, 기업중심적 이론을 비판해온 스티글리츠 사상의 한 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책의 해제를 무려 선대인씨가 썼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이 책의 신뢰도가 확 떨어지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으나,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어내려가다 보면 감히 선대인 따위가 비빌 수 없는 단단하고도 강렬한 그의 사상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다. 최근 읽은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책에서 느꼈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급하게 집어들었지만, 노르베리-호지의 관점과 일부 맥락을 같이 하면서도(세계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등) 전세계적 지역화를 주장하는 노르베리-호지와 달리 기본적인 세계 경제구조의 패턴은 인정하되 그 안에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자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스티글리츠의 시각은 반세계화 주의자들에게 이론적인 배경을 제공해주는 차원을 넘어 경제학의 지평을 넓히는 차원에서 해석되어질 여지가 충분하다. 다만, 미국이라는 단일한 국가에 한정하여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국가별 상이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고(선대인씨처럼 “미국 다음으로 심각한 나라가 한국이다!”라고 주장하면 할 말이 없다), 그가 지속적으로 비판하는 대상인 대기업의 “약탈적” 경제행위의 근간이 되는 이기심, 혹은 ‘애니멀 스피릿’에 대한 구조적 분석이 부재하다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 함께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론 부분에서 그가 제시하는 다양한 정책적 제안들은 현실의 경제구조 안에서 충분히 실현 가능한 것들이다. 본문의 내용 중 인상 깊었던 지대 추구(rent seeking) 행위를 잡아내기 위한 지원금 폐지, 독점금지법 강화, 금융부문 규제강화같은 주장들은 실제로 민주당 정권 시절 신중하게 추구된 전례가 있고, 세계화의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경상수지 적자 해소는 지금 트럼프 행정부가 무역전쟁을 통해(물론 스티글리츠가 원한 방법은 아니었을 것이다)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이 또한 현실에서 정책으로 반영이 된 부분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금융부문의 과도한 위험추구행위를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에 적극 동감하는 편인데, 경제적 호황기에 지나친 신용공급을 추구하지만 불황기에 시작되면 이렇게 과잉공급된 신용을 순식간에 거두어 들여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금융산업의 경기순응성(procyclicality)이 최근 전세계적 경제위기를 발생시킨 주원인 중 하나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금융기관의 경제적 유인을 전환시킬 수 있는 정책적 도구를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아빠, 교수

두번째 학기임에도 결코 나아지는 법이 없이 점점 더 바빠져만 간다. 강의 준비와 내 논문 작성에만 시간을 쏟아도 모자랄 판에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계속 튀어나오는 점이 제일 성가시다. 대학원생들의 논문 지도나 학부생들의 진로 상담은 당연한 의무라 생각하지만, 각종 연구사업을 따오기 위해 제안서를 작성하는 일이나 학내외 정치를 위해 동원되는 일은 아무리 적응해보려고 해도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힘이 들어 몸과 마음이 지쳐갈 때 아빠, 아버지 생각이 자주 난다. 그 분은 대체 어떻게 이런 위기를 수도 없이 잘 넘길 수 있었을까? 그 분도 나처럼 힘들었을까?

