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교자 | 칼국수와 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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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고 시절을 모두 한 동네에서 보냈다. 세 개의 산과 세 개의 터널로 둘러싸인 작은 동네였는데, 한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주택가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빌라촌이 담벼락를 맞대로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어린 시절 놀러갔던 ‘친구네 집’은 반지하 단칸방부터 삼층짜리 대저택까지 그 간극이 무척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놀러온 아들의 친구를 위해 자리를 비켜줄 공간조차 없어 좁은 거실에서 친구의 어머니와 등을 맞대고 있었던 기억도 있고, 집의 한 층 전체가 그 친구에게 할애되어 방 안에서 탁구를 치고 대형 스크린으로 게임을 즐겼던 기억도 있다. 어린 나이 마냥 철이 없었기에 느끼지 못했을 삶의 노곤한 축적과정이 지금 돌이켜 보니 조금 묵직하게 와닿는다.

그 동네에 있는 성당은 주차공간이 무척 협소했다. 성당에 들어가고 나오는 과정에서 조금 많은 인내심을 요할 때가 종종 발생했다. 다른 말로 하면, 대구 출신인 나의 아버지의 성미에는 잘 맞지 않았던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름의 명확한 주차 관련 규칙을 가진 명동성당에 가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이 살던 동네와 명동성당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 매주 일요일 아침 세 개의 산와 세 개의 터널로 둘러싸인 조용한 동네를 벗어나 다다른 광화문과 종로, 시청과 같은 큼지막한 세계는 내가 기억하는 ‘고향’의 첫번째 이미지로 지금까지 각인되어 있다. 그 곳에서 미사를 드리면 성당에서 두시간짜리 주차권을 끊어주었다. 우리는 미사를 위해 쓰인 한시간을 제외하고 남은 한시간을 명동교자에서 칼국수를 먹는 일에 할애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거의 매주 일요일 점심으로 명동교자에서 칼국수를 먹었다. 내 나이 열살, 열두살, 아니 아홉살, 혹은 열한살일 수도 있는 그 무렵의 이야기다.

지금도 부암동은 세 개의 산과 세 개의 터널로 둘러싸여있다. 그 당시에는 밭을 가는 소가 있던 그 동네는(정말이다. 부암동 골목길로 올라가면 밭과 소가 있었다) 이제 조금은 개발이 더 되었지만, 여전히 서울의 다른 지역과 물리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분리된 어떤 이질감이 남아있다. “서촌”이라 불리우는 효자동 일대와도 다른,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이 살아남아 유지되는 것이다. 명동 일대도 마찬가지다. 명동성당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지하주차장이 새로 만들어졌고 조금 더 넓어졌지만, 여전히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면 두시간짜리 주차권을 준다. 그 주차권을 들고 명동성당 아래로 조금 내려가다 보면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골목들이 나오고, 첫번째 골목 왼쪽으로 들어가자마자 명동교자가 나온다.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직원들의 능숙한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을 때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명동교자에 가면 항상 칼국수를 먹는다. 머릿수가 좀 많으면 만두까지 먹을 생각을 한다. 칼국수의 가격과 양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이 곳에 오면 거의 아무런 고민 없이 칼국수를 선택하게 된다. 이 곳에서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춧가루로 범적이 된 매운 김치도, 고슬고슬한 공기밥 한그릇도 이 곳만이 가진 독특한 색깔이다. 전국의 수많은 칼국수집이 이 가게의 이름을 훔쳤지만, 그 맛까지 훔치지는 못했다. 칼국수라는 단순한 메뉴 하나로 1965년부터 지금까지 50년 이상을 한 장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이미 존경을 받아 마땅한 성취다. 그런 의미에서나는 명동교자가 서울을, 더 나아가 한국을 대표하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식당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외국에서 요리를 배워 왔거나 미디어에 노출되어 유명세를 탄 많은 요리사들이 신선하고 새로운, 그리고 비싼 메뉴로 소비자를 유혹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 어떤 고급스러운 식당도 명동교자가 쌓아올린 이 유산에 비할바는 되지 않는다. 그 어떤 고급스러운 음식도 명동교자만큼 서울의 냄새를, 한국의 공기를, 명동의 촉감을 잘 간직하고 있지는 못하다. 직원들이 선사하는 친절함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딱 적절한 수준의 미소를 간직하고 있다. 빠르게, 하지만 불편하지 않게 일을 처리하면서도 넉넉한 인심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식당은 사실 찾아보면 그리 많지 않다.

아내는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기 전 6개월동안 그곳에서 교리공부를 해야 했다. 매주 금요일, 퇴근 후 추운 겨울 날씨를 뚫고  명동에 도착하면 허겁지겁 명동교자에 들러 칼국수를 흡입하고 7시까지 아내를 들여보낸 뒤 근처 커피숍에서 숨을 돌리며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세례를 받고, 축하를 위해 모인 부모님과 누나, 그리고 두 조카와 함께 다시 명동교자에 갔다. 그 때에는 작은 방을 빌려 시끌벅적하게 칼국수와 만두를 나누어 먹었다. 그 순간 나는 대단히 큰 기쁨을 느꼈다. 종교적인 이유와 무관하게, 내가 사랑하는 나의 혈육이 한 자리에 모여 기쁨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리고 그 장소가 20년 넘게 줄기차게 찾아온 오래된 식당이라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내가 자식을 낳는다면, 아마도 나는 아내와 함께 그들을 이끌고 이 곳에 다시 올 것이다.

나와 같은 경험과 기억을 간직한 사람이 무척 많을 것이다. 달동네에 사는 노인부터 평창동에 사는 박사장님까지 몇천원의 돈으로 누릴 수 있는 음식이 있고, 그 음식을 몇십년동안 변함없이 즐기며 쌓아올린 추억이 있다. 그 맛과 그 추억은 입구에서부터 줄을 서는 모두에게 공평하다. 이태원이나 서래마을에 있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 가격표를 통해 사람을 가려 받는다면, 광장시장의 유명한 맛집이 누군가에게는 신체적인 불편함을 걱정케 한다면, 명동교자에는 그러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명동교자가 쌓아올린 유산은 이런 것이다. 다른 그 어떤 식당도 대체할 수 없는, 서울의 역사 그 자체가 명동교자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