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 버닝

이창동 버닝
결론부터 말하면, [버닝]은 이창동의 필모그래피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기록될만한 가치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동시대에 존재하는 모든 한국영화들 중 최고의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그만큼 이창동은 완전히 다른 레벨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또한, 이창동이 차기 작품에서 나아갈 방향에 대한 단서들을 꽤 많이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 [버닝]은 매우 흥미로운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먼저 이창동의 다른 영화들과 비교하여 [버닝]이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혹은, 그 진실성을 표현하는 방법이 상투적이고 진부하다. 이 영화를 ‘현 시대 젊은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 혹은 공감’으로 해석한다면 이 상투성은 더 크게 다가온다. 현실은 지옥이고 전쟁인데, 이창동은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못한채 현학적으로 현실을 ‘음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영화적으로 가장 잘 하는 것은 ‘선’을 제대로 긋는 것이다. 그가 만든 모든 영화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정확하고도 올곧은 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버닝]에서도 그가 가진 시선은 옳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파주와 반포 사이 어딘가에 줄세워져 있을 것이고, 파주의 젊은이가 가진 응축된 분노와 반포의 젊은이가 가진 책임감 없는 쾌락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현실은 이미 모두가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뼈에 사무치도록 경험하고 있는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이다. 이창동의 [버닝]에서는 현실의 차가운 촉감을 느낄 수 없다. 매혹적인 장면들과 구조주의적인 대사, 잔뜩 꼬아버린 서사구조가 이 시대 젊은이들의 고통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물론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영화가 되긴 했다(후술할 것이다). ‘존재’에 대해 묻지 않고 ‘부재’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방식은 굉장히 날카롭다. 하지만 어른인 그가 청춘의 비틀거림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딘가 어설프고 동떨어져 있다. 진심어린 위로의 목소리를 느낄 수 없다. 그렇다고 지옥도 안에서 함께 숨쉬고자 하는 연대의식도 찾을 수 없다. 영화의 구조적 완성도에 천착한 나머지 메시지를 다듬는 일에 조금 소홀하지 않았나 느껴질 정도다.

둘째,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방식은 오히려 퇴보했다. [오아시스], [밀양], [시]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여성을 향한 서늘하고도 뜨거운 양가적인 시선은 이번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쓸데없이 벗기고, 대상화시키는 데에 적극적이다. 아름다운 석양 아래에서 춤추는 장면을 보며 이창동이 이번에는 여성을 굉장히 나이브하게 담아내려고 작정했구나, 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해미'(전종서 扮)로 대표되는 주요 여성 캐릭터 자체가 [버닝]이 가진 미스테리하고 다차원적인 서사구조를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해석하면 아예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영화에서 해미만큼 적극적으로 영화의 주제의식을 함축하고 있는 캐릭터도 없는 셈이기도 하다. 다만, 감독의 여러 의도 중 하나가 이 영화에 대한 다채로운 해석의 공존에 있다면, ‘모든 것은 실재하는 현실’이라고 이 영화를 이해하는 관객에게는 해미의 역할이 충분히 불쾌할 수 있다. 실재하는 여성의 벗겨진 모습을 대상화하는 주인공에게 요즘 젊은층의 대표성을 부여할 수 없다고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셋째, 이 영화는 조금 비겁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대표적이다. 종수의 극단적인 선택은 그의 개인적인 선택이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 혹은 그가 대표하는 사회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운명을 묘사하는 쪽에 가깝다. 과연 그의 선택이 온당하고 합당한가. 혹은, 어른의 시선으로 젊은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위로의 최선이 그것이었는가. 나는 조금 더 담대하고 조금 더 따뜻한 무언가를 원했던 것 같다. 차라리 조금 덜 허무하게 인생을 이어나가는 쪽이었다면 납득하기 수월했을 것이다. 극단적 선택을 이끄는 하나의 결론에 종수가 사로잡혀가는 과정은 논리적으로 정당하지 않으며 강제적이지도 않고 숙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미스테리한 서사구조를 위해 희생되어야만 하는 것이 있다면, 왜 하필 그것이 종수의 선택이었는지도 궁금하다.