아주 어린 나이부터 나는 아버지의 직업이 교수, 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 직업이 무엇을 하는 일인지 제대로 알기 전부터 어른들이 물어볼 때마다 또박또박 “교수”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교수라는 직업이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인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익숙해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훨씬 지난 시점부터다. 아버지는 주로 집에서 일을 하셨기 때문에 내 눈에 비친 아버지는 가족으로서의 아버지와 공적인 직업인으로서의 아버지의 이미지가 항상 겹쳐져 있었다. 어머니와 즐겁게 수다를 떨다가도 갑자기 책상 앞에 앉아 한참동안 책만 바라보시던 모습, 마당에서 잡초를 뽑다가 퍼뜩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갑자기 방으로 돌아와 이것저것 찾아보시던 보습, 제자들을 집으로 불러 왁자지껄하게 고기를 구워먹다가 문득 역사 이야기로 빠지면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쉬지 않고 수다를 이어 나가시던 모습. 나에게 아버지는 늘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교수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 두 정체성이 지금도 잘 분리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아는 교수로서의 아버지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은 또 한참 뒤의 일이다. 인터넷이 발달한 세상에서 검색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 분이 그동안 내가 생각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대단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분이 쓰신 책이 한국과 중국 사학계에서 큰 논란을 일으키고, 더 나아가 어떤 유의미한 영향을 지속적으로 끼치게 되었음을 발견했을 때, 나는 자랑스럽고 뿌듯하기 보다는 당혹스럽고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상처를 받지 않았을지 걱정이 되는 마음이 더 컸는데, 이런걸 보면 역시 가족은 가족이지 않나 싶다. 비전공자로서 깊은 수준에서 이해할 수 없는 나는 그저 방관자였을 뿐 결코 큰 힘이 되어드릴 수 없었을텐데, 아버지의 생각에 깊이 동의하는 다른 역사학자들의 지지 선언을 볼 때마다 뭉클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그 분들이 아버지에게 있어 또다른 가족이자 형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젊은 나이에 교수로 임용되어 무사히 정년퇴임하시던 순간까지, 위와 같은 격랑이 한두번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고통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집에서 내색 한번 하지 않으시고 무던하게 그 긴 세월을 넘긴 분의 단단한 마음의 굳기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나는 어제도 아내에게 징징거렸고, 그걸로도 채 만족하지 못해 전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또 징징거렸다. 40년 가까이 교수의 아내로 살아오신 엄마는 “사치스럽다”라는 일침을 날리셨다. 학기중에 바쁜 일이 계속 터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고, 그렇게 바쁜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꾸지람이 나의 정신을 버쩍 들게 했다. 대학원생들의 논문을 읽고 코멘트를 주는 일, 연구실적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지만 한푼의 사업비라도 더 타와서 학부생들에게 좋은 경험 하게 해주는 일,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지식을 활용하여 코멘트를 드리는 일 등등, 내 레쥬메에 기록될 연구실적과 하등 상관없는 많은 임무들이 주변에 산적해 있다. 이걸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저 억울하고 답답할 뿐이다.

나는 아버지처럼 훌륭한 학자가 아니다. 학계의 변방에 억지로 매달려 기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거인은 되지 못한 채 거인의 어깨에 숨어 세상을 바라보는 척 흉내만 내고 있는 셈이다. 남들보다 배로 노력해서 따라잡으려고 해도 뱁새가 다리 찢어지는 격인데, 다른 업무들때문에 공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어서 잠시 가슴이 답답했나보다. 별 시덥지도 않은 가치도 없어보이는 논문을 써서 학회 자리나 채워주려는 시도에 스스로 화가 났나보다. 아버지도 내 나이 때 쯤 비슷한 생각을 하셨을까. 왠지 아닐 것만 같아서, 왠지 그 분은 그 시절에도 분명한 확신을 가지셨을 것만 같아서 한 편으로 분하고 부럽고, 다른 한 편으로 기쁘고 뭉클하다. 학자로서 분하고, 아들로서 기쁘다. 이 두 감정이 쉽게 분리가 되지 않는다.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 내 인생에서 가장 가까이 존재할 때, 그 열패감과 안도감은 결코 지워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만 같다. 아마도 평생 이럴 것 같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 행복의 경제학

