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현 작, 최용훈 연출 | 텍사스 고모

최근 한 공중파 채널에서 유쾌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전라도의 한 시골 마을에 사는 소녀 몇명이 의기투합하여 밴드를 만든 뒤 고군분투(?) 끝에 동네의 작은 축제에서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가진다는 내용이었는데, 정작 눈길을 끈 건 멤버 중 가장 밝고 적극적이던 한 소녀의 생활상이었다. 그 친구가 사는 집에는 엄마가 없었다. 그 소녀의 어머니는 근처 도시의 공장에서 합숙을 하며 일을 하고 있었고, 그로인해 이 모녀는 주말에 딱 하루 반나절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 소녀의 어머니는 필리핀 사람, 즉 결혼이주 여성이었다.

지방 시골 마을에 가면 두세집 건너 한 가정 꼴로 다문화가족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가 가진 기형적인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수입’되어온 이주 여성들의 삶은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의도적인 무관심’에 힘입어 주변적으로만 다루어져왔다. 이들에 대한 무관심의 뿌리는 어디일까. 몇십년 전, 주한미군과의 결혼을 통해 미국에서의 행복한 삶을 꿈꾸던 “양공주”들이 미국에서 겪은 불행과 고통의 이야기들은, 그들의 후손인 앤더슨 팍(Anderson .Paak)이나 하인즈 워드(Hines Ward) 등을 통해 불쑥 불쑥 한국 사회로 튀어나왔다. 그 당시 한국 여성들이 경험한 삶의 굴곡이 현대 한국에서 동남아시아 이주 여성들의 삶을 통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당시 피해자라면 피해자에 속했던 한국 사회가 이제는 가해자의 터전으로 기능하는, 역사의 아이러니한 수레바퀴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텍사스 고모]는 이 지점을 타격한다. “원조를 받는 국가에서 원조를 주는 국가로 변신한 유일한 국가”라는 자랑은, ‘이주 여성을 수출하던 국가에서 이주 여성을 받아들이는 국가’로의 전이를 인정한다는 말이기도 하고, 이걸 다른 말로 바꾸면 ‘고통을 수출하면서도 아무말 할 수 없었던 힘 없는 국가에서 개인의 고통을 수입하고 이를 노동력으로 치환하려 하는 힘 있는 국가’로의 변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인공 ‘텍사스 고모’의 조카가 목에 힘을 주고 이야기하는 “전국가적 위기상황”이란, 최소한의 인격적 존중조차 받지 못하고 부족한 농촌의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짐승처럼 부려지는 삶을 사는 결혼 이주여성이 30만명을 넘어선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대다수 한국인들의 무관심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푸른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간 고모는 돈 한푼 받지 못하고 옥수수밭과 목화밭에서 일만 하다 아이 셋을 남기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의정부 양말공장에서 일하며 살아오던 고모는 환갑이 가까운 자신의 오빠가  키르기스스탄에서 열아홉 여성을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 곳 고향에는 남겨진 아이들이 있다. 집을 떠난 부탄 출신 엄마와 고기 잡으러 배를 타고 떠난 아빠를 잊지 못해 밝은 곳만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소년, 시어머니에게 국자로 머리를 맞아가면서도 아들을 위해 버텼지만 끝끝내 시댁 식구들의 인격적 모독을 견디지 못하고 존재를 감추어버린 엄마를 기다리는 소년, 그리고 고모의 기구한 삶을 그대로 반복하려 하는 위기의 키르기스스탄 여성이 있다.  이 두 여성이 어떤 연대를 이루어낼 수 있을까, 를 기대했지만 연극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현실을 직시하는 결말을 통해 저릿한 충격을 안긴다. 이들에게 “모닝커피 한 잔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수영장 딸린 주택”과 같은 판타지는 없다. 하고 싶은 공부는 꿈도 꾸지 못하고, 이 일이 끝나면 저 일로 끌려 다니며 노동력을 제공하고 남자가 원하는 수 만큼의 아이를 낳기 위해 자궁을 제공하는 임무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 안타까움이 배우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날 때, 바라보는 관객 역시 무너져내릴 수 밖에 없다. 

좋은 극본과 좋은 연출, 그리고 뛰어난 연기와 사려깊은 무대연출을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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