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자드 아부 알라라 | 너는 스무살에 죽을거야

우리 부부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유일한 영화는 수단에서 온 [너는 스무살에 죽을거야]였다. 유럽에서 공부한 젊은 수단 감독이 프랑스 등 많은 국가의 자본의 도움을 받아 만든 영화였는데, 스무살에 죽을거라는 예언을 받고 태어난 한 남자아이가 성인이 되기까지 겪는 성장담이 주된 서사구조라고 할 수 있다. 정적인 화면에 담긴 황량한 사막의 풍경은 죽을 것을 알고 태어난 소년의 텅 빈 마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소년은 빼앗긴 미래가 현재를 갉아먹는 구조에서 나름의 방황을 거치며 조금씩 성장해간다. 그런 주인공에게 생명의 공기를 불어넣어주는 존재로 강인한 의지를 가진 어머니와 종교에 속박당한 마을에서 서구사회의 문물을 전달해주는 삐딱한 존재인 동네 아저씨가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중 가장 진취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지는 주인공의 어머니는 아들의 불행한 미래를 감당할 수 없어 가족을 버리고 도망친 아버지와 크게 대비되는데,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해가며 아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주인공이 우연히 만나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 동네 아저씨는 수단의 현재를 상징하는 비유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는데,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등장하는 수단의 민주화운동 인사들에 대한 헌사에서 이 인물이 영화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영화의 주인공 소년은 암울한 수단의 현재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일부 진취적인 사람들의 열망을 품고 있는 존재이며, 상대적으로 더 열려있는 서구사회를 목적지로 하여 어머니로 상징되는 유무형의 유산을 발판삼아 결국 죽음을 극복하고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에 이른다. 아내가 전해준 말처럼 유럽출신 감독이 만든 아프리카 영화의 전형성을 답습하고 있으며, 선진국의 자본, 그리고 다국적 자본이 개입할 경우 영화의 메시지가 얼마나 ‘정치적 올바름’에 갇혀 뭉툭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처럼 느껴졌다.

Bon Iver | i,i

네번째 정규음반 [i,i]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비로소 보니베어(Bon Iver), 혹은 저스틴 버논(Justin Vernon)의 음악세계를 온전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그가 발표한 세 장의 음반은 어쩌면 매우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수준에서의 ‘드러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의아하게 들릴 수 있다. 첫번째 음반 [For Emma, Forever Ago]는 그 자체로 매우 훌륭한 인디-포크 음반이었기 때문이다. 300명 정도 규모의 볼더의 폭스 극장(Fox Theatre)에서 단촐한 밴드 구성과 함께 한 버논을 처음 보았을 때 참 단단한 인디음악을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지 그가 10년 뒤 전자음악을 할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위스컨신의 작은 숲속에서 나와 빅밴드와 함께 만든 [Bon Iver]는 –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 확장되기 시작한 그의 음악세계가 내딛는 또다른 첫걸음이었는데, 역시 그 자체로 매우 좋은 음반이었고, 당시 우리는 그의 새계가 ‘완성’되었다고 ‘착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1만명 규모의 레드락 야외극장(Red Rocks Amphitheatre)에서 저스틴 버논은 확실히 다르게 보였던 것 같다. 포크음악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레벨로 나아갔지만, 어쨌든 여전히 인디의 범주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후 칸예 웨스트 등과의 콜라보레이션을 거쳐 그의 세계가 한번 더 확장되기 시작하였고, 3집 [22, a Million]이 나왔을 때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다. 소리는 분열되기 시작하였고 가사는 알아듣기 힘들었으며, 실험적인 전자음악의 빈번한 사용만큼이나 음반커버와 노래제목은은 기호처럼 모호하게 느껴졌다.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간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4집 [i,i]를 듣고 나서야 그의 세번째 정규음반이 한 극단을 경험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였음을 알게 되었다.그는 세 번의 꽤 괜찮은 여행을 마친 후, 비로소 그의 음악세계의 한 절정을 여기 4집에서 풀어놓았다. 물론 지난 세 번의 음악여행 모두 그 자체로 매우 훌륭한, 독립적인 작품이지만, 저스틴 버논이라는 희대의 아티스트가 걸어온 길을 기록한 인디-영웅적인 성장담의 한 챕터로 읽어도 충분히 흥미로운 것이다.