행복의경제학
올해 초부터 학교에서 경제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지난 학기에는 경제학의 기본원리와 무역/통상정책의 여러 갈래에 대해 강의했고, 이번 학기에는 국제무역의 이론적 토대와 국제금융의 기본원리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내가 강의하는 내용의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시장은 가장 효율적인 경제시스템이며 자유무역은 모두를 이롭게 할 것이다. 이건 내가 주장하는 소수의견이 아니라, 내가 속한 경제학의 세계에서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여지는 명제다. 이 명제는 누군가에게 ‘신자유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것이며,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교과서에 나오는 뻔하고 흔한 말, 즉 지극히 당연한 자연법칙처럼 받아들여질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불평등을 가속화시키고 극소수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중력의 법칙과도 같은 자연스러운 사회적 규칙으로 이해된다는 것이 일견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나의 명제를 이토록 극명하게 엇갈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이 것 외에도 또 존재하는지 궁금할 정도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오래된 미래]를 통해 국제무역과 세계화가 평화로웠던 지역경제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실증적으로 증명한 바 있다. [행복의 경제학]은 세계화에 반대하고 지역화를 추구하는 노르베리-호지의 사상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책이다. 그녀가 제작한 동명의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요약하고 그녀가 기고한 여러 칼럼의 내용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완성된 책이어서 전체적인 완성도는 떨어지는 편이지만, 노르베리-호지의 세계화에 대한 뚜렷한 반대 입장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이 책에서 세계화를 거부하고 지역화를 추구하자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치고 있으며, 그 근거로 세계화의 경제적 효과는 과장되어 있으며 부정적 영향은 과소평가되어 있음을 다양한 수치로 확인시켜 주고 있다. 세계화를 진전시키는 ‘주범’으로 IMF와 WTO 등 국제금융과 국제무역을 총괄하는 국제기구를 지목하며, GDP 등 지역사회의 ‘행복지수’를 측정할 수 있는 계량지표를 배척하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지표를 개발하자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어찌 보면 상당히 과격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의 내용은 사실 세계화에 반대하는 학자들의 의견을 잘 모아놓은 서베이 보고서이기도 하다. 즉, 노르베리-호지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반대하는 비주류 경제학자들의 주장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오래된 미래] 단 한 권으로 내 머릿속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이름으로 자리잡았다. 이 책에서 그녀가 설파했던 지역화, 혹은 지역주의는 참 매력적이고 아름다워 보이는 개념이었다. 그녀의 주장에 영향을 받아 지금까지도 동네서점, 동네커피숍, 동네빵집 등 다양한 형태로 지역성(locality)을 담보하는 상업시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행복의 경제학]을 읽으며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노르베리-호지가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수단으로 비판하는 그 주류 경제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 단 한번도 특정 이데올로기를 위해 살아왔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주류 경제학이 물리학처럼 일반적인 자연법칙이 인간사회에도 깃들어 있다고 믿는, 순수학문에 가까운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주류 경제학의 기본 가정 중 하나인 인간의 이기심때문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가정은, 이 사회의 여러 병폐들의 원인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고 쿨하게 인정하며 출발하는 지점으로 기능한다. 주류 경제학이 논리적으로 엄밀한 전개과정 속에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인간의 의지’라는 치트키의 사용 가능성 자체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노르베리-호지처럼 세계화에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에 결여되어 있는 치명적인 약점 역시 이 부분에 있다. 이들은 사회가 인간의 선한 의지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대안적인 지역주의적 경제시스템이 윤리적으로, 그리고 생태경제학적으로 ‘옳은’ 명제로 판명난다면 사람들이 이 명제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이데올로기다. 주류 경제학은 ‘사람들은 ~해야 한다’와 같은 규범적인(normative) 주장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학문이다. 주류 경제학이 특정 이데올로기에 봉사한다는 노르베리-호지의 주장이 편견으로 판명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의 선한 의지가 반드시 존재하며, 이 선한 의지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저자의 속박된 시선에서부터 출발하는 셈이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이기심이 나쁜 것일까? 주류경제학은 그 반대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인구가 증가하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멜서스의 우울한(dismal) 경제학을 물리치고- 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어했던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며, 영국이 다른 나라들을 제치고 산업혁명의 주역이 되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발명 특허권을 폭넓게 보장하여 떼돈을 벌고 싶어하는 인간의 이기심을 충실히 자극했던 국가 시스템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이기심은 열등한 신체조건을 가진 인간이라는 종(種)을 지구에서 가장 우등한 존재로 탈바꿈시킨 주된 인자일 수 있다. 이기심에 의해 인류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유전적 형질은 선한 의지에 의해 결코 제거될 수 없다. 인간이라는 종이 존재하는 한, 이들은 끊임없이 더 높은 수준의 물질적 쾌락을 탐할 것이며, 국가 등에 의해 강제로 제재당하기 전까지 자신보다 조금 더 약한 존재를 약탈하는 것에 몰두할 것이다. 그 부작용 중 하나가 지나친 세계화, 혹은 지역사회의 몰락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리 틀린 주장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세계화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최소한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노르베리-호지는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경덕 | 처음 만나는 북유럽 신화

