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 피프티 피플

몇주 전 아내가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을 추천해주었을 때, 나중에 읽어볼게, 하고 건성으로 대답한 뒤 결국 지금까지 읽지 않았다. 당시 읽고 있던 다른 책이 있기도 했지만, 이 책이 왠지 [82년생 김지영]과 대구로 읽히는 것 같아 괜히 마뜩치 않았기 때문이다. 조남주의 화제작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꼭 존재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제목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읽기를 거부할 정도면 [82년생 김지영]의 서투르고 억센 문학성과 폭력적인 일반화에 대한 거부감이 생각보다 컸던 것 같다. [보건교사 안은영]이 퇴마사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안 것은 그로부터 며칠 지난 뒤였다.

[피프티 피플]은 주인공이 없는, 혹은 51명의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인 장편소설이다. 표지에 장편소설이라고 적혀있지만, 실제로 책을 읽다보면 50여편의 짤막한 단편소설이 조금의 공통분모를 두고 계속 이어지는 형태임을 알 수 있다. 호흡이 무척 짧은 단편이 각각 주인공을 한 명씩 가지고 있고, 나머지 50여명 중 누군가가 그 주변을 스쳐지나가는 방식이다. 미리 말하지만, 다음 문단에서 하게 될 두어개 정도의 사소한 불평을 고려하더라도 나는 이 소설집을 무척 좋게 읽었다. 각각의 등장인물에서 나의 한 조각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고, 51명의 인물의 이야기가 산만하게 흐트러지지 않고 응집력 있게 잘 뭉쳐져 있는 소설(집)의 짜임새도 마음에 들었다. 짤막한 이야기를 연속적으로 읽는 과정에서 특유의 은율감이 느껴지는 것도 좋았다. 소네트 연작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글의 리듬이 뛰어나서 읽는 동안 지루함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정세랑은 문장을 참 잘 만들어내고, 이야기도 참 잘 직조해내는 것 같다. 이 많은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스쳐가는 주요한 공간으로 병원 응급실을 택한 것도 현명해보인다. 좋은 상징성을 지닌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재를 열심히 한 티도 많이 난다. 많은 이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것 같고, 그 이야기를 다시 자기만의 이야기로 훌륭하게 재탄생시켰다.

사소한 불만이 없을 수 없다. 먼저, 물론 쉽지 않은 작업이었겠지만, 51편의 단편 사이에 존재하는 밀도의 차이가 꽤 있는 편이다. 어떤 단편에서는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먹먹해지거나 실제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행복한 진심이 잘 전달되는 반면, 다른 단편에서는 억지로 머릿수를 맞추기 위해 끼워넣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피상적인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이건 두번째 불평, 즉 작가가 가진 편향성, 혹은 편견이 글의 곳곳에서 드러난다는 사실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이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나이, 혹은 성별, 혹은 그 언저리의 삶에 대한 현명한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주변’에 대해서는 피상적인 편견으로 대충 얼버무리는 태도를 취한다. 소설의 종반부에 등장하는 몇 개의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노골적인 이데올로기, 혹은 프로파간다도 재미없고 따분했다. 갑자기 대학생의 리포트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정세랑보다 더 넓은 스펙트럼으로 더 다양한 인간군상에게 더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한국작가는 지금도 많다.

당신이 없는 삶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이다. 전날 밤 우리는 각각 따로 잠자리에 들었다. 제출기한이 코 앞으로 다가온 연구계획서를 마무리하느라 나는 새벽 늦은 시간까지 책상 앞에 붙들려 있어야 했고, 아내는 그런 나를 기다리다 소파에서 잠들어버렸고 이후 침대로 옮겨졌다. 나는 새벽 세시 쯤 늦은 잠을 청했지만 세시간 쯤 뒤 강제로 깨어나야 했다. 아내의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눈물을 곧잘 흘리는 그녀지만 그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무척 슬픈 꿈을 꾼 모양이었다.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채 통곡하는 그녀를 겨우 진정시킨 뒤, 어떤 꿈을 꾸었는지 물었다. 그녀가 잠시 살았던 지난 밤의 꿈에서 나는 이미 죽은 뒤였다고 한다. 고향 친구의 집을 방문하여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이미 죽은 남편’ 생각이 났고,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는 것이 아내가 기억하는 꿈의 내용이었다. 다만 그 아픔의 크기가 너무 커서 실제로 울기 시작했고, 잠에서 깨어난 뒤 자신을 달래는 남편의 얼굴을 보고 잠시 어리둥절했으며, 약간의 적응시간을 거친 뒤 다시 살아난(!) 남편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서야 울음을 그쳤다는 사실이 그녀가 수도 없이 꾸었을 다른 슬픈 꿈과의 극적인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내를 그토록 슬프게 만든 것은 ‘남편이 없는 삶’이었다. 우리는 가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른 편인데, 나는 내 자신의 죽음을 꽤 쉽게 가정하는 반면(“오늘 출근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지, 뭐.”), 아내는 우리 둘 중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하는 편이다(“말이 씨가 된다. 함부로 그렇게 말하지 마라!”). 진지하게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정 반대다. 나는 죽는 것이 두렵고, 죽음 이후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두렵다. 현재의 삶을 충실히 잘 살아낸다고 해도 그에 따른 보상(‘천국’과 같은)이 없다면 지금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과연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아내는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개념을 생각보다 잘 받아들였다. 어린 시절 불교신자였다가 싱가폴 체류 시절에는 개신교 신자가 되었고, 남편을 만난 뒤 천주교로 개종하는 등 화려한 종교적 편력을 가진 그녀였지만, 의외로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은 약한 편이다. 그래서 현재에 집중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지금 당장의 삶을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이 그녀에게는 꽤나 중요한 소명이다. 그런 그녀에게 ‘남편과의 사별’은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가장 좋은 친구이자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는 동반자, 머릿속과 마음속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또다른 나. 그런 존재를 상실하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나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죽음만이 서로를 갈라놓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천주교식 결혼을 한 우리는, 그 문장 안에 스스로를 가둔채 살아가고 있다. 천주교에서는 법적인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대충 짐작해보면 신의 이름으로 허락한 결혼을 인간들끼리 합의하에 무를 수는 없다는 논리같다. 실제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친한 형은 이혼 후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몇년 후 ‘복권’되기는 했지만, 교회법상 형은 그 몇년동안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던 셈이다. 이러한 천주교의 논리가 아내의 눈에는 꽤 신선하게 비추어졌는지, “죽기 전에는 나랑 헤어질 수 없어”라는 말을 꽤 자주 한다. 하지만 그 말의 이면에는 “둘 중 누군가가 죽으면 영원히 혼자가 된다”는 두려움이 깔려있기도 하다. 아내보다 내가 먼저 죽는 것도 두렵고, 나를 두고 아내가 먼저 떠나버리는 것도 두렵다. 나는 아내를 마음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무한히 사랑하지만, 아내와의 동반자살을 택한 프랑스 철학자 앙드레 고르(André Gorz)처럼 아내가 없는 삶을 완전히 포기할 만큼 강단이 있지는 못하다. 아내가 나보다 먼저 죽는다면, 나는 아마 자연이 삶을 허락할 때까지 계속 삶을 이어갈 것이다. 그 혼자된 삶을 상상하면 가슴이 먹먹해져서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을 정도다. 아내를 두고 먼저 떠나는 마음은 또 얼마나 비참하고 죄스러울까. 아빠의 가장 친한 친구 교수님이 돌아가실 때, 아빠와 다른 친구 교수님께 당신의 아내인 여사님을 부탁하며 “아내가 술을 좋아하니 가끔 술을 함께 마셔달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이후 우리 집에서 그분들이 다 함께 모이는 일이 있었는데, 아빠와 다른 친구 교수님이 그렇게 열심히 술을 마시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평소에 술을 잘 드시지 못하는 분들인데, 그날만큼은 미망인이 되신 여사님 앞에서 술잔을 꺾지도 않았다.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답고 슬퍼보였다.