밴드 구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집부터 스튜디오 작업을 늘 함께 해온 션 케이시(드럼, 키보드)와 매튜 맥커핸(드럼, 베이스)이 이번에도 음반작업에 참여해 보니베어 사운드의 핵심 중 하나인 더블-드러머 시스템을 형성했고, 2집부터 밴드 사운드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잡은 섹소폰은 3집에 이어 이번에도 마이클 루이스가 연주했다. 또한 이들을 포함해 총 여섯명이 보컬 작업에 참여했다. 스튜디오 작업에 참여한 멤버 구성을 굳이 이야기하는 이유는 저스틴 버논의 음악세계를 구성하는 핵심요소 – 겹겹이 쌓인 보컬 층위, 관악기의 사용, 더블-드러머를 동원한 리듬파트의 강조 – 는 2집 이후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3집부터 확연하게 달라진 점으로 많은 이들이 전자음악의 도입과 그로 인해 보니베어의 장르가 달라졌음을 지적하겠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음악에서 포크의 냄새를 맡는다. 여전히 쓸쓸한 위스컨신의 작은 동네 골목이 떠오른다. 보니베어의 장르는 변화하거나 옮겨간 것이 아니라 확장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고, 확장되었다기 보다는 음악적 핵심요소는 그대로 간직한 채 그들만의 장르를 서서히 조립하고 쌓아올려 만들어온 것이라고 판단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오히려 인디포크부터 전자음악까지, 상이한 형식 안에서도 유사한 감정을 느끼게끔 한다는 점이 놀랍다.

개인적으로 꼽는 1집과 2~4집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차이점이라 한다면 상징, 혹은 기호체계의 변화를 들고 싶다. 언제부턴가 그의 가사를 이해하기 힘들어졌다. 아니, 더이상 그가 가사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여전히 음악에 많은 메시지를 담아 전달하고 있지만, 영어의 문장구조 속에서 체계적으로 그 내용을 표현하기 보다는 (난해한) 음반 커버와 (더 난해한) 노래 제목, 그리고 분절적이고 상징적인 기호체계로 구성된 음악구조를 통해 보다 직관적인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점에서 오히려 최근의 음악작업 방식이 더 마음에 들고, 조금 더 완성형에 가까운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보니베어의 음악은 확고한 정체성을 잃어버린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다양한 실험을 통해 비로소 버논의 스토리라인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플랫폼을 ‘발명’한 것처럼 보인다. 기존의 편협한 장르구분으로는 담을 수 없는 레벨로 올라간 것이다. 비슷한 부류로 묶을 수 있는 아티스트로는 라디오헤드와 뷰욕이 있다. 라디오헤드의 음악은 그냥 라디오헤드의 음악이고, 이들 외에 라디오헤드의 음악을 할 수 있는 이는 지구상에 아무도 없다. 뷰욕도 마찬가지다. 이제 보니베어도 그런 아티스트가 됐다. 이제부터는 보니베어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되는 세상이 펼쳐지는 셈이다.

토드 필립스 | 조커

영화 포스터에 감독의 이름보다 배우의 이름이 더 큼지막하게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조커]는 호아킨 피닉스의 원맨쇼를 유희적으로 감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다. 그는 작은 얼굴 근육 하나부터 전체적인 몸짓의 형상까지 촘촘하게 설계하고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무엇을? 조커의 그것을. [조커]는 피닉스의 연기력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며 조커가 악당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소외당하고 차별당하던 가난한 청년이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부모의 학대로부터 시작된 비극의 크기가 비정한 고담시의 현실과 맞닿아 겉잡을 수 없이 불어나 머릿속 이성을 지배하게 되어버린다는 서사구조는 새롭지 않다. 오히려 만화에서 영화로 넘어온 히어로물의 흔한 성장담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 서사를 ‘평범한 개인이 우연한 계기를 통해 능력을 깨닫고 특별한 행동을 행하게 되어 대중을 주목을 받게 된다’고 짤막하게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나, [조커]는 흔한 영웅, 혹은 반영웅의 서사가 아니다. 윤리적인 부분을 깊게 고려하지 않고 감성적인 부분에 호소하며 만들어진, 상당히 위험하고 불안정한 영화다.

