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커피 | 너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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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커피(Biroso Coffee)는 대흥역 4번 출구로 나와 철길 공원을 따라 걸으면 보이는 갈색 건물의 1층과 2층에 자리잡고 있는 로스터리 커피숍이다. 메뉴는 단촐하다. ‘너의 이름’, ‘오감도’, ‘여운’ 등 커피숍이 제공하는 블렌드는 에스프레소 기반의 커피에서, 싱글오리진 커피는 필터드립으로 내린 커피에서 맛볼 수 있다. 여기에 차 몇 가지와 디저트 몇 가지를 더한게 메뉴의 전부다. 커피숍의 외관부터 메뉴, 인테리어까지 한결같이 단정하게 꾸며진 이 곳에서 우리 부부는 결혼 생활의 첫 발을 내딛었다. 어느날 저녁, 근처 을밀대에서 평양냉면과 수육을 먹은 뒤 이 곳으로 건너와 프로포즈를 했다. 쑥스러운 마음에 무릎을 꿇지도 않았고 결혼해 달라는 청을 멋있게 하지도 못했지만, 당시 우리와 사장님 외에는 아무도 없던 조용한 분위기 덕분이었는지(당시는 지금처럼 2층까지 확장하지 않은, 1층에 로스팅 기계와 카운터, 몇 개의 좌석이 공존하던 시절이었다), 꽤나 성공적이었던 평양냉면 맛집 여행덕분이었는지, 아내의 왼쪽 네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일은 무사히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었다.

이후 우리는 날씨가 좋은 날, 혹은 평양냉면을 먹는 날, 혹은 그냥 기분이 좋은 날, 혹은 그냥 아무 날, 비로소 커피를 찾았다. 금호동으로 신혼집을 정한 탓에 전과 같이 마포구로 자주 놀러 나오지는 못했지만, 서강대 성당에서 미사를 보는 날에는 거의 빼놓지 않고 비로소 커피에 들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갔다. 최근 대전으로 삶의 본거지를 옮긴 후부터는 비로소 커피를 찾는 일이 조금 더 힘들어졌다. 바쁜 일상을 보내는 와중에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늘 비로소 커피를 생각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합쳐지고 새롭게 시작하는 순간을 공유한 공간이다. 지금도 프로포즈 당시 비로소 커피 안에 흐르던 공기의 냄새를 코 끝으로 기억하고 있다.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사장님은 우리에게 등을 돌린 채 로스팅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내는 프로포즈 하나 제대로 못하냐고 타박하면서도 기쁨의 눈물을 흘려 주었고, 나는 프로포즈 기회만을 엿보며 보름 넘게 가방에 숨기고 다닌 반지를 드디어 주인에게 돌려 준 후 홀가분한 마음에 마냥 기분이 좋았다. 비로소 커피 1층은 무척 조용했다. 마치 세상에 우리 셋 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새하얀 벽이 그런 기분을 더더욱 재촉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테이블 위에는 프랑스 여행 사진집이 있었는데, 우리는 거짓말처럼 프랑스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비로소 커피는 대전으로 내려온 후에도 나의 삶을 한번 더 구원해주었다. 대전에서 좋은 커피를 마시는 일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었는데, 결국 참지 못하고 비로소 커피에서 제공하는 블렌드 중 하나를 온라인으로 주문해버렸다. 커피가 도착한 날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 급하게 커피 한 잔을 내렸다. 좁은 공간이 금세 좋은 커피향으로 가득 채워졌다. 약한 심장 탓에 저녁에는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지만 그 날 저녁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처음 한모금을 마시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꽤 오랜 시간동안 좋은 커피를 마시지 못하던 중이었다. 입 안에 상큼한 과일향이 퍼져나갔다. 참 많이 고마웠다. 그 블렌드의 이름은 ‘너의 이름’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마신 약배전 커피 중 가장 맛있었다. 그 당시 상황이 그래서였기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가장 좋은 커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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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비로소 커피 | 너의 이름

  1. 안녕하세요! 종혁님 블로그에 종종와서 글을 읽는 독자(?)예요. 한가지 질문드려도 될까요? 혹시 미국에서 온라인/오프라인으로 살수있는 맛있는 커피가 있을까요? 이제 스타벅스 커피가 지겹고… 종혁님 글을 읽다보니 저도 뭔가 ‘맛있는’ 커피를 먹고 싶어요!!! ㅎㅎㅎ

    • 반갑습니다! 마침 프릳츠 커피에서 최근 온라인 해외판매를 시작했습니다. 프릳츠 커피를 미국에서 받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아요 제 블로그에 등장하는(?) 포틀랜드의 코아바 커피(coava coffee)나 요즘 전세계에서 가장 핫하다는 샌프란시스코의 포배럴(four barrel) 커피도 각자 사이트에서 온라인 원두 판매를 하고 있네요. 저라면 한번 트라이해보겠습니다! ㅎㅎ

  2. 안녕하세요 종혁 님. 종혁 님 블로그를 좋아하는 독자입니다. 우연히 제가 다니던 학교와 근처의 이야기를 읽다가 종혁 님 블로그를 탐독하게 됐어요. 제가 자주 다니던 커피집, 식당, 장소가 새로운 시각으로 담기고, 그 곳에서 로맨틱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행복했어요.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소식, 일이 많기를 바라요

    • 안녕하세요 소고님, 저도 덕분에 최근부터 소고님 블로그 자주 들어가 읽고 있어요.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공간들이 각자에게 특별한 의미로 읽힌다는게 참 매력적이죠? 소고님도 늘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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