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써니 루소, 조 루소|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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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스크린의 80% 이상을 독점했다던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우리 부부에게 영향을 미칠거라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대전에서의 완전한 정착을 아직 이루지 못한 우리는 한가로운(?) 저녁 시간을 극장에서 보낼 때가 늘었는데, [레이디버드]까지 보고 난 직후 대전의 거의 모든 스크린을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쓸어담아버리는 바람에 사실상 이 영화를 보도록 강요받게 된 것이다. 문제는 내가 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관련 영화 중 그 어떤 영화도 보지 않았고 심지어 마블에서 발간한 그래픽 노블 중 그 어떤 것도 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내가 본 미국식 히어로물 그래픽 노블이라면 배트맨 관련 몇 권과 [왓치맨] 정도가 전부였다.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나를 만나기 전의 아내(짧게 말하기엔 좀 뭐하지만 간단히 정리하면 아내의 영화 취향은 나를 만나기 전과 만난 후로 나뉜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가 그나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대해 상대적으로 익숙하다는 점 정도였다.

아무튼, 마블의 세계관에 대해 어깨 너머로 주워들은 것이 전부인 나같은 사람도 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이해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었다는 점이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유일한 장점이다. 아 하나 더 있구나. 블록버스터 영화 한 편의 주인공 역할을 맡았어야 할 수퍼스타들이 씬 몇 개에만 등장하는 조연으로 나온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래서) 스칼렛 요한슨의 얼굴을 많이 보지 못한 점, 돈 치들, 폴 베타니, 마크 러팔로같은 좋은 배우들이 철저히 계산된 ‘money-making’ 대사들만 꼭두각시처럼 내뱉는 모습을 영화 내내 지켜봐야 하는 점, 조쉬 브롤린과 브래들리 쿠퍼의 얼굴을 전혀 볼 수 없는 점, 그 외 영화를 보는 동안 떠올랐던 374가지의 불만들은 모두 단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블의 히어로들과 세계관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도 알겠고 이 프로젝트가 왜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이는지 그 이유도 알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같은 사람은 이 영화를 볼 이유가 거의 없어보인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출연진들이 살짝 보여주는 키치한 세계에서 조금 위로받은 것을 빼면 이 영화가 가진 유머감각도, 서스펜스도, 서사도, 연기도, 연출도, 그래픽도,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Khruangbin | Con Todo El Mundo