피닉스의 연기에 대해서는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를테니, 차라리 짧게 줄이는 편을 택하겠다. 그는 좋은 연기를 펼쳤다. 하지만 최고의 연기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한국사람들이 좋아하는, 한국영화적 연기를 했다고 하는 쪽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영화의 구조적 결점을 배우의 에너지를 갈아넣어 메우려는 의도가 느껴져 박수를 아주 세게 쳐줄 수 없었다. 물론 그는 조커를 완벽하게 재창조해냈지만, 그의 조커-아서 플렉 캐릭터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창조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느냐,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 그는 그냥 조커였는데, 매우 뛰어난 연기를 펼쳤을 뿐이다. 대중이 여러 영화로부터 ‘교육’받은 조커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혹은 ‘배트맨’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조커의 최종적 캐릭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상상하며 만들어진 조커의 초기 모습은 충분히 상상 가능하며 그다지 다양한 층위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영화의 첫장면부터 영화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흐름으로 2차원 직선 위에서 진행되는데, 이 영화는 사실상 조커-아서 플렉의 내면의 변화를 다루고 있으므로 조커의 캐릭터 자체가 2차원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조커는 누구인가? 만화책의 유명한 캐릭터다. 마블과 DC코믹스가 본격적으로 종이에서 벗어나 필름으로 그 판을 옮긴 후 히어로물 영화는 오히려 더 만화적으로 변했다. 영화적 상상력에 기반하여 만화책의 주인공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만화책에서 팬들이 읽었던 장면을 영화속에서 재현해내는 것에 충실한 나머지, 오히려 영화적인 혁신은 둔화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마블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블의 오랜 팬들은 가슴이 두근거리겠지만, 그냥 보통의 영화를 좋아하는 나의 눈에는 재미있는 장면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CG로 떡칠된 장면들이 새로운 영화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만화책 속 장면의 재현에 그칠 때 힘이 쭉 빠진다. 돈이 또 이렇게 낭비됐구나 싶다. 그 와중에 서사구조는 점점 더 빈약해졌다. 마블영화에서 제대로 된 서사를 보여준 영화는 사실 거의 없다. 그들이 영화를 본격적으로 만든지 10년이 넘었는데 앞서 언급한 ‘평범한 개인이 블라블라~’ 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굳이 예외를 찾자면 [다크나이트] 시리즈 정도일텐데, 이조차 나는 사람들의 열렬한 숭배를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에 열광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만든 배트맨 시리즈 3편이 썩 괜찮게 만든 오락영화 수준이라는 의견에는 변함이 없다. 아무튼, 조커는 이런 흐름 위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캐릭터이고 아마도 가장 사랑받는 악역일텐데, [조커]는 대중이 궁금해하는 그 지점, 히어로물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악당의 탄생비화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히 상업적이고, 충분히 자극적이며, 적당히 자연스러운 시나리오와 정말 좋은 배우의 연기만 합쳐지면 박스오피스 1위는 거뜬히 가능하겠다, 싶은 그런 영화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어버렸다.

