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미 골드스타인 | 제인스빌 이야기

학부 시절 경제학을 처음 배울 때 한 교수님이 일제 강점기의 생활상을 경제학적으로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이야기하며 당시 측정된 학생들의 신체조건의 비약적인 발전을 예로 든 적이 있다. 즉, 일제강점기 초기에 비해 후기로 갈수록 한국인의 신장 및 체중이 유의한 수준에서 지속적으로 개선되었다는 통계분석 결과는 당시 피지배계층이었던 한국인의 영양상태가 전반적으로 개선되었다는 가정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결과는 일제 강점기를 바라보는 두 완전히 다른 시각 – 식민지 근대화론과 식민지 수탈론 – 중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가 한반도의 경제적 근대화를 촉진시켰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될 여지가 있었다. 대학 시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일제 강점기에 대한 ‘상식’과 대치되는 내용이어서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이와 함께, 식민지화, 혹은 독립운동과 같은 ‘거시적’인 사회담론이 같은 시대를 살다간 이름 없는 민초의 ‘미시적’인 삶과 얼마나 괴리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고민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는 거시경제정책을 전공으로 삼아 공부하고 있지만, 재정정책이나 통화정책과 같은 거대하고 뭉툭한 정책이 그 영향력 아래 있는 서민 개개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꾸게 되는지 추적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결코 게을리 해서는 안되는 고민의 영역이기도 하다.

[제인스빌 이야기]의 원제는 [Janesville: An American Story]다.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 에이미 골드스타인이 쓴 르포르타주인데, 금융위기 직후인 2008년부터 금융위기의 여파로 제인스빌의 GM공장이 공식적으로 폐쇄된 2013년까지 5년 간 제인스빌에 사는, 혹은 이 도시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의 원제가 상징하듯, 이 책은 제인스빌이라는 위스컨신의 작은 도시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경제대공황 이후 미국사회가 겪은 가장 큰 경제위기였던 2008년 금융위기가 어떻게 미국인의 평균적인 삶을 바꾸어놓았는지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기도 하다.

이 책은 크게 세 축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한 축은 제인스빌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던 중산층 가족들이다. GM와 리어, 파커 펜 등 우리도 알 법한 글로벌 대기업의 공장에서 착실히 모기지 대출을 갚아나가던 이들이 금융위기라는 외부충격으로 인해 순식간에 직장을 잃어버린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실직자가 된 이들은 새로운 밥벌이 수단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좌절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희망을 움켜쥔다. 십만명이 채 되지 않는 인구의 소도시 제인스빌이 공동체의식을 기반으로 큰 위기를 버티어내는 과정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이 책이 전달하는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다. 이들을 돕기 위해 애쓰는 위스컨신 지역의 공동체 리더들이 이 책의 두번째 축을 담당한다. 이들은 직업학교를 확장하여 실직자들의 재취업을 돕고, 실직자 부모를 둔 학생들이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학교 안에 생필품을 제공하는 작은 창고를 운영하며, 워싱턴의 정치인들이 위스컨신의 작은 마을에 아주 약간의 관심이라도 둘 수 있도록 동분서주한다. 이들의 노력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다. 수천명이 직업을 잃었지만 직업학교를 통해 재취업에 성공한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GM공장은 결국 영구적으로 폐쇄되었고, 제인스빌 공동체는 정치적으로 분열되었다. 작은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 성공적이지 못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워싱턴의 거대 정치가 지역사회의 실체적 삶과 괴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인스빌 출신의 정치인 폴 라이언과 위스컨신 주지사 스캇 워커 등으로 대변되는 정치인들이 이 책의 다른 한 축을 차지한다. 예산통인 폴 라이언은 고향의 민심을 등지고 워싱턴 중앙정치로 나아간다. ‘선동가’ 스캇 워커는 경기침체의 직격탄을 받은 위스컨신의 서민들을 위한 예산을 대폭 삭감한다. 지역사회의 외침은 이들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선거 전 제인스빌 연설에서 공장을 반드시 살려 내겠다고 공언한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결국 그 도시에서 가장 큰 공장들을 폐쇄했다.

이 책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며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 영민함을 보여주면서도 르포르타주의 생생함과 금융위기 이후 시행된 경제회생 정책의 비현실성을 향한 비판의 날카로움은 놓치지 않는다. 극한 상황에 처한 개인이 가족과 공동체를 포기하기 않고 존엄성을 유지하는 과정을 과장되지 않은 묘사를 통해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한편, 이들이 그런 어려운 상황까지 되지 않게 할 수도 있었을, 혹은 이후 회생의 속도를 더 빠르게 할 수도 있었을, 아니면 이 책에 등장하는 한 여인이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지 않게 할 수도 있었을 수많은 기회들이 허무하게 사라진 현상의 본질을 맹렬하게 파고든다. 5년이 넘는 밀착취재와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터뷰, 각종 정책에 대한 깊은 이해 등이 어우러져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긴박함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즈와 뉴욕 타임즈, 월스트릿저널 등 각종 매체에서 그 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하였고, 이 책의 조연(?) 중 한 명인 오바마 전 대통령 등으로부터도 찬사를 받았다.

