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 채움, 소비

생존을 유지하는 차원을 넘어서 개인의 효용을 증대시키기 위한 소비행위는 인간을 인간답게 존재케 하는 주요한 특징 중 하나다. 나 역시 소비를 무척 좋아하는 인간으로서 나름의 소비 규칙을 가지고 있다. 거창하게 말하면 ‘플랫폼 소비는 최소화하고 컨텐츠 소비에 집중하자’인데, 간단하게 말하면 한 때의 호기심에 의한 장비류 구매는 최대한 자제하는 것이다. 구매를 극도로 경계하는 제품군이 몇 있는데,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오디오, 시계, 고가의류, 자전거, 등산, 캠핑, 자동차튜닝, 덩치 큰 주방기기(에어프라이나 착즙기같은)…

이것들은 그 자체로 구매자의 효용을 증대시킨다기 보다는, 이걸 이용해서 무언가를 꾸준히 해야 효용이 발생하는 제품들이다. 예를 들어 좋은 오디오는 음악을 계속 들어야 귀가 맑아지는 효과를 느끼고, 자전거도 계속 라이딩을 해야 하고, 착즙기로 매일 쥬스를 갈아 마셔야 행복해진다. 다시 말하면 구매자의 선호도가 변하는 순간 쓸모 없어지는, 고가의 쓰레기로 변질될 확률이 높다. 이런 것들이 소위 ‘플랫폼’에 해당한다. 나의 선호도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나 자신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므로, 불확실성을 굳이 떠안으며 돈을 쓸 이유가 적은 셈이다. 최근 약간의 예외가 있었는데, 아내를 위해 구입한 전자피아노와 나를 위해 구입한 수영복이 그것이다. 피아노는 아내가 즐기지 않으면 값비싼 건조대가 될 위험이 있긴 한데, 다행히 아직까지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 어릴 적 배운 경험을 살려내는 맛이 쏠쏠한가보다. 나는 올해 생존을 위해 수영을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으므로, 아직까지 지치지 않고 열심히 수영을 배우고 있다.

이에 반해, 지출에 있어 거리낌이 없는 몇 제품군이 있다.

책, 영화, 음반(요즘엔 음반을 사지 않고 월정액 스트리밍 상품을 구입한다), 해외스포츠 시청권(MLB, NFL, NBA..), 유니클로 계절 옷, 커피원두, 카페에서의 커피…

대부분 ‘컨텐츠’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확고하게 자리잡은 나의 취향(영화, 음악, 스포츠, 커피 등)을 지속적으로 구입해주는 것은 그릇에 물을 채우는 것과 비슷하다. 나에게 플랫폼은 컨텐츠의 발전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도구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음악을 듣는 과정에서 내 귀가 극도로 민감하게 발달해버렸다면, 그래서 음표 하나 하나, 악기 하나 하나를 분쇄해서 들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티볼리 오디오 시스템은 나에게 역부족일 수 있고, 오디오 시스템의 교체를 고려해볼만 하다. 더이상 책을 꽂을 공간이 없을 때 책장을 사는 것이고, 수영을 마스터하여 수영장에서 더이상 배울 것이 없다면 골프나 다른 운동으로 넘어가기 위해 골프채를 보러 상점으로 나가볼 수 있는 것이다. 섣부른 흥미와 호기심에 의해 장비부터 구입하고 셋업에 집중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지칠 수 있다. 그릇 안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고, 더이상 그릇이 감당하지 못할 때 쯤 그릇을 바꾸는 방식의 소비패턴이 내 삶에 서서히 자리잡고 있다. 결혼 후 돈 모으는 일에 관심이 생기다보니 더 빠르게 자리잡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아내에게 맥북프로를 사달라고 조르고 있는데 잘 먹히지 않고 있다. 그래서 어제 밤 늦게까지 외부연구비 프로포절을 작성했다. 효율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반드시 노트북 구매가 필요합니다! 라고 역설하며.. 아내와 연구재단 중 누가 더 까탈스러운 구매자인지 시험해볼 좋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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