[조커]에 대해 비판할 지점은 참으로 많지만, 가장 중요한 딱 하나만 언급해야 한다면 윤리성의 결여다.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며, 현실이 존재하지 않으면 영화도 존재할 수 없다. 현실에서 사회적 구성원들에 의해 역사적으로 맺어진 윤리적 합의가 영화로 옮겨진다고 해서 완전히 새롭게 재정의될 수 없는 이유다. 이 영화는 마지막에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어 반영웅으로서 폭도들의 찬양을 받는 것을 보여주는데, 일반인이 살인자가 되어가는 심리적 과정을 설득력 있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건 [조커]가 지난 10여년의 기간동안 대중이 반복적으로 교육받은 히어로물 영화의 전형적인 서사구조를 그대로 따라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관객은 그가 자신의 힘을 폭발시키게 되는 과정에서 많은 외부적 요인이 있음을 반복적으로 주입받게 된다. 그 결과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한다. 이게 지나친 비약이라면, ‘영화 모방 범죄’를 구글에서 검색하도록 하자. 영화는 생각보다 훨씬 무겁고 강력한 전달매체다. 두시간여의 시간동안 어두운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커다란 화면을 통해 아서 플렉의 ‘성장담’을 보게 되면 그의 악마성에 충분히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영화적으로 새로울 것이 없는 뻔한 서사구조를 만든 감독이 배우의 미친듯한 연기력에 떼를 쓰며 만들어낸 결과가 윤리적으로 아주 얄팍한 영화라면, 마음이 상당히 불쾌해진다. [위플래쉬]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런 류의 영화는 조금 더 많이 비판받아야 한다.

심지어 이 영화는 조커 캐릭터를 알뜰살뜰하게 보살피지도 못했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했고, 그 결과 의도와 상관없이 웃음이 터져 나오는 정신병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직장과 사회로부터 차별받고 핍박받는 와중에 정신착란에 빠진 어머니때문에 머릿속 정신병이 점점 더 심화된다는 설정은 얼마나 형편없고 성의없는가. 우리가 궁금했던 것은 아서 플렉이 어떻게 조커가 되어가는지였는데, 감독이 던져주는 해답은 ‘부모에게 맞아서’였다. 아서 플렉이 내면 속에 잠자고 있던 폭력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는 이벤트는 동료 광대가 건네주는 총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왜 동료가 갑자기 총을 건네주는지에 대한 설명도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갑자기 총이 생기고 그걸 우연히 마주친 폭력적인 취객에게 사용하며, 여기서부터 숨겨진 광기를 되찾게 되는데.. 글쎄, 이게 최선의 흐름이었나 싶다. 정신착란에 빠진 어머니가 고담시의 최고 엘리트인 웨인 가문에 대해 착각-톰 웨인이 아서 플렉의 아버지라는-을 한다는 설정은 내가 지금 아침 드라마를 보고 있는지 순간적으로 헷갈리게 만들었다. 문제는 어머니의 이 어이없는 착각이 아서 플렉을 광기로 몰아넣는 또다른 기제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아마도 아서 플렉에게는 아버지의 부재가 상당히 큰 부분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토크쇼 진행자를 아버지로 여기는 것, 톰 웨인을 아버지로 믿는 점 등등), 그 부정의 결핍이 악마성의 탄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이 없다. 이 영화는 오롯이 아서 플렉의 내면에 대한 영화인데, 영화관을 나왔을 때 우리가 조커의 내면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가정교육이 참 중요하구나, 정도?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빈약한 서사구조와 게으른 윤리성을 배우의 연기와 감각적이 편집, 긴장을 고조시키는 음악 등으로 한껏 치장하며 변명하는, 꽤 잘만든 오락영화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것처럼 그리 대단한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대칭적 사회와 쉬운 분노

세상사는 비대칭적이며 불균등하다. 기회는 균등하지 않게 주어지며, 비록 균등한 기회에서 출발한다 해도 그 행위의 결과에 대한 평가는 비대칭적으로 이루어진다.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불평등한 결과의 연속이다. 현대 주류 경제학은 불평등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러한 무기력증은 비주류 경제학이나 다른 사회과학 분야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속성이 그러하다고 변명한다. 자본의 이기적인 속성은 스스로 번식하고 진화하는 능력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자본을 갖지 못한 자를 착취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만든다. 경제학자들이 찾아낸 것은 여기까지다. 평등이 사회정의의 최종 종착지 중 하나라면, 99%의 사람들은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두 축 중 다른 하나인 민주주의에 이 사회정의의 달성을 베팅할 수 밖에 없는 자포자기적 상태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치명적인 약점은 다수에 의한 쉬운 분노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전문가의 의견은 다수의 이해 정도에 의해 종종 무시되기 쉬우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폭력성마저 다수결이라는 원칙 아래 용인받기도 한다.