오늘 아내는 하루종일 내 옆에 꼭 붙어 있었다. 잠시 함께 외출을 할 때에는 이미 퉁퉁 부은 두 눈때문인지 유난히 화장에 공을 들이기도 했다. 평소에도 내 옆에 꼭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그 꼭 붙어 있던 오늘의 그녀 모습은 전과는 조금 달라보였다. 전과 같이 맹렬하게 나를 사랑하고 있지만, 꿈 속에서나마 내가 없는 삶을 조금 느껴보았기 때문일까. 전과는 다른 애틋함과 절실함이 조금 더 깊게 느껴진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Yorgos Lanthimos | The Favourite

[The Favourite] poster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요즘 영화판에서 가장 핫한 이야기꾼인 것 같다. [더 랍스터(The Lobster)]부터 [킬링 디어(The Killing of Sacred Deer)]를 지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The Favourite)]까지, 큰 실수 없이 착실하게 자신의 영화적 세계를 구축했다. 감정을 숨긴 무표정한 배우의 얼굴, 새파란 숲, 극단적인 광각 렌즈의 사용 등 란티모스 영화만의 트레이드 마크가 시각적으로 우선 강렬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의 영화가 시각적으로 선사하는 깔끔한 모습은 아주 뛰어나다고 할 정도로 독창적이진 않다. 란티모스를 동년배의 다른 감독군과 분리시키는 것은 아주 단순한 서사구조를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와중에 창의적으로 이끌어내는 선명한 문제제기 능력일 것이다.

그의 세계는 항상 날카로운 대립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극에서 가장 복합적인 인물은 대립적인 두 세계 사이에서 고뇌하고 갈등하는 사람이다. 가운데에서 방황하는 인물의 고민이 깊어질수록, 그 누구도 행복해지지 못하며 그 누구도 균열을 막을 수 없게 된다. [더 페이버릿]에서는 여왕 앤이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는 누구나 대립관계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친절하게 설명한 뒤 부차적인 장식물은 모두 거세한 채 빠른 속도로 핵심으로 치닫는다. 관객은 이미 결말을 알고 있지만, 등장인물 사이의 갈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긴장감도 함께 높아지기 때문인지 직선적인 서사구조로 인해 지루해할 틈은 없다. 지극히 판타지스러운 이 세계는 결말에 다다르는 지점에서 갑자기 관객의 현실을 환기시키는데, 나는 이 부분이 란티모스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점점 일그러지는 앤의 얼굴과 마비되어가는 팔, 다리는 잘못된 선택이 연속적으로 행해지고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쉽게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의 낡고 굳어버린 처지를 상징한다. 그렇다고 앤의 사랑을 차지한 한쪽 세계가 많이 행복해보이진 않는다. 그녀는 여왕의 무릎 밑에서 짓눌리는 삶을 평생 살아야 한다. 껍데기 뿐인 권력이지만 그 권력의 끄트머리를 부둥켜 잡고 살아야 겨우 생존하는 가냘픈 인생이 이 한쪽 세계의 전부임을, 영화는 꽤 긴 클로즈업을 통해 적나라하게 비춰준다. 여왕의 사랑과 권력을 빼앗긴채 이제 모든 것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다른 세계의 모습이 오히려 더 담담해보인다.

