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지하철 1호선]은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2001년, 혹은 2002년 무렵 어느 겨울날 이 뮤지컬을 처음 접했고, 큰 충격에 빠졌다. 내가 알던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충격은 아마도, 애써 무시하고 있던 세상의 밑바닥을 날것 그대로 접해야 했던 어린날의 성장통이었을 것이다. 이후 두 세번 정도 더 관람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관람 후 계단에서 기다리던 출연진과 일일이 악수를 하는 여유도 생겼지만, 관람 중 어느 순간 맞닥뜨렸던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듯한 감동은 여전한 크기로 전해져왔다. 유학을 나와있던 중 [지하철 1호선]이 4천회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다고 했을 때 느꼈던 서운함도 아직 잊지 못한다. 영원히 달릴 것 같았던, 마냥 씩씩해보였던 작품이 갑자기 운행을 종료한다는 통보를 해왔을 때 느꼈던 서늘하고 먹먹한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게 가슴 한구석에 살아남아있다. 연속 공연을 중단한 김민기 대표가 이후 아동극에 천착하는 모습을 보며 [지하철 1호선]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할 수 조차 없게 된 것은 오히려 인상적이었다. 매일 이 작품을 기억하며 살지는 않았지만, 첫번째 관람 이후 이 작품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말도 거짓은 아니다.

그런 작품이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마음 속으로 16,17년 전 감정이 살아나는 듯 해 묘한 반가움을 느꼈다. (사실은 뛸 듯 기뻤다) 그 때 들었던 노래들은 여전한 감동으로 다가올지도 궁금했고, 그 당시 이 작품을 통해 발견했던 마음 속 깊숙한 곳부터 시작된 아우성은 이제 어떤 모습으로 반응할지도 궁금했다. 나는 [지하철 1호선]을 비롯한 몇몇 예술 작품과 서적들을 통해 현재의 자아를 획득한 경우다.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십대 시절 읽지 않았다면, 머큐리 레브(Mercury Rev)의 [Deserter’s Songs]를 수험생 시절 듣지 않았다면, 로버트 하일브로너의 책들을 유학을 떠나기 전 읽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하철 1호선] 역시 마찬가지다. 입대 전 방탕한 대학생 시절에 만난 이 작품을 통해 세상을 보는 시선은 분명한 변화를 겪었다. 지금의 나는 그 때로부터도 멀리 달아나 있지만, 최소한 그 뿌리는 아직도 굳건히 자리잡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기에 이 작품을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관람하는 것은 최소한 개인적으로는 나에게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아내와 함께 찾았다. 아내가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지금 우리가 함께 보는 공연에서 어떤 것들을 공유할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다시 찾은 학전블루 소극장은 여전히 낡고 좁았다. 좌석은 세시간 가까이 진행되는 공연 시간동안 내 뾰족한 엉덩이를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딱딱했다. 하지만 앞좌석에 무릎이 닿을 정도로 좁고 불편한 좌석도, 매캐한 냄새가 은근히 퍼지는 지하의 공연장도 그저 반갑고 고맙기만 할 뿐, 공연을 기다리는 들뜬 마음을 식혀버리는 걸림돌이 되지는 못했다.

