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나 노르베리-호지 | 행복의 경제학

행복의경제학
올해 초부터 학교에서 경제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지난 학기에는 경제학의 기본원리와 무역/통상정책의 여러 갈래에 대해 강의했고, 이번 학기에는 국제무역의 이론적 토대와 국제금융의 기본원리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내가 강의하는 내용의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시장은 가장 효율적인 경제시스템이며 자유무역은 모두를 이롭게 할 것이다. 이건 내가 주장하는 소수의견이 아니라, 내가 속한 경제학의 세계에서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여지는 명제다. 이 명제는 누군가에게 ‘신자유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것이며,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교과서에 나오는 뻔하고 흔한 말, 즉 지극히 당연한 자연법칙처럼 받아들여질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불평등을 가속화시키고 극소수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중력의 법칙과도 같은 자연스러운 사회적 규칙으로 이해된다는 것이 일견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나의 명제를 이토록 극명하게 엇갈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이 것 외에도 또 존재하는지 궁금할 정도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오래된 미래]를 통해 국제무역과 세계화가 평화로웠던 지역경제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실증적으로 증명한 바 있다. [행복의 경제학]은 세계화에 반대하고 지역화를 추구하는 노르베리-호지의 사상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책이다. 그녀가 제작한 동명의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요약하고 그녀가 기고한 여러 칼럼의 내용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완성된 책이어서 전체적인 완성도는 떨어지는 편이지만, 노르베리-호지의 세계화에 대한 뚜렷한 반대 입장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이 책에서 세계화를 거부하고 지역화를 추구하자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치고 있으며, 그 근거로 세계화의 경제적 효과는 과장되어 있으며 부정적 영향은 과소평가되어 있음을 다양한 수치로 확인시켜 주고 있다. 세계화를 진전시키는 ‘주범’으로 IMF와 WTO 등 국제금융과 국제무역을 총괄하는 국제기구를 지목하며, GDP 등 지역사회의 ‘행복지수’를 측정할 수 있는 계량지표를 배척하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지표를 개발하자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어찌 보면 상당히 과격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의 내용은 사실 세계화에 반대하는 학자들의 의견을 잘 모아놓은 서베이 보고서이기도 하다. 즉, 노르베리-호지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반대하는 비주류 경제학자들의 주장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오래된 미래] 단 한 권으로 내 머릿속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이름으로 자리잡았다. 이 책에서 그녀가 설파했던 지역화, 혹은 지역주의는 참 매력적이고 아름다워 보이는 개념이었다. 그녀의 주장에 영향을 받아 지금까지도 동네서점, 동네커피숍, 동네빵집 등 다양한 형태로 지역성(locality)을 담보하는 상업시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행복의 경제학]을 읽으며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노르베리-호지가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수단으로 비판하는 그 주류 경제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 단 한번도 특정 이데올로기를 위해 살아왔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주류 경제학이 물리학처럼 일반적인 자연법칙이 인간사회에도 깃들어 있다고 믿는, 순수학문에 가까운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주류 경제학의 기본 가정 중 하나인 인간의 이기심때문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가정은, 이 사회의 여러 병폐들의 원인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고 쿨하게 인정하며 출발하는 지점으로 기능한다. 주류 경제학이 논리적으로 엄밀한 전개과정 속에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인간의 의지’라는 치트키의 사용 가능성 자체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노르베리-호지처럼 세계화에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에 결여되어 있는 치명적인 약점 역시 이 부분에 있다. 이들은 사회가 인간의 선한 의지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대안적인 지역주의적 경제시스템이 윤리적으로, 그리고 생태경제학적으로 ‘옳은’ 명제로 판명난다면 사람들이 이 명제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이데올로기다. 주류 경제학은 ‘사람들은 ~해야 한다’와 같은 규범적인(normative) 주장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학문이다. 주류 경제학이 특정 이데올로기에 봉사한다는 노르베리-호지의 주장이 편견으로 판명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의 선한 의지가 반드시 존재하며, 이 선한 의지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저자의 속박된 시선에서부터 출발하는 셈이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이기심이 나쁜 것일까? 주류경제학은 그 반대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인구가 증가하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멜서스의 우울한(dismal) 경제학을 물리치고- 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어했던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며, 영국이 다른 나라들을 제치고 산업혁명의 주역이 되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발명 특허권을 폭넓게 보장하여 떼돈을 벌고 싶어하는 인간의 이기심을 충실히 자극했던 국가 시스템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이기심은 열등한 신체조건을 가진 인간이라는 종(種)을 지구에서 가장 우등한 존재로 탈바꿈시킨 주된 인자일 수 있다. 이기심에 의해 인류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유전적 형질은 선한 의지에 의해 결코 제거될 수 없다. 인간이라는 종이 존재하는 한, 이들은 끊임없이 더 높은 수준의 물질적 쾌락을 탐할 것이며, 국가 등에 의해 강제로 제재당하기 전까지 자신보다 조금 더 약한 존재를 약탈하는 것에 몰두할 것이다. 그 부작용 중 하나가 지나친 세계화, 혹은 지역사회의 몰락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리 틀린 주장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세계화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최소한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노르베리-호지는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경덕 | 처음 만나는 북유럽 신화