이 책은 지금까지 경제학자들이 믿고 있던 통념들 중 상당 부분이 실제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일깨워준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실업자에 대한 직업교육의 효과성이다. 제인스빌 주민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 그 지역에 있는 블랙호크 직업학교를 수료한 실직자보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은 고졸 실직자가 재취업에 성공한 사례가 더 많으며, 재교육 과정을 수료한 실직자 중 상대적으로 더 많은 비율이 간헐적 노동에 종사하며 더 낮은 임금을 받았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실업과 관련된 정책을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는 부분이 실직자 재교육을 통한 구직기간의 단축인데, 제인스빌에서는 이 정책이 제대로 먹히지 않은 것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먼저 숙련노동자(skilled labor)와 비숙련노동자(unskilled labor)간 직업이동의 차별성이 존재할 수 있다. 변호사나 대학교수는 숙련노동자에 해당하며, 상대적으로 직업안정성이 뛰어나다. 편의점 파트타이머와 같은 비숙련노동자는 언제든 비슷한 수준의 다른 노동자로 대체될 수 있기 때문에 직업안정성이 떨어진다. 때문에 비숙련노동자에 대해 직업안정성을 높여주는 정책이 사회 전체적인 실업률 억제를 위해서 효과적일 수 있다. 제인스빌에서 일하던 GM공장 노동자들은 대부분 고졸이었다. 하지만 길게는 30년 가까이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일한 경험을 가진 이들을 비숙련노동자로 분류할 수 있을까? 고도로 분업화된 생산체계에서 10년 넘게 장기간 하나의 기술에만 종사해왔다면, 이들이 갑작스러운 실직 이후 약 2년여의 재교육기간을 거쳐 완전히 다른 직종에 지속적인, 혹은 정규직 직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까? 차라리 지금까지 해왔던 같은 일을 지속할 수 있는 다른 지역으로 터전을 옮기는 쪽을 택하는 것이 더 현명할 수 있다. 다시말해 노동이동(labor immigration)이 자연스럽게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온 맷의 예가 이에 해당한다. 고소득을 보장받는 숙련노동자도, 대체성이 높은 대신 다른 직종으로 변환하기도 쉬운 비숙련노동자도 아닌 이 장기 제조업 종사자들은 기존의 이론대로 직업교육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한다는 결과는, 결국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터전인 특정 지역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직업적 전문성을 계속 발휘하는 일은 금융위기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의미인데, 이는 지역사회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 책의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우선 군산의 예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GM 군산공장은 2015년 공장의 폐쇄를 통보했다. 이 공장에서 일하던 500여명의 노동자와 GM 하청업체에서 일하던 500여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지역사회 경기는 꽁꽁 얼어붙었다.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은 당장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해했다. 평생을 컨베이어 벨트에서 살아온 이들이 갑자기 학원을 차리거나 간호사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은 실업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라다. 또한 직종간 이동이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나라다. 아직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유효하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2019년 5월, 폐쇄된 GM 군산공장을 국내 한 컨소시엄이 인수한다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지역 상공회의소와 중앙정부가 노력한 결과다. 고용은 대부분 승계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세금이 들어갔다. 사기업의 경영판단으로 인한 사회적 파장을 정부가 어디까지 관여해야 하는가는 지금도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첨예한 논쟁거리다. 한국사회는 대기업의 회생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정부의 과감한 개입을 요구하여 왔다.

신도시가 생기면 가장 먼저 상권을 장악하는 수많은 치킨집도 떠오른다. 대기업 본사의 경영지침에 따라 자유도가 허락되지 않는 환경에서 치킨집을 운영하는 이들은 대부분 평생 치킨을 튀기는 일과 무관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들의 실패에 대해서는 본사가 책임지지 않는다. 전문성을 충분히 획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은퇴자금을 쏟아부은 이들은 대부분 2년 안에 수익을 회수하지 못한다. 남들보다 조금 빠른 은퇴를 선택했거나 은퇴로 내몰린 이들이 가지고 있던 선택지 중 치킨집이 정말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을까? 대우조선과 같은 대기업에 천문학적 세금을 쏟아부으며 회생절차를 돕고 있는 정부는 하루에도 몇백개의 치킨집이 문을 닫는 현상에 대해서는 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것일까? ‘대마불사’가 아니라 ‘소마불사’의 시각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6 thoughts on “에이미 골드스타인 | 제인스빌 이야기

    • 책이 꽤 두껍긴 한데 술술 넘어가요. 심심하실 때 읽어보시면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1.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아주 재밌는 책일 것 같습니다.

    숙련노동자와 비숙련노동자에 대해서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데, 최근에 선진국에서는 갈수록 노동자 내에서도 직업, 직무에 따른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무역-노동쪽의 연구들이 떠오릅니다. 아주 전문적이고 대체되기 어려운 직업, 아니면 아주 숙련도가 떨어지고 대체되기 쉬운 직업들만이 남고 나머지 직업들의 비중은 줄고 있다는…. 그 점차 사라지고 있는 직업, 직무 종사자들이 고용훈련의 혜택을 받기 어려운 그룹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노동 이동에 관해서 어려운 부분은, 산업(제조업) 자체가 국가 안에서 사양산업이 되는 상황에서는 노동이동도 장기적으로는 뾰족한 대안이 아닐 수 있다는 점 아닐까 생각듭니다. 맷은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만… 어려운 문제네요.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노동자의 직무에 따른 양극화 현상은 흥미롭네요. 산업구조의 변화라는 큰 물줄기 속에서 노동자 개인이 할 수 있는 부분은 아주 작은 것 같아요. 결국 말이 쉽지 직업을 바꾸는 일은 상당히 어려우니까요. 결국 정책적으로 고민할 수 밖에 없는데, 비즈니스 모델의 변화라는 미래상까지 예측해야 하는 일이기에 참 쉽지 않은 이슈같습니다.

  2. 마침 신문에도 소개되어 있어 구해다 읽었습니다. 이상적으로 결말지어질 거라 생각은 안했지만, 한 가정이라도 더 행복해진 경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다지 희망대로 전개되지는 않더군요. 좋은 책 소개 감사드립니다.

    • 뜨겁지만 감정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책을 덮고 난 후 생각할 숙제들을 많이 던져주었어요. 강추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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