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자로서의 삶

최근 아내는 그림을 그리는 일에 흠뻑 빠져있다. 학교로부터 강의용으로 얻어온 아이패드 위에 그림을 그리며 손을 풀더니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내 눈에는) 별로 어렵지 않게 수채화 그림을 몇 점 그려낸 후, 올해부터는 일주일에 두 번 학교 평생교육원에 나가 유화를 그리고 있다. 덕분에 우리집은 점점 화실처럼 변해가고 있다. 2015년 처음 혼자 살기 시작할 때부터 함께 한 6인용 테이블은 이제 아내의 작업공간으로 탈바꿈했고, 집 안 복도는 전시회 공간처럼 캔버스로 가득 채워졌다. 요즘 나의 즐거움 중 하나는 학교와 집을 오가며 그림을 그리는 아내를 위해 무거운 화구가방을 대신 들어주는 일이다. 그림에 소질이 전혀 없는 나의 눈에는 무척 아름다운 그림을 척척 그려내는 아내의 손재주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 그녀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내가 다른 걱정 없이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게 환경을 조성해주는 일 정도이며, 그 중에서도 화구가방을 들어주는 일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축에 속한다. 다행히 우리 부부는 맞벌이를 반드시 해야 할 정도로 형편이 어렵지는 않다. 최근 종합소득세 신고를 하며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이지만, 국립대 교수로 ‘열심히’ 살면 지방 대도시 부근에서 큰 부족함 없이 살아갈 정도의 수입은 올릴 수 있다. 부부 중 한 명이 돈벌이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환경은 큰 축복이다. 나는 이 축복을 제 발로 걷어차고 싶지 않다. 어차피 나는 좋아하는 공부를 하며 돈도 받을 수 있는 직업을 운좋게 얻었으니, 내가 건강을 유지하며 본분에 충실한 삶을 살면 아내는 평생 좋아하는 일에만 집중하며 살아도 될 것이다. (마음같아서는 요리도 하고 싶을 때만 했으면 좋겠지만, 요리를 일종의 창작활동으로 여기는 아내에게는 그림이나 피아노연주처럼 요리도 ‘필을 받으면’ 넘치는 에너지로 한상 그득하게 차려내는 대상이 된다) 그래서 겉으로든 속으로든 그녀에게 돈과 관련된 부담을 전혀 지우지 않기 위해 나름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무엇보다 서울에서 맞벌이 회사생활을 하던 시절, 즉 평일이면 저녁에 녹초가 되어 만나 대화도 몇마디 나누지 못하고 지쳐 쓰러지고, 주말이면 쉬기 바빠 근처로 산책 한번 나가기 힘들었던 그 생활로 ‘스스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아내는 미술을 전공했다. 고등학교 기간동안 입시미술을 준비하고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그녀는 생뚱맞게 첫 직장은 일반 경영직으로 들어갔다. 대학 졸업 후 나를 만나 서울을 떠나기 전까지 마케팅과 같은 경영 업무만을 해온 그녀에게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는 환경은 무척 반가웠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고 또 가장 잘하는 일을 마음껏 하기를 바란다. 나는 비로소 원하는 직업을 얻어 꿈을 향해 (조금 늦었지만) 걸어가기 시작했으니, 아내 역시 자신의 꿈을 향해 걸어나갔으면 한다. 그 과정에서 돈을 벌면 기분 좋은 것이고, 돈이 전혀 생기지 않는 일을 한다 하더라도 꿈을 성취할 수 있다면, 혹은 그 꿈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된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단기적인 목표는 전시회를 여는 것이다. 작은 규모의 전시회를 열기에 충분한 개수의 그림을 완성하는 것, 그리고 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쌓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다. 그 과정에서 내가 어떠한 형태로든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큰 영광이고 기쁨일 것이다. 우선 몇 년이 걸리든 꾸준하게 화구가방을 들어줄 수 있는 체력을 유지해야 한다. 아내가 그림을 그리는데 집중하기 위해 다른 집안일을 떠맡는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또 아내가 좋은 영감을 얻기 위해 이곳 저곳을 여행할 수 있도록 충분한 지원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논문도 더 열심히 써야 할 것이다.