북유럽신화
시작은 운전연습이었다. 세종시는 서울과 달리 자가운전이 필수인 곳이기 때문에, 서울에서 운전을 전혀 하지 않았던 아내도 운전을 새로 배워야 했다. 꽤 잘 가르친다는 선생님을 소개 받아 여름방학 중 며칠 개인교습을 받았다. 아내가 운전연습을 받는 동안 혼자 집을 지키고 있자니 조금 심심해졌다. 그러던 와중 서랍정리가 하고 싶어졌고, 텔레비전이 놓인 TV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쪽 구석에서 플레이스테이션이 나왔다. 1년에 몇 번 하지 않아 구석에 처박아놓은 게임기였다. 갑자기 게임이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게임을 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우리 부부는 자연스럽게 각종 게임을 하나씩 마스터 해나가기 시작했다.

이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친한 형 부부가 세종시를 방문했다. 그는 게임의 고수였다. 두어개 정도의 게임을 추천해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마침 여름맞이 할인기간이어서 거의 반값에 좋은 게임들을 구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 두 게임 중 먼저 시작한 게임이 바로 [갓 오브 워 4]였다. 이 게임은 스파르탄에서 건너온 한 무시무시하고 무뚝뚝한 사나이가 아들과 함께 고대 북유럽 신화 속 세계를 탐험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컨트롤러의 조작능력이 중요한 액션게임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구성이 탄탄해서 한 편의 영화를 보듯 몰입해서 하느라 며칠 밤을 뜬 눈으로 보내야 했다. 그렇게 무사히(물론 ‘무사히’는 아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죽음’을 맞이했지만, 게임 속 주인공은 그 때마다 불굴의 의지로 다시 부활하여 나로 하여금 계속 전진하게 만들었다) 엔딩을 보았고, ‘파밍(farming)’이라고 불리우는 엔딩 후 플레이는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게임창을 닫았다. 하지만 마음 속 어딘가에 아쉬움이 남아 있음을 발견했다.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다보면, 등장인물들이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하여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각종 신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알 수 없는 깊은 소외감을 느껴야했다. 나는 북유럽 신화를 잘 모르기 때문에! 왜 재미있어 보이는 이야기를 자기네들끼리만 저리도 열심히 하는가, 왜 나에게 그 신화속 세계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 것이지? 심통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택하게 된 책, [처음 만나는 북유럽 신화]는 나처럼 고대 북유럽 신화를 잘 모르는 초심자를 위한 친절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각종 신화에 대한 전문가이자 문화인류학자로서 세상을 조망하는 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고대 북유럽 신화의 세계관 및 주요 등장인물을 차분하고 정갈하게 전달하고 있다.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토르의 무적 망치, 묠니르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부터 한쪽 눈을 잃으면서까지 지혜를 갈구했던 최고신 오딘, 사고를 일으키지만 미워할 수 없는 장난꾸러기이자 기어코 그 장난끼를 주체하지 못해 신들의 세계를 멸망시키고야 마는 로키의 이야기까지, 개성 넘치는 신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200쪽 남짓한 분량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읽어내려가게 된다. 나처럼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비해 북유럽 신화에 대한 지식이 짧은 사람이라면, 혹은 [토르]나 [반지의 제왕]을 즐겁게 보았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메타포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답답했던 사람이라면 한번쯤 가볍게 읽어볼만한 책이다.