욕망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쟁취했지만 불안감에 한 치도 마음 놓을 수 없는 현실, 틀린 것을 알고 있지만 바로잡을 용기가 없는 삶, 지나친 소유욕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알량한 자존심. 그렇게 판타지스럽지 않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습들이다. [더 페이버릿]은 그런 현실의 누추함을 비추는 현명한 우화다. 란티모스의 영화는 테크닉이 너무 화려하고 뛰어나서 별 네개 이상을 줄 수 없게 만들지만([플로리다 프로젝트]와 [문라이트]같은 영화가 내가 별 다섯개를 줄 수 있는 영화들이다), 그렇다고 그가 가진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시기하거나 깎아내릴 마음은 추호도 없다. 지적으로 자극이 되는 흥미로운 영화를 계속 만들어주기를 희망한다.

XXX | Language

XXX | Language

[쇼미더머니]을 통해 메인스트림 문화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주류 한국 힙합은 미국 흑인음악의 형식과 내용 모두 별다른 고민 없이 베낀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붐뱁, 트랩, 클라우드, 어쩌구저쩌구 하는 힙합의 다양한 얼굴들 중 한국 힙합이 내재적으로 탄생시킨 독창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힙합은 문화다”를 주구장창 외치는 그들은 정작 미국 힙합문화의 단편적인 모습들만을 그대로 직수입해 상표조차 떼지 않고 사용 중이다. [쇼미더머니]에서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유명 래퍼가 영어로 감탄사를 내뱉는 장면이 유독 자주 나오는데, 그럴 때마다 ‘왜 부끄러움은 시청자의 몫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국적인 힙합’에 대한 고민은 [쇼미더머니]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가장자리에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발견된다. 경상도 사투리로 랩을 구사한 메타와 렉스의 “무까끼하이”와 같은 시도는 물리적 성공이 유일한 목표, 혹은 숭고한 미덕 정도로 취급되는 [쇼미더머니]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XXX는 래퍼 김심야와 작곡가 겸 프로듀서 프랭크(FRNK)로 이루어진 힙합 듀오다. 이들은 아직 [쇼미더머니]의 바깥 테두리에 위치해있다. [Language]는 이들이 발표한 EP인데, 최근 꽤 즐겨 자주 들은 음반이다. 음반을 반복해서 듣게 되는 요인은 김심야의 래핑보다는 프랭크의 사운드메이킹 쪽에 있다. 프랭크의 감각적인 작곡과 사운드메이킹은 이들의 음악을 [쇼미더머니] 제작과정에서 급하게 만든 ‘음원순위용’ 노래들과 차별화시킨다. 최근 힙합에서 이런 사운드를 듣게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귀를 즐겁게 해주는 소리들로 가득하다. 인더스트리얼 음악의 최전선을 목격하는 듯 하다.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프랭크의 사운드는(실제로 칼을 가는 소리가 효과음으로 들어가 있기도 하다) 분노로 가득찬 고음의 김심야의 목소리와 제법 잘 어울린다. 김심야의 랩은 비트에 맞게 때려 박았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메인트스림 한국 힙합계에 대한 차오르는 분노가 느껴지긴 하는데, 래퍼의 ‘자세’는 확실히 인식할 수 있다 하더라도 래퍼의 ‘이야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화가 난 것은 그가 내뱉는 다채로운 욕설 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는데, 왜 화가 났는지 청자를 이해시키려고 성실하게 노력하지 않는다. 이런 형식적인 문제는 그가 공격하는 메인스트림 한국 래퍼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약간 안타까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설픈 영어 가사는 한국어를 모르는 청자에게도 김심야의 ‘자세’를 설명하는 차원으로는 제법 쓸만하게 느껴지지만, 이 역시 ‘왜 부끄러움은 한국 청자의 몫인가’라는 생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

그릇, 채움, 소비

생존을 유지하는 차원을 넘어서 개인의 효용을 증대시키기 위한 소비행위는 인간을 인간답게 존재케 하는 주요한 특징 중 하나다. 나 역시 소비를 무척 좋아하는 인간으로서 나름의 소비 규칙을 가지고 있다. 거창하게 말하면 ‘플랫폼 소비는 최소화하고 컨텐츠 소비에 집중하자’인데, 간단하게 말하면 한 때의 호기심에 의한 장비류 구매는 최대한 자제하는 것이다. 구매를 극도로 경계하는 제품군이 몇 있는데,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오디오, 시계, 고가의류, 자전거, 등산, 캠핑, 자동차튜닝, 덩치 큰 주방기기(에어프라이나 착즙기같은)…

이것들은 그 자체로 구매자의 효용을 증대시킨다기 보다는, 이걸 이용해서 무언가를 꾸준히 해야 효용이 발생하는 제품들이다. 예를 들어 좋은 오디오는 음악을 계속 들어야 귀가 맑아지는 효과를 느끼고, 자전거도 계속 라이딩을 해야 하고, 착즙기로 매일 쥬스를 갈아 마셔야 행복해진다. 다시 말하면 구매자의 선호도가 변하는 순간 쓸모 없어지는, 고가의 쓰레기로 변질될 확률이 높다. 이런 것들이 소위 ‘플랫폼’에 해당한다. 나의 선호도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나 자신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므로, 불확실성을 굳이 떠안으며 돈을 쓸 이유가 적은 셈이다. 최근 약간의 예외가 있었는데, 아내를 위해 구입한 전자피아노와 나를 위해 구입한 수영복이 그것이다. 피아노는 아내가 즐기지 않으면 값비싼 건조대가 될 위험이 있긴 한데, 다행히 아직까지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 어릴 적 배운 경험을 살려내는 맛이 쏠쏠한가보다. 나는 올해 생존을 위해 수영을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으므로, 아직까지 지치지 않고 열심히 수영을 배우고 있다.

이에 반해, 지출에 있어 거리낌이 없는 몇 제품군이 있다.

