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 기생충

[기생충]은 잘 만든 영화다. 이 영화의 장점, 혹은 미덕에 대해서는 많은 매체에서 저명한 평론가들을 동원하여 쉴새없이 이야기할 것이니 이 블로그에서 중언부언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설국열차]에서 수평의 구조를 통해 계급주의에 대해 이야기한 봉준호는 [기생충]에서 같은 이야기를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를 반복 사용하며 수직의 구조 안에 풀어냈다. 다만 계급에 대한 미시적인 관찰과 이를 일반화시켜 확장시키는 ‘관객 설득’ 과정이, 일종의 블록버스터 영화라는 형식의 한계에 갇혀 있던 [설국열차]에는 부재한 반면 그 어떤 제약도 없이 마음껏 ‘봉준호 월드’를 펼쳐 보일 수 있었던 [기생충]에서는 확연하게 드러났다는 점이 유의미한 차이가 될 것 같다. 권위 있는 상을 받을 만큼 충분히 잘 만든 영화고, 그로테스크한 세계를 만들어놓고도 관객들로 하여금 낄낄 거리게 만드는 특유의 위트도 [플란다스의 개] 시절부터 간직해온 봉준호만의 특장점이라는 측면에서 반가웠다. 특히 지하실로 내려가면서부터 확 달라지는 영화의 공기에도 불구 머뭇거림 없이 이야기를 확장, 전개시켜 나가는 영화의 호흡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예술영화’와 ‘오락영화’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cinema’이기도 하고 ‘movie’이기도 한데, 그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에너지의 원천이 ‘한국영화’가 발전시켜온 고유한 장기라는 점에서 무척 인상적이었다.

다만, 나는 [버닝]에서 느꼈던 불안감을 이 영화에서도 비슷하게 느꼈다는 점을 고백해야 겠다. [버닝]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 대한 영화이고, 그 젊은이들이 겪는 계급의 장벽에 대한 영화다. [기생충]에서 두 다른 계급의 가족을 만나게 해주는 연결고리는 4수 끝에 대학 입시에 실패한 젊은 백수 아들이다. 즉 [기생충] 역시 현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에 대한 영화, 혹은 그 젊은이가 -아무리 “계획”를 잘 세운다고 해도- 결코 극복할 수 없는 한국사회의 계급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버닝]과 [기생충]은 동시대 한국영화가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 수작이지만, ‘어른’이 만든 영화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현시대의 젊은 세대에 대한 어른의 근심을 보수적인 시각에 담아 펼쳐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충분히 근심스러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나는 [기생충]을 보는 내내 서울의 반지하에 살고 있는 젊은 친구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볼지 걱정스러웠다. 영화에 등장하는 젊은 남매는 어려운 순간에도 관객을 웃길줄 아는 여유로움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진짜 20대 젊은이들은 속옷이 고기냄새에 절 때까지 파트타임을 뛰느라 정작 기말고사를 위해 공부할 시간은 확보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들이 연구실로 찾아왔을 때 내가 “알바 하지 말고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 쓰고, 일할 시간에 차라리 공부를 좀 더 해라”라고 충고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위선이며, 그것은 충고하는 자가 사회적 연대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자위행위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그런 느낌의 영화다. 젊은 세대에 대한 어른의 위로가 피상적이라고 판단한다면, 그 이유는 위로를 받는 대상이 느끼는 감정의 본질에서부터 찾아야 한다. 심지어 [기생충]은 구체적이며 깊은 위로의 작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나를 더 근심케 한다. 영화에서 구현하는 세계, 혹은 영화가 견지하는 태도가 ‘위로조차 하지 않는 어른의 모습’ 그 자체를 형상화한 것이라면, 그 근심의 크기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