다니엘 켈만 | 명예

명예
내 독서습관 중 별로 좋지 못한 부분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한 권의 책을 끝내지 못하면 쉽게 다른 책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머뭇거림이다. 책을 읽다 중간에 멈추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 탓에 쉽게 진도를 빼지 못하는 어려운 책을 만나면 전체적인 독서 계획이 한꺼번에 꼬여버린다. 올 여름 나를 가로막은 책은 대런 에이스모글루(Daron Acemoglu)의 [Why Nations Fail]이었다. (최근 한 학생에게 전해 듣기로 이 책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로도 번역이 되어 있다고 한다) 거의 대부분의 주요한 내용은 처음 몇 장에 다 나옴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이야기꾼인 저자의 엄청난 필력때문에 계속 책을 읽어내려가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을 느꼈는데, 문제는 학기가 시작하면서 진득히 앉아 영어로 쓰인 책을 집중해서 읽을 정도의 여유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학기가 시작한 후 지금까지 단 한권의 책도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나는 [Why Nations Fail]을 끝까지 읽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말인즉슨 이 블로그에도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을 쓰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스스로 정한 굵직한 원칙 중 하나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책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것) 책 한 권을 다 읽지 못했다는 열패감에 사로잡혀 이번에는 최대한 얇은 책을 읽기로 결심했고, 책장에 꽂혀있는 빳빳한 책들 중 가장 얇아보이는 책을 골랐는데 그 것이 바로 독일작가 다니엘 켈만의 [명예]였다.

켈만 역시 타고난 이야기꾼인 것처럼 보인다. [명예]는 표지를 젖힌 후 한 번도 쉬지 않고 끝까지 읽어내려갈 수 밖에 없는 매력을 가진 소설이다. 형식적으로는 총 아홉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처럼 보이지만, 각각의 단편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조금 특이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 단편에 등장한 주인공이 다른 작품에서는 스쳐지나가는 인물로 다시 나오고, 한 작품의 주인공이 다른 작품을 창작하는 창작자가 되어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탄생시킨다. 어떤 작품에서는 원 저자(켈만)가 창조한 작품 속 작가와 그 작가가 창조한 작품의 인물이 만나 대화하기도 한다. 이처럼 교묘하게 비틀어놓은 플롯과 서브플롯의 향연 속에서 아홉 편의 단편은 하나의 작품으로 재탄생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 혹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매개체는 휴대폰과 인터넷, 편지와 같은 비대면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아홉편의 단편 중 꽤 많은 작품이 주인공의 자아가 함몰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익명성’을 담보로 한 비대면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단편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혹은 도구적 목적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주제로 기능하는 측면이 강하다.

소설의 처음을 장식하는 ⌈목소리⌋에서 주인공 에블링은 ‘랄프’라는 사람과 똑같은 전화번호를 가지게 되고, 어느날부터 자신을 ‘랄프’로 인식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전화를 받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에블링은 자신을 랄프처럼 인식하기 시작한다. 다른 작품 ⌈탈출구⌋는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게 된 ‘진짜’ 랄프에 대해 다룬다. 유명한 배우였던 랄프는 더이상 자신을 찾지 않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 진짜 배우 랄프가 아닌 그를 흉내내는 가짜 배우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동양⌋의 주인공 마리아는 휴대폰 배터리를 챙겨가지 않은 사소한 실수로 인해 동양의 한 나라에서 순식간에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사건을 마주하게 되고, ⌈토론에 글 올리기⌋의 주인공 몰비츠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행위가 유일한 존재의 가치인 것처럼 여기며 익명성에 집착한다. 이처럼 [명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현실’과 ‘형식’ 사이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잃어버린 듯한 착각에 공통적으로 빠진다. 그리고 이러한 인물들의 모습은 진짜 현실 속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소셜네트워크의 네모난 화면 안에 예쁜 모습을 담기 위해 그 네모 밖의 추악한 것들을 감추려고 하는 우리들,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주인공에 투표하며 화면 속 밝게 웃고 있는 아이돌의 얼굴에 자신을 투영하는 우리들, 현실에서 직접 마주치는 이름없는 타인에게 비소 한 줌 내어주지 않으면서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다니엘 켈만이 [명예]에서 그리고자 했던 모습일런지도 모른다.