북유럽신화
시작은 운전연습이었다. 세종시는 서울과 달리 자가운전이 필수인 곳이기 때문에, 서울에서 운전을 전혀 하지 않았던 아내도 운전을 새로 배워야 했다. 꽤 잘 가르친다는 선생님을 소개 받아 여름방학 중 며칠 개인교습을 받았다. 아내가 운전연습을 받는 동안 혼자 집을 지키고 있자니 조금 심심해졌다. 그러던 와중 서랍정리가 하고 싶어졌고, 텔레비전이 놓인 TV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쪽 구석에서 플레이스테이션이 나왔다. 1년에 몇 번 하지 않아 구석에 처박아놓은 게임기였다. 갑자기 게임이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게임을 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우리 부부는 자연스럽게 각종 게임을 하나씩 마스터 해나가기 시작했다.

이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친한 형 부부가 세종시를 방문했다. 그는 게임의 고수였다. 두어개 정도의 게임을 추천해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마침 여름맞이 할인기간이어서 거의 반값에 좋은 게임들을 구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 두 게임 중 먼저 시작한 게임이 바로 [갓 오브 워 4]였다. 이 게임은 스파르탄에서 건너온 한 무시무시하고 무뚝뚝한 사나이가 아들과 함께 고대 북유럽 신화 속 세계를 탐험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컨트롤러의 조작능력이 중요한 액션게임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구성이 탄탄해서 한 편의 영화를 보듯 몰입해서 하느라 며칠 밤을 뜬 눈으로 보내야 했다. 그렇게 무사히(물론 ‘무사히’는 아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죽음’을 맞이했지만, 게임 속 주인공은 그 때마다 불굴의 의지로 다시 부활하여 나로 하여금 계속 전진하게 만들었다) 엔딩을 보았고, ‘파밍(farming)’이라고 불리우는 엔딩 후 플레이는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게임창을 닫았다. 하지만 마음 속 어딘가에 아쉬움이 남아 있음을 발견했다.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다보면, 등장인물들이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하여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각종 신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알 수 없는 깊은 소외감을 느껴야했다. 나는 북유럽 신화를 잘 모르기 때문에! 왜 재미있어 보이는 이야기를 자기네들끼리만 저리도 열심히 하는가, 왜 나에게 그 신화속 세계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 것이지? 심통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택하게 된 책, [처음 만나는 북유럽 신화]는 나처럼 고대 북유럽 신화를 잘 모르는 초심자를 위한 친절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각종 신화에 대한 전문가이자 문화인류학자로서 세상을 조망하는 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고대 북유럽 신화의 세계관 및 주요 등장인물을 차분하고 정갈하게 전달하고 있다.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토르의 무적 망치, 묠니르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부터 한쪽 눈을 잃으면서까지 지혜를 갈구했던 최고신 오딘, 사고를 일으키지만 미워할 수 없는 장난꾸러기이자 기어코 그 장난끼를 주체하지 못해 신들의 세계를 멸망시키고야 마는 로키의 이야기까지, 개성 넘치는 신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200쪽 남짓한 분량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읽어내려가게 된다. 나처럼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비해 북유럽 신화에 대한 지식이 짧은 사람이라면, 혹은 [토르]나 [반지의 제왕]을 즐겁게 보았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메타포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답답했던 사람이라면 한번쯤 가볍게 읽어볼만한 책이다.

