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쉴러 | 버블 경제학

우리 부부는 최근 디지털피아노를 하나 구입했다. 60만원 정도 되는 나름의 고가(!) 장비였기에 주 사용자인 아내 뿐 아니라 나 역시 이번 기회에 피아노에 대한 의욕이 꽤 크게 불타올랐다. 피아노를 전공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꽤 진지한 학습 경험을 가진 아내와 달리 나는 왼손과 오른손이 따로 놀아야 하는 지점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주저앉은, 아주 전형적인 ‘피아노 바보’ 중 하나라는 사실이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관계로 이번 설 연휴에 창원 부모님댁으로 간 큰 이유 중 하나는 그 곳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되었던 [바이엘 피아노 교본] 상, 하권을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곳에는 바이엘 교본이 없었고, 먼지 쌓인 책장을 구경하다 엉뚱하게 꽂혀서 세종까지 가지고 온 책이 [버블 경제학]이다.

로버트 쉴러(Robert J. Shiller) 교수는 현시대의 많은 거시/금융 경제학자들에게 롤모델과도 같은 존재다. 금융시장의 비효율성을 증명한 연구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학자로서의 경력 뿐 아니라 케이스-쉴러 지수(Case-Shiller Index)를 개발하여 미국 부동산 시장의 가격수준 및 변동성 수치를 정책에 반영한 정책가로서의 역량, 그리고 뉴욕 타임즈 등에 꾸준히 글을 기고하는 등 일반인을 상대로 한 활발한 저작활동까지, 다방면에 걸친 그의 활약상은 거시경제학자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지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융시장의 불완전성과 경제주체의 비이성적 판단이 미치는 결과 – 예컨대 버블 – 에 대해서는 세계 최고의 권위자인 쉴러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전후로 더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쉴러에게 금융위기에 대한 해답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버블 경제학](원제는 [Subprime Solution])은 금융위기 직후 이 새로운 형태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쉴러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한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반부의 명쾌한 진단과 후반부의 뜬구름 잡는 낙관주의가 뒤엉켜버려서 전체적으로 썩 좋은 책이라고는 말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특히 뉴딜 정책에 대한 찬양은 낯뜨거울 정도인데, 만약 지구상에 케인즈교가 있다면 쉴러는 케인즈교 코네티컷 지부의 주교 정도 자리는 차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비경제학자가 번역하고 감수한 책답게 전문용어에 대한 사려깊은 고려가 담겨져 있지 않은 점도 아쉬운 부분인데, 역설적으로 지나치게 쉽게 번역된 탓에 (짧은 책의 분량과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여) 큰 어려움 없이 빠르게 읽어내려갈 수 있다는 점은 장점으로 치부할 수 있겠다.

쉴러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딱 두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부동산 시장은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그리 뒷맛이 좋은 시장이 되지 못한다. 부동산가격은 딱 물가상승률 만큼, 혹은 물가상승률보다 조금 더 낮은 수준으로 상승해왔다. 하지만 사람들이 여전히 부동산시장에서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쉴러에 의하면, 금융시장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버블-버스트 구조는 경제주체의 비이성적 판단이 집단적으로 합쳐진 결과이며, 최근 지나치게 고도화된 금융상품의 특성과 대리인 비용(agency cost) 등 정보의 비대칭성 등에 의해 이러한 시스템적 영향이 증폭되어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불러 일으켰다. 쉴러에 의하면,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우선 금융시장에 존재하는 정보의 비대칭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이를 위해 개인별 맞춤 재무상담 서비스를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고 각종 공시시스템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 이와 함께 금융소비자 보호 정책도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이 어려운 퍼즐은 모두 퀀트(quant)가 풀어줄 것이다!)

여기까지는 아주 상식적인 주장이고, 이 책이 나온 뒤 10여년의 기간동안 책에서 주장된 많은 부분이 실제 정책으로 이행되어왔다. 하지만 책의 가장 뒷부분에서 쉴러가 주장하는 내용은 조금 결이 다르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파생상품시장 등을 통해 부동산 시장에 조금 더 많은 유동성을 불어넣어 투기꾼들이 장난을 치지 못하게 만들자는 쉴러의 주장은, 몇가지 지점에서 지나치게 낙관적이지는 않은지 걱정을 하게 만든다. 첫째, 쉴러는 시장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과연 쉴러가 가진 선의를 시장의 참가자들도 가지고 있을 것인가. 다양한 시장 참가자 모두에게 적절한 경제적 유인이 주어져 자산시장의 변동성 완화 및 리스크관리라는 최종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나에겐 되게 어려운 문제처럼 느껴졌는데 쉴러는 당연히 될 것처럼 이야기한다. 둘째, 쉴러는 정부정책 역시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신뢰하는 것처럼 보인다. 위와 같은 정책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인내심 넘치고 꾸준한 성미를 가진 정책가가 과연 존재하는가. TARP 등의 대규모 구제금융 정책이 실제로 시행되었던 과정을 살펴보면, 쉴러와 같은 이성적 경제학자가 굵직한 금융정책 결정 과정에서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는 여지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셋째, 쉴러는 인간의 마음 역시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1주택자와 같은 소규모 투자자가 과연 자기집 한번 마련해보자는 선한 마음만으로 주택담보대출을 받았을까? 월가에서 수조원을 굴리는 펀드 매니저부터 동네 계모임에 수십만원을 넣는 사람까지 모두의 욕망은 동일하다. 기회만 된다면 타인의 피해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가능성을 충분히 통제함과 동시에 투기적 수요까지 잠재울 수 있는 새로운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시장의 파이를 키우는 방향으로 설정하자는 쉴러의 주장은 나같은 초짜 경제학자의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이 책에서 내 눈에 미친 쉴러는 금융과 시장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경제위기는 정부정책으로 극복 가능하다는 케인즈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땅에서 2cm 정도 발을 떼고 떠 있는 숭고한 인격체처럼 보인다. 책에 적힌 그의 주장 중 가슴에 와닿는 것도 많았다. 아니, 거의 대부분의 주장에 동의했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특히 인플레이션에 연동된 물가지수를 개발하여 이를 지속적으로 대중에게 교육시키자는 주장은 꽤 참신했다. 명목가치와 실질가치를 구분짓는 일은 경제학이 세상에 해줄 수 있는 가장 선한 행동 중 하나인 것 같다.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