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원 | 바다와 나의 변화

김해원
김사월X김해원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 이들의 음악은 함께 음악을 듣던 친구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김사월X김해원 들어봤어요?” “네, 완전 대박” 따위의 대화를 자주 주고받았다. 이들의 음악에 심장이 뛰었던 사람들은 비단 우리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포크씬에 일으킨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것을 넘어 한국 음악계 전체에 신선한 충격을 안긴 이들의 음악은 서늘하면서도 뜨거웠고, 명쾌하면서도 다차원적이었으며, 매혹적이지만 마냥 살갑게 굴지도 않는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김사월은 두 장의 솔로 음반을 통해 인디씬에 확고한 자기만의 위치를 만들었다. 주체적인 여성의 목소리를 명료하게 들려준다는 점에서 그녀의 음악은 단순히 잘 만든 음악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김사월의 목소리를 꾸준히 접하는 동안 김해원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프로듀싱과 영화음악 등을 통해 음악가와 청자, 감독과 관객의 매개자로 활동”해온 그가 “스스로 텍스트가 되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돌아왔다.  결론부터 말하면, 작곡, 작사는 물론 연주와 녹음, 편곡과 믹싱까지 음반 제작에 필요한 거의 모든 작업을 혼자 힘으로 해낸 [바다와 나의 변화]는 놀라운 수준의 들끓는 에너지가 절제된 목소리 안에 고요히 담겨 있는 묘한 작품이다. 도시를 떠나 바다를 가까이 하며 내면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김해원은 이번 음반에서 오롯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성찰은 깊은 수준까지 내려간다. 연인 사이에도 드러내기 힘든 마음의 밑바닥까지 남김없이 긁어내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연주는 심장을 도려내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소리의 빈공간조차 농밀하게 채워져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될 정도로 작곡은 빈틈이 없다. 홈레코딩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녹음도 깔끔하다.

이 음반은 다분히 감정적이지만, 지극히 냉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엘리엇 스미스를 삼촌으로 둔 수프얀 스티븐스가 빅 띠프의 멤버들과 음반을 만든다면 이런 느낌일까. 첫곡 “Hungry Boy”에서 김해원은 ‘소리’를 직조하는 과정에서 단 일보도 후퇴할 생각이 없음을 명확히 드러낸다. “헝클어진 머리”와 “불길”에서는 이 음반을 듣는 청자에게 어떤 자세를 요구하는 것 같아 보인다. 나는 이만큼 솔직해질테니, 나의 음악을 듣는 당신도 진실해지길, 하고 속삭이는 느낌이다. “Television” 쯤에 이르면 김해원의 세계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어제 네가 나오는 텔레비전을 봤어”라는 단 한 줄의 가사를 두 번 읊조리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후 묵묵히 이어지는 연주를 통해 화자의 감정을 절절하게 노출한다.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냐, 라고 반문하는 이 노래를 듣는 청자의 마음도 함께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불길”과 “새벽녘”에서 보여주는 김해원의 기타 연주는 탄성을 자아낼 정도인데, 이는 단순히 악기를 아름답게 연주하는 차원을 넘어 악기연주를 통해 어떤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인상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Listener”와 “종달새”에서는 그의 음악적 뿌리가 여전히 포크에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잊고 있었다!), “Why So Hard?”에서는 김해원식 아름다움의 한 절정을 느낄 수 있다. 왜 후반부에 배치되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하면 절로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이 노래는 무척 아름답다. 순수하게 아름답다. 이 곡에 이어지는 음반의 타이틀곡 “바다와 나의 변화”과 음반을 마무리짓는 “오늘”에서는 가슴을 시리게 만드는 화자의 서늘한 고백을 마주해야 한다. “차가워지는 물”과 “짐이 되어가는 자신”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아끼는 것들과 사람을 위해” “무거운 옷”을 입어도 힘이 들지 않는다고 되내이는 김해원의 고백을 듣다보면 얼굴의 솜털이 삐죽 곤두설 정도로 서늘함을 느끼면서도 그 안에 가만히 자리잡고 있는 뭉클하고 뜨거운 힘을 발견할 수 있다. 좀처럼 갖기 힘든 기이한 체험이다. 아름답고 아름답다.

우리가 김사월X김해원의 음악을 통해 상상하고 기대했던 김해원의 음악보다 훨씬 더 깊고 더 풍부하고 더 맑은 음악을 [바다와 나의 변화]를 통해 전달받을 수 있었다. 윤영배 이후 언제 이토록 좋은 포크 음반을 접해보았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나에게는 현재까지 이 음반이 ‘올해의 음반’이다. 최소한, 상반기 최고의 음반이다. 최소한. 반드시 헤드폰으로 들어보기를 추천한다.