Con Todo El Mundo
우리는 방탄소년단이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이돌 그룹이 되고 품 비푸릿(Phum Viphurit)의 내한공연 예매가 시작된지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아 매진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문화산업의 영향력 측면에서 그 흐름의 방향이 변하고 있다. 예전에는 서구권 국가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주고 받거나 서구권에서 비서구권으로 영향력의 방향이 일방적인 흐름을 나타냈다면, 모바일과 스트리밍의 시대인 요즘 비서구권 음악의 대외 진출이 조금씩 더 활발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이건 단순히 플랫폼의 발달로 인한 원거리 소비의 간편화때문만은 아닌 것 같고, 비서구권 국가의 정치 및 경제가 조금씩 안정화되면서 서구권 음악을 단순히 수입, 추종했던 과거의 패턴에서 벗어나 일정 수준 이상의 자생적인 음악생산 환경 및 유통구조를 조성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과거 뛰어난 제3세계 음악가가 서구권 매체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 일종의 ‘사건’이었다면, 이제는 좋은 음악성과 상품성을 갖춘 비서구권 뮤지션이 안정적으로 배출되고 대외적으로도 적극적으로 노출되는 일이 일상화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이런 음악상품이 일정한 루트를 통해 서구권 대중에게 전달되는 과정이 ‘시스템적’으로 정착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 것이다. 최근 세이 수 미(Say Sue Me)에 엘튼 존이 열광하고 예지(Yeaji)를 피치포크 등의 매체가 주목하게 된 것은 우연이나 행운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비서구권 국가가 가진 유,무형의 음악적 인프라스트럭처가 이제 어느정도 수준을 갖추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태국어로 비행기를 뜻하는 크룽빈(Khruangbin)은 텍사스에서 결성된 3인조 밴드다. 텍사스를 기반으로 잔뼈가 굵은 세 명의 베테랑 연주가가 합심하여 결성한 인스트루멘탈 밴드인데, 6,70년대 타이 훵크 음악에 강한 영향을 받았음을 숨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이들은 텍사스에 있는 단골 타이 식당에서 타이 훵크 음악을 접했고, 이후 각자 지속하던 활동을 접고 본격적으로 타이 훵크를 파기 시작한다. 이들의 두번째 음반 [Con Todo El Mundo]는 스페인어로 “with everybody”라는 뜻이라고 한다. 미국 남부 시골에서 결성된 다인종 타이 훵크 밴드가 스페인어 제목의 음반을 냈다, 라는 문장이 엄청 힙하게 느껴진다면, 이 음반을 듣고 이들의 음악이 결코 ‘힙’이나 ‘키치’만을 추구하는 가벼운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들이 추구하는 음악은 과거 타이 훵크를 현재에 되살리는 수준을 넘어선, 미국의 느끼한 버터냄새가 잔뜩 추가된 고유하고 세련된 네오-사이키델리아 소울 세상이다. 세르주 갱스브루,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와 같은 대가들의 영향력도 느껴지고, 리버브가 꽉 물린 기타 사운드에서 물결따라 흔들거리는 서프 뮤직의 향기도 맡을 수 있다. 타이 훵크를 한번도 접해보지 않았다고 해도 감상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으며, 오히려 그 편이 크룽빈의 음악을 또렷하게 각인하는데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장르가 생겨났듯 ‘남부 타이 훵크(Southern Thai Funk)’라는 영역도 만들어질 수 있을까? 크룽빈이 지금과 같은 행보를 이어간다면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어보인다.

그레타 거윅 | 레이디 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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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독립영화계가 사랑해 마지 않는 그레타 거윅(Greta Gerwig)의 감독 데뷔작 [레이디 버드(Lady Bird)]는 사랑스럽고 따뜻한, 그리고 명민한 성장영화다. 그녀가 직접 주연을 맡고 공동으로 각본을 쓴 [프랜시스 하(Frances Ha)]를 본 이후 거윅이 영화를 만든다면 어떤 모습일지 무척 궁금해 했는데, 자전적인 이야기를 풀어낸 데뷔 작품에서부터 그녀의 젠체 하지 않는(down to earth) 성향이 적극적으로 드러난 것 같아 묘한 흥분감마저 느껴졌다. 캘리포니아의 작은 도시(사실 새크라멘토가 그리 작은 도시는 아닌데 뉴욕과 비교가 되다 보니..) 를 떠나 뉴욕으로 가고 싶어하는 한 소녀가 좌충우돌하다 부모의 품을 떠난 뒤에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어찌보면 흔하디 흔한 서사구조를 가지고도 주제의식의 진실성과 소소한 디테일을 앞세워 관객을 무장해제시켜버리고야 마는 능력은 분명 주목받아야만 한다. 거윅이 다른 감독의 디렉팅을 일방적으로 받는 연기를 하며 커리어를 마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연출가로서도, 극본가로서도 이렇게나 빠른 속도로 자기 세계를 구축해낼 것이라고 확신한 이도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샤얼샤 로넌(Saoirse Ronan)과 같은 재능 넘치는 배우를 만나 에너지가 꽌 찬 흥겨운 코메디-드라마 한 편을 잘 만들어냈다.

