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켈만 | 명예

명예
내 독서습관 중 별로 좋지 못한 부분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한 권의 책을 끝내지 못하면 쉽게 다른 책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머뭇거림이다. 책을 읽다 중간에 멈추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 탓에 쉽게 진도를 빼지 못하는 어려운 책을 만나면 전체적인 독서 계획이 한꺼번에 꼬여버린다. 올 여름 나를 가로막은 책은 대런 에이스모글루(Daron Acemoglu)의 [Why Nations Fail]이었다. (최근 한 학생에게 전해 듣기로 이 책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로도 번역이 되어 있다고 한다) 거의 대부분의 주요한 내용은 처음 몇 장에 다 나옴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이야기꾼인 저자의 엄청난 필력때문에 계속 책을 읽어내려가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을 느꼈는데, 문제는 학기가 시작하면서 진득히 앉아 영어로 쓰인 책을 집중해서 읽을 정도의 여유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학기가 시작한 후 지금까지 단 한권의 책도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나는 [Why Nations Fail]을 끝까지 읽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말인즉슨 이 블로그에도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을 쓰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스스로 정한 굵직한 원칙 중 하나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책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것) 책 한 권을 다 읽지 못했다는 열패감에 사로잡혀 이번에는 최대한 얇은 책을 읽기로 결심했고, 책장에 꽂혀있는 빳빳한 책들 중 가장 얇아보이는 책을 골랐는데 그 것이 바로 독일작가 다니엘 켈만의 [명예]였다.

켈만 역시 타고난 이야기꾼인 것처럼 보인다. [명예]는 표지를 젖힌 후 한 번도 쉬지 않고 끝까지 읽어내려갈 수 밖에 없는 매력을 가진 소설이다. 형식적으로는 총 아홉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처럼 보이지만, 각각의 단편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조금 특이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 단편에 등장한 주인공이 다른 작품에서는 스쳐지나가는 인물로 다시 나오고, 한 작품의 주인공이 다른 작품을 창작하는 창작자가 되어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탄생시킨다. 어떤 작품에서는 원 저자(켈만)가 창조한 작품 속 작가와 그 작가가 창조한 작품의 인물이 만나 대화하기도 한다. 이처럼 교묘하게 비틀어놓은 플롯과 서브플롯의 향연 속에서 아홉 편의 단편은 하나의 작품으로 재탄생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 혹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매개체는 휴대폰과 인터넷, 편지와 같은 비대면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아홉편의 단편 중 꽤 많은 작품이 주인공의 자아가 함몰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익명성’을 담보로 한 비대면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단편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혹은 도구적 목적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주제로 기능하는 측면이 강하다.

소설의 처음을 장식하는 ⌈목소리⌋에서 주인공 에블링은 ‘랄프’라는 사람과 똑같은 전화번호를 가지게 되고, 어느날부터 자신을 ‘랄프’로 인식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전화를 받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에블링은 자신을 랄프처럼 인식하기 시작한다. 다른 작품 ⌈탈출구⌋는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게 된 ‘진짜’ 랄프에 대해 다룬다. 유명한 배우였던 랄프는 더이상 자신을 찾지 않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 진짜 배우 랄프가 아닌 그를 흉내내는 가짜 배우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동양⌋의 주인공 마리아는 휴대폰 배터리를 챙겨가지 않은 사소한 실수로 인해 동양의 한 나라에서 순식간에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사건을 마주하게 되고, ⌈토론에 글 올리기⌋의 주인공 몰비츠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행위가 유일한 존재의 가치인 것처럼 여기며 익명성에 집착한다. 이처럼 [명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현실’과 ‘형식’ 사이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잃어버린 듯한 착각에 공통적으로 빠진다. 그리고 이러한 인물들의 모습은 진짜 현실 속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소셜네트워크의 네모난 화면 안에 예쁜 모습을 담기 위해 그 네모 밖의 추악한 것들을 감추려고 하는 우리들,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주인공에 투표하며 화면 속 밝게 웃고 있는 아이돌의 얼굴에 자신을 투영하는 우리들, 현실에서 직접 마주치는 이름없는 타인에게 비소 한 줌 내어주지 않으면서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다니엘 켈만이 [명예]에서 그리고자 했던 모습일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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