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 피프티 피플

몇주 전 아내가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을 추천해주었을 때, 나중에 읽어볼게, 하고 건성으로 대답한 뒤 결국 지금까지 읽지 않았다. 당시 읽고 있던 다른 책이 있기도 했지만, 이 책이 왠지 [82년생 김지영]과 대구로 읽히는 것 같아 괜히 마뜩치 않았기 때문이다. 조남주의 화제작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꼭 존재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제목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읽기를 거부할 정도면 [82년생 김지영]의 서투르고 억센 문학성과 폭력적인 일반화에 대한 거부감이 생각보다 컸던 것 같다. [보건교사 안은영]이 퇴마사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안 것은 그로부터 며칠 지난 뒤였다.

[피프티 피플]은 주인공이 없는, 혹은 51명의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인 장편소설이다. 표지에 장편소설이라고 적혀있지만, 실제로 책을 읽다보면 50여편의 짤막한 단편소설이 조금의 공통분모를 두고 계속 이어지는 형태임을 알 수 있다. 호흡이 무척 짧은 단편이 각각 주인공을 한 명씩 가지고 있고, 나머지 50여명 중 누군가가 그 주변을 스쳐지나가는 방식이다. 미리 말하지만, 다음 문단에서 하게 될 두어개 정도의 사소한 불평을 고려하더라도 나는 이 소설집을 무척 좋게 읽었다. 각각의 등장인물에서 나의 한 조각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고, 51명의 인물의 이야기가 산만하게 흐트러지지 않고 응집력 있게 잘 뭉쳐져 있는 소설(집)의 짜임새도 마음에 들었다. 짤막한 이야기를 연속적으로 읽는 과정에서 특유의 은율감이 느껴지는 것도 좋았다. 소네트 연작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글의 리듬이 뛰어나서 읽는 동안 지루함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정세랑은 문장을 참 잘 만들어내고, 이야기도 참 잘 직조해내는 것 같다. 이 많은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스쳐가는 주요한 공간으로 병원 응급실을 택한 것도 현명해보인다. 좋은 상징성을 지닌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재를 열심히 한 티도 많이 난다. 많은 이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것 같고, 그 이야기를 다시 자기만의 이야기로 훌륭하게 재탄생시켰다.

사소한 불만이 없을 수 없다. 먼저, 물론 쉽지 않은 작업이었겠지만, 51편의 단편 사이에 존재하는 밀도의 차이가 꽤 있는 편이다. 어떤 단편에서는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먹먹해지거나 실제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행복한 진심이 잘 전달되는 반면, 다른 단편에서는 억지로 머릿수를 맞추기 위해 끼워넣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피상적인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이건 두번째 불평, 즉 작가가 가진 편향성, 혹은 편견이 글의 곳곳에서 드러난다는 사실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이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나이, 혹은 성별, 혹은 그 언저리의 삶에 대한 현명한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주변’에 대해서는 피상적인 편견으로 대충 얼버무리는 태도를 취한다. 소설의 종반부에 등장하는 몇 개의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노골적인 이데올로기, 혹은 프로파간다도 재미없고 따분했다. 갑자기 대학생의 리포트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정세랑보다 더 넓은 스펙트럼으로 더 다양한 인간군상에게 더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한국작가는 지금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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