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er Farrelly | Green Book

3월 중순,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본 또다른 영화는 [그린북]이다. 이 영화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한 클래식/재즈 피아니스트 돈 셜리(Don Shirley)와 그가 미국의 남부(“Deep South”) 지역 순회공연을 위해 고용한 프랭크 발레롱가(Frank Vallelonga)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를 감독한 피터 패럴리의 전작들이 [덤 앤 더머],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와 같은 코메디물이고, 프랭크 발레롱가의 아들 닉 발레롱가(Nick Vallelonga)가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여 돈 셜리라는 실존 인물을 왜곡하여 다루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등, [그린북]을 둘러싼 잡음과 의구심이 상당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충분한 사회적 의미와 영화적 매력을 가지고 있다.

먼저 의미라 함은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가 그리 가볍지 않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돈 셜리는 흑인이었고, 그가 발레롱가와 함께 남부지역을 여행한 때는 1960년대였다. 즉, 비교적 인종차별에서 자유로웠던 미 동북부 지역이나 서부 지역과 달리, 당시 우리가 ‘”Deep South”라고 부르는 남부 7개 주에서는 흑인이 백인 밀집지역을 돌아다니면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때였다. 셜리가 클럽 기도 등 ‘해결사’ 역할로 생계를 유지하던 덩치 발레롱가를 운전기사 겸 보디가드로 고용한 이유도 이때문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공항에 내렸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곳에 남부군 깃발(Confederate Flag)이 걸려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고, 실제 친구 스캇의 결혼식 뒷풀이에서 그곳에 살던 몇몇 백인들이 나에게 다가와 “네가 들었던 악명과 비교해 실제 남부에 와보니 어때?” 라고 농담 반 진담 반 질문을 던졌다. 당연히, 스캇의 성대한 결혼식에 참석한 아시안은 나 하나였다. 비록 지금은 흑인과 백인이 함께 길거리에서 공존할 수 있는 환경까지 조성이 되었다고 하지만, 흑인 입장에서 ‘내 조상이 저기 보이는 백인의 조상의 노예였다’ 라는 사실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며, 그건 백인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가 선거운동을 할 당시 흑인 인구비율이 가장 높은 이 남부지역에 한번도 오지 않았다는 기록은(그는 백인 인구비율이 압도적이었던 콜로라도나 아이오와 주에 10번 이상 들렸다), 그 많은 남부지역 흑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의 주인’이었던 농장주의 후손들이 지지하는 보수정당에 투표한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슬픈 통계지표일 것이다. [그린북]은 현재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미국 남부지역의 이 슬픈 사회적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진중하고 조심스러운 자세로 접근한다. 물론 감독의 성향(..) 상 어이 없는 지점에서 도덕적 기준을 상실하는 순간도 발견되긴 하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밑도 끝도 없는 헤피엔딩’은 아닌 것이다.

재미도 있다. 전형적인 버디 무비가 될 뻔한 이 영화를 구워한 것은 다름 아닌 두 주연배우, 비고 모르텐슨(Viggo Mortenssen)과 마허샬라 알리(Marhershala Ali)다. 비고 모르텐슨은 아주 자연스럽게 인종차별을 체득한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분해 돈 셜리와의 여행을 통해 성장하는 캐릭터를 훌륭히 연기해냈다. 물론 캐릭터의 전형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교양 없는 서민계층 백인이 훌륭한 음악에 감화되어 그동안 고수해온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꾼다는 설정도 약간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능청맞게 이탈리아식 영어 억양을 구사하는 그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절로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문라이트]에서 매우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 마허샬라 알리는 [그린북]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역량에 걸맞는 주목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연기하는 교양 넘치는 흑인 피아니스트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연기 교본으로 쓰일 수 있을 것 같다. 실제 돈 셜리는 클래식 피아니스트로 출발했지만 유리장벽 등으로 인해 그 바닥에서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그나마 흑인 뮤지션이 활동할 폭이 넓은 재즈/크로스오버 장르로 넘어왔다고 한다. 심지어 당시 상당한 탄압을 받던 성정체성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방대한 역사적 컨텍스트를 절제된 연기에 담아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걸 알리가 해냈다! 그의 연기를 보며 ‘탁월하다’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린북]은 완벽한 영화는 아니다. 헛점도 많고 한계도 분명하다. 생각보다 가볍다고 느끼는 관객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꽤 모범적인 수준에서 주제를 잘 형상화했고, 두 배우의 인상깊은 연기가 영화에 깊이를 더해주며 나쁘지 않은 영화적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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