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라 | 벌새

김보라 감독이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직접적으로 밝혔던 것처럼, [벌새]는 불안하고 서늘하지만 따뜻하고 희망적인 영화다. 영화는 중학생 여자아이의 등 뒤를 조용히 쫓으며 그녀가 겪는 세상의 편협함과 폭력성을 가만히 비추는 동시에 그 거친 세상에서 날개짓을 바삐 하는 주인공의 복잡한 내면을 조용히 감싸 안는다. 주인공 은희가 2년째의 중학교 생활을 견디어 내는 1994년은 해방 이후 진화해온 한국사회의 전근대적인 병폐들이 별다른 도전을 받지 않은채 그 존재감을 뽐내며 이곳 저곳을 괴롭히고 다니던 시기였다. 그 병폐들이란 가족 단위에서 발견되는 가부장제와 가정폭력, 가정과 학교가 합심하여 힘을 발휘한 학력제일주의, 사회 차원에서 비극을 초래하는 인자였던 안전불감증과 개발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 등으로 간추려질 수 있을텐데, 은희는 그 모든 것의 총집체이자 상징이었던 대치동의 고층 아파트에서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님과 함께 산다. 아버지로부터 서울대 진학이라는 꿈을 부여받지만 공부를 아주 썩 잘하지 못하는 오빠는 은희에게 상습적인 폭력을 휘두르고, 8학군에 진학하지 못한 언니는 밤마다 거리를 배회하며 집에 잘 녹아들지 못한다. 은희 역시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삐삐로 ‘1004 486’ 메시지를 보내는 남친과 한문학원에서 키득거리를 수 있는 단짝 친구가 있으니 불안하고 서늘한 현실을 어느정도 버티어 낼 수 있다.

슬픔을 기쁨으로 받아치고 불안함을 따뜻함으로 둘러치던 은희의 삶에 몇가지 파장이 발생한다. 배우지 못한 설움을 자신의 딸은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여대생’이 되길 바라는 엄마나 옆에 앉은 ‘날라리’를 적어내라고 강요하는 학교 선생님 등, 주변의 보수적이고 완고한 어른들과 달리 20대 여성인 한문학원 선생님 영지는 은희에게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는지 묻고, 그 누구에게도 맞지 말라고 용기를 준다. 아마 이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자신의 10대 시절 만난 각자의 영지 선생님을 떠올렸거나, 영지 선생님을 만나지 못한 자시의 10대 시절을 위로했을 것이다. 은희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해준 영지 선생님은 영화에서 유독 이질적이고 비현실적인 존재로 비추어지는데, 천국에서 홀연히 날아와 숨을 불어넣고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천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강하고 선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감독의 분신처럼 생각되는 한편, 은희에게 철거농성장의 현수막의 의미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앞서 언급한 ‘완전히 사라지는’ 계기가 사회적인 비극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인공 개인과 그녀를 둘러싼 불안한 사회를 연결시켜주는 가교로 기능하기도 한다. 어쩌면 미래의 은희가 과거의 은희에게 잠시 돌아온 것일 수도 있겠다.

은희의 신체에도 변화가 하나 일어나는데, 귀 뒤에 혹이 생겨 이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간단한 수술이라 하지만 수술은 수술인지라 가족들은 자신을 때린 오빠를 두둔하던 아버지는 병원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고, 목놓아 불러도 대답이 없던 엄마는 감자전을 먹는 은희를 (영화 속에서는 처음으로) 가만히 쳐다보기 시작한다. 수술에서 깨어난 은희가 주변 사람들(아마도 간호사)에게 떼어낸 혹을 어찌 했는지 묻고, 그 혹을 버렸다는 말에 ‘왜’냐고 반문하는 대목에서 이 일화는 조금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즉, 지금까지 은희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인자들이 조금씩 제거된다는 차원에서 그녀의 서늘한 마음을 조금을 덜어낸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은희는 집을 잘못 찾는 바람에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러도 엄마를 만날 수 없다. 영화 중간, 어딘가를 멍하게 쳐다보는 엄마를 아무리 불러도 엄마는 돌아보지 않는다. 오빠의 폭력으로부터 구원해달라고 조금 더 센 힘을 가진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늘 묵살당한다. 은희의 마음 한구석에는 결코 해결되지 못하는 우울함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고, 그 중심에는 부모와의 관계가 일정 부분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이 작용했을 것이다. 귀 뒤에 붙어있는 혹을 제거하면서 그 부분이 조금 해결되는 양상을 보인다. 수학여행 장면에서 이를 조금 더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엄마는 딸을 위해 김밥을 싸주고 아빠는 경주에 도착하면 전화하라고 당부한다. 버스를 기다리는 은희는 혼자이지만, 주변 친구들을 바라보면서도 더이상 불안해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 조금 마음이 놓이게 된다.

마지막으로 성수대교 붕괴사건이 있다. 불안하고 서늘한 10대 시절을 통과해야 하는 은희의 마음에는 늘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어보인다. 친구가 있어 좋고 남친이 있어 좋지만, 좋아하는 영지 선생님은 더이상 만날 길이 없고 지난 학기 고백 받았던 후배는 어느새 마음을 정리해버렸다. 멍청한 남친은 언제 다시 바람을 피울지 모르고 그의 어머니는 떡집 딸을 썩 내켜하지 않는다. 날개짓을 열심히 한 덕분에 조금씩 나아지는 부분도 있지만 결코 해결되지 않는 부분도 여전히 존재한다. 은희의 마음속에 툭 끊어진 부분, 단절된 부분이 성수대교의 끊어진 부분으로 상징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참 많다. 밤을 새워 이야기해도 끝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영화의 모든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렇게 이야기할만한 가치가 있다. 은희의 뒷모습을 가만히 조망한다는 점에서 에드워드양이, 은희의 앞모습을 지긋이 비춘다는 점에서 허우샤오시엔이 생각났고, 지옥같은 십대를 사회상과 연결짓는다는 점에서는 [파수꾼], [릴리슈슈의 모든 것] 등이 생각났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영화의 색깔을 빌려다 썼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충분한 오리지널리티가 있고, 한국영화사에서 중요하게 기록될 이유를 분명히 가지고 있으며, 여성주의 영화로 읽어도 의미있는 지점을 많이 포착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차원이 깊고 다양하다. 1994년을 힘들게 이겨낸 은희는 지금 잘 살고 있을까. 자기만한 딸을 하나 두고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지는 않을까. 힘든 시절을 이겨낸 여성 모두에게 바치는 조용한 위로같은 영화다.

2 thoughts on “김보라 | 벌새

  1. 리뷰읽고 봐야겠다 싶어서 어제 와이프와 봤습니다.
    말씀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은 영화더군요. 저는 조금 수다떨다가 감독 인터뷰를 열심히 찾아 읽는 것으로 대신하였습니다 ㅎㅎ

    • 보셨군요! 저도 여기저기 흩뿌려진 감독 인터뷰를 찾아 읽는 재미로 요즘 살고 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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