장강명 | 당선, 합격, 계급

장강명
장강명의 최근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꽤 재미있게 읽었다. 젊은 세대라면 한번쯤 들어보았고 생각해보았을 “헬조선”을 중심으로 풀어낸 주제의식도 마음에 들었고 빠르게 책장을 넘기게 되는 쉽고 쫀득한 문체도 좋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기대 이상으로 치밀하다고 느낀 작가의 취재능력이었다. 공중에 5cm 정도 떠 있는 다른 한국 소설들과 달리 현실의 밑바닥에 바짝 달라붙어 그 까칠한 촉감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이 소설의 진면목이 작가의 치밀한 사전 취재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역시나, 기자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픽션이 아닌 논픽션을 신작으로 내놓았다는 소식에 적지 않은 흥미를 느꼈다. 그것도 공채와 문학상으로 대표되는 ‘고인 물’을 정면으로 파고드는 르포 형식이라니, 국내 유력 일간지 공채 기자 출신으로 굵직한 문학상을 다수 수상한 그가 작심하고 소위 ‘내부 총질’을 하는데 어찌 기대가 되지 않겠는가.

[당선, 합격, 계급]은 치밀하게 전개하고 명쾌하게 쏟아내는 좋은 논픽션이다. 여기서 ‘좋은’이라는 단어는 ‘사회적으로 필요한’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이 책은 저자가 과거에 속한 사회적 집단(대기업, 정부, 공기업, 언론사를 포괄하는 주류 대기업)이 내부 구성원을 선발하고 육성하는 대표적인 방식인 ‘공채’와, 저자가 현재 속한 사회적 집단(문학계)이 구성원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대표적 방식인 ‘문학상’의 이면을 파고들어 그 명과 암을 제대로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국사회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인재 선발 양식인 공채와 문학상에 대해, 저자는 그 사회적 장점 – 예컨대 공정성과 같은 – 을 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형태의 인재선발 방식이 한국사회의 전체적인 역동성을 해치고 있음을 다각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수많은 인터뷰와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극소수의 인원을 선발하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가 장기간 에너지를 낭비해야 하는 비효율성, 기업이나 문학상이 원하는 인재상과 그 선발 기준 및 절차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 비논리성, 그리고 선발되지 못한 이들이 감수해야 하는 배타성과 차별까지 조목조목 제시한다. 결국 이러한 선발 방식은 사회의 계급을 분화시키고 고착화시키는 역할만 할 뿐, 제대로 된 인재를 발견하고 키워내기 위한 적합한 방식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지방 정부의 말단 공무원으로 평생 일해야 하는 사람이 어려운 국사 문제를 ‘완벽하게’ 풀어야 할 이유는 없다. 몇 년 뒤 자신들의 먹거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삼성그룹에서 몇십년 뒤의 먹거리까지 책임질 인재를 몇십개의 시험문제로 선발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문학계와 영화계 등 예술계에서 폐쇄적이고 배타적으로 행해지는 ‘등단’, 혹은 ‘입봉’의 과정이 갖는 불합리성 역시 본질적으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극히 상대적이고 우연적인 이유에 의해 선정된 작가에게 부여되는 ‘등단’이라는 특혜와 그 이후 문학계의 주류 안으로 편입시켜 내부자(insider)로 활동하게 하는 사다리 걷어차기는 기본이고, 문학상이라는 ‘고시’를 통과하지 못한, 혹은 그러한 방식을 거부한 다수의 작가들에게 가해지는 배타적 차별 현상 역시 만성적이고 노골적이다. 이러한 부조리함은 변호사와 의사, 공무원 등 특정 시험을 통과한 후 ‘자격’을 획득한 사람이 능력 부족 등을 이유로 결코 소속집단에서 누락되지 않는 현상으로 이어지며, 더 나아가 이들의 능력이 공적으로 평가되고 취합되어 공개되는 과정이 암묵적으로 생략되는 현상으로가지 나아간다. 어떤 변호사가 승률이 높은지, 어떤 의사가 어떤 병을 잘 고치는지 일반인이 알기가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네이버 영화 평점처럼 정보의 비대칭성을 완화시킬 수 있는 ‘정보의 민주화’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문학계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문학작품이 자신의 취향과 맞는지 판단할 적절한 기준이 공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평론가의 서평은 너무 현학적이고 언론사의 서평은 칭찬 일색이다. 이 분야 역시 정보의 비대칭성이 강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사회적 비용의 증가 원인이 바로 ‘공채’와 ‘문학상’으로 대변되는 선별적이고도 차별적인 시스템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명확하고 중대한 문제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많은 사람들이 공채와 문학상이 사라지기를 바랄까? 저자는 그조차 어둡게 본다. ‘로스쿨 vs 사시’와 같은 사회적 갈등이 좋은 예다. 사람들은 공채와 문학상으로 대변되는 비합리적인 ‘과거제도’ 방식이 여전히 존치되기를 원하고 있다. 갖은 고생을 해서라도 그 장벽만 넘는다면, 사회적으로 어마어마한 혜택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노량진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수십만명의 젊은이들이 취업을 포기한채 공시에 집착하는 현상부터 “기대치를 낮추어 중소기업에 취직하라”며 중소기업의 연봉구조나 복지혜택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어른들의 행태까지, 이 사회가 조금 더 보잘것 없어지는 현상의 이면에는 개인의 이기심을 부추기는 공채와 같은 사회적 장치가 존재하고 있다.