다니엘 켈만 | 명예

명예
내 독서습관 중 별로 좋지 못한 부분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한 권의 책을 끝내지 못하면 쉽게 다른 책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머뭇거림이다. 책을 읽다 중간에 멈추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 탓에 쉽게 진도를 빼지 못하는 어려운 책을 만나면 전체적인 독서 계획이 한꺼번에 꼬여버린다. 올 여름 나를 가로막은 책은 대런 에이스모글루(Daron Acemoglu)의 [Why Nations Fail]이었다. (최근 한 학생에게 전해 듣기로 이 책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로도 번역이 되어 있다고 한다) 거의 대부분의 주요한 내용은 처음 몇 장에 다 나옴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이야기꾼인 저자의 엄청난 필력때문에 계속 책을 읽어내려가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을 느꼈는데, 문제는 학기가 시작하면서 진득히 앉아 영어로 쓰인 책을 집중해서 읽을 정도의 여유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학기가 시작한 후 지금까지 단 한권의 책도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나는 [Why Nations Fail]을 끝까지 읽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말인즉슨 이 블로그에도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을 쓰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스스로 정한 굵직한 원칙 중 하나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책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것) 책 한 권을 다 읽지 못했다는 열패감에 사로잡혀 이번에는 최대한 얇은 책을 읽기로 결심했고, 책장에 꽂혀있는 빳빳한 책들 중 가장 얇아보이는 책을 골랐는데 그 것이 바로 독일작가 다니엘 켈만의 [명예]였다.

켈만 역시 타고난 이야기꾼인 것처럼 보인다. [명예]는 표지를 젖힌 후 한 번도 쉬지 않고 끝까지 읽어내려갈 수 밖에 없는 매력을 가진 소설이다. 형식적으로는 총 아홉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처럼 보이지만, 각각의 단편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조금 특이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 단편에 등장한 주인공이 다른 작품에서는 스쳐지나가는 인물로 다시 나오고, 한 작품의 주인공이 다른 작품을 창작하는 창작자가 되어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탄생시킨다. 어떤 작품에서는 원 저자(켈만)가 창조한 작품 속 작가와 그 작가가 창조한 작품의 인물이 만나 대화하기도 한다. 이처럼 교묘하게 비틀어놓은 플롯과 서브플롯의 향연 속에서 아홉 편의 단편은 하나의 작품으로 재탄생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 혹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매개체는 휴대폰과 인터넷, 편지와 같은 비대면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아홉편의 단편 중 꽤 많은 작품이 주인공의 자아가 함몰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익명성’을 담보로 한 비대면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단편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혹은 도구적 목적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주제로 기능하는 측면이 강하다.

소설의 처음을 장식하는 ⌈목소리⌋에서 주인공 에블링은 ‘랄프’라는 사람과 똑같은 전화번호를 가지게 되고, 어느날부터 자신을 ‘랄프’로 인식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전화를 받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에블링은 자신을 랄프처럼 인식하기 시작한다. 다른 작품 ⌈탈출구⌋는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게 된 ‘진짜’ 랄프에 대해 다룬다. 유명한 배우였던 랄프는 더이상 자신을 찾지 않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 진짜 배우 랄프가 아닌 그를 흉내내는 가짜 배우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동양⌋의 주인공 마리아는 휴대폰 배터리를 챙겨가지 않은 사소한 실수로 인해 동양의 한 나라에서 순식간에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사건을 마주하게 되고, ⌈토론에 글 올리기⌋의 주인공 몰비츠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행위가 유일한 존재의 가치인 것처럼 여기며 익명성에 집착한다. 이처럼 [명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현실’과 ‘형식’ 사이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잃어버린 듯한 착각에 공통적으로 빠진다. 그리고 이러한 인물들의 모습은 진짜 현실 속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소셜네트워크의 네모난 화면 안에 예쁜 모습을 담기 위해 그 네모 밖의 추악한 것들을 감추려고 하는 우리들,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주인공에 투표하며 화면 속 밝게 웃고 있는 아이돌의 얼굴에 자신을 투영하는 우리들, 현실에서 직접 마주치는 이름없는 타인에게 비소 한 줌 내어주지 않으면서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다니엘 켈만이 [명예]에서 그리고자 했던 모습일런지도 모른다.