[레이디 버드]는 [프랜시스 하]의 프리퀄로도 받아들일 수 있고, [보이후드]의 코메디 버전, 혹은 여자 버전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프랜시스 하]에서 몸과 마음이 고갈된 프랜시스가 새크라멘토의 부모에게 돌아가 잠시나마 마음의 안정을 찾았던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노아 바움백과 그레타 거윅이 그 장면을 집어넣을 수 있었던 자신감의 원천을 [레이디 버드]에서 확인한 것 같아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또한 [프랜시스 하]에서 주인공의 ‘숨겨진 이름(중에서도 성(surname))’이 영화의 주제를 상징했던 것처럼 [레이디 버드]에서는 “내가 내 자신에게 지어준 이름(given name)”인 “lady bird”가 영화의 주제의식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레타 거윅이 스토리텔러로서 천착하는 주제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한편, [레이디 버드]는 엔딩씬에서 이야기를 완결짓지 않고 갑자기 끝낸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이 마지막 장면이 영화의 핵심이자 큰 매력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영화가 보여주는 부분(졸업시즌부터 입학까지) 이제 막 열여덟살이 되어 새로운 곳에서 첫 발을 내딛은 그녀에게 하나의 마침표로 기억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삶은 지속될 것이고, 그녀에게 어머니의 눈물은 삶을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원천으로 미래에서 기능할 것이다. [보이후드] 역시 주인공의 삶을 12년 간 따라가며 보여주지만 결코 하나의 완결된 서사로 마무리짓지 않고 현재에 충실하라는 숙어(“seize the moment”)로 결말을 대신한다. [레이디 버드]에서 주인공 레이디 버드가 부모에게 전화로 목소리를 남기고 어딘가를 불안한 시선으로 응시하는 장면과  [보이후드]에서 주인공 메이슨이 새롭게 만난 기숙사 친구들과 함께 황량한 자연으로 걸어들어가는 장면이 두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다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Kasbo | Places We don’t K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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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출신 전자음악가 칼 가스보(Carl Garsbo)의 스테이지 네임 카스보(Kasbo)가 2018년 발매한 데뷔 음반 [Places We don’t Know]를 반복해서 듣는 와중 머릿속에 계속 떠오른 단 하나의 단어는 ‘chill,’ 혹은 ‘chillout’ 뿐이었다. 결코 흥분하는 법 없이, 하지만 그렇다고 무덤덤하거나 심심하지도 않게 음반 전체를 균일한 온도로 채워나간다는 것이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위키피디아 등을 통해 카스보의 국적을 알아보기 전 이미 진동하는 ‘북유럽 냄새’를 맡으며 이 음악가의 음악적, 생물학적 배경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인데, 음반의 처음부터 끝까지 꽤 괜찮은 훅을 가진 미디움 템포의 깔끔한 팝-일렉트로닉 넘버가 잔뜩 포진해 있어 듣는 내내 귀가 즐거운 편이다. 엄청난 새로움이나 대단한 혁신은 없지만, 패션 핏(Passion Pit)이나 처치스(Chvrches)같은 젊은 전자음악가에 대한 애정이 있거나 이레이저(Erasure), 뉴 오더(New Order) 등의 음악을 좋아한 전력이 있다면 불편함 없이 반갑게 만날 수 있는 음반이다. 이번 데뷔 음반의 첫 싱글 “Aldrig Mer”나 “Over You”같은 곡에서는 카스보가 객원보컬도 능수능란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고, 이 음반에서 개인적인으로 가장 좋아하는 곡인 “Snow in Gothenberg”(칼 가스보의 고향이 스웨덴 구텐베르그다) 에서는 상당히 광활한 사운드스케이프를 경험할 수 있다.