후원자로서의 삶에 강한 애착을 보이는 이유는 아내가 타의로 포기해야 했던 ‘꿈’때문이다. 아내는 원래 피아노를 전공하려 했다. 피아노학원을 운영하시던 어머니와 큰어머니를 따라 어린 나이부터 피아노 연주에 대해 재능을 보인 그녀는 착실하게 피아노 영재로 교육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덟살 무렵 동생이 태어나면서 더이상 집중적인 훈련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몇 년 후 동생이 어느 정도 성장한 후 어머니는 다시 아내의 피아노 교육에 집중하려 하셨지만, 약간의 공백도 치명적인 그쪽 세계에서 몇 년의 공백은 이미 더이상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상실을 안겨주었다. 결국 아내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피아노 못지않게 재능이 있었던 그림 쪽으로 목표 전공을 선회했고, 그 결과 미대에 입학하여 나름 치열하게 대학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결국 그 그림조차 구직활동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여 원치 않는 경영 업무로 청년 시절을 흘려보낸 것이다. 나는 그녀의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충분히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고, 또 즐겼을 것이다. (아내의 성격을 감안하면, 맞다, 그녀는 확실히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몸에 잘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처럼 원치 않는 일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던 그녀의 모습 역시 생생하게 기억한다. 철도 씹어 먹을 정도의 왕성한 소화력을 보이는 아내가 역류성 식도염에 걸려 밤마다 헛구역질을 할 정도로 그녀는 원치 않는 일을 할 때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 식도염은 직장을 관둔 뒤 거짓말처럼 완전히 사라졌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이제부터라도 그녀가 가장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나는 그녀가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뒤에서 서포트해주는 일을 맡을 것이다. 어쩌면 내 직업은 그러한 역할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이렇게 후원자로 살아가는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고 보람차다. 재능있는 사람이 그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최적의 환경을 조성해주는 일은, 별다른 재능이 발견되지 않는 일에서 억지로 무언가를 실현해보기 위해 발버둥치는 일보다 훨씬 가치있는 일이다. 어쩌면 나는 전자에 더 재능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Big Thief | U.F.O.F.

올 해 최고의 음반이 도착했다. 빅 띠프(Big Thief)는 앞서 발표한 두 장의 음반 [Masterpiece]와 [Capacity]를 통해 인디 포크씬에서 꽤 중요한 존재로 자리잡았다. 프런트워먼 에이드리앤 렝커(Adrianne Lenker)의 개인사를 중심으로 풀어낸 [Capacity]는 개인적으로 2017년 최고의 음반 중 하나였다. 렝커는 2018년 개인 이름으로 [Abysskiss]를 발표하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갔고, 밴드는 렝커의 이 음반을 끝으로 Saddle Creek Records에서 4AD로 플랫폼을 갈아탔다. 밴드가 4AD에서 발표한 첫번째 음반이자 밴드의 세번째 음반 [U.F.O.F.]는 2019년 인디 포크씬 뿐 아니라 현대음악계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음반으로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그 정도로 명료하고 굵직하게 하나의 완전한 음악적 세계를 구현해내는 음반이다. 이 음반은 아케이드 파이어(Arcade Fire)의 [Suburbs] 음반과 같은 인상을 주는데, 음악의 형식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밴드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즉, ‘기존에 해오던 것을 반복했음에도 대중음악계가 새삼스레 호들갑떨며 발견하는 음반’이 될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U.F.O.F.] 역시 기존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렝커의 우울한 과거사에서 많은 모티브를 가져오고 있고, 나즈막한 렝커의 목소리와 격하지 않은 통기타 연주 등 포크음악의 형식으로 기본적으로 따르고 있다. 하지만 전작과 달라진 점, 혹은 이 음반을 ‘완전하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가 두어가지 정도 발견된다. 첫째,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다 밴드 형태에 가까운 음악이 완전한 수준으로 진화했다. 내가 여기서 사용하는 ‘완전(complete)’이라는 단어는 ‘완벽(perfect)’과 미묘하게 다른 개념이다. 음악과 같은 예술의 영역에서 절대적 완벽함이란 쉽게 존재할 수 없는 차원이다. 하지만 한 예술가의 내재적인 발전과정에서 부족함이 메워지고 한계가 극복되는 과정이 반복적으로 발생하여 기존의 차원에서 더이상 논의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움이 어느정도 ‘완성’되었을 때 완전하다, 라고 표현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U.F.O.F.]는 그 정도 수준의 음반이다. 먼저 렝커에게 의존적이었던 음악적 구성이 밴드 멤버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형태로 변화했다. 렝커를 포함한 밴드의 모든 멤버들이 음반 크레딧에 ‘ambience’라는 역할로 올라가 있는 점이 흥미롭다. 즉, 이 음반은 하나의 장르로 읽히기 보다는 특유한 ‘분위기’로 이해되어야 하는 측면이 강한데, 이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있어 멤버들의 허밍이라던가 나지막한 코러스 등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Century”같은 곡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전형적인 포크 넘버인 이 노래는 밴드 멤버 벅 믹(Buck Meek)의 코러스 참여로 인해 빅 띠프의 음악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금은 로킹한 트랙인 “Contact”에서는 물이 오른 합주실력을 엿볼 수 있다.