 

 

 

아이를 위한 나라

세종시를 조금씩 더 좋아하게 되는 이유로 여러가지를 꼽을 수 있을텐데, 그 중 하나는 이 도시가 아이들을 중심으로 설계된 동네라는 점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인 한국에서 아이가 중심이 된 도시를 그리 많이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을 생각해볼 때, 반가움을 넘어 고마움까지 느끼게 만드는 작은 배려들을 도시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설계자가 고려한 여러가지 장치들을 이 곳에 실제로 거주하는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고 무시해버린다면 그것처럼 슬픈 일도 없겠지만, 서울과 같은 기존의 대도시들이 겪고 있는 것처럼 타인과의 불쾌한 경쟁을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환경으로까지 악화되지만 않는다면 최소한의 배려는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을 가지고 있게 된다. 그런 작은 기대들이 이웃을 향해 한번은 더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마음 속 작은 여유를 만드는 원천이 된다. 타인을 반드시 이기지 않아도, 이웃을 반드시 미워하지 않아도 내 가족과 내 아이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조금씩 더 강해질때, 비로소 ‘공동체’의 한국적인 재해석이 가능해질런지도 모른다.

말은 이렇게 거창하게 하지만, 나는 오늘도 공동체의식을 지켜내기 위한 위기를 한차례 넘겼다. 아내가 잠시 한국을 떠난 이번 주말 내내 혼자 집을 지키고 있다. 집에 혼자 있을 때에는 영화도, TV프로그램도 잘 보지 않고 심지어 음악도 잘 듣지 않는다. 침묵이 흐르는 넓은 집에 하루종일 혼자 있다보면 작은 소음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기 마련인데, 오늘따라 유독 그동안 잘 참아왔던 윗층으로부터의 층간 소음에 온 정신을 사로잡혀버렸다. 어린 아이가 쿵쾅쿵쾅 뛰어다니는 소리에 스트레스를 받아본 적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는데 오늘은 그만 육체적인 고통, 즉 두통이 오고 말았던 것이다. 책상 앞에 앉아 이것저것 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에게 머리와 관련된 고통은 꽤나 성가신 존재다. 늦은 저녁까지 쉬지 않고 뛰어다니는 윗층의 어린 친구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는 와중에 그만 과연 나는 오늘 밤까지 이 소음을 참아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뇌에 빠져버렸다. 마침내 내가 그동안 그렇게 많이 들어왔던, 윗층 계단을 올라가서 초인종을 누르는 꼰대 아저씨가 되어 버리는 것인가 싶어 두려움까지 밀려왔다.

일단 저녁미사를 보고 와서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이십몇층부터 내려오던 엘리베이터가 윗층에서 멈추더니, 떠들썩한 아이의 목소리와 그 아이를 진정시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함께 들렸다. 딱 봐도 윗층 식구들이었다. 바로 밑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다시 멈추었을 때, 떠들썩했던 엘리베이터에서 순간적으로 묘한 침묵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공룡을 좋아하는 아이와 함께하는 윗층 가족과 하필이면 오늘따라 예민한 아랫층 남자는 그렇게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첫번째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공룡을 두 손에 들고 있는 세살에서 네살 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의 옆에는 역시 공룡 하나를 들고 말상대를 열심히 해주고 있는 젊은 여자와 그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휴대폰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공룡을 들고 좁은 엘리베이터의 이구석과 저구석을 열심히 뛰어다니는 그 아이와, 혈기왕성한 아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진땀 흘리는 여자, 그리고 휴대폰만 열심히 보고 있던 남자로 구성된 그 가족을 보고 있자니, 오늘 하루종일 나를 괴롭힌 두통 따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의 두통은 그 아이가 오늘 윗층을 뛰어다니며 확장시켰을 공룡과의 대혈투 이야기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그 어린 친구의 세계가 큰 장애물 없이 계속 성장해나가기를 바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 가족을 다시 만난 것은 불과 10여분 후, 성당에서였다. 그 가족도 같은 성당 식구였던 것인데, 거기서도 여자의 사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아랫층으로의 소음전파에 대한 걱정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스트레스가 그 여자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그녀의 표정에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미사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휴대폰만을 보던(과연 그 휴대폰 안에는 무엇이 담겨져 있는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남자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는 다행히 큰 소음을 내지 않고 지겹고도 지루한 한시간 여의 시간을 견디어냈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을 다시 정리했다. 이 도시는 아이들을 위한 곳이다. 하지만 이 곳이 여성을 위한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설계자의 배려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필요해보였다. 나는 두통을 희생했지만, 최소한 그것보다는 더 큰 희생과 노력이 필요해보였다. 거의 확실하게 그렇게 느껴졌다.