친구 중 한 명은 대학 졸업 후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공채로 입사했다. 승승장구하던 그 친구는 최근 어떤 이유에서인지 임원으로 올라갈 길이 막혔다는 생각이 들자 심각하게 이직을 고민 중이다. 그 친구의 말에 따르면 오직 공채 출신만이, 그 중에서도 윗선으로 선택을 받아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만이 그룹의 관리를 책임지는 임원 레벨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지인 한 명 역시 대학 졸업 후 국내 대기업에 들어갔는데, 지금도 여전히 ‘임원 코스’를 밟으며 잘 나가고 있다. 그가 가진 소속 그룹에 대한 충성심과 자부심은 대단한 수준이다. 각종 비리에 얽혀 뉴스에 그 회사가 등장하는 것 따위는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못하는 듯 보인다. 어쩌면 이 두 명의 사례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들에게는 국내 대기업의 공채 시험을 통과하여 그 기업의 주류가 되었다는 ‘업적’을 굉장히 중요하게 평가했다. 아직 기업 내부에서 관리직급으로 올라가지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채를 통과했다는 결과만으로 이미 다수의 다른 한국인들과 자신을 가르는 어떤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이들의 삶에서 ‘계급’의 발생은 대기업에 입사할 즈음, 이십대 중반 정도의 젊은 나이에 이미 역동적으로 분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계급 안으로 입성하기 위해 이들이 치루어야 했던 공채 시험이 과연 정말 효율적인 시험방식이었는지, 혹은 심지어 공정한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의심해보지는 않았을 확률이 높다.

이들과 비슷한 방식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계급의 분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장강명은 공채라는 특수한 시험 방식을 통해 계급의 분화와 고착화의 핵심을 잘 꼬집고 있다. 나는 그의 생각에 거의 대부분 동의한다. 그는 이 사회의 역동성을 저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를 잘 짚어냈다. 그의 답답함이 책의 이곳저곳에서 절실하게 느껴진다.

박철수 | 박철수의 거주 박물지

거주박물지

[박철수의 거주 박물지]는 ‘아파트 공화국’ 한국이 가진 문화적 획일성 문제의 미시적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일종의 문화 고고학 서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파트라는 특수한 건축양식이 서울 전역을 뒤덮는 현상이 마뜩지 않고, 더 나아가 이러한 거주양식의 획일화가 어쩌면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적 양태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그러한 걱정을 확신으로 바꾸어주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서울이 아파트에 지배당하고 있고 한국사회가 서울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가정이 사실이라면, 아파트라는 건축양식의 변화추이 안에 내재되어 있는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코드를 읽음으로써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질병’의 근원을 조금 더 내밀하게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히 건축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사회변화상으로 압축하기에는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고 그 무게감도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책은 개인적으로 궁금해 했던 한국형 거주문화의 독특한 형태들, 예컨대 ‘확장형 발코니’라던가 다목적실의 흔적으로 남은 식모방  등의 역사적 유래를 친절하게 설명해줄 뿐 아니라 여의도 시범아파트와 같은 오래된 아파트에 남아 있는 과거의 유산들(장독대, 더스트 슈트(dust chute), 단지내 수영장 등)이 탄생하고 사라져간 연유를 다양한 인문학 레퍼런스를 동원하여 설명하고있다. 더 나아가,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욕망이 투영된 강남의 탄생, 그리고 국토건설 정책이 사회에 미친 광범위한 영향 등 거시적인 차원의 담화 역시 빼놓지 않고 포함시키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박철수의 거주 박물지]라는 책의 제목에 걸맞는 고고학적 기능을 충실히 이행할 뿐 아니라, 단순한 ‘화석의 전시’ 차원을 넘어 그 유물이 담고 있는 인문학적 배경을 통시성 있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꽤 무게감 있는 건축 현대사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설명하고자 하는 다양한 이슈들을 통해 몇 가지 공통된 시사점을 추려볼 수 있다. 첫째, 현대 한국 사회가 아파트라는 특수한 하나의 건축 형태에 경제적, 정신적으로 지배를 당하게 된 데에는 정책당국의 결정, 혹은 판단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정부가 강남을 개발하고 아파트를 주된 공급 단위로 삼게 된 경제적 유인에 동의하는지 여부와 상관 없이, 이 책은 우리 사회가 강남의 아파트 한 채에 모든 욕망을 쏟아붓게 된 가장 큰 요인이 박정희로 대표되는 6~80년대 독재정권의 개발 드라이브였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둘째, 해방 이후 급속하게 진행된 경제발전과 그 안에서 무실서하게 발생한 계급의 분화 과정 역시 현대 한국 사회의 아파트 신드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회사 관리자 등의 신 중산층 계급과 아주 빠른 속도로 재산을 증식한 신흥 자영업자를 시각적으로 ‘분리’시키기 위한 거주양식이 필요했고, 공급의 편의성 등 정책 당국의 경제적 유인과 맞물려 아파트라는 건축 양식이 강남을 중심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파트 신드롬, 혹은 강남 신드롬은 새롭게 탄생한 지배 계급과 편의성, 목적 달성 중심의 정책 당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탄생한 역사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다양성을 존중하고 과정 중심의 행동 양태를 추구하는 최근의 사회적 움직임은 여전히 강력한 경제적 유인을 내포한 강남-아파트 연결고리를 쉽게 깨트리지 못할 것이다. ‘힙스터’로 대표되는 젊은 소규모 자본가들이 을지로나 효자동과 같은 비(非)아파트촌 낡은 동네로 걸어들어가 새로운 문화 공동체를 가꾸고 다른 차원의 경제적 움직임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이러한 시도가 서울, 더 나아가 한국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아파트 등의) 부동산을 통한 재산 증식’ 명제를 뒤엎을 정도의 강력한 사회적 운동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이들의 움직임에 동조하는 경제적 수요는 여전히 니치(niche)한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이러한 대안적 문화 생산이 치솟는 임대료 등에 의해 연속성을 쉽게 확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시선을 거둘 길이 없는 것이다.

