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옥·김동훈 | 이명옥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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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 시절 자주 들락날락거렸던 동네 서점이 하나 있다. 영어로 쓰인 책을 빨리 읽지도 못하면서 그 곳을 자주 찾았던 이유의 절반은 (당연히) 허세였고, 나머지 절반은 한국의 서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분야의 서적들에 대한 흥미로움이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분야는 역사쪽이었다. 그 서점의 역사 코너는 꽤나 자세히 세분화되어 정리되어 있었다. 전쟁사(戰爭史) 부분이 따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흥미로웠고, 한 인물에 대한 평전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대형 서점에서 역사 서적들이 어떻게 몰개성화된 상태로 전시되어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더 나아가 한국과 미국이 가진 역사의 물리적 ‘시간’만을 고려한다면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국 사람들이 역사 분야에 보여주는 열정은 한국보다 더 뜨거워보였다.

그 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계속 잡아 끌었던 부분은 한국에서는 그 개념도 생소한 가족사(家族史) 코너였다.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인물부터 전혀 그렇지 않은 인물까지 다루고, 짧게는 한 세대부터 길게는 몇 세대를 아우르는 긴 시간까지 포괄하는 등 이 분야가 가지는 범위의 확장성도 놀라웠지만, 그 가족을 둘러싼 이야기만으로 하나의 역사 서적이 완성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당시 나에겐 획기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내 곧 이러한 가족사적 담화가 매우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가족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나가다 보면 그 가족을 둘러싼 환경이 보인다. 가족의 구성원이 대물림되며 핏줄이 이어지는 과정을 따라가다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대의 변화상이 보인다. 통계수치나 전쟁같은 거대담론만을 나열하면 절대 발견할 수 없는 역사의 미시적 변화상은 시대를 직접 살아낸 민초 개개인의 삶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고, 그러한 미시적 역사를 정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가 가족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가족이 평범하면 평범할수록 거시적-미시적 역사의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있는 훌륭한 케이스 스터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어머니와 고속버스를 타고 하동에서 서울까지 함께 올라온 적이 있다. 네시간 가까이 되었던 그 시간동안 어머니로부터 외갓집 식구들의 역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 이후 시간이 꽤 흐른 뒤에야 당시 어머니의 목소리를 녹음해둘걸,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이후 지금까지, 기회가 허락된다면 어머니의 회고를 녹취해서 글로 풀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해왔다. 어머니의 기력이 쇠해지는 모습이 최근 눈에 띌 정도로 확연히 느껴지는 최근 그러한 생각이 더 강해지고 있다. 어머니의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 지금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녀가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과 어머니 그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의 완성된 글로 정리하여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평생 조연으로, 조력자로만 살아온 삶이기에 더 그런 것 같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한국에 또 있었나보다. [이명옥 회고록]은 공주와 대전, 경기도 광주 등에서 살아온 ‘평범한’ 여자 이명옥이 그녀의 아들 김동훈과 행한 인터뷰를 글로 정리한 책이다. 이 책에서 이명옥은 자신의 삶과 함께 주로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그녀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홀홀단신 넘어와 맨주먹 하나로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일구어냈다. 이명옥의 증언대로 그녀의 아버지가 유독 가족에 집착하며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었던 것은 그가 탄생시킨 가족이 또 누구로부터도 이어받지 않은, 온전히 그와 그의 아내(이명옥의 어머니)가 0의 상태에서부터 만들어낸 가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가족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 시대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이명옥이 어린 시절을 보낸 대전의 판자촌부터 이명옥의 아버지가 숨을 거둔 서울의 지하철까지, 영화보다 더 극적인 삶의 순간들이 숨쉬는 일만큼 평범한 일상 속에 고르게 펴 발라져 있다.

이명옥의 담담한 말투가 상상될 정도로 평온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이 짧은 책은 그녀가 10여년간 모시고 살아온 시어머니의 죽음 장면에 이르러 짤막한 절정과 시큰한 감동을 선사한다. 먹고 살기 위해 젊음을 희생하고 낭만을 포기했던 나의 윗 세대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격한 감정의 파고는 아마도 부모의 죽음이 아니었을까. 나는 평생 무뚝뚝하게 가족을 대해온 아버지가 내 앞에서 처음으로 흘린 눈물을 아직도 기억한다. 할머니의 시신을 염하는 장소였다. 차마 가까이 다가가 마지막 인사를 하지도 못하고 귀퉁이 어딘가에 기대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아버지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이후로 다시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해서 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명옥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길거리에서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죽음을 묘사하며 “걔들(이명옥의 손자·손녀를 가리킨다) 보면 얼마나 예뻐하셨을까” 안타까워 하면서도 “시간이 다 그렇다”며 너무 일찍 떠는 부친을 향한 그리움을 애써 시간 속으로 묻어버린다.

기쁨과 슬픔을 억누르며 살기를 강요받아온 윗 세대가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소중한 것들과 이별을 해야 할 때, 그들은 마치 감정을 능숙하게 다루어온 장인처럼 행세하려 한다. 그 모습이 참으로 애처롭고 애닲게 느껴져 조용히 어루만져 주는 일은 그들을 바라보는 자녀들의 몫이다. 이 책은 그러한 어루만짐이 느껴져서 좋았다. 작가 김동훈은 아주 간단한 질문을 던지는 것 만으로 평범한 사람 이명옥의 특별한 삶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다. 마음을 가만히 움직이는 좋은 책을 읽었다.

2 thoughts on “이명옥·김동훈 | 이명옥 회고록

  1. 안녕하세요. 이 책을 만든 김동훈입니다. 네이버에서 책 검색하다 타고 들어왔는데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제 책보다 리뷰가 더 잘쓴 것 같아 민망할 정도네요 ㅡㅡ;;

    책 만들고 반응도 너무 없고 판매도 시원찮아서 콘텐츠 자체가 별로라 그런가 싶은 생각을 한동안 했는데 덕분에 힘 얻고 갑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김동훈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찾아와 읽어주셔서 영광입니다. 저는 이 가족사 서적이 한국사회에서 갖는 가치가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책이 무척 소중하게 느껴져요. 원하시는 만큼의 반응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직 한국 독자들에게 ‘일반인의 서사’가 익숙치 않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해봅니다. 우리나라는 예능부터 다큐멘터리까지 일반인이 풀어내야 할 이야기조차 연예인에게 맡겨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잖아요. 이 책은 오래오래 기억될 것 같아요. 조금 더 많은 이들에게 읽혀지기를 기원합니다. 참, 뱃지 잘 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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