둘째, 보다 깊어지고 포용적이 된 음반의 철학이 독보적인 수준으로 올라섰다. 음반의 제목 ‘U.F.O.F.’는 ‘미확인 비행물체’를 가리키는 약어 ‘U.F.O.’에 ‘friend’를 상징하는 F를 붙인 것이라고 한다. 음반에는 여전히 상처와 죽음의 흔적이 가득하다. 렝커의 개인 음반에 수록된 곡을 리메이크한 “Terminal Paradise”에서는 죽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렝커와 친구들은 자신 안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외부로 묵묵히 걸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이 음반을 듣는 청자에게도 그렇게 외부의 이방인과 친구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 위에 언급한 “Terminal Paradise”를 다시 들여다 보면 의미심장한 구절이 발견된다.

터미널
우리 둘 다 알고 있어
내 남은 것들 모두 떠나게 해줘
내 죽음이 하나의 흔적이 되고
그 흔적이 한송이 꽃을 피우는 모습을 지켜봐줘
나는 너의 여정 속에서 피어날 것이고
모든 꿈에서 함께 할거야

음반의 타이틀곡인 “U.F.O.F.”는 약간은 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마치 나쁜 꿈을 꾼 것 같이
넌 사라지겠지
다른 지도는 파란색으로 바뀌고

거울에서 거울로(위의 두 구절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난 너를 상상해
우리의 사랑을 더 깊게 하기 위해
나를 밖으로 이끌어내는 너의 모습을
우린 더이상 떨어지지 않을거야

렝커의 가사는 한 편의 시가 되고, 청자는 그의 목소리에 위로받고 그의 목소리를 위로한다. 절망적이지 않지만 대책없이 긍정하지 않는 침착함. 여전히 세상은 어둡고 우울하지만 서로의 손을 잡음으로써 담담히 걸어나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 음반의 시각 역시 완전하다.

렝커의 개인 음반에서 건너온 곡이 하나 더 있다. “From” 역시 [Abysskiss]에 수록된 곡인데 “Terminal Paradise”처럼 보다 더 아름다운 밴드곡으로 잘 편곡되어 실려있다. “From”과 “Terminal Paradise”는 렝커와 빅 띠프의 음악에 연속성을 부여하며 이들의 이야기가 일반적인 삶처럼 긴 시간 굽이굽이 흐르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이 음반에는 앞서 언급한 노래 들 외에도 빅 띠프 특유의 절절한 멜로디라인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노래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Orange”는 렝커가 가장 잘하는 것을 극대화하는 좋은 트랙이며, “Cattaills”와 “Jenni” 역시 오직 빅 띠프만이 구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U.F.O.F.]는 버릴 곡이 하나도 없고 놓치고 싶은 순간이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올해의 음반’ 타이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