더 많은 ‘동네’가 아파트 ‘단지’로 대체될 것이며, 그 속도는 전보다 더 빨라질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왠지 정말 그렇게 될 것만 같아 속이 상했다.

비로소 커피 | 너의 이름

비로소2
비로소 커피(Biroso Coffee)는 대흥역 4번 출구로 나와 철길 공원을 따라 걸으면 보이는 갈색 건물의 1층과 2층에 자리잡고 있는 로스터리 커피숍이다. 메뉴는 단촐하다. ‘너의 이름’, ‘오감도’, ‘여운’ 등 커피숍이 제공하는 블렌드는 에스프레소 기반의 커피에서, 싱글오리진 커피는 필터드립으로 내린 커피에서 맛볼 수 있다. 여기에 차 몇 가지와 디저트 몇 가지를 더한게 메뉴의 전부다. 커피숍의 외관부터 메뉴, 인테리어까지 한결같이 단정하게 꾸며진 이 곳에서 우리 부부는 결혼 생활의 첫 발을 내딛었다. 어느날 저녁, 근처 을밀대에서 평양냉면과 수육을 먹은 뒤 이 곳으로 건너와 프로포즈를 했다. 쑥스러운 마음에 무릎을 꿇지도 않았고 결혼해 달라는 청을 멋있게 하지도 못했지만, 당시 우리와 사장님 외에는 아무도 없던 조용한 분위기 덕분이었는지(당시는 지금처럼 2층까지 확장하지 않은, 1층에 로스팅 기계와 카운터, 몇 개의 좌석이 공존하던 시절이었다), 꽤나 성공적이었던 평양냉면 맛집 여행덕분이었는지, 아내의 왼쪽 네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일은 무사히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었다.

이후 우리는 날씨가 좋은 날, 혹은 평양냉면을 먹는 날, 혹은 그냥 기분이 좋은 날, 혹은 그냥 아무 날, 비로소 커피를 찾았다. 금호동으로 신혼집을 정한 탓에 전과 같이 마포구로 자주 놀러 나오지는 못했지만, 서강대 성당에서 미사를 보는 날에는 거의 빼놓지 않고 비로소 커피에 들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갔다. 최근 대전으로 삶의 본거지를 옮긴 후부터는 비로소 커피를 찾는 일이 조금 더 힘들어졌다. 바쁜 일상을 보내는 와중에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늘 비로소 커피를 생각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합쳐지고 새롭게 시작하는 순간을 공유한 공간이다. 지금도 프로포즈 당시 비로소 커피 안에 흐르던 공기의 냄새를 코 끝으로 기억하고 있다.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사장님은 우리에게 등을 돌린 채 로스팅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내는 프로포즈 하나 제대로 못하냐고 타박하면서도 기쁨의 눈물을 흘려 주었고, 나는 프로포즈 기회만을 엿보며 보름 넘게 가방에 숨기고 다닌 반지를 드디어 주인에게 돌려 준 후 홀가분한 마음에 마냥 기분이 좋았다. 비로소 커피 1층은 무척 조용했다. 마치 세상에 우리 셋 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새하얀 벽이 그런 기분을 더더욱 재촉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테이블 위에는 프랑스 여행 사진집이 있었는데, 우리는 거짓말처럼 프랑스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비로소 커피는 대전으로 내려온 후에도 나의 삶을 한번 더 구원해주었다. 대전에서 좋은 커피를 마시는 일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었는데, 결국 참지 못하고 비로소 커피에서 제공하는 블렌드 중 하나를 온라인으로 주문해버렸다. 커피가 도착한 날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 급하게 커피 한 잔을 내렸다. 좁은 공간이 금세 좋은 커피향으로 가득 채워졌다. 약한 심장 탓에 저녁에는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지만 그 날 저녁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처음 한모금을 마시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꽤 오랜 시간동안 좋은 커피를 마시지 못하던 중이었다. 입 안에 상큼한 과일향이 퍼져나갔다. 참 많이 고마웠다. 그 블렌드의 이름은 ‘너의 이름’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마신 약배전 커피 중 가장 맛있었다. 그 당시 상황이 그래서였기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가장 좋은 커피였다.

