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소 쿠아론 | 로마

내가 근무하는 대학교의 단과대학 건물에는 네 개 학과가 함께 살림살이를 꾸리고 있다. 학교로 적을 옮긴 후 고개 숙여 인사하는 대상이 확 줄어들었다. 교수끼리 고개 숙여 인사할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고개 숙여 인사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학교 복도에서 청소하는 중년의 여성을 만날 때다. 나는 아직도 복도와 화장실을 청소하는 그들이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일해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지만(그것이 자의에 의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삶에 대한 애착과 고단함에 굴복하지 않는 강인함을 온 몸으로 드러낼 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경기침체와 빈부격차 확대, 질좋은 일자리의 감소 등 거시경제의 부정적 여파가 미시적 개인의 삶 속으로 파고들 때 가장 앞자리에서 그 고통을 온 몸으로 견디어 내야 하는 계층은 항상 성인 여성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무너지지 않고 늘 사회의 진보를 이끌어 왔다. 사회적으로 낮은 곳에 위치한 노동자 여성의 숭고함에 존경심을 표하는 길에는 그래서 한계가 없어야 한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그래비티] 이후 5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자 [이투마마] 이후 멕시코로 돌아가 스페인어 – 와 멕시코 원주민어 – 로 찍은 첫번째 영화, 그리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극소수의 극장에서만 개봉한 뒤 넷플릭스 스트리밍으로 공개한 영화. 이 때문에 깐느 영화제와 출품 자격 문제로 시비를 겪었고 마침내 베니스 영화제에서 공개되어 심사위원 전원일치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화제작. 심지어 쿠아론 본인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놓은 영화라는 소식까지. [로마]는 최초 공개 시점부터 꼭 보고 싶었던 영화였고, 항상 위시리스트 첫머리에 위치한 영화였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보았다!

[로마]는 흑백영화다. 배경음악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파노라마로 넓게 펼쳐진 화면 안에서 카메라는 흔들리지 않고 횡으로(그리고 가끔은 종으로) 조용히 움직인다. 그래서 영화의처음부터 끝까지 관조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을 잃지 않으며 오로지 영화의 주인공에 집중하게 만든다. 영화의 주인공은 클레오, 멕시코시티 로마 지역의 한 중산층 가정에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젊은 여성이다. [로마]는 클레오에 대한 이야기다. 클레오의 캐릭터는 이 영화의 감독인 알폰소 쿠아론이 유년 시절 시간을 함께 보낸 가정부 로비 로드리게즈를 모델로 탄생했다. 감독은 50년 쯤 전 기억을 꺼내어 이를 영화로 재현했다. 클레오와 그녀가 보살피는 가정이 사는 집은 쿠아론이 어렸을 때 살던 집을 그대로 본따 제작했으며, 심지어 그 집 안에 있는 소품들은 쿠아론의 가족이 쓰던 것들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전적으로 개인의 기억에 기대어 제작된 영화이지만 영화의 시선이 무척 객관적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쿠아론이 이 영화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안으로부터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부유한 중산층 가정과 그 가정 안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삶을 이어가는 하위 계급에 관한 영화라는 점에서 최근 개봉한 [기생충]과 서사적으로 맞닿아 있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기생충]이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를 반복하며 계급 갈등 문제를 노골적으로 비꼬는 방향을 택했다면, [로마]는 횡으로 가지런하게 움직이는 카메라만큼이나 계급 간 갈등보다는 수평적인 ‘관계’에 보다 집중하고 있는 듯 보인다. 영화 속 클레오는 고용인 부부의 아이들과 평화롭게 어울린다. 아이들은 부모보다 클레오를 더 많이 따르고, 클레오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이도 고용인들이다. 즉, 이 영화는 멕시코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빈부격차 문제에서 눈을 돌리지 않지만, 일차원적으로 그 갈등을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문제가 개인의 삶에서 극복되어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남자에게 버림받은 두 여성이 서로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클레오는 영화 속에서 큰 개인적인 슬픔을 겪게 되는데, 그 사건 이후 슬픔 안으로 가라앉지 않고 고용인의 아이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지속적으로 나누어준다. 이를 통해 [로마]는 쿠아론이 자신의 유년 시절을 가꾸어준 보모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헌사이자, 그녀로 상징되는 노동자 여성에 대한 감독의 따뜻한 시선이 깊게 스며든 영화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영화는 빈부격차 문제 외에도 멕시코의 사회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영화의 절정 부분에 해당하는 지점에서 주요한 배경이 되는 사건은 시위 도중 120명이 학살된 ‘성체축일 대학살’ 사건인데, 가구점에서 주인공 클레오를 어려움에 몰아 넣은 남성과 마주치는 장면, 이후 병원에서 겪게 되는 클레오의 개인적인 비극 등과 합쳐져 상당한 감정적 파고를 이끌어낸다. [로마]가 개인의 이야기를 다루되 회고적인 시선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인 차원으로 이야기를 확장하여 극복의 서사를 제시하는 과정은 사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암시되어 있다. 클레오와 중산층 가정이 사는 집의 현관 앞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개똥들과 이를 물로 깨끗히 씻어내려는 클레오의 청소 장면이 바로 이 영화가 던지는 주제의식을 단적으로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감독은 아마도, 내가 추측하기에, 한 사회가 봉착한 어려움이 개인의 삶으로 스며들어 그들을 괴롭힐 수 있지만, 이와 반대 방향으로 에너지의 흐름이 움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즉, 사회는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반대로 개인의 작은 몸짓의 집단적 결합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쿠아론이 바라보는 대상, 클레오는 아마도 그 다른 흐름의 실마리는 제시하는 인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극복’의 서사의 한 가운데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사랑이다. 클레오가 가진 한없이 선한 마음과 그녀가 주변의 타인들에게 나누어주는 아낌 없는 사랑. 산불이 났는데도 술잔을 들고 나와 노래를 부르는 한심한 상위계급이 심화시키는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는 유일하고도 가장 현명한 방법은 아마도, 지하의 허름한 술집에서 새해를 축복하기 위해 일꾼들이 나누어 마시는 따뜻한 술잔, 혹은 그 술잔에 담긴 사랑과 연대의 마음이 아닐까. 쿠아론은 [로마]에서 유년 시절의 자신에게 사랑을 베푼 한 여성에게 끝없는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고 있는 한편, 이와 동시에 자신의 뿌리인 멕시코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문제들을 이 여성과 그녀가 속한 노동자 계급이 가진 숭고한 연대와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소망을 넌지시 전달하고 있다. 이 덕분에 영화는 다른 차원으로 승화한다. 더이상 개인의 회고록이 아닌, 영화사 전체에 걸쳐 큰 의미를 가지는 엄청난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걸 극장이 아니라 넷플릭스 플랫폼으로 본다는 경험도 흥미롭다. 소파에 앉아, 가족과 함께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감독이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영화의 주제의식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알폰소 쿠아론을 ‘작가’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영화로 인해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좋은 영화를 만들어주어서 감사합니다.

2 thoughts on “알폰소 쿠아론 | 로마

  1. 로마를 처음 보았을 때 가슴 한 켠이 크게 아렸던 것을 종혁님의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느낍니다. 종혁님의 영화 리뷰는 항상 아주 편안하게 읽히면서도 저로서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들이 문장으로 빛나서 그 통찰력에 크게 감동하곤 해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 숙제 완료했습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영화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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