공연은 1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배경은 여전히 1998년 IMF 위기가 터진 직후였고, 선녀는 여전히 제비를 찾아 1호선을 타고 이곳 저곳을 배회한다. 그 와중에 만나는 사람들 역시 여전히 1998년을 살고 있었다. 혼혈로 태어나 사창가에서 포주 노릇을 하는 철수도, 그런 철수를 주워다 키운 곰보할매도, 곰보할매의 가게에서 우동을 외상으로 먹는 안경도, 그런 안경을 사랑하는 걸레도 모두 그대로였다. 지하철에서 UFO에 대한 믿음을 설파하는 교주와 고무장갑을 파는 잡상인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공연에서 2018년을 느낄 수 있었던 유일한 부분은 음악이었다. 밴드 ‘무임승차’의 구성이 조금 달라졌다. 드럼과 색소폰이 빠지고 바이올린과 건반, 퍼커션이 들어왔다. 그러다보니 모든 곡에서 약간의 편곡이 이루어졌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공연에서 정말 크게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사람이다. 공연을 올리는 배우들이 바뀌었고, 그 공연을 보는 나와 내 주변의 관람객이 바뀌었다. 우리는 이 작품이 무대 위에서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1998년의 공기에서 20년이나 떨어져 있었다. 그 당시의 무겁고 우울한 공기에서 조금씩 벗어난 우리는 이제 조금 다른 형태의 삶의 고단함으로 옮겨온 터였다. 비록 기억은 하고 있을지언정 더이상 그 순간을 살지 않은 우리들이 공연장에서 가장 서서히, 하지만 기어코 가장 극적으로 변해버린 존재가 아니었을까. 한 인터뷰에서 이번 [지하철 1호선]에 참여한 배우 중 과거에 공연되었던 [지하철 1호선]을 직접 경험한 배우는 딱 한 명 뿐이라는 이야기를 읽었다. 1998년이 2018년의 우리에게 ‘역사’로 기억되는 것처럼, 이 공연의 무대에 서는 배우들에게도 이 작품은 하나의 역사였던 것일까. 그래서인지 배우들의 연기에서 작지않은 이질감을 느꼈다.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선녀와 철수, 걸레와 안경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한 것이, 이번에 무대에 오른 젊은 배우들이 받아들였을 1998년과 나를 비롯한 객석의 많은 ‘늙은’ 관객이 기억하는 1998년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12월 쯤 되어 예정된 100회 공연의 막바지에 다다를 때, 이 배우들은 어떤 공기를 내뿜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관객으로부터 어떤 공기를 받아들일 것이며, 1998년을 반복해서 상기시키는 대사와 몸짓을 통해 무엇을 체화할 것인지 궁금해졌다. 아마도 적지 않은 것들이 달라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 1호선]은 4,000회에서 100을 더해 딱 4,100회까지만 운행한다고 한다. 김민기 대표의 인터뷰에 따르면 “정리하고 가야 할” 작품들이 학전에 쌓여 있고, [지하철 1호선]은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 가장 먼저 털고 넘어가기로 했다고 한다. 이제 이 작품이 정말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셈이다. 이 작품의 2008년, 2018년 버전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대표의 말처럼 만약 그렇게 시대를 한번 더 옮겨야 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번안이 아니라 새로운 작품이어야만 할 것이다. 2018년을 살아가는 철수와 걸레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 시대가 변했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변했으며, 우리와 시대 안에 존재하는 공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8년을 그리고 있는 [지하철 1호선]은 여전히 넘치는 생명력으로 펄떡거렸다. 오프닝에서 선녀가 독창을 할 때부터 이미 시작된 짜릿한 기운은 한 이름없는 술취한 직장인이 남산 아래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느껴지는 먹먹한 감정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되었다. 선녀의 이야기가, 걸레의 이야기가, 빨간바지의 이야기가 관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 개개인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 여전히 눈 앞에서 펼쳐졌다. 좁고 불편한 객석에서 세시간 만에 몸을 일으키며 고맙다는 생각만 계속 들었다. 다시 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단 100회 뿐이라 해도, 이렇게라도 다시 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명동교자 | 칼국수와 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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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고 시절을 모두 한 동네에서 보냈다. 세 개의 산과 세 개의 터널로 둘러싸인 작은 동네였는데, 한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주택가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빌라촌이 담벼락를 맞대로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어린 시절 놀러갔던 ‘친구네 집’은 반지하 단칸방부터 삼층짜리 대저택까지 그 간극이 무척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놀러온 아들의 친구를 위해 자리를 비켜줄 공간조차 없어 좁은 거실에서 친구의 어머니와 등을 맞대고 있었던 기억도 있고, 집의 한 층 전체가 그 친구에게 할애되어 방 안에서 탁구를 치고 대형 스크린으로 게임을 즐겼던 기억도 있다. 어린 나이 마냥 철이 없었기에 느끼지 못했을 삶의 노곤한 축적과정이 지금 돌이켜 보니 조금 묵직하게 와닿는다.

그 동네에 있는 성당은 주차공간이 무척 협소했다. 성당에 들어가고 나오는 과정에서 조금 많은 인내심을 요할 때가 종종 발생했다. 다른 말로 하면, 대구 출신인 나의 아버지의 성미에는 잘 맞지 않았던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름의 명확한 주차 관련 규칙을 가진 명동성당에 가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이 살던 동네와 명동성당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 매주 일요일 아침 세 개의 산와 세 개의 터널로 둘러싸인 조용한 동네를 벗어나 다다른 광화문과 종로, 시청과 같은 큼지막한 세계는 내가 기억하는 ‘고향’의 첫번째 이미지로 지금까지 각인되어 있다. 그 곳에서 미사를 드리면 성당에서 두시간짜리 주차권을 끊어주었다. 우리는 미사를 위해 쓰인 한시간을 제외하고 남은 한시간을 명동교자에서 칼국수를 먹는 일에 할애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거의 매주 일요일 점심으로 명동교자에서 칼국수를 먹었다. 내 나이 열살, 열두살, 아니 아홉살, 혹은 열한살일 수도 있는 그 무렵의 이야기다.