나는 지금 ‘조국 사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조국은 비대칭적인 사회구조에 기여한 사람이다. 그는 겉으로는 평등한 사회정의에 대해 떠들었지만(그리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떠들었지만), 정작 본인은 99%의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고 그 부를 대물림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람들은 그의 표리부동함에 분노했다. 평생 노력해도 갖지 못할 가치들이 너무나 쉬운 방식으로 전달되는 과정이 하나씩 공개될수록 분노의 크기는 커져갔다. 이 분노의 크기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생명체가 두 개 있는데, 바로 정치인과 언론인이다. 이들은 대중의 등 뒤에 달라붙어 그들의 분노를 먹고 사는 붙어살이과 생물인데, 그 결과로 정치인은 득표수를, 언론인은 클릭수를 얻으며 행복감을 느낀다. 이 시점부터 서사구조는 이상하게 뒤틀리기 시작한다.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광장에 정당인들이 주도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하고, 어떤 재벌가 자녀의 마약문제는 단신으로 처리되는데 오직 한 장관의 자녀에 대해서는 서류에 붙은 글씨 하나까지 특종으로 보도된다. 아직까지 불법 여부가 확인된 바는 없는데, 갑자기 검찰이라는 특수한 생명체가 달라붙어 사건의 덩치를 키운다. 그들의 미래 먹거리를 좌지우지하는 사람의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보면 개기는 것이고 다른 이가 보면 할 일을 하는 것인 그들의 특수한 업무는 이 사회를 정확하게 절반으로 갈라놓았다. 한 쪽은 광화문에서, 다른 한 쪽은 서초동 검찰철 앞에 모여 목을 놓아 부르짖는다. 너희가 잘못했다고.

양비론은 아니다. 이 서사의 출발이 조국이라는 괴물을 낳은 비대칭적 사회구조와 다른 모든 중요한 이슈를 제껴두고 오직 조국에 대해서만 분노를 집중하는 쉬운 선택을 한 대중 모두에게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우경화되는 대학생들이 왜 재벌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고 강남 아빠에 대해서만 분노하는가, 생각해볼 부분이다. 강남의 학부모들이 왜 조국을 두둔하고 나서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전국의 대학생들이 조국 한명때문에 갑자기 박탈감을 크게 느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서서히 침체 일로를 걸어가는 경기상황과 갈수록 빡빡해져가는 스펙놀이가 이들을 꽤 오랜 기간동안 짓눌러왔다. 살짝만 건드려도 터질 것 같은 임계치가 가까워진 시점에 정치세력과 언론인이 그들을 자극했다. 다만 이들은 가지지 못한 자들이고, 그들의 분노가 비록 나이브한 쉬운 선택이었을지언정 거짓과 위선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충분히 화를 낼만한 상황이지만, 누군가에 의해 휘둘리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으면 한다. 이들의 반대편에 있는 가진자들은 조국으로 인해 자신들의 치부까지 드러날 것을 걱정하고 있다. 적당히 사태가 마무리되었으면 하고 바랄 것이다. 교육 뿐만이 아니다. 부동산, 취업, 거래, 거의 모든 분야에서 편법적인 부의 대물림이 성행하고 있고, 조국 서사는 그 일부분을 공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조국 하나만으로 이렇게까지 커질 일은 아니었고, 기왕 화를 낼거면 이 사회의 전체적인 시스템에 대해 감정을 집중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일 것이라는 이야기다. 지금 조국에 대해 연일 맹렬한 비난을 쏟아내고 있는 한 정당에 속한 많은 이들이 그보다 훨씬 더 한 짓들을 하고 다녔다는 사실이 동등한 수준으로 보도가 된다면 상황은 아주 짜게 식을 것이다. 조국 한 명에게 집중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어떤 특수한 의도가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고, 이는 여론은 주도하는 이들이 가진 비대칭적인 시각과 그들에 휘둘리는 대중의 쉬운 분노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므로 그 정당성을 획득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