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 레몬

장편보다는 중편에 가까운, 스릴러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탓에 더 빠르게 읽히는 책으로 권여선이 돌아왔다. 그의 책을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다.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서를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하지만, 지나치게 감상에 젖어 현실을 흐리게 보는 우를 저지르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의 문장은 따뜻하지만 서늘하고, 포근하지만 날카롭다.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레가토], [분홍 리본의 시절] 모두 그런 문장으로 쓰인 이야기들을 품고 있었다. [안녕 주정뱅이]는 권여선이 동시대 가장 중요한 작가라는 사실을 만인에 각인시킨 의미있는 소설집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여기저기 찾아보니 [레몬]은 권여선이 과거에 연재한 중편을 다듬은 결과물이라 하고, 원작은 지금보다 더 짧았다고 한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은 복수에 대한 이야기다. 의문의 사고로 형제를 잃은 한 사람이 16,7년에 걸쳐 복수의 길을 걷는 한편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설은 몇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마다 화자가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사건을 조금씩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스릴러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고 분량이 짧은 편이며 화자의 구성 또한 다양하기 때문에 책장은 술술 넘어간다. 기존의 권여선 소설과 다르게 서사구조 그 자체만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 또한 흥미로운데, 사건의 본질에 접근해가며 서서히 변해가는 주인공의 심리와 함께 책을 덮은 후에도 꽤 묵직한 생각할 꺼리를 남겨둔다. 많은 이들이 언급한 바와 같이 사회적 문제를 적극적으로 껴안고 있기도 하다. 세월호 이후 남겨진 심리적 채무, 극복될 수 없는 계급 간 차이, 신에의 의지를 통한 현실의 망각과 왜곡 등의 문제가 작품 곳곳에 꽤 묵직하게 스며들어가 전체적인 주제를 형성하는데 일조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결국 자신의 방식대로 복수를 완수한다. 하지만 복수의 책임은 여전히 남아 있다. 사랑하는 형제를 온전히 떠나보내는 데에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이후 남겨진 이들이 가지고 가야 할 짐의 무게는 많이 줄어들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앞서 이야기한 권여선 특유의 연민의 정서가 소설속 낮은 계급에 속한 이들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면, [레몬]의 마지막 부분에서 연민에 더한 애도의 정서가 분출된다. 떠나보내도 떠나지 않는 것이 남아 있다. 애도는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품는 것이 아닐까. 소설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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