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교수

두번째 학기임에도 결코 나아지는 법이 없이 점점 더 바빠져만 간다. 강의 준비와 내 논문 작성에만 시간을 쏟아도 모자랄 판에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계속 튀어나오는 점이 제일 성가시다. 대학원생들의 논문 지도나 학부생들의 진로 상담은 당연한 의무라 생각하지만, 각종 연구사업을 따오기 위해 제안서를 작성하는 일이나 학내외 정치를 위해 동원되는 일은 아무리 적응해보려고 해도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힘이 들어 몸과 마음이 지쳐갈 때 아빠, 아버지 생각이 자주 난다. 그 분은 대체 어떻게 이런 위기를 수도 없이 잘 넘길 수 있었을까? 그 분도 나처럼 힘들었을까?

아주 어린 나이부터 나는 아버지의 직업이 교수, 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 직업이 무엇을 하는 일인지 제대로 알기 전부터 어른들이 물어볼 때마다 또박또박 “교수”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교수라는 직업이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인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익숙해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훨씬 지난 시점부터다. 아버지는 주로 집에서 일을 하셨기 때문에 내 눈에 비친 아버지는 가족으로서의 아버지와 공적인 직업인으로서의 아버지의 이미지가 항상 겹쳐져 있었다. 어머니와 즐겁게 수다를 떨다가도 갑자기 책상 앞에 앉아 한참동안 책만 바라보시던 모습, 마당에서 잡초를 뽑다가 퍼뜩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갑자기 방으로 돌아와 이것저것 찾아보시던 보습, 제자들을 집으로 불러 왁자지껄하게 고기를 구워먹다가 문득 역사 이야기로 빠지면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쉬지 않고 수다를 이어 나가시던 모습. 나에게 아버지는 늘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교수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 두 정체성이 지금도 잘 분리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아는 교수로서의 아버지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은 또 한참 뒤의 일이다. 인터넷이 발달한 세상에서 검색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 분이 그동안 내가 생각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대단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분이 쓰신 책이 한국과 중국 사학계에서 큰 논란을 일으키고, 더 나아가 어떤 유의미한 영향을 지속적으로 끼치게 되었음을 발견했을 때, 나는 자랑스럽고 뿌듯하기 보다는 당혹스럽고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상처를 받지 않았을지 걱정이 되는 마음이 더 컸는데, 이런걸 보면 역시 가족은 가족이지 않나 싶다. 비전공자로서 깊은 수준에서 이해할 수 없는 나는 그저 방관자였을 뿐 결코 큰 힘이 되어드릴 수 없었을텐데, 아버지의 생각에 깊이 동의하는 다른 역사학자들의 지지 선언을 볼 때마다 뭉클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그 분들이 아버지에게 있어 또다른 가족이자 형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젊은 나이에 교수로 임용되어 무사히 정년퇴임하시던 순간까지, 위와 같은 격랑이 한두번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고통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집에서 내색 한번 하지 않으시고 무던하게 그 긴 세월을 넘긴 분의 단단한 마음의 굳기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나는 어제도 아내에게 징징거렸고, 그걸로도 채 만족하지 못해 전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또 징징거렸다. 40년 가까이 교수의 아내로 살아오신 엄마는 “사치스럽다”라는 일침을 날리셨다. 학기중에 바쁜 일이 계속 터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고, 그렇게 바쁜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꾸지람이 나의 정신을 버쩍 들게 했다. 대학원생들의 논문을 읽고 코멘트를 주는 일, 연구실적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지만 한푼의 사업비라도 더 타와서 학부생들에게 좋은 경험 하게 해주는 일,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지식을 활용하여 코멘트를 드리는 일 등등, 내 레쥬메에 기록될 연구실적과 하등 상관없는 많은 임무들이 주변에 산적해 있다. 이걸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저 억울하고 답답할 뿐이다.

나는 아버지처럼 훌륭한 학자가 아니다. 학계의 변방에 억지로 매달려 기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거인은 되지 못한 채 거인의 어깨에 숨어 세상을 바라보는 척 흉내만 내고 있는 셈이다. 남들보다 배로 노력해서 따라잡으려고 해도 뱁새가 다리 찢어지는 격인데, 다른 업무들때문에 공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어서 잠시 가슴이 답답했나보다. 별 시덥지도 않은 가치도 없어보이는 논문을 써서 학회 자리나 채워주려는 시도에 스스로 화가 났나보다. 아버지도 내 나이 때 쯤 비슷한 생각을 하셨을까. 왠지 아닐 것만 같아서, 왠지 그 분은 그 시절에도 분명한 확신을 가지셨을 것만 같아서 한 편으로 분하고 부럽고, 다른 한 편으로 기쁘고 뭉클하다. 학자로서 분하고, 아들로서 기쁘다. 이 두 감정이 쉽게 분리가 되지 않는다.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 내 인생에서 가장 가까이 존재할 때, 그 열패감과 안도감은 결코 지워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만 같다. 아마도 평생 이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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