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 보든, 라이언 플렉 | 캡틴 마블

[캡틴 마블] 포스터

전에도 몇 번 이야기했지만, 소위 DC니 마블이니 하는 그런 류의 히어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예술적으로 전혀 새롭지 않은 형식을 차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적으로도 흥미롭지 않다. 일차원적인 캐릭터와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갈 때부터 예측할 수 있는 단순한 서사구조는 영화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든다. 그 외에도 수많은 단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런 류의 영화에 열광하는 관객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영화를 예술이 아닌 산업-상품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보다 더 훌륭한 상품이 또 어디있나 싶다.

하지만 [캡틴 마블]은 꼭 보고 싶었다. 이 영화의 관람 여부가 엉뚱하게 ‘페미니즘’ 분쟁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조차 찻잔 속 태풍 정도에 불과하겠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역을 맡은 브리 라슨이 과거에 한 발언 등에 근거하여 불매운동을 벌이는 젊은 남성층의 태도는 나로 하여금 반드시 이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드는 동력으로 작동했다. 영화는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다른 히어로 영화들이 가진 단점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지만, 딱 하나, 브리 라슨의 연기력만으로 이 영화는 구원받기에 충분하다. 기존에 보지 못한 복합적이고도 흥미로운 성격의 여성 히어로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데에는 브리 라슨의 연기력이 절대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뒤뚱뒤뚱 뛰는 모습이 히어로답지 못하다”는 비판을 한 기성언론에서 읽을 수 있었는데, 이런 류의 시선이야말로 페미니즘과 여성주의 문화를 제대로 독해하지 못한 보수적 남성주의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라슨이 연기한 캐럴 댄버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그 캐릭터의 과거와 현재에 의해 중첩된 성격의 면면을 읽을 수 있었다. 뒤뚱거리며 뛰는 모습을 예로 들면, 캐릭터가 가진 불완전한 성장배경과 다혈질(이지만 섬세하기도 한 복합적인) 성격 등에 의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장면이었다. 브리 라슨은 아주 엉성한 영화에서 매우 섬세하게 캐릭터를 구현해냈다. 이 영화에서 볼만했던 것은 그거 딱 하나였다.

김현섭, 김기훈 | 오예! 스페셜티 커피!

[오예! 스페셜티 커피]

금호동에 살던 때, 근처에 있는 성수동은 우리 부부에게 재미있는 놀이터였다. 콘크리트건물과 아스팔트 도로에 둘러싸인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숨쉴 곳을 제공하는 몇 안되는 큰 공원인 서울숲이 있고, 대기업 상권이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성동구 조례에 의해 어느정도 보호되는 골목상권이 있으며, (이제는 그 표현이 민망한 정도에 다다른) “서울의 윌리엄스버그” 핫플레이스들까지 있으니, 호기심 많은 신혼부부 입장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구경을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세종으로 내려온지 꽤 시간이 지난 지금도 소규모 자본을 바탕으로 한 그 곳의 좋은 가게들이 가끔 생각나 문득 그리워지곤 한다.

