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맥도나 | 쓰리 빌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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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영화의 원제는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다. 이걸 그냥 [쓰리 빌보드]로 자신감 넘치게(!) 줄여버린 국내 배급사의 호기에 경의를 표한다. 이 영화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역성(locality)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즉, 한국어 제목에서 사라진 “outside Ebbing, Missouri”는 그 자체로 상징하는 바가 꽤 크다고 할 수 있다. “연쇄살인범의 주”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미주리주에서 치안은 꽤 심각한 사회문제다. 여기에 (영화에서도 주된 비판의 대상이 되는) 흑/백 인종 갈등 문제가 더해져 2014년 세인트루이스 근교 퍼거슨에서는 대규모의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경찰과 같은 공권력이 지켜주지 못하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웃을 적으로 돌려야 하는 이 곳의 냉랭한 분위기는 어린 시절의 제니퍼 로렌스가 열연한 [윈터스 본]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에빙(Ebbing)이라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작은 도시는 물론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마을이다(영화를 촬영한 곳은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실비아(Sylvia)라는 도시다) 대부분의 이웃이 서로를 알고 있을 정도로 익명성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작은 마을, 이 곳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누군가를 적으로 돌려야 한다면 그 절박함은 상당한 수준일 것이다. 이 영화는 이 폐쇄적인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원한과 분노, 복수에 대한 이야기다.

우선, 예고편을 보고 상상했던 이야기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 깜짝 놀랐다. 납치된 딸을 경찰 대신 추격하는 엄마가 주인공인 스릴러물을 상상했는데(도대체 왜 이런 상상을 했을까..) 정작 영화는 블랙 코메디에 가까운 서사를 느린 템포로 보여준다. 강간당하고 불태워진 딸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던 엄마는 거금을 들여 마을 외곽에 있는 광고판 세 개에 광고를 게재한다.

“(내 딸은) 죽임을 당하는 동안 강간당했다”
“그런데 아직도 범인을 잡지 못했다고?”
“대체 어떻게 된거야, 윌로비 서장?”

이 세 문구는 그 자체로 충분히 강력하게 영화의 주제를 함축한다. 영화는 이 세 광고판에 새겨진 분노가 작은 마을에서 어떻게 되물림되는지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분노의 힘은 우연과 필연을 가로지르며 한 엄마에게서 경찰서장에게로, 경찰서장에게서 형사를 꿈꾸는 충성스러운 경찰에게로, 그리고 다시 엄마와 경찰에게서 강간범으로 의심되는 한 남자에게로 전이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멍청한 캐릭터로 등장하는 19살 여자의 입에서 나온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낳는다”라는 문구는 영화의 모든 주제를 집어삼키는 단 하나의 키워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모든 행동에 대해 충분한 개연성을 부여받는다. 그 누구도 지독하게 악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비현실적으로 선하지도 않다. 적당히 약았고 적당히 이기적이며 또 적당히 비겁하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분노의 대물림이 희극적으로, 혹은 부조리극에 가까운 형태로 표현되는 동안, 자연스럽게 ‘대체 왜 일이 이지경까지 오게 되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딱히 잘못한 사람도 없고 딱히 잘한 사람도 없는데 모두가 조금씩 망가져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마음 한켠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낀다. 이와 동시에, 누군가의 슬픔이, 혹은 누군가의 분노가 어떤 지점에서 어떤 계기에 의해 멈출 수 있었다면, 과연 이 마을은 다시 평화를 찾게 되었을까, 하는 의심도 살짝 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결국 이 분노와 복수의 서사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되면 코언 형제의 걸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까지 떠올리게 된다. 현실을 비추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작은 마을의 비극적 이야기가 성공적으로 현실 그 자체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날카롭게 미국의 현재를 비춘다. 미국은 갈등의 천국이기도 하지만 봉합의 귀재이기도 하다. 어떤 갈등이 발생하면 미디어와 정책 당국은 재빠르게 “하나의 미국”을 외치며 휴머니즘을 화려하게 포장한다. 대규모 총기 살해사건이 발생한 다음날에는 서로를 껴안으며 슬픔을 나누는 유가족의 모습이 영웅적으로 표현된 사진이 모든 신문의 1면 톱에 등장한다. 총기규제를 위한 실질적인 논의는 처음에만 잠깐 반짝할 뿐 곧 강력한 로비에 막혀 용두사미 형태로 마무리된다. 미국의 이러한 위선적인 갈등 봉합 과정은 비슷한 형태와 구조의 갈등의 재발을 필연적으로 불러온다. 아마도 확실히, 올해 안 언젠가, 미국의 한 학교에서는 복수의 학생이 총기에 의해 살해당할 것이다. 미국 정부는 그것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방치하고 있다. 주민을 지키지 못하는 미주리주 경찰처럼. 그리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당신들이 스스로 이겨내야만 한다고. 이 역시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윌로비 경찰서장의 모습과 흡사하다. (자살 후 ‘따뜻한’ 편지를 남기는 모습까지 미국사회를 그대로 재현했다!) 과연 딸을 잃은 어미에게 그 슬픔을 오롯이 혼자 감당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옳은가, 라는 질문은 현재의 미국 사회에도 똑같이 돌려줄 수 있는 질문이다. 자살한 윌로비 서장은 위선적인 미국의 시스템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고, 강간범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기 위해 길을 떠나는 ‘답 없는’ 어미와 경찰은 혼란을 겪고 있는 미국인 전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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