비로소1

데이빗 레이치 | 데드풀 2

데드풀2
[데드풀]을 보지 않았다. 마블 시리즈도 거의 챙겨보지 않았다. [데드풀 2]를 보기 전 유심히 들여다본 작품이라면 바로 직전에 본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비행기 안에서 본 [앤트맨]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드풀 2]를 유쾌하게 즐길 수 있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다스럽다. 영화와 직, 간접적으로 얽힌 많은 문화적 코드를 안주 삼아 신나게 씹어댄다. 하지만 영화에서 사용하는 문화적 코드가 엄청 딥-하지는 않다. 나처럼 마블 시리즈를 거의 보지 않았지만 대중문화코드에 적당히 노출된 관객이라면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을 정도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크게 두가지였다. 첫째, 이 영화는 ‘제 4의 벽’을 적극적으로 허물고 있다. 구글링을 해보면 원작의 설정에서 데드풀은 자신이 카툰 안에 존재하는 캐릭터임을 자각하는 유일한 존재라고 한다. 그래서 카툰 밖으로 나와 작가들의 세계(현실)를 침범하는 에피소드까지 있을 정도라고 하니, 각종 문화코드를 먹잇감처럼 잘근잘근 씹어대는 데드풀의 캐릭터를 극단적으로 확장하면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점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었다. 관객과 대화하며 ‘이제부터 사람을 많이 죽일텐데 이건 다 오락이고 뻥이야’라고 미리 알려주는 친절한 캐릭터라니. 좋은 시도라고 느꼈다. 둘째, 단순히 선정적인 표현만이 난무하는 성인을 위한 오락영화라고 하기에는 [데드풀 2]가 가진 정치적인 균형감각이 매우 뛰어나보였다. 다인종-동성애자 커플을 주요 조연으로 배치한 점이나 대안가족의 형성을 영화의 큰 테마로 설정한 점, 뚱뚱하고 못생긴 소년을 안티-히어로 역할로 배치하여 전통적인 히어로물의 프로토타입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점 등은 이 영화가 가진 절묘한 정치적 감각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쉴새 없이 튀어나오는 거의 모든 대사에서 정치적인 올바름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건 계산이라기 보다는 감각, 혹은 자세의 영역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나 싶다. 작가들의 능력이 놀라울 뿐이다.

이창동 | 버닝

이창동 버닝
결론부터 말하면, [버닝]은 이창동의 필모그래피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기록될만한 가치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동시대에 존재하는 모든 한국영화들 중 최고의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그만큼 이창동은 완전히 다른 레벨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또한, 이창동이 차기 작품에서 나아갈 방향에 대한 단서들을 꽤 많이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 [버닝]은 매우 흥미로운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먼저 이창동의 다른 영화들과 비교하여 [버닝]이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혹은, 그 진실성을 표현하는 방법이 상투적이고 진부하다. 이 영화를 ‘현 시대 젊은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 혹은 공감’으로 해석한다면 이 상투성은 더 크게 다가온다. 현실은 지옥이고 전쟁인데, 이창동은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못한채 현학적으로 현실을 ‘음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영화적으로 가장 잘 하는 것은 ‘선’을 제대로 긋는 것이다. 그가 만든 모든 영화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정확하고도 올곧은 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버닝]에서도 그가 가진 시선은 옳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파주와 반포 사이 어딘가에 줄세워져 있을 것이고, 파주의 젊은이가 가진 응축된 분노와 반포의 젊은이가 가진 책임감 없는 쾌락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현실은 이미 모두가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뼈에 사무치도록 경험하고 있는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이다. 이창동의 [버닝]에서는 현실의 차가운 촉감을 느낄 수 없다. 매혹적인 장면들과 구조주의적인 대사, 잔뜩 꼬아버린 서사구조가 이 시대 젊은이들의 고통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물론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영화가 되긴 했다(후술할 것이다). ‘존재’에 대해 묻지 않고 ‘부재’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방식은 굉장히 날카롭다. 하지만 어른인 그가 청춘의 비틀거림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딘가 어설프고 동떨어져 있다. 진심어린 위로의 목소리를 느낄 수 없다. 그렇다고 지옥도 안에서 함께 숨쉬고자 하는 연대의식도 찾을 수 없다. 영화의 구조적 완성도에 천착한 나머지 메시지를 다듬는 일에 조금 소홀하지 않았나 느껴질 정도다.