책, 영화, 음반(요즘엔 음반을 사지 않고 월정액 스트리밍 상품을 구입한다), 해외스포츠 시청권(MLB, NFL, NBA..), 유니클로 계절 옷, 커피원두, 카페에서의 커피…

대부분 ‘컨텐츠’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확고하게 자리잡은 나의 취향(영화, 음악, 스포츠, 커피 등)을 지속적으로 구입해주는 것은 그릇에 물을 채우는 것과 비슷하다. 나에게 플랫폼은 컨텐츠의 발전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도구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음악을 듣는 과정에서 내 귀가 극도로 민감하게 발달해버렸다면, 그래서 음표 하나 하나, 악기 하나 하나를 분쇄해서 들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티볼리 오디오 시스템은 나에게 역부족일 수 있고, 오디오 시스템의 교체를 고려해볼만 하다. 더이상 책을 꽂을 공간이 없을 때 책장을 사는 것이고, 수영을 마스터하여 수영장에서 더이상 배울 것이 없다면 골프나 다른 운동으로 넘어가기 위해 골프채를 보러 상점으로 나가볼 수 있는 것이다. 섣부른 흥미와 호기심에 의해 장비부터 구입하고 셋업에 집중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지칠 수 있다. 그릇 안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고, 더이상 그릇이 감당하지 못할 때 쯤 그릇을 바꾸는 방식의 소비패턴이 내 삶에 서서히 자리잡고 있다. 결혼 후 돈 모으는 일에 관심이 생기다보니 더 빠르게 자리잡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아내에게 맥북프로를 사달라고 조르고 있는데 잘 먹히지 않고 있다. 그래서 어제 밤 늦게까지 외부연구비 프로포절을 작성했다. 효율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반드시 노트북 구매가 필요합니다! 라고 역설하며.. 아내와 연구재단 중 누가 더 까탈스러운 구매자인지 시험해볼 좋은 기회다.

Susanne Bier | Bird Box

[Bird Box]

영화의 구조는 단순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무엇’을 본 사람은 자살하게 되는 세계가 도래한다. 그것을 보면 반드시 죽는다. 죽지 않기 위해 문을 걸어잠그고 창문의 커튼을 내린다. 음식 등을 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갈 때에는 눈을 가린채 여기저기를 손으로 더듬어가며 길을 찾아야 한다. 주인공 멀로리(산드라 불록 扮)는 그 와중에 아기까지 출산했다. 한 집에서 함께 위기를 겪어나가던 여자는 동시에 아이를 낳고 숨졌다. 그녀와 한 집에 우연히 모여 함께 위기를 헤쳐나가던 동료들은 ‘그것’을 보아도 죽지 않는 미치광이에 의해 살해당했다. 멀로리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동료 톰(트레반테 로즈 扮)과 함께 두 아이를 데리고 외딴 곳에서 5년 동안 생존한다. 하지만 톰마저 미치광이들에 의해 숨지고, 멀로리는 우연히 무전교신을 통해 연락이 닿은 신원불명의 남자 ‘릭’이 가르쳐준 방향대로 눈을 가린채 작은 보트에 몸을 싣고 무작정 그 ‘유토피아’로 나아간다.

영화의 매력도 단순하다. 영화는 산드라 불록이 가진 미덕을 최대한 전시하는데 집중한다. 그녀는 [그래비티]에서 보여준 강인한 육체적 매력을 자신있게 보여줌과 동시에, 동 영화에서 주인공 라이언이 극복해야 했던 대상이자 채워지지 않는 공백이었던 모성애를 마음껏 드러낸다. 갑자기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해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디스토피아적 세계, 바깥 세상은 아무 것도 볼 수 없기 때문에 집 안에서만 생활할 수 있는 폐쇄적인 공간성, 그 좁은 공간을 공유하는 동료조차 믿을 수 없게 만드는 다양한 상황설정 등 영화는 스릴러의 기본공식을 충실히 따라간다.

영화의 단점도 명확하다. 우선 서사구조가 엉성하다. 설정 상 모순이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등장인물의 성격도 하나같이 일차원적이다. 스릴러 장르 영화에 대한 클리셰로 가득차있다. 심지어 무언가를 보면 반드시 죽는다는 기본 설정조차 어디에서 본 듯 하다. (영화는 조쉬 메일러맨(Josh Malerman)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넥플릭스에서 만들어진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텔레비전이라는 한정된 전달매체 안에서 지속적으로 시청자의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한 장치를 끊임없이 삽입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손쉬운 장치가 스릴러 구조다. [버드 박스] 또한 예외는 아니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심지어 앞도 보지 못하는 포스트-아포칼립틱 세계에서 두 아이를 건사해야 하는 어머니의 사투라는 주제는 끝까지 영화를 보게 만드는 원천이다. 영화의 매력도 딱 거기까지고, 그 외 새로운 매력을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다.

하지만 [눈먼 자들의 도시] 등의 관련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주제의식을 [버드 박스]에서도 동일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은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영화에서는 사람들의 시각을 지배하여 목숨을 잃게 만드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정체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주인공이 거주하는 집에 침입한 미치광이의 그림에 의해 대략적인 형태를 짐작할 수 있지만, 우스꽝스러운 그 모습을 보면 더이상 중요하지 않은 존재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초월적 존재와 인간 사이의 대립관계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관계는 ‘그것’을 보아도 눈이 멀거나 죽지 않는 미치광이 집단과 ‘그것’을 보면 죽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 사이의 사투일 것이다. 미치광이는 주인공이 거주하는 집에 침입한 뒤 창문을 개방하여 동료들을 하나씩 죽게 만든다. “넌 저것을 봐야해. 얼마나 아름다운지.”라는 대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억지로 바깥 세상을 보도록 강요한다. 모두가 시력을 가진 세계에서 눈먼 자들은 비정상이라고 취급당한다. 하지만 모두가 시력을 빼앗긴 채 살아가는 영화 속 세계에서 ‘그것’을 볼 수 있는 자들은 미치광이, 혹은 폭력적 존재로 그려진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현실의 세계에 사는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당연’한 일이자, 가끔은 퍽 낭만적이거나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현실에서 눈먼 자들이 사는 세상은 세심하게 보살펴지지 못할 때가 많다. 어쩌면 영화속에서 눈을 가린 자들에게 바깥 세상을 보라고 강요하는 미치광이의 모습이, 현실에서 눈먼자들에게 동등한 세계를 공유할 것을 강요하는 시력을 가진 이들의 행동을 은유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속 미치광이에게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는 그 모습이 평범한 이들에게는 죽음으로 가는 독약이듯, 현실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이 다수에 의한 폭력이 되어서는 안된다.