김기찬 | 골목안 풍경 전집

골목안풍경전집
한국은 서울에 지배당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은 아파트에 지배당하고 있다. 우리는 서울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큼지막한 콘크리트 덩어리들 중 한줌의 구역을 손에 넣은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와 동시에 서울은 골목 안 풍경 팔이 장사로 돈을 벌고 있다. 아파트에 사는 젊은이들은 골목 안에 숨은 예쁘장한 가게와 이를 둘러싼 풍경을 사랑한다. 하지만 아파트에 사는 그들은 결코 골목 안의 세상에 소속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래서 서울은 노골적인 위선으로 가득차 있다. 서울은 골목 안을 사랑하는 척 하지만, 정작 그 골목 안의 풍경은 끝끝내 전시의 대상으로서만 취급될 뿐이다. 우리는 결코 아파트 바깥으로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채 살아가고 있다. 서울을 서울답게 만드는 곳이 경복궁 뒤로 숨은 효자동 골목과 홍대 번화가 뒤에 자리잡은 연남동의 작은 골목들이라고들 이야기하지만, 반포 자이 아파트와 압구정 현대 아파트의 유혹 앞에서는 모두가 가지런히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그런 곳이 서울이다. 공동체 의식은 무너지고 있고, 옛것과 새것 사이에서 서울의 정체성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서울은 몹시 빠르게 변화하는 곳이다. 다시 말하면, 아주 바쁘게 이곳저곳에 아파트를 세우고 있는 중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서울 안에 있는 골목들은 오늘도 쉼 없이 파괴되고 있다. 골목 안 풍경을 사랑하는 듯 위선을 떠는 한편 오늘도 바쁘게 옛 골목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도시가 서울이다. 속절없이 망가져버린 이 거대한 도시에서 콘크리트 한 줌의 은혜를 받으며 벽돌과 시멘트와 유리의 신에게 찬양의 기도를 올리고 있는 우리들은 골목 안 풍경에 대해 과연 무엇이든 이야기할 자격이 있을까.

김기찬의 사진집 [골목안 풍경 전집]은 1970년대부터 90년대 말까지 존재했던 서울의 중림동과 도화동, 만리동과 천호동 일대의 ‘골목’안 풍경을 담고 있다. 그곳에 빼곡히 자리잡았던 달동네 다세대 주택과 그들의 핏줄과도 같았던 골목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지금은 평당 가격이 2천만원을 넘기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그 공간을 차지하고 앉아있다. 김기찬의 사진들은 서울의 소중한 유산이었지만 아무도 보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골목길의 풍경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는 기록사진으로서의 가치도 대단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70년대부터 꾸준히 한 동네를 드나들던 한 사진가가 그곳에 살던 주민들과 나누었던 미묘한 ‘거리’의 유지에 있다. 사진은 때론 덤덤하게, 때론 친근하게 그곳에 살던 주민들을 비춘다. 주민들 역시 카메라의 존재를 굳이 신경쓰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렌즈에 눈을 맞추며 미소를 지어보인다. 허우샤오시엔의 영화 [빨간 풍선]에서 빠리의 이곳저곳을 떠돌던 풍선의 시선처럼, 김기찬의 시선은 자유롭게 골목 안 여기저기를 배회한다. 그 골목길이 재개발이란 명목하에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그라고 알지 못했을까. 사진가로서 사회적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골목길을 유랑한다. 멸종해가는 골목길에 대한 절박함을 알면서도 일부러 딴전을 피우듯, 그렇게 공기처럼 골목 안으로 흘러들어갔다가 기척도 없이 빠져나온다. 이 전집이 유독 짜릿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골목안 풍경 전집]은 중림동과 도화동 등 작가가 찾았던 공간들이 재개발로 사라진 뒤, 작가가 그곳에 살던 이들을 수소문해 다시 찾아 찍은 사진들에서 다른 차원으로 승화한다. 아랫도리를 벗어재낀 채 골목의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7살 꼬마는 청년이 되어 늙어버린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쪽방에서 몸을 반쯤 겹친 채 누워 자던 여섯 형제들은 무사히 성인이 되어 같은 동네에 오손 도손 모여살며 다음 세대를 키우고 있었다. 골목은 사라지고 공간은 잊혀져도,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계속 살아남아 생을 지속한다. 서울은 끊임없이 옛공간을 파괴하고 역사도 없고 맥락도 없는 새로운 건물들을 쌓아 올리는데 열중하고 있지만, 파괴된 옛공간에 살던 사람들은 그 공간을 마음으로 기억하며 다음 세대로 전이한다. 지금 그나마 남아있는 서울의 옛 골목들에는 젊은 소규모 자본가들이 들어와 서울의 옛모습과 미국의 힙스터 문화를 적절히 섞어 만들어낸 ‘흉내’로 돈벌이를 하고 있다. (물론, 지방은 그런 서울의 모습을 한번 더 ‘흉내’내며 문화적으로 기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래 역시 한국에선 서울이 최고다!”라는 쓴 농담을 할 수밖에 없다) 문화적으로도 배척받고 경제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7,80년대 골목 안 풍경은 그렇게 기억 속에서만 살아남도록 강요받고 있다. 김기찬의 사진집은 이런 이유에서든, 혹은 저런 이유에서든 소중하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책이다.

