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없는 삶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이다. 전날 밤 우리는 각각 따로 잠자리에 들었다. 제출기한이 코 앞으로 다가온 연구계획서를 마무리하느라 나는 새벽 늦은 시간까지 책상 앞에 붙들려 있어야 했고, 아내는 그런 나를 기다리다 소파에서 잠들어버렸고 이후 침대로 옮겨졌다. 나는 새벽 세시 쯤 늦은 잠을 청했지만 세시간 쯤 뒤 강제로 깨어나야 했다. 아내의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눈물을 곧잘 흘리는 그녀지만 그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무척 슬픈 꿈을 꾼 모양이었다.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채 통곡하는 그녀를 겨우 진정시킨 뒤, 어떤 꿈을 꾸었는지 물었다. 그녀가 잠시 살았던 지난 밤의 꿈에서 나는 이미 죽은 뒤였다고 한다. 고향 친구의 집을 방문하여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이미 죽은 남편’ 생각이 났고,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는 것이 아내가 기억하는 꿈의 내용이었다. 다만 그 아픔의 크기가 너무 커서 실제로 울기 시작했고, 잠에서 깨어난 뒤 자신을 달래는 남편의 얼굴을 보고 잠시 어리둥절했으며, 약간의 적응시간을 거친 뒤 다시 살아난(!) 남편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서야 울음을 그쳤다는 사실이 그녀가 수도 없이 꾸었을 다른 슬픈 꿈과의 극적인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내를 그토록 슬프게 만든 것은 ‘남편이 없는 삶’이었다. 우리는 가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른 편인데, 나는 내 자신의 죽음을 꽤 쉽게 가정하는 반면(“오늘 출근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지, 뭐.”), 아내는 우리 둘 중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하는 편이다(“말이 씨가 된다. 함부로 그렇게 말하지 마라!”). 진지하게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정 반대다. 나는 죽는 것이 두렵고, 죽음 이후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두렵다. 현재의 삶을 충실히 잘 살아낸다고 해도 그에 따른 보상(‘천국’과 같은)이 없다면 지금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과연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아내는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개념을 생각보다 잘 받아들였다. 어린 시절 불교신자였다가 싱가폴 체류 시절에는 개신교 신자가 되었고, 남편을 만난 뒤 천주교로 개종하는 등 화려한 종교적 편력을 가진 그녀였지만, 의외로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은 약한 편이다. 그래서 현재에 집중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지금 당장의 삶을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이 그녀에게는 꽤나 중요한 소명이다. 그런 그녀에게 ‘남편과의 사별’은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가장 좋은 친구이자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는 동반자, 머릿속과 마음속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또다른 나. 그런 존재를 상실하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나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죽음만이 서로를 갈라놓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천주교식 결혼을 한 우리는, 그 문장 안에 스스로를 가둔채 살아가고 있다. 천주교에서는 법적인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대충 짐작해보면 신의 이름으로 허락한 결혼을 인간들끼리 합의하에 무를 수는 없다는 논리같다. 실제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친한 형은 이혼 후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몇년 후 ‘복권’되기는 했지만, 교회법상 형은 그 몇년동안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던 셈이다. 이러한 천주교의 논리가 아내의 눈에는 꽤 신선하게 비추어졌는지, “죽기 전에는 나랑 헤어질 수 없어”라는 말을 꽤 자주 한다. 하지만 그 말의 이면에는 “둘 중 누군가가 죽으면 영원히 혼자가 된다”는 두려움이 깔려있기도 하다. 아내보다 내가 먼저 죽는 것도 두렵고, 나를 두고 아내가 먼저 떠나버리는 것도 두렵다. 나는 아내를 마음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무한히 사랑하지만, 아내와의 동반자살을 택한 프랑스 철학자 앙드레 고르(André Gorz)처럼 아내가 없는 삶을 완전히 포기할 만큼 강단이 있지는 못하다. 아내가 나보다 먼저 죽는다면, 나는 아마 자연이 삶을 허락할 때까지 계속 삶을 이어갈 것이다. 그 혼자된 삶을 상상하면 가슴이 먹먹해져서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을 정도다. 아내를 두고 먼저 떠나는 마음은 또 얼마나 비참하고 죄스러울까. 아빠의 가장 친한 친구 교수님이 돌아가실 때, 아빠와 다른 친구 교수님께 당신의 아내인 여사님을 부탁하며 “아내가 술을 좋아하니 가끔 술을 함께 마셔달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이후 우리 집에서 그분들이 다 함께 모이는 일이 있었는데, 아빠와 다른 친구 교수님이 그렇게 열심히 술을 마시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평소에 술을 잘 드시지 못하는 분들인데, 그날만큼은 미망인이 되신 여사님 앞에서 술잔을 꺾지도 않았다.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답고 슬퍼보였다.

오늘 아내는 하루종일 내 옆에 꼭 붙어 있었다. 잠시 함께 외출을 할 때에는 이미 퉁퉁 부은 두 눈때문인지 유난히 화장에 공을 들이기도 했다. 평소에도 내 옆에 꼭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그 꼭 붙어 있던 오늘의 그녀 모습은 전과는 조금 달라보였다. 전과 같이 맹렬하게 나를 사랑하고 있지만, 꿈 속에서나마 내가 없는 삶을 조금 느껴보았기 때문일까. 전과는 다른 애틋함과 절실함이 조금 더 깊게 느껴진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2 thoughts on “당신이 없는 삶

  1. 몇달전에 차에서 아내와 한 사람이 부재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고개 돌려보니 아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더군요. 그때 생각이 나서 어제 저녁에 이 글을 아내에게 보여줬더니 아내가 또다시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종혁씨도 그랬겠지만 이렇게 끔이나 상상만으로도 애틋한 아내의 모습을 보니 참 마음이 뭉클하고 찡해지더라구요 ㅠ 오랜만에 블로그에 덧글을 남기는 것 같은데, 종혁씨 글과 블로그는 여전히 참 좋네요 :)

    • 만옥이 언니를 가끔 만날 때마다 진심이 올곧게 느껴져서 참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좋은 짝을 만났으니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일만 남았네요.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열심히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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