[버드 박스]가 성취하고 있는 가장 훌륭한 주제의식이 위와 같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영화의 결말은 두배로 실망스럽다. 모든 고난을 뚫고 멀로리와 두 아이가 도착한 곳은 실제 눈을 먼 이들과 시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에 의해 바깥 세상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함께 사는 일종의 유토피아인데, 그곳에서 어떻게 식량은 조달하는지 등 설정, 그곳에서의 삶이 미치광이 집단과의 대립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등에 대한 설명 등 꼭 필요한 정보를 전혀 제공하지 않고 뭉클한 감동을 강요한 뒤 성급하게 엔딩 크레딧을 올려버린다. 전형성에 대한 비판을 담은 영화인데 서사구조나 영화적 장치는 너무나 전형적이다. 이런 모순도 가 설계된 것이라면 실로 대단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지만, 솔직히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1월 결산

  • 1월 1일은 남해에서 시작했다. 이동에너지 만땅에 여행에너지는 측정 불가능 수준인 아내의 영향권 아래 산다는 것은, 언제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충만함을 의미한다. 당일 새벽 세시에 출발하여 어두운 고속도로를 긴장감 넘치게 달린 끝에 늦지 않게 남해 해안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퍽 괜찮은 일출을 보면서 소원을 하나 빌었다. 이 가족의 개체수가 증가하게 해달라는. 기복신앙 참 좋아하는 이 나라에 살다보면 소원을 빌 수 있는 기회를 상당히 많이 접하게 되는데 그 때마다 내가 비는 소원은 항상 같다. 아기를 갖는 것에 대한 간절함은 꽤 오래된 것 같다. 부디 지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1월에도 우리는 임신에 실패했다.
  • 남해에서 이틀 정도 머물렀는데, 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생각의 계절’ 민박집 신세를 졌다. 이 블로그와도 얕은 인연을 가진 집이다. 이 곳에 썼던 음악 이야기를 발견한 웹진의 편집장님이 연락을 주셨고, 여자저차한 끝에 그 매체에 블러드 오렌지에 대한 글을 한 편 실을 수 있었다. 아마추어로 남고 싶은 마음에 그 매체와의 인연은 거기에서 끝났고, 당시 편집장님은 “저희 부부는 이제 남해로 가서 민박집합니다~”라는 인사말을 남기시고 홀연히 사라지셨다. 이후 지금까지 그 민박집에 언제 한번 가보나, 마음속으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아내 덕분에 비로소 그 곳에 가게 된 것이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조용했고, 마을은 참 예뻤다. 딱히 아는 척을 하지는 못했는데, 낯가림이 심한 인트로벗의 전형적인 특징이기도 하고, 과거는 과거의 좋은 추억으로 남겨두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 남해에 다녀온 후 베트남 출장까지 논문에 매진했다. 지난 학기는 정말 너무 힘들었는데, 나를 힘들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지 못하게 만드는 각종 행정업무들이었다. 정작 연구와 교육이 가장 중요한 임무인 직업을 가지게 되었는데 역설적으로 그 둘 외의 것들에 신경을 더 많이 써야 하는 구조가 답답했다. 방학만을 기다렸고,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무조건 논문 한 편 쓴다는 다짐 하에 맹렬히 써내려갔다. 한국 경제에 대한 이야기라 한국어로 썼고, 모교에서 운영하는 학술지에 투고했다. 아직 소식이 오지 않았다.
  • 베트남 출장은 이 학교로 온 후 겪은 많은 이상한(weird) 경험 중 거의 탑을 달리지 않을까 싶다. 글로벌 현장학습이라는 이름으로 몇 달 전부터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어쩌구 예산을 확인하고 저쩌구 하며 고생했는데, 내가 이 여행에 동참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학부생 스무명 정도를 데리고 하노이와 하롱 베이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무능하고 무식한 나 때문에 우리과 행정조교 선생님과 그녀의 친구 여행사 직원분이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나는 무식하고 무능한 덕분에 여행사에서 준비한 가이드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3박 4일동안 ‘나는 대체 왜 여기 있는가’를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한가지 얻고 온 것이 있는데, 베트남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남아 국가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이 나라들에 대해 별다른 생각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베트남은 이유 없이 호감을 갖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말도 안될 정도로 혼란스러운 교통문화와 그보다 조금 나은 수준인 질서의식, 서울은 비교도 안될 정도로 혼탁한 하노이의 대기오염 등 내가 싫어하는 모든 요소를 다 가지고 있음에도 싫어할 수가 없었다. 신기한 나라였다.
  • 정신없는 학기와 극적으로 대비되는 방학의 삶은 늦잠과 느린 아침식사로 시작하여 커피와 산책으로 이어졌다. 아내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삶에 늘 감사하고 있다. 이번 겨울은 그리 추운 편이 아니어서 추위를 싫어하는 아내도 그럭저럭 무난하게 보낼 수 있었다. 우리는 항상 늦게 일어났으며, 게으르게 아침식사를 준비해서 천천히 먹었다. 커피는 거의 대부분 직접 내려 마셨으며, 이틀에 한번 꼴로 저녁마다 동네 한바퀴를 돌았다. 아내는 요가와 그림 등 본인이 하고 싶었던 것에 조금 더 매진했으며, 나는 논문 하나를 끝낸 뒤 잠시 풀어져 게으르게 보냈다.
  • 그 와중에 짧은 직장생활 경력에 한줄기 오점(?)을 남기는 이벤트도 있었다. 지연도, 학연도, 그럴듯한 동앗줄도 없이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처럼 묵묵히 시키는 일 열심히 하기’가 거의 유일한 생존방법일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았다. 이런 삶의 가장 큰 부작용이라면 결코 가지고 싶지 않은 ‘명성’이 하나 생긴다는 것인데, 바로 ‘저 친구에겐 어떤 일이든 시켜도 잘 해낼거야’라는 부정확한 집단적 맹신이 그것이다. 이 학교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지 초짜 조교수에게 모든 행정업무가 쏟아져 들어왔고, 이를 더이상 참을 수 없던 나는 공식 회의 자리에서 큰 목소리로(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계속 커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를 줄이면 왠지 지는 것 같아서 그럴 수 없었다) 이에 대해 항의했고, 뒷담화를 즐기는 교수사회의 특성을 고려할 때 아마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찍히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약간의 현자타임이 온 것은 사실이다. 지난 두 번의 이직 경험과 이번 일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다른 직장인들에 비해 ‘분노의 임계치’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사실이다. 분노의 임계치를 통과하면 보통 술을 마시면서 잊는다던가 꾹 참고 다시 웃으며 출근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삶을 이어나가는데, 나는 바로 이직을 준비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고, 이번에는 제발 전의 사례와는 다르기만을 바랄 뿐이다.
  • 2019년 1월은 세종시대 이후 서울을 한번도 방문하지 않은 첫 달로 기억될 것이다.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올라가지 않았다는 것은 상당히 유의미하지 않은가.. 스스로 대견해하고 있다(사실 세미나 참석차 올라가려고 했는데 교수회의에 발목 잡혀서 올라가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세종의 조용한 분위기가 퍽 마음에 든다. ‘문화’가 전무하다는 점은 여전히 치명적으로 다가오지만, 세종시에도 이제 꽤 좋은 커피숍이 몇 들어왔고, 음식은 대부분 집에서 해먹게 되었으니 조금 더 건강해질 뿐 아니라 외식을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세종의 불 꺼진 공실 상가들에 큰 불만은 없다. ‘동네’라고 할만한 정체성이 없다는 점이 제일 뼈아픈데, 아파트만이 존재하는 환경은 필연적으로 삭막한 이웃관계를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사실 이 점은 서울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은 부분이어서 이조차 불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Girlpool | What Chaos is Imaginary