Mount Eerie | A Crow Looked at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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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불행할 때 최고의 작품을 내놓는다”는 속설은 가끔 너무 잔인하게 다가온다. 일개 청자에 불과한 우리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말을 던질 때 따라오는 책임감은 먼지처럼 가볍지만, 정작 이 명제가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지게 되면 아찔하고 서늘한 죄책감을 무겁게 느끼게 된다. 워싱턴 주 출신 필 엘버룸(Phil Elverum)의 1인 프로젝트 마운트 에리(Mount Eerie)의 2017년 작품 [A Crow Looked at Me]는 예술가 개인의 불행이 처절하게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증명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반이다.

필 엘버룸의 아내 제네비에브 고셀린(Genevieve Gosselin)은 2015년 췌장암 진단을 받는다. 은둔형 뮤지션으로 평생을 살았던 이 부부가 2016년 공개적으로 GoFundMe 페이지를 통해 병원비 모금활동에 나섰다는 것은, 그만큼 이들이 절박한 곳까지 몰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병원비는 바닥났고,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 고셀린은 2016년 여름 세상을 떠난다. 남겨진 엘버룸의 품에는 어린 딸이 안겨져 있었다. 그로부터 약 반년 뒤 [A Crow Looked at Me]가 발매되었고, 거의 대부분의 매체에서 완벽에 가까운 평을 받으며 그 해의 음반으로 기록된다.

그래서, 마운트 에리는 행복해졌을까?

[A Crow Looked at Me]는 나지막한 울부짖음으로 가득하다. 이 음반을 여는 첫번째 노래 “Real Death”는 반주조차 없이 “Death is real”이라는 엘버룸의 건조한 목소리로 시작하여 (차마 노래라고 할 수조차 없는 울먹거림으로) “I love you”라고 말하며 끝맺는다. 바로 이어지는 두번째 노래 “Seaweed”에서는 “우리에겐 1년 6개월 된 딸이 있어. 당신이 죽은지 이제 11일이 되었네”라는 가사를 무심하게 내뱉는다. 음반의 가사는 엘버룸 개인이 겪은 실제적 고통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수필에 가깝다. 통기타만이 외롭게 떠받치는 그의 목소리는 말하는 것인지, 노래를 부르는 것인지, 혹은 울먹이는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가라앉아 있다. 대중음악의 영역에서 이정도 수준의 실제적 고통의 기록을 청자의 입장에서 ‘즐긴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 것인지부터 고민하게 된다. 물론, 데이비드 벤의 [자살의 전설]처럼 사적 경험을 비틀어 예술의 영역에서 풀어놓는 방식 자체가 생소한 것은 아니다. 다만, 폴 엘버룸이 이 음반에서 보여주는 감정의 폭이 지나치게 사적이고 또 지나치게 깊다보니 이것을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작품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버거울 뿐이다.

