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erson .Paak | Ventura

몇 년 전부터 스포츠 팬들 사이에서 ‘폼(form)’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마치 추신수가 ‘그린라이트(green light)’라는 야구 관용어를 한국에 소개했듯, 누군가에 의해서 소개된 이 단어는 지금까지 그 쓰임새를 관찰할 때, 운동선수의 컨디션, 역량, 성장곡선, 나이 등을 고려한 총체적인 퍼포먼스 지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음악인에게도 이 ‘폼’ 개념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음악계에서 단순히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비례적으로 더 나은 음악적 산출물을 보여주는 경향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음악인 개인의 노력과 영감, 주변 상황에 따라 성과물의 수준이 들쭉날쭉한 경우가 대부분이며, 한 뮤지션의 디스코그래피를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일정 기간 침체기를 겪은 후 음악적 역량이 반등하는 뮤지션도 심심치 않게 발견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그런 경우를 발견할 때 재기에 성공한 운동선수를 보는 것 같아 반갑고 고마운 감정을 느낀다.

OBE 레이블에서 [Venice]와 [Malibu], 두 장의 음반을 발표하고 평단과 대중 양단으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미국 서부 출신 뮤지션 앤더슨 팍(Anderson .Paak)은 전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해온 닥터 드레와 본격적으로 함께 하기 위해 큰 둥지인 애프터매스(Aftermath)로 옮겨간다. OBE에서 발매한 두 장의 음반 중 특히 [Malibu]는 미 서부 힙합을 레트로풍의 알엔비, 훵크와 절묘하게 엮어내 힙합이라는 장르의 현재 영역을 한 걸음 확장시킨, 정말 좋은 음반이었다. 그런데 애프터매스에서 발매된 첫 음반이자 닥터 드레가 직접 프로듀스한 음반 [Oxnard]는 그 의미심장한 음반명에도 불구 – 앤더슨 팍의 고향이다 – 상당히 산만한 분위기로 가득찬, 한마디로 재미없는 음반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음반의 전체적인 에너지 레벨이 무척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인데, 나중에 들려온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드레의 프로듀싱이 앤더슨 팍의 창의력을 조금 억누른 것은 아닌가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음반에서 앤더슨 팍은 어딘가 불편해보였다. 가장 잘하는 것에 힘을 쏟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그닥 잘하지 못하는 것에 억지로 최선을 다하는 느낌이었다. 아주 구린 음반은 아니었지만, 결코 뛰어난 음반은 아니었다.

2019년에 발표된 새음반 [Ventura]는, 팍에 따르면 전작 [Oxnard]를 제작할 당시 함께 만들어둔 노래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당시 팍은 이 [Ventura] 음반에 수록된 노래들도 함께 발표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번 음반을 제작하면서 닥터 드레로부터 조금 더 많은 재량권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Oxnard] 시절 만들어진 결과물치고는 [Malibu]의 분위기를 조금 더 많이 닮아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결론부터 말하면 [Ventura]는 [Malibu] 시절로 돌아간 앤더슨 팍의 ‘폼’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좋은 음반이다. 조금 더 자유롭게 드리블과 슛의 재량권을 부여받은 농구선수를 보는 느낌이다. 감독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쏘고 싶을 때 쏘고, 패스하고 싶을 때 패스할 수 있기 때문에 코트 위에서의 움직임이 활기차보이는 농구선수처럼, 앤더슨 팍은 이번 음반에서 자신이 들어갈 때 정확히 들어가고 나와야 할 때 적절하게 빠져주는 유연함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음반의 수록곡 중 “King James”는 농구선수 르브론 제임스와 풋볼선수 콜린 캐퍼닉에 대한 이야기다) 어깨에 힘을 쭉 빼서인지 음악은 여유롭고 흥겹다. 듣는이도 긴장감보다는 즐거움과 기쁨을 먼저 느끼게 된다. 음반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존재는 라라 해서웨이(Lalah Hathaway), 브랜디(Brandy), 재즈민 설리반(Jazmine Sullivan)과 같은 여성 보컬리스트의 목소리다. 이들이 참여한 트랙에서 앤더슨 팍은 조금 더 편안하게 보이고 음악은 조금 더 단단하게 느껴진다. 그가 가장 잘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나 싶다. 아직도 더 올라갈 곳이 존재하는 성장하는 음악인임을 증명한 음반이다. 올 여름을 이 음반과 함께 보낼 리스너들이 무척 많을 것 같다. 나 역시 그 중 한 명이다.