김민기 |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지하철 1호선]은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2001년, 혹은 2002년 무렵 어느 겨울날 이 뮤지컬을 처음 접했고, 큰 충격에 빠졌다. 내가 알던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충격은 아마도, 애써 무시하고 있던 세상의 밑바닥을 날것 그대로 접해야 했던 어린날의 성장통이었을 것이다. 이후 두 세번 정도 더 관람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관람 후 계단에서 기다리던 출연진과 일일이 악수를 하는 여유도 생겼지만, 관람 중 어느 순간 맞닥뜨렸던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듯한 감동은 여전한 크기로 전해져왔다. 유학을 나와있던 중 [지하철 1호선]이 4천회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다고 했을 때 느꼈던 서운함도 아직 잊지 못한다. 영원히 달릴 것 같았던, 마냥 씩씩해보였던 작품이 갑자기 운행을 종료한다는 통보를 해왔을 때 느꼈던 서늘하고 먹먹한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게 가슴 한구석에 살아남아있다. 연속 공연을 중단한 김민기 대표가 이후 아동극에 천착하는 모습을 보며 [지하철 1호선]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할 수 조차 없게 된 것은 오히려 인상적이었다. 매일 이 작품을 기억하며 살지는 않았지만, 첫번째 관람 이후 이 작품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말도 거짓은 아니다.

그런 작품이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마음 속으로 16,17년 전 감정이 살아나는 듯 해 묘한 반가움을 느꼈다. (사실은 뛸 듯 기뻤다) 그 때 들었던 노래들은 여전한 감동으로 다가올지도 궁금했고, 그 당시 이 작품을 통해 발견했던 마음 속 깊숙한 곳부터 시작된 아우성은 이제 어떤 모습으로 반응할지도 궁금했다. 나는 [지하철 1호선]을 비롯한 몇몇 예술 작품과 서적들을 통해 현재의 자아를 획득한 경우다.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십대 시절 읽지 않았다면, 머큐리 레브(Mercury Rev)의 [Deserter’s Songs]를 수험생 시절 듣지 않았다면, 로버트 하일브로너의 책들을 유학을 떠나기 전 읽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하철 1호선] 역시 마찬가지다. 입대 전 방탕한 대학생 시절에 만난 이 작품을 통해 세상을 보는 시선은 분명한 변화를 겪었다. 지금의 나는 그 때로부터도 멀리 달아나 있지만, 최소한 그 뿌리는 아직도 굳건히 자리잡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기에 이 작품을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관람하는 것은 최소한 개인적으로는 나에게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아내와 함께 찾았다. 아내가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지금 우리가 함께 보는 공연에서 어떤 것들을 공유할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다시 찾은 학전블루 소극장은 여전히 낡고 좁았다. 좌석은 세시간 가까이 진행되는 공연 시간동안 내 뾰족한 엉덩이를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딱딱했다. 하지만 앞좌석에 무릎이 닿을 정도로 좁고 불편한 좌석도, 매캐한 냄새가 은근히 퍼지는 지하의 공연장도 그저 반갑고 고맙기만 할 뿐, 공연을 기다리는 들뜬 마음을 식혀버리는 걸림돌이 되지는 못했다.

