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룬다티 로이: 작은 것들의 신

대학생들을 데리고 베트남으로 짧은 출장을 다녀왔다. (그들에겐 ‘여행’이었겠지만 나에게 그것은 너무나도 확실한 ‘business trip’이었다)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을 끝낼 수 있었다. 결혼기념일(12월 17일)을 맞이해서 즉흥적으로 계획한 부산여행 중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손목서가에 들려 샀던 이 책을 그 이후 한달 동안 질질 끈 나에게 넌지시 올해의 고구마상을 수여하고 싶다. 그 사이에 있었던 기말고사니, 서울여행이니, 논문이니, 출장이니 등등 자질구레한 핑계들을 댈 수 있겠지만, 그냥 이 책을 끝내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이 소설 한 권으로 아룬다티 로이가 부커상과 같은 곳에서 권위를 인정받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거나, 몇백만명이 이 책에 열광했다거나 하는 부가적인 정보때문에 이 책을 구입한 것은 아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책 제목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이 이랑의 음반 제목인줄로만 알고 책을 샀는데(하지만 그것은 [신의 놀이]였다..) 알고보니 넉살의 음반 제목이었다. 어쨌든,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 [작은 것들의 신]은 넉살의 그 아주 뛰어난 음반보다 훨씬 소화하기 힘든 빽빽함을 가지고 있다. 한 줄도 허투루 읽어내려갈 수 없게 만드는 엄격함을 느끼게 하는데, 꽤 두꺼운 책 두께에 숨막힐 정도의 밀도에도 불구하고 책을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흡인력 또한 대단한 편이다. 이 책이 뛰어난 이유는 첫째, 아룬다티 로이만의 독특한 문체가 이미 완벽하게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고, 둘째, 그 문체가 소설의 내용과 조응하며 형식과 내용이 완벽하게 어우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그 와중에 소설 속에 작가 자신을 거리낌 없이 투영하며 세상을 비추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로 치면 미하엘 하네케의 후기작들에서 보이는 작가적 솜씨가 이미 소설 데뷔작에 치밀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세간의 칭송도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나 개인에게 이 작가나 이 소설이 그렇게 크게 강렬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유는 먼저 역설적이게도 그 독특한 문체때문이다. 나는 이런 문체가 기본적으로 버겁다. 같은 인도 출신 작가 중에서 꼽자면 줌파 라히리 쪽이 나에게 더 맞는다. 많은 이들이 로이를 라히리와 비교하던데, 내 눈에는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계열의 작가로 보인다. 오히려 로이는 주노 디아즈와 같은 통통 튀는 문체로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작가들과 함께 묶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큰 것들’에 억압당하는 슬픈 사랑을 위로하기 위해 ‘작은 것들의 신’이 살포시 내려와 이들에게 아주 얄팍한 미소 한줄기를 선사해주고 가는 이 소설의 이야기 구조는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강력한 한 방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을 생각하게 만들고 느끼게 만드는 그 강렬함이 이 소설의 가치를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유지시켜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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