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졸데 카림 | 나와 타자들

우리는 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익명성이 보장된 온라인상에서 독설을 내뱉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이제 오프라인으로 나와 혐오의 대상에게 실제적인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남성과 여성이 갈라져 싸우고 경상도와 전라도가 갈라져 싸우는 모습은 오래 전부터 보아온 익숙한 광경이지만, 그 ‘결’이 최근 달라졌다. 과거에는 특정 언론사 및 정당이 내세운 가치에 ‘맞추어’ 일정한 갈등의 규칙이 정해졌다면, 요즘에는 뜻이 맞는 개인과 개인이 모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다. 이들은 기존에 존재하는 제도권 세력에게 거꾸로 그 혐오의 색깔을 주입시키고 제도권 세력은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한다. 사회에 흐르는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이 바뀐 것이다. 티파티(Tea Party)의 혼란기를 지나 미국에서는 트럼프라는 괴물이 탄생했고, 이민정책과 극우주의의 몸살을 겪고 난 유럽에는 마크롱이라는 신예가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었다. 이 둘은 기존의 정치문법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포퓰리스트라는 공통점이 있다. 일베와 메갈리아는 한국에만 있는 특수한 집단이 아니다. 전 세계의 정치흐름을 바꾸고 있는 극단주의와 포퓰리즘을 이해하는 핵심은 무엇일까?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이졸데 카림(Isolde Charim)은 그의 저서 [나와 타자들(원제:Ich Und Die Anderen)]에서 포퓰리즘 득세의 본질적 원인을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개인 안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자아 정체성이 사회와 호응하는 방식의 변화로 설명한다. 카림은 먼저 개인을 사회의 일부로 환원시키는 몇가지 장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대표적이다. 민족은 허구이며 허상이지만, 그 어떤 개념보다 개인에게 강한 소속감을 부여하는 효과적인 장치다. 현대사회의 민주정치는 민족과 같은 몇가지 장치를 통해 개인으로 하여금 사회와 감정적인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며, 이 감정적 동질감을 개인별로 동등하게 부여된 표로 환산하여 권력화한다. 카림은 이러한 민주사회의 속성이 개인이 정체성을 느끼는 방식에 따라 조금씩 변해왔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카림에 의하면, 1세대 개인주의가 사회에 개인을 맞추는 방식이었고 2세대 개인주의가 개인의 개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었다면, 3세대 개인주의는 개방과 세계화, 정보의 과다공급에 따른 우연과 불확실, 자신에 대한 불안감 등이 주가 된다. 즉 ‘다원화’된 세계에 사는 개인은 확고한 정체성을 유지해나가기 힘들다. 다양한 종교를 인정해야 하고, 다양한 민족의 공존을 받아들여야 하며, 기존에 누리던 특권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사회가 공고히 유지하고 있던 몇가지 개념들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보며 개인은 ‘감소한 정체성’ 속에서 극심한 불안감을 느낀다. 우리나라로 치면 패미니즘이 각광받는 요즘 이에 대한 반발로 20대 남성이 극단적으로 우경화하는 경우가 이에 속한다.

위축된 자아, 혹은 다원화된 세계에서 근본주의는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오히려 다원화에 대한 퇴행적 반동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고 불안해하는 개인에게 억지로 이상적인 똘레랑스를 강요하는 좌파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 3세대 개인주의는 이성의 영역이 아닌 감정과 공감의 영역에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틈을 파고든 최초의 인물이 마크롱이다. 그는 좌도 우도 아닌 중도의 길로 자신을 정의내리며, 불안감을 느끼는 많은 이들을 ‘공명 공간’으로 불러냈다. 새로운 형태의 개인주의는 기존의 제도권에 자신을 맞추려 하지 않는다. 제도권이 개인에게 다가가 새로운 공간에서 화합되어야 한다. 카림에 의하면 마크롱은 이러한 대중의 성향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한 최초의 정치인이다. 가난한 이민자들이 넘쳐나는 유럽에서 박탈감을 느끼는 이들은 이제 ‘원한’을 ‘혐오’의 언어로 풀어내려 한다. 우리나라는 이 원한과 혐오의 언어가 남성 대 여성의 대결에서 드러난다. 마크롱, 혹은 트럼프는 몇가지 극단적인 이민정책을 실제적으로 전시함으로써 대중이 가진 원한이 씻김굿으로 풀어질 수 있음을 효과적으로 증명해냈다. 이들이 아마추어적인 정치기술을 가지고도 아직까지 위치를 공고히 하는 이유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가장 올바른 길, 가장 지향해야 할 길이 아님을 카림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운동이 상처받기 쉬운 개인의 정체성을 “도덕적 개혁주의”를 통해 하나 하나 보듬어 나가는 동시에 그 연약함을 ‘인정’해준다는 측면에서 새로운 시도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 정치적 올바름 운동도 결국 “지나친 감정화”의 위험에 빠져 그 본질적 가치를 상실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트위터 등의 공간에서 꽤 의미있는 정치적 올바름 운동을 발견할 수 있었으나, 결국 현 시대의 개인의 정체성이 위축된 감정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채 지나친 감정적 대립을 야기하는 바람에 그 성취가 목표한 수준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증오와 광신이 넘실거리는 이 포퓰리즘 시대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질문은 무엇일까? 카림은 책의 말미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충분히 징후적이라고 선언한다. 대중의 감소한 정체성을 간파하고 그 배고픔을 해소해주는 포퓰리즘을 넘어선, 그 포퓰리즘을 극복한 더 나은 형태의 민주주의는 실제적인 ‘무엇’에 대해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은 추상적인 이 책의 결말이 미진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삶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혐오와 광신의 에너지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해보는 것으로 그 공백을 조금이나마 채워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