지금도 부암동은 세 개의 산과 세 개의 터널로 둘러싸여있다. 그 당시에는 밭을 가는 소가 있던 그 동네는(정말이다. 부암동 골목길로 올라가면 밭과 소가 있었다) 이제 조금은 개발이 더 되었지만, 여전히 서울의 다른 지역과 물리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분리된 어떤 이질감이 남아있다. “서촌”이라 불리우는 효자동 일대와도 다른,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이 살아남아 유지되는 것이다. 명동 일대도 마찬가지다. 명동성당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지하주차장이 새로 만들어졌고 조금 더 넓어졌지만, 여전히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면 두시간짜리 주차권을 준다. 그 주차권을 들고 명동성당 아래로 조금 내려가다 보면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골목들이 나오고, 첫번째 골목 왼쪽으로 들어가자마자 명동교자가 나온다.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직원들의 능숙한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을 때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명동교자에 가면 항상 칼국수를 먹는다. 머릿수가 좀 많으면 만두까지 먹을 생각을 한다. 칼국수의 가격과 양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이 곳에 오면 거의 아무런 고민 없이 칼국수를 선택하게 된다. 이 곳에서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춧가루로 범적이 된 매운 김치도, 고슬고슬한 공기밥 한그릇도 이 곳만이 가진 독특한 색깔이다. 전국의 수많은 칼국수집이 이 가게의 이름을 훔쳤지만, 그 맛까지 훔치지는 못했다. 칼국수라는 단순한 메뉴 하나로 1965년부터 지금까지 50년 이상을 한 장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이미 존경을 받아 마땅한 성취다. 그런 의미에서나는 명동교자가 서울을, 더 나아가 한국을 대표하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식당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외국에서 요리를 배워 왔거나 미디어에 노출되어 유명세를 탄 많은 요리사들이 신선하고 새로운, 그리고 비싼 메뉴로 소비자를 유혹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 어떤 고급스러운 식당도 명동교자가 쌓아올린 이 유산에 비할바는 되지 않는다. 그 어떤 고급스러운 음식도 명동교자만큼 서울의 냄새를, 한국의 공기를, 명동의 촉감을 잘 간직하고 있지는 못하다. 직원들이 선사하는 친절함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딱 적절한 수준의 미소를 간직하고 있다. 빠르게, 하지만 불편하지 않게 일을 처리하면서도 넉넉한 인심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식당은 사실 찾아보면 그리 많지 않다.

아내는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기 전 6개월동안 그곳에서 교리공부를 해야 했다. 매주 금요일, 퇴근 후 추운 겨울 날씨를 뚫고  명동에 도착하면 허겁지겁 명동교자에 들러 칼국수를 흡입하고 7시까지 아내를 들여보낸 뒤 근처 커피숍에서 숨을 돌리며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세례를 받고, 축하를 위해 모인 부모님과 누나, 그리고 두 조카와 함께 다시 명동교자에 갔다. 그 때에는 작은 방을 빌려 시끌벅적하게 칼국수와 만두를 나누어 먹었다. 그 순간 나는 대단히 큰 기쁨을 느꼈다. 종교적인 이유와 무관하게, 내가 사랑하는 나의 혈육이 한 자리에 모여 기쁨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리고 그 장소가 20년 넘게 줄기차게 찾아온 오래된 식당이라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내가 자식을 낳는다면, 아마도 나는 아내와 함께 그들을 이끌고 이 곳에 다시 올 것이다.

나와 같은 경험과 기억을 간직한 사람이 무척 많을 것이다. 달동네에 사는 노인부터 평창동에 사는 박사장님까지 몇천원의 돈으로 누릴 수 있는 음식이 있고, 그 음식을 몇십년동안 변함없이 즐기며 쌓아올린 추억이 있다. 그 맛과 그 추억은 입구에서부터 줄을 서는 모두에게 공평하다. 이태원이나 서래마을에 있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 가격표를 통해 사람을 가려 받는다면, 광장시장의 유명한 맛집이 누군가에게는 신체적인 불편함을 걱정케 한다면, 명동교자에는 그러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명동교자가 쌓아올린 유산은 이런 것이다. 다른 그 어떤 식당도 대체할 수 없는, 서울의 역사 그 자체가 명동교자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