폴 엘버룸의 몸부림은 이 음반 이후 이어진 [Now Only]에서 계속된다. 예술가 개인의 불행을 통해 대중음악계가 또 한 장의 명반을 건진 것이 과연 사회적으로 좋은 현상인 것인가, 고민해보게 된다.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 변방의 사운드: 모더니티와 아시안 팝의 전개 1960~2000

변방의사운드
신현준 교수가 진행하는 다양한 형태의 글쓰기 프로젝트를 좋아하고, 또 지지하는 편이다. 그가 청년 시절 쓴 [얼트문화와 록 음악] 등의 책을 읽으며 십대시절을 보냈으니 어쩌면 나의 지지성향은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편애를 탄생시킨 보다 중요한 이유는 그가 진행한 프로젝트가 갖는 사회적 가치, 혹은 시의성에 기인한다. 그는 미국 대중음악의 한 조류를 실시간으로 분석한 거의 최초의 평론가였고([얼트문화와 록 음악]), 힙스터 문화의 일부분 정도로 취급될 수 있었던 6,7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으며([한국 팝의 고고학] 시리즈), 음악의 범주를 벗어나 문화적 다양성을 보호하기 위한 시도([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를 하기도 했다. 즉, 그는 문화적 주체성이라던가 문화와 사회가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내는 무형의 가치에 주목하여 이러한 가치가 갖는 동시대성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가 속한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가 기획하고 펴낸 [변방의 사운드: 모더니티와 아시안 팝의 전개 1960~2000]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한 책이다.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대중음악이 어떻게 출발했고 또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한 눈에 조망해보자는 것이 이 책의 출판목적이라면, 단 한 권의 책에 그 방대한 역사를 균일하고 정밀하게 담아낼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 역시 기획 단계에서부터 충분히 예상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대중음악이라는 거대한 하나의 산업은 하나의 국가 내에서도 그 층위가 촘촘하게 나뉘어지기 마련이고, 국가별 저자의 시각 및 성향에 따라 선별적이고 편파적인 기술이 얼마든지 가능한 글쓰기 환경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언더그라운드 문화에만 집중하여 대안적인 사운드의 진화과정만 기술할 수 있고, 또 다른 이는 정치, 사회적 분위기가 대중음악 산업에 미친 전반적인 영향을 고려하여 글을 쓸 수도 있다. 이러한 한계를 충분히 인지한다면 이 책의 시도 자체가 그리 어리석어 보이지 않는다. 아시아를 “변방”으로 규정하며 시작한 이 모음집은 아시아 국가들이 서구사회의 팝 문화로부터 받은 지대한 영향을 부정하지도 않고,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겪은 냉전과 독재라는 어두운 사회분위기가 미친 절대적인 영향력을 과소평가하지도 않는다. 동시대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거울과 같은 성질이 대중음악이라는 상품이 갖는 본질 중 하나라면, 이 기획에 참여한 저자들은 그러한 본질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데에 인색함이 없다.

일본과 중국이라는 ‘큰’ 나라들이 음악산업에 있어서도 상대적으로 더 많은 주체성을 담보할 수 있었다는 점이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흥미로운 지점인데, 어쩌면 정치 및 경제 면에서 드러나는 ‘덩치’가 개별적인 문화산업의 발전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심증을 확보한 셈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과거 제조업 등에 기반하여 선진국을 ‘캐치업’하는 것이 경제적 필살기였던 이 나라는, 음악산업에 있어서도 이러한 캐치업 효과를 극단적인 차원에서 활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돌 문화를 연구하는 많은 이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현재 케이팝의 전세계적 성공이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 즉 ‘2등 중 최고의 2등이 되자’는 정서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이 나라는 혁신과 같은 창의성이 완전히 부재한 상태에서 외부로부터 주어진 ‘1등’의 모범적 사례를 비틀거나 발전시켜 나가며 경쟁력을 확보하는 틈새전략으로 생존해온 나라다. (예를 들어 서울을 보라. 이 곳에는 정말 맛있는 음식들이 많지만, 그 중 그 어떤 음식도 ‘서울만의’ 음식은 아니다) 아이돌 문화, 혹은 케이팝 컨텐츠도 이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말 흥미로운 것은 ‘1등’마저도 결국 이 아름답고 완벽한 ‘2등’에 홀딱 빠져버렸다는 역설이지만.

