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nny Lewis | On the Line

결혼 전, 여의도에 있는 회사에서 근무할 당시 나는 돈을 멍청하게 낭비하는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셔츠 빨래가 귀찮아 세탁소에 열 장이 넘는 셔츠를 한꺼번에 맡겨버리는가 하면 아무 이유 없이 “내가 쏜다!”를 외치기도 했다. 그 중 제일 가관이었던 낭비는 퇴근 길 싱글몰트 바에 들려 한 잔에 몇 만원씩 하는 위스키를 마시는 일을 ‘루틴’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친해진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당시 자주 듣던 음악을 바에서 틀곤 했는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순간은 제니 루이스(Jenny Lewis)의 [The Voyager] 를 듣던 어느날 밤이다. 당시에도 제니 루이스는 완벽했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점이 하나 있는데, 제니 루이스는 첫번째 음반 [Rabbit Fur Coat]부터 [Acid Tongue], [The Voyager]까지 단 한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국인 중 제니 루이스를 ‘최애’로 꼽는 이는 극히 드물겠지만, 최소한 그녀의 음악은 항상 기대 이상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개인적으로는 2008년 유학을 시작하던 시기부터 지금까지 인생의 변곡점을 함께 해온 뮤지션이라는 점에서 조금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그녀는 무척 ‘미국적’이지만, 그래서 한국인들에게는 ‘잘 팔리지 않는 메뉴를 고집하는 원테이블 레스토랑 사장님’같은 느낌으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지만, 그녀의 그런 ‘미국스러움’은 내가 사랑하는 미국의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뮤지션이기도 하다.

제니 루이스의 네번째 솔로 음반 [On the Line]은 마흔을 넘긴 뮤지션이 속한 장르를 극적으로 바꾸지 않은 채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는 놀라움을 선사하는 뛰어난 작품이다. 컨트리와 포크의 자기장 안에서 여전히 아주 전통적인 미국적 사운드를 들려주지만, 그 안에서 끊임없이 자기 성장을 하기 위해 노력해온 그간의 성과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느낌이다. NME와의 인터뷰 영상에서 진행자가 루이스를 “legendary” 라고 소개하는데, 이제 그 표현을 거리낌 없이 그녀의 이름 앞에 붙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확신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 음반에 수록된 “Do Si Do” 때문이다. 제니 루이스는 이번 음반 작업을 벡(Beck), 라이언 아담스(Ryan Adams) 등과 함께 했는데, (전설 링고 스타도 음반에 참여했다) 그 과정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진짜 락앤롤 음악을 처음 했던, 에너제틱하면서도 편안했던 작업”이었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거듭 강조했다. “Do Si Do”를 듣다 보면 뜬금없이 “rock and roll” 이라는 가사가 튀어 나온다. 거기서 느껴지는 묘한 카타르시스가 있다. 사운드는 더 없이 탄탄하고 그 위에 얹힌 루이스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단단하다. 유년 시절부터 끊임없이 미디어에 노출되고 그룹 활동과 여러 프로젝트 작업을 거친 베테랑 뮤지션이 갑자기 당당하게 이제 나는 록음악을 합니다, 라고 선언하는데 그 아우라가 대단하다. 이제 그녀는 새로운 경지로 나아갔다. 음반에는 “Do Si Do” 외에도 좋은 곡들이 무척 많다. 들으면 들을수록 감탄이 나올 정도로 거의 모든 곡들이 매끄럽고 단단하다. 십년 넘게 함께 해온 뮤지션이기에 그저 음악을 계속 해주는 것만으로 고마운데, 심지어 매 음반마다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존경심마저 우러 나온다. 더이상 벤 기바드(Ben Gibbard)와 찰랑거리는 사랑-이별 노래를 부르지는 않지만, 그 시절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성숙한 음악을 계속해서 공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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