Nilüfer Yanya | Miss Universe

“나만 알고 싶은 뮤지션”이라는 농담은 혁오가 [무한도전]에 출연하던 무렵부터 대중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 같다. 남다른 센스와 부지런함으로 단련된 감각적인 리스너들은 꽤 괜찮은 음악을 누구보다 먼저 찾아내어 남모를 뿌듯함을 느끼는 것을 삶의 기쁨 중 하나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음악을 찾아 듣다보면 가끔 ‘음, 이 음악은 조만간 한국의 힙스터들에게 사랑받겠군’과 같은 직감을 느낄 때가 있다. 신선하고 감각적인 음악적 외형은 기본이다. 한국의 젊고 부지런한 힙스터 리스너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남다른 외모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또래 뮤지션들과 구분되는 확실한 정체성을 몇가지 상징체를 통해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영국 런던 첼시 출신의 1996년생 아티스트 닐루퍼 얀야(Nilüfer Yanya)는 그 까다로운 요건을 거뜬히 통과하고도 남을 정도로 인상적인 데뷔음반 [Miss Universe]를 내놓았다. 터키 음악을 전공한 아버지와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얀야는 12살 무렵부터 클래식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하였으며, One Direction을 프로듀스한 회사에서 걸그룹으로 데뷔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계속 추구해왔다. 몇 장의 EP를 내고 올 해 정식으로 데뷔 음반을 발표했는데 평단의 평은 무척 호의적인 편이고, 벌써부터 나의 몇 안되는 힙스터 친구들은 얀야의 음악을 끼고 살기 시작했다. 김밥레코드 사장님은 “올해의 앨범급 데뷔작”이라고 칭찬했는데, 닐루퍼 얀야의 음악이 한국과 미국 등에서 널리 들려질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ATO 레이블에서 발매된 [Miss Universe]는 데뷔 음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고 통통 튀는 노래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영향을 받았다고 그녀가 언급한 뮤지션을 열거해보면 큐어(The Cure), 픽시스(Pixies), 제프 버클리(Jeff Buckley), 니나 사이먼(Nina Simone) 등이 있는데, 이 종잡을 수 없는 레퍼런스처럼 [Miss Universe]도 ‘이보다 더 잡탕밥일 수 없다’고 느낄 정도로 다양한 장르가 뒤섞여 있다. 인디록, 재즈, 힙합, 트립합, 디스코, 신스팝 등 갖가지 장르가 닐루퍼 얀야의 입맛에 맞게 맛있게 비벼져 있다. 싱글로 발매되어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훅을 자랑하는 곡만 다섯 손가락에 다 꼽기 힘들 정도로 많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곡은 “Paralysed”, “Melt”, “The Unordained”, “Heavyweight Champion of the Year” 등인데, 기타와 드럼 등 최소화된 악기 구성에 중독성 있는 멜로디를 얹는 것만으로 훌륭한 노래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충실히 증명해내고 있는 노래들이다. 세인트 빈센트(St.Vincent)가 노래를 진행해 나가는 방식도 떠오르고, 킹 크룰(King Krule)의 분위기도 조금 느껴진다. 초창기 파이스트(Feist)의 색깔도 난다. 나 역시 그녀의 음악을 묘사하기 위해 종잡을 수 없는 레퍼런스를 꺼내들게 된다. 완전히 새로운 음악이다. 이런 신인을 만난다는 것은 항상 기분 좋은 일이다. 연말에 많이 언급될 음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