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동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금남시장에서 커피를 마셔야만 한다면

금호동은 커피를 마시기에 그리 좋은 장소는 아니다. 금남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상권은 아직 신축 아파트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이 곳에 살던 옛 거주민들의 영역이다. 비쭉 솟아오른 대규모 아파트 단지 주변에는 프랜차이즈 커피숍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다. 하지만 금호역, 신금호역, 옥수역, 행당역으로 둘러싸인 이 대규모 중산층 주거지역이 그럴듯한 커피숍을 갖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역설적으로 이곳이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위로는 이태원, 왼쪽으로는 한남동, 오른쪽으로는 서울숲과 성수동, 아래로는 압구정과 신사에 15분 정도면 도달할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가진 이 금호동의 구불구불한 언덕길에 굳이 용기를 내어 비싼 원두를 취급하는 커피가게가 들어올 경제적 유인이 거의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든 금남시장 근처에서 발이 묶였을 때 커피 한잔 생각이 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다. 나같은 경우, 집에 원두가 떨어졌으나 급하게 커피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그러했다. 이러한 위기가 닥쳤을 때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발견한 커피숍 몇 군데를 기록한다. 물론, 이 커피숍들에 가서 커피를 사마시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또한, 이태원이나 망원동 등 서울시내 주요 상권에서 커피숍의 개점과 폐업 간 시차가 점점 짧아지는 현상이 발견되고 있고, 이러한 위기가 금호동에서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며 지금 우리가 지나쳐가는 저런 가게들이 과연 몇년 뒤 우리가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 계속 남아있을까, 하는 이야기를 했다.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2018년 현재, 조금씩 흥미로운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 금호동의 모습을 기록하는 것만으로 일기장으로서의 가치는 다하지 않을까 싶다.

금호동이 아직 달동네의 모습을 완전히 벗지 못했다 하더라도 금남시장에서 신금호역으로 가로지르는 가파른 언덕길의 잠재성을 알아보고 선구자적인 자세로 이곳에 자리를 잡은 ‘젊은’ 가게들이 몇 있다. 그 중 하나가 이 골목의 꼭대기 즈음에 자리를 잡은 메그앤스튜디오(Magnstudio coffee)다. 이 가게는 매그놀리아 크리에이티브 랩이라는 광고대행사에서 운영하는 커피숍이다. 그래서 그런지 금호동 언덕길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흰색과 분홍색을 주된 테마 색깔로 잡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산뜻하게 연출하고 있다. 두 개의 직접 로스팅한 커피를 제공하고 있는데, 이 가게에서 주로 홍보하고 있는 커피 종류는 분홍색의 컨셉에 맞는 배리에이션들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솜사탕 위에 커피를 부어 녹인다던지, 분홍색의 비엔나 커피를 흘러넘치도록 붓는다던지 하는 식으로 ‘비주얼’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시각적 효과를 강조한 커피들이 맛까지 갖춘 경우는 드문데, 이곳 역시 마찬가지다. 원두는 태우기 일쑤였고 물 온도는 지나치게 높았다. 기본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 가게에 들어서며 커피의 맛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내부 공간이 인상적으로 꾸며져 있는 것도 아니다. 인스타용 사진 한 장을 건지기 위해 주차조차 몹시 불편한 이 금호동 골목길을 찾아나서는 일은 있어서는 안되겠다. 모든 목적에서 실패할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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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그앤스튜디오에서 금남시장쪽으로 걸어내려가다 보면 원형교차로 부근 골목길에 눈에 띄는 커피숍이 하나 보인다. 이 동네의 분위기와 동떨어져 있는 듯한 간판과 소재마감때문에 눈에 띄었던 것 같다. 테오커피(Theo Coffee)는 우리 부부가 금호동으로 이사올 무렵부터 존재했던 커피숍이다. 집에 원두가 떨어진 어느날 이곳에 들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는데, 이후 지금까지 다시 방문하지 않고 있다. 배가 부를 정도의 엄청난 양의 커피는 그렇다치고 오로지 쓴 맛 이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오직 쓴 맛 하나를 위해 커피를 마시지는 않는다. 공간 내부는 약간의 아늑함과 약간의 어두침침함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굳이 돈과 시간을 지불하고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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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시장 부근에서 그나마 마실만한 커피숍을 고르라면 루시아 플라워 앤 커피(Lucia Flower & Coffee)를 고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금호역과 집 사이를 오고가는 마을버스 노선 상에 위치하고 있어 지나갈 때마다 궁금함을 자아냈던 곳인데 마침 오늘 점심을 먹고 오는 길에 들려 아메리카노를 한잔 마셔볼 수 있었다. 라마르조꼬 머쉰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든 커피가 일정 수준 이상을 담보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최소한 502커피로스터스의 신선한 램블과 딥씨 블렌드 원두를 사용한다면 최소한 기계에 부끄러운 맛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아메리카노는 지나치게 묽은 감이 있었다. 과일향은 희미하게 전달됐다. 하지만 금남시장에서 산미를 느낄 수 있는 커피를 마셨다는 사실에 살짝 감격스러운 느낌까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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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커피를 마시기 위해 조금 걸을 용의가 있다면, 금남시장을 벗어나 대우아파트를 끼고 돌아 옥수역까지 걸어간 다음 빈플래토(Bean Plateau)에 다다르기 위한 15분 정도의 시간을 기꺼이 희생해야 한다. 옥수동과 금호동을 아울러 그나마 마실만한 커피를 제공하는 거의 유일한 커피숍이기 때문에 이정도의 수고는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다. 빈플래토를 만든 사장님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블랙워터이슈에서 다루어진 바가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다양한 원산지에서 온 원두를 필터드립으로 내려주는데, 전문 바리스타가 있냐 파트타임 근로자가 있냐의 유무에 따라 필터드립을 마시지 못할 확률도 있다. 어쨌든 이 동네에서는 꽤 균일한 품질의 원두를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만큼은 절대 실패하고 싶지 않다, 라는 생각이 든다면 거의 유일한 선택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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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만약 금남시장 한가운데에서 좋은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 추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장 택시나 버스를 타고 그 곳을 벗어나는 것이다. 금남시장에서 버스를 타면 두세정거장만에 한남동 스타벅스에 다다를 수 있다. 그곳에서 일단 구원을 받은 다음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 좋다. 반대편 동쪽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아무거나 잡아타면 언젠가는 서울숲 앞에 내려줄 것이다. 서울숲 뒷편으로 걸어가 매쉬커피를 찾는 것도 좋은 옵션이다. 하지만 금호동이라는 동네에 대한 애정이 크다면, 그래서 이 동네에서 내려주는 좋은 스페셜티 커피 한잔을 반드시 마셔야만 한다면, 조금은 느긋하게 새로운 가게가 들어오는 날까지 기다리는 것도 아주 나빠보이지는 않는다. 언젠가는 반드시 입소문만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좋은 가게가 이곳에도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그 가게의 첫번째 단골손님이 되는 일도 분명 의미있을 것이다. 나는 그 경험을 하지 못하고 비록 이 곳을 떠나게 되었지만, 금호동이 조금 더 재미있는 동네가 되리라는 기대는 접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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