조교수, 한 달

지난 3월 1일자로 임용되었으니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기 시작한지 이제 막 한 달을 채웠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순간에도 내 이름 앞(혹은 뒤)에 붙는 교수라는 수식어가 몹시 어색하여 실실 웃음이 나오고 있지만, 현실은 방금전에도 강의 하나를 막 마치고 나온 엄연한 교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서울에 있는 회사들을 다닐 때에는 떠올리지 않았던 것들을 요즘 많이 생각한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여기까지 왔고, 또 여기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인생에 대한 심오한 고민 따위로서의 생각이 아니라, 그냥 정말 너무 궁금하기 때문에 자꾸 떠오른다. 왜 이렇게 됐지? 왜 여기까지 왔지?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만큼 서울에서의 삶과 이 곳에서의 삶 사이에 흐르는 간극이 무척 크게 느껴지나보다.

대학원생 시절에도 학교 구성원들 사이에서 ‘조교수의 삶’은 희화화의 대상이자 연민의 대상이었다. 대학원생보다 일찍 출근하여 대학원생보다 늦게 퇴근하는 젊은 조교수들의 모습을 보며 ‘참 열심히 일하시는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지, 그들을 강의실이나 연구실에서의 교수가 아닌 일상 속에서 한 가정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으로 바라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작 내가 그들과 비슷한 삶을 잠깐이나마 살아보니, 강의실과 연구실 안과 밖의 균형을 절묘하게 조절해 나가야 하는 생각보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의 숙제를 받아들게 되었다. 연고가 전혀 없는 곳으로 오는 바람에 흡사 외국에 다니 나온 것과 같은 기분을 가끔 느끼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가족과 함께, 밥벌이 수단으로 왔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당장 살 집을 구하는 단기적인 문제부터 새로운 지역사회에 정착하는 조금 더 긴 호흡의 숙제까지 처리해나가느라 지난 한 달여의 시간동안 연구실과 강의실 밖에서 오히려 더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여기에 더해, 학생 신분으로는 자세히 알기 힘든 교원으로서의 다양한 고충과 고난이 조교수라는 특정 직위에 상대적으로 집중되는 현상이 비단 미국만의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최근 이 직업을 새롭게 시작하며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평등하고 독립적인 교원 간 관계는 개별 교원에게 주어지는 책임의 무게를 타인에게 양도할 빈틈도 그만큼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에게 주어진 책임의 양은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신입 직원’에게 주어지는 혜택같은 것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특히 교육 부문에 있어, 실수해도 괜찮아, 신입이니까, 와 같은 너그러움을 학생들에게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당장 오늘을 살아내야 하는 존재들이고, 나는 그들에게 최선의 교육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 뿐이었다. 지금도 내가 잘 모르는데 감히 누구를 가르치나, 라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죄스러움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새벽 늦게까지 강의준비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대학의 전임교원이라는 직업이 주는 다양한 형태의 매력을 음미할 여유는 아직까지 주어지지 않았다. 이 ‘매력’에는 일반적으로 익히 알려진 출퇴근 시간의 자유, 방학이 주는 여유로움, 조직 내에서 절대 복종해야하는 절대적인 ‘갑’의 부재 등이 해당된다. 나도 학교에 임용되기 전 이러한 환상에 빠져 잔뜩 기대를 부풀렸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 사람, 저 모임, 그리고 다시 이 업무에 불려다니는 와중에 매주 새로운 강의노트를 만들고 수업준비를 해야 하는 하루살이와 같은 삶에 허덕이며 지난 한 달을 보냈다. 논문은 아직 한 편도 읽지 못했다. 게으르게 보내기로 마음 먹는다면 한없이 게을러질 수 있는 직업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어렴풋하게 들었지만, 나의 경우 아마도 은퇴하기 전까지 게으르게 살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운명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힘든 한 달이었지만, 즐겁고 행복한 한 달이기도 했다. 