둘째,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방식은 오히려 퇴보했다. [오아시스], [밀양], [시]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여성을 향한 서늘하고도 뜨거운 양가적인 시선은 이번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쓸데없이 벗기고, 대상화시키는 데에 적극적이다. 아름다운 석양 아래에서 춤추는 장면을 보며 이창동이 이번에는 여성을 굉장히 나이브하게 담아내려고 작정했구나, 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해미'(전종서 扮)로 대표되는 주요 여성 캐릭터 자체가 [버닝]이 가진 미스테리하고 다차원적인 서사구조를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해석하면 아예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영화에서 해미만큼 적극적으로 영화의 주제의식을 함축하고 있는 캐릭터도 없는 셈이기도 하다. 다만, 감독의 여러 의도 중 하나가 이 영화에 대한 다채로운 해석의 공존에 있다면, ‘모든 것은 실재하는 현실’이라고 이 영화를 이해하는 관객에게는 해미의 역할이 충분히 불쾌할 수 있다. 실재하는 여성의 벗겨진 모습을 대상화하는 주인공에게 요즘 젊은층의 대표성을 부여할 수 없다고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셋째, 이 영화는 조금 비겁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대표적이다. 종수의 극단적인 선택은 그의 개인적인 선택이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 혹은 그가 대표하는 사회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운명을 묘사하는 쪽에 가깝다. 과연 그의 선택이 온당하고 합당한가. 혹은, 어른의 시선으로 젊은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위로의 최선이 그것이었는가. 나는 조금 더 담대하고 조금 더 따뜻한 무언가를 원했던 것 같다. 차라리 조금 덜 허무하게 인생을 이어나가는 쪽이었다면 납득하기 수월했을 것이다. 극단적 선택을 이끄는 하나의 결론에 종수가 사로잡혀가는 과정은 논리적으로 정당하지 않으며 강제적이지도 않고 숙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미스테리한 서사구조를 위해 희생되어야만 하는 것이 있다면, 왜 하필 그것이 종수의 선택이었는지도 궁금하다.

하지만 [버닝]이 여전히 동시대 모든 한국영화, 더 나아가 꽤 많은 전세계 영화들과 비교하여 여전히 압도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영화가 가진 다층적인 서사구조를 이해하는 과정 자체만으로 충분히 지적으로 즐겁고 흥미롭다. 영화는 종수(유아인 扮)가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을 묘사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의 모든 씬 중 종수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 장면은 거의 마지막 즈음 딱 한 번 등장한다. 벤(연상엽 扮)이 화장실에서 화장도구를 꺼내 여성을 화장해주는 장면 말이다. 즉, 이 영화는 종수가 바라보는 모습이 모두 다 실재하는 현실인지, 혹은 중간 중간 잠들었던 그가 꿈에서 깬 이후부터 전개되는 현실인지, 혹은 그 꿈에서부터 환상이 시작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영화의 종반부에 종수가 해미의 방에서 열심히 타이핑하는 그 소설의 내용이 그냥 이 영화 자체인지 알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 관객은 그 어떤 가능성으로 해석해도 영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며, ‘실재’와 ‘부재’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영화의 형식과 그 형식을 바라보는 관객 모두가 하나의 주제의식을 형성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여러 상징물과 촘촘히 직조된 대사들을 끼워맞추는 행위는 그래서 재미를 넘어 관객 스스로 영화의 주제의식을 형상화시키는 하나의 의식으로 승화되기에 이른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에 대한 어른의 시선, 혹은 공감’이라는 사회적 키워드만 제거한다면, 이 영화는 영화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조립품질을 자랑한다. 결국 나는 이 영화가 영화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어쨌든, [오아시스]에서부터 차근 차근 쌓아온 이창동의 ‘환상과 현실 간 모호한 경계’의 영화적 실현이 [버닝]에 이르러 미학적으로나 구조적으로 거의 완성단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둘째, 종수, 벤, 해미로 대표되는 영화의 중심 캐릭터는 이 시대의 사회상 그 자체를 상징한다. 그러니까 나는 처음부터 종수나 벤, 해미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영화 내내 그들이 인간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이창동은 살아있는 배우들이 연기하는 이 캐릭터들을 철저하게 사회 그 자체로 설계하고 표현하려고 의도한 듯 보인다. 종수라는 인물이 품고 있는 사회의 한 부분이 있다. 벤도 그러하고, 해미도 그러…할까? 아무튼, 최소한 종수와 벤의 대립 관계에서 관객은 파주와 반포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된 공기를 느낄 수 있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종수가 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벤이 종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현실을 환기한다. 최근에 등장한 그 어떤 영화에서도 이정도로 담대한 시선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진실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은 뼈아픈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중간에 멈춘 느낌이다)

셋째, 영화는 시각적으로 충분히 아름답고, 모든 씬이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다. 한 평론가는 이 영화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고 했는데, 사실 그 정도는 아니다. 허세가 약간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부터 이 영화가 영원히 끝지 않기를 바랐던 유일한 영화는 허우샤오시엔의 [빨간 풍선]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이창동답지 않게 멋을 잔뜩 부렸다. 그런데 완성도가 꽤나 훌륭하다.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랄 정도는 아니지만 몇 번이고 또 보고 싶어지게 만든다.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될 해미의 춤 장면이 대표적인 그런 장면일 것이고, 남산타워(혹은 서울타워)를 바라보는 해미의 옥탑방이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묵직한 한 방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창동의 전작들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많은 영화적인 장치들이 [버닝]에서는 깜짝 놀랄 정도로 높은 완성도와 함께 가지런하게 전시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이창동의 다음 영화가 무척 기다려지기도 한다. 구조적으로 영화를 직조하는 능력이 완성단계에 이르렀고, 시각적, 혹은 미학적으로 이를 표현하는 능력도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면, 이제 남은 것은 그 그릇안에 무엇을 담느냐 정도일 것이다. 그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무엇이 담겨 나올지 궁금하다.