Girlpool | What Chaos is Imaginary

뮤지션의 음악적 여정을 데뷔 시절부터 눈을 떼지 않고 계속 지켜보는 과정은 흥미롭다. 뮤지션이 슬럼프에 빠졌을 때는 내 마음이 다 안타깝고, 음악적으로 큰 진보를 이루어냈을 때에는 아무 것도 보태준 것이 없지만 괜히 뿌듯해진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엘에이 지역 출신 인디록 듀오 걸풀(Girlpool)은 십대 시절인 2014년 발표한 첫번째 음반 [Before the World was Big]부터 지금까지 애정을 가지고 지켜봐 온 밴드다. 이들을 마음 깊숙히 응원해오고 있는 이유는 단지 짧은 기간 이루어낸 음악적 성취 때문만은 아니다. 음악보다 먼저인 삶 자체를 응원하게 되었다.

물론, 데뷔 음반에서 보여준 깔끔하고 산뜻한 미니멀리즘 펑크 음악에 매료되어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기타와 베이스로만 구성된 단순한 구성 위에 켜켜이 쌓아올린 카랑카랑한 두 목소리의 하모니는 꽤 근사했다. 2017년 발표한 2집 [Powerplant]에서 이들은 이미 좋은 평가를 받은 데뷔 음반의 미덕을 상당 부분 포기하고 다채로운 악기구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을 택했는데, 이에 대해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었을지언정 이 듀오의 재능이나 가능성이 퇴보했다고 생각하는 이는 적었을 것이다. 여전히 이들의 음악이 가진 특이성, 혹은 유일성은 존재했다. 오히려 내게 가장 의아했던 부분은 상당히 우울해진 음반의 분위기였다. 이들에게 안좋은 일이 있나, 하는 걱정이 들기까지 했다. 1집에서 보여준 호기, 혹은 패기를 찾기 힘들었다.

그 ‘무슨일’이 있긴 있었다. ‘안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삶의 큰 변곡점인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2019년 발표한 3집 [What Chaos is Imaginary]의 첫곡 “Lucy’s”를 듣고 ‘멤버가 바뀌었나?’라고 생각했다면, 반은 맞고 반을 틀리다. 먼저 멤버는 전과 동일하다. 고등학교 동기동창인 클레오 터커(Cleo Tucker)와 하모니 티비대드(Harmony Tividad)가 여전히 걸풀의 주인공이다. 다만, 이 중 클레오 터커의 성(性)이 여자에서 남자로 변화했다. 사춘기 소년의 목소리를 연상시키는 알토의 보이스톤은 클레오 터커의 것이다. 이제 이 밴드는 여성듀오가 아닌 혼성듀오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밴드에 생긴 변화는 생각보다 컸다고 한다.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듯, 이들은 기존에 발표한 모든 걸풀의 노래를 두 옥타브는 낮아진 터커의 목소리에 맞추어 다시 다듬는 작업을 해야했다. 지난 음반들, 특히 데뷔 음반이 가진 매력 중 상당 부분은 여성 소프라노 두명이 만들어내는 유쾌한 화음에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자신의 목소리가 어색하게 들린다는 것은 나같은 일반인이 생각하기 힘든 큰 도전이었을 것이다. 2집의 우울한 분위기, 3집의 도전적이면서도 드리미한 사운드는 이들 삶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아보인다.