하지만 [버닝]이 여전히 동시대 모든 한국영화, 더 나아가 꽤 많은 전세계 영화들과 비교하여 여전히 압도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영화가 가진 다층적인 서사구조를 이해하는 과정 자체만으로 충분히 지적으로 즐겁고 흥미롭다. 영화는 종수(유아인 扮)가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을 묘사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의 모든 씬 중 종수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 장면은 거의 마지막 즈음 딱 한 번 등장한다. 벤(연상엽 扮)이 화장실에서 화장도구를 꺼내 여성을 화장해주는 장면 말이다. 즉, 이 영화는 종수가 바라보는 모습이 모두 다 실재하는 현실인지, 혹은 중간 중간 잠들었던 그가 꿈에서 깬 이후부터 전개되는 현실인지, 혹은 그 꿈에서부터 환상이 시작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영화의 종반부에 종수가 해미의 방에서 열심히 타이핑하는 그 소설의 내용이 그냥 이 영화 자체인지 알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 관객은 그 어떤 가능성으로 해석해도 영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며, ‘실재’와 ‘부재’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영화의 형식과 그 형식을 바라보는 관객 모두가 하나의 주제의식을 형성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여러 상징물과 촘촘히 직조된 대사들을 끼워맞추는 행위는 그래서 재미를 넘어 관객 스스로 영화의 주제의식을 형상화시키는 하나의 의식으로 승화되기에 이른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에 대한 어른의 시선, 혹은 공감’이라는 사회적 키워드만 제거한다면, 이 영화는 영화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조립품질을 자랑한다. 결국 나는 이 영화가 영화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어쨌든, [오아시스]에서부터 차근 차근 쌓아온 이창동의 ‘환상과 현실 간 모호한 경계’의 영화적 실현이 [버닝]에 이르러 미학적으로나 구조적으로 거의 완성단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둘째, 종수, 벤, 해미로 대표되는 영화의 중심 캐릭터는 이 시대의 사회상 그 자체를 상징한다. 그러니까 나는 처음부터 종수나 벤, 해미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영화 내내 그들이 인간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이창동은 살아있는 배우들이 연기하는 이 캐릭터들을 철저하게 사회 그 자체로 설계하고 표현하려고 의도한 듯 보인다. 종수라는 인물이 품고 있는 사회의 한 부분이 있다. 벤도 그러하고, 해미도 그러…할까? 아무튼, 최소한 종수와 벤의 대립 관계에서 관객은 파주와 반포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된 공기를 느낄 수 있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종수가 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벤이 종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현실을 환기한다. 최근에 등장한 그 어떤 영화에서도 이정도로 담대한 시선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진실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은 뼈아픈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중간에 멈춘 느낌이다)

셋째, 영화는 시각적으로 충분히 아름답고, 모든 씬이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다. 한 평론가는 이 영화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고 했는데, 사실 그 정도는 아니다. 허세가 약간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부터 이 영화가 영원히 끝지 않기를 바랐던 유일한 영화는 허우샤오시엔의 [빨간 풍선]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이창동답지 않게 멋을 잔뜩 부렸다. 그런데 완성도가 꽤나 훌륭하다.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랄 정도는 아니지만 몇 번이고 또 보고 싶어지게 만든다.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될 해미의 춤 장면이 대표적인 그런 장면일 것이고, 남산타워(혹은 서울타워)를 바라보는 해미의 옥탑방이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묵직한 한 방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창동의 전작들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많은 영화적인 장치들이 [버닝]에서는 깜짝 놀랄 정도로 높은 완성도와 함께 가지런하게 전시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이창동의 다음 영화가 무척 기다려지기도 한다. 구조적으로 영화를 직조하는 능력이 완성단계에 이르렀고, 시각적, 혹은 미학적으로 이를 표현하는 능력도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면, 이제 남은 것은 그 그릇안에 무엇을 담느냐 정도일 것이다. 그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무엇이 담겨 나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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