김용완 | 챔피언

챔피언
영화는 너무나 상투적이고 진부해서 1%의 독창성도 발견할 수 없다. 이 영화를 영화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 같다. 다만, 영화가 사회상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생각한다면,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이 영화가 반영하는 현대 한국사회의 얼굴에서 조금 흥미로운 구석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먼저 이 영화는 ‘대안 가족’을 평범하게 그린다. 아주 무심한 표정으로,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이 영화의 밝은 결말이 대안가족의 ‘완성’이 되어버리게 만들어버린다. 이게 이 영화가 가진 무서운(?) 부분이다. 개그소재마저 어디선가 베껴온 듯한 진부함의 연속에서 주인공이 가짜 가족을 진짜 가족으로 만들어버리는 과정이 몹시 자연스럽다. 주인공의 배경은 이 영화가 반영하는 한국사회의 또다른 어두운 부분이다. 주인공은 미국으로 입양되어 친부모와 양부모 모두 여의고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달동네에 거주하며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비주류 스포츠의 최강자로 발돋움한다는 설정을 통해 영화는 한국사회가 가진 모든 비주류 정서를 한 사람 안에 무식하게 뭉뚱그려버린다. 이게 이 영화가 가진 두번째 무서운(?) 부분이다. 그야말로 이 영화는 한국사회에서 소수로 차별받는 모든 소재를 끌어다가 가장 주류 영화다운 방식으로 만든, 욕할 수 없을 정도로 천진난만한 정서를 가진 작품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평가하는 것이 더더욱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영화에서 신스틸러로 활약하는 귀여운 남매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이 이 영화를 상징하는 것 같다.   마동석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역할, 그로 인해 탄생한 역할을 무난하게 소화한다. 권율과 한예리도 딱 주류 영화의 평균적인 조연이 해야 할 부분까지만 무난하게 해낸다. 배우들의 연기가 딱히 훌륭하지도 않다. 그래서 더 불가사의한 영화다.

Julien Baker | Turn Out the Lights

줄리엔 베이커
오직 ‘감정’ 하나로 자신의 음악에 승부를 보려는 아티스트들이 있다. 예술가로서 쌓아올린 자아의 내면을 가감없이 밖으로 드러냄으로써 예술 세계를 완성시키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몹시 예술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감정의 온도와 모양이 청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위험성 역시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감정으로 노래하는 사람의 음악이 대중음악 시장에서 인정받기 위한 중요한 요소는 그 감정의 전달(delivery)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테네시주 멤피스 출신의 젊은 여성 싱어송라이터 줄리엔 베이커(Julien Baker)가 작은 음반사 6131에서 데뷔 음반 [Sprained Ankle]을 내놓았을 때 많은 이들이 흥분을 하고 상찬을 보낸 것은 그녀가 고백하는 감정의 조각들이 진실성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감정이 청자에게 전달되는 과정 역시 매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마타도어(Matador)에 픽업되어 발매한 두번째 음반 [Turn Out the Lights]은 더 큰 기대와 함께 ‘혹시나’하는 걱정을 수반했다.

결과적으로 새음반에서 그녀가 전달하는 울림의 폭은 더 커졌다. 드럼과 베이스같은 리듬파트 악기를 거세한 상태에서 오직 기타와 피아노에 의지해서 울려퍼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음악의 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있다. 후렴구는 코러스와 중첩되어 더 두꺼워졌고, 강하게 내지르는 부분도 더 많아졌다. 떨림은 더 심해졌다. 세심해졌다기 보다는 그 낙폭이 몸으로 느껴질 정도로 커졌다. ‘절창’이라고 표현해도 좋을만큼 아름다운 순간들이 복수의 곡들에서 스쳐 지나간다. 흡사 플릿 폭시스의 후렴구를 듣는 듯한 드라마틱한 순간들이 많이 느껴진다. 다만, 전작에 존재했던 본이베어와 같은 나른하고 나긋한 자기반성적 모습은 많이 줄어들었다.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전달방식은 여전히 훌륭하다. 짧은 러닝타임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감정에 동화되어 함께 음반 커버와 비슷한 색깔의 어두운 보라색의 심연으로 가라앉게 된다. 그녀는 여전히 절실하고 또 여전히 갈구한다. 그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난다. 그녀의 절실함을 청자가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은 축복받은 음악적 재능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새로운 레코딩 환경에서 명민하게 ‘요령’을 공부한 부지런함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새소년 | 여름깃

새소년 여름깃
수퍼루키 새소년의 첫 EP [여름깃]이 내뿜는 진짜 힘은 라이브 무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애석하게도 아직 이들의 ‘소문난 잔치’를 직접 구경해보지는 못했지만, 온스테이지처럼 녹음이 잘 된 라이브 무대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에너지 레벨은 영상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라이브가 스튜디오 음반보다 뛰어나다는 명성을 가진 대부분의 그룹이 가진 공통점은 연주력이 무척 탄탄하다는 점이다. 음악적 기본기가 뛰어나면 공연의 흐름을 다른 요인들에 빼앗길 확률이 적어진다. 새소년은 이제 막 데뷔한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롱런할 수 있는 밴드 음악의 핵심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 놀랍다.