성수동에서 가장 좋아했던, 그리고 지금도 좋아하는 가게는 서울숲 뒷편 택시회사 옆에 자리잡은 작은 커피숍, 매쉬커피다. 다섯명 정도 되는 손님이 들어오면 가게가 꽉 찰 정도로 자그만한 공간을 가진 이 가게는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몇가지 큰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커피 맛이 끝내준다. 산미를 강조하지만 연하고 은은하게 풀어낸 이 가게만의 특유한 추출방식이 내 취향과 딱 맞았다. 둘째, 바리스타 분들이 무척 친절했다. 아내와 가게를 처음 방문했을 때에는 젊은 여성 바리스타분이 우리를 반겼는데, 서울에서 방문한 그 어떤 스페셜티 커피숍보다 융숭한 환대를 받았다. 처음 보는 얼굴인 우리를 웃으면서 맞이해주었고, 커피 문외한의 엉뚱한 질문에 상냥하고 자세하게 답변해주었으며, 좋은 자리를 추천해주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에게 가게를 맡기고(?) 근처 가게에 놀러가던 그 자유롭고 편안했던 ‘환대’의 색깔과 온도가 참 좋았다. 매쉬커피를 혼자 방문할 때도 있었는데, 그 때에는 이 [오예! 스페셜티 커피!]의 저자인 남성 바리스타 두 분이 나를 반겼다. 그 때 매쉬커피의 핸드드립 공식(1대 20!)을 직접 배울 수 있었고, 세심하고 친절하게 원두의 특성 및 향미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참 좋은 느낌으로 남아있다. 셋째, 멋을 부리지 않아서 좋았다. ‘힙’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서울과, 한국인과, 한국문화와 동떨어진 공간디자인과 커피향미를 소비자에게 강요하는 커피숍이 요즘 너무 많다. 물론 그렇게 해야만 매출이 확보된다면 굳이 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매쉬커피는 공간에서 특별히 멋을 부리지 않고 털털하게 커피맛 하나만으로 소비자를 응대한다는 점에서 ‘서울에만 존재할 수 있는 진짜 커피숍’이라는 인상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런 매쉬커피의 두 바리스타가 스페셜티 커피에 대한 에세이를 썼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그 책을 읽고 싶어 안달이 났다. 서울카페쇼에 갔을 때 살 기회가 있었지만 일부러 뒤로 미루었다. 그 당시에는 오히려 언젠가는 반드시 읽게 될 것을 알았기에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 비로소 이 책을 이틀만에 다 읽어버렸다. 기대만큼 재미있고, 기대보다 훨씬 더 좋은 정보를 많이 얻어갈 수 있는 책이다. ‘이렇게 솔직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영업비밀(?)을 가감없이 풀어놓는데, 아마도 한국에서 커피숍을 운영하는 일의 고단함을 충분히 전달하고 싶었던 저자의 마음씀씀이때문인 것 같다. 젠트리피케이션, 과당경쟁, 까다로운 생두수입절차 등 커피숍 운영자로서 경험해야 하는 씁슬한 현실에 대해 너무 무겁지 않게, 시종일관 밝고 따뜻한 느낌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미덕 중 하나다. 커피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문장마다 절절하게 느껴지지만 책의 어떤 부분에서도 절박함이나 비참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커피를 정말 사랑하기에 커피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저자의 마음가짐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문장을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커피사랑에 동참하게 되어, 어느새 나도 집에 있는 커피도구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되고, 저자가 추천해준 방식으로 커피를 내리면 어떤 맛이 날까 궁금해 조바심이 나기 시작한다(파나마 게이샤! 파나마 게이샤를 맛보고 싶다!). 한국의 커피업계에서 작지 않은 위치를 가진 저자가 여전히 순수한 마음으로 커피를 대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이 책은, 한국에서 자영업을 고려하는 모든 사람이 읽을 가치가 있을 정도로 꽤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라. 비록 힘들더라도.

요즘에도 가끔 인터넷을 통해 매쉬커피의 원두를 주문해 세종에서 내려마신다. “우리가 다시 금호동에 살 일이 있을까?”라고 아내에게 물어보면, 아내는 단호히 그럴 일은 없다고 대답한다. 금호동보다 집값이 비싸고 공기도 더 나쁜 성수동에서는 더더욱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살 일은 없을 것이다. 매쉬커피와 멀리 떨어진 곳에 살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삶이 조금은 서글프게 느껴질 때도 있다. 마을버스를 타고, 혹은 살살 걸어서 ‘동네 단골’ 매쉬커피에 가는 상상을 가끔 한다. 반갑게 맞이하는 바리스타의 얼굴을 보는 그 순간이 참 좋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받아 들고 서울숲으로 향하는 그 길이 참 좋을 것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