공연은 1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배경은 여전히 1998년 IMF 위기가 터진 직후였고, 선녀는 여전히 제비를 찾아 1호선을 타고 이곳 저곳을 배회한다. 그 와중에 만나는 사람들 역시 여전히 1998년을 살고 있었다. 혼혈로 태어나 사창가에서 포주 노릇을 하는 철수도, 그런 철수를 주워다 키운 곰보할매도, 곰보할매의 가게에서 우동을 외상으로 먹는 안경도, 그런 안경을 사랑하는 걸레도 모두 그대로였다. 지하철에서 UFO에 대한 믿음을 설파하는 교주와 고무장갑을 파는 잡상인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공연에서 2018년을 느낄 수 있었던 유일한 부분은 음악이었다. 밴드 ‘무임승차’의 구성이 조금 달라졌다. 드럼과 색소폰이 빠지고 바이올린과 건반, 퍼커션이 들어왔다. 그러다보니 모든 곡에서 약간의 편곡이 이루어졌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공연에서 정말 크게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사람이다. 공연을 올리는 배우들이 바뀌었고, 그 공연을 보는 나와 내 주변의 관람객이 바뀌었다. 우리는 이 작품이 무대 위에서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1998년의 공기에서 20년이나 떨어져 있었다. 그 당시의 무겁고 우울한 공기에서 조금씩 벗어난 우리는 이제 조금 다른 형태의 삶의 고단함으로 옮겨온 터였다. 비록 기억은 하고 있을지언정 더이상 그 순간을 살지 않은 우리들이 공연장에서 가장 서서히, 하지만 기어코 가장 극적으로 변해버린 존재가 아니었을까. 한 인터뷰에서 이번 [지하철 1호선]에 참여한 배우 중 과거에 공연되었던 [지하철 1호선]을 직접 경험한 배우는 딱 한 명 뿐이라는 이야기를 읽었다. 1998년이 2018년의 우리에게 ‘역사’로 기억되는 것처럼, 이 공연의 무대에 서는 배우들에게도 이 작품은 하나의 역사였던 것일까. 그래서인지 배우들의 연기에서 작지않은 이질감을 느꼈다.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선녀와 철수, 걸레와 안경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한 것이, 이번에 무대에 오른 젊은 배우들이 받아들였을 1998년과 나를 비롯한 객석의 많은 ‘늙은’ 관객이 기억하는 1998년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12월 쯤 되어 예정된 100회 공연의 막바지에 다다를 때, 이 배우들은 어떤 공기를 내뿜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관객으로부터 어떤 공기를 받아들일 것이며, 1998년을 반복해서 상기시키는 대사와 몸짓을 통해 무엇을 체화할 것인지 궁금해졌다. 아마도 적지 않은 것들이 달라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 1호선]은 4,000회에서 100을 더해 딱 4,100회까지만 운행한다고 한다. 김민기 대표의 인터뷰에 따르면 “정리하고 가야 할” 작품들이 학전에 쌓여 있고, [지하철 1호선]은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 가장 먼저 털고 넘어가기로 했다고 한다. 이제 이 작품이 정말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셈이다. 이 작품의 2008년, 2018년 버전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대표의 말처럼 만약 그렇게 시대를 한번 더 옮겨야 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번안이 아니라 새로운 작품이어야만 할 것이다. 2018년을 살아가는 철수와 걸레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 시대가 변했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변했으며, 우리와 시대 안에 존재하는 공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8년을 그리고 있는 [지하철 1호선]은 여전히 넘치는 생명력으로 펄떡거렸다. 오프닝에서 선녀가 독창을 할 때부터 이미 시작된 짜릿한 기운은 한 이름없는 술취한 직장인이 남산 아래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느껴지는 먹먹한 감정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되었다. 선녀의 이야기가, 걸레의 이야기가, 빨간바지의 이야기가 관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 개개인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 여전히 눈 앞에서 펼쳐졌다. 좁고 불편한 객석에서 세시간 만에 몸을 일으키며 고맙다는 생각만 계속 들었다. 다시 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단 100회 뿐이라 해도, 이렇게라도 다시 달려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