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 백의 그림자

SNS의 내 타임라인에는 독서광인 친구들의 계정이 몇 있다. 요즘에는 그들이 극찬한 책을 즐겨찾기에 저장해두었다가 어느 정도 쌓이면 한꺼번에 주문하는 패턴으로 책을 산다. 소설가 황정은의 2010년작 [백의 그림자] 역시 그런 방식으로 읽게된 책들 중 하나다. 170쪽 남짓한 짧은 소설인데, 읽는 내내 책을 손에서 뗄 수 없을 정도로 문장이 쫀뜩하게 맛이 있고, 책을 다 읽고 덮은 후에도 마음 속에 묵직하게 생각할 것들을 남겨주는, 좋은 소설이다. 황정은의 소설은 이 책이 처음인데, 작가 특유의 문장이나 서사구조, 글에 색을 입혀 나가는 방식이 가히 ‘황정은풍’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독창적이고 압도적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무척 ‘영화적’이라고 느꼈다. 시각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좋은 영화, 예컨대 허우샤오시엔이나 미하엘 하네케의 영화를 볼 때 관객은 영화의 전체적인 서사를 따라감과 동시에 곳곳에 뿌려진 많은 단서들로부터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를 함께 파악하게 된다. 흔히 말하는 구조주의적 색채가 있는 영화들에서 말이다. [백의 그림자]는 문장과 문장이 연결되는 구조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를 헤아리게 된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은 영화를 보는 경험과 상당히 유사한 예술적 경험을 제공하는 것 같다. 그런데 거의 모든 문장이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쓰여 소설 전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장시처럼 읽히기도 한다. 흐름이 끊어지지 않고 매끄럽게 이어지는 과정에서 독특한 리듬마저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막스 리히터나 닐스 프람의 음악을 듣는 것 같기도 하다. 형식적인 면에서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다른 차원으로 날라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 형식 안에 담고 있는 내용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소설 뒤에 함께 실린 신형철의 평처럼 이 소설은 대단히 윤리적인데, 그 예술에서의 윤리성이란 것이 사실 조금만 흐트러져도 우스꽝스러워지거나 또다른 폭력으로 탈바꿈할 위험성을 지니고 있어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백의 그림자]는 예술작품에서 윤리성이 담보해야 하는 최대한의 것을 성취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누구도 해하지 않지만, 피상적이지도 않은, 가만히 어루만져 주지만 깊은 위로가 되는, 절묘한 그 어딘가를 찾은 느낌이다. 책을 덮자마자 작가의 다른 작품도 얼른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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