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 | 불황의 경제학

폴 크루그먼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지만(그리고 그를 싫어할 만한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지만), 그 중 딱 세 가지만 꼽아보라고 하면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첫째, 문장이 쉽고 간결하며, 꼭 필요한 단어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둘째, 항상 자신만만하며 충분히 공격적이지만 결코 위트를 잃지 않는다. 셋째, 경제학의 꼭대기에 올라선 사람이 쓴 글이지만, 경제학원론 조차 경험하지 않는 독자도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하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이후 크루그먼은 주류 경제학계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칼럼과 저서를 다수 발표해 왔다. 나 역시 오직 크루그먼의 칼럼을 읽기 위해 한동안 뉴욕 타임즈를 구독한 경험이 있다. 그의 칼럼은 대부분 신랄하고 공격적인 비판으로 가득차 있으며, 반드시 비판의 대상을 반 시체 수준으로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놓은 뒤에야 끝을 맺는다. 논리적으로 완벽할 뿐 아니라 물고 늘어지는 집념 또한 대단해서, 왠만한 정신력이 아니고서는 쉽게 그의 타겟에 걸리면 어느 정도의 상처는 각오해야 할 정도다.

그가 집요하게 공격하는 주 대상은 한때 그가 속해 있던 주류 경제학계와, 그 주류 경제학의 자장 안에서 만들어지는 여러 경제정책들이다. 1980년대 이후 발생한 굵직한 경제위기에 대해 해석하고 그 위기의 해법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크루그먼과 주류 경제학계는 현저한 시각적 차이를 보여왔다. 현대 국제무역이론을 정립하고 국제금융 분야의 권위자로 이름을 떨친 그가 바라보는 세계화와 경제위기는 어떤 모습일까. [불황의 경제학]에서 어느 정도 힌트를 찾을 수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후, 고도로 복잡화된 현대의 금융상품과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선진국의 거대 자본, 그리고 은행처럼 강력한 규제를 받지 않는 그림자금융(shadow banking) 등이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많은 정책가들과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낸 근본적인 원인을 제도와 역사에서 찾지 않고 시간과 장소를 한정시켜 국소적인 원인만을 치유하는 방향으로 논리를 전개시켜 나갔다. 크루그먼의 눈에는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브레튼우즈 체제가 무너지고 변동환율제가 실시된 이후 국제금융시장을 통한 자본의 국제적 이동이 심화되고 국가 간 연결고리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이미 위기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조지 소로스와 같이 한 나라의 중앙은행이 가진 외환보유고와 거의 동등한 수준의 자본력을 동원할 수 있는 거대 투기세력이 한 나라의 통화가치를 떨어뜨려 거대한 수익을 올리는 동안 그 나라의 실물경제는 파탄이 나고 그 나라에 살던 시민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국가 채무불이행 사태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했던 IMF 구제금융은 선진국의 경제논리를 개발도상국에 주입시키는 결과로 나타났다. IMF는 위기에 처한 국가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신 노동시장 자율화와 금융시장 개방 등 선진국의 자본이 보다 손쉽게 침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강요했고, 당장 위기를 끝내야만 했던 작은 국가들은 이에 복종해야만 했다. 크루그먼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시장만이 가진 국소적 문제때문에 발생한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며, 당장 그 어느 나라, 그 어느 때에도 발생할 수 있는 공통적인 위험 인자가 아직도 도처에 존재한다고 역설한다. 공황은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현재의 국제통화제체를 유지하고 국제금융시장이 계속 팽창하는 이상, 불황은 주기적으로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으며, 호황과 불황 사이의 진폭은 세계 경제의 긴밀한 연결성 속에서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나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경제는 한 나라에서 발생한 아주 미세한 사건에도 많은 나라가 민감하게 반응할 정도로 지나치게 신경질적인 이웃들이 사는 공간으로 변했다. 한 나라의 통화정책은 그 나라의 실물경기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환율을 방어하거나 혹은 미국의 금리정책을 쫓아가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스나 포르투갈처럼 미국으로부터 시작된 위기에 노출되어 실물경기가 후퇴한 국가들은 국제기구로부터 원조를 받을 때 재정적자를 일정 수준 이하로 유지할 것을 약속해야 했다. 변동환율제도의 가장 큰 장점은 각국의 통화 및 재정 정책에 독립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국제적 자본거래가 겉잡을 수 없이 커진 요즘의 세상에서는 거시경제정책의 독립성이 여러 측면에서 큰 도전에 직면해있는 것이 사실이다. 크루그먼은 IMF와 WTO 등 국제기구가 편향적임을 지적하고, 최근 발생한 경제위기의 본질적 원인을 치유하지 않는 이상 유사한 위기가 또다시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구 반대편에 사는 거대 자본가의 이익 편취행위로 인해 실질적인 피해를 보는 사람은 이와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온 중산층 이하 직장인들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체제는 과감히 종식되어야 한다. 크루그먼의 가르침은 나로 하여금 앞으로 발생할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최적의 시스템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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