이러한 큰 변화에도 불구하고 큰 용기를 낸 이 젊은 듀오는 [What Chaos is Imaginary]에서 여전히 근사한 음악을 들려준다. 이제 이들의 음악은 더이상 미니멀하지도 않고, 펑크의 범주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오히려 비치하우스(The Beach House)를 연상시키는 드림팝 계열에서 논의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 매체가 “슬리터-키니에서 비치 하우스로의 변화”라고 표현했듯, 이들은 여전히 아름다운 보컬 하모니를 간직한 채 디스토션과 퍼즈가 잔뜩 걸린 기타를 치고 드럼과 키보드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며 사운드케이프를 광활한 차원으로 넓혀버린다. 타이틀곡 “What Chaos is Imaginary”나 “Pretty”같은 곡은 영락없는 잘 만든 드림팝 넘버이고, 달라진 터커의 목소리가 전면에 등장하는 “Hire”나 “Lucy’s”도 드리미한 사운드가 강하게 느껴진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운드라는 점은 약점이자 강점이다. 3집에서 이들은 새로운 변화에 여전히 적응해나가는 듯 보인다. 비단 달라진 목소리 톤때문만은 아니다. 1집과 비교하면 같은 밴드의 음악인가, 싶을 정도로 작법까지 많이 달라졌다. 미완성인채 앞으로 달려나가는 듯한 모습이 불안하기 보다는, 이들의 음악세계가 어떤 완성판으로 빚어질지 궁금증을 자아낸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지점이 더 많지 않나 생각한다.

로버트 쉴러 | 버블 경제학

우리 부부는 최근 디지털피아노를 하나 구입했다. 60만원 정도 되는 나름의 고가(!) 장비였기에 주 사용자인 아내 뿐 아니라 나 역시 이번 기회에 피아노에 대한 의욕이 꽤 크게 불타올랐다. 피아노를 전공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꽤 진지한 학습 경험을 가진 아내와 달리 나는 왼손과 오른손이 따로 놀아야 하는 지점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주저앉은, 아주 전형적인 ‘피아노 바보’ 중 하나라는 사실이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관계로 이번 설 연휴에 창원 부모님댁으로 간 큰 이유 중 하나는 그 곳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되었던 [바이엘 피아노 교본] 상, 하권을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곳에는 바이엘 교본이 없었고, 먼지 쌓인 책장을 구경하다 엉뚱하게 꽂혀서 세종까지 가지고 온 책이 [버블 경제학]이다.

로버트 쉴러(Robert J. Shiller) 교수는 현시대의 많은 거시/금융 경제학자들에게 롤모델과도 같은 존재다. 금융시장의 비효율성을 증명한 연구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학자로서의 경력 뿐 아니라 케이스-쉴러 지수(Case-Shiller Index)를 개발하여 미국 부동산 시장의 가격수준 및 변동성 수치를 정책에 반영한 정책가로서의 역량, 그리고 뉴욕 타임즈 등에 꾸준히 글을 기고하는 등 일반인을 상대로 한 활발한 저작활동까지, 다방면에 걸친 그의 활약상은 거시경제학자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지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융시장의 불완전성과 경제주체의 비이성적 판단이 미치는 결과 – 예컨대 버블 – 에 대해서는 세계 최고의 권위자인 쉴러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전후로 더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쉴러에게 금융위기에 대한 해답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버블 경제학](원제는 [Subprime Solution])은 금융위기 직후 이 새로운 형태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쉴러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한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반부의 명쾌한 진단과 후반부의 뜬구름 잡는 낙관주의가 뒤엉켜버려서 전체적으로 썩 좋은 책이라고는 말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특히 뉴딜 정책에 대한 찬양은 낯뜨거울 정도인데, 만약 지구상에 케인즈교가 있다면 쉴러는 케인즈교 코네티컷 지부의 주교 정도 자리는 차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비경제학자가 번역하고 감수한 책답게 전문용어에 대한 사려깊은 고려가 담겨져 있지 않은 점도 아쉬운 부분인데, 역설적으로 지나치게 쉽게 번역된 탓에 (짧은 책의 분량과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여) 큰 어려움 없이 빠르게 읽어내려갈 수 있다는 점은 장점으로 치부할 수 있겠다.

쉴러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딱 두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부동산 시장은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그리 뒷맛이 좋은 시장이 되지 못한다. 부동산가격은 딱 물가상승률 만큼, 혹은 물가상승률보다 조금 더 낮은 수준으로 상승해왔다. 하지만 사람들이 여전히 부동산시장에서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쉴러에 의하면, 금융시장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버블-버스트 구조는 경제주체의 비이성적 판단이 집단적으로 합쳐진 결과이며, 최근 지나치게 고도화된 금융상품의 특성과 대리인 비용(agency cost) 등 정보의 비대칭성 등에 의해 이러한 시스템적 영향이 증폭되어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불러 일으켰다. 쉴러에 의하면,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우선 금융시장에 존재하는 정보의 비대칭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이를 위해 개인별 맞춤 재무상담 서비스를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고 각종 공시시스템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 이와 함께 금융소비자 보호 정책도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이 어려운 퍼즐은 모두 퀀트(quant)가 풀어줄 것이다!)

