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오 코우 | 기동전사 건담 썬더볼트: 디셈버 스카이

나의 첫번째 건담은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였다. 1988년 무렵, 일본 애니메이션의 정식 수입이 불법이었던 시기, 서점에는 일본 에니메이션을 캡처하고 대사를 엮어 책으로 만들어 팔던 때였다. 그 이유와 목적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를 데리고 무궁화호 열차를 타야 했던 어머니는 기차역 플랫폼에서 이 [역습의 샤아] 캡처본 책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나는 이 책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미국에 사는 아이들이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미래의 역사를 배우듯, 나와 같은 한국의 아이들은 조악한 화질로 녹화된 [건담] 시리즈의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미래의 역사를 익혀 나갔다. 그렇게 우주세기연표와 1년전쟁, 아무로 레이와 샤아를 하나의 역사로 받아들이게 됐다. 이후 모든 건담시리즈를 챙겨볼 정도로 푹 빠지진 않았지만, 건담 시리즈와 모빌 슈트는 어린 시절의 추억 중 한 챕터를 단단히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기동전사 건담 썬더볼트: 디셈버 스카이]는 건담의 정사(正史)의 출발점인 1년 전쟁과 그 시간을 공유하되 서로 영향을 주고 받지 않는, 일종의 평행세계관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우주세기에 정식으로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완전히 다른 건담 이야기라고도 할 수 없는, 약간 독특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 군살 없이 단순하되 충분히 흥미롭다. 공격하는 연방군과 지키려는 지온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연일 벌어진다. 프리재즈를 좋아하는 연방군 소속 파일럿 이오 플레밍은 전투와 모빌슈트에 미친 사람이다. 부하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에 죄책감을 심하게 느끼는 상관이자 연인 클로디아와는 달리 전투에서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도 두려워하지 않는 천부적인 싸움꾼이다. 이에 대항하는 지온군의 대릴 로렌츠는 비치 보이스 류의 요트 음악을 좋아하는 스나이퍼로, 전쟁 중 두 다리를 잃고 의족을 한채 같은 처지인 상이군인 부대에서 에이스로 인정받고 있다. 영화의 거의 모든 서사와 인물, 컷과 씬은 이 두 명의 주인공이 격돌하는 장면을 위해 존재하지만, 그 안에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을 성공적으로 녹여내며 성인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정체성을 잘 지켜낸다. 유치한 장면은 하나도 없고 재즈와 올드 팝 음악이 번갈아 나오는 OST 역시 훌륭하며, 선과 악이 구분되지 않은 복합적인 인물 묘사 역시 뛰어난 편이다. 특히 나처럼 1980년대 건담 애니메이션에서 그 기억이 멈추어 있는 사람이라면 최신 애니메이션 기술로 되살아난 건담 대 자쿠의 전투신은 영혼을 빼앗아갈 정도의 매력으로 다가올 것이다. 현재 연재중인 코믹스를 원작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의 결말은 열려 있다. 아마도 두 주인공의 운명은 이후 꽤 많이 바뀔 것 같다. 이런 류의 작품은 대체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현재 애니메이션 후속편 [기동전사 건담 썬더볼트: 벤디트 플라워]까지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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