 

 

 

아이를 위한 나라

세종시를 조금씩 더 좋아하게 되는 이유로 여러가지를 꼽을 수 있을텐데, 그 중 하나는 이 도시가 아이들을 중심으로 설계된 동네라는 점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인 한국에서 아이가 중심이 된 도시를 그리 많이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을 생각해볼 때, 반가움을 넘어 고마움까지 느끼게 만드는 작은 배려들을 도시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설계자가 고려한 여러가지 장치들을 이 곳에 실제로 거주하는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고 무시해버린다면 그것처럼 슬픈 일도 없겠지만, 서울과 같은 기존의 대도시들이 겪고 있는 것처럼 타인과의 불쾌한 경쟁을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환경으로까지 악화되지만 않는다면 최소한의 배려는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을 가지고 있게 된다. 그런 작은 기대들이 이웃을 향해 한번은 더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마음 속 작은 여유를 만드는 원천이 된다. 타인을 반드시 이기지 않아도, 이웃을 반드시 미워하지 않아도 내 가족과 내 아이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조금씩 더 강해질때, 비로소 ‘공동체’의 한국적인 재해석이 가능해질런지도 모른다.

말은 이렇게 거창하게 하지만, 나는 오늘도 공동체의식을 지켜내기 위한 위기를 한차례 넘겼다. 아내가 잠시 한국을 떠난 이번 주말 내내 혼자 집을 지키고 있다. 집에 혼자 있을 때에는 영화도, TV프로그램도 잘 보지 않고 심지어 음악도 잘 듣지 않는다. 침묵이 흐르는 넓은 집에 하루종일 혼자 있다보면 작은 소음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기 마련인데, 오늘따라 유독 그동안 잘 참아왔던 윗층으로부터의 층간 소음에 온 정신을 사로잡혀버렸다. 어린 아이가 쿵쾅쿵쾅 뛰어다니는 소리에 스트레스를 받아본 적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는데 오늘은 그만 육체적인 고통, 즉 두통이 오고 말았던 것이다. 책상 앞에 앉아 이것저것 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에게 머리와 관련된 고통은 꽤나 성가신 존재다. 늦은 저녁까지 쉬지 않고 뛰어다니는 윗층의 어린 친구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는 와중에 그만 과연 나는 오늘 밤까지 이 소음을 참아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뇌에 빠져버렸다. 마침내 내가 그동안 그렇게 많이 들어왔던, 윗층 계단을 올라가서 초인종을 누르는 꼰대 아저씨가 되어 버리는 것인가 싶어 두려움까지 밀려왔다.

일단 저녁미사를 보고 와서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이십몇층부터 내려오던 엘리베이터가 윗층에서 멈추더니, 떠들썩한 아이의 목소리와 그 아이를 진정시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함께 들렸다. 딱 봐도 윗층 식구들이었다. 바로 밑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다시 멈추었을 때, 떠들썩했던 엘리베이터에서 순간적으로 묘한 침묵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공룡을 좋아하는 아이와 함께하는 윗층 가족과 하필이면 오늘따라 예민한 아랫층 남자는 그렇게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첫번째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공룡을 두 손에 들고 있는 세살에서 네살 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의 옆에는 역시 공룡 하나를 들고 말상대를 열심히 해주고 있는 젊은 여자와 그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휴대폰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공룡을 들고 좁은 엘리베이터의 이구석과 저구석을 열심히 뛰어다니는 그 아이와, 혈기왕성한 아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진땀 흘리는 여자, 그리고 휴대폰만 열심히 보고 있던 남자로 구성된 그 가족을 보고 있자니, 오늘 하루종일 나를 괴롭힌 두통 따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의 두통은 그 아이가 오늘 윗층을 뛰어다니며 확장시켰을 공룡과의 대혈투 이야기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그 어린 친구의 세계가 큰 장애물 없이 계속 성장해나가기를 바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 가족을 다시 만난 것은 불과 10여분 후, 성당에서였다. 그 가족도 같은 성당 식구였던 것인데, 거기서도 여자의 사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아랫층으로의 소음전파에 대한 걱정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스트레스가 그 여자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그녀의 표정에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미사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휴대폰만을 보던(과연 그 휴대폰 안에는 무엇이 담겨져 있는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남자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는 다행히 큰 소음을 내지 않고 지겹고도 지루한 한시간 여의 시간을 견디어냈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을 다시 정리했다. 이 도시는 아이들을 위한 곳이다. 하지만 이 곳이 여성을 위한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설계자의 배려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필요해보였다. 나는 두통을 희생했지만, 최소한 그것보다는 더 큰 희생과 노력이 필요해보였다. 거의 확실하게 그렇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