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약배전 커피 마시기

2월말 대전으로 내려온 이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생각들 중 하나는 ‘좋은 로컬 로스터리 커피숍’을 찾는 일이었다. 정확하게 두달동안 대전의 좋다는 커피숍을 찾아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나이브했던 것 같기도 하다. ‘로컬’에 집착한 나머지 내가 사는 ‘동네’에서 로스팅한 커피를 일상에서 즐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특히 대전이라는 ‘지방’에서 살기로 작정한 이상, ‘서울’에서 문화적으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하고 싶은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의 이러한 시도는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며칠전 블랙워터포트에서 주문한 비로소커피의 약배전 블렌드인 ‘너의 이름’이 오늘 오후 도착했고, 바로 학교 기숙사로 가지고 들어가 서울에서 챙겨온 도구들을 이용해 급하게 한 잔을 내렸다. 푸어 오버로 내린 그 한 잔의 커피는, 대전의 수많은 커피숍에서 마신 그 어떤 커피보다 맛있었다. 깊은 한숨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대체 왜 그렇게 고생(과 돈낭비)을 했지, 라는 자책감과 5월 1일 로스팅했다는 낙인을 보며 신선한 원두를 빠르게 보내준 비로소커피에 대한 고마움이 함께 했다.

톨드어스토리, 곰에스프레소, 비터앤스위트, 싱크커피로스터스, 커피살림팩토리, 커피인터뷰같은 대전의 유명한 로컬 로스터리에서 대표 메뉴라고 내놓는 커피는 대부분 중, 강배전이다. 하지만 내가 방문했을 때에는 원두의 신선함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는지 강배전 커피에서 느낄 수 있는 달콤한 다크초콜렛 풍미나 묵직한 바디가 전혀 느껴지지 않고 그냥 기분 나쁜 쓴 맛과 짠 맛이 가득할 뿐이었다. 목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오일리한 느낌도 전혀 없었다. 어쨌든 연남동의 리이슈 커피를 제외하면 서울의 핫한 커피숍들이 대부분 원두 본연의 과일향 풍미를 극대화시킨 약배전 커피를 주로 내세우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것이 서울에서 지방으로 일방향으로 진행되는 트렌드의 전파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체현상인지, 대전 로컬숍들의 완고함에 기인한 이 지역 특유의 풍토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편, 듁스커피나 프릳츠에서 원두를 제공받는 앤아워페이스나 몇몇커피 등 젊은 감성의 커피숍에서 제공하는 커피는 신맛이 지나치게 강해서 입안이 얼얼할 정도였다. 입안의 감각이 상처받을 정도로 산미를 강조한 커피는 다시 찾고 싶지 않다. 신선하지 않은 원두로 내린 커피가 주는 불쾌한 느낌과 결과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그동안 정말 많은 대전 로컬 커피숍을 다녔고, 로컬숍을 소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때문에 최대한 전향적인 자세에서 커피의 맛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결과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완벽한 실패였다. 그 어떤 커피숍도 나의 취향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좋은 커피’라는 생각조차 갖지 못하게 했다. 대부분의 커피숍에서 커피를 다 마시지 못하고 나올 정도였다. 한 잔의 좋은 커피를 마실 때 받는 수많은 감정적인 위로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절망스럽게도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듁스, 프릳츠, 리브레, 테일러와 같은 유명한 서울의 로스터리숍들이 온라인 유통망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펠트나 비로소 등 내가 사랑하는 공간들도 블랙워터포트 플랫폼을 통해 신선한 원두를 온라인으로 공급하고 있다. 나는 비로소커피의 원두를 오늘 받아들고 구원을 받았다고 느꼈다. 그 정도로 대전에서 좋은 산미를 느끼는 일은 힘들다.

7 thoughts on “대전에서 약배전 커피 마시기

  1. 아, 승인 후 댓글이 표시되는 시스템인 것 같네요. 작성 후에 댓글이 안올라가는 줄 알고 여러개 썼는데 민망하네요, 하나만 살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_-;;;

    • 제가 볼 수 있는 댓글은 방금 쓰신 이 댓글 하나뿐입니다. 승인이 필요하게끔 설정해두진 않았구요, 아마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도록 설정해두었을겁니다. ^^;

    • 수정도 전에 읽으시다니 민망합니다 ㅠㅠ
      몹시 반가워서 댓글을 달았는데 이상하게 안떠서 어리짐작 후 댓글을 달았더니 그 댓글만 살아서 올라갔네요.

      저도 약배전? 커피 좋아합니다. 로스터리에 가면 항상 로스팅 약한 걸 추천 부탁드리고 있어요.
      제 딴에는 정발 반가운 점이 많습니다. 교수님께서 금호 사시던 시기 비슷한 시절에 한칸 위 약수 살았었고 고딩때 저도 핫뮤직 모았었거든요.

      아무튼 저는 지금 강릉에 삽니다. 강릉에는 보헤미안, 테라로사가 유명하지만, 저는 친구 소개로 커피내리는 버스정류장이라는 곳에서 원두를 구입해다 내려마시고 있습니다. 정말 맛있어요. 언제 강릉에 일이나 휴가 건으로 오시면 그 곳에서 한잔 대접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ㅎㅎ 약수에 사셨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대전에 내려온지 아직 두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그 동네가 그립네요 ^^;

      안그래도 몰래 블로그 훔쳐보면서(?) 강릉에 사시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강릉에는 제가 전 회사에서 모시던 윗분이 머물고 계셔서 안그래도 찾아뵈어야 겠다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커피 천국(?) 강릉에 사신다니 부럽습니다. 저는 강릉이 한국의 플로리다, 혹은 한국의 샌디에고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경치도 끝내주고 살기도 편하고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조만간 강릉에 찾아뵙겠습니다.

  2. 완전 공감하는 글입니다.
    저도 제주에서 거의 비슷한 시행착오를 겪었고, 종혁씨는 두 달 만에 깨우치신 것을 저는 더 오래, 거의 일 년 넘게 헤매다가 깨우쳤을 뿐 아니라…..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또 어디가 맛있다고 하면 마셔보고 후회하고 -_-; 이 과정을 거듭하고 있거든요.
    아무래도 유통의 문제겠지 싶어서 거대한 로스팅 기기가 있는 곳이 생겨서 반가와하던 것도 잠시, 기기의 문제만은 아니더군요. ㅠ
    제주에서 마셔 본 중 가장 제 입맛에 맞았던 곳은 풍림다방이었지만, 세상에 커피 하나 사자고 시장통 같은 캐셔에서 30분을 기다리고나니 다시는 가기 싫어지고 말았어요. (금액도 보통 원두의 2배인데!) 쉽지가 않구나 생각하다가도, 이렇게 까다롭게 굴려면 차라리 서울로 되돌아가야지 싶어서 어디다 투덜대지도 못하는 참입니다. ^-^;;
    아무튼 덕분에 좋은 온라인 샵을 알았네요. 가입하고 주문했어요! :)

    • 커피대란(?)을 겪으면서 서울에서 지방으로 개인이 짐싸들고 내려오는 시간은 몇시간이면 되지만, 서울의 공기, 혹은 문화가 지방으로 내려오는 데에는 몇년이 걸리는가 싶어 살짝 풀이 죽었습니다. 이또한 지방에서 살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겠지요. 제주도에 안트러사이트도 있고 브루마블같은 힙스터 커피숍도 있어서 전 그나마 그곳 상황은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냉면 쪽에서 특히 더 많이 고생하시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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