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ygenius | Boygenius EP

2018년 발매된 뛰어난 음반들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Boygenius EP]를 꼽고 싶다. 이 음반이 나의 ‘Top 5’ 음반 목록에서 제외된 단 하나의 이유는 정규음반이 아니라는 사실때문인데, 이 역시 지금 돌이켜보면 썩 합당한 이유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만큼 이 음반이 가진 파괴력은 엄청나다. 아마도 2018년에 발명된 모든 화음 중 가장 조화롭고 아름다운 화음을 간직한 음반일 것이고, 2018년에 등장한 모든 음반을 통털어 가장 자신만만한 음반이자 동시에 가장 젠체하지 않는 음반일 것이다.

줄리엔 베이커(Julien Baker)와 피비 브릿저스(Phoebe Bridgers), 루시 데커스(Lucy Dacus)는 필라델피아의 한 음악 페스티벌에서 만나 친해진 이후 함께 투어를 돌자는 약속을 한다. 이 약속은 이후 몇 번의 만남과 끝도 없이 이어진 이메일들, 그리고 긴 전화통화들을 거친 후 공동 음악작업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단 두 장의 음반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줄리엔 베이커 뿐 아니라 피비 브릿저스와 루시 데커스 역시 나름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뮤지션들이었으니, 음악계에서 이 프로젝트를 두고 “인디수퍼그룹”이라고 표현한 것도 그리 큰 무리는 아니다. NPR에서 진행하는 [Tiny Desk Concert] 등에서 몇 곡을 처음으로 선보인 후 발매된 EP는 평단과 팬들 모두에게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이후 이들은 처음의 약속처럼 – 하지만 이제는 자작곡과 함께 – 열심히 투어를 돌고 있다.

음반은 총 6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곡의 갯수 뿐 아니라 각 노래의 구성도 단촐하다. 인디 포크와 인디 록을 기반으로 하는 이들의 음악은 최소한의 악기만을 동반한 채 이들의 목소리에 꽤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다. 세 명이 각각의 이야기를 들려준 뒤 후렴구에서 하나로 합치되는 구조로 진행되는 곡들이 많은데, 이 지점에서 꽤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우선 세 명의 호흡이 놀라울 정도로 좋기 때문에 그 자체로 귀가 즐겁기 때문이고(마음껏 내지르는 베이커의 목소리가 요정처럼 속삭이는 브릿저스의 목소리와 어울릴 때의 황홀함이란!), 이들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생각보다 훨씬 묵직하고 설득력이 있어 귀 뿐 아니라 머리와 마음까지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음악을 한마디로 설명하라고 한다면, 여성 개인으로서의 정체성(identity)과 주체성(independence)의 확립이라고 말할 것이다. 타인을 통한, 혹은 타인을 거친 자신의 모습은 떳떳하지 못할 때가 많다. 오히려 내재적인 성찰과 반성, 그 이후 드러나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을 통해 보다 단단한 개인 뿐 아니라 세상과의 온전한 관계가 완성될 수 있다. 보이지니어스의 음악은 아주 아름다운 방식으로, 불편함과 충돌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도 그러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음반의 첫 곡 “Bite the Hand”는 타인에 휘둘리지 않는 사랑의 방식을 직접적으로 선언하고 있는데,

난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널 사랑할 수 없어
난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널 사랑할 수 없어
난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널 사랑할 수 없어

여기 너를 최대한 배려한 사랑이 있어
하지만 너는 내가 줄 수 없는 것을 원하고 있어
내 손은 묶여 있는데, 너의 손은 중력과도 같네


이러한 선언은 철저한 자기고백 위에서 조금 더 숭고한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다. ‘센 척’하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의 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은 더 나은 관계를 위한 첫걸음이다. 음반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 “Souvenir”는 줄리엔 베이커를 괴롭혀온 악몽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브릿저스가 “공동묘지”와 “병원”으로 받고, 이걸 다시 데커스가 “손에 박힌 가시”와 “새벽 수술”로 공명함으로써 공감과 연대의 서사를 써내려간다. 후렴구는 단지 “Ooh-ooh-ooh-ooh”일 뿐이지만, 충분히 아름답다. 폭력에 대한 절묘한 시선은 또 어떠한가. “Stay Down”에서 이들은 스스로를 “villian”이라 칭함으로써 폭력의 방향이 일방적일 수 없음을 역설한다. 이를 통해 폭력을 멈추기 위한 흐름 역시 일방적일 수 없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음반의 타이틀곡 격인 “Me & My Dog”은 그저 그 자체로 아름다운데,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앤드루 포터(Andrew Porter)의 초창기 단편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줄리엔 베이커의 음반들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 프로젝트 역시 베이커의 투어 일정을 확인하던 중 알게 되었다. 하지만 30분이 채 되지 않는 이 짧은 EP를 몇 번 반복해서 듣고 난 후 뒤늦게 나머지 두 명의 멤버인 피비 브릿저스와 루시 데커스의 음악세계 역시 베이커 못지 않게 아름답고 단단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마 나처럼 일부로부터 시작하여 보이지니어스의 세계를 확장시켜 나간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 과정 역시 즐겁고 유쾌한 경험이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잘 할 필요는 없다. 배우고 생각하며 조금씩 나아지면 되는 것이다. 보이지니어스는 나의 이런 생각에 왠지 동의해줄 것만 같은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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