이번 EP에는 사이키델릭 음악부터 슈게이징, 블루스까지 다채로운 장르가 새소년만이 가지고 있는 바탕 위에 잘 버무려져 있다. 그 독특한 정체성은 아마도 확실히 밴드의 보컬리스트이자 기타리스트인 황소윤 개인이 가진 아우라에 기반하고 있을 것이다. 최근 접한 거의 모든 음악들 중 가장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아마도 확실히 최근 등장한 여성 기타리스트 중 가장 맛깔나게 기타를 치는 분이 아닐까 싶다. 세인트 빈센트처럼 진보적이진 않아도, 미츠키처럼 장르 속에 파묻혀 제멋대로 퍼져나가진 않아도, 본인들의 음악을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게끔 하는 확실한 화장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 역시 기본기가 탄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장르에 대한 이해, 좋은 음악이 대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훅’에 대한 이해, 과잉과 부족 사이에 존재하는 균형점에 대한 이해 등, 음악을 잘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가지고 있는 그런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잘 알려진 “긴 꿈”을 비롯해 타이틀곡 “여름깃”, 이들을 록큰롤 아이돌로 만들기에 충분한 섹시한 노래 “파도”, 그리고 EP를 마무리짓는 밴드 이름과 동일한 곡 “새소년”까지 버릴 노래가 하나도 없다.

대전에서 약배전 커피 마시기

2월말 대전으로 내려온 이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생각들 중 하나는 ‘좋은 로컬 로스터리 커피숍’을 찾는 일이었다. 정확하게 두달동안 대전의 좋다는 커피숍을 찾아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나이브했던 것 같기도 하다. ‘로컬’에 집착한 나머지 내가 사는 ‘동네’에서 로스팅한 커피를 일상에서 즐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특히 대전이라는 ‘지방’에서 살기로 작정한 이상, ‘서울’에서 문화적으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하고 싶은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의 이러한 시도는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며칠전 블랙워터포트에서 주문한 비로소커피의 약배전 블렌드인 ‘너의 이름’이 오늘 오후 도착했고, 바로 학교 기숙사로 가지고 들어가 서울에서 챙겨온 도구들을 이용해 급하게 한 잔을 내렸다. 푸어 오버로 내린 그 한 잔의 커피는, 대전의 수많은 커피숍에서 마신 그 어떤 커피보다 맛있었다. 깊은 한숨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대체 왜 그렇게 고생(과 돈낭비)을 했지, 라는 자책감과 5월 1일 로스팅했다는 낙인을 보며 신선한 원두를 빠르게 보내준 비로소커피에 대한 고마움이 함께 했다.

톨드어스토리, 곰에스프레소, 비터앤스위트, 싱크커피로스터스, 커피살림팩토리, 커피인터뷰같은 대전의 유명한 로컬 로스터리에서 대표 메뉴라고 내놓는 커피는 대부분 중, 강배전이다. 하지만 내가 방문했을 때에는 원두의 신선함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는지 강배전 커피에서 느낄 수 있는 달콤한 다크초콜렛 풍미나 묵직한 바디가 전혀 느껴지지 않고 그냥 기분 나쁜 쓴 맛과 짠 맛이 가득할 뿐이었다. 목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오일리한 느낌도 전혀 없었다. 어쨌든 연남동의 리이슈 커피를 제외하면 서울의 핫한 커피숍들이 대부분 원두 본연의 과일향 풍미를 극대화시킨 약배전 커피를 주로 내세우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것이 서울에서 지방으로 일방향으로 진행되는 트렌드의 전파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체현상인지, 대전 로컬숍들의 완고함에 기인한 이 지역 특유의 풍토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편, 듁스커피나 프릳츠에서 원두를 제공받는 앤아워페이스나 몇몇커피 등 젊은 감성의 커피숍에서 제공하는 커피는 신맛이 지나치게 강해서 입안이 얼얼할 정도였다. 입안의 감각이 상처받을 정도로 산미를 강조한 커피는 다시 찾고 싶지 않다. 신선하지 않은 원두로 내린 커피가 주는 불쾌한 느낌과 결과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그동안 정말 많은 대전 로컬 커피숍을 다녔고, 로컬숍을 소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때문에 최대한 전향적인 자세에서 커피의 맛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결과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완벽한 실패였다. 그 어떤 커피숍도 나의 취향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좋은 커피’라는 생각조차 갖지 못하게 했다. 대부분의 커피숍에서 커피를 다 마시지 못하고 나올 정도였다. 한 잔의 좋은 커피를 마실 때 받는 수많은 감정적인 위로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절망스럽게도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듁스, 프릳츠, 리브레, 테일러와 같은 유명한 서울의 로스터리숍들이 온라인 유통망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펠트나 비로소 등 내가 사랑하는 공간들도 블랙워터포트 플랫폼을 통해 신선한 원두를 온라인으로 공급하고 있다. 나는 비로소커피의 원두를 오늘 받아들고 구원을 받았다고 느꼈다. 그 정도로 대전에서 좋은 산미를 느끼는 일은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