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위한 나라

세종시를 조금씩 더 좋아하게 되는 이유로 여러가지를 꼽을 수 있을텐데, 그 중 하나는 이 도시가 아이들을 중심으로 설계된 동네라는 점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인 한국에서 아이가 중심이 된 도시를 그리 많이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을 생각해볼 때, 반가움을 넘어 고마움까지 느끼게 만드는 작은 배려들을 도시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설계자가 고려한 여러가지 장치들을 이 곳에 실제로 거주하는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고 무시해버린다면 그것처럼 슬픈 일도 없겠지만, 서울과 같은 기존의 대도시들이 겪고 있는 것처럼 타인과의 불쾌한 경쟁을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환경으로까지 악화되지만 않는다면 최소한의 배려는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을 가지고 있게 된다. 그런 작은 기대들이 이웃을 향해 한번은 더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마음 속 작은 여유를 만드는 원천이 된다. 타인을 반드시 이기지 않아도, 이웃을 반드시 미워하지 않아도 내 가족과 내 아이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조금씩 더 강해질때, 비로소 ‘공동체’의 한국적인 재해석이 가능해질런지도 모른다.

말은 이렇게 거창하게 하지만, 나는 오늘도 공동체의식을 지켜내기 위한 위기를 한차례 넘겼다. 아내가 잠시 한국을 떠난 이번 주말 내내 혼자 집을 지키고 있다. 집에 혼자 있을 때에는 영화도, TV프로그램도 잘 보지 않고 심지어 음악도 잘 듣지 않는다. 침묵이 흐르는 넓은 집에 하루종일 혼자 있다보면 작은 소음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기 마련인데, 오늘따라 유독 그동안 잘 참아왔던 윗층으로부터의 층간 소음에 온 정신을 사로잡혀버렸다. 어린 아이가 쿵쾅쿵쾅 뛰어다니는 소리에 스트레스를 받아본 적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는데 오늘은 그만 육체적인 고통, 즉 두통이 오고 말았던 것이다. 책상 앞에 앉아 이것저것 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에게 머리와 관련된 고통은 꽤나 성가신 존재다. 늦은 저녁까지 쉬지 않고 뛰어다니는 윗층의 어린 친구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는 와중에 그만 과연 나는 오늘 밤까지 이 소음을 참아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뇌에 빠져버렸다. 마침내 내가 그동안 그렇게 많이 들어왔던, 윗층 계단을 올라가서 초인종을 누르는 꼰대 아저씨가 되어 버리는 것인가 싶어 두려움까지 밀려왔다.

일단 저녁미사를 보고 와서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이십몇층부터 내려오던 엘리베이터가 윗층에서 멈추더니, 떠들썩한 아이의 목소리와 그 아이를 진정시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함께 들렸다. 딱 봐도 윗층 식구들이었다. 바로 밑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다시 멈추었을 때, 떠들썩했던 엘리베이터에서 순간적으로 묘한 침묵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공룡을 좋아하는 아이와 함께하는 윗층 가족과 하필이면 오늘따라 예민한 아랫층 남자는 그렇게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첫번째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공룡을 두 손에 들고 있는 세살에서 네살 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의 옆에는 역시 공룡 하나를 들고 말상대를 열심히 해주고 있는 젊은 여자와 그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휴대폰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공룡을 들고 좁은 엘리베이터의 이구석과 저구석을 열심히 뛰어다니는 그 아이와, 혈기왕성한 아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진땀 흘리는 여자, 그리고 휴대폰만 열심히 보고 있던 남자로 구성된 그 가족을 보고 있자니, 오늘 하루종일 나를 괴롭힌 두통 따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의 두통은 그 아이가 오늘 윗층을 뛰어다니며 확장시켰을 공룡과의 대혈투 이야기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그 어린 친구의 세계가 큰 장애물 없이 계속 성장해나가기를 바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 가족을 다시 만난 것은 불과 10여분 후, 성당에서였다. 그 가족도 같은 성당 식구였던 것인데, 거기서도 여자의 사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아랫층으로의 소음전파에 대한 걱정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스트레스가 그 여자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그녀의 표정에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미사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휴대폰만을 보던(과연 그 휴대폰 안에는 무엇이 담겨져 있는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남자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는 다행히 큰 소음을 내지 않고 지겹고도 지루한 한시간 여의 시간을 견디어냈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을 다시 정리했다. 이 도시는 아이들을 위한 곳이다. 하지만 이 곳이 여성을 위한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설계자의 배려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필요해보였다. 나는 두통을 희생했지만, 최소한 그것보다는 더 큰 희생과 노력이 필요해보였다. 거의 확실하게 그렇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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