이 곳에서, 이 직업으로 앞으로 30년을 더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대한 답은 (당연히) 찾지 못했지만, 최소한 서울에 있는 회사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는 것을 보면 지금 현재의 삶이 조금 더 나아진 것만큼은 확실하다. 강의 실력이 앞으로 조금씩이나마 나아져 학생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줄어들고, 그 와중에 조금씩 시간을 더 잘 활용하게 되어 논문을 계속 써나갈 수 있게 된다면, 그래서 남은 시간을 오롯이 가족에게 할애할 수만 있다면, 그 지점부터 내 삶이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슴프레한 희망을 가져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루카 구아다니노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callme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캐롤]과 [문라이트]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다양한 기준을 충족시키는 영화다. 유명한 소설이나 희곡을 원작으로 했다는 점, 주인공들이 동성의 대상을 사랑한다는 점, 뛰아름다운 음악과 영상이 함께 한다는 점, 무엇보다 감독의 엄청난 연출력과 그 연출력에 주눅들지 않는 뛰어난 연기력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점 등에서 여러모로 이 세 작품은 같은 선상, 혹은 비슷한 수준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세 영화가 많은 이들에게 찬사를 받은 본질적인 이유는 아마도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집중도가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캐롤]에서는 사회적 계급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두 여성의 절박한 마음이 유리창, 어깨너머의 시선 등의 장면으로 표현된 단절의 정서를 통해 절절하게 형상화되었고, [문라이트]에서는 하위 계급 흑인 동성애자 남성이 맞닥뜨린 바닥까지 내려가버린 가난한 마음을 새파랗게 질린 어슴프레한 하늘의 모습이 완벽한 상징체로 기능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주인공들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은 남부 이탈리아의 한여름 풍경이다. 기분 좋게 내리쬐는 뜨거운 햇살과 느긋한 안식처를 제공해주는 울창한 나무, 한낮의 더위를 식히는 쉼터이자 고단한 짝사랑의 무게를 잠시나마 씻겨내주는 강과 호수, 그리고 코끝을 간지럽히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들어오는 별장침대. 이 모든 것이 영화의 주인공 그 자체가 되어 첫사랑의 마음을 형상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음악이 있다. 수프얀 스티븐스(Sufjan Stevens)와 류이치 사카모토(Sakamoto Ryuichi) 등이 참여한 영화음악은 경쾌한 클래식 넘버들과 어우러져 주인공의 넘실대는 마음을 날것 그대로 표현한다. 아마도 이 영화가 대단히 관능적으로 느껴진다면, 그 배경에는 분명 영화의 풍경과 음악의 자리가 크게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관능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인공 엘리오와 올리버를 연기한 티모시 샬라메(Timothée Chalamet)와  아미 해머(Armie Hammer)의 존재다. 티모시 샬라메는 첫사랑의 떨리는 마음 그 자체가 되어 현현하고, 아미 해머는 사회적 관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괴로움과 결코 잊지 못할 상대를 만난 황홀함을 절제된 표정으로 잘 표현해냈다. 화면과 음악, 연기와 연출력 모두 나무랄데 없지만, 이와 비교해 조금 심심하다고 느껴졌던 서사구조 역시 마지막 즈음에 이르러 기어코 구원받는다. 주인공의 마음을 처음부터 헤아리고 있던 부모가 그들의 사랑을 사려깊게 배려하는 장면을 곳곳에 배치함으로써 이 영화는 조금 다른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보수적인 고고학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가톨릭 중심의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유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관습을 따라야만 하는 올리버와 달리 엘리오는 부모의 따뜻한 품 안에서 첫사랑의 상처를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둥지를 발견한다. 모닥불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엘리오를 옆에 두고 묵묵히 식사 준비를 하는 가족의 모습을 블러 처리하여 보여주는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그래서 인상적이다. 이 영화는 첫사랑의 달뜬 마음부터 고통스러운 이별의 아픔,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기꺼이 껴안아주는 성숙한 어른의 세계를 균형감 있는 매혹적인 시선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