여기까지는 아주 상식적인 주장이고, 이 책이 나온 뒤 10여년의 기간동안 책에서 주장된 많은 부분이 실제 정책으로 이행되어왔다. 하지만 책의 가장 뒷부분에서 쉴러가 주장하는 내용은 조금 결이 다르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파생상품시장 등을 통해 부동산 시장에 조금 더 많은 유동성을 불어넣어 투기꾼들이 장난을 치지 못하게 만들자는 쉴러의 주장은, 몇가지 지점에서 지나치게 낙관적이지는 않은지 걱정을 하게 만든다. 첫째, 쉴러는 시장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과연 쉴러가 가진 선의를 시장의 참가자들도 가지고 있을 것인가. 다양한 시장 참가자 모두에게 적절한 경제적 유인이 주어져 자산시장의 변동성 완화 및 리스크관리라는 최종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나에겐 되게 어려운 문제처럼 느껴졌는데 쉴러는 당연히 될 것처럼 이야기한다. 둘째, 쉴러는 정부정책 역시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신뢰하는 것처럼 보인다. 위와 같은 정책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인내심 넘치고 꾸준한 성미를 가진 정책가가 과연 존재하는가. TARP 등의 대규모 구제금융 정책이 실제로 시행되었던 과정을 살펴보면, 쉴러와 같은 이성적 경제학자가 굵직한 금융정책 결정 과정에서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는 여지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셋째, 쉴러는 인간의 마음 역시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1주택자와 같은 소규모 투자자가 과연 자기집 한번 마련해보자는 선한 마음만으로 주택담보대출을 받았을까? 월가에서 수조원을 굴리는 펀드 매니저부터 동네 계모임에 수십만원을 넣는 사람까지 모두의 욕망은 동일하다. 기회만 된다면 타인의 피해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가능성을 충분히 통제함과 동시에 투기적 수요까지 잠재울 수 있는 새로운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시장의 파이를 키우는 방향으로 설정하자는 쉴러의 주장은 나같은 초짜 경제학자의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이 책에서 내 눈에 미친 쉴러는 금융과 시장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경제위기는 정부정책으로 극복 가능하다는 케인즈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땅에서 2cm 정도 발을 떼고 떠 있는 숭고한 인격체처럼 보인다. 책에 적힌 그의 주장 중 가슴에 와닿는 것도 많았다. 아니, 거의 대부분의 주장에 동의했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특히 인플레이션에 연동된 물가지수를 개발하여 이를 지속적으로 대중에게 교육시키자는 주장은 꽤 참신했다. 명목가치와 실질가치를 구분짓는 일은 경제학이 세상에 해줄 수 있는 가장 선한 행동 중 하나인 것 같다.

KIRARA | Sarah

KIRARA | Sarah

공연을 할 때마다 청하를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뮤지션 키라라(KIRARA)가 “음반 안에서 개연성을 가지게 만든 첫번째 결과물”이라고 이야기하는 [Sarah]는 그녀의 세번째 정규음반이다. 키라라의 표현에 따르면 앞선 두 장의 정규음반이 기존에 작업했던 곡들을 음반의 형태를 갖추어 발매한 “모음집”의 형태였다면, [Sarah]는 ‘Sarah’라는 한 인물을 중심으로 슬픔, 외로움, 절망과 같은 감정을 녹여내고 있다. 여기서 ‘Sarah’는 아마도 당연히 키라라 자신이겠지만, 키라라와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친구들’이기도 할 것이다.

키라라의 음악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생각보다 훨씬 따뜻하다. 음반의 첫 곡이자 음반의 전체적인 방향을 정립하는 곡 “걱정”에는 이 뮤지션의 사려깊고 섬세한 마음씀씀이가 잘 드러나있다. 한 친구의 자살로부터 시작된 염려와 걱정의 관념은 [Sarah]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잘 지내냐”는 한 마디가 입 밖으로 나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번민과 얼마나 복잡한 생각들이 마음 속을 오고 나갔을까. 이러한 절절한 마음에 대한 표현은 이어지는 노래인 “Wish”에까지 그대로 이어져 [Sarah]만이 가지는 어떤 하나의 얼굴 표정을 만들어낸다. 그녀와 그녀 주변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쁘고 강해” 보이기도 하고, 웨이브에 실린 표현처럼 “뿌숨과 감화”의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Sarah]에 대해 이야기하는 다양한 층위의 시각과 주제가 있을 것이다. 하우스와 빅비트, 시부야케이와 같은 장르, 캐미컬 브라더스, 이디오테잎, 코넬리우스와 같은 뮤지션, “Rain Dance” 등에서 드러나는 재미있는 실험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할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인터넷 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키라라의 음악에 대한 반응 중 상당 부분이 청자와 뮤지션 간에 발생하는 감정적인 교감에 대한 고백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꽤 크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전자음악만큼 뮤지션과 청자 간 존재하는 감정적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장르를 찾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전자음악을 흔히 “기계적”이라는 이유로 멀리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인간의 목소리를 포함해 음반의 형태로 청자의 귀에 전달되는 음악의 대부분은 0과 1의 신호로 변환된 기계음이다. 오히려 전자음악은 상대적으로 조금 더 추상적이라는 특징을 지니며, 이 지점에서 성공적인 성취를 이루어내는 뮤지션의 경우 본인의 감정을 상대적으로 더 직관적이고 직접적으로 청자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추상화를 볼 때 아무런 단어를 떠올리지 않고, 혹은 현실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고도 화가의 마음속에 순간적으로 들어갈 수 있을 때가 있듯 말이다. 말도 안되는 허무맹랑한 궤변이지만, 아무튼 나의 이런 가정에 따르면 [Sarah]가 유독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키라라가 전자음악이 가진 추상성을 잘 이해하고 있고 소리의 분해와 조립의 과정을 통해 본인만의 특유한 질감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음반이고 고마운 음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