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 | 우리집

[벌새]에 이어 [우리집]을 연이어 보았다. 아내는 영화 중간 등장하는 대사 “우리집은 진짜 왜 이럴까?”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벌새]와 마찬가지로 [우리집] 역시 어린 시절 통과의례처럼 겪어야 했던 공통된 고통의 기억을 집요하게 일깨운다는 점에서 폭 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밑바탕을 가지고 있다. 바쁜 성인의 삶 속에서 잠시 잊고 있던 ‘그’ 기억이 화면에서 되살아날 때, 관객은 어린 배우들의 얼굴에서 그 고통의 세대 간 되물림을 확인하며 연민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생각보다 훨씬 무겁게 다가온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귀여운 에피소드와 어린 배우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며 이 영화의 주제가 안고 있는 무게감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겠지만, 후반부로 나아가며 영화는 운명론적 비관성을 비교적 명확히 드러낸다. 관객은 절망감과 당혹감을 느끼며 어린 소녀들이 보여준 대안적 가족으로서의 연대의식과 전통적 형태의 가족에 대한 희미한 희망만으로 과연 안심을 해도 되는 것인지 불안해한다. 상자, 요리, 저녁식사, 휴대폰 등으로 상징되는 가족 구성원 간 안정적 관계에 대한 소녀들의 열망은 어른들의 긴 한숨과 냉소적인 다그침에 의해 봉쇄당한다. 미성년이라는 특정 연령층이 불완전함이나 미성숙함을 반드시 내포하고 있을 필요는 없지만, 타의에 의해 조금 빠른 속도로 본인의 연령대에서 흔히 발견되는 순수함에서 벗어나 어른의 세계로 진입할 수 밖에 없는 미성년의 모습을 어른의 시선으로 보는 것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영화의 비극적 결말은 그 죄책감의 크기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시사하기 위한 운명론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와 함께 타의에 의해 강요되어진 가족 붕괴의 위기 속에서 강한 의지로 역경을 이겨내려 하는 소녀들의 공동체를 지지할 수 밖에 없는 것 역시 필연적으로 보인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강한 인과관계로 서사구조를 단단히 붙들어 매는 가운데 배우들의 호연과 배경이 되는 동네 그 자체의 얼굴을 통해 많은 감정을 성공적으로 담아낸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왜 ‘Our Home’이 아니고 ‘The House of Us’인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상자로 상징되는 집이라는 물질적 공간 속에 무언가를 담아내거나 덜어내고 싶어하는 소녀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혹은 “우리집에 놀러와”의 그 ‘집’이 갖는 물질성, “저녁은 가족이 함께 먹어야지”에서 드러나는 저녁식사 식탁이 갖는 그 물